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고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하연을 감싸안으며 바닥에 넘어졌다.“범인 잘 잡고 있어. 도망치게 하면 안 돼.”순간 몇몇 경찰들이 대호 곁으로 달려갔지만 대호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물 흐르듯 익숙한 동작으로 수갑을 풀고 불길과 함께 사람들 눈앞에서 사라졌다.폭발음은 일정한 간격으로 몇 번 울리다가 한참 뒤에야 멎었다. 그리고 연기가 자욱한 현장을 본 순간, 하연은 뭔가 알아차린 듯 물었다.“권대호는 어디 갔지?”사람들도 그제야 수갑을 차고 있던 대호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큰일 났어. 그놈 도망쳤어.”눈앞에서 범인을 놓친 경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이, 상혁은 무전기를 꺼내 차갑게 명령했다.“모든 입구 다 막아서 무조건 잡아.”“네, 도련님.”상혁은 얼른 하연을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여기 모든 입구에 이미 사람 심어 뒀어. 경찰 외에 우리 부씨 가문 사람들도 있어.”그 말을 듣고도 하연은 안심할 수 없었다.“권대호, 이 교활한 자식. 감히 눈앞에서 도망치다니.”“걱정하지 마. 얼마 도망 못 갈거야.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아니나 다를까 얼마 뒤, 부씨 집안의 경호원한테서 연락이 왔다.“도련님, 잡았습니다. 역시 도련님 예상대로 놈이 바다에 뛰어들더군요. 다행히 바닷속에도 수색대를 풀어 두어 쉽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그 말에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하니 다시 열이 나 버럭 소리쳤다.“권대호 이 교활하고 간사한 놈. 하지만 아무리 교활해도 뭐 어쩔 거야? 결국 죽게 될 목숨인데. 이래서 항상 뒤를 조심해야 한다는 거야.”얼마 뒤, 하연과 상혁이 해안에 도착해 보니 대호는 온몸이 축축한 채 경찰 두 명에게 압송되고 있었다.하연을 발견한 대호는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어진 채 낮게 중얼거렸다.“이번엔 내 실패를 인정하지.”“실패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네가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대호는 피식 웃으며 하연을 바라봤다.“최하
상혁은 하연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됐어, 이제 우리도 돌아가자.”B시에 도착하자마자 하연은 하민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최하연, 너 점점 겁이 없어지네. 어떻게 권대호처럼 극악무도한 놈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어? 이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몰라서 그래?”“오빠, 저 무사하잖아요. 그리고, 상혁 오빠도 있는데 뭘 걱정해요. 권대호가 잡혔으니까 오빠도 이제 걱정하지 마요.”그건 하민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하지만 이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오빠인 저한테 도움도 안 청한다는 사실에 왠지 질투가 났다.“다음은 없어.”“알았어요.”하연은 연신 약속했다.몇 마디 더 당부한 하민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최동신이 관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어때? 하연이 괜찮대?”하민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요. 부상혁도 같이 있어 큰 위험은 없었던 것 같아요.”상혁을 언급하자 최동신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하연이 이 녀석, 사람 보는 눈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구나. 그런데 혼약이 있던 나씨 집안이 좀 아쉽긴 한데.”최동신이 이렇게 아쉬워하는 건 그동안 나씨 집안과 친분이 두텁기 때문이다. 만약 두 집안의 혼사까지 이루어 지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을 텐데, 결혼은 중요한 일이기에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할아버지, 하연이 안목 믿어 봐요. 이번에는 우리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하연이만 뭐라 하지 말고, 너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데 얼른 손주며느리 데려와 봐.”본인 얘기로 주제가 넘어가자 하민은 대충 얼버무리며 속임수를 썼다.“할아버지, 회사에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저 나가 봐야 해요.”이윽고 최동신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다. 최동신은 도망치듯 떠나는 손주의 뒷모습을 보며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자식, 어쩜 연애 얘기만 나오면 저렇게 어리숙하게 굴어? 하유, 됐어. 애들이 알아서 잘하겠지.”...그 뒤로 며칠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새로 지나갔지만, 하
