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백은 황급히 몸을 굽혀 인사했다.“선미 언니.”황은아도 덩달아 인사를 건넸다.예전에 아버지가 조씨 가문에서 일하실 때, 그녀는 조선미와도 많이 만났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상대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맏언니이고 자주 그녀에게 선물을 줬었다.다만 조선미가 강능으로 가서 발전한 뒤로는 좀처럼 만나지 못했다.“은아야, 2년 만에 보니 너 갈수록 더 예뻐지네.”조선미는 웃으며 한마디 칭찬했다.“언니야말로 정말 너무 예뻐요. 전 서울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언니 얼굴을 부러워하는지 몰라요.”황은아는 흠모하는 얼굴이다.조선미의 미모와 기질은 서울은 물론, 강남 전체를 놓고 봐도 그녀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다.“꼬맹이가 말을 참 잘하네.”조선미는 손을 뻗어 황은아의 코를 살짝 다치고 뒤에 있는 폐허를 훑어봤다.“두 사람의 집이 허물어진 거 같네요. 이렇게 해요, 당신들 나랑 조씨 집안에서 마침 우리 옛이야기도 나눌 겸 며칠 지내요.”“아가씨,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다시 다른 장소를 찾으면 돼요.”황백은 완곡히 거절했다.“새해가 다가오는데 어디 가서 찾을 건가요? 어차피 우리 집은 넓기도 하고 방도 많잖아요. 그리고 당신들도 잘 알고 있으니 며칠 묵어도 괜찮지 않겠어요?”조선미는 개의치 않았다.“이건...”황백은 조금 난처해하는 눈치였다.“선미 언니 말이 맞아요, 아빠가 가기 싫으면 내가 갈게요.”황은아는 콧방귀를 뀌었다.“아저씨, 주저하지 마시고 얼른 차 타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조선미가 재촉하기 시작했다.“그럼 며칠만 아가씨께 폐를 끼치겠습니다.”황백은 좌우를 둘러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성의는 거절하기 어려우니, 더 이상 거절하면 호의를 무시하는 게 된다.차에 오르자 일행 4명은 곧 성중마을을 떠났다.30분 후 차량은 조씨 별장으로 진입했다.차창 너머로 낯익은 광경을 보며 황백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조씨 집안에서 여러 해 동안 머물러 이곳이 그
“아저씨, 이 일에 관하여 계획이 있으세요?”유진우가 물었다.“블랙지존이 온다면 당연히 미리 준비해야죠. 만일에 대비하여 거금을 들여서라도 세간의 고수들을 불러 경호를 맡길 생각이에요.”조군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블랙지존은 무도 레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주술에도 능했다. 조씨 가문의 호위무사들로는 턱없이 부족하기에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실력도 강해져 조씨 가문의 손실을 줄일 수 있다.“아저씨, 블랙지존은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이 아주 많아요. 게다가 하나같이 실력이 뛰어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해요.”유진우가 귀띔했다.“네, 조심할게요. 요 며칠 나쁜 놈들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조씨 가문의 경계를 강화할 거예요.”조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우리 조씨 가문에 비장의 카드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대체 뭐예요?”조선미가 불쑥 물었다.“한 사람이야.”조군수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사람요? 그게 누군데요?”조선미는 더욱 궁금해졌다.“강남에 5대 마스터가 있는데 바로 황보용명, 독고영재, 송만규, 방기덕, 그리고 황동해야. 그리고 내가 말한 그 사람이 바로 5대 마스터 중 한 명인 황동해고.”조군수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마스터 황동해요?”조선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강남의 5대 마스터는 명성이 자자한 거물들이다. 마치 높은 산처럼 우뚝 솟은 존재라 평소 쉽게 만날 수도 없고 가까이할 수도 없다. 그런 마스터 앞이라면 일반인이든 내공 무사든 개미 새끼 한 마리에 불과하다고 한다.예전에 마스터 레벨 아래는 전부 다 개미 새끼라는 말이 세간에 떠돌기도 했다. 단지 이것만으로도 무도 마스터의 존재가 얼마나 엄청난지 알 수 있다. 5대 마스터 중에서 아무나 나서도 조씨 가문을 쉽게 멸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하여 아버지가 말한 비장의 카드가 황동해 마스터라는 걸 들었을 때 이토록 경악했던 것이었다. 경악 뒤에는 곧바로 의문이 따랐다.“아빠,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죠?
