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주봉이 무릎을 꿇었을 때 뒤에 있던 그의 부하들은 전부 다 성난 얼굴이었다.청풍의 실력이 강하긴 하지만 그들이 다 함께 덤빈다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이 일이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꺼져!”청풍이 냉랭하게 호통쳤다.주봉은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부하들과 함께 황급히 도망쳤다.“대박! 멋진 한방이었어요.”“무극문의 수석 제자는 역시 대단하네요.”“공격 열 번을 다 채우기도 전에 폭도 주봉을 이기다니, 정말 진심으로 탄복합니다.”연회장 안의 무사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가뜩이나 주봉은 악명이 높고 사람을 마구 괴롭혀서 예전부터 공분을 샀다. 하지만 그의 실력 때문에 함부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그런 폭도 주봉을 청풍이 나서서 해결하자 사람들은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통쾌했다. 하여 자연스레 수많은 무사들의 칭찬을 받게 된 것이다.“봤어요? 이게 바로 우리 선배님의 위엄이에요. 아직도 우리 선배님의 실력을 의심할 겁니까?”유하가 고개를 들고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황은아가 의심해서 기분이 매우 언짢았었다.“선미 씨, 당신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유진우 씨는 찍소리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 선배님은 선뜻 나서서 나쁜 놈을 처리했어요. 누가 더 훌륭한지 제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겠죠?”청하는 고개를 돌려 조선미를 쳐다보았다. 말하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우쭐거렸다.“흥,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진우 씨는 당신네 선배에게 절대 뒤지지 않아요.”조아영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도씨 가문과의 결투에서 그녀는 유진우가 도규현을 이기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청풍의 실력도 만만치 않은 건 사실이지만 도규현과 비교하면 조금 뒤떨어지기에 당연히 유진우도 이기지 못한다.“하하... 만약 진짜로 강하다면 저렇게 뒤에 숨어서 쭈그리고 있지 않겠죠.”청하가 코웃음을 쳤다.“맞아요. 위험이 닥쳤
건장한 남자의 표정이 급변했고 몸은 통제를 벗어나 창백한 얼굴의 남자 쪽으로 재빠르게 끌려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이 그를 앞으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고 결국 창백한 얼굴의 남자에게 목이 잡히고 말았다.“너...”건장한 남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뭐라 말하려는데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갑자기 손에 힘을 주었다.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건장한 남자의 목이 비틀어지면서 그대로 숨이 멎었다.“뭐야?”난생처음 보는 기괴한 광경에 사람들은 겁에 질려 아연실색했다. 아무나 잡아도 쉽게 죽일 수 있는 이 수단은 실로 무서웠다.“다들 당황해하지 말아요. 우리 선배님이 있는 한 그 어떤 나쁜 놈도 나대지 못할 겁니다.”청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내어 겁에 질린 사람들을 다독였다.“넌 또 어디서 온 나쁜 놈이기에 여기서 행패를 부리는 거야?”두어 걸음 앞으로 나선 청풍의 눈빛이 날카로웠고 살기가 등등했다. 등 뒤의 장검이 파르르 떨리면서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난 블랙지존님의 큰 제자 창섭이다.”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손을 뿌리치자 건장한 남자의 시체가 그대로 멀리 내팽개쳐졌다.“창섭? 혈안 창섭이라고?”사람들은 저마다 아연실색했다.혈안 창섭은 세간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평소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뺏는 것을 일삼는 데다가 수단도 잔인하기 그지없었다.그가 나섰다 하면 온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건 당연했다.예전에 세간의 적지 않은 정의 사도들이 여러 번 작당 모의하여 창섭을 제거하려 했었지만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작당 모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보복을 당하다가 목숨까지 잃었다.그 후 창섭을 제거하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창섭도 한동안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오늘 이곳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드디어 오는 건가?”조선미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3일 경계한 끝에 블랙지존이 드디어 손을 쓰기 시작했다.“혈안 창섭이면 뭐? 저런 나쁜 놈이 무슨 큰 파장이라도 일으킬
