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안도균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만만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바로 깨달았다. 유진우의 힘이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던 것이었다.엄청난 힘이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무섭게 전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심지어 그의 손바닥 전체가 뚜두둑 하고 소리 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더 버텼다간 뼈가 다 부러질 것 같았다.안도균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유진우를 물리치려고 주먹을 뻗었다. 그런데 유진우는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주먹을 그대로 받아쳤다.“쾅!”두 주먹이 부딪치면서 안도균이 앉아있던 의자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안도균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기대고서야 멈춰 섰다. 그런 그와 달리 유진우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양측의 실력이 한순간에 판가름 났다.“너 아주 실력을 숨기고 살았구나. 내가 널 과소평가했어!”안도균은 실눈을 뜨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를 썼다. 나이도 어린 유진우에게 이런 엄청난 힘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고작 주먹 한 방을 당해내지 못하다니.비록 힘으로 전력을 완전히 파악할 순 없지만 적어도 상대의 몸이 아주 강하다는 건 증명되었다.“도균 삼촌, 그럼 이 인삼은 제가 가져가도록 할게요.”유진우는 주저하지 않고 나무 상자를 들고 자리를 뜨려 했다. 안도균같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는 이미 그의 블랙리스트에 들어갔다. 앞으로 다시는 그와 거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안 어르신, 제가 사람을 보내서 물건을 빼앗아올까요?”우현은 떠보듯 물었다. 그는 안도균과 유진우가 친한 친구는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그렇다면 그도 더는 무서울 게 없다.“쟤 꽤 실력 있는 놈이야. 네 밑의 애들은 아예 상대가 안 돼.”안도균이 저릿저릿한 팔을 움직였다.“그럼... 그냥 이대로 보낼 건가요?”우현은 내키지 않아 하며 말했다. 조금 전 잃은 체면을 다시 찾고 싶었다.“보내다니? 하하... 절대 그럴 수 없지!”안도균이 싸
“난 그냥 무슨 일이든 생각 좀 하고 움직이라고 충고하는 거야. 든든한 배후가 있다고 해서 제멋대로 굴어선 안 돼.”이청아가 진지하게 말했다.“남자는 그래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야지. 권력 있는 사람한테 빌붙으면 한때는 잘나가겠지만 오래 가지 못해. 네가 이 도리를 제때 깨달았으면 좋겠어.”그녀의 말에 유진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내가 권력 있는 사람한테 빌붙었다고 누가 그래?”“아니야? 조선미 씨의 명성이 아니었더라면 아까 우현 씨가 널 놔줬겠어?”이청아가 솔직하게 얘기했다.“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아무튼 난 당신들 눈에 한낱 무능력자니까.”유진우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한번 뇌리에 박힌 인상은 바꾸기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사실이 눈 앞에 펼쳐진다고 해도 어떤 이들은 믿지 않고 다른 핑계로 자신을 설득하려 한다.“유진우, 아니꼬워하지 마. 정말 자존심이 있으면 자신의 능력으로 성과를 이뤄봐. 여자한테 빌붙는 기생오라비로 살지 말고!”이청아가 얼굴을 굳혔다.“기생오라비가 어때서? 그것도 능력이야.”유진우가 어깨를 들먹였다.“너...”화가 난 이청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그녀가 좋은 마음으로 얘기했지만 상대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했다.‘정말 답이 없네!’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순찰차 몇 대가 갑자기 달려오더니 길목을 봉쇄했다. 곧이어 차 문이 열리자 제복 차림의 경찰들이 드높은 기세로 걸어왔다.“누가 유진우야?”그중 한 소대장이 물었다.“접니다.”유진우가 대답했다.“무슨 일인가요, 경찰관님?”“방금 당신이 귀중 물품을 훔쳤다는 신고가 들어왔어. 우리랑 함께 경찰서로 가.”소대장이 호통쳤다.“훔치다니요? 경찰관님,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닙니까?”유진우가 실눈을 뜨며 물었다.“지금 그 상자 안에 든 게 뭐야?”“인삼입니다.”“그럼 맞네! 지금 당장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아!”소대장은 더는 얘기하지 않고 유진우에게 수갑을 채웠다.“경찰관님, 대
