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황보춘이라고?”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황보 가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아니겠지? 황보춘은 인품 좋고, 정직하기로 소문났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꾸밀 수가 있어?”“내 생각도 그래. 황보춘은 모두가 인정하는 보살이잖아.”“뭔가 잘못된 거 아냐?”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황보 가문 4대 호걸 중 대외의 평가가 가장 좋은 사람이 바로 황보춘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사교성이 좋고 의리가 있어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거지가 찾아온다 해도 한 끼 푸짐히 먹일 사람이었다. 그의 인품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황보춘은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화를 내기 시작했다.“무슨 소립니까? 유진우 씨! 난 당신과 엮인 적이 없는데, 왜 저를 모함하는 겁니까?”“모함인지 아닌지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아실 테지요. 황보추는 머리보다 의욕이 앞서는 사람인데, 홀로 맹주님의 암살을 계획하고 실천하고 제게 죄까지 덮어씌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보추는 그럴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황보추가 함정에 빠지고부터 스스로 자백할 때까지 보여준 모습은 너무 허술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이토록 치밀한 암살을 준비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사건을 자세히 조사했더니 역시나 배후가 있었다.황보춘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말 잘 맞추시죠. 언제는 셋째, 언제는 미야모토 코지로라더니, 이젠 제게 죄를 덮어씌우는 겁니까? 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자식! 허튼소리 말아! 족장님을 모함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황보 가문 사람들이 유진우를 질책했다. 황보용명이 죽은 뒤 황보춘이 뒷일을 정리하고 가문을 안정시켜 가문의 중심이 되었다.송만규가 물었다.“유진우 씨, 이렇게 얘기만 하고 끝날 게 아니라, 증거를 가져와야죠. 황보춘이 배후라는 증거가 있습니까?”“증거가 없다면 이런 말 하지도 않았죠. 여봐라, 그 자식들 몇 명을 끌어와!”유진우의 명령과 함께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이 쓰인 사람 몇 명이 강린파 제자들에게 끌려왔다. 복면과 상의를 벗기자, 그들 모두의 가슴에 특별한
황보춘이 담담하게 말했다.“맹주님, 편지는 조작할 수 있습니다. 서예가를 찾아 필적을 따라 해 편지를 위조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맞아! 유진우 당신이 일부러 모함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황보춘 씨, 정말 대단하네요. 아직도 발뺌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완벽히 지게 해 드리죠.”유진우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러자 강린파 제자들이 두 줄로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그 뒤에서 흰 수염에 흰 눈썹의 노인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노인을 본 사람들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 죽은 줄 알았던 황보용명이었다!“이, 이게 가능해? 맹주님은 돌아가신 거 아니었어?”“미친,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거야?”“이게 뭐야? 부활이라도 한 거야?”사람들은 아연실색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황보용명은 7일 전에 죽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장례까지 마쳤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살아난 거지? 영혼인 건가?“스, 스승님?”송만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소홍도가 당황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이럴 리 없어! 안 죽은 거야?”“부활하다니, 세상에!”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안, 안 죽었어?”황보춘이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까지 덤덤하던 그는 지금 공포에 질려 온몸을 덜덜 떨며 식은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맹주님, 이제 맹주님이 처리하실 차례입니다.”유진우가 예를 표하고는 자리를 내주었다.“못된 놈! 더 할 말이 남았냐?”황보용명이 서늘하게 물었다. 황보춘이 공포에 질려 대답했다.“주, 죽은 거 아니었어요? 왜 아직 살아있는 건데요?”“내가 죽은 척하지 않았으면 너 같은 버러지들을 잡을 수가 있었겠어?”“죽은 척했다고요? 어떻게요? 제가 직접 확인했어요!”황보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랜 시간 참고 참아 드디어 족장 자리에 오르나 했더니 이렇게 모든 게 끝나버렸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무도 마스터인데 너희들도 못 속이면, 몇십 년간 수련한 게 다 뭐가 돼?”“왜?
