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행당했다고요?”손기태는 눈살을 찌푸리며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빨리 속도를 내!”“네.”기사는 대답을 하고 페달을 세게 밟아 속도가 갑자기 치솟았다.그러던 중 바로 앞 갈림길에서 검은색 승합차가 나타나 길목을 가로질렀다.기사는 안색이 변하며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끼이익.타이어가 지면에 마찰하여 한 줄기의 긴 흔적을 끌어냈다. 관성으로 인해 차량은 결국 충돌하고 말았다.펑!큰 소리가 나더니 승합차는 충돌하여 뒤집혔고, 손기태의 롤스로이스는 차 앞부분이 뒤틀려 부서져 시동이 꺼졌다.다행히 안전조치가 제대로 이뤄져 몇 명은 다치지 않았다.다만 그들이 차에서 내릴 때 뒤따라오던 차가 이미 쫓아왔다.“어서, 저들을 둘러싸!”문이 열리면서 양복 차림에 몽둥이를 든 건달들이 살기등등하게 달려왔다.눈 깜짝할 사이에 유진우 몇 사람을 겹겹이 에워쌌고 그 눈들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너희들 누구야? 감히 내 차를 건드리다니?”손기태가 노하여 소리쳤다.온 서울에서는 5대 가문조차도 그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그러니 보통 졸개가 어찌 감히 그와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흥, 몇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너희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차가운 말소리와 함께 강초설과 유청이 차에서 내렸다.“안녕, 또 만났네, 놀랍지 않아?”유청이 차갑게 웃었다. 그 얼굴에는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냄새가 났다.“너희 둘이었구나.”유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건넸다.“왜 남의 집에 불난 틈에 도둑질하려고?”“그래. 그게 뭐 어때서?”유청은 실눈을 떴다.“눈치가 있으면 천년 청련을 당장 내놔, 그렇지 않으면 넌 내 손에 죽어!”“의술능력이 없어서 나한테 졌는데 이런 수단으로 보복하다니. 신의문 사람들은 다 이런 꼬락서니야?”유진우가 못마땅한 듯 비아냥거렸다.“쓸데없는 소리 작작해!”강초설은 유진우의 말에 조금 귀찮아졌다.“너희들에게는 지금 두 가지 선택밖에 없어. 천년 청련을 내놓든지, 아니면 우리 손에 불구가 되든지.”“너희들 몇
“됐어요, 끝!”모두를 쓰러뜨린 황은아는 방망이를 어깨에 올리고 마치 깡패처럼 거들먹거리며 유진우에게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아저씨, 어때요? 대단하죠?”“좋아, 엊그제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유진우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황은아의 타고난 무도 천부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루 수련하면 거의 보통 무사의 1년에 상당하다. 특히 유진우의 가르침을 받은 후 실력이 급속도로 상승했다.예전에는 한 번에 십여 명을 때리기가 무리였지만 지금은 힘을 들이지 않고 여유 있게 처리한다.“그럼요, 제가 누군데요!”황은아는 고개를 쳐들었는데 의기양양해 보였다.어찌 된 일인지 어젯밤 자고 일어났더니 그녀는 체내의 기운이 유난히 두터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도저히 다 쓰려야 쓸 수 없었다.“너희 둘, 스스로 꺼지겠어 아니면 내가 직접 나서야 해?”유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초설과 유청을 바라보았다.“옆에 여자 경호원이 있을 줄은 몰랐네, 내가 방금 잘못 판단했어.”잠시 놀란 유청은 자기도 모르게 냉소를 터뜨렸다.“그런데 이 여자애가 능력이 광란한 것만으로 나를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해!”“야, 너도 맞고 싶냐?”황은아는 방망이를 들었고 분노가 치밀었다.“맞고 싶냐고? 허허...”유청은 갑자기 웃었다. 그것도 아주 건방지게 웃었다.“우리 신의문의 제자가 정말 의술만 할 줄 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사실대로 말할게, 우리 같은 천재는 의술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무도 방면의 조예도 뛰어나다고. 그저 평소에 우리가 나타내지 않았을 뿐이지. 만약 너희들이 계속 고집불통이라면 오늘은 내가 직접 너희들을 혼내줄 수밖에 없어.”말하는 동안 그는 외투를 벗고 소매를 걷어올리는 등 모습을 보여주었다.“허세를 부리기는, 딱 대!”황은아는 쓸데없는 말을 귀찮아하며 발을 힘껏 내딛더니 그대로 튕겨 나가며 유청을향해 공격했다.“그래, 와봐!”유청은 크게 웃으며 뒤로 물러서지 않고 손뼉을 치더니 방망이에 닿는 순간 움츠러들며 받