그날 밤, 어두운 감방.유진우와 이청아가 서로 등진 채 의자에 묶여있었다. 방 안이 어찌나 습하고 어두운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미안해. 너도 끌어들일 줄은 몰랐어.”유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네가 귀중 물품을 훔쳤다던데 그게 정말이야?”이청아가 갑자기 물었다.“네 생각은?”“넌 그럴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야. 누군가 뒤에서 널 모함했겠지. 우현 씨랑 연관이 있어?”“우현은 그저 시키는 일이나 하는 부하고 진짜 주모자는 안도균이야.”유진우가 대답했다.“안도균? 안 어르신 말이야?”이청아가 화들짝 놀랐다.“아까 웃으면서 얘기도 나눴잖아? 그새 안 어르신을 건드린 거야?”“내가 한 대 때렸어.”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뭐?”이청아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안 어르신을 때렸다고? 너 미쳤어?”안 어르신이 누구인가? 안 회장의 친척이자 서울 재벌가인 안씨 가문 사람이다.흉악하기 그지없는 우현마저도 그의 앞에서는 쩔쩔매는데 유진우가 그를 때렸다니. 이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안도균이 먼저 때리려고 했으니까 난 정당방위야.”유진우의 낯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넌 매사에 너무 충동적이야!”이청아가 분노를 터뜨렸다.“안 어르신이 어떤 분인지 몰라서 그래? 네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안 어르신 한마디면 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다고!”“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책을 세우면 되지, 뭐.”유진우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말은 참 쉽게 하네. 너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이청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이따가 기회 봐서 조선미 씨한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해. 지금 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조선미 씨밖에 없어.”이 말을 내뱉는 그녀의 마음이 왠지 모르게 쓰라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조선미의 집안 배경은 확실히 그녀가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철컥!”두 사람이 한창 얘기하던 그때 감방 철
밤이 점점 깊어갔다.그 시각 장경화와 이현 일행이 감방문 앞에서 조급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이청아는 이씨 가문의 기둥이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씨 가문이 망하게 된다. 하여 이청아를 구하기 위해 이씨 가문에서는 동원할 수 있는 관계를 몽땅 동원했다.뭇사람들이 소식이 나타나기만을 고대하던 그때 한 경찰이 갑자기 걸어 나왔다.이현이 경찰에게 바로 달려갔다.“혁재 형, 상황이 어때? 우리 누나 풀어줄 수 있겠어?”“이현아, 내가 방금 알아봤는데 이 일은 서 경장님께서 직접 담당한 일이라 나 같은 경찰은 아예 끼어들 자격도 없어.”장혁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럼 어떡해? 다른 방법은 없어?”이현이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래그래! 장 경관이 우릴 도와준다면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어.”장경화가 간곡하게 부탁했다.“최선은 다하겠지만 확실한 답변을 드릴 순 없어요. 그리고 사람을 빼내려면 자금이 필요하니까 미리 준비하시고요.”“형, 방금 4억을 준비했는데 먼저 갖고 있어. 부족하면 내가 더 마련해 보도록 할게. 형이 도와주면 일이 끝난 후에 사례는 제대로 할게.”이현이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알았어. 다시 알아볼게.”장혁재는 남몰래 돈을 챙긴 후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이현아, 4억이 적은 돈도 아니고 네 친구 믿을만해?”장경화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어찌 됐든 시도는 해봐야 할 거 아니야.”이현이 이를 꽉 깨물었다.“아 참, 호준 도련님은 어디 갔어요?”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물었다.“호준이 친구 만나러 간댔어. 친구 분이 청아를 빼낼 수 있는 능력이 있나 봐.”장경화가 대답했다.“그렇군요. 호준 도련님까지 도와준다면 이중 보험을 든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뭇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시각, 어느 한 화려한 별장.여호준은 한 장발 미녀와 함께 욕조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데 뒤엉킨 채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즐기는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
바깥이 발칵 뒤집힌 그때 감방의 경장 사무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서 경장, 어떻게 됐어? 그 자식 그렇게 하겠대?”우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걔 선택은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내 손에 들어온 범인은 결국에는 굴복하게 돼 있으니까.”뚱보가 시가를 입에 물고 여유 있게 말했다.“서 경장이 직접 나서는데 당연히 문제없겠지. 하지만 길게 끌어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해결해 줘.”우현이 말했다.“뭐야? 지금 날 가르치려 드는 거야?”뚱보가 싸늘하게 째려보았다.“그럴 리가. 그 자식 배후에 든든한 조력자가 있어서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일이 복잡하게 될까 봐 그래.”우현은 재빨리 미안한 얼굴로 해명했다.“복잡할 게 뭐가 있어? 난 그저 원칙적으로 일을 처리할 뿐이야. 그리고 여긴 내 구역인데 누가 감히 날 건드려?”뚱보는 한껏 여유를 부렸다.