한바탕 쏟아낸 뒤 황보춘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엔 각종 감정으로 가득했다. 분노, 원한, 질투, 진한 아쉬움.그는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의 차질도 없이 완벽한 계획이었다. 황보용명을 죽이기만 한다면 그는 차세대 족장이 될 테고,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의 치밀한 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애초에 그의 계획에는 두 가지 결과밖에 없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족장이 되거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불행하게도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황보용명은 죽지 않았다. 그의 계획은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너무도 아쉬웠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하면 성공했을 텐데, 왜?“황보춘이 배후라니, 정말 상상도 못 했어.”“사람 좋아 보이더니 그게 다 꾸며낸 거였어?”“맹주님이 죽은 척하지 않았다면 이놈이 족장이 됐을 거잖아!”“...”정신이 거의 나간 황보춘을 보며 사람들은 분개했다. 얼마 전까지 황보춘의 편을 들었는데, 모두 황보춘에게 놀아난 꼴이었다.송만규가 크게 외쳤다.“이봐! 이 짐승놈을 묶어!”“네!”두 사람이 대답하고는 황보춘의 다리를 부러뜨려 꽁꽁 묶었다.“영감탱이! 죽어! 죽어!”황보춘은 정신이 나간 듯 외치고 있었다.“지하 감옥에 처넣고 잘 감시해. 내일 공개처형이다!”송만규가 명령을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해산시켰다.“진실은 이미 드러났으니 모두 돌아가시죠.”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하나둘 돌아갔다.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들의 첫 목표는 유진우였는데, 황보추와 황보춘의 악행이 수면 밖으로 드러났다. 황보 가문의 두 효자가 모든 사람을 속일 뻔했다.“송 맹주님, 강남 무도 연맹엔 정말 뛰어난 사람들이 많네요. 구경 잘 했습니다. 그럼, 이만.”소홍도는 의미심장하게 말하고는 강북 무도 연맹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자리를 떴다.백수정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흥! 또 저 자식을 놓치고 말았네, 아쉬워라.”“황보용명이 살아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운 좋기
송만규만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만규야, 뭐 해? 어서 돌아가.”황보용명이 담담하게 말했다. 송만규는 대답 없이 그를 훑어보고는 유진우에게 물었다.“유진우 씨, 이분은 어디서 데려온 겁니까?”“만규야, 그게 무슨 소리야?”“당신, 언제까지 연기할 거야?”“무엄하다! 감히 스승님께!”“흥! 당신 정체가 뭔지 한번 보자!”송만규는 차갑게 웃고는 황보용명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 뒤 뭔가 잘못됐다는 듯이 뒷걸음쳤다. 곧 잡히려 할 때, 유진우가 송만규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맹주님, 대화로 풉시다.”“못된 놈! 감히 스승님을 공격해? 이 배신자야!”“됐어요, 연기 그만 해요. 송 맹주님 이미 알아챘어요.”유진우가 뒤를 쳐다보며 경고했다. 그 말을 들은 황보용명의 얼굴에 분노가 사라지고 장난기 어린 웃음이 떠올랐다. 이어 쨍한 여자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무도 마스터는 역시 다르네요,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었는데도 가면인 걸 알아챌 줄은 몰랐어요.”그가 얼굴을 잡아당기자 황보용명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가히 절세미인이라 칭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설연홍이었다.송만규가 인상을 쓰고 말했다.“누굽니까?”“변신술 전문인 제 친구입니다. 황보춘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탁한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그렇군요. 좋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선택이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유진우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설연홍더러 황보용명으로 변장해 연기를 펼치게 했으니, 고인을 존중하지 않았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용건만 말하죠. 결백을 증명했으니, 저도 기쁩니다. 강남 무도 연맹은 당신 같은 젊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얼마 후면 이곳은 당신들의 무대가 될 겁니다.”“과찬입니다.”송만규가 뭔가 생각난 듯 약병 하나를 유진우에게 건넸다.“맞다. 이걸 까먹을 뻔했네요. 7일 탈명단의 해독제입니다. 어서 마셔요. 독이 뼈에까지 침투하면 후유증이