“사장님, 우리...”태훈은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태준의 태도만 봐도 하연과 서준을 접촉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었다.하지만 하연은 피할 수 없는 건 언젠가 마주쳐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가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한 대표님이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주인이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네요.”서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HT 그룹은 지금껏 이 분야에 손 댄 적 없었어. 너와 협력할 생각에 처음 시도한 거니까.”하연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지금 HT 그룹이 우리 DS 그룹과 손잡고 싶다는 말인가요?”“그런 셈이지. 세부 사항은 이걸 보면서 조율해 봐.”서준은 여유롭게 비서 손에서 서류 하나를 받으며 말했다.그 말에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아, 혹시 뭐 궁금한 점이라도 있나요?”“이익 분배가 조금 불합리하다고 생각돼서 말이야.”그 말을 들은 태훈이 무의식적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속으로 한서준이 협력할 마음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한 대표님, HT 그룹도 이 업계에서는 햇병아리나 다름없는데 이 정도 이익 배분은 아주 합리하다고 생각되는데요? 혹시 아예 협력할 의사가 없는 건 아닌가요?”태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공격적으로 쏘아붙였지만 서준의 시선을 하연에게 돌리며 말했다.“참 똑 부러지는 비서를 뒀네. 이익은 우리 HT 그룹이 너무 많이 차지한 것 같아 불합리하다고 한 거야. 5대 5가 아니라 7대 3으로 하자고, DS 그룹이 7, 우리가 3.”태훈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준을 빤히 바라봤다. 그럴만한 게, 이건 협력이 아니라 돈을 DS 그룹에 가져다 바치겠다는 거나 다름없다.2할이나 되는 이익은 시가로 따져도 몇백억이니 말이다.“최하윤 사장님 생각은 어떤가요?”하연은 점점 한서준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한 대표님, 이건 사업이 아니라 자선사업인 것 같은데요?”서준은 느긋하게 대답했다.“돈 더 벌게 하려는 것뿐이야. 돌아가서 이사회
“최하연, 잠깐만.”하연은 걸음을 멈추고 귀찮은 듯 물었다.“또 무슨 볼일 있나요?”“최하연, 나...”하지만 서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서준아,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반가운 얼굴로 서준에게 말을 걸던 이수애는 하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굳었다.“아들, 너 설마 얘랑 아직도 만나? 엄마가 화병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이어지는 이수애의 잔소리에 서준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이건 내 일이니까 참견하지 마세요.”이윽고 하연의 팔을 잡으며 밖으로 끌었다.“우리 가자.”하지만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뒤로 뺐다.“한 대표님, 자중하세요.”이윽고 이수애를 보며 거리감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이제 한 대표님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하연의 도도한 태도를 보자 이수애는 전에 하연에게 못되게 굴어 최씨 가문과 인연이 닿을 기회를 잃었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잘못이니 돌이킬 수도 없었다.다행히 아들이 훌륭한 덕에 아직도 좋아하는 여자가 널리고 널려 최하연이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이렇게 생각한 이수애는 얼른 자기와 함께 식사하러 온 여자를 끌어 서준 앞으로 밀었다.“서준아, 이 아가씨가 바로 내가 저번에 말했던 임모연 씨야. 명문가 출신인 데다 유명한 디자이너래, 너랑 천생연분이야!”이수애는 모연이라는 여자를 소개하면서 턱을 한껏 치켜올렸다. 그 교만한 태도는 마치 하연에게 자기 아들은 아무렇게나 찾아도 너보다 몇백 배 나은 여자를 찾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듯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세요.”서준은 하연이 오해할까 봐 다급히 부인했다.하지만 하연은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뒤돌아 떠나 버렸다.그런데 그때,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모연이 갑자기 하연을 불러 세웠다.“최하연 씨 맞죠? 소문 많이 들었는데, 오늘 보니 역시 명불허전이네요.”모연은 하연에게 걸어가더니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만나서 반가워요. 임모연이
