말을 마친 대호는 펜치를 내려놓고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이게 뭔 줄 알아?”끝이 뾰족한 칼을 보자 하연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대호가 바로 말을 이었다.“이건 장기 털 때 사용하는 거야...”“읍.”그 말을 듣자 하연은 끝내 참지 못하고 구역질해 댔다.그걸 본 대호는 더 광기 서린 웃음을 터뜨렸다.“최하연, 이건 에피타이저에 불과한데 벌써 괴로워하면 어떡해? 오늘 네 제삿날이니 이따 저승사자 만나면 날 탓하지 마.”대호는 말을 마치자마자 손짓했고, 그걸 본 부하들은 이내 하연에게 달려들었다.그때, 상혁이 하연 앞에 막아서며 팔을 움직였다.음산한 상혁의 눈빛은 마치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 삼킬 둣 섬뜩하고 무서웠다.그 눈빛에 놈들은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서서 좀처럼 움직이질 못했다.“쓸모없는 것들! 멍하니 서서 뭐 해? 당장 덤비지 않고.”대호의 소리는 놈들은 내심 겁이 나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달려들었다.하지만 상혁이 눈 깜짝할 새에 놈의 가슴을 차버렸고, 다음 순간 놈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대호도 이토록 무서운 기세를 내뿜고 발길질 한 번으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사람은 처음 보는지라 잔뜩 경계했다.“당신 누구야?”“알 거 없어.”그때 하연이 앞으로 나서며 싸늘하게 말했다.“권대호, 정말 우리가 아무 준비도 없이 달랑 셋만 왔을 것 같아?”그 말에 대호는 피식 웃으며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우리 최하연 아가씨가 평소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닌다는 걸. 그 경호원들이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 하나같이 실력이 대단하다면서? 그런데 아쉬워서 어쩌나? 오늘 여기 오지도 못할 텐데.”대호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러니 마음 놓고 있어. 오늘 너 구하러 올 사람은 없을 테니까. 네 옆에 있는 그 남자도 마찬가지야.”“아, 그래? 내기 하나 할까? 난 네가 오늘 죽을 것 같은데?”“목숨 걸자는 건가? 재밌네. 그런데 여기가 누구 구역인지 잊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는 하연의 말에 대호는 몸을 흠칫 떨었다.“최, 최하연 씨, 우리 말로 해요. 칼 휘두르는 건 좀 아니지...”하지만 하연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대호의 옷을 칼로 찢어 살에 칼날을 댔다.“무슨 얘기? 네 놈한테 당한 피해자들한테 말할 기회는 줬고?”“대호 형님 당장 풀어줘. 그러면 너희들 살려는 줄게.”그때 대호의 부하 하나가 하연을 향해 소리쳤고, 그 말에 하연은 냉소를 머금은 채 대호에게 말했다.“저놈들 다 물러나게 해.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모르겠으니까.”하연이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낀 대호는 얼른 엄숙한 표정으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뭘 멍하니 서 있어? 당장 물러나!”그 말에 놈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대호와 가까이 서 있던 하연은 모공까지 보이는 대호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접었다.“지난번 봤을 때가 변장한 거고, 이번이 진짜 모습이네. 맞지?”하연이 자기 비밀을 이토록 쉽게 간파할 줄 몰랐던 대호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했다.“그렇다면 뭐? 오늘 나를 잡아 죽인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가?”“너무 순진하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목숨 내놓고 이 일 하는 거라 뒤에 어떤 게 어떤 게 숨어 있는지 보통 사람들은 몰라.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은 건드리면 안 돼, 나중에 가서 내가 경고하지 않았다고 울지나 말고.”대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하연을 협박하고 있었다.그 경고를 하연도 모를 리는 없다.하지만 이 일은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다.놈들을 완전히 처단하지 못한다 해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놈들이 더 많은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B시에서 나를 잡는다고 무슨 소용 있어? 이 나라 법이 나한테도 적용될 것 같아? 결국 나를 다시 F국으로 보내야 한다고. 그사이 내가 도망가지 못할 것 같아?”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마. F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고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하연을 감싸안으며 바닥에 넘어졌다.“범인 잘 잡고 있어. 도망치게 하면 안 돼.”순간 몇몇 경찰들이 대호 곁으로 달려갔지만 대호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물 흐르듯 익숙한 동작으로 수갑을 풀고 불길과 함께 사람들 눈앞에서 사라졌다.폭발음은 일정한 간격으로 몇 번 울리다가 한참 뒤에야 멎었다. 그리고 연기가 자욱한 현장을 본 순간, 하연은 뭔가 알아차린 듯 물었다.“권대호는 어디 갔지?”사람들도 그제야 수갑을 차고 있던 대호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큰일 났어. 그놈 도망쳤어.”눈앞에서 범인을 놓친 경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이, 상혁은 무전기를 꺼내 차갑게 명령했다.“모든 입구 다 막아서 무조건 잡아.”“네, 도련님.”상혁은 얼른 하연을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여기 모든 입구에 이미 사람 심어 뒀어. 경찰 외에 우리 부씨 가문 사람들도 있어.”그 말을 듣고도 하연은 안심할 수 없었다.“권대호, 이 교활한 자식. 감히 눈앞에서 도망치다니.”“걱정하지 마. 얼마 도망 못 갈거야.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아니나 다를까 얼마 뒤, 부씨 집안의 경호원한테서 연락이 왔다.