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라고 낮게 대답한 하연은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그로부터 2분도 안 지나 하연은 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상혁을 발견하였다.심지어 가까이했을 때, 상혁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발견했다.“상혁 오빠,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상혁은 서먹서먹한 하연의 말투에 얼른 하연의 손을 잡고 회사로 걸어갔다.“나한테 왜 그렇게 내외하고 그래?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 네가 찾아오는 건 방해가 아니니까.”하연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지자 이제야 마음마저 따뜻해졌다.두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1층 로비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하연은 쑥스럽기는커녕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그렇게 엘리베이터에 도착하자 하연은 그제야 상황을 설명했다.“진숙 이모가 오늘 오빠 생일이라고 해서 왔어요.”상혁은 옆으로 돌아 하연을 바라봤다.“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미리 말하면? 사무실에서 봤던 그 장면 볼 일 없었나?’하연의 기분은 순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연의 감정 변화를 느낀 상혁은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아, 아무것도 아니에요.”하연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상혁 오빠, 오빠랑 오빠 전 비서 무슨 사이예요?”“전 비서?”상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임 비서 말하는 거야?”하연은 고개를 끄덕이자 상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상사와 부하 관계지.”“아.”하연은 알겠다는 듯 대답했지만 영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그러자 상혁이 더 의아해했다.“왜 갑자기 그걸 묻는데?”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밖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분주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하연은 그걸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먼저 나갔다. 하연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리 없는 상혁은 어리둥절해서 다급히 뒤따랐다.“최 사장님, 안녕하세요.”“부 대표님, 안녕하세요.
하연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도 그 답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그 순간 상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무실 전화로 내선 번호를 눌렀다.“마케팅팀 임 매니저더러 내 사무실로 오리고 해요.”“네, 대표님”“그리고, 경비원 몇 명도 함께 불러줘요.”“네.”하연은 곧장 소파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로부터 약 5분 뒤, 서희가 헐레벌떡 달려와 사무실 문을 열었다.“대표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말을 마치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을 발견한 서희는 한순간 넋을 잃었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상혁은 놓칠 리 없었다.조진숙도 예전에 서희가 불여우라 겉모습처럼 순진하지 않을 거라고 예기했던 적 있다. 그래서 대표실에서 강제로 마케팅팀으로 부서를 옮겼던 거고.상혁은 그때만 해도 자기 어머니가 서희한테 편견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괜히 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임 매니저,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서희는 천연덕스럽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표정을 본 순간 상혁의 눈빛은 이내 어두워졌다. 상혁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분위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상혁 곁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비서 일을 해온 서희가 그걸 모를 리는 없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티를 낼 수 없었기에 서희는 애써 침착한 척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 서희가 정말 억울하다고 믿었을 거다.“임 매니저는 오늘 당장 인사팀에서 퇴사 처리해요. 월급은 한 달 치 더 지급할게요.”그 말에 서희는 더 이상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대표님, 왜 그러세요?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상혁은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서희를 내쫓았다.그러자 서희가 하연을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쳤다.“대표님, 혹시 저 여자가 뭐라고 했어요? 저 여자 말 믿으세요?”이 상황을 보자 하연은 겨우 마음이 놓였다. 이로써 서희와 상혁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게 증명됐으니까.
하연은 고개를 살짝 들어 상혁과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맑은 눈동자에서 하연은 자기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상혁 오빠, 생일 축하해요.”상혁은 하연이 예뻐 죽겠다는 듯 싱긋 웃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고마워.”다급히 일어서서 테이블 쪽으로 달려간 하연은 아까의 우울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보물이라도 바치는 듯 케익을 들어 상혁에게 내밀었다.“상혁 오빠. 이건 제가 직접 만든 케익이에요. 꼭 다 먹어야 해요.”“그래.”상혁이 웃는 얼굴로 하연을 보며 대답했다.그러자 하연은 얼른 케익 상자를 열어 촛불을 꽂은 뒤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이고 가볍게 노래하기 시작했다.“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오빠, 소원 빌어요.”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꼭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하연은 어느새 상혁의 앞에 다가왔다.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촛불을 껐고, 하연이 곧이어 나이프를 상혁에게 건네며 말했다.