“알았어요. 족장이신 아버지께서 결정하세요.”조선미는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황동해라는 비장의 카드는 확실히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 가장 좋은 결과는 조씨 가문이 자신의 실력으로 이 위기를 넘기고 블랙지존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비장의 카드도 계속 남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문 사람을 격려하고 분발시킬 수 있다.“아저씨, 저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블랙지존과 조씨 가문 사이에 대체 무슨 원한이 있는 거예요?”그때 유진우가 갑자기 물었다.“그게...”조군수는 말하려다가 멈췄다.“다른 뜻 없이 그냥 물어본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아저씨.”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 가문의 비밀과 직결된 일이라서 말하기 곤란한 건 사실이었다.“아빠, 얘기해주세요. 진우 씨가 남도 아닌데.”조선미가 설득에 나섰다. 양측의 원한에 관해 그녀도 절반밖에 알지 못했다.“그래. 다들 궁금해하니 얘기해주지.”조군수는 2초 정도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기로 결심했다.“우리 조씨 가문과 블랙지존 사이의 원한은 사실 그리 복잡하지 않아. 주요하게 재물 문제거든.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씨 가문의 조상은 왕실이었어. 한창 잘 나가던 시기에 정말 나라와 대적할 만한 정도의 엄청난 재물을 모았어. 나중에 왕권이 교체되면서 조씨 가문의 조상은 재물을 안전한 곳에 묻고 보물 지도도 만들었어. 그리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보물 지도를 세 등분으로 나눠서 조상의 세 아들에게 나눠주었지. 조상은 그 보물로 재기하려 했으나 세 아들의 사이가 틀어져서 원수가 된 바람에 세 아들은 보물 지도를 가지고 종적을 감춘 거야. 그때부터 조씨 가문은 세 갈래로 나뉘어서 각자 발전하게 됐어.”“수백 년 동안의 갈고 닦은 끝에 조씨 가문의 세 혈통은 강한 것도 있고 약한 것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잘 나가는 집안도 있고 망한 집안도 있어. 보물 지도는 그렇게 한세대 한세대 거쳐서 전해졌어. 그러다가 10년 전에 중주에 재난이 발생하면서 용국 대지진이 일어났잖아. 하룻밤 사이에 우리 조씨 가문의 가장
“유일한 생존자요?”그 말에 유진우와 조선미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블랙지존의 성도 조씨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조씨 가문과 뿌리가 같다니, 이러니 그 많은 비밀을 다 알고 있지.“세 혈통은 원래 뿌리가 같지만 블랙지존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가족까지 무참히 살해했어요.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네요.”조선미는 너무도 화가 나 책상을 탁 쳤다. 진실을 알게 된 후 오히려 더 분노가 끓어올랐다. 만약 양측 사이에 깊은 원한이라도 있다면 지금 이 사태가 벌어진 게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단지 보물 지도의 일부분 때문에 조씨 가문을 수년간 해했다는 건 실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어. 보물 지도의 유혹이 너무 커서 블랙지존은 손에 넣기 전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조군수가 말했다.“세 혈통 중에서 한 혈통이 사라졌다는 건 보물 지도의 한 부분도 모자란다는 뜻이잖아요. 블랙지존이 갖은 수단을 써서 우리가 가진 보물 지도를 손에 넣는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여전히 쓸모없는 거나 마찬가지죠.”조선미가 싸늘하게 말했다. 완전하지 않은 보물 지도로는 당연히 보물을 찾을 수 없다. 조선미는 블랙지존이 오로지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하고 객관적인 건 미처 고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블랙지존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서 진작 이성을 잃었어. 이 보물 지도는 네가 족장이 된 후에 너에게 물려줄게. 꼭 잘 지켜야 해.”조군수가 진지하게 말했다.“싫어요. 그냥 아빠가 쭉 족장 자리에 있어요. 전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요.”조선미가 손사래 쳤다.보물 지도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서 그녀가 물려받는다면 나중에 귀찮은 일이 얼마나 많이 생길지 아무도 장담 못 한다.“됐어. 나중의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 나도 널 강요할 생각 없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블랙지존을 상대하는 거야.”조군수가 당부했다.“앞으로 사흘 동안 두 사람은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 저택에만 있어. 그리고 기인들
‘역시 소문대로 절세 미녀야.’“무극문의 둘째 제자 청하가 족장님을 뵙습니다.”“무극문의 셋째 제자 유하가 족장님을 뵙습니다.”두 여인도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인사를 올렸다.“그래요, 그래요. 마침 잘 왔어요. 얼른 앉아서 차 좀 마셔요.”조군수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집사에게 얼른 다과상을 준비하라고 했다.“족장님께서 어려운 일에 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도움을 드리러 왔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말씀하세요. 꼭 해결해드리겠습니다.”청풍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세 분이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많이 피곤했을 텐데 오늘은 일단 쉬고 얘기는 내일 다시 하도록 하죠. 아 참, 수장님은 왜 안 보이시죠?”