“그럼 그럼. 서 경장은 황상수 님의 사위인데 다들 서 경장 앞에서는 굽신거리기 바쁘지.”우현이 그를 치켜올렸다.“하하! 그래도 넌 머리가 좋네.”뚱보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가 가장 의기양양 해하는 건 자신의 경장 자리가 아니라 황상수가 그의 장인어른이라는 것이었다. 황상수는 강능의 최고 권력자였다.“서 경장, 이건 안 어르신께서 준비하신 선물이니까 받아줘.”우현은 그에게 선물 상자를 건넸다. 선물 상자를 열자 금빛이 반짝이는 걸 본 뚱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하하, 안 어르신도 참, 뭘 이런 걸 다 준비하셨대? 돌아가서 어르신한테 감사하다고 전해줘.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실수 없이 제대로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그럼 서 경장만 믿을게!”우현과 서 경장이 한창 얘기를 나누던 그때 아까 그 소대장이 갑자기 들어왔다.“무슨 일이야?”뚱보가 재빨리 선물 상자 뚜껑을 닫았다.“경장님, 이씨 가문 사람들이 지금 밖에서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이청아라는 여자를 풀어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소대장이 사실대로 고했다.“흥! 그 여자는 풀어줄 수
블랙 하우스 안.유진우와 이청아는 등을 맞대고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결혼부터 이혼까지 두 사람은 간만에 이런 조용한 시간을 갖게 됐다.하여 미처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우리 오늘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드디어 이청아가 먼저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주변의 음침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환경이 그녀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주었다.게다가 생각만 해도 섬뜩한 서태영을 떠올리니 가슴이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허튼 생각 하지 마. 우린 무조건 안전하게 여길 벗어날 거야.”유진우가 위로했다.“만에 하나 못 나간다면 넌 유언 같은 거 있어?”이청아가 그윽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만약은 없어. 무슨 일 있으면 나가서 다시 얘기해.”유진우가 답했다.“우린 무려 안도균을 건드렸어. 그 인간 인맥과 능력으로 우릴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야.”이청아가 한숨을 내쉬었다.리얼 빅 보스 앞에서 그녀의 하찮은 실력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청아야,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아무리 어려운 일도 용감하게 맞섰잖아. 왜 우는소리부터 하는 건데?”유진우가 불쑥 정색하며 말했다.이청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석연하게 웃었다.“그러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어쩌면 또 다른 반전이 있을지도 몰라...”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철컥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블랙 하우스의 철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서태영이 덩치 좋은 몇몇 사내를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걸어왔다.“야 이 자식아! 시간이 다 됐어. 어떻게 선택할지 다 정했어?”서태영이 그를 호시탐탐 노려보았다.“그래. 난 거래 안 해.”유진우가 답했다.“뭐라고?”서태영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이 자식이,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솔직히 말할게. 이 사람들은 전부 교도소에서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이야! 게다가 이미 수년 동안 여자를 만져보지 못했지! 네가 감히 거절한다면 장담하건대 이 사람들이 네 앞에서 미친 듯이 네 여자친구를 괴롭힐 거야! 그때 가서 후
유진우가 발을 걷어차자 바닥에 있던 건장한 사내 한 명이 순식간에 튕겨 나가 인간 폭탄처럼 서태영의 몸에 부딪혔다.서태영은 비명을 지르고는 바닥에 쓰러져버렸다.“경고하는데 이 여자 건드리지 마.”유진우가 바짝 다가오며 서늘한 눈빛으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X발! 여긴 감방이야. 너 함부로 나오지 마!”서태영은 그에게 협박하며 뒷걸음질을 쳤다.“함부로 하면 어쩔 건데?”유진우가 싸늘하게 웃으며 서태영의 손을 짓밟았다.“으악!”서태영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극심한 고통에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유진우! 당장 멈춰!”이청아는 놀라서 사색이 되었다.두 사람이 무고하다 해도 손을 댄 이상 입이 열 개라도 해명할 길이 없다!“X발!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기는 해? 지금이라도 이 손 놓으면 살 희망은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아작내버리겠어!”서태영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에게 협박했다.유진우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배를 꽉 짓밟았다.“풉!”서태영은 전날 먹은 저녁밥까지 토하며 바지에 똥오줌을 지렸다.