“오빠, 첫 번째 조각은 생일 주인공이 베는 거랬어요.”지금껏 상혁의 생일만 되면 수많은 친구가 모여 생일을 축하해 줬는데, 그때마다 하연은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다.하지만 오늘 이 생일은 분명 소박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하연이 함께 한다는 거였다.“그래, 케익 벨게.”두 사람이 케익을 다 먹기 바쁘게 상혁의 개인용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아들, 생일 축하해.”전화를 받아 보니 건너편에서 조진숙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조진숙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다.“고마워요.”“올해에는 하연이 곁에 있으니 나랑 네 아버지는 끼어들지 않을게. 저녁에 레스토랑 예약해 뒀으니 위치 보낼게. 꼭 하연이랑 같이 가.”조진숙은 싱글벙글해서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혁의 핸드폰에는 주소 하나가 날아왔다.어머니를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던 상혁은 하연을 정식으로 초
서준은 차에 앉아 창문을 통해 하연을 바라볼 뿐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했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던 하연과 상혁이 계산까지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올 때까지 서준은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 심지어 두 사람이 시선 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런 서준을 다시 현실로 끌어 낸 건 다름 아닌 전화벨 소리였다. 이수애는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잔뜩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너 어디 있어? 나은 씨가 너 한참 기다렸대. 너...”서준은 이수애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윽고 핸드폰을 아예 꺼버리고는 그걸 차창 밖으로 내다 버리고 그곳을 훌쩍 떠나 버렸다.한편, 안태현이 개인 파티룸에서 한창 즐기고 있을 때, 문이 갑자기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어떤 자식이 눈치도 없이...”순간 화가 치밀어 욕지거리를 내뱉던 태현은 서준을 보자마자 하려던 말을 이내 삼키며 앞으로 다가갔다.“한서준,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대? 네가 여길 다 오고?”사실 서준은 한참 동안 파티룸에 드나들지 않았었다. 특히 하연과 이혼한 뒤에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발길을 뚝 끊었다.서준은 태현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그 순간 서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느낀 태현은 얼른 룸안에 있던 사람들을 내보내고는 입을 열었다.“어디 보자. 너 이러는 거 혹시 네 엑스 와이프 때문이야?”“그렇게 티나?”차갑게 묻는 서준의 말에 태현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너 진짜 완전히 빠졌네? 최하연 씨 이제 너한테 눈길도 안 주는데, 왜 이렇게 본인을 혹사해?”태현의 말에 서준은 아까 전 레스토랑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하연이 상혁을 보는 눈빛은 너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나랑 최하연 가능성 있을까?”“아니.”태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하지만 말하고 나서 상대에게 너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했는지 이내 말을 보탰다.“뭐, 아예 없는 건
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할 지 답을 찾은 듯했다.“고맙다, 친구야.”이윽고 말을 마치고는 벌떡 일어서서 다급히 룸을 빠져나가 덩그러니 남게 된 태현만 어리둥절했다.다음 날, 하연은 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오늘은 반년에 한번 이사회를 개최하는 날이기에 DS 그룹의 이사진과 임원진은 이미 맨 위층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한편, 하연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태훈은 하연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주었다.“사장님, 이건 상반기의 재무 보고서과 명세서입니다. 상반기 이윤만 해도 이미 작년 한 해 동안의 총이윤을 넘었습니다. 그것도 10퍼센트나 초과했습니다.”태훈은 말하면서도 무척 흥분했다.그도 그럴 게, 상반기 동안 작년 한 해의 실적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10퍼센트나 초과한 건 그동안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하연은 고작 반년 동안 그걸 해낸 거다.“사장님, 이 데이터를 이사회 그 능구렁이들한테 던져주면 찍소리도 못 낼 거예요. 호 이사님과의 내기도 무조건 이겨요.”잔뜩 흥분한 태훈의 보고에도 하연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서류를 훑었다.보고서에는 이미 D시 프로젝트와 아직 채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의 이윤까지 적혀 있었다.“D시 프로젝트 제외하면 이윤이 얼마지?”“D시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작년 실적까지 30퍼센트 부족합니다.”“음, 알았어. 회의하러 가자.”그 시각, 회의실 안.호현욱은 이미 이인자의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호현욱은 이미 상반기 재무 보고서를 확인했었다.사실 그것만 봐도 하연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 실적이 단기간에 대폭 상승했으니. 하지만 내기를 한 것과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호 이사님, 제가 볼 때 이사님과 최 사장님의 내기는 이미 승부가 난 거나 다름없습니다.”“최 사장님은 역시 너무 어려요. 뭐, 경영 수단은 확실히 대단하나 약속한 목표와 아직 거리가 멀던데요.”“상반기에는 D시 프로젝트가 있었으니 이만큼 실적을 올렸지만 하반
