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추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그 영감탱이 얘기 하지 마. 지금은 우리가 힘을 합치는 게 제일 중요해. 날 밀어준다면 며칠 안에 황보 가문을 먹어버릴 수 있어.”“내가 언제 너와 힘을 합친댔어?”“응? 이 조건 혹하지 않아?”“친아버지도 가차 없이 죽이는 너 같은 짐승이랑 합작하는 건 내 명성만 망칠 뿐이야. 네가 한 모든 짓을 이미 모두에게 알렸으니 얌전히 죽을 준비나 해.”유진우가 차갑게 말하며 손을 휙 저었다. 이를 본 장 어르신이 쏜살같이 달려가 황보추를 넘어뜨렸다.“비겁한 놈! 방금 승낙했잖아! 왜 이러는 건데?”황보추가 절규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성공할 수 있었다. 권력, 지위, 명성은 모두 그의 것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유진우가 차가운 눈길로 말했다.“난 좋은 사람은 못 되어도 짐승 새끼까진 아니야. 이봐, 이자를 때려 기절시킨 뒤 끌고 가. 내일 아침 공개처형이다!”...다음 날 새벽.풍우 산장 문가.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무문, 음양종, 진혼파 등 각 세력과 파벌들이 모두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다. 강남과 강북 무사 연맹의 맹주들과 원로들도 분분히 이곳을 찾아왔다. 인여궁 사람들도 구경에 열을 올렸다.7일이 지났으니 이젠 황보용명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낼 때였다.“송 맹주님, 최근 유진우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데, 죄를 인정하기로 마음먹은 걸까요?”인파의 맨 앞줄에 선 소홍도가 흥미진진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송만규가 딱딱하게 물었다.“소 맹주님,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십니다?”“오해입니다, 소년 마스터의 명성이 자자한데, 저도 이런 천재는 무사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황보용명 선배님의 죽음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말씀하시기 전에 웃음기부터 거두시죠?”“제가 그랬나요? 아닌데요.”소홍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계속해서 미소 지었다. 유진우가 강북 무사 연맹의 사람이었다면 주저 없이 그를 지켰겠으나, 그는 하필이면 강남의 무사였고, 그를 살려뒀다간 추후 큰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풍우 산장 문가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 끝도 없는 인파가 풍우 산장으로 몰려들었다.사람들이 모두 도착했다. 유진우를 처리하려는 사람들, 구경꾼들, 그의 적수들까지.유진우가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이제 탄탄대로를 걸으리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희대의 천재 한 명이 몰락하고 말 것이었다.“유진우! 안에 있는 거 알아. 약속한 7일이 지났으니 이제 나와서 순순히 죽어줘!”황보 가문의 사람들이 크게 소리쳤다.쾅!이때 문이 천천히 열리고 몇 사람을 거느린 유진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이렇게나 많이 왔어요? 북적북적하니 좋네요.”유진우는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아닌 척하지 마! 내 할아버지를 죽였으니, 오늘은 너도 죽어줘야겠어!”황보곰이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래! 송 맹주님이 은혜를 베풀어 7일간 더 살려뒀지만, 오늘 죽음을 피하기는 어려울 거야!”이에 사람들이 하나둘 동조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황보용명을 존경했고, 한편으로는 유진우라는 이 소년 마스터를 질투했다.“유진우 씨, 억울하다고 해서 7일간 시간을 줬는데, 증거는 찾았습니까?”송만규가 물었다.“네, 범인을 찾았습니다.”“웃기시네! 네놈이 할아버지를 죽였잖아?”황보곰이 흥분해 말했다. 이에 유진우가 제스처를 취하며 평온하게 대답했다.“누가 범인인지는 곧 있으면 알게 될 겁니다.”유진우의 손짓과 함께 몸이 꽁꽁 묶인 채 복면이 씌워진 남자가 장 어르신에게 이끌려 나왔다.“흥! 아무 희생양이나 잡아 거짓으로 자백시키면 넘어가 줄 줄 알았어? 꿈 깨!”황보곰이 격분해 말했다. 황보춘도 차가운 표정으로 한 마디 더 얹었다.“유진우 씨!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어서 자백하세요. 쉽게 쉽게 갑시다!”“맞아요! 당장 자백해요!”황보 가문의 사람들이 분분히 거들었다. 모두 유진우가 희생양을 잡아 거짓 자백을 시킨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닌데?“먼저 범인을 확인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술렁댔다. 놀라움, 의문 등 많은 감정이 오갔지만, 그중에 가장 많은 건 의심이었다.“웃기지 마! 아빤 평생을 정정당당하게 살아오셨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경고하는데, 헛소리 하지 마!”황보곰이 소리쳤고 황보춘도 차갑게 말했다.“아버지를 해친 것도 모자라 이제 내 동생까지 모함하려 들다니, 이런 나쁜 놈!”“모함인지 아닌지는 황보추 씨가 직접 얘기하신답니다.”유진우는 황보추의 입에 쑤셔 넣은 재갈을 빼고는 그를 발로 퍽 차며 말했다.“어젯밤 있은 일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형님! 살려주세요! 어서요! 이 자식 절 잡아 각종 고문에 협박까지 했어요. 제가 자백하지 않으면 가문 전체를 죽이겠대요! 형님, 꼭 제 편을 들어주셔야 해요!”“개 같은 놈! 아직도 허튼짓이야?”장 어르신이 화가 나 손을 치켜들었지만, 유진우에게 제지당했다. 이 상황에서 때리기까지 한다면 더욱더 의심을 살 게 뻔했다.“유진우 씨! 정말 담이 크네요. 어서 셋째를 풀어줘요!”“당장 아버지를 풀어줘! 그렇지 않으면 이깟 산장 따위 싹 다 태워버릴 거야!”