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이 발칵 뒤집힌 그때 감방의 경장 사무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서 경장, 어떻게 됐어? 그 자식 그렇게 하겠대?”우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걔 선택은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내 손에 들어온 범인은 결국에는 굴복하게 돼 있으니까.”뚱보가 시가를 입에 물고 여유 있게 말했다.“서 경장이 직접 나서는데 당연히 문제없겠지. 하지만 길게 끌어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해결해 줘.”우현이 말했다.“뭐야? 지금 날 가르치려 드는 거야?”뚱보가 싸늘하게 째려보았다.“그럴 리가. 그 자식 배후에 든든한 조력자가 있어서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일이 복잡하게 될까 봐 그래.”우현은 재빨리 미안한 얼굴로 해명했다.“복잡할 게 뭐가 있어? 난 그저 원칙적으로 일을 처리할 뿐이야. 그리고 여긴 내 구역인데 누가 감히 날 건드려?”뚱보는 한껏 여유를 부렸다.“그럼 그럼. 서 경장은 황상수 님의 사위인데 다들 서 경장 앞에서는 굽신거리기 바쁘지.”우현이 그를 치켜올렸다.“하하! 그래도 넌 머리가 좋네.”뚱보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가 가장 의기양양 해하는 건 자신의 경장 자리가 아니라 황상수가 그의 장인어른이라는 것이었다. 황상수는 강능의 최고 권력자였다.“서 경장, 이건 안 어르신께서 준비하신 선물이니까 받아줘.”우현은 그에게 선물 상자를 건넸다. 선물 상자를 열자 금빛이 반짝이는 걸 본 뚱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하하, 안 어르신도 참, 뭘 이런 걸 다 준비하셨대? 돌아가서 어르신한테 감사하다고 전해줘.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실수 없이 제대로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그럼 서 경장만 믿을게!”우현과 서 경장이 한창 얘기를 나누던 그때 아까 그 소대장이 갑자기 들어왔다.“무슨 일이야?”뚱보가 재빨리 선물 상자 뚜껑을 닫았다.“경장님, 이씨 가문 사람들이 지금 밖에서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이청아라는 여자를 풀어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소대장이 사실대로 고했다.“흥! 그 여자는 풀어줄 수
블랙 하우스 안.유진우와 이청아는 등을 맞대고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결혼부터 이혼까지 두 사람은 간만에 이런 조용한 시간을 갖게 됐다.하여 미처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우리 오늘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드디어 이청아가 먼저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주변의 음침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환경이 그녀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주었다.게다가 생각만 해도 섬뜩한 서태영을 떠올리니 가슴이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허튼 생각 하지 마. 우린 무조건 안전하게 여길 벗어날 거야.”유진우가 위로했다.“만에 하나 못 나간다면 넌 유언 같은 거 있어?”이청아가 그윽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만약은 없어. 무슨 일 있으면 나가서 다시 얘기해.”유진우가 답했다.“우린 무려 안도균을 건드렸어. 그 인간 인맥과 능력으로 우릴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야.”이청아가 한숨을 내쉬었다.리얼 빅 보스 앞에서 그녀의 하찮은 실력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청아야,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아무리 어려운 일도 용감하게 맞섰잖아. 왜 우는소리부터 하는 건데?”유진우가 불쑥 정색하며 말했다.이청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석연하게 웃었다.“그러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어쩌면 또 다른 반전이 있을지도 몰라...”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철컥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블랙 하우스의 철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서태영이 덩치 좋은 몇몇 사내를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걸어왔다.“야 이 자식아! 시간이 다 됐어. 어떻게 선택할지 다 정했어?”서태영이 그를 호시탐탐 노려보았다.“그래. 난 거래 안 해.”유진우가 답했다.“뭐라고?”서태영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이 자식이,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솔직히 말할게. 이 사람들은 전부 교도소에서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이야! 게다가 이미 수년 동안 여자를 만져보지 못했지! 네가 감히 거절한다면 장담하건대 이 사람들이 네 앞에서 미친 듯이 네 여자친구를 괴롭힐 거야! 그때 가서 후
