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휴대 전화를 꺼내 동영상 하나를 틀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촬영 장소는 한 커피숍이었는데 박호철과 남자가 마주하여 앉아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하여 대화 내용도 잘 들렸는데 바로 이현을 어떻게 죽인 다음 유진우에게 어떻게 덮어씌우라는 내용이었다. 상의를 마친 후 박호철은 그 자리에서 남자에게 약속한 돈의 일부분을 먼저 주었다. 범인을 매수하고 살인을 지시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몽땅 찍혔다.동영상을 본 후 사람들은 모두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조금 전까지 흉악한 모습이던 장경화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아니꼬운 태도로 일관하던 단소홍도 할 말을 잃었다.그들은 줄곧 유진우를 진범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유진우는 정말로 결백했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한순간에 받아들이자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박호철은 그대로 얼어버렸고 표정도 잿빛이 되었다.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면 증명할 길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교활한 자식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동영상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자, 다들 보셨죠?”홍길수가 씩씩거렸다.“당신들은 조금 전까지 보스를 의심하고 욕설을 마구 퍼부었어요. 진실이 드러난 지금은 어때요? 아직도 할 말 있어요?”“그게...”장경화와 단소홍은 민망한 나머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박호철,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상황 파악을 마친 이청아는 몸을 돌려 박호철의 얼굴을 힘껏 후려갈겼다. 그 바람에 박호철은 비틀거리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올랐다.“네가 내 아들을 죽였어! 죽여버릴 거야!”장경화는 포효하면서 박호철을 덮쳤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는 것으로나마 마음속의 화를 풀었다.아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었고 살인범이 바로 앞에 있는데 어찌 참을 수 있단 말인가?박호철은 그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연신 울부짖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머리를 감싸 쥐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한참이 지난 후 장경화 일행이 어느 정도 화풀이하고 나서야 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왜 이러세요?”따끔거리는 얼굴을 부여잡은 이청아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상대를 건드린 적도 없는데 왜 보자마자 따귀를 날리는 걸까?“이봐! 당신은 또 어디에서 온 미친 할망구이기에 내 딸을 때려? 당신도 맞고 싶어?”이청아가 얻어맞은 모습을 보자 장경화는 펄쩍 뛰면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무엄하다!”그때 키가 훤칠한 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험상궂은 얼굴로 말했다.“버릇없이 감히 우리 할머니께 대들어? 죽고 싶어 환장했어?”상대의 사나운 기세에 장경화는 깨갱거렸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센 척 몰아붙였다.“왜? 사람이 많다고 우릴 괴롭히려고? 내가 당신들을 무서워할 것 같아?”“경비, 이 사람들을 당장 끌어내!”단소홍이 그들을 내쫓으려 했다.“우릴 끌어내겠다고?”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이씨 그룹 전체가 우리 것인데 감히 우릴 내쫓아?”“아이고, 큰소리치기는. 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나대는 거야?”단소홍이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난 이씨 가문의 3대 직계 장손 이원기다.”남자는 가슴을 쫙 펴고 오만하게 말했다.“그리고 우리 할머니는 이씨 가문의 현 여주인이시다.”“이씨 가문의 여주인?”그 말에 단소홍과 장경화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대신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강북의 이씨 가문에서 족장 이세훈을 제외하고는 여주인의 권력이 가장 컸다. 이씨 가문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고 그녀 한마디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었다.이런 다른 레벨의 거물을 그들은 감히 건드릴 수 없다.“흥. 눈치도 없는 촌뜨기들.”이원기는 그들을 하찮게 내려다보았다.단소홍과 장경화는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큰할머니, 제가 대체 뭘 잘못하였기에 큰할머니께서 이렇게 노하신 겁니까?”이청아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왜? 아랫사람 하나 혼내는데 이유까지 필요해?”손미란이 싸늘하게 말했