바닥이 노랗고 흰 물체로 어지럽혀졌고 악취가 번지기 시작했다.“너, 네가 감히...”서태영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토사물에 사레들려 기침을 마구 해댔다.“유진우! 너 미쳤어?! 서 경장이 다치면 우리 모두 여기서 죽어야 해!”이청아가 겁에 질려 그에게 말했다.“내가 손을 안 써도 이 인간은 절대 우릴 안 놔줄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이놈을 죽이는 게 낫지.”유진우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아직은 되돌릴 여지가 있어. 만약 네가 진짜 서 경장을 죽이면 그땐 우리도 죽음뿐이야!”이청아는 살짝 초조해졌다.유진우가 충동적으로 어리석은 짓을 꾸밀까 봐 너무 두려웠다.“들었어? 감히 날 건드리면 너뿐만 아니라 너의 온 가족이 죽게 될 거야!”서태영이 정색하며 으름장을 놓았다.“서 경장, 무슨 일이야?”이때 인기척 소리를 들은 우현이 한 무리 사람들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달려왔다.한편 그는 중상을 입고 바닥에
“멈춰!”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한 무리 정장 차림의 엘리트 경호원들이 손에 방망이를 들고 호탕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다들 뭐 하는 사람들이야? 감히 제멋대로 감방에 쳐들어와?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거야?!”서태영이 으름장을 놓았다.그는 지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유진우를 빨리 아작내야 했으니 감히 막아서는 자는 그의 원수나 다름없다!“서 경장, 카리스마가 넘치네요!”한 무리 사람들이 흩어지자 화끈한 몸매의 절세미인이 당찬 표정으로 기세등등하게 걸어들어왔다.“조선미 씨?”서태영은 그녀를 보더니 분노가 살짝 사그라들며 굳은 표정으로 변했다.“유진우, 너 운 좋은 줄 알아. 네 여자친구가 지금 널 구해주러 왔네?!”위풍당당한 조선미를 보자 이청아가 살짝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기쁘면서도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같은 여자로서 자랑스럽지만 그녀는 조선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다만 문제는 지금 조선미만이 유진우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선미 씨, 이 늦은 시간에 뭣 하러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데려왔어요? 이거 대체 무슨 뜻이죠?”서태영은 조선미 일행이 더는 다가오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았다.“흥! 무슨 낯짝으로 그걸 내게 물어요? 이유 불문하고 사람을 마구 체포하는 게 당신들 감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에요?”조선미가 코웃음 치며 쏘아붙였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네요.”서태영이 모른 척하며 시치미를 떼기 시작했다.“그래요? 좋아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당장 유진우 씨 풀어요. 난 오늘 진우 씨 데리러 왔어요. 얼른 안 풀면 나 무슨 짓 할지 몰라요!”조선미가 날카롭게 말했다.“풀다니요? 이 사람은 죄질이 엄중하고 명백한 증거까지 있는데 선미 씨가 풀라고 하면 풀어줘야 하나요? 이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법이 있긴 있어요?”서태영이 당당하게 말했다.좀 전에 유진우에게 얻어맞아 바지에 똥오줌을 지렸기에 그 원한을 삼킬 수 없었다.하여 조선미의 심기를 건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겠다는 말이 서경왕부 상공에 계속 맴돌았다.이미 공포에 질려 있던 반군들은 더욱 두려움에 떨었고 전투 의지를 완전히 잃었다.쨍그랑, 쨍그랑, 쨍그랑...점점 더 많은 병사들이 손에 든 무기를 던졌고 고집을 부리는 일부 병사들은 즉시 체포되어 포박당했다.왕부를 오랜 시간 공격했음에도 함락되지 않았고 성문을 지키던 군대도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네 명의 제후 중에 둘은 포로가 되어 잡혔고 둘은 도망쳤다. 대세를 잃을 그들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항복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하지만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목숨을 헛되이 버리려 하지 않았다.“난 방금 한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항복한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무기를 던진 반군을 보며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 강압적이지 않았고 강렬한 기세도 내뿜지 않았으며 오히려 말투가 부드러워졌다.항복한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왕비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많은 장교들이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왕비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장교들이 앞장서자 많은 병사들도 무릎을 꿇었다.몇 분 만에 조금 전까지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사람들의 무릎을 전부 꿇렸다.이의진의 자비에 모든 병사들은 진심으로 감동했다.“너희 둘은 어떡할 거야?”이의진이 뒤에 매달려 있는 진승민과 강윤기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왕부 대문에 매달려 있었는데 꼴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저... 