“도련님, 잡았습니다. 역시 도련님 예상대로 놈이 바다에 뛰어들더군요. 다행히 바닷속에도 수색대를 풀어 두어 쉽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그 말에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하니 다시 열이 나 버럭 소리쳤다.“권대호 이 교활하고 간사한 놈. 하지만 아무리 교활해도 뭐 어쩔 거야? 결국 죽게 될 목숨인데. 이래서 항상 뒤를 조심해야 한다는 거야.”얼마 뒤, 하연과 상혁이 해안에 도착해 보니 대호는 온몸이 축축한 채 경찰 두 명에게 압송되고 있었다.하연을 발견한 대호는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어진 채 낮게 중얼거렸다.“이번엔 내 실패를 인정하지.”“실패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네가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대호는 피식 웃으며 하연을 바라봤다.“최하
상혁은 하연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됐어, 이제 우리도 돌아가자.”B시에 도착하자마자 하연은 하민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최하연, 너 점점 겁이 없어지네. 어떻게 권대호처럼 극악무도한 놈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어? 이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몰라서 그래?”“오빠, 저 무사하잖아요. 그리고, 상혁 오빠도 있는데 뭘 걱정해요. 권대호가 잡혔으니까 오빠도 이제 걱정하지 마요.”그건 하민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하지만 이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오빠인 저한테 도움도 안 청한다는 사실에 왠지 질투가 났다.“다음은 없어.”“알았어요.”하연은 연신 약속했다.몇 마디 더 당부한 하민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최동신이 관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어때? 하연이 괜찮대?”하민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요. 부상혁도 같이 있어 큰 위험은 없었던 것 같아요.”상혁을 언급하자 최동신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하연이 이 녀석, 사람 보는 눈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구나. 그런데 혼약이 있던 나씨 집안이 좀 아쉽긴 한데.”최동신이 이렇게 아쉬워하는 건 그동안 나씨 집안과 친분이 두텁기 때문이다. 만약 두 집안의 혼사까지 이루어 지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을 텐데, 결혼은 중요한 일이기에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할아버지, 하연이 안목 믿어 봐요. 이번에는 우리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하연이만 뭐라 하지 말고, 너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데 얼른 손주며느리 데려와 봐.”본인 얘기로 주제가 넘어가자 하민은 대충 얼버무리며 속임수를 썼다.“할아버지, 회사에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저 나가 봐야 해요.”이윽고 최동신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다. 최동신은 도망치듯 떠나는 손주의 뒷모습을 보며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자식, 어쩜 연애 얘기만 나오면 저렇게 어리숙하게 굴어? 하유, 됐어. 애들이 알아서 잘하겠지.”...그 뒤로 며칠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새로 지나갔지만, 하
“사장님, 우리...”태훈은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태준의 태도만 봐도 하연과 서준을 접촉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었다.하지만 하연은 피할 수 없는 건 언젠가 마주쳐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가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한 대표님이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주인이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네요.”서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HT 그룹은 지금껏 이 분야에 손 댄 적 없었어. 너와 협력할 생각에 처음 시도한 거니까.”하연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지금 HT 그룹이 우리 DS 그룹과 손잡고 싶다는 말인가요?”“그런 셈이지. 세부 사항은 이걸 보면서 조율해 봐.”서준은 여유롭게 비서 손에서 서류 하나를 받으며 말했다.그 말에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아, 혹시 뭐 궁금한 점이라도 있나요?”“이익 분배가 조금 불합리하다고 생각돼서 말이야.”그 말을 들은 태훈이 무의식적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속으로 한서준이 협력할 마음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한 대표님, HT 그룹도 이 업계에서는 햇병아리나 다름없는데 이 정도 이익 배분은 아주 합리하다고 생각되는데요? 혹시 아예 협력할 의사가 없는 건 아닌가요?”태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공격적으로 쏘아붙였지만 서준의 시선을 하연에게 돌리며 말했다.“참 똑 부러지는 비서를 뒀네. 이익은 우리 HT 그룹이 너무 많이 차지한 것 같아 불합리하다고 한 거야. 5대 5가 아니라 7대 3으로 하자고, DS 그룹이 7, 우리가 3.”태훈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준을 빤히 바라봤다. 그럴만한 게, 이건 협력이 아니라 돈을 DS 그룹에 가져다 바치겠다는 거나 다름없다.2할이나 되는 이익은 시가로 따져도 몇백억이니 말이다.“최하윤 사장님 생각은 어떤가요?”하연은 점점 한서준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한 대표님, 이건 사업이 아니라 자선사업인 것 같은데요?”서준은 느긋하게 대답했다.“돈 더 벌게 하려는 것뿐이야. 돌아가서 이사회