동영상을 보여주면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손미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휴대 전화를 냅다 바닥에 던지더니 발로 쾅 밟아 깨뜨려버렸다.“이젠 증거가 없네?”손미란이 덤덤하게 말했다.그 광경에 사람들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건 또 무슨 경우지? 일부러 감싸주는 것도 모자라 증거 인멸까지 한다고? 이래도 되는 거야?’“큰할머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이청아가 눈살을 찌푸렸다.“다들 봤잖아. 뭐 불만 있어?”손미란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계속 이러시면 큰할아버지께 이르는 수밖에 없어요.”이청아의 표정도 얼음장같이 차가웠다.“족장님으로 날 누르겠다? 너에게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손미란이 피식 웃었다.“왜 없어요? 내 딸은 족장님이 직접 선택한 후계자예요. 그리고 곧 새로운 족장 자리에 앉을 거라고요. 그때가 되면 당신들 모두 고개를 숙이고 굽신거려야 할 겁니다.”장경화는 배짱이 점점 두둑해지면서 목소리도 높아졌다.“후계자? 새로운 족장? 누가 그래?”손미란은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했다.“족장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못 믿겠으면 전화해서 물어보세요.”장경화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전화? 그럴 기회가 없을 것 같은데?”손미란이 덤덤하게 말했다.“어젯밤에 족장님이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진 바람에 지금 의식불명이셔.”“네? 의식불명이요?”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어젯밤에도 멀쩡하셨는데 왜 갑자기 의식불명이 됐어요?”이청아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어젯밤에 이세훈이 전화 왔을 때만 해도 잘도 웃고 목소리에 힘도 넘치면서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쓰러졌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족장님의 연세가 많은 데다가 과로한 탓에 한 번 쓰러지니까 일어나지 못하시는 거야. 지금 가문의 크고 작은 일은 전부 다 내가 관리하고 있어. 또 다른 의견 있어?”손미란이 싸늘하게 훑
쿵!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를 듣자 사람들은 모두 멍하니 반응을 하지 못했다.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1초 전만 해도 박호철은 폭소를 터뜨렸는데 지금은 아래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사람들 앞에서 사람을 죽이다니? 누가 너에게 그런 용기를 주었느냐?”살짝 멍해진 후, 손미란은 순간적으로 크게 화를 냈다.박호철은 그녀의 심복일 뿐만 아니라 조카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에 있는 이 녀석은 죽이고 싶다면 죽이고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할머니, 모함하지 마세요. 저는 방금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분명 박호철 씨가 스스로 뛰어내렸어요.”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렇게 많은 눈들이 보고 있는데도 감히 변명을 해?”손미란은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누가 봤죠?”유진우는 홍길수 몇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너희들, 보았어?”“아니요, 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홍길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청아 씨, 혹시 봤어?”유진우가 이청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나도 못 봤어.”이청아도 따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호철이 이청아의 동생을 죽였으니 백 번 죽어 마땅했다.“아무도 못 봤는데요.”유진우는 어깨를 약간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할머니, 혹시 눈이 침침해서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나하고 여기서 수작을 부려?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손미란은 낯빛이 어두워졌다.“할머니, 모든 일은 증거가 있어야 해요. 증거가 없는 일은 절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돼요.”유진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리고 할머니 얼굴이 누렇고 수척하며 두 눈에 힘이 없고 감정 기복이 심하며 손가락이 가끔 경련을 일으키기도 한 걸 보니 제 추측으로는, 할머니는 아마 오래 살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몸조심하세요.”“방자하다! 감히 우리 할머니를 저주하다니? 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듣고 있던 이원기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댈 태세였다.장경화 몇 사람도 은근히 놀랐다.‘이 녀석, 이씨 가문 여주인