주먹 한 방에 날아간 청풍을 보며 사람들은 순간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눈앞의 이 사람은 무극문의 수석 제자이자 실력이 강하기로 소문난 무도 천재다. 전에 단 몇 방으로 폭도 주봉을 이겼는데 그런 막강한 존재가 창섭의 일격에 패하고 말았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어떻게 이럴 수가... 청풍 도련님이 졌다고?”“창섭의 실력이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네. 단 일격에 무극문의 수석 제자를 처리해버렸어.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큰일 났어. 청풍 도련님마저도 창섭의 상대가 아니라면 우리가 당해낼 수 있을까?”그 순간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 쳤다.청풍의 실력도 충분히 강한데 창섭의 실력은 더욱 강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상대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력자가 매우 많았고 게다가 실력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인해전술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선배님.”잠깐 넋을 놓다가 정신을 차린 유하와 청하의 표정이 급변했다. 후다닥 달려가 중상을 입은 청풍을 일으켜 부상 치료에 탁월한 단약을 먹였다.“저 자식 너무 강해. 당장 사부님께 연락해.”청풍은 가슴팍을 움켜쥔 채 비틀거렸고 얼굴에는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조금 전 창섭은 썩은 나무를 꺾듯이 그의 공격을 쉽게 막아냈는데 청풍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너무도 컸다.이젠 그의 사부와 사숙이 직접 나서야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무극문의 수석 제자도 개미 새끼에 불과하군. 당당하게 나선 김에 그냥 죽어.”주먹 한 방으로 청풍을 제압한 후 더욱 날뛰기 시작한 창섭은 다시 한번 주먹을 뻗었다.윙!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엄청난 진기가 솟아오르면서 커다란 주먹으로 변하더니 청풍을 덮치려 했다.“선배님, 비키세요.”유하와 청하가 청풍을 밀어내고 주먹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쿵!엄청난 굉음과 함께 유하와 청하도 멀리 날아가 중상을 입고 피를 토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창섭의 상대가 아니었다.“유하, 청하야!”청풍의 표정이 급변했고 분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전부 유진우에게 쏠렸다.“너 이 자식 감히 블랙파의 제자를 죽여? 간덩이가 아주 부었구나.”창섭은 유진우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시뻘건 두 눈이 더욱 살벌하게 느껴졌다.“여기서 항복하고 물러선다면 완전한 시체는 거둘 수 있게 해줄게.”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한마디에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세상에나! 저 자식은 누구야? 누군데 저렇게 나대?”“대놓고 창섭을 도발하다니. 정말 죽으려고 환장했나?”“이런 상황에 나서서 나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이야.”무사들은 수군거리며 마치 바보를 쳐다보는 듯했다.창섭의 악명이 자자했고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심지어 무극문의 고수도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름도 없는 녀석이 저런 소리를 한다고? 대체 무슨 배짱으로?“유진우 씨,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 선배님마저 창섭의 상대가 아닌데 당신이 뭔데 나대는 거죠?”유하가 불쑥 한마디 했다.“맞아요. 고작 그 실력으로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고요.”청하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당신네 선배가 안 된다고 해서 나까지 안 된다는 법은 없죠. 끼어들지 말고 물러나 있어요.”유진우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뭐라고요?”유진우의 말에 청풍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유진우 씨, 당신이 뭔데 날 무시해요? 내가 창섭의 상대는 안 돼도 당신 하나쯤은 쉽게 해결할 수 있어요.”“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면서 큰소리는.”유진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당신!”청풍이 이를 꽉 깨물었다. 중상을 입지만 않았으면 유진우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건데.“우리가 좋은 마음으로 귀띔해줘도 듣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죠. 결과가 어떻든 혼자서 책임져요, 그럼.”유하가 미간을 찌푸렸다.“흥. 좋은 말로 설득하는데도 죽겠다고 달려드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냥 죽게 내버려 둬.”청풍의 얼굴에 독기가 가득했다. 유진우가 당장이라도 창섭의 손에 죽길 바랐다.“시체를 거두게 해주겠다고?”창섭은