“최하연, 잠깐만.”하연은 걸음을 멈추고 귀찮은 듯 물었다.“또 무슨 볼일 있나요?”“최하연, 나...”하지만 서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서준아,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반가운 얼굴로 서준에게 말을 걸던 이수애는 하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굳었다.“아들, 너 설마 얘랑 아직도 만나? 엄마가 화병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이어지는 이수애의 잔소리에 서준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이건 내 일이니까 참견하지 마세요.”이윽고 하연의 팔을 잡으며 밖으로 끌었다.“우리 가자.”하지만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뒤로 뺐다.“한 대표님, 자중하세요.”이윽고 이수애를 보며 거리감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이제 한 대표님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하연의 도도한 태도를 보자 이수애는 전에 하연에게 못되게 굴어 최씨 가문과 인연이 닿을 기회를 잃었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잘못이니 돌이킬 수도 없었다.다행히 아들이 훌륭한 덕에 아직도 좋아하는 여자가 널리고 널려 최하연이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이렇게 생각한 이수애는 얼른 자기와 함께 식사하러 온 여자를 끌어 서준 앞으로 밀었다.“서준아, 이 아가씨가 바로 내가 저번에 말했던 임모연 씨야. 명문가 출신인 데다 유명한 디자이너래, 너랑 천생연분이야!”이수애는 모연이라는 여자를 소개하면서 턱을 한껏 치켜올렸다. 그 교만한 태도는 마치 하연에게 자기 아들은 아무렇게나 찾아도 너보다 몇백 배 나은 여자를 찾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듯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세요.”서준은 하연이 오해할까 봐 다급히 부인했다.하지만 하연은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뒤돌아 떠나 버렸다.그런데 그때,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모연이 갑자기 하연을 불러 세웠다.“최하연 씨 맞죠? 소문 많이 들었는데, 오늘 보니 역시 명불허전이네요.”모연은 하연에게 걸어가더니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만나서 반가워요. 임모연이
“어머니, 또 무슨 헛소리예요?”서준은 다급히 이수애를 막아 나섰다. 본인의 어머니 하연에 대한 악의가 이토록 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예전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게 또 실감 났다.그에 반해 하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한 대표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그 말을 하고 떠난 하연을 서준은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이수애가 갑자 그를 잡아끌었다.“아이고, 아들. 나 안 되겠어.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서 숨이 안 쉬어져...”“어머님, 괜찮으세요?”모연이 다급히 묻자 상황을 본 서준도 얼른 다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요?”그랬더니 다음 순간, 이수애는 서준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아들, 엄마 말 들어. 절대 최하연 저 계집 건드리지 마. 모연 씨 좀 봐 봐. 얼마나 좋아. 진짜 너와 어울리는 사람은 모연 씨 같은 분이라고.”순간 눈치챈 서준은 눈살을 팍 구기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차가운 미소를 지짓더니 이수애를 밀어내며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어머니 진짜 연기 잘하시네요. 전에는 왜 그걸 몰랐을까??”“아들, 왜 그렇게 말해? 서준아...”이수애가 아무리 불러도 서준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하연이 떠나간 방향으로 쫓아갔다.하지만 여전히 한발 늦었다. 서준이 쫓아 나갔을 때 하연의 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차 안에서 하연은 방금 받은 명함을 손에 쥐고 임모연이라는 세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분명 아까 인사할 때도 모연은 다정하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곧이어 하연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했다.그리고 얼마 뒤, 전화 건너편에서 여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래? 나 보고 싶었어?”하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어때? 요즘 바빠?”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여은은 곧바로 하소연했다.“바빠! 아주 요즘 소처럼 일해! 왜? 무슨 일 있어?”이에 하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한테 사람 하나 알아보려고.”“어떤 대단한 사람이길래