“풀어줘!”“풀어줘!”“풀어줘!”사람들이 흥분한 얼굴로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황보용명을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 황보추를 희생양으로 세우다니, 양심이 없어도 분수가 있지!“뿌린 대로 거둔다더니, 결국 벌을 받는구나!”인여궁 사람들이 속이 시원한 듯 크게 외쳤다. 유진우가 어려움에 부닥칠수록 그녀들은 기뻐했다. 이제 전세를 뒤집기는 어려워 보였다. 무도 마스터면 뭐해? 이제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갈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황보추가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하하하... 유진우, 경고했잖아? 나와 힘을 합친다면 죽을 일도 없었을 거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네 꼴을 봐. 공공의 적이 됐잖아? 네 선택에 따른 대가야! 어때? 절망적이지? 후회되지 않아? 내가 황보용명을 죽였는데, 그런데 뭐 어쩔 건데? 네가 날 잡았다 해도 그래서 뭐? 네 말을
쿵...땅에 떨어진 황보추의 머리를 본 모두가 조용해졌다. 방금까지도 소란스럽던 장내가 순간 고요해졌다.송만규와 소홍도 또한 깜짝 놀랐다. 황보 가문, 인여궁, 현무문, 음양종, 대비사, 진혼파 등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무사가 모두 입을 떡 벌렸다.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유진우가 이 정도로 무자비할 줄은 그 아무도 몰랐다.황보 가문이 보는 앞에서, 남북 무도 연맹이 보는 앞에서, 모든 무사가 주시하는 앞에서 황보추의 목을 잘라버렸다.이유도, 설명도 없이, 돼지를 잡는 백정처럼 깔끔하고 무자비한 손놀림이었다.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장내가 술렁거렸다.“유진우! 이렇게 공개적으로 살인을 해?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살인으로 입막음하려는 거잖아!”“네가 이런 놈이라는 건 세상 모두가 알아야 해!”“저놈을 죽여! 맹주님과 황보 가문의 복수를 해!”“...”사람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쳐댔다. 양아치인 건 알았지만 이런 짓을 하다니! 이런 놈은 남겨둘 수 없었다. 하루빨리 처리하는 게 현명하다!“이 자식, 스스로 제 무덤을 파네?”인여궁 사람들은 차갑게 웃으며 구경거리를 보는 듯 유진우를 쳐다봤다. 모두가 쳐다보는 앞에서 황보추를 죽이다니,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었다.정신을 차린 황보춘이 격분해 외쳤다.“짐승 같은 놈! 감히 셋째를 죽여? 오늘부로 황보 가문은 너와 전쟁이야!”“개자식! 아버지를 죽이다니, 오늘 너 죽고 나 죽자!”황보곰이 칼을 뽑아 들고 유진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가까이 가기도 전에 장 어르신의 주먹에 맞아 풀썩 쓰러졌다.“송 맹주님! 이 자식은 제 아버지를 죽였고, 이젠 제 동생까지 죽였습니다. 맹주로서 이런 놈을 가만히 내버려두실 겁니까?”황보춘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실력이 그보다 뛰어났다면 진작에 사람들을 이끌고 풍우 산장을 쓸어버렸을 것이다.“유진우 씨!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 나오면 당신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어요!”송만규가 화난 듯 외
유진우는 사방을 둘러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모두 보셨죠? 황보추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맹주 자리에 앉기 위해 친아버지까지 죽인 사람입니다. 이런 짐승을 살려둬도 되겠습니까?”그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가장 큰 소리로 얘기하던 황보 가문 또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황보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황보곰이 중얼댔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 아빠가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아니... 아니야!”자신의 아버지가 이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권력과 지위를 위해서 천륜까지 거스르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난 유진우가 범인일 줄 알았는데, 황보 가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 거네.”“친아버지를 죽이다니, 짐승 같은 놈!”“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의리 넘치던 셋째 도련님이 이런 사람일 줄 누가 알았겠어?”사람들이 쑥덕거렸다.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은 황보 가문에게로 옮겨갔다.이때 백수정이 의심의 화살을 던졌다.“잠깐! 황보추의 힘이 아주 약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무도 마스터를 암살할 수 있어요?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맞아요! 마스터만이 마스터를 죽일 수 있는데, 황보추가 무슨 힘으로 마스터를 죽여요? 누군가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희생양으로 황보추를 세운 건 아니에요?”차연주가 질세라 말을 꺼냈다. 유진우가 이렇게 위기를 벗어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모함일지라도 어떻게든 죄를 덮어씌워야 했다.“맞아! 황보추 실력에 어떻게 맹주님을 다치게 하겠어?”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또다시 의심을 시작했다. 무도 마스터는 신과도 같은 존재라, 일반 마스터들은 그들을 다치게 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암살이라니?의심되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유진우는 인여궁 쪽을 힐긋 쳐다보고는 설명했다.“황보추 한 사람만으론 당연히 안 되죠. 맹주님을 직접 죽인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송만규가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그게 누군데요?”“영살문 에이스 청부업자, 미야모토 코지로입니다.”