연회장 전체의 모든 잡음이 사라졌다. 어찌나 조용한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바닥에 떨어진 창섭의 머리를 보며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그리고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이라 뭇사람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고 사람들을 압도하던 창섭이 유진우에게 질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그것도 단 일격에 말이다.“내...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창섭이 죽었어?”“검 한번 휘둘러서 창섭을 죽이다니. 저 녀석 대체 무슨 괴물이야?”“정말 무서운 검이야. 세간에 언제 저런 고수가 생겨났대?”침묵도 잠시 현장 전체가 다시 떠들썩해졌다.유진우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놀라움과 경악이 가득했고 저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창섭이 세상을 뒤흔들만한 검을 휘둘렀을 때 다들 유진우가 무조건 죽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가?유진우가 죽기는커녕 되레 창섭을 쉽게 처리해버렸다. 실로 놀라운 실력이 아닐 수 없다.무릎 꿇고 굴복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던 그의 망언이 지금 전부 현실이 되었다.“어... 어떻게 이럴 수가... 저 자식 왜 저렇게 강해?”청풍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그의 눈에 비친 유진우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명성이 자자한 혈안 창섭을 이길 거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저렇게 강했어?”유하와 청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경악했다. 두 사람의 선배인 청풍마저도 창섭의 손에 패했는데 유진우는 검 한번 휘두르고 창섭을 죽였다. 유진우의 실력이 청풍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뜻했다.조금 전에 그에게 범한 실례와 무시했던 것만 생각하면 유하와 청하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거물을 못 알아보고 나댔던 건 오히려 그녀들이었다.“역시 아저씨는 대단하다니까.”황은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유진우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짙어졌다.“형부 대박. 정말 최고라니까요.”조아영
다시 도망쳐 나왔을 때는 이미 피부가 짓물러져 있었고 온몸에서 고름이 흘러나왔으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아마 오래 못 살 것 같다.“저들을 놓쳐서는 안 돼, 쫓아가!”가면을 쓴 두 명의 킬러가 조선미 일행을 추격하려 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검이 휘둘리더니 그 두 사람의 머리가 잘려나갔다.“너희 상대는 나야.”유진우는 검을 손에 들고 위엄있게 맨 앞에 섰다.그 독극물들은 마치 무엇을 두려워하는 듯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저 녀석을 죽여라! 선배를 위해 복수하자!”분노의 외침과 함께, 검은 옷과 가면을 쓴 킬러들이 즉시 유진우를 포위하였다.그들의 공격 수단은 무기뿐만 아니라 독극물, 심지어 환술까지 사용한다.막으려야 막을 수 없다.“오늘, 한 사람도 나갈 생각을 하지 마.”유진우는 차갑게 말하고 검을 들어 무리 속으로 쳐들어갔다.피 튀기는 전쟁이 순식간에 벌어졌다.그 시각, 화원.조선미 일행은 폭설을 무릅쓰고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새하얀 대지에 발자국들이 하나하나씩 찍혔다.“언니, 그 사람들이 쫓아오지 않은 것 같아. 우린 인제 안전해.”2,300미터를 달려 조아영은 숨을 헐떡거렸다.“선미 아가씨, 선배가 많이 다쳐서 빨리 치료해야 해요. 안전한 곳을 찾아 먼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유하가 말했다.조선미는 고개를 돌려 청풍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창백하고 팔다리에 힘이 없는지 서 있기도 힘들어했다. 분명히 큰 부상을 입었다.“회의실로 가자. 조씨 집안의 엘리트들이 모두 거기서 회의를 해.”그녀는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가요.”몇 사람이 막 출발하려고 할 때 덩치가 큰 무리의 건장한 남자들이 갑자기 꽃밭에서 걸어 나왔다.맨 앞에 있는 사람은 전의 폭도 주봉이었다.“미녀 여러분, 어디 가십니까?”주봉은 사악하게 웃으며 나쁜 마음을 품은 눈빛으로 조선미 몇 사람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주봉, 조씨 가문에 외적이 침입했는데, 너희들 어서 빨리 가서 지원해.”조선미가 외쳤다.“지원? 허허.
