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 아버지는 절대 보물 지도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상대방의 화를 돋우어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네, 사람을 불러 아저씨를 보호할게요.”“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놓이네요. 물론 너무 오래 가있지는 않을 거예요. 연경의 새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바로 서울로 돌아올게요. 빠르면 일주일 안에 돌아올 수도 있어요.”“네, 기다릴게요.”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두 사람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했다.띵동.이때 또다시 대문이 열렸다. 한껏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웃으며 들어왔다.유진우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훑어보다 흠칫하며 놀라운 표정으로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왜요?”조선미는 금세 이상함을 느꼈다.“별거 아니에요, 아는 사람을 봐서.”“아는 사람이요? 가서 인사할래요?”조선미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젊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옷차림과 행동을 봤을 때 모두 부유한 사람들이었다.“아뇨, 저희끼리 먹죠.”유진우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리고는 식사를 계속했다. 지금의 안정이 좋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미와 함께 있을 때면 더없이 편안했다. 그를 괴롭히던 일들도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여보, 비행기를 타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 며칠 뒤 봐요.”배불리 먹은 뒤 조선미가 몸을 일으켰다. 유진우도 따라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래요, 데려다줄게요.”“그럴 필요 없어요. 차를 이미 불렀거든요. 피곤해 보이는데, 들어가서 푹 쉬어요. 맞다, 나 없을 때 한눈팔면 나한테 죽어요.”조선미는 일부러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엄포를 놓고는 피식 웃으며 유진우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갈게요.”그 말을 남긴 채 조선미는 손을 흔들며 레스토랑을 나갔다.유진우는 멍하니 조선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마음속 어딘가가 구멍이 뚫린 듯 공허했다.“진우 오빠?”이때 맑은 여자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울렸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몇 명이 호기심 어린
“온 지는 좀 됐는데 너무 바빠서 아직 장군님께 인사드리지 못했어요.”유진우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맞다, 몸은 좀 어때요? 불편한 덴 없어요?”극한 신체는 100년에 한 번 나올지 하는 희귀병으로서 치료가 극히 어려웠다. 누에로 그 기를 눌렀어도 10년 동안만 버틸 수 있었다. 10년이 지나면 다른 변수가 없는 이상 남궁은설은 죽은 목숨이었다.남궁은설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네, 괜찮아요. 다 진우 오빠 덕분이죠.”“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은설아, 이분 누구야?”남궁은설의 옆에 선 붉은 옷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남궁은설이 재빨리 그를 소개했다.“연지 언니, 이 분이 전에 말한 진우 오빠세요. 제 병을 고쳐주신 분이요!”남궁은설이 고개를 조금 쳐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오, 그쪽이 은설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에요?”유연지가 유진우를 아래 우로 훑어보며 말했다.얼굴은 괜찮았지만, 옷차림이 시골 사람 같은 게,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급이 아니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남궁은설의 마음을 앗아갔지? 단지 얼굴이 잘생겨서?정말 그렇다면 너무 격 떨어지는 일이었다.“진우 오빠, 밥 아직 안 드셨죠? 같이 먹을래요?”“아, 방금 먹었어요.”남궁은설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급히 말을 덧붙였다.“그럼 같이 커피라도 마셔요. 마침 의학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말을 마친 남궁은설은 기대 넘치는 표정으로 유진우를 쳐다보았다.“그래요.”유진우는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거절했다가는 그녀를 울릴 수도 있었다.“좋아요! 진우 오빠 이리 오세요!”남궁은설은 활짝 웃으며 유진우의 팔을 끌고 호화롭게 장식된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앉아있었다.가장 가운데에는 정장을 입은 반듯한 인상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그는 보기만 해도 압도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앉아만 있어도 눈에 띌 정도로 출중한 용모였다.“은설아, 옆에 선 분은 누구셔? 본 적이 없는데.”정장