“뭐? 황보춘이라고?”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황보 가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아니겠지? 황보춘은 인품 좋고, 정직하기로 소문났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꾸밀 수가 있어?”“내 생각도 그래. 황보춘은 모두가 인정하는 보살이잖아.”“뭔가 잘못된 거 아냐?”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황보 가문 4대 호걸 중 대외의 평가가 가장 좋은 사람이 바로 황보춘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사교성이 좋고 의리가 있어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거지가 찾아온다 해도 한 끼 푸짐히 먹일 사람이었다. 그의 인품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황보춘은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화를 내기 시작했다.“무슨 소립니까? 유진우 씨! 난 당신과 엮인 적이 없는데, 왜 저를 모함하는 겁니까?”“모함인지 아닌지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아실 테지요. 황보추는 머리보다 의욕이 앞서는 사람인데, 홀로 맹주님의 암살을 계획하고 실천하고 제게 죄까지 덮어씌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보추는 그럴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황보추가 함정에 빠지고부터 스스로 자백할 때까지 보여준 모습은 너무 허술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이토록 치밀한 암살을 준비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사건을 자세히 조사했더니 역시나 배후가 있었다.황보춘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말 잘 맞추시죠. 언제는 셋째, 언제는 미야모토 코지로라더니, 이젠 제게 죄를 덮어씌우는 겁니까? 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자식! 허튼소리 말아! 족장님을 모함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황보 가문 사람들이 유진우를 질책했다. 황보용명이 죽은 뒤 황보춘이 뒷일을 정리하고 가문을 안정시켜 가문의 중심이 되었다.송만규가 물었다.“유진우 씨, 이렇게 얘기만 하고 끝날 게 아니라, 증거를 가져와야죠. 황보춘이 배후라는 증거가 있습니까?”“증거가 없다면 이런 말 하지도 않았죠. 여봐라, 그 자식들 몇 명을 끌어와!”유진우의 명령과 함께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이 쓰인 사람 몇 명이 강린파 제자들에게 끌려왔다. 복면과 상의를 벗기자, 그들 모두의 가슴에 특별한
황보춘이 담담하게 말했다.“맹주님, 편지는 조작할 수 있습니다. 서예가를 찾아 필적을 따라 해 편지를 위조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맞아! 유진우 당신이 일부러 모함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황보춘 씨, 정말 대단하네요. 아직도 발뺌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완벽히 지게 해 드리죠.”유진우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러자 강린파 제자들이 두 줄로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그 뒤에서 흰 수염에 흰 눈썹의 노인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노인을 본 사람들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 죽은 줄 알았던 황보용명이었다!“이, 이게 가능해? 맹주님은 돌아가신 거 아니었어?”“미친,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거야?”“이게 뭐야? 부활이라도 한 거야?”사람들은 아연실색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황보용명은 7일 전에 죽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장례까지 마쳤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살아난 거지? 영혼인 건가?“스, 스승님?”송만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소홍도가 당황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이럴 리 없어! 안 죽은 거야?”“부활하다니, 세상에!”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안, 안 죽었어?”황보춘이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까지 덤덤하던 그는 지금 공포에 질려 온몸을 덜덜 떨며 식은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맹주님, 이제 맹주님이 처리하실 차례입니다.”유진우가 예를 표하고는 자리를 내주었다.“못된 놈! 더 할 말이 남았냐?”황보용명이 서늘하게 물었다. 황보춘이 공포에 질려 대답했다.“주, 죽은 거 아니었어요? 왜 아직 살아있는 건데요?”“내가 죽은 척하지 않았으면 너 같은 버러지들을 잡을 수가 있었겠어?”“죽은 척했다고요? 어떻게요? 제가 직접 확인했어요!”황보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랜 시간 참고 참아 드디어 족장 자리에 오르나 했더니 이렇게 모든 게 끝나버렸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무도 마스터인데 너희들도 못 속이면, 몇십 년간 수련한 게 다 뭐가 돼?”“왜?