유진우가 발을 걷어차자 바닥에 있던 건장한 사내 한 명이 순식간에 튕겨 나가 인간 폭탄처럼 서태영의 몸에 부딪혔다.서태영은 비명을 지르고는 바닥에 쓰러져버렸다.“경고하는데 이 여자 건드리지 마.”유진우가 바짝 다가오며 서늘한 눈빛으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X발! 여긴 감방이야. 너 함부로 나오지 마!”서태영은 그에게 협박하며 뒷걸음질을 쳤다.“함부로 하면 어쩔 건데?”유진우가 싸늘하게 웃으며 서태영의 손을 짓밟았다.“으악!”서태영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극심한 고통에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유진우! 당장 멈춰!”이청아는 놀라서 사색이 되었다.두 사람이 무고하다 해도 손을 댄 이상 입이 열 개라도 해명할 길이 없다!“X발!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기는 해? 지금이라도 이 손 놓으면 살 희망은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아작내버리겠어!”서태영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에게 협박했다.유진우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배를 꽉 짓밟았다.“풉!”서태영은 전날 먹은 저녁밥까지 토하며 바지에 똥오줌을 지렸다.바닥이 노랗고 흰 물체로 어지럽혀졌고 악취가 번지기 시작했다.“너, 네가 감히...”서태영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토사물에 사레들려 기침을 마구 해댔다.“유진우! 너 미쳤어?! 서 경장이 다치면 우리 모두 여기서 죽어야 해!”이청아가 겁에 질려 그에게 말했다.“내가 손을 안 써도 이 인간은 절대 우릴 안 놔줄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이놈을 죽이는 게 낫지.”유진우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아직은 되돌릴 여지가 있어. 만약 네가 진짜 서 경장을 죽이면 그땐 우리도 죽음뿐이야!”이청아는 살짝 초조해졌다.유진우가 충동적으로 어리석은 짓을 꾸밀까 봐 너무 두려웠다.“들었어? 감히 날 건드리면 너뿐만 아니라 너의 온 가족이 죽게 될 거야!”서태영이 정색하며 으름장을 놓았다.“서 경장, 무슨 일이야?”이때 인기척 소리를 들은 우현이 한 무리 사람들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달려왔다.한편 그는 중상을 입고 바닥에
“멈춰!”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한 무리 정장 차림의 엘리트 경호원들이 손에 방망이를 들고 호탕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다들 뭐 하는 사람들이야? 감히 제멋대로 감방에 쳐들어와?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거야?!”서태영이 으름장을 놓았다.그는 지금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유진우를 빨리 아작내야 했으니 감히 막아서는 자는 그의 원수나 다름없다!“서 경장, 카리스마가 넘치네요!”한 무리 사람들이 흩어지자 화끈한 몸매의 절세미인이 당찬 표정으로 기세등등하게 걸어들어왔다.“조선미 씨?”서태영은 그녀를 보더니 분노가 살짝 사그라들며 굳은 표정으로 변했다.“유진우, 너 운 좋은 줄 알아. 네 여자친구가 지금 널 구해주러 왔네?!”위풍당당한 조선미를 보자 이청아가 살짝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기쁘면서도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같은 여자로서 자랑스럽지만 그녀는 조선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다만 문제는 지금 조선미만이 유진우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선미 씨, 이 늦은 시간에 뭣 하러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데려왔어요? 이거 대체 무슨 뜻이죠?”서태영은 조선미 일행이 더는 다가오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았다.“흥! 무슨 낯짝으로 그걸 내게 물어요? 이유 불문하고 사람을 마구 체포하는 게 당신들 감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에요?”조선미가 코웃음 치며 쏘아붙였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네요.”서태영이 모른 척하며 시치미를 떼기 시작했다.“그래요? 좋아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당장 유진우 씨 풀어요. 난 오늘 진우 씨 데리러 왔어요. 얼른 안 풀면 나 무슨 짓 할지 몰라요!”조선미가 날카롭게 말했다.“풀다니요? 이 사람은 죄질이 엄중하고 명백한 증거까지 있는데 선미 씨가 풀라고 하면 풀어줘야 하나요? 이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법이 있긴 있어요?”서태영이 당당하게 말했다.좀 전에 유진우에게 얻어맞아 바지에 똥오줌을 지렸기에 그 원한을 삼킬 수 없었다.하여 조선미의 심기를 건
