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요? 레시피를 개선했다고요?”조안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하나의 레시피는 수천만 번의 실험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약을 추가하거나 빼면 균형을 깨뜨려 단약을 제조할 수 없게 된다.레시피를 개선한다는 건 엄청난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하고 또 여러 번 실험해야 한다. 현장에서 레시피를 개선하고 또 단번에 성공한다는 건 운이 아주 좋거나 엄청난 의학 천재라는 걸 뜻한다.“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경악도 잠시 유청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레시피를 개선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상등품의 레시피를 최상품으로 바꾸는 건 저희 사부님이신 최 명의님이라도 불가능한데 저 자식이 성공했다는 게 말이 돼요?”“맞아요! 저런 촌뜨기 의사가 어떻게 레시피를 개선해요?”강초설이 따라서 맞장구를 쳤다.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도 뛰어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촌뜨기의 재능이 그녀보다 뛰어날 거라고 절대 믿지 않았다.“젊은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젊은이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 같으니 대체 어떻게 했는지 설명 좀 해줄 수 있어요?”조안태가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딱히 설명할 것도 없어요. 그냥 몇 가지 약재를 더 넣었을 뿐이에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흥. 약재를 더 넣었다고? 그럼 어떤 약재를 더 넣었는데?”유청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당귀, 감초, 백렴, 그리고 금은화를 넣었어.”유진우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레시피가 노출되는 걸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최상품의 단약을 제조하려면 자신의 능력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한 단약도 아니고 해독단일 뿐이기에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아니야!”곰곰이 생각하던 유청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당귀와 감초, 그리고 백렴은 해독단의 약효를 강화하긴 하지만 금은화는 레시피에 적힌 약재들과 상극이라 넣으면 오히려 유해효과를 일으킬 수 있어.”“아무것도 모르면 으스대지나 마.”유진우는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했다.“해독
조안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두 번째 심사가 끝난 후 통과한 사람은 고작 몇 명밖에 없었다. 전부 비범한 의술을 지녔거나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자들이었다.“제가 먼저 하겠습니다.”한 중년 남자가 자신만만하게 자발적으로 나섰다. 20년 동안 갈고 닦은 침술을 드디어 쓸 수 있게 되었다.그는 노인의 앞으로 다가가 꼼꼼하게 살펴본 후 진맥했다. 그러고는 노인의 다리 부분 혈 자리에 은침을 열몇 개 꽂았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응?”중년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계속하여 여러 번 시도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시간이 다 됐어요. 탈락입니다!”검은 옷 집사가 불쑥 말했다.“잠깐만요... 한 번만 더 해볼게요.”중년 남자는 전혀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끌어내!”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았던 검은 옷 집사는 바로 명을 내려 중년 남자를 끌어내게 했다.“흥. 원인도 모르면서 침을 꽂아? 정말 돌팔이 의사가 따로 없군. 내가 어떻게 하는지 봐봐.”그때 한 여자가 갑자기 나서더니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어혈을 풀어주는 단약을 꺼내 노인에게 먹였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노인의 다리와 허리를 마사지하고 두드리기 시작했다.처음에 그녀는 노인의 경맥이 막힌 줄 알고 경맥만 뚫어주면 감각을 회복할 거라 생각하여 아주 자신만만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힘을 쓰고 땀범벅이 되어도 노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시간이 다 됐어요. 탈락입니다.”검은 옷 집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 또 두 명이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실패였다. 노인은 목각처럼 그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쓸모없는 것들. 내가 할게.”몇몇이 실패한 후 유청이 참다못해 드디어 나섰다. 조금 전 관찰하면서 그는 노인이 마비된 원인을 알아냈기에 감각을 되찾게 할 자신이 있었다.“야 이 자식아, 네가 단약을 제조하는 건 나보다 나을지는 몰라도 환자를 치료하는 건 날