이때 한 매부리코 남자가 물었다.“둘 다 아닙니다.”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매부리코 남자가 다시 물었다.“그럼? 어디 지잡대 나왔어?”다른 사람들도 모두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대학을 안 나왔습니다.”유진우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매부리코가 일부러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진짜야? 대학을 안 나왔는데 어떻게 의사가 돼?”“저는 한의학을 배웠습니다. 어릴 때부터 배워 자연스럽게 할 줄 알게 되었어요.”매부리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한의학? 지금 장난치는 거야? 그거 다 속임수 아니야? ”“하하하... 요즘도 한의학 믿는 사람이 있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하긴 폐지 줍는 노인들은 이런 거 믿을 테니까. 한 명이라도 더 속이면 좋잖아.”사람들이 웃으며 비아냥댔다. 서양식 교육을 받은 그들에게 한의사는 돌팔이나 다름없었다.“은설아, 정말 저 사람이 널 살려준 거야? 속은 건 아니고?”유연지가 비꼬았다.“아니에요! 진우 오빠는 정말 실력 있는 사람이에요!”“실력? 하하하... 난 왜 안 믿기지?”매부리코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한의사라며? 내 건강이 어떤지 한 번 봐봐. 맞히면 상을 줄게.”매부리코가 손을 내밀며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유진우는 그를 쓱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요즘 들어 추위를 많이 타고, 허리가 아프고, 땀도 많아졌죠?”“응? 어떻게 알았어?”매부리코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최근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두 눈에 초점이 없고, 호흡도 가쁘고, 얼굴빛도 좋지 않아요. 거기다 춥고 허리가 아프고 땀이 많이 난다면, 아마 성기능이 쇠약할 겁니다.”“웃기지 마! 난 멀쩡해, 하룻밤에 일곱 번도 거뜬하다고!”“그뿐만 아니라 성병도 있는 것 같네요. 빨리 병원에 가 보는 게 좋겠어요. 병이 진행되면 그곳이 썩어버릴 거예요.”“너... 허튼소리 마! 다시 한번 이상한 소리 하면 본때를 보여줄 거야!”매부리코가 얼굴이 빨개진 채 외쳤다. 성기능 쇠약도 모
뚝... 뚝...바닥에 흥건한 오줌을 본 사람들이 모두 경악했다. 매부리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혈 자리 두 개를 눌렀을 뿐인데 오줌을 지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가장 난처한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 광경을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악!”매부리코가 비명을 지르고는 바지를 잡고 자리를 뛰쳐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오줌 발자국이 찍혔다.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망신당한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죽음이었다.“유진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유연지가 책상을 쾅 치며 말했다. 대학도 나오지 않은 사람 하나가 감히 명문가 도련님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다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방금 성기능 쇠약이라고 했잖아요, 신장이 약하다고. 그런데 안 믿으시니, 이렇게 증명해 드리는 수밖에요.”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너...”유연지는 말문이 막혔다. 핑계를 찾아 그를 난처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팀 킬을 할 줄은 몰랐다.“흥! 일부러 이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한솔이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절친한 황우가 이렇게 망신당하는 꼴을 본 그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안 믿으시는 겁니까? 당신도 한 번 봐 드려요?”유진우의 시선이 그에게 옮겨갔다. 그 말을 들은 한솔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유진우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우의 최후를 바로 옆에서 본 터라 모험하고 싶지 않았다.“난 안 믿어, 네가 정말 그 정도 실력이라면 나도 한 번 봐봐!”유연지가 건들거리며 한 쪽 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한의학을 믿지 않았고, 유진우가 한 번 보기만 해도 병을 보아낼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정당한 방법이 아닌 속임수가 확실했다.유진우가 그녀를 유심히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은 더 심하네요. 호흡이 일정하지 않고 이상한 소리도 들려요. 쉽게 흥분하고, 정신도 맑지 않아 보이는 게, 폐에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마. 폐에 어떤 문제가 있는데? 난 왜 아무 느
이렇게 잘난 척하는 사람들은 상대하기도 싫었다.유연지가 깔보는 목소리로 말했다.“연지 언니! 진우 오빠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전 진우 오빠를 믿어요!”남궁은설이 유진우의 편을 들고 나섰다.“은설아, 넌 다 좋은데 너무 단순해. 그래서 저런 사람들에게 속아넘어가기 딱 좋아. 특히 이런 근본도 모르는 사람들은 꼭 조심해야 해.”유연지는 유진우를 흘깃 보며 말했다. 유연지에게 유진우는 과거 남궁은설을 따라다니던 사람들과 같았다. 갖은 방법을 다해 그녀에게 접근해 보려는 사람들.“연지 언니, 오해예요. 진우 오빠는 좋은 사람이에요!”“왜? 찔려? 할 말이 없어? 그럴 줄 알았다! 너 같은 사기꾼은 차고 넘쳤어! 은설이는 속여도 나는 못 속여!”남궁은설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유진우를 적대시하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은설 씨, 나 먼저 가볼게요.”차를 마신 뒤 유진우는 일어나 자리를 뜨려 했다. 