“어머니, 또 무슨 헛소리예요?”서준은 다급히 이수애를 막아 나섰다. 본인의 어머니 하연에 대한 악의가 이토록 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예전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게 또 실감 났다.그에 반해 하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한 대표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그 말을 하고 떠난 하연을 서준은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이수애가 갑자 그를 잡아끌었다.“아이고, 아들. 나 안 되겠어.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서 숨이 안 쉬어져...”“어머님, 괜찮으세요?”모연이 다급히 묻자 상황을 본 서준도 얼른 다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요?”그랬더니 다음 순간, 이수애는 서준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아들, 엄마 말 들어. 절대 최하연 저 계집 건드리지 마. 모연 씨 좀 봐 봐. 얼마나 좋아. 진짜 너와 어울리는 사람은 모연 씨 같은 분이라고.”순간 눈치챈 서준은 눈살을 팍 구기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차가운 미소를 지짓더니 이수애를 밀어내며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어머니 진짜 연기 잘하시네요. 전에는 왜 그걸 몰랐을까??”“아들, 왜 그렇게 말해? 서준아...”이수애가 아무리 불러도 서준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하연이 떠나간 방향으로 쫓아갔다.하지만 여전히 한발 늦었다. 서준이 쫓아 나갔을 때 하연의 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차 안에서 하연은 방금 받은 명함을 손에 쥐고 임모연이라는 세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분명 아까 인사할 때도 모연은 다정하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곧이어 하연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했다.그리고 얼마 뒤, 전화 건너편에서 여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래? 나 보고 싶었어?”하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어때? 요즘 바빠?”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여은은 곧바로 하소연했다.“바빠! 아주 요즘 소처럼 일해! 왜? 무슨 일 있어?”이에 하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한테 사람 하나 알아보려고.”“어떤 대단한 사람이길래
하연은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네가 안 믿을 수도 있지만, 그 여자 오늘 이수애랑 식사하더라. 사이 꽤 좋아 보였어.”“헐, 네 전 시어머니? 설마 한서준과 결혼시키려는 건 아니겠지?”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이 대화를 계속하지 않았다.“고마워. 나중에 내가 밥 살게.”“그래. 난 계속 일하러 간다.”전화를 끊은 하연은 명함을 따로 챙겼다. 물론 모연과 교점이 없지만 왠지 또 만날 것 같다는 예감이 어렴풋이 들었으니까.하연의 그런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불과 며칠 만에 예나의 전화를 받게 되었으니까.“하연아, 큰일 났어.”“왜 그래? 천천히 얘기해.”“얼른 인터넷 찾아봐. 누가 실명으로 우리 브랜드숍 대부분 드레스가 표절이라는 제보를 했어. 지금 인터넷 검색어 난리도 아니야.”너무 황당하다는 생각에 하연은 얼른 인터넷을 확인했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브랜드숍 이름이 검색어 맨 위에 떡하니 있었고 제목들 뒤에는 모두 표절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띄게 붙어 있었다.워낙 브랜드숍 장사가 잘되고, 팬들도 많은 데다, 단골도 많은지라 실명으로 제보되고 나니 검색어 순위는 좀처럼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헐, 이 브랜드숍 드레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였는데, 표절이라니.][한 벌뿐만 아니라 대부분이래요. 게다가 똑같은 디자이너 작품을 베꼈다고 함. 정말 너무 뻔뻔해.][디자이너가 돼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는 거지? 어쩜 이렇게 양심 없는 짓을 할 수 있어?][오리지널은 영원하고 표절한 사람은 영원히 벌받아야 함. 이 브랜드숍 얼마 못 가 문 닫는다고 봄.]...기사 아래에 쏟아지는 욕설을 보자 하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하연아, 누가 우리 숍에 와서 문 닫으라고, 쇼핑몰에서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쳐.”“우선 조급해하지 말고 먼저 문 닫아. 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다급히 대답한 하연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태훈이 급히 물었다.“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어디 가세요?