“움직였어. 발가락을 움직였어!”“세상에나! 진짜 반응했어. 너무 신기한데?”“최 명의님의 제자는 역시 명불허전이야.”노인이 발가락을 움직이자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세 번째 라운드까지 진출한 참가자는 모두 실력이 뛰어나고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처음에 진찰했던 몇몇 참가자는 노인의 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모습을 보였다.그런데 유청이 나서자마자 8년이나 마비되었던 노인의 두 다리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실로 대단한 실력을 지닌 자인 건 확실했다.“어르신, 어떠십니까?”유청이 은침을 뽑은 후 입가에 미소를 띠고 물었다.“발가락에... 감각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노인은 놀라면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반신이 마비된 후 두 다리에 감각을 잃게 되었고 그 어떤 자극을 주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두 다리가 저릿하면서 가려운 감각이 느껴졌다.특히 발가락을 조금씩 통제할 수도 있었다. 너무 선명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8년 동안 하반신 마비를 앓은 그에게는 기적이나 다름없었다.“감각이 있으면 돼요. 마비된 시간이 오래돼서 한순간에 회복하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연속 한 달 동안 침을 놓는다면 어르신의 두 다리를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유청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고마워요, 명의님. 정말 대단하시네요.”노인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별말씀을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뭐.”유청의 태도가 한껏 오만해졌다.최 명의가 직접 가르친 제자라서 침술 방면의 조예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제일이었다. 게다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그렇게 귀하다는 호백단까지 꺼냈다. 이런 영약까지 꺼냈는데도 이기지 못한다면 그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좋아요. 이리도 짧은 시간 내에 환자의 일부분 감각을 회복시켰다는 건 아주 훌륭해요.”그 모습에 검은 옷 집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심사를 모두 통과하였음을 정식으로 선포합니다.”“유 선배, 축하해요.”강초설이 웃음을 지
노인이 자신의 다리를 꼬집자 아픔이 살짝 느껴졌다. 그는 놀라면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전에는 그저 두 발에 감각이 살짝 있을 뿐이었는데 이젠 두 다리마저 어느 정도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없었다.“됐어요.”효과가 나타나자 강초설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빠른 시간 내에 요령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아주 좋은 효과까지 나타났어요. 눈썰미와 경험, 그리고 천부적인 재능 중 그 어느 하나가 빠져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역시 의학 천재는 다르다니까요.”검은 옷 집사는 그녀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그럼 저도 통과했나요?”강초설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럼요. 두 분 모두 만점으로 통과했어요.”검은 옷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그 소리에 강초설과 유청은 기쁨에 겨워 안색이 환해졌다.앞서 두 라운드는 유진우가 방해한 바람에 만점을 맞았다가 다시 점수를 깎였었다. 그런데 다행히 마지막 라운드에서 제대로 만회했다.“이 자식아, 봤어? 이게 바로 우리의 정밀하고 뛰어난 의술이야.”유청의 시선이 갑자기 유진우에게 향하더니 우쭐거리며 말했다.“우린 30분이면 8년이나 하반신이 마비된 환자가 두 다리의 감각을 되찾게 할 수 있어. 넌 이런 재간이나 있어?”“안 되면 그냥 여기서 패배를 인정해. 괜히 망신당하지 말고.”강초설이 아니꼽게 말했다.단약을 제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의술도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두 가지의 근원은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일부분의 감각만 돌아왔을 뿐인데 이렇게나 나댄다고? 누가 보면 환자의 병을 다 치료한 줄 알겠어.”유진우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흥. 내 의술에 환자의 다리를 고친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야. 한 달만 시간 주면 환자가 다시 걷게 할 수 있다고.”유청이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한 달이나 필요해? 너무 늦다고 생각하지 않아?”유진우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자식아, 큰소리 그만 쳐. 난 적어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지만 넌? 그럴