회의실 문이 열리자 하연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하연이 나타나자 회의실은 언제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모든 사람의 눈빛이 하연에게 쏠렸다.그러다 하연이 착석하자 호현욱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최 사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하연은 호현욱을 바라보며 미소로 화답했다.“별말씀을요. 그냥 일한 건데요.”“최 사장님도 오셨으니 회의 시작하죠.”호현욱이 웃으며 말하자 이사진은 모두 그가 중심이라도 되는 듯 행동했다.하연은 그걸 모두 눈에 새겼지만 기분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그러다 잠시 뒤 입을 열었다.“상반기 회사의 많은 프로젝트가 좋은 성과를 따냈는데, 지금으로부터 각 프로젝트 매니저가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합시다.”하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웬 이사 한 명이 말을 잘랐다.“최 사장님, 오늘이 상반기 이사회인 만큼 다들 재무 보고서도 봤을 테니 우선 상반기 실적부터 얘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그 말이 떨어지자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이사도 맞장구쳤다.“최 사장님, 재무 보고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지난 상반기 고생 많으셨습니다. DS 그룹이 상반기 동안 이와 같은 성적을 따낼 수 있었던 건 다 사장님의 현명한 판단 덕입니다.”하연은 그 말에 팔짱을 끼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다들 회사 실적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니 우선 실적부터 얘기해 봅시다.”“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최 사장님과 호 이사님의 내기도 걸린 일인데. 허나 애초에 뭐라고 약속했든지 기억하십니까?”하연의 우스운 꼴을 기대하던 이사진은 이내 한마디씩 말을 보탰고, 회의실은 순간 왁자지껄해졌다. 이 시각,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하연이 망신당하는 꼴을 기대하고 있었다.특히 호현욱은 우쭐거리는 표정을 아예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심지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최 사장님은 신용 있는 부인데, 뱉은 말은 당연히 지키겠죠. 다들 급해 마세요. 아직 때가 아니잖습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의실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보니 다들 하연이
상대가 충격을 받았을 거다 판단된 하연은 그제야 태훈에게 그만하라는 눈치를 주더니 침착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아직 반년이나 남았는데 다들 그렇게 급해 마세요. 기한이 되면 모든 게 일단락될 거고, 승자가 누구인지도 자연스레 알리겠죠.”호현욱도 그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최 사장님 말이 맞아요. 모든 게 아직 정해진 게 아니니 우리 최 사장님 좋은 소식을 기다리자고요.”이사진은 하연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호현욱이 이렇게 말하자 하나둘 맞장구쳤다.“그럼 최 사장님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최 사장님이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하지만 정말 지면 결과에 승복하고 빨리 자리에서 물러나셔야 합니다.”“...”하연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 요즘 이사회 분위기가 안 좋고 이사진 대부분이 호현욱을 필두로 하고 있다는 걸 하연도 알고 있다.때문에 이사회를 잘 정리하려면 맨 먼저 호현욱부터 잘라내야 한다.회의가 끝나고 하연이 회의실을 나서자 사람들은 모두 호현욱을 둘러쌌다.“호 이사님, 최 사장이 자신만만해 보이는데, 우리 이러다 지는 거 아닙니까?”“그러게 말이에요. 지금 다들 호 이사님을 따르는데, 만약 이사님이 물러나면 앞으로 우리도 처지도 곤란해집니다.”“뭐가 됐든, 절대 저 계집한테 져서 체면 깎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의견을 얘기했다.애초에 하연이 DS 그룹에 들어온 순간부터 대부분 이사진은 호현욱의 편에 섰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하연이 너무 어려 관리 경험이 없다는 거였다.하지만 고작 반년 사이에 이런 실적을 냈으니, 판도가 바뀌어 하연이 이길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봐야 한다.그리고 만약 정말 하연이 이긴다면, 호현욱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사회에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없을 테고.“호 이사님, 방법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정 안 되면 특별한 수단이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최씨 집안 사람들을 이사회에서 쫓아내기만 하면 DS 그룹은 이사
“요즘 협상하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 서류 나한테 가져와.”태훈은 여전히 태연하게 행동하는 하연을 보자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그리고 얼마 뒤, 서류 한 뭉치를 안고 다시 돌아왔다.이윽고 최근에 협상할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만 골라 하연에게 건넸다.“사장님, 이 몇 개 프로젝트가 괜찮으니 한번 확인해 보세요.”“어, 거기 둬.”하연은 서류를 건네받고 내친김에 확인해 보더니 얼마 뒤 손가락으로 프로젝트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인수합병 건이 협상할 여지가 있어 보이네...”태훈도 사실 이 프로젝트를 눈여겨봤었다.“이건 프로젝트팀 피드백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 공장들 모두 섬에 있어 협력하기로 하시면 현지 조사는 섬에 가서 하셔야 할 겁니다.”하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섬이 어딘데?”“서해안에서 약 300킬로미터 떨어진 오하우섬입니다. 현지 조사도 배를 타고 해야 하고 왕복 2, 3일 정도 걸립니다.”“프로젝트팀에 준비하라고 일러둬. 때가 되면 현지 조사도 나갈 거야.”“네, 사장님.”“...”그 시각, DS 그룹 대문 앞에 몰려 있는 무리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대철 형님, 들어갈까요?”“쓸데없는 소리. 안 들어갈 거면 여기까지 왜 왔겠어?”대철은 으리으리한 건물을 보자 왠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리가 이런 건물 하나 딱 있으면 진짜 굉장했을 텐데.”“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보스한테 말씀드려 우리 사무실도 한자리 내달라고 할까요?”대철은 인정사정없이 민석의 머리를 내리쳤다.“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한테 그런 대우가 가당키나 해?”그 말에 민석은 머리를 감싸 쥐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대철 형님, 농담이잖아요.”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철의 다른 부하 윤규가 DS 그룹에서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대철 형님, 안내 데스크 직원이 그러는데 보스를 만나려면 예약이 필요하다는데요.”그 순간 대철은 버럭 화를 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쓸모없는 것! 우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