저희도 항복하겠습니다.”진승민과 강윤기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왕부의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건 그들이 성문 밖에 주둔시킨 군대가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게다가 왕부를 포위 공격하던 선봉 부대는 모두 무릎을 꿇고 항복했고 그들 두 사람까지 인질이 되었다.이런 상황에서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항복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 희망이 남아 있었다.만약 대장군 유태범이 흑용군을 이끌고 도착한다면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
명령을 받은 후 진승민의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렸다.“그리고 너. 네 부하들도 전부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해.”이의진은 칼끝을 돌려 강윤기의 목에 겨누었다.살기등등한 이의진의 눈빛에 강윤기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무기 전부 내려놔.”쨍그랑, 쨍그랑, 쨍그랑...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렸고 강윤기가 통솔하던 병사들도 무기를 버렸다.전장의 약 60%에 달하는 군대가 전투를 포기했다. 나머지 40%는 무기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전투는 사기가 떨어지면 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이미 무기를 버렸는데 어찌 더 공격할 수 있겠는가?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제후가 이미 사라져 수만 명의 군대를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두머리가 사라졌으니 당연히 당황하는 수밖에.“다들 잘 듣거라. 너희들의 제후는 이미 도망갔고 너희들이 죽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어. 아직도 그런 사람을 위해 싸울 것인가? 너희들이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것이고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아. 그래서 무기를 내려놓으면 오늘 일어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물론 계속 저항하면 책임을 물을 것이고 그땐 모든 사람을 반역자로 취급할 것이다. 그럼 너희들은 참수될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심각한 처벌을 받을 것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판단하거라.”이의진의 강렬하고 힘찬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보이지 않는 위엄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제후님이 정말 도망갔어? 그럼 우린 어떡해?”“나한테 물으면 내가 누구한테 물어?”“이 싸움은 원래 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어. 왕실을 구원하고 범인을 잡긴 개뿔. 이건 그냥 반역이야. 이 일에 책임을 묻는다면 우린 모두 죽을 거라고.”“진 제후님과 강 제후님도 이미 항복했는데 우리도 항복할까? 왕비님께서 우리한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전장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의견이 분분했다.그들은 이미 전투 의지를 완전히 잃었지만 명령이
“됐어. 그만 좀 웅얼거려. 유태범이 왕이 될 수 있을지는 오늘 밤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제갈영군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듯 손을 크게 휘둘렀다.“여봐라. 반역자들을 잡아들여서 감시하거라!”“알겠습니다.”친위대가 즉시 앞으로 나와 노정한과 하원휘를 포박했다.“제갈영군. 우리 모두 한 지역의 제후이고 동등한 위치에 있는데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건 우리 체면을 너무 짓밟는 거 아니야?”노정한이 소리쳤다.“체면?”제갈영군이 코웃음을 쳤다.“이미 반역자로 잡혔는데 무슨 체면이 더 있어?”“제갈영군, 아직 승패가 결정된 것도 아니고 대세도 정해지지 않았어. 대장군님이 왕이 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어?”노정한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맞아. 세상일은 돌고 돈다고 했어. 지금 한껏 위세를 부려도 영원히 부릴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야. 그러니까 적당히 해.”하원휘가 맞장구를 쳤다.“너희들이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을지도 아직 모르는데 감히 내 앞에서 큰소리를 쳐? 정말 주제를 모르는구나. 여봐라, 어서 저 둘의 입을 막아라. 더 이상 시끄럽게 떠들지 않게.”제갈영군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너...”노정한과 하원휘가 뭐라 더 말하려던 그때 입을 강제로 틀어막은 바람에 웅얼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끌고 가.”제갈영군이 손을 휘두르자 부하들이 바로 그들을 차에 태웠다.제갈영군의 시선이 앞쪽의 유진우에게 향하더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어딘가 낯이 익은데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나?”“네, 만난 적이 있어요. 전 서경왕부 사람입니다.”유진우가 대답했다.“그래?”제갈영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왕부의 고수들은 내가 전부 알고 있는데 당신은 전혀 모르겠어. 대체 누구지?”“제 신분은 나중에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진우는 제갈영군에게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인사한 뒤 순식간에 사라졌다.“빠르네.”제갈영군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이 다 휘둥