1까지 센 후 안병서는 두말없이 방아쇠를 당겼다.“펑!”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총알이 서태영의 귀를 뚫었다.“으악!”서태영은 비명을 지르며 피가 철철 흐르는 귀를 감싸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 그는 쉴 새 없이 입을 나불거렸다.“드디어 미쳤어! 진짜 총을 쏘다니?!”그는 안병서가 단지 겁주는 거라고 여겼는데 진짜 총을 쏠 줄이야!“다음엔 귀로 끝나지 않을 거야.”안병서는 총구를 움직이며 차갑게 말했다.“마지막으로 물을게. 풀어줄 거야 말 거야?!”“너, 너 정말...”서태영은 식겁하여 몸을 벌벌 떨었다.안병서가 충동적으로 진짜 그를 쏴죽일까 봐 너무 두려웠다.서태영이 풀어줄지 말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문 앞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곧이어 백발의 노인이 경호팀 한 팀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왔다.“황상수?!”순간 감방 전체가 고요한 정적에 빠졌다.눈앞의 이 노인은 이 도시의 오너이자 강능에서 공식인정한 최고 대표이다!만인이 우러러보는 진정한 빅 보스이다!“하하, 황상수 씨 왔네. 유진우! 넌 이제 끝장이야! 선미 씨랑 안 회장을 움직일 수 있으면 뭐해? 황상수 씨가 계신 한 오늘은 아무도 널 못 구해!”황상수가 나타나자 전에 겁에 질려있던 우현이 불쑥 미친 듯이 웃어댔다.마치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말이다.조선미와 안병서가 그에게 준 압력이 너무 커서 오늘 밤에 과로사로 죽을 줄 알았다.다행히 황상수가 제때 도착하여 그의 뒷배가 되어줄 것 같았다.“안 회장! 저 자식 때문에 날 때리고 총까지 겨눠?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군! 인제 우리 장인어른이 왔으니 당신 어떻게 설명할지 지켜보겠어!”서태영이 사악한 미소를 날리며 표독스럽게 말했다.‘다들 방금 미쳐 날뛰었잖아? 이 도시의 오너가 왔어. 계속 날뛰어봐!’“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야! 하필이면 이때 나타나?!”조선미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상수는 장내를 휩쓸어버릴 실력을 지녔다.조선미와 안병서가 힘을 합쳐도 그에게 살짝 뒤처진다.가장 중요한
“망했어... 이젠 끝장이야!”서태영이 체포되자 우현은 벼락을 맞은 듯 사색이 되었다.황상수의 등장부터 서태영의 체포까지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단 하나 명확한 건 황상수가 인정사정없이 사위까지 체포했다는 사실이다.동아줄로 여겼던 장인어른이 순식간에 목숨을 위협하는 악마가 돼버렸다.세상사 한 치 앞도 헤아릴 수가 없다!우현은 넋 놓고 있다가 고개 돌려 무덤덤한 표정의 유진우를 힐긋 쳐다봤다.처음부터 끝까지 유진우는 이 모든 걸 짐작이라도 한 듯 줄곧 덤덤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자식, 대체 정체가 뭐야? 황상수까지 이토록 겁에 질리게 하다니? 안도균, 너 대체 무슨 괴물을 건드린 거냐고?!’“그리고 이 사람들도 싹 다 체포해!”황상수의 명령 하에 우현 일행도 전부 체포됐다.함께 역경을 물리쳤던 두 친구는 후회가 밀려와 눈만 멀뚱거렸다.오늘 본인들이 끝장났다는 걸 체감한 듯싶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갑자기 판이 뒤바뀌자 조선미도 어안이 벙벙했다.황상수가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일이 번거로워질 거로 여겼다.그런데 정작 황상수는 유진우를 난처하게 굴지 않았을뿐더러 도리어 서태영을 체포하다니...가족도 전혀 봐주지 않는 그의 행동이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나 잘못 본 거 아니지? 황상수 씨가... 우릴 돕고 있어?!”이청아도 못 믿겠다는 듯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황상수와 서태영의 관계를 알게 된 후 그녀는 내심 불안했다.심지어 본인과 유진우가 함께 끝장날 거로 여겼다.그런데 정작 결과는 입이 쩍 벌어지게 했다.설마 황상수가 이토록 정의롭고 청렴한 관직자란 말인가?“자네가 바로 유진우인가? 역시 듣던 대로 인물이 출중하군.”모든 걸 해결한 황상수가 유진우의 앞으로 걸어갔다.근엄한 얼굴에 드디어 한줄기 미소가 드러났다.“처음 뵙겠습니다, 황상수 씨.”유진우가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오늘 일은 실로 미안하게 됐네. 다
그 시각, 모 정원의 별장 안에서.안도균이 한창 화려한 옷차림의 젊은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그 남자의 뒤엔 도복을 입은 여자 호위 두 명이 서 있었다.여자 호위는 허리에 장검을 차고 늠름하게 서 있었는데 아무도 선뜻 다가가지 못할 아우라를 내뿜었다.“도균 씨가 말한 우금환이 그렇게 대단해요?”화려한 옷차림의 남자가 커피잔을 들고 먼저 질문을 건넸다.“그렇다니까요, 경준 씨. 제가 직접 경험해봤는데 아주 대단해요.”안도균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얼마 전에 갑자기 내상을 입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우금환 한 알을 먹고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어요. 만병을 치료하는 알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말로만 들어선 짐작이 안 가네요. 물건 어디 있어요? 일단 한번 볼게요.”화려한 남자가 서서히 손을 내밀었다.“우금환이 워낙 진귀하다 보니 저에게 아직 재고가 없어요.”“재고도 없으면서 한밤중에 왜 날 이리로 불렀어요? 지금 날 놀려요?!”진경준이 싸늘하게 말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경준 씨, 제가 어찌 감히 경준 씨를 놀리겠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이미 사람을 보내서 약 처방을 구해오라고 했으니 곧 있으면 도착할 겁니다.”안도균이 웃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감히 현무문을 농락했다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할지는 본인이 더 잘 아실 거예요!”진경준이 으름장을 놓았다.“당연하죠. 약 처방만 얻으면 제가 바로 제작해서 첫 번째로 생산된 우금환을 전부 경준 씨에게 드릴게요.”안도균이 웃으며 아양을 떨었다.“그래요, 역시 일 처사가 깔끔하네요.”진경준이 흡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그럼 나도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안도균 씨에 관한 미담을 몇 마디 해야겠어요. 혹시 알아요? 아버지가 기쁜 마음에 도균 씨를 높은 자리에 올리실지!”“고마워요, 경준 씨!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을게요!”안도균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전에 그는 직접 조사에 나섰는데 우금환이 내상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무사의 수련에도 엄청난 도움을 준다고 했다.이 약재는