한바탕 쏟아낸 뒤 황보춘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엔 각종 감정으로 가득했다. 분노, 원한, 질투, 진한 아쉬움.그는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의 차질도 없이 완벽한 계획이었다. 황보용명을 죽이기만 한다면 그는 차세대 족장이 될 테고,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의 치밀한 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애초에 그의 계획에는 두 가지 결과밖에 없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족장이 되거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불행하게도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황보용명은 죽지 않았다. 그의 계획은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너무도 아쉬웠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하면 성공했을 텐데, 왜?“황보춘이 배후라니, 정말 상상도 못 했어.”“사람 좋아 보이더니 그게 다 꾸며낸 거였어?”“맹주님이 죽은 척하지 않았다면 이놈이 족장이 됐을 거잖아!”“...”정신이 거의 나간 황보춘을 보며 사람들은 분개했다. 얼마 전까지 황보춘의 편을 들었는데, 모두 황보춘에게 놀아난 꼴이었다.송만규가 크게 외쳤다.“이봐! 이 짐승놈을 묶어!”“네!”두 사람이 대답하고는 황보춘의 다리를 부러뜨려 꽁꽁 묶었다.“영감탱이! 죽어! 죽어!”황보춘은 정신이 나간 듯 외치고 있었다.“지하 감옥에 처넣고 잘 감시해. 내일 공개처형이다!”송만규가 명령을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해산시켰다.“진실은 이미 드러났으니 모두 돌아가시죠.”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하나둘 돌아갔다.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들의 첫 목표는 유진우였는데, 황보추와 황보춘의 악행이 수면 밖으로 드러났다. 황보 가문의 두 효자가 모든 사람을 속일 뻔했다.“송 맹주님, 강남 무도 연맹엔 정말 뛰어난 사람들이 많네요. 구경 잘 했습니다. 그럼, 이만.”소홍도는 의미심장하게 말하고는 강북 무도 연맹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자리를 떴다.백수정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흥! 또 저 자식을 놓치고 말았네, 아쉬워라.”“황보용명이 살아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운 좋기
“아직 절 기억해주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저 아직 살아있습니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성종의 과거사를 몰랐던 터라 갑자기 흥분한 모습을 보니 조금 의아했다.“살아있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은성종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벌써 10년이나 지났어요. 그사이 세자 전하께서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그러네요. 10년 동안 많은 게 변했습니다.”유진우는 감탄하며 말했다.10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10년 후에는 아버지가 암살당했다. 10년 사이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제후님, 아까 제 형을 보면 서경왕부를 전폭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형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약속을 어기진 않으실 거죠?”유천우가 떠보듯 물었다.“만약 세자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시겠다고 한다면 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자 전하가 왕의 자리에 앉도록 도와줄 거야.”은성종이 진지하게 말했다.조금 전까지 냉정하고 덤덤했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투지가 넘쳤고 온몸에서 전에는 본 적 없는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좋습니다. 제후님은 역시 약속을 잘 지키시네요.”유천우는 웃어 보이고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역시 형이 나서야 했어.’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은성종을 설득하지 못했는데 유진우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든 게 쉽게 해결되었다.비록 10년이 흘렀지만 유씨 가문 천재라는 명성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고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제후님, 제가 서경에 돌아온 사실을 아직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때까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유진우가 당부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겠습니다.”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은 그는 당연히 유장혁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위왕이 호룡각의 잔당들에게 살해당했고 유태범은 왕위를 빼앗으려 혈안이 되어있었다. 정말 여러 가지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왕위를 이을 생각이 없다면서 왜 싸우려는 건데?”