하여 그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하하하... 이 지경이 됐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제갈영군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비웃었다.“그래. 그렇게 보고 싶다면 보여주지.”제갈영군은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휙.금빛 광선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더니 펑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터져버렸다.잠시 후 머나먼 길 끝에서 갑자기 일사불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고 리듬이 빠르면서도 동일했다.노정한과 하원휘는 발밑의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땅의 진동은 더욱 강해졌다.노정한과 하원휘는 움찔하더니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칠흑같이 어두운 그림자가 눈앞에 나타났다.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거리를 전부 덮고 있었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말... 말도 안 돼.”눈앞에 빽빽하게 서 있는 병사를 본 순간 노정한과 하원휘는 멍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요행을 바랐고 제갈영군이 겁을 주기 위해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다.그들의 십만 대군이 성문을 지키고 있어서 정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외부 군대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군대가 나타났다는 건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 바로 그들의 십만 대군이 정말로 항복했다는 것이다.제갈영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들이 스스로를 속여왔던 것이었다.“노정한, 하원휘, 너희들이 지금 본 건 단지 일부야. 우리 동맹에는 세 개의 군대가 더 있고 세 제후가 이끌고 각각 세 방향에서 왕부를 향해 빠르게 진격하고 있어. 내 예측이 맞다면 이미 왕부에 가까워졌고 어쩌면 너희 군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몰라. 너희는 이미 사방으로 포위됐어. 항복하지 않는다면 전멸되는 건 시간문제야. 그래서 아까 이미 대세가 기울었고 다시 역전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 거야.”제갈영군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심장을 쿡쿡 찌르는 그의 말에 두 사람은 얼굴이 다 창백
제갈영군의 말에 노정한과 하원휘는 충격에 빠졌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말도 안 돼.”하원휘가 단호하게 부인했다.“우리 십만 대군은 장비도 잘 갖춰져 있고 훈련도 잘되어 있는데 항복한다는 게 말이 돼?”“맞아.”노정한도 전혀 믿지 않고 소리쳤다.“설령 남쪽 4대 제후의 군대를 모두 합친다고 해도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우리 십만 대군을 무너뜨릴 수 있겠어? 지금 우리한테 겁주려고 과장한 게 분명해.”남쪽 4대 제후의 총 군사력은 20~30만 명에 불과했다. 전부 동원한다고 해도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의 10만 대군을 이길 수 없었다.그들의 대군은 이미 많은 방어 시설을 구축해 놓았기에 두세 배에 달하는 적을 상대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게다가 남쪽 4대 제후의 군대를 전부 동원하는 건 불가능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일부는 도시를 지켜야 했다.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이기는 건 더욱 어려웠다.“정면 돌파는 당연히 불가능하지.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제갈영군이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장교들은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어. 만약 그 사람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우리가 장교들의 친척이나 친구들을 군영에 데려와 설득한다면 결과가 어떨지 한번 예상해볼래?”그 말을 들은 순간 노정한과 하원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해졌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사실 그들이 왕성을 포위한 것 자체가 명분 없는 행동이었다. 비록 왕실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수많은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반역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소문이 빠르게 퍼지면서 군 내부에서도 이미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단지 군령 때문에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불안감의 씨앗은 이미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만약 속전속결로 대장군을 왕위에 올리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특히 방금 제갈영군이 말한 것처럼 장교들의 친척이나 친구를 데려