“안도균, 당장 나와!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그의 고함이 천둥처럼 정원 상공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이제 막 문 앞에 다다른 안도균이 그의 목소리를 듣더니 울화가 치밀었다.“어떤 바보가 감히 내 저택에서 설쳐대?!”안도균이 씩씩거리며 걸어 나오더니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유진우를 보자 살짝 놀란 듯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너였어... 너 이 녀석 이미 체포된 거 아니야? 어떻게 또 도망쳐 나왔지?”안도균이 서태영을 매수하여 유진우를 감방에 처넣었다.제아무리 조선미가 지켜준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 유진우가 탈출해 나올 수가 없다.“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운 거 너 맞지?”유진우가 차갑게 물었다.“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이미 답이 정해진 거 아니야?”안도균이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맞아, 내가 그렇게 했어! 그러게 누가 너더러 눈치 없이 굴래? 이미 기회를 많이 줬는데 네가 소중히 여기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이런 하책을 댈 수밖에 없지!”“그래, 인정하면 된 거야.”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네게 속죄할 시간을 줄게. 스스로 두 팔을 자르고 강능에서 썩 꺼져. 영원히 돌아오지 마. 그렇게 하면 나도 더는 캐묻지 않을게.”“스스로 두 팔을 잘라? 강능에서 꺼져?”안도균은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박장대소했다.“야 이 자식아! 너 약 잘못 먹었어?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딴 식으로 말을 뱉어? 조선미가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네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아마도 유진우가 조선미의 도움을 받고 감방에서 나온 거로 여기는 듯싶었다.“그럼 내 제안을 거부하는 거네?”유진우가 싸늘하게 되물었다.“이 새끼가!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돼? 네가 제멋대로 우리 집에 쳐들어왔어. 지금 널 죽여도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해! 물론, 내가 워낙 인자하다 보니 네게 살 기회를 한 번 줄게. 우금환의 처방을 내놓는다면 네 목숨을 한 번 살려줄 거야.”안도균이 실눈을 뜨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겠다는 말이 서경왕부 상공에 계속 맴돌았다.이미 공포에 질려 있던 반군들은 더욱 두려움에 떨었고 전투 의지를 완전히 잃었다.쨍그랑, 쨍그랑, 쨍그랑...점점 더 많은 병사들이 손에 든 무기를 던졌고 고집을 부리는 일부 병사들은 즉시 체포되어 포박당했다.왕부를 오랜 시간 공격했음에도 함락되지 않았고 성문을 지키던 군대도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네 명의 제후 중에 둘은 포로가 되어 잡혔고 둘은 도망쳤다. 대세를 잃을 그들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항복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하지만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목숨을 헛되이 버리려 하지 않았다.“난 방금 한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항복한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무기를 던진 반군을 보며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 강압적이지 않았고 강렬한 기세도 내뿜지 않았으며 오히려 말투가 부드러워졌다.항복한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왕비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많은 장교들이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왕비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장교들이 앞장서자 많은 병사들도 무릎을 꿇었다.몇 분 만에 조금 전까지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사람들의 무릎을 전부 꿇렸다.이의진의 자비에 모든 병사들은 진심으로 감동했다.“너희 둘은 어떡할 거야?”이의진이 뒤에 매달려 있는 진승민과 강윤기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왕부 대문에 매달려 있었는데 꼴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저... 저희도 항복하겠습니다.”진승민과 강윤기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왕부의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건 그들이 성문 밖에 주둔시킨 군대가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게다가 왕부를 포위 공격하던 선봉 부대는 모두 무릎을 꿇고 항복했고 그들 두 사람까지 인질이 되었다.이런 상황에서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항복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 희망이 남아 있었다.만약 대장군 유태범이 흑용군을 이끌고 도착한다면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