하연은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네가 안 믿을 수도 있지만, 그 여자 오늘 이수애랑 식사하더라. 사이 꽤 좋아 보였어.”“헐, 네 전 시어머니? 설마 한서준과 결혼시키려는 건 아니겠지?”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이 대화를 계속하지 않았다.“고마워. 나중에 내가 밥 살게.”“그래. 난 계속 일하러 간다.”전화를 끊은 하연은 명함을 따로 챙겼다. 물론 모연과 교점이 없지만 왠지 또 만날 것 같다는 예감이 어렴풋이 들었으니까.하연의 그런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불과 며칠 만에 예나의 전화를 받게 되었으니까.“하연아, 큰일 났어.”“왜 그래? 천천히 얘기해.”“얼른 인터넷 찾아봐. 누가 실명으로 우리 브랜드숍 대부분 드레스가 표절이라는 제보를 했어. 지금 인터넷 검색어 난리도 아니야.”너무 황당하다는 생각에 하연은 얼른 인터넷을 확인했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브랜드숍 이름이 검색어 맨 위에 떡하니 있었고 제목들 뒤에는 모두 표절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띄게 붙어 있었다.워낙 브랜드숍 장사가 잘되고, 팬들도 많은 데다, 단골도 많은지라 실명으로 제보되고 나니 검색어 순위는 좀처럼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헐, 이 브랜드숍 드레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였는데, 표절이라니.][한 벌뿐만 아니라 대부분이래요. 게다가 똑같은 디자이너 작품을 베꼈다고 함. 정말 너무 뻔뻔해.][디자이너가 돼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는 거지? 어쩜 이렇게 양심 없는 짓을 할 수 있어?][오리지널은 영원하고 표절한 사람은 영원히 벌받아야 함. 이 브랜드숍 얼마 못 가 문 닫는다고 봄.]...기사 아래에 쏟아지는 욕설을 보자 하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하연아, 누가 우리 숍에 와서 문 닫으라고, 쇼핑몰에서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쳐.”“우선 조급해하지 말고 먼저 문 닫아. 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다급히 대답한 하연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태훈이 급히 물었다.“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어디 가세요?
하연이 눈을 떴을 때, 도시는 이미 밤의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몸이 묵직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상혁은 특히나 격렬했다. 소파에서 시작해 주방, 다시 안방, 마지막으로 욕실까지, 온 집안의 모든 공간을 사용했다. 하연의 온몸은 마치 압사당한 듯 피곤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퍼져 있었고, 어둑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이미 사랑의 흔적이 사라졌고, 상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천장이 아닌 신들의 조각상이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신들은 어두운 밤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하연의 마음은 쓸쓸했다. 어젯밤, 둘이 동시에 절정을 맞았을 때, 상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신들을 가리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극도의 미친 감정이었다.하연은 다시 샤워할 필요는 없었다. 상혁이 욕실에서 이미 그녀를 씻겨주었기 때문이다.하연은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고, 그곳에서 외부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버지를 조사해보라고 했잖아. 했어?” 조진숙의 목소리였다.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조진숙이 갑자기 찾아왔고, 상혁은 서둘러 셔츠를 하나 걸치고 나갔다. 그와 하연이 얽히며 셔츠 목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했어요. 고나희의 사고는 단순 사고였고, 아버지와는 관련이 없어요.”“고경수가 비리로 돈을 챙긴 걸 얼마나 알아냈어? 난 그 명목상의 숫자만 믿을 수는 없어. 배를 채운 흔적이 있는지 다 밝혀냈어?” “DL그룹은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 리 없죠.” 조진숙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시련을 겪어온 여성이기에,
“왔어요?” 상혁은 놀라움이 가득한 여자 목소라가 들렸다. 상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서둘러 나오는 하연이 국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이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국이 너무 뜨거웠던지, 그녀는 재빨리 그릇을 내려놓고 귀를 만지며 식히고 있었다. 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까지 차가웠다. “정말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너무 안 와서, 심심해서 뭐 만들어 먹을 게 없나 하고 요리 만드는 법을 찾아보다가 뭘 좀 만들어 먹었어요. 다행히 냉장고도 가득 차 있었고 장비도 다 갖추어져 있어서 문제없었어요.” 그녀가 말할 때, 분명히 기쁜 마음과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은 두세 걸음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손을 잡고 그대로 바로 하연이를 품 안에 가둬버렸다. 상혁의 힘은 상당히 강했고, 하연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왜 그래요?” 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안정을 느꼈지만, 그의 강한 포옹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평온한 향기가 상혁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상혁은 눈을 감고, 목소리가 거칠고 낮았다. “난 네가 간 줄 알았어.” 하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기다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안 갔죠.” 그녀는 상혁의 감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상혁은 본가에서 싸움 끝에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다. 부남준은 송혜선을 보호하며 소리쳤다.“형, 이 아이도 한 생명이에요! 아버지의 혈육이잖아요!”상혁은 바로 남준의 옷깃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집사가 나서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남준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혁의 목에 난 상처를 알아보고 하연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죠? 교통사고 처리하러 간