이런 말로 일반 백성을 속일 수는 있어도 제갈영군의 앞에서 이 수작을 부리는 건 그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제갈영군, 여기까지 온 이상 숨길 필요도 없을 것 같으니까 솔직하게 얘기할게.”하원휘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 진지하게 말했다.“위왕님께서 돌아가신 지금 위왕 자리가 비었어. 무릉 제후는 누가 새로운 서경왕이 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제갈영군이 차갑게 웃었다.“무릉 제후도 잘 알 텐데. 새로운 왕이 될만한 가장 적합한 분이 표기 대장군 유태범이라는 걸.”하원휘가 고개를 쳐들고 말을 이었다.“대장군님께서 서경왕이 되셔야 우린 더 나은 발전과 더 많은 영토, 그리고 더 많은 군사를 가질 수 있어. 이게 지금 대세고 절대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야. 무릉 제후는 현명한 사람이니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알 거라 믿어.”“나더러 너희들 편에 서라는 건가?”제갈영군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그래.”하원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대장군님께서는 그동안 세운 공이 많고 권력을 쥐고 있으며 능력까지 뛰어나 서경왕의 자리에 오르는 데 부족함이 없어. 좋은 새는 좋은 나무를 택하고 현명한 신하는 현명한 군주를 섬긴다고 하잖아. 대장군을 따른다면 앞날이 무궁무진한 건 물론이고 원하는 모든 걸 얻을 수 있어.”“맞아, 무릉 제후. 우린 조정의 신하로서 서로 원한도 없잖아. 현명한 왕을 섬긴다면 우린 분명 승승장구할 수 있을 거야.”노정한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들어보니 나쁘지 않군.”제갈영군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렇다면 제안에 동의한다는 건가?”하원휘는 제갈영군을 설득한 줄 알고 두 눈이 다 반짝였다.“무릉 제후가 무공이 뛰어나니 우리를 위해 저 자객을 처리해 준다면 대장군님께 좋게 얘기해줄게.”노정한이 유진우를 가리키며 말했다.“잠깐. 내가 언제 동의한다고 했어?”제갈영군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난 충신이야. 너희들 같은 배신자들과는 다르다고. 그러니까 너희들의 그 더러
유진우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살기등등하게 서 있었다.원래 검은색이었던 옷은 이미 핏빛으로 물들어 검붉게 변해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창궁검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가볍게 울렸는데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였다.“X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지?”앞을 막아선 유진우를 본 순간 노정한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친위대가 시간을 조금 더 끌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객이 벌써 포위망을 뚫고 추격해왔을 줄은 몰랐다.“진퇴양난이네. 큰일 났어, 이제.”하원휘도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들은 지금 고립된 상태였고 두 강자의 협공 앞에서 저항할 여지가 없었다.제갈영군은 그나마 신분 때문에 함부로 죽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객은 달랐다. 조금 전 학살을 벌이던 장면을 그들은 모두 똑똑히 봤다. 반항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노 제후님, 이제 어떡하죠?”하원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노정한이 한숨을 쉬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이미 궁지에 몰렸으니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다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죠.”“항복?”하원휘가 미간을 찌푸렸다.“제후님, 우린 반역죄를 저질렀어요. 항복하면 가볍게는 가산을 몰수당하고 유배를 떠나겠지만 심할 경우 사람들 앞에서 참수를 당할 수 있어요. 결과가 어떻든 우리 인생은 끝장난다고요.”“저도 당연히 알고 있죠. 근데 지금 다른 선택이 없지 않습니까.”노정한은 앞쪽에 살기등등한 기세로 서 있는 유진우와 뒤쪽에서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는 제갈영군을 번갈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항복하는 게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요. 게다가 대장군님께서 아직 나서지 않으셨으니 우리가 살아있으면 다시 역전할 기회도 있을 겁니다.”그 소리에 하원휘가 눈을 번뜩였다.“그렇네요. 우리한테는 아직 대장군님이 있어요. 아직 진 게 아니네요.”“항복합시다.