명령을 받은 후 진승민의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렸다.“그리고 너. 네 부하들도 전부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해.”이의진은 칼끝을 돌려 강윤기의 목에 겨누었다.살기등등한 이의진의 눈빛에 강윤기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무기 전부 내려놔.”쨍그랑, 쨍그랑, 쨍그랑...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렸고 강윤기가 통솔하던 병사들도 무기를 버렸다.전장의 약 60%에 달하는 군대가 전투를 포기했다. 나머지 40%는 무기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전투는 사기가 떨어지면 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이미 무기를 버렸는데 어찌 더 공격할 수 있겠는가?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제후가 이미 사라져 수만 명의 군대를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두머리가 사라졌으니 당연히 당황하는 수밖에.“다들 잘 듣거라. 너희들의 제후는 이미 도망갔고 너희들이 죽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어. 아직도 그런 사람을 위해 싸울 것인가? 너희들이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것이고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아. 그래서 무기를 내려놓으면 오늘 일어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물론 계속 저항하면 책임을 물을 것이고 그땐 모든 사람을 반역자로 취급할 것이다. 그럼 너희들은 참수될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심각한 처벌을 받을 것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판단하거라.”이의진의 강렬하고 힘찬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보이지 않는 위엄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제후님이 정말 도망갔어? 그럼 우린 어떡해?”“나한테 물으면 내가 누구한테 물어?”“이 싸움은 원래 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어. 왕실을 구원하고 범인을 잡긴 개뿔. 이건 그냥 반역이야. 이 일에 책임을 묻는다면 우린 모두 죽을 거라고.”“진 제후님과 강 제후님도 이미 항복했는데 우리도 항복할까? 왕비님께서 우리한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전장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의견이 분분했다.그들은 이미 전투 의지를 완전히 잃었지만 명령이
“됐어. 그만 좀 웅얼거려. 유태범이 왕이 될 수 있을지는 오늘 밤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제갈영군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듯 손을 크게 휘둘렀다.“여봐라. 반역자들을 잡아들여서 감시하거라!”“알겠습니다.”친위대가 즉시 앞으로 나와 노정한과 하원휘를 포박했다.“제갈영군. 우리 모두 한 지역의 제후이고 동등한 위치에 있는데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건 우리 체면을 너무 짓밟는 거 아니야?”노정한이 소리쳤다.“체면?”제갈영군이 코웃음을 쳤다.“이미 반역자로 잡혔는데 무슨 체면이 더 있어?”“제갈영군, 아직 승패가 결정된 것도 아니고 대세도 정해지지 않았어. 대장군님이 왕이 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어?”노정한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맞아. 세상일은 돌고 돈다고 했어. 지금 한껏 위세를 부려도 영원히 부릴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야. 그러니까 적당히 해.”하원휘가 맞장구를 쳤다.“너희들이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을지도 아직 모르는데 감히 내 앞에서 큰소리를 쳐? 정말 주제를 모르는구나. 여봐라, 어서 저 둘의 입을 막아라. 더 이상 시끄럽게 떠들지 않게.”제갈영군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너...”노정한과 하원휘가 뭐라 더 말하려던 그때 입을 강제로 틀어막은 바람에 웅얼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끌고 가.”제갈영군이 손을 휘두르자 부하들이 바로 그들을 차에 태웠다.제갈영군의 시선이 앞쪽의 유진우에게 향하더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어딘가 낯이 익은데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나?”“네, 만난 적이 있어요. 전 서경왕부 사람입니다.”유진우가 대답했다.“그래?”제갈영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왕부의 고수들은 내가 전부 알고 있는데 당신은 전혀 모르겠어. 대체 누구지?”“제 신분은 나중에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진우는 제갈영군에게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인사한 뒤 순식간에 사라졌다.“빠르네.”제갈영군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이 다 휘둥