풍우 산장의 한 방 안.유진우는 보랏빛 얼굴을 하고 침대에 누워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몸속의 독소와 진기가 서로 맞부딪치며 치열하게 겨루고 있었다. 그의 코에서는 가끔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약왕 경철호는 침대 옆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조심스레 유진우의 몸에 침을 꽂아 독소를 빼내고 있었다.장 어르신, 설연홍, 황은아 등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7일 탈명단도 해독하지 못했는데 맹독 하나가 더 들어오다니, 불 난 집에 기름 뿌리는 격이었다.송만규는 강남 무도 연맹을 거느리고 소홍도를 찾아 헤맸지만, 아직 소식이 없었다. 이제 모든 건 약왕에게 달렸다.시간이 흐르며 경철호의 이마에는 땀이 돋아났고, 호흡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은바늘이 한 개씩 꽂히자, 유진우의 가슴에 일렁거리는 검은 기가 보였다.침을 꽂은 후 경철호는 유진우에게 특효 해독단을 먹였다. 이는 많은 독을 해독할 수 있었지만, 이 희귀한 독약에는 약간의 억제 작용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경철호가 몸을 일으켰다.“후...”“선배님! 어떻게 됐어요? 괜찮은 거죠?”황은아가 급히 물었다. 그녀는 수련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유진우의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유 장로님의 몸에는 7일 탈명단과 화기산, 두 가지 독이 있는데, 그 두 가지 독이 만나 더 큰 독성을 내뿜고 있어요.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7일 탈명단도 해독하기 힘든데 거기다 무도 고수를 상대하는 화기산까지 더해졌으니 설상가상이었다. 유진우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약왕이시잖아요. 의술이 고명하다며, 이런 것도 못 해요?”황은아는 당황했다. 유진우는 아버지를 제외하고 그녀에게 진심으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선배님! 돈은 얼마든지 상관없으니, 살려만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장 어르신이 그대로 바닥에 꿇어앉았다.“부탁드립니다!”다른 사람들도 질세라 꿇어앉았다.“이러실 필요 없어요. 유 장로님은 약신궁 사람
“조선미 씨의 심정은 백번 이해하나 독은 이미 유 장로의 뼛속까지 파고 들어갔어요. 제가 여러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다 쓸모가 없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조안태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유진우를 중히 여겼고 심지어 약신왕 자리까지 물려주려 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해독이 불가능한 독에 중독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말... 말도 안 돼요.”당황한 조선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만약 약신왕마저 치료할 방법이 없다면 대체 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잠깐만요!”그때 조선미의 뇌리에 문득 뭔가 떠올랐다.“선배님, 약신궁에 송장꽃이라는 아주 신기한 약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법과 함께 사용하면 기사회생한다던데 그게 정말입니까?”“송장꽃이요?”조선미의 말에 조안태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선미 씨, 송장꽃은 불길한 물건이라서 절대 사용해서는 안 돼요.”“왜 안 되는데요? 선배님 설마 저희가 살 돈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조선미는 애간장이 탔다.“돈이 문제가 아니에요.”조안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설명했다.“송장꽃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좋은 약이 아니라 아주 맹독성 물질이에요. 사용 조건도 까다로워서 의학계에서는 금지 약품으로 지정되었어요.”“좋은 약이든 독약이든 진우 씨만 살리면 돼요. 선배님은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조선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유 장로의 지금 상태로 송장꽃을 사용한다면 다른 사람이 목숨을 걸어야 해요. 그러니까 체내의 모든 독소를 다른 사람에게 옮겨서 목숨과 목숨을 바꿔야만 일말의 생존 기회가 생긴단 말이죠.”조안태가 한탄하며 말했다.“다른 사람의 목숨과 바꾼다고요?”그의 말에 적지 않은 사람의 표정이 급변했다. 치료하는 대가가 상상 이상으로 컸다.“다른 사람의 목숨과 바꾸는 건 단지 기본적인 조건일 뿐이에요. 문제는 아무나 목숨을 바꿀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조안태가 계속하여 말했다.“목숨을 바꾸는 과정에서 희생하는 그 사람은 수만