“개자식아, 그만해.”유하와 청하가 강제로 침범당할 것을 보고 황은아가 더는 참지 못했다.‘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개, 돼지만도 못하네.’“이쁜이, 조급해하지 마. 우리가 이 두 사람과 잘 놀고 그 다음 천천히 너랑 놀아줄게.”한 무리의 건장한 남자들이 방자하게 웃으며 마치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너희들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지 마.”황은아는 화가 나서 단검을 뽑아 무리 속으로 직접 쳐들어갔다.몇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몸에 상처가 나자 놀라 뒤로 물러났다.“감히 우리의 좋은 일을 망쳐? 오늘은 너와 먼저 자야겠어.”반응이 돌아온 후, 남자들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가 났다.칼을 빼려다가 주봉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이 녀석들아, 미녀에게 어찌 거칠게 대할 수 있어?”“이쁜이, 아저씨들이랑 놀고 싶어도 줄은 서야지?”“꺼져, 다시 가까이 오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황은아가 외쳤다.“그렇게 화내지 마. 아저씨는 악의가 없어. 일단 칼 먼저 줘, 이런 물건은 너무 위험해서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주봉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꺼져!”황은아는 칼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주봉의 손을 스치자 피가 났다.주봉의 미소가 굳어지고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쁜이,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어.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은아야, 함부로 하지 마.”그때 황백이 갑자기 앞으로 달려가 딸 앞을 가로막고 웃는 낯으로 대했다.“제 딸이 어려서 철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세요.”“용서?”주봉은 콧방귀를 뀌었다.“영감탱이, 방금 내가 칼에 베였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배상, 제가 배상할게요.”황백은 주머니에서 40억짜리 수표 한 장을 더듬어 꺼내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바로 전에 윤호가 준 배상금이다.“오, 그래도 적지 않은 액수네.”주봉은 수표를 받아 즉시 호주머니에 넣었다.“어르신, 돈은 이미 배상했으니 인제 저희 가도 되죠?”황백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놔요.”황은아는 그를 뿌리치고 화를 냈다.“아빠가 비겁하게 죽음을 무서워하는 건 아빠 일이에요. 어쨌든 난 아빠처럼 비굴하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갈 수 있다 해도 조선미와 몇 사람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설마 동료를 버리고 구차하게 살아가야 하는 건가?이 문제에 대해 그녀는 할 수 없었다.“은아야, 푸르고 무성한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어. 목숨부터 지키는 게 중요해.”황백이 황은아를 말렸다.“갈 거면 아빠 혼자 가요. 난 상관 하지 말고요.”황은아는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이런 비겁한 모습을 가장 경멸했다. 여태까지 무슨 일을 당해도 언제나 굽실거리고 비굴하게 굴었다. 한 번도 정정당당한 남자인 적이 없다.아버지의 나약함 때문에 그녀는 어려서부터 웃음거리가 되어 고개도 들지 못했다.그녀는 일찌감치 설령 몸이 부서져도 절대 존엄을 잃지 않겠다고 맹세했다.“은아야, 제멋대로 굴지 말고 빨리 따라와.”황백은 조금 초조해져서 딸을 강제로 끌고 가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신경 쓰지 마요. 꺼져요!”황은아는 힘껏 밀어 황백을 땅에 쓰러뜨렸다.이 모습을 본 주봉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이쁜이, 넌 네 아버지의 충고를 들었어야 해. 비록 너희들은 여전히 갈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더 재미난 구경거리를 볼 수 있었어.”그는 처음부터 두 사람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순전히 가지고 놀려고만 했을 뿐이다.“난 네가 좋은 뜻을 품지 않았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어. 죽어!”황은아는 화가 나 칼을 들어 주봉을 찌르려고 했다. 주봉을 죽인다면 위기는 자연히 풀릴 것이다.“주제넘긴.”주봉은 고개를 가로젓고 빠르게 바로 복부를 걷어찼다.황은아는 끙끙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서 넘어졌고 입가에 피가 흘렀다.한순간 일어서려야 일어설 수가 없었다.“이쁜이, 네가 이렇게 잘난 체하면 내가 제일 먼저 너와 잠자리를 할 거다.”주봉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황은아의 옷을 벗기려고 했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죽도록 애쓰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이만기도 그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이었기에 사실 이만기도 잘못한 것은 없었다.“장혁 씨 아버님께서도 여러 번 저를 구해 주셨고 또 저를 그렇게 신뢰해 주셨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정말 부끄럽습니다.”각진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만약 유진우가 그를 꾸짖거나 때렸다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했을 것이다.