하여 그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하하하... 이 지경이 됐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제갈영군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비웃었다.“그래. 그렇게 보고 싶다면 보여주지.”제갈영군은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휙.금빛 광선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더니 펑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터져버렸다.잠시 후 머나먼 길 끝에서 갑자기 일사불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고 리듬이 빠르면서도 동일했다.노정한과 하원휘는 발밑의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땅의 진동은 더욱 강해졌다.노정한과 하원휘는 움찔하더니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칠흑같이 어두운 그림자가 눈앞에 나타났다.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거리를 전부 덮고 있었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말... 말도 안 돼.”눈앞에 빽빽하게 서 있는 병사를 본 순간 노정한과 하원휘는 멍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요행을 바랐고 제갈영군이 겁을 주기 위해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다.그들의 십만 대군이 성문을 지키고 있어서 정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외부 군대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군대가 나타났다는 건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 바로 그들의 십만 대군이 정말로 항복했다는 것이다.제갈영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들이 스스로를 속여왔던 것이었다.“노정한, 하원휘, 너희들이 지금 본 건 단지 일부야. 우리 동맹에는 세 개의 군대가 더 있고 세 제후가 이끌고 각각 세 방향에서 왕부를 향해 빠르게 진격하고 있어. 내 예측이 맞다면 이미 왕부에 가까워졌고 어쩌면 너희 군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몰라. 너희는 이미 사방으로 포위됐어. 항복하지 않는다면 전멸되는 건 시간문제야. 그래서 아까 이미 대세가 기울었고 다시 역전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 거야.”제갈영군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심장을 쿡쿡 찌르는 그의 말에 두 사람은 얼굴이 다 창백
제갈영군의 말에 노정한과 하원휘는 충격에 빠졌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말도 안 돼.”하원휘가 단호하게 부인했다.“우리 십만 대군은 장비도 잘 갖춰져 있고 훈련도 잘되어 있는데 항복한다는 게 말이 돼?”“맞아.”노정한도 전혀 믿지 않고 소리쳤다.“설령 남쪽 4대 제후의 군대를 모두 합친다고 해도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우리 십만 대군을 무너뜨릴 수 있겠어? 지금 우리한테 겁주려고 과장한 게 분명해.”남쪽 4대 제후의 총 군사력은 20~30만 명에 불과했다. 전부 동원한다고 해도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의 10만 대군을 이길 수 없었다.그들의 대군은 이미 많은 방어 시설을 구축해 놓았기에 두세 배에 달하는 적을 상대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게다가 남쪽 4대 제후의 군대를 전부 동원하는 건 불가능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일부는 도시를 지켜야 했다.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이기는 건 더욱 어려웠다.“정면 돌파는 당연히 불가능하지.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제갈영군이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장교들은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어. 만약 그 사람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우리가 장교들의 친척이나 친구들을 군영에 데려와 설득한다면 결과가 어떨지 한번 예상해볼래?”그 말을 들은 순간 노정한과 하원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해졌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사실 그들이 왕성을 포위한 것 자체가 명분 없는 행동이었다. 비록 왕실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수많은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반역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소문이 빠르게 퍼지면서 군 내부에서도 이미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단지 군령 때문에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불안감의 씨앗은 이미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만약 속전속결로 대장군을 왕위에 올리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특히 방금 제갈영군이 말한 것처럼 장교들의 친척이나 친구를 데려