“해임?”이 말이 나오자 몇 사람은 더는 침착하지 못했다.“무슨 근거로요? 내 딸의 직위는 족장이 직접 임명한 거예요. 당신은 청아를 해고할 자격이 없어요!”장경화는 좀 불복했다.“맞아요! 언니는 입사한 이래로 회사에 대량의 수익을 가져다주었고, 한 달 만에 천억이 넘는 이익을 냈는데 당신이 왜 언니를 해고해요?”단소홍도 불복했다.이청아가 오기 전까지 이씨 그룹은 줄곧 적자 상태였다.이청아가 힘을 다하여 다스리고 대대적인 개혁으로 죽어가는 그룹을 기사회생시켰다.이제 겨우 성과를 냈는데, 이 사람들은 해직시키고 싶으면 해직시킨다. 그야말로 강을 건넌 뒤 다리를 부숴 버리는 격이다.“내가 지금 족장을 대행하고 있으니 내가 하는 말이 곧 법이야. 너희들이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어.”손미란이 외쳤다.“당... 당신 정말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네요.”장경화와 단소홍 두 사람은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이청아는 침착한 얼굴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표정이 좋지 않았다.비록 그녀는 회장이지만, 회사의 지분 대부분은 이씨 가문의 손에 있어 그녀는 아무런 반항의 여지가 없다.“할머니, 정말 그렇게 하시겠어요?”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왜? 이제야 겁이 나? 이미 늦었어. 내 생각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누구도 바꿀 수 없다.”손미란은 여전히 횡포했다.“할머니, 제가 알려주지 않았다고 탓하지 마세요. 당신 몸속의 독은 저만이 치료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리석게 군다면 오래 못 살 것 같아요.”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네 헛소리를 믿을 것 같아?”손미란은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믿거나 말거나요. 어차피 죽는 건 제가 아니에요.”유진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흥, 괜히 겁 주지 마. 쓸데없는 말 하기 귀찮아, 가자!”손미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사람을 데리고 돌아섰다.그녀는 전에 이청아에게 비난할 구실을 찾지 못했는데 상대방이 오히려 기회를 가져다줄 줄은 몰랐다.꼬투리가
이씨 그룹을 나올 때 손미란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그녀의 신분으로는 평소에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하든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아무도 없었다.하지만 오늘 사람들 앞에서 도발당하고 심복 한 명까지 잃었으니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어찌 됐든 이곳은 강남의 땅이어서 복수를 하려면 강북에서 사람을 옮겨와야 한다.“할머니, 어쨌거나 이청아는 할아버지가 직접 임명한 그룹 회장인데, 이렇게 공공연히 이청아를 해임시킨다면 할아버지가 깨어나신 후 설명 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이원기는 머뭇거리며 말했다.비록 금방 화가 풀렸지만, 이런 횡포한 행위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뭘 설명해야 해? 네 할아버지가 깨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가 문제인데.”손미란은 담담하게 말했다.“할아버지는 그저 고질병을 앓는 게 아닙니까? 좀 쉬고 나면 괜찮겠죠?”이원기는 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그 늙은이는 병이 재발된 게 아니다. 내가 독을 먹였어. 평생 깨어나지 못해.”손미란이 차갑게 말했다.“네?”이 말이 나오자 이원기는 벼락을 맞은 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할, 할머니... 농담이시죠?”이원기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내가 지금 너한테 장난치는 걸로 보이니?”손미란은 무뚝뚝한 얼굴에 약간의 냉기를 띠고 있다.“왜, 왜요? 왜 그렇게 하셨어요?” 이원기는 순간 식은땀이 뚝뚝 흘렀다.족장을 모해하는 건 목이 베일만큼 큰 죄이다. 일단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금혼부부라는 것이다. 수십 년 생사를 같이하며 살아왔다. 평소에도 얼마나 부부간의 애정이 깊은지 말로 다할 수 없고 서로 손님을 대하듯이 존경한다.그는 왜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독을 먹였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깊은 원한이 있는 거지?’“네 할아버지는 눈이 어두워서 이청아를 족장으로 임명하려고 해. 그리고 오늘 온 가문에 이 일을 알리려고 했어. 난 원래 좋은 말로