그 도발적인 동작에 유청은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어두워지고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유청 선배, 봐주지 말고 저 녀석을 호되게 때려요!”강초설이 차갑게 말했다.“이놈아, 내가 너를 어떻게 모욕하는지 잘 봐!”유청은 두 다리를 벌리고 갑자기 몸을 움직여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채로 유진우에게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간 후 몸을 뒤틀자 두 손바닥은 잔영이 되어 유진우의 턱을 향해 세게 쳤다.쌍추장이다!이 수법은 공격할 수도 있고, 수비할 수도 있고, 전진할 수도 있고 후퇴할 수도 있으며 변화무쌍이어서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다.유진우는 두 발을 움직이지 않고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갑자기 아래로 눌렀다.쾅!광포한 진기가 식은 죽 먹기처럼 유청의 수법을 격파한 후, 그의 가슴을 간단하고 거칠게 때렸다.푸!유청은 그 자리에서 피를 한 모금 내뿜었고, 순식간에 사람이 튕겨나가 결국 차에 심하게 부딪쳤다.펑!굉음만 들렸고 차는 움푹 파여서 더는 못쓰게 되었다.“꼬맹아, 봤어? 이렇게 쳐야지.”유진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이내 빙긋 웃었다.“음...”황은아는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이걸 도대체 어떻게 배워? 완전 실력으로 제압한 거잖아.’“유청 선배!”강초설은 깜짝 놀라 급히 달려가 차에서 사람을 끌어냈다.유청의 실력은 이미 익스트림 레벨이라 보통 무사는 감히 안된다. 그런데 지금 한방에 날려 보내다니 확실히 실력이 무서웠다.“유청 선배, 괜찮아요?”강초설은 조금 걱정되었다.“나 괜찮...”유청은 입을 열더니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또 피를 뿜자 강초설의 온몸에 튀었다.“능력이 없으면 남의 흉내를 내지 마, 오늘은 단지 너희들에게 약간의 교훈을 준 것뿐이야. 앞으로 다시는 나를 건드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후회해도 늦어.”차갑게 한마디 던지고 유진우는 차를 타고 떠날 준비를 했다.“죽어!”그때 유청이 벌떡 일어나 독극물 한 병을 꺼내 뿌렸다.유진우는 뒤도 안 돌아오고, 손을 흔들었다.갑자기 공중에서 바람
“아저씨, 방금 말한 이원기가 누구예요?”멀어지는 차량을 보며 황은아는 궁금증이 생겨 물어보았다.“어떤 멍청이일 뿐이야, 신경 쓰지 마.”유진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툭 내뱉었다.“...”황은아의 눈꼬리가 씰룩거렸다.속으로 이 이원기라는 놈을 위해 3초간 묵념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대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니 말이다.염룡 무관으로 돌아온 후 손기태는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유진우는 천년 청련을 잘 보관한 후 시간을 내 황은아에게 타구봉법을 가르쳤다.황은아는 기초가 있고, 내력도 충분하며, 기본적인 전투 기술도 갖추고 있다.다만 공격방식이 너무 단일하고 장법이 부족해 조금만 강한 상대를 만나면 쉽게 손해를 볼 수 있다.황은아가 방망이를 쓰기 좋아하니 다행히도 타구봉법을 연습할 수 있었다.유진우는 어려서부터 고금에 통달하여 각종 무도 전적을 숙독하였다.기초 무학이든, 현묘하고 심오한 묘수든, 아니면 금서 기이한 전적이든, 머릿속에 없는 것이 없다.무도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눈 깜짝할 사이에 이틀이 지나갔다.이틀 동안 유진우는 황은아를 가르치는 동시에 염룡파와 맹호파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른 두 개의 큰 패거리인 곰파와 망파를 굴복시켰다.주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가장 좋고, 불복한다면 철저히 복종하게 만들었다.불과 이틀 만에 서울의 4대 지하조직을 모두 유진우가 통제하게 되었다.다시 말하면, 지금의 그는 이미 서울 지하 세계의 왕이 되었다.휘하에는 거의 4천 명의 병사가 있고, 세력은 5대 가문보다 높다. 유진우는 4대 조직을 통일한 뒤 조직 이름을 강린파로 바꿔 통칭했다.염룡, 맹호, 곰, 망은 사대당으로 바뀌었다.이로써 훗날 천하를 제패할 강린파가 정식으로 탄생했다.셋째 날 아침.유진우가 조직 물건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단소홍이 걸어온 전화였는데 연결되자마자 입을 아주 급하게 열었다.“유진우, 큰일났어! 언니가 방금 하마터면 암살당할 뻔했어!”“암살? 무슨 일이야?”유