이런 사람들과 계속 접촉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진우 오빠...”남궁은설은 급히 일어났지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은설 씨,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먼저 먹어요. 다음에 장군님 뵈러 갈게요.”유진우는 웃어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진...”남궁은설이 그를 쫓아가려 할 때 유연지가 그녀를 말렸다.“은설아! 뭐 해? 사기꾼일 뿐이야. 그냥 가라고 해. 여기 남으면 우리 기분만 망쳐.”“진우 오빠 그렇게 말하지 마요!”“그래, 말 안 할게.”유연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하고는 또다시 물었다.“은설아, 그 자식 좋아하는 거야?”“네?”남궁은설은 새빨개진 얼굴로 우물쭈물 대답했다.“그, 그럴 리 있어요? 진우 오빠는 제 생명의 은인이라, 보답하고 싶은 거예요.”비록 강력히 부인했지만 남궁은설의 표정은 모든 걸 설명하고도 남을 만큼 확실했다.유연지가 경고했다.“은설아, 보답하려는 거면 괜찮지만, 절대 그 자식 좋아하지 마.”“왜요?”“아직도 모르겠어? 너흰 다른 세계 사람들이야. 함께할 수 없다고
박살 난 술잔을 본 사람들이 멍해졌다. 유진우가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아무 말도 없이 유연지의 술잔을 깨뜨리다니.“야! 뭐 해? 미쳤어?”유연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외쳤다. 방금 맞은 손등이 화끈거리며 조금 부어올랐다.“감히 연지를 건드리다니, 무섭지도 않아?”사람들이 모두 화가 나 소리쳤다.“너,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기 전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뗄 줄 알아.”한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강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술에 독이 있어요. 지금 당신들 목숨을 구해드리는 겁니다.”유진우가 차갑게 대답했다.“독?”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놀란 채 서로를 응시했다. 유진우가 일부러 보복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거짓말이면 어떡할래?”유연지가 외쳤다. 그녀는 의심이 많아 다른 사람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유진우는 아무 말 없이 은침 하나를 꺼내 남궁은설의 술잔에 넣었다. 조금 젓고 다시 침을 꺼내니 은침은 이미 새까맣게 변해있었다.“이러면 되겠습니까?”유진우는 새까맣게 변한 은침을 사람들 앞에 내밀었다.“응?”이를 본 유연지는 흠칫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은침이 까맣게 변했다는 건 술에 독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셨다면 큰일났을 거였다.“젠장! 정말 독이 있잖아? 누구 짓이야?”“감히 우리 술에 독을 타? 죽고 싶은 거야?”사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목숨에 관계되는 일은 중요시해야 했다.“진우 오빠, 정말 고마워요. 오빠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중독됐을 거예요.”남궁은설은 아직 진정되지 않은 듯 침을 삼키며 말했다.“별거 아니에요.”유진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은설을 봐서라도 그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잠깐! 네가 어떻게 독이 있다는 걸 알았어?”유연지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술을 마시지도, 검사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했어?”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유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미심쩍었다. 어떻게
“연지 언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우 오빠가 우릴 구해줬잖아요!”“은설아, 저 자식한테 속지 마. 절대 좋은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야! 우리 술 안의 독은 이 자식이 탄 거야! 일부러 자리를 뜨고는 중요한 타이밍에 등장해 호감을 사지. 이까짓 꼼수로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아?”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처음 본 유진우보다는 유연지에게 더 믿음이 갔다.“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거 아니에요? 난 그런 거 할 시간이 없어요.”유진우가 차갑게 말했다. 좋은 마음으로 도와준 건데 이렇게 돌아올지는 몰랐다. 짐승도 은혜 갚을 줄 안다고 했는데!유연지가 계속해서 다그쳤다.“흥! 인정하지 않는 거야?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 어떻게 마침 그 직원을 마주쳤고, 마침 이 독약을 손에 넣었어? 이게 다 우연의 일치야?”“맞아요. 우연의 일치입니다.”“하하, 다들 들었지? 이 자식 할 말이 없어졌어.”유연지가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것 말고도 더 치명적인 게 있어. 그 은침 말이야. 누가 미쳤다고 은침을 가지고 다녀? 진작 계획한 거잖아!”“저 자식이 독을 탄 거라니,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믿을 수 없어!”“연지가 똑똑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우리 다 속을 뻔했어.”“찢어 죽일 놈, 감히 우리 앞에서 꼼수 쓰다니, 살고 싶지 않은 거야?”사람들이 유진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처음의 감격이 이제는 분노로 뒤바뀌었다.“유진우, 이렇게 빨리 들통날 줄은 몰랐지? 더 할 말 있어?”유연지는 팔짱을 끼고 신이 나 말했다. 미제사건을 해결한 것인 양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안 믿으니 어쩔 수 없네요. 전 못 본 걸로 하세요. 그럼.”말을 마친 유진우는 몸을 휙 돌려 걸어 나갔다.“거기 서!”유연지가 유진우의 앞을 막고 소리쳤다.“우리 술에 독을 탔으면서 그냥 가려고? 그런 게 어디 있어?”“자식!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해!”사람들이 웅성댔다. 모두가 기회를