이런 말로 일반 백성을 속일 수는 있어도 제갈영군의 앞에서 이 수작을 부리는 건 그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제갈영군, 여기까지 온 이상 숨길 필요도 없을 것 같으니까 솔직하게 얘기할게.”하원휘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 진지하게 말했다.“위왕님께서 돌아가신 지금 위왕 자리가 비었어. 무릉 제후는 누가 새로운 서경왕이 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제갈영군이 차갑게 웃었다.“무릉 제후도 잘 알 텐데. 새로운 왕이 될만한 가장 적합한 분이 표기 대장군 유태범이라는 걸.”하원휘가 고개를 쳐들고 말을 이었다.“대장군님께서 서경왕이 되셔야 우린 더 나은 발전과 더 많은 영토, 그리고 더 많은 군사를 가질 수 있어. 이게 지금 대세고 절대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야. 무릉 제후는 현명한 사람이니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알 거라 믿어.”“나더러 너희들 편에 서라는 건가?”제갈영군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그래.”하원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대장군님께서는 그동안 세운 공이 많고 권력을 쥐고 있으며 능력까지 뛰어나 서경왕의 자리에 오르는 데 부족함이 없어. 좋은 새는 좋은 나무를 택하고 현명한 신하는 현명한 군주를 섬긴다고 하잖아. 대장군을 따른다면 앞날이 무궁무진한 건 물론이고 원하는 모든 걸 얻을 수 있어.”“맞아, 무릉 제후. 우린 조정의 신하로서 서로 원한도 없잖아. 현명한 왕을 섬긴다면 우린 분명 승승장구할 수 있을 거야.”노정한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들어보니 나쁘지 않군.”제갈영군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렇다면 제안에 동의한다는 건가?”하원휘는 제갈영군을 설득한 줄 알고 두 눈이 다 반짝였다.“무릉 제후가 무공이 뛰어나니 우리를 위해 저 자객을 처리해 준다면 대장군님께 좋게 얘기해줄게.”노정한이 유진우를 가리키며 말했다.“잠깐. 내가 언제 동의한다고 했어?”제갈영군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난 충신이야. 너희들 같은 배신자들과는 다르다고. 그러니까 너희들의 그 더러
유진우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살기등등하게 서 있었다.원래 검은색이었던 옷은 이미 핏빛으로 물들어 검붉게 변해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창궁검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가볍게 울렸는데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였다.“X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지?”앞을 막아선 유진우를 본 순간 노정한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친위대가 시간을 조금 더 끌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객이 벌써 포위망을 뚫고 추격해왔을 줄은 몰랐다.“진퇴양난이네. 큰일 났어, 이제.”하원휘도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들은 지금 고립된 상태였고 두 강자의 협공 앞에서 저항할 여지가 없었다.제갈영군은 그나마 신분 때문에 함부로 죽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객은 달랐다. 조금 전 학살을 벌이던 장면을 그들은 모두 똑똑히 봤다. 반항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노 제후님, 이제 어떡하죠?”하원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노정한이 한숨을 쉬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이미 궁지에 몰렸으니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다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죠.”“항복?”하원휘가 미간을 찌푸렸다.“제후님, 우린 반역죄를 저질렀어요. 항복하면 가볍게는 가산을 몰수당하고 유배를 떠나겠지만 심할 경우 사람들 앞에서 참수를 당할 수 있어요. 결과가 어떻든 우리 인생은 끝장난다고요.”“저도 당연히 알고 있죠. 근데 지금 다른 선택이 없지 않습니까.”노정한은 앞쪽에 살기등등한 기세로 서 있는 유진우와 뒤쪽에서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는 제갈영군을 번갈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항복하는 게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요. 게다가 대장군님께서 아직 나서지 않으셨으니 우리가 살아있으면 다시 역전할 기회도 있을 겁니다.”그 소리에 하원휘가 눈을 번뜩였다.“그렇네요. 우리한테는 아직 대장군님이 있어요. 아직 진 게 아니네요.”“항복합시다.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잠시 참고 견디자고요.”