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유진우는 전혀 그를 탓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진으로 더욱 하여금 죄책감에 빠지게 했다.“각진 스님,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희는 호룡각과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왜 저희를 암살하려 했던 걸까요?”유진우가 다시 물었다.“장혁 씨가 한 일들이 호룡각에게 위협을 줬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경고의 의미로 보낸 듯합니다.”각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십 년 전, 장혁 씨네 서경왕부는 권세가 막강했고 명성이 자자했어요. 황제의 권위마저도 능가하는 듯했죠. 호룡각은 서경왕부의 존재가 그들의 지위를 위협했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그저 넘어갈 수는 없었던 거예요.”“고작 그런 이유로 제거하려 했다고요?“유진우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의 눈빛에 냉기가 흘렀다.“장혁 씨, 서경왕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영향력이 크답니다.”각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장혁 씨 아버님께서 훌륭하신 것뿐이라면 호룡각은 참고 넘어갔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장혁 씨네 가족은 다들 지나치게 좋은 유전자를 가졌잖아요.”“장혁 씨 아버님인 육만군 씨는 잘생기신 데다가 재능도 뛰어나신 분이었죠. 수십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셨고요. 그는 왕에 준하는 분이셨고 오십만 정예 군을 지휘했었죠.”“장혁 씨 어머님이신 진소연 씨도 대단한 사람이셨어요. 삼십 대 초반에 이미 무도 미스터로 되신 독보적인 분이셨죠.”“그리고 장혁 씨도 예사로운 분은 아니시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신의 보호를 받은 분이시니까요. 열다섯 살에 마스터 경지에 도달
“좋습니다!”각진 스님의 말을 듣자, 유진우는 돌려 말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각진 스님, 저는 단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당시 우리를 암살하려 계획했던 배후의 주동자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역시 그것이었군요.”각진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뻔히 예상했다는 듯, 바로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유 시주님, 호룡각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호룡각이요?”유진우는 눈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유만준에게서 몇 마디 들은 적은 있지만, 잘은 모릅니다.”“모르신다면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각진 스님은 숙연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호룡각은 나라가 세워질 때 만들어져 황제의 권력 위에 존재하던 기구였습니다. 그곳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최정상급 고수들이었죠.그중 누구 하나만 뽑아도 수많은 군사와 맞먹을 만큼 강했습니다.특히 호룡각의 수장인 이원무의 능력은 더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온 천하를 통틀어 용호산의 속세를 떠난 도사 외에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이 없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현 황제가 이원무의 도움으로 즉위했다는 점이었다.어떻게 보면 황제라는 존재는 이원무가 마음대로 조종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황제의 권력과 자리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이런 자가 바로 이원무였다. 이른바 호룡각의 본모습이었다.말을 끝맺으며 각진 스님의 눈에 분개의 기색이 스쳤으나, 더 깊은 것은 무력감이었다.황실의 혈족이자 황제의 아우로서, 그는 호룡각의 진정한 공포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이원무는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호룡각 구성원 하나도 황제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었다.더욱 서글픈 것은 그들에게 저항할 어떤 수단도 없었다는 점이었다.반기를 든 자들은 모두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니까.호룡각은 겉으로는 보호를 위한 조직이었으나, 실제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무법천지가 되어버렸다. 전후로 얼마나 많은 천리를 어기는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정도였다.더욱 절망적인 것은 누구도 그들을 관리할 수도, 감히