하연은 상혁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녘에 깨어나니 집안은 고요했고 상혁이 돌아온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뒤척이며 잠을 청할 수 없어 핸드폰을 열었고 보니, 마침 서여은이 사진을 올려놓았다. 외부 취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에는 ‘큰 뉴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뒤, 여은이 다시 글을 남겼다. [뉴스가 없어졌어.]하연은 궁금해졌다. [어떤 뉴스?][DL그룹과 관련된 일이야. 전에 조사받았던 고경수 기억나지? 그 사람 딸이 죽었대. 원래 뉴스에 나올 예정이었는데, 누군가 큰돈을 써서 기사를 막아버린 모양이야.]하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DL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혁이 처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은이 사건 현장의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사진 속 여성은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절반가량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표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처참했다. 하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이 여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여은이 바로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나희야, 고경수의 딸이잖아. 애지중지하게 키워졌는데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아이였지. 그런데 네가 정말 고나희를 본 적 있어?]“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본 적 있어.” 하연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고, 드디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정다영을 만나러 호텔에 갔을 때, 고나희와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 고나희가 하연과 부딪혔고, 부남준이 다정하게 하연을 붙잡아주며 고나희에게 아주 화를 내면서 잘 보고 다니라고 말했다.하연은 그때 남준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반박하려다, 남준의 시선이 고나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나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고, 이후 하연과 남준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연은 고나희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녀의 사망 소식으로.[참, 고나희의 뱃속에 아이도 있었다고 하더라.]하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몇 개월이었는데?”[5,6개월쯤 되었을 거야.]하지만
“형님 얼굴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상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만, 아침부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어서 앉아라.” 부동건이 꾸짖었다.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 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앉으며 말했다. “접대하는 자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혁이 처럼 남준이 너도 당연히 그런 자리는 해야 해.” 송혜선은 웃으며 중재했고,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상혁은 집사가 가져온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반면 부남준은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갔다. “형, 들었어요. 고경수의 딸이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소식 한번 빠르군.” “검사 보고서도 확인했어요. 그 여자아이,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 질문은 부동건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상혁아, 왜 나한테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은 거냐?” “떳떳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잘못된 남자를 믿는 일은 흔합니다.” 상혁은 남준을 힐끗 보고 말했다. “본인이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고경수의 집안은 이미 파란 속에 휩싸여 있으니, 괜한 일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지나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준은 아침을 먹으며 웃었다. “고경수가 DL그룹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누군가 알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 딸을 이용해 DL그룹 고위 간부에게 연결하게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냥 떠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부동건은 남준의 말의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라.” “제 말은, 고경수가 자기 딸을 이용해 누구에게든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상혁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하얀 손가락 관절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무심한 어조로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