노정한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노정한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면서 쿵쾅거리는 마음을 진정했다.다행히 친위대가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빠르게 도망칠 수 있었다. 자객이 공격할 때까지 계속 가만히 있었더라면 그들도 진승민과 강윤기처럼 생포 당했을 것이다.그때가 되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목숨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너무 이상합니다. 왕부에 언제부터 이렇게 강한 사람이 있었죠? 수만 명에 달하는 대군조차도 그 사람을 막지 못했어요.”하원휘는 고민에 잠긴 듯 얼굴을 찌푸렸다.그들의 조사에 따르면 왕부에는 석태혁과 홍복홍이라는 두 강자뿐이었다.홍복홍은 이미 유태범의 손에 잡혔고 석태혁도 조금 전 모습을 드러냈다. 왕부에 정예 부대가 숨겨져 있다는 것도 그들이 예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자객은 예상 밖이었다. 단순한 자객이라면 몰라도 문제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수많은 군사를 뚫고 쉽게 우두머리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정도였다.이런 무서운 압박감은 홍복홍이나 석태혁에게서는 절대 받을 수 없었다.자객은 그들에게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돼버렸다.“이 일 빨리 대장군님께 보고하는 게 좋겠어요. 자객의 실력이 강해서 우두머리를 제거하는 작전을 실행한다면 방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노정한이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맞습니다. 지금 당장 대장군님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러 오시라고 연락해. 반드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객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후환이 생길지 몰라.”하원휘가 진지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조수석에 앉은 한 장교가 전화를 꺼내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했다.끼익.그런데 그때 차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타이어가 지면과 마찰하면서 자국 네 줄을 길게 남겼다.차 안에 있던 노정한과 하원휘는 몸이 앞으로 쏠린 나머지 머리를 앞 좌석 등받이에 부딪히고 말았다.“무슨 일이야? 왜 멈췄어?”노정한이 머리를 어루만지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제후님, 앞에 누군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운전하던 장교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두 사람이 눈을 크
유진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적을 잡으려면 먼저 우두머리를 잡아야 했다.쌍방이 전투를 시작할 때 먼저 유천우와 유만군이 대부분의 병사를 유인하도록 했다. 그다음 유진우가 틈을 타 적진에 침입하여 4대 제후를 생포하는 것이었다.그의 실력으로 수만 대군을 모두 죽일 수는 없지만 대군 중에서 우두머리의 머리를 베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4대 제후가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진우는 맨 처음 적진에 침입할 때 실력 대부분을 숨기고 약한 척했다. 진승민과 강윤기 주변의 친위대가 떨어져 나간 순간 갑자기 실력을 폭발시켜 단숨에 두 사람을 잡았다.이제 진승민과 강윤기는 붙잡혔고 남은 건 노정한과 하원휘뿐이었다. 마지막 두 제후만 처리하면 왕부 밖의 대군은 자연스럽게 물러날 것이다.“이제 너희 차례다.”유진우는 눈빛을 번뜩이며 두 제후의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어서 저놈을 막아라.”“여봐라. 절대 저놈이 가까이 오게 해선 안 된다.”노정한과 하원휘는 겁에 질려 연신 소리쳤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들은 그동안 전장에서 수많은 적을 홀로 상대하는 자를 본 적이 있었지만 아무리 강한 무사라도 포위되면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이 자객은 달랐다.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 강해졌고 피로한 기색조차 전혀 없었다.수만 대군이 한 사람을 막지 못하다니 실로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면 서경의 검선 백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왕부에 언제 이런 고수가 나타난 것일까?“제후님을 지켜라.”공격해오는 유진우를 아무도 막지 못하자 두 제후의 친위대는 즉시 방어 진형을 만들고 유진우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자객을 죽일 자신이 없었던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두 제후가 안전하게 탈출하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밖에 없었다.“제후님, 그만 보시고 빨리 차에 타십시오.”몇 명의 측근 장교들이 노정한과 하원휘를 차에 태웠다.왕부를 포위할 때 근처의 모든 거리는 이미 봉쇄되어 있었다. 차량이 거침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