서하사의 법당은 크지 않았고 금빛 화려한 장식도 없었으며, 정면에는 단지 3-4미터 높이의 석가모니 불상 하나만 모셔져 있었다.소박한 모습이었지만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불상 주변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불상 앞 방석 위에는 마른 체형의 중년 스님이 앉아 있었다.황적색 가사를 입고 눈을 감은 채 한 손으로는 목어를 두드리고 다른 손은 입 아래에 둔 채 경문을 읊고 있었다.매우 신실한 모습이었다.“주지 스님, 유 시주님이 와계십니다.”가사 입은 스님이 앞으로 나아가 조용히 전했다.이 말에 주지 각진 스님은 드디어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일어나 유진우에게 합장하며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유 시주님, 오래간만입니다.”“그러게요,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지금 각진 스님이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임강왕 전하라고 불러야 할까요?”“저는 이미 세속의 인연을 끊고 법호를 각진이라 하오니, 그저 각진이라 부르시면 됩니다.”각진 스님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유진우는 담담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각진 스님, 제가 오늘 갑자기 찾아온 것은 주로 몇 가지 의문점을 해소하고 싶어서입니다.”“유 시주님께서 물으시려는 것은 10년 전의 일들이겠지요?” 각진 스님은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맞습니다.” 유진우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진 스님, 10년 전 당신은 아직 출가하지 않으셨고 자금성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계셨죠. 당연히 내막을 알고 계실 텐데, 숨김없이 진실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유 시주님, 지난 일은 모두 지나갔는데 왜 과거에 매달리시나요?” 각진 스님이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지나간 일이라도 없었던 일이 되진 않습니다. 전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인데, 그게 잘못된 걸까요?" 유진우가 반문했다.“어떤 진실은 모르는 게 차라리 낫습니다. 알게 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각진 스님이 조심스레 경고했다.“저는 이미
“누구시길래 여기까지 오신 거요?”두 스님은 즉시 자리를 바꾸어 앞뒤로 유진우의 진퇴로를 막아섰다.두 사람의 눈빛은 매섭게 경계하며 날카롭게 주시했다.그들은 이곳에서 여러 해를 은거하며 세상과 단절한 채 외부인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갑자기 낯선 사람이 나타나 왕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만나자 하니 분명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다.“저는 유장혁이라고 합니다. 임강왕을 뵈러 왔으니 길을 비켜주시면 좋겠습니다.”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유장혁이라고?”두 스님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더욱 놀란 표정이었다.“유 시주님, 이곳은 절입니다. 임강왕이란 분은 계시지 않으니 돌아가십시오.”둥근 얼굴의 스님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두 스님, 멀리서 왔으니 진심을 담아 뵙고 싶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한 번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유진우는 예를 갖춰 합장하며 인사했다.“유 시주님, 난처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 절은 너무 작아서 시주님 같은 귀한 분은 모시기가 힘듭니다.”둥근 얼굴의 스님이 말했다.“부처님께서는 인과를 말씀하셨죠. 각진 스님께서 10년 전에 뿌린 씨앗, 이제는 거둬들일 때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피해 숨기만 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일일 뿐입니다.” 유진우가 당당하게 말했다.“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군요.” 둥근 얼굴의 스님이 냉랭하게 말했다. “유 시주님,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만 주지 스님은 참선 중이시라 외부인은 만나지 않으십니다. 돌아가십시오!”“좋게 말씀드렸는데 굳이 막으시겠다면 강제로라도 들어가야겠습니다.” 유진우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어떻게든 오늘은 이만기를 만나야만 했다.“유 시주님! 법당은 성스러운 곳인데 어찌 이리 난동을 부리려 하십니까?!" 둥근 얼굴의 스님이 호통쳤다.“더 이상 떠나지 않으시면 몽둥이로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스님이 짜증난 듯 말했다.“한번 해보시죠.”유진우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법당으로 들어가려 했다."방자하도다!"두 스님은 이를
유진우는 거침없이 진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결국 절 정문 앞에 이르렀다.문 위에는 현판 하나가 걸려있었는데‘서하사'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서하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절이었고, 겉모습을 보니 꽤 오래된 듯 여러 곳이 낡아 있었다.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임강왕이 이런 작은 절에 몸을 숨기고 있을 줄을.유진우는 앞으로 다가가 절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후 조금 더 힘주어 두드렸다.“예, 갑니다.”절 안에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일고여덟 살 정도의 동자승이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유진우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며 물었다. “시주님, 무슨 일이 신가요?”“산에서 길을 잃었는데 마침 절이 있어서 물 한 잔 청하러 왔습니다. 괜찮을까요?” 유진우는 거짓말을 지어냈다.“얼마든지요, 시주님. 이리 들어오세요.”동자승은 아무런 의심 없이 절 문을 열어 유진우를 안으로 들였다.