은성종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전 서경왕이 될 자격이 부족하지만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유태범보다 더 어울려요.”유천우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게 누군데?”은성종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제 형님 유장혁입니다.”유천우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유장혁?”은성종은 실눈을 뜨더니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세자 전하께서 서경왕이 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실종된 지 10년이 넘었고 감감무소식이라는 거야.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왕위를 이을 수 있겠어?”“제 형님은 죽지 않았고 이미 서경에 돌아왔습니다. 서경왕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형님밖에 없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말로만 해서는 안 돼. 증거가 있어?”은성종이 물었다.만약 유장혁이 정말로 서경에 돌아왔다면 벌써 서경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하여 유천우가 단지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핑계를 대는 것이라 생각했다.“제후님, 증거를 드릴 수는 있는데 그 전에 물을 게 있어요. 만약 제 형님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실 겁니까?”유천우가 되물었다.“그건...”은성종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유천우가 하도 자신감이 넘쳐서 오히려 확신이 없어졌다.“제후님, 서경에는 좋은 왕이 필요합니다. 제 형님보다 더 서경왕에 적합한 사람은 없어요. 제후님도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유천우가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만난다면 널 도와줄게. 만나지 못하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야 할 거야.”은성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약속하는 겁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유진우를 돌아보았다.“형, 이젠 형이 나설 때가 됐어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본모습을 드러냈다.“당신은...”은성종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은성종은 유천우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자신과 유천우에게 술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술을 단숨에 마셨다.“좋은 술이군.”은성종은 혀를 차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유천우도 다그치진 않고 술을 다 마신 다음 은성종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기다렸다.“유태범이 나한테 손을 잡자고 하더라고. 엄청난 이익을 약속했지만 모두 거절했어.”이 말을 들은 유천우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어진 은성종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아직 너무 기뻐하진 마. 유태범의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너도 도울 생각은 없어.난 전쟁을 싫어해서 중립을 선택할 거야.”은성종이 솔직하게 말했다.“중립이라고요?”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바로 설득했다.“제후님, 서경의 일원으로서 서경이 무너지는 걸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난 능력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은성종이 고개를 내저었다.“그리고 난 야심이 없어서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어. 이런 권력 다툼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아. 내가 가진 작은 땅만 잘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은성종이 잠깐 멈칫하다가 또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너랑 표기 대장군 모두 유씨 가문의 핏줄이라 누가 서경왕이 되든 나한테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말이 반란이지, 그저 왕위 다툼일 뿐이야.”“그건...”유천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천우야, 난 성격이 솔직한 편이라 혹시 불쾌한 점이 있다면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은성종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제후님이 평화를 바라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제후님도 무사하지 못해요.”유천우가 다시 설득했다.“태평은 변경의 작은 도시이고 가난하고 가진 게 없어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여기까지 쳐들어올 일은 없어.”은성종이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미 유태범과도 합의했어. 내가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태평에는 절대 쳐들어오지 않겠다고.”“제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