“뭐야?”갑자기 벌떡 일어난 노인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었다. 하나같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8년 동안이나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던 환자가 이렇게 일어설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유진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침을 하나밖에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침 한 방으로 하반신 마비 환자를 치료했다.이게 진짜 인간이란 말인가?“내...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저 영감이... 방금 일어났어?”“어떻게 된 거야? 침 한 대 놓았을 뿐인데 고쳤다고?”“세상에나! 너무 신기하잖아.”잠깐의 침묵 후 현장이 삽시간에 떠들썩해졌다.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의문과 경멸, 비웃음 대신 놀라움이 자리 잡았다.“말... 말도 안 돼.”“8년 동안 누워있던 환자가 어떻게 저렇게 빨리 일어날 수 있는 거지?”유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한 달 동안 치료해야 하는 환자를 상대는 3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치료했다. 이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어떻게 이런 일이... 대체 어떻게 한 거야?”강초설도 충격에 빠진 건 마찬가지였다.오만하고 자신감이 넘쳤던 강초설도 이젠 엄청난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강초설은 의학 천재인데다가 같은 또래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이라고 늘 우쭐거렸지만 유진우의 활약으로 이젠 자존심이 완전히 짓밟히고 말았다.그녀가 머리를 쥐어짜도 고치지 못했던 병을 유진우는 침 한 방에 고쳐버렸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저 자식 대체 정체가 뭐기에 이런 뛰어난 의술을 지닌 거지?”검은 옷 집사도 놀란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름 없는 유진우를 얕잡아보았지만 이젠 경외심만 남았다.약물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단약 제조에도 뛰어난 실력을 지녔고 또 의술도 뛰어났다. 이런 존재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훌륭한 인재입니다. 정말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그런 훌륭한 인재입니다.”“우리 약신궁에
유청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표정이 보기 구차할 정도로 어두워졌다.옆에 있던 강초설도 내키지 않았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좋아요! 역시 재능이 출중한 사람은 대부분 젊은이라니까요.”조안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며 웃었다.“축하해요. 오늘은 젊은이가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했어요. 소원이 뭔지 말해봐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들어줄게요.”대부분 사람들이 심사에 참여한 건 약신궁에 들어가기 위해서지만 약신궁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 때문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소원으로 귀한 보물이나 의술 서적, 영약 등을 달라고 할 수 있었다.“약신왕님은 역시 통쾌하십니다. 그럼 사양 하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온 건 천년 청련 때문입니다.”유진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천년 청련?”조안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건 일품 영약인데다가 아주 보기 드문 물건이에요. 젊은이의 요구가 꽤 높네요?”“왜요? 저에게 주기 아까우신가요?”유진우가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물었다.“하하... 천년 청련이 귀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그래도 줄 수 있죠.”조안태가 웃어 보였다.“여봐라. 가서 영약을 가져와.”“네.”검은 옷 집사는 대답을 마친 후 바로 자리를 떠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청색의 연꽃이 담겨있었는데 마치 옥처럼 아주 맑고 투명했다. 연꽃의 잎은 청색이었지만 가운데 연자심은 금색을 띠었다.딱 봐도 아주 완벽하고 정교한 예술 작품처럼 흠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거기에 햇볕까지 더해지니 더욱 눈이 부셨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역시 천년 청련이야.”자세히 살피던 유진우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전에는 연식이 부족하여 사지 않았지만 약신왕이 다른 방법으로 익힌 덕에 청련은 완전히 탈바꿈하여 진정한 일품 영약인 천년 청련이 되었다.“잠깐만요.”그때 강초설이 갑자기 나서서 말했다.“약신왕님, 이 천년 청년을 저에게 파시면 안 될까요? 제가 고가에 사