오랜만에 외부인을 보아서인지 동자승은 무척 신이 난 듯 재잘재잘 끊임없이 물었다. “시주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죠? 진산엔 맹수들이 많아서 다행히 낮에 길을 잃으셨네요. 밤이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아, 그리고요. 길을 잘 모르시면 제가 나중에 산 아래까지 모셔다드릴게요.”“고맙습니다.” 유진우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이 동자승이 꽤 재미있는 녀석이네.’“당연한 일이에요.”동자승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출가한 사람은 자비를 품어야 하니 누군가 어려움에 부닥쳤다면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야 한다고 하셨어요. 한 생명을 구하는 게 7층 탑을 짓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거든요.”“실례지만 한 가지 여쭤볼게요. 서하사에는 모두 몇 분이나 계신가요?” 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몇 분이냐고요?”어린 스님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더니 말했다. “우리 서하사에는 주지스님이 계시고, 제 스승님, 그리고 두 분의 사숙님들, 거
“무슨 일이야?”이원무는 몸에 묻은 돌을 털어내며 천천히 제단에서 내려왔다.붉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서 마치 모든 것을 무시하는 신과 같았다.사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원무의 존재는 하늘의 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손가락 하나로도 순식간에 사람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어르신님, 용담적염창이 갑자기 이상한 기운을 내뿜었는데 무언가에 반응한 것 같습니다.”호룡각의 제자가 말했다.“이상한 기운이라?”이원무는 뒤에 있는 붉은 장창을 돌아보고는 손짓하여 불러들였다.“윙-!”붉은 창이 은은한 울림과 함께 땅을 박차고 올라와 이원무의 손아귀에 딱 들어왔다.이원무는 눈을 감고 세심히 살피더니 곧 답을 얻었다.“그래서 용작검이 세상에 나타난 거였구나. 네가 이리 예민하게 반응한 게 이해되는군.”이원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그래, 용작검이 세상에 나타났구나. 네가 이리 흥분한 것도 당연하군.”이원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이 말에 호룡각 일원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용작검이라고요? 그 유명한 천하제일검 말씀인가요?”“제가 알기로 용작검은 지금 검신 백준의 애검인데, 혹시 백준이가 연경에 들어온 걸까요?”“흥! 정말 배짱 하나는 크구나. 호룡각의 허가도 없이 감히 연경에 침입하다니, 완전히 법도 모르는 자로군!”용작검의 등장 소식에 놀라는 이도 있고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호룡각은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천하의 대소사를 관장하니, 누구든 어떤 세력이든 호룡각 앞에서는 머리 숙여야만 했다.백준은 앞서 알리지도 않고 연경 땅에 제멋대로 들어와 호룡각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이런 행동은 분명히 호룡각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었다.“너희는 용맥을 지키고 있어라. 내가 나가서 살펴보겠다.”이원무는 한마디만 던지고 몸을 휘둘러 붉은 광채가 되어 순식간에 하늘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이원무가 떠나자마자 호룡각 일원들은 즉시 산을 지키는 대진을 발동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용천산 아래에는 용국의 용맥
“경성아, 서하사 일로 점을 봤더니 징조가 아주 안 좋아. 이러다 나라가 뒤집힐 수도 있겠어.”백발노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라가 뒤집힐 정도예요? 혹시 유장혁의 목숨이 위험하단 거예요?”이경성이 불안한 듯 되물었다.어젯밤에 특별히 당부했던 거고, 호신부적까지 건네준 것도 다 유장혁이 무사하길 바라서였다.만약 그가 죽기라도 하면 전쟁이 벌어지고 피바다가 될 테니까.“유장혁 얘기가 아니라, 국운... 그러니까 용맥 말이야.”백발노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번 서하사에서 벌어질 일로 인해 누군가가 용맥을 훼손할 거야. 그러면 국운이 떨어지고 큰 재앙이 닥쳐서 온 나라가 뒤바뀔 거다!”“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하단 말씀이세요?”이경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황실의 일원이자 흠천감의 제자로서, 그녀는 당연히 용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한번 망가지면 황실이 혼란에 빠지고 권력이 바뀌며, 심각한 경우에는 왕조까지 교체될 수 있는 일이었다!“스승님, 이를 막을 방법이 있을까요?”이경성이 근심스레 물었다.“운명이 이미 정해졌으니, 바꿀 수 없다. 이제는 하늘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구나." 백발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가 천기를 살펴 해결 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크게 떨렸다.이는 하늘이 보내는 경고였다.만약 그가 그렇게 했다간,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아 목숨을 잃을 것이다.“중대한 일이니, 돌아가서 전하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스승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이경성이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쓸데없는 수고일 뿐이다. 