“그렇군요. 그런데 박호철더러 이현을 암살하라고 하신 것은 또 어찌 된 일입니까?쓸데없는 짓이지 않습니까?”이원기는 좀 이상하게 생각했다.이현은 작은 인물일 뿐, 이런 사람을 죽이는 건 자원 낭비와 같았다.“이현?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죽였겠어? 아마 박호철의 주장이겠지. 하지만 다 중요하지 않아, 이현이 죽든 말든 아무 영향 없어.”손미란은 손을 내저었다.말하고 있는데, 그녀는 갑자기 몸서리를 치더니 호흡이 가빠졌다. 동시에 찌르는 듯한 아픔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할머니, 어디 아프세요?”이원기는 곧 이상함을 감지했다.“고질병일 뿐이야, 빨리 차에 가서 약을 가져다줘.”손미란은 즉시 명령했다.“알겠어요.”이원기는 주저하지 않고 서둘러 앞에 있는 롤스로이스로 달려가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보라색 약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할머니, 약 가져왔어요.”손미란은 급히 약병을 열어 손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약병이 텅 비어 있었다.“약은? 벌써 없어?”손미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온몸의 통증이 심해지고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어서, 어서 박호철의 시체로 가서 찾아봐. 내 약이 박호철에게 있어!”손미란이 재빨리 반응했다.시간을 헤아려 보니 오늘은 마침 강씨 가문이 약을 주는 날이었다.예전 같으면 박호철이 약을 받아 강북 이씨 집안에 몰래 보내줬을 것이다.이 시점에서 쌍방은 이미 거래를 마쳤을 것이다.“할머니 잠시만요.”이원기는 주저하지 않고 두 사람을 데리고 박호철이 추락한 곳으로 달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달려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할머니, 박호철의 몸에 약이 없어요.”“약이 없다고? 그렇다면 약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단 말인가?”손미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또 재촉했다.“당장 강 집사에게 전화해서 약을 갖다 달라고 해!”지금 그녀는 좀처럼 서 있기 힘들었고 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네.”이원기는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은 계속 전
“할머니!”갑자기 쓰러진 손미란을 보며 이원기는 깜짝 놀랐다.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급히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다.한 차례 응급처치 후 손미란이 목숨은 건졌지만 상황은 매우 낙관적이지 않았다.“의사 선생님, 저희 할머니 어떤가요?”의사가 병실을 나서자 이원기가 얼른 다가가 물었다.“이원기 씨, 할머니께서 어떤 특별한 약을 자주 드시지 않나요?”의사가 떠보면서 물었다.“맞아요, 우리 할머니는 몸이 편찮으셔서 보약을 좀 드세요.”이원기는 부인하지 않았다.“보약처럼 쉬운 게 아닐걸요.”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환자가 약물중독이 심하고 체내에 독소가 많이 축적되어 있는 데다 나이가 많아 이 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여긴 가장 훌륭한 병원인데, 설마 전혀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이원기는 눈살을 찌푸렸다.“유일한 방법은 환자가 약을 계속 복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몸은 일시적으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요. 일단 약을 끊으면 3일을 넘기기 바빠요.”의사는 한숨을 쉬었다.“네?”이 말이 나오자 이원기는 당황했다.할머니가 죽는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족장 자리가 아직 손에 잡히지 않았는데, 할머니라는 후원자가 없고 할아버지 또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는 이씨 집안에서 역경에 처하게 된다.“원기야...”그때 병상의 손미란이 천천히 눈을 떴다.방금 의사가 진통제를 썼지만, 조금 완화되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치료되진 않았다.“할머니,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이원기는 얼른 앞으로 나가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내 약, 찾았니?”손미란이 허약한 얼굴로 물었다.“아직 소식이 없어요.”이원기는 고개를 저었다.“강 도련님은? 내가 두 배의 가격을 줄 테니까 약을 한 병 더 보내 달라고 해.”손미란이 말했다.“강 도련님께서 이 약은 너무 희귀해서 매년 일정한 양으로 약을 만든다고 해요. 급하게 제조한다고 해도 한 달은 걸린다고 해요.”이원기는 얼굴이 상해서 말했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