“청아 씨, 대체 무슨 일이야?”유진우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어제 강북 이씨 가문에 가서 큰할아버지의 병문안을 갔다가 오늘 아침에 돌아오는 도중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다행히 한 장군님이 지나가다가 우리를 구해주었어.”이청아가 설명했다.“강북에 갔다고 왜 말을 안 했어? 적어도 널 보호해 줄 사람을 보낼 수 있었어.”유진우는 좀 언짢았다.“경호원 몇 명을 데리고 갔지만 이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지.”이청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일반적인 충돌이라면 경호원 몇 명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지만 누군가 고의적으로 살인을 계획한 거라면 분명 충분하지 않다.“누가 그랬는지 알아?”유진우는 이청아를 보며 캐물었다.“아직은 잘 모르겠어.”이청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당신이 방금 강북에 가서 족장을 보고 돌아왔는데 암살당할 뻔한 것은 너무 공교로운 일인 것 같아. 내 추측이 맞다면, 이 일은 이씨 집안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이씨 가문?”이청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당신은 지금 이씨 그룹의 최대 주주이고, 또 족장이 친히 지명한 후계자야. 이씨 집안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노리고 있어 이런 극단적인 일을 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유진우가 분석하면서 말했다.이청아의 현재 신분으로 보면 그녀는 반드시 시기와 질투를 당한다.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씨 집안의 나머지 사람들은 자리에 앉을 기회가 생긴다.재벌 가문은 이익을 제일 중요시하고 친정 따위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언니, 유진우 말이 맞아요. 이번 일은 이씨 집안 짓이 분명해요!”단소홍은 좀 분했다.“이 망할 놈들, 감히 내 딸을 다치게 해? 반드시 그 사람들을 찾아 결판을 낼 것이다!”장경화도 화가 단단히 나서 말을 뱉었다.“아직 그렇게 단정 짓기엔 일러요. 증거를 찾기 전까지 함부로 추측하지 않는 게 좋아요.”이청아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녀는 비록 조금 의심이 갔지만 단정 짓지 않았다. 실질적인 증거가 없으니 무슨
“청아 씨, 억지 부리지 마.”유진우는 눈썹을 찡그렸다.“다른 물건이라면 아무리 값어치가 있어도 흔쾌히 주겠지만 이 인삼은 정말 안 돼.”“맞아! 내가 억지를 부렸어!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됐어. 나 혼자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게!”이청아는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예전에는 그녀가 어떤 요구를 하든 유진우는 거의 다 들어줬다. 하지만 지금은 인삼 하나만 달라고 했을 뿐인데 상대방이 이렇게 딱 잘라 거절했다.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분명하다.보아하니 새 애인이 생긴 후, 그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유진우! 내 딸이 너에게 인삼을 달라고 하는 것은 너에게 기회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야, 너 호의를 무시하지 마!”장경화가 유진우를 향해 외쳤다.“언니의 지위에 아름다운 미모면, 얼마나 많은 젊은 인재들이 인삼을 앞다퉈 선물할지 몰라. 너는 기회를 잡는 게 좋을 거야.”단소홍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당신들이 인삼을 원한다면 내 인맥을 동원해서 찾아줄 수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인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이걸로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데 쓸 것이기 때문이에요.”유진우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좋아, 당신이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한다고 했으니 내가 물어볼게. 누가 내 큰할아버지보다 더 중요해?”이청아가 유진우를 쳐다보며 물었다.“너도 아는 사람이야, 바로 주정뱅이 영감이야.”“주정뱅이 할아버지?”이청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화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할아버지가 어떠신데? 설마 또 병이 도진 거야?”그녀의 인상 속에서 주정뱅이 할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자고 있어 정신을 차릴 때가 드물었다.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몸이 안 좋았다.“주정뱅이 영감이 당분간은 괜찮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어서 내가 빨리 영약들을 찾아 병을 고쳐줘야 해.”유진우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주정뱅이 영감이 잠시 괜찮다면 먼저 우리에게 인삼을 빌려줘. 이씨 집안 족장의 병