황제라 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테니.”백발노인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어떻게든 시도는 해봐야 합니다.”이경성의 눈빛이 단호했다.“그러려무나, 가보아라.”백발노인은 더 이상 만류하지 않고 가볍게 한숨지으며 말했다.“네게는 천운이 있으니, 운명을 완전히 바꾸진 못하더라도 어쩌면 피해는 조금은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천기각 백효당.선우현은 평소 아끼던 보물 함을 열어 그 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양피지의 표지에는 세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경세방(驚世榜)!천기 각의 경세방은 천하의 가장 뛰어난 강자들을 모두 망라했다.방에는 나이 제한도 없고 남녀 구분도 없으며, 노소의 차이도 없었다. 오직 실력만이 기준이었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방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명성이 자자한 전설적인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선우현은 봉인을 조심스럽게 뜯고 양피지를 천천히 펼쳤다.그 안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으며, 열 개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위에서 아래로 차례로제1위: 용호산의 장선기제2위: 호룡각의 이원무제3위: 서량검신 백준제4위: 검종 종주 홍흥조제5위: 천하회 종주 소무명제6위: 무고교 교주 공대숙제7위: 한상성 성주 한상제8위: 진무사 사장 반유림제9위: 흑방의 고혼제10위: 대내 상시 부규환선우현은 명단을 한번 쭉 살펴본 뒤, 붓을 들어 제10위인 부규환의 이름 옆에 표시를 그었다. 그러고는 붓을 위로 올려 제9위 고혼의 이름 옆에도 표시했다. 그때 백효당의 제자 하나가 급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와 죽간을 올리며 보고했다.“당주님, 긴급 소식입니다. 한상 성주가 드디어 성을 나섰답니다!”“뭐라고?”선우현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적잖이 놀란 듯했다.한상이란 자가 10년째 성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갔는데, 하필 오늘 그 규칙을 깨다니.“한상이가 어디로 갔지?”선우현이 입을 열었다.“연경 쪽으로 향했습니다. 아마도 진산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진산 서하사란 말이지?”선우현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재밌군... 안위순에 이어 고혼, 이제 한상까지 움직였어. 육장수 녀석이 오늘 살아남기 힘들겠는데.”정보망으로 유명한 백효당은 사방에 정보원들이 깔려 있어 소식을 빨리 접했다.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늘 가장 먼저 알아냈다.어젯밤부터 연경이 소란스러웠는데, 오늘 아침엔 더욱 심상치 않
바보는 자두의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주면서 말했다. "자두야, 잘 기억해. 밥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있어. 난 이만 가야겠다." 자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보가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알게 되었다. 바보가 자신에게 준 책이 수많은 대가가 평생 꿈꾸던 값진 보물이었다는 것을.그날 평안 촌 개울가에는 몇몇 아줌마들이 빨래하면서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집안일이랑 동네 뒷담화로 한창 재미가 붙어있을 때였다. "야, 저기 좀 봐! 멋진 남자 왔다!"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들 뒤를 돌아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저기 바보 아냐?""바보라고?"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자세히 보더니 마침내 알아보고 놀라며 말했다."어머나! 진짜 바보네.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달라 보여?""옷도 말끔하고, 머리도 단정하고, 얼굴에 바보 같은 웃음도 없어졌어. 이러니까 제법 멋있어" 여자들이 수군거렸다. "춘자 씨! 바보 왔어!"노란 옷을 입은 아줌마가 저 멀리 향해 외쳤다. "응?" 춘자라고 하는 아줌마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평소에는 어리숙하기만 하던 바보가 웃으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단정한 이목구비에 깊이 있는 눈빛이 더해져, 전체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바보 맞아?" 춘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춘자 씨, 나 멀리 가야 해서 오래 못 돌아올 것 같아. 집 일은 네가 좀 봐줘."바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것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동안 바보는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맨날 몇 마디 단어만 멍청하게 되풀이하더니, 갑자기 조금 전엔 말도 똑똑하게 하고 목소리도 또렷하니 보통 사람처럼 말하는 게 아닌가. 정말 깜짝 놀랐다. "너....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춘자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멍하니 쳐다보았다."춘자 씨, 이렇게 오래 날 보살펴줘서 정말 고마워. 너랑 결혼한 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