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잠시 참고 견디자고요.”노정한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노정한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면서 쿵쾅거리는 마음을 진정했다.다행히 친위대가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빠르게 도망칠 수 있었다. 자객이 공격할 때까지 계속 가만히 있었더라면 그들도 진승민과 강윤기처럼 생포 당했을 것이다.그때가 되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목숨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너무 이상합니다. 왕부에 언제부터 이렇게 강한 사람이 있었죠? 수만 명에 달하는 대군조차도 그 사람을 막지 못했어요.”하원휘는 고민에 잠긴 듯 얼굴을 찌푸렸다.그들의 조사에 따르면 왕부에는 석태혁과 홍복홍이라는 두 강자뿐이었다.홍복홍은 이미 유태범의 손에 잡혔고 석태혁도 조금 전 모습을 드러냈다. 왕부에 정예 부대가 숨겨져 있다는 것도 그들이 예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자객은 예상 밖이었다. 단순한 자객이라면 몰라도 문제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수많은 군사를 뚫고 쉽게 우두머리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정도였다.이런 무서운 압박감은 홍복홍이나 석태혁에게서는 절대 받을 수 없었다.자객은 그들에게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돼버렸다.“이 일 빨리 대장군님께 보고하는 게 좋겠어요. 자객의 실력이 강해서 우두머리를 제거하는 작전을 실행한다면 방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노정한이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맞습니다. 지금 당장 대장군님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러 오시라고 연락해. 반드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객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후환이 생길지 몰라.”하원휘가 진지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조수석에 앉은 한 장교가 전화를 꺼내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했다.끼익.그런데 그때 차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타이어가 지면과 마찰하면서 자국 네 줄을 길게 남겼다.차 안에 있던 노정한과 하원휘는 몸이 앞으로 쏠린 나머지 머리를 앞 좌석 등받이에 부딪히고 말았다.“무슨 일이야? 왜 멈췄어?”노정한이 머리를 어루만지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제후님, 앞에 누군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운전하던 장교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두 사람이 눈을 크
유진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적을 잡으려면 먼저 우두머리를 잡아야 했다.쌍방이 전투를 시작할 때 먼저 유천우와 유만군이 대부분의 병사를 유인하도록 했다. 그다음 유진우가 틈을 타 적진에 침입하여 4대 제후를 생포하는 것이었다.그의 실력으로 수만 대군을 모두 죽일 수는 없지만 대군 중에서 우두머리의 머리를 베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4대 제후가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진우는 맨 처음 적진에 침입할 때 실력 대부분을 숨기고 약한 척했다. 진승민과 강윤기 주변의 친위대가 떨어져 나간 순간 갑자기 실력을 폭발시켜 단숨에 두 사람을 잡았다.이제 진승민과 강윤기는 붙잡혔고 남은 건 노정한과 하원휘뿐이었다. 마지막 두 제후만 처리하면 왕부 밖의 대군은 자연스럽게 물러날 것이다.“이제 너희 차례다.”유진우는 눈빛을 번뜩이며 두 제후의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어서 저놈을 막아라.”“여봐라. 절대 저놈이 가까이 오게 해선 안 된다.”노정한과 하원휘는 겁에 질려 연신 소리쳤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들은 그동안 전장에서 수많은 적을 홀로 상대하는 자를 본 적이 있었지만 아무리 강한 무사라도 포위되면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이 자객은 달랐다.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 강해졌고 피로한 기색조차 전혀 없었다.수만 대군이 한 사람을 막지 못하다니 실로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면 서경의 검선 백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왕부에 언제 이런 고수가 나타난 것일까?“제후님을 지켜라.”공격해오는 유진우를 아무도 막지 못하자 두 제후의 친위대는 즉시 방어 진형을 만들고 유진우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자객을 죽일 자신이 없었던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두 제후가 안전하게 탈출하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밖에 없었다.“제후님, 그만 보시고 빨리 차에 타십시오.”몇 명의 측근 장교들이 노정한과 하원휘를 차에 태웠다.왕부를 포위할 때 근처의 모든 거리는 이미 봉쇄되어 있었다. 차량이 거침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