“하연아, 이것 봐. 이게 너를 실명 제보한 사람의 트위터 계정이야...”하연은 핸드폰을 받아 들고 트위터에 있는 내용을 확인했다.하연의 브랜드숍을 표절했다고 제보한 사람은 본인의 실명을 공개했을 뿐만 아니라 디자인 원고와 하연의 숍에서 잘나가는 실제 드레스 몇 벌을 대조하며 하연이 표절했다고 주장했다.화면에 뜬 원고를 본 순간 하연은 믿을 수 없었다.브랜드숍에서 인기 있는 드레스는 모두 하연이 직접 디자인한 것이지 절대로 표절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두 벌은 하연의 졸업 작품이다.“이럴 리 없어... 이건 말도 안 돼.”하연이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상혁이 부하가 알아낸 소식을 알려주었다.“알아냈어. 표절당했다는 디자이너가 Jion래. 요즘 핫한 디자이너인 데다 국제 디자인 업계에서 발언권도 있는 사람이래. 게다가 방금 인스타에 저작권을 주장했어.”“Jion?”하연은 웃음이 났다.“임모연이 내가 본인 걸 베꼈다고 했다고요? 정말 어이없네.”상혁은 하연에게 iPad를 건넸다. 화면 속에는 모연의 인스타 계정이었는데, 맨 위로 설정한 게시물이 바로 이번 표절 사건에 관한 내용이었다.“하연아, 아직 조급해하지 마. 이 일은 분명 뭔가 수상쩍어, 우리 쪽 사람들 말로는 이번 실검도 누가 돈 들여 조작한 거래, 연속 3일 동안 검색어 1위에서 내려가지 않게 하라고. 내가 우선 모든 실검을 내렸지만 진실은 우리가 끝까지 알아내야 해. 안 그러면...”상혁은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하연은 그 결과를 당연히 알고 있다.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표절은 금기 사항이니까.하연이 만약 자기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면 브랜드숍은 영원히 문 닫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하연의 평판도 한순간 무너질 수 있다.“이번 일 무조건 밝혀내야 해요.”그때 상혁이 가장 중요한 걸 짚어냈다.“문제는 이 작품이 분명 네 작품인데, 상대가 왜 오히려 너를 도둑으로 몰까? 아마 그 키는 상대가 갖고 있을 거야.”하연은 상혁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마치 약속이라도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모연은 천천히 걸어오며 마치 반갑기라도 한 듯 부드럽고도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이번에 하연은 절대 모연의 이런 겉모습에 쉽게 속을 리 없다.“임모연 씨, 저한테 뭐 설명할 거 없나요?”그 말에 모연은 피식 소리 내 웃더니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편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설명? 무슨 설명이요? 여기까지 온 건 나랑 배상에 대해 논의하러 온 게 아니에요? 제 작품을 그렇게나 많이 표절했으면서 그동안 그거로 수입이 꽤 짭짤했겠어요.”“전에 가게 매출 괜찮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 배상은 문제없죠? 아니면 배상으로 끝나지 않고 법률적 절차를 밟고 싶나? 그렇다면 뭐 끝까지 싸워 드리죠.”“...”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마치 진짜인 것처럼 줄줄 말하는 모연을 하연은 싸늘하게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전 표절한 적 없어요.”하연이 짤막한 한마디로 제 태도를 표명하자 모연은 씩 웃었다.“그 말을 누가 믿어요? 사실이 눈앞에 있는데, 아직도 발뺌할 생각인가요?”“진실이 무엇인지는 잘 알 텐데? 그런데 좀 궁금하네요, 그 원고는 대체 어디서 났어요?”모연은 깊은숨을 내쉬었다.“최하연 씨, 표절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뭐 하러 쓸데없는 변명을 해요? 원고는 당연히 제가 그린 거죠. 그것도 최하연 씨보다 훨씬 전에.”“그럴 리 없어요.”“최하연 씨는 참 포기를 모르네요? 끝까지 가보자는 거예요? 뭐, 괜찮아요. 증거는 언제든 내놓을 수 있으니까.”모연은 말이 끝나자마자 부하를 시켜 본인이 디자인한 원고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확인해 본 결과, 그 디자인은 하연의 디자인과 싱크로율이 90퍼센트에 달했다.게다가 디자인 마감일은 모두 7년 전으로 되어 있고, 종이 역시 시간이 꽤 오래 지난 것처럼 보였다.“잘 봤죠? 최하연 씨?”하연은 너무 믿을 수 없어 그대로 굳어버렸다.‘이, 이럴 수가?’그때 모연이 말을 이었다.“최하연 씨, 이 얘기는 이만하고 배상 건에 대해서 예기합시다. 그래도 합의 볼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송혜선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솔직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채고 하나하나 넘겨봤다. 사진마다 담긴 장면이 송혜선을 점점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 최씨 가문의 귀한 딸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니,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사진 속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고한 분위기, 남다른 기품까지...비록 사진에는 전부 뒷모습만 담겨 있었지만,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송혜선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모든 사진을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친한 남녀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선을 넘은 정황은 없잖아. 겉보기엔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정다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설 탐정을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사진 속 ‘한명준’이라는 남자와 하연 이 둘 사이에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님, 이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다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바로 B시 한씨 가문의 사람이란다.” “B시 한씨 가문?”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하연의 전 남편이 한씨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한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최하연의 전남편은 감옥에 간 걸로 아는데, 또 다른 한씨 가문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복잡한 사연이 많았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다영은 하연과 ‘한명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일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부상혁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남자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