“수장님, 농담이시죠? 이 자는 이제 막 입문했는데 장로로 승급하다니요... 이건 말도 안 됩니다!”“맞습니다, 수장님. 우리 약신궁은 백 년 동안 이런 전례가 없었어요. 이건 정말 규범에 어긋나는 일입니다.”“수장님, 수장님이 좋아하시기에 마음이 절실한 것은 압니다만, 이렇게 하시면 다른 사람들의 신망을 얻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약신궁의 몇몇 장로들과 제자들은 다 반향을 일으켰다.장로의 권리는 집사보다 높고 수장과 부수장 다음으로 높다.일반적으로 입문하는 제자들은 처음에는 모두 외문 제자들이다.외문 제자가 위로 올라가면 내문 제자가 되고, 더 위로 올라가면 핵심 제자가 된다.핵심 제자가 된 뒤 약신궁에 어느 정도 공헌을 해야 집사로 승진할 수 있다.집사도 저급, 중급, 고급으로 나뉜다.고급 집사가 된다면 엄청 희박한 가능성으로 명예 장로로 승진할 기회가 있다. 매번 승진할 때마다 언제나 수년을 버텨야 한다.다시 말해, 문외 제자가 장로 계급까지 올라가려면 적어도 이삼십 년은 걸린다.그런데 지금 유진우는 벼락출세를 하니 다른 사람들은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너희들은 정말 눈앞의 재능 있는 사람을 못 알아보는구나. 유진우 씨의 의술로는 명예 장로가 되기에 충분해.”조안태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세 가지 심사에서 유진우는 모두 기준을 초과하여 완성했고 그 활약은 완벽에 가까웠다.그여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이런 젊은 천재는 약신궁이 힘을 쏟아 끌어들이기 충분하다.“수장님, 유진우 씨의 의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경력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집사 제자로서는 자격이 있지만 장로의 직위는 아직 무리입니다.”흰 수염 장로가 말렸다.약신궁은 백여 년 동안 젊은 장로가 없었다.“쓸데없는 소리 작작해요! 내가 된다고 하면 되는 거예요!”조안태는 얼굴이 굳어져서 사람들이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약신궁은 결국 수장님의 뜻에 달렸다.“유진우 씨 생각은 어떠십니까?”조안태는 눈을 돌리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미행당했다고요?”손기태는 눈살을 찌푸리며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빨리 속도를 내!”“네.”기사는 대답을 하고 페달을 세게 밟아 속도가 갑자기 치솟았다.그러던 중 바로 앞 갈림길에서 검은색 승합차가 나타나 길목을 가로질렀다.기사는 안색이 변하며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끼이익.타이어가 지면에 마찰하여 한 줄기의 긴 흔적을 끌어냈다. 관성으로 인해 차량은 결국 충돌하고 말았다.펑!큰 소리가 나더니 승합차는 충돌하여 뒤집혔고, 손기태의 롤스로이스는 차 앞부분이 뒤틀려 부서져 시동이 꺼졌다.다행히 안전조치가 제대로 이뤄져 몇 명은 다치지 않았다.다만 그들이 차에서 내릴 때 뒤따라오던 차가 이미 쫓아왔다.“어서, 저들을 둘러싸!”문이 열리면서 양복 차림에 몽둥이를 든 건달들이 살기등등하게 달려왔다.눈 깜짝할 사이에 유진우 몇 사람을 겹겹이 에워쌌고 그 눈들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너희들 누구야? 감히 내 차를 건드리다니?”손기태가 노하여 소리쳤다.온 서울에서는 5대 가문조차도 그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그러니 보통 졸개가 어찌 감히 그와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흥, 몇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너희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차가운 말소리와 함께 강초설과 유청이 차에서 내렸다.“안녕, 또 만났네, 놀랍지 않아?”유청이 차갑게 웃었다. 그 얼굴에는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냄새가 났다.“너희 둘이었구나.”유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건넸다.“왜 남의 집에 불난 틈에 도둑질하려고?”“그래. 그게 뭐 어때서?”유청은 실눈을 떴다.“눈치가 있으면 천년 청련을 당장 내놔, 그렇지 않으면 넌 내 손에 죽어!”“의술능력이 없어서 나한테 졌는데 이런 수단으로 보복하다니. 신의문 사람들은 다 이런 꼬락서니야?”유진우가 못마땅한 듯 비아냥거렸다.“쓸데없는 소리 작작해!”강초설은 유진우의 말에 조금 귀찮아졌다.“너희들에게는 지금 두 가지 선택밖에 없어. 천년 청련을 내놓든지, 아니면 우리 손에 불구가 되든지.”“너희들 몇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