“응?”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유연지는 멍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슴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놀라움, 경악, 의문, 공포가 담긴 복합적인 표정이었다.자신이 총에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아무런 징조 없이 이렇게나 갑자기.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그녀는 단말마의 비명만을 남긴 채 그대로 쓰러졌다.“킬러야, 빨리 엎드려!”한솔이 크게 외쳤다. 사람들이 급히 땅에 엎드렸다. 그와 동시에 가면을 쓴 킬러들이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모두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들고, 보이는 사람마다 가차 없이 쏘아댔다.빵, 빵, 빵, 빵...총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땅에 쓰러졌다.“젠장!”한솔은 화가 나 킬러들 쪽으로 테이블을 뒤엎었다.킬러들이 테이블을 피하는 사이 그는 킬러 두 사람의 목을 잡고는 손에 힘을 줬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을 잡힌 두 사람이 쓰러졌다.둘을 해치운 뒤 한솔은 다시 주먹을 뻗었다. 그 위력은 천둥번개처럼 강력했다.쿵. 쿵. 쿵.소리와 함께 남은 킬러들도 가슴이 관통당한 채 고꾸라졌다. 단 몇 분 만에 한솔은 모든 킬러를 처리했다. 그 실력에 모두가 놀랐다.“쓰레기들.”한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뀌고는 땅에 널브러진 테이블보를 들어 손에 묻은 피를 닦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모두가 환호했다.“역시 도련님이에요! 너무 대단해요!”“당연하지, 도련님은 가문의 후계자시고 천하회 회원이기도 하시니, 이 정도는 기본이지!”“이 사람들, 운 없기도 하지. 도련님을 만났으니.”사람들은 저마다 한솔을 칭송했다. 한솔은 그들 사이에서도 리더였다. 신분도 고귀하고 실력도 강했다. 서울 전체에서도 그와 대적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이제 네 차례야.”한솔은 고개를 돌려 곱지 않은 시선으로 유진우를 빤히 쳐다보았다.“이 킬러들, 네가 보낸 거지?”“저는 당신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제가 왜 당신들을 죽이려 하겠습니까?”“네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잖아. 사실대로 말하는
“아직 절 기억해주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저 아직 살아있습니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성종의 과거사를 몰랐던 터라 갑자기 흥분한 모습을 보니 조금 의아했다.“살아있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은성종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벌써 10년이나 지났어요. 그사이 세자 전하께서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그러네요. 10년 동안 많은 게 변했습니다.”유진우는 감탄하며 말했다.10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10년 후에는 아버지가 암살당했다. 10년 사이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제후님, 아까 제 형을 보면 서경왕부를 전폭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형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약속을 어기진 않으실 거죠?”유천우가 떠보듯 물었다.“만약 세자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시겠다고 한다면 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자 전하가 왕의 자리에 앉도록 도와줄 거야.”은성종이 진지하게 말했다.조금 전까지 냉정하고 덤덤했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투지가 넘쳤고 온몸에서 전에는 본 적 없는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좋습니다. 제후님은 역시 약속을 잘 지키시네요.”유천우는 웃어 보이고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역시 형이 나서야 했어.’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은성종을 설득하지 못했는데 유진우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든 게 쉽게 해결되었다.비록 10년이 흘렀지만 유씨 가문 천재라는 명성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고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제후님, 제가 서경에 돌아온 사실을 아직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때까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유진우가 당부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겠습니다.”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은 그는 당연히 유장혁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위왕이 호룡각의 잔당들에게 살해당했고 유태범은 왕위를 빼앗으려 혈안이 되어있었다. 