“안녕, 내 사랑...”흐리멍덩한 의식 속 유진우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떠지지 않았다.몸이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에 빠진 듯 계속 밑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공포와 절망이 유진우를 덮쳤고 온 세상이 암흑이다 못해 빛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런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도 모르겠다.1년? 10년? 아니면 100년?그런데 유진우의 정신세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릴 것만 같던 그때 한 줄기의 빛이 나타났다. 그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친 듯이 발버둥 쳐서 빛이 보이는 쪽으로 헤엄쳐갔다. 그렇게 빛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드디어 빛과 한 몸이 되었다...“쓰읍!”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유진우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 기운이 폐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심장도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환생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무엇보다 체내의 독이 신기하게도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다. 몸이 아직 허약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유 장로, 드디어 깨어났군요. 이번 고비를 넘기지 못할까 봐 걱정 많이 했습니다.”지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유진우가 눈을 떠보니 약신왕 조안태가 침대 옆에 앉아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안색이 창백했고 숨도 거칠게 내쉬는 게 진기를 아주 많이 소모한 듯했다.“약신왕 선배님께서 살려주셨군요.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유진우가 재빨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가 중독된 독은 거의 해독 불가능한 독이었다. 조안태가 황천길에서 맴도는 유진우를 끌어오느라고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모른다. 정말 생명의 은인이었다.“유 장로, 난 그저 진기를 조금 소모했을 뿐 딱히 한 거 없어요. 유 장로가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은 이분입니다.”조안태가 한숨을 내쉬었다.“이분이요?”유진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옆 침대에 얼굴에 핏기라곤 전혀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 가만히 누워있었다. 호흡이 아주 미약하다 못해 가슴팍도 움직이지 않았
조선미가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수만 마리의 개미가 뼈를 갉아 먹는 듯한 고통을 견뎌낸 것, 그리고 죽음에 임박했다가 마지막에 산송장이 된 것까지 이 전체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유진우에게 말해주었다.왜냐하면 유진우가 반드시 이 사실을 알아야 하고, 조선미가 죽을 각오까지 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조안태의 설명을 듣던 유진우는 그대로 넋이 나갔다. 자리에 멍하니 선 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조선미가 유진우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희생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유진우는 그제야 조선미의 사랑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겁고 소중한 사랑을 그가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이건 선미 씨가 유 장로에게 남긴 편지입니다. 읽어보세요.”조안태는 복잡한 표정으로 조선미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존경하고 탄복한 적이 없는 그였는데 조금 전 조선미의 용기는 진심으로 존경할만했다.수만 마리 개미가 뼈를 갉아 먹는 듯한 고통은 무도 마스터라도 버틸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런데 여린 여자가 그 고통을 견뎌냈고 게다가 어떤 후회와 두려움도 없이 강인하고 단호했다.한 사람을 대체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해야만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조안태는 신이 와도 유진우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조선미를 통하여 일반인에게도 신과 겨룰만한 강력한 힘이 있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되었다.유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받고 열어보았다. 가지런한 글씨가 그의 눈앞에 또렷하게 나타났다.[여보,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난 아마 이 세상에 없겠죠? 하지만 너무 속상해하지도 말고 자책하지도 말아요. 이 모든 건 다 내가 원해서 선택한 거니까. 사실 당신을 만난 그 순간부터 난 당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었어요. 처음에는 단지 재미나는 사람이라고만 여겼었는데 나중에 나도 모르게 진우 씨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머릿속에 매일 당신 얼굴이 떠오르고 한시도 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