“방금 군부대에 가서 출석하고 마침 이곳을 지나치니 한번 들렀어요.”강백준이 싱긋 웃었다.“강백준 장군님을 뵙습니다.”반응이 오자 이청아는 벌떡 일어나 허리 굽혀 인사했다.“예의 차릴 것 없어요.”강백준은 이청아의 어깨를 살짝 누르며 다시 누우라고 손짓했다.“이청아 씨, 당신은 지금 다쳤으니 휴식해야 해요.”“작은 상처라 별거 아니에요.”이청아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청아 씨, 이분은...”유진우는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상대의 어깨에 달린 배지를 보니 소장이었다.서른 정도 돼 보이는 나이에 장군인 것을 보면 출신이 뛰어나거나 능력이 출중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이분은 강백준 장군님이야. 오늘 아침 내가 죽을 뻔했을 때 바로 강백준 장군님이 도와줬어.”이청아가 강백준을 유진우에게 소개했다.오늘 아침의 경험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만약 강백준이 제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그렇군요. 강백준 장군님께 감사드립니다.”유진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별거 아니에요.”강백준은 싱겁게 웃으며 유진우에게 되물었다.“혹시 그쪽은 누구신지요?”“아, 이쪽은 제 친구, 유진우예요.”이청아가 말을 내뱉었다.“친구?”두 글자를 듣자 유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아하, 유진우 씨 만나서 반가워요. 전 강백준이라고 해요.”강백준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그 표정은 상냥해 보이지만 눈빛은 어딘가 우월감이 가득 차 보였다.“만나서 반가워요.”유진우도 손을 뻗어 악수를 했지만 한편으로 의미심장했다.강씨 성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았다.엊그제 강초설을 만났는데 지금은 또 강백준이라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인지 모르겠다.“이청아 씨, 방금 당신들이 말하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최상품 인삼이 시급하다고 하던데, 맞나요?”강백준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네, 맞아요. 제 큰할아버지가 병에 걸려 최상품 인삼이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강백준 장군님, 당신의 호의는 마음으로만 받을게요. 이 최상품 인삼은 정말 받을 수 없어요.”놀라움을 받은 후 이청아는 곧 다시 난처해지기 시작했다.살려준 은혜도 갚지 못했는데 지금 최상품 인삼까지 받는다면 이 인정은 어떻게 갚아야 하는 거지?“이청아 씨, 인삼은 원래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에요. 내가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으니 차라리 당신이 이걸 가지고 사람을 구하러 가서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강백준이 사람 좋게 웃었다.“그런데...”이청아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장경화가 말을 끊었다.“청아야, 강백준 장군님의 성의를 그냥 받아. 나중에 기회를 봐서 보답하면 되지 않겠니.”장경화는 말하는 동안에 미친 듯이 눈짓을 했다.“그래요, 언니. 사람 구하는 게 중요하죠. 이 최상품 인삼이 없으면 족장님의 병은 어떻게 해야 하죠?”단소홍이 따라 이청아를 설득했다.“이건...”이청아는 잠시 말이 막혔다.비록 인정은 갚기 어렵지만 큰할아버지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이청아 씨, 정말 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면 부탁이 있어요.”강백준이 불쑥 말을 꺼냈다.“말씀하세요.”이청아는 눈썹을 찡그렸다.“제가 오늘 로얄호텔에서 파티를 열 예정인데 이청아 씨가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강백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파티요?”이청아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강백준 장군님의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제 영광이죠.”강백준이 그녀를 많이 도와줬으니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수 없었다.“좋아요, 그럼 오늘 밤에 만나요.”강백준은 웃으며 오래 머물지 않고 두 마디 인사를 나눈 뒤 작별을 고했다.“언니, 강백준 장군님 어떻게 생각해요?”그가 떠난 뒤 단소홍이 불쑥 이청아에게 물었다.“이렇게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었으니 훌륭할 수밖에 없지.”이청아가 말을 이었다.“언니, 강백준 장군님은 훌륭할 뿐만 아니라 언니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방금 강백준의 행동과 말투를 보고 단소홍은 피식 웃었다.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