정말 여러 가지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왕위를 이을 생각이 없다면서 왜 싸우려는 건데?”은성종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전 서경왕이 될 자격이 부족하지만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유태범보다 더 어울려요.”유천우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게 누군데?”은성종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제 형님 유장혁입니다.”유천우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유장혁?”은성종은 실눈을 뜨더니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세자 전하께서 서경왕이 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실종된 지 10년이 넘었고 감감무소식이라는 거야.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왕위를 이을 수 있겠어?”“제 형님은 죽지 않았고 이미 서경에 돌아왔습니다. 서경왕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형님밖에 없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말로만 해서는 안 돼. 증거가 있어?”은성종이 물었다.만약 유장혁이 정말로 서경에 돌아왔다면 벌써 서경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하여 유천우가 단지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핑계를 대는 것이라 생각했다.“제후님, 증거를 드릴 수는 있는데 그 전에 물을 게 있어요. 만약 제 형님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실 겁니까?”유천우가 되물었다.“그건...”은성종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유천우가 하도 자신감이 넘쳐서 오히려 확신이 없어졌다.“제후님, 서경에는 좋은 왕이 필요합니다. 제 형님보다 더 서경왕에 적합한 사람은 없어요. 제후님도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유천우가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만난다면 널 도와줄게. 만나지 못하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야 할 거야.”은성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약속하는 겁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유진우를 돌아보았다.“형, 이젠 형이 나설 때가 됐어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본모습을 드러냈다.“당신은...”은성종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은성종은 유천우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자신과 유천우에게 술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술을 단숨에 마셨다.“좋은 술이군.”은성종은 혀를 차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유천우도 다그치진 않고 술을 다 마신 다음 은성종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기다렸다.“유태범이 나한테 손을 잡자고 하더라고. 엄청난 이익을 약속했지만 모두 거절했어.”이 말을 들은 유천우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어진 은성종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아직 너무 기뻐하진 마. 유태범의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너도 도울 생각은 없어.난 전쟁을 싫어해서 중립을 선택할 거야.”은성종이 솔직하게 말했다.“중립이라고요?”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바로 설득했다.“제후님, 서경의 일원으로서 서경이 무너지는 걸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난 능력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은성종이 고개를 내저었다.“그리고 난 야심이 없어서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어. 이런 권력 다툼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아. 내가 가진 작은 땅만 잘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은성종이 잠깐 멈칫하다가 또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너랑 표기 대장군 모두 유씨 가문의 핏줄이라 누가 서경왕이 되든 나한테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말이 반란이지, 그저 왕위 다툼일 뿐이야.”“그건...”유천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천우야, 난 성격이 솔직한 편이라 혹시 불쾌한 점이 있다면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은성종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제후님이 평화를 바라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제후님도 무사하지 못해요.”유천우가 다시 설득했다.“태평은 변경의 작은 도시이고 가난하고 가진 게 없어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여기까지 쳐들어올 일은 없어.”은성종이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미 유태범과도 합의했어. 내가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태평에는 절대 쳐들어오지 않겠다고.”“제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