조군수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무극문의 제자 세 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적어도 몇몇 장로나 혹은 수장이 직접 나서야 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족장님. 사부님과 사숙님은 이틀 뒤에 도착할 겁니다.”청풍이 대답했다.“아, 그럼 다행이네요.”조군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이런 작은 일엔 저희 사부님과 사숙님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돼요. 이런 잡놈은 제가 단칼에 해결할 수 있어요.”청풍은 어깨를 들먹이며 등 뒤의 장검을 순식간에 빼 들었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3m 떨어진 의자를 향해 냅다 휘둘렀다.슉!검의 빛이 눈이 부시게 반짝이면서 박달나무 의자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엄청난 검법이십니다, 선배님.”유하와 청하는 이구동성으로 감탄하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진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건 선천 무사의 상징이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검의 기운이 이토록 날카롭다는 건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족장님, 저의 검법이 어떤가요?”청풍은 씩 웃으며 우쭐거렸다. 그 와중에 조선미를 힐끔거렸는데 마치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나 멋지죠?’“아주 훌륭하네요. 젊은 나이에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건 물론이고 당신의 사부님이 젊었을 때보다도 더 대단
“꺼져요!”조선미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조금 전까지 환하게 웃던 청풍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조선미가 그의 체면을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청풍은 무극문의 수석 제자이자 사람들이 인정한 무도 천재다. 평소 어딜 가든 사람들이 치켜세우기에 바빴고 그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가 오늘 먼저 혼담을 꺼냈는데 단칼에 거절당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선미야, 무례하게 굴어선 안 돼.”조군수가 바로 호통치더니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청풍 씨, 우리 딸이 충동적으로 막말을 한 것이니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어쨌거나 상대는 무극문의 수석 제자이기에 체면을 어느 정도 세워줘야 했다.“족장님, 전 얼굴도 잘생겼고 능력도 뛰어나서 조씨 가문의 사위가 될 자격이 충분하지 않나요? 오늘 제가 진심으로 혼담을 꺼냈는데 고작 이런 태도인가요?”청풍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오해했어요, 청풍 씨. 사실 제 딸에게는 이미 결혼할 남자가 있거든요. 두 사람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가 봐요.”조군수가 고개를 내저었다.“결혼할 남자가 있다고요? 그게 누군데요?”청풍이 잠깐 멈칫했다.“여기요. 바로 이 젊은이 유진우 씨입니다.”조군수는 손을 내밀어 소개했다.그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전부 유진우에게 쏠렸다. 유진우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진짜든 가짜든 절대 까발려서는 안 된다.“유진우?”청풍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사실 그는 들어온 순간부터 유진우를 주의 깊게 봤었다. 원래는 그저 조씨 가문의 일반 제자인 줄 알았는데 조선미의 약혼남이라는 소리는 정말 뜻밖이었다.자세히 훑어보니 얼굴이 좀 잘생긴 것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점이 없어 보였다. 옷차림이나 분위기도 평범했고 무사의 강한 기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청년이 지녀야 할 활기마저 없어 보였다. 정말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 같았다.“족장님, 저 사람은 무슨 자격으로 족장님의 따님과
“세 분 저 따라오세요.”조씨 가문 집사는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안내했다.“당신 오늘 운이 좋은 줄 알아요. 하지만 다음번에는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유진우를 싸늘하게 쳐다본 후 청풍 등 3인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아빠, 왠지 나쁜 사람을 끌어들인 것 같은데요?”조선미가 진지하게 말했다.“비상시기에 대국을 중시해야지. 우린 지금 무극문의 힘이 필요해. 그러니까 절대 저들과 등을 돌리지 마.”조군수가 당부했다.“저 사람이 날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어요.”조선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너 이 녀석...”조군수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됐어. 난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 두 사람도 나가봐.”그들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른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서재를 나선 후 조선미는 유진우에게 온천이 딸린 스위트 게스트룸을 마련해주었다. 게다가 개인 경호원도 붙여주었다.유진우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하도 끈질긴 조선미를 어찌할 방법이 없어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물론 주요하게 조선미의 안전이 걱정돼서였다. 블랙지존이 언제든지 나타나 손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변화무쌍한 수단이라면 사람을 몇 명 죽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혹시라도 그가 옆에 없을 때 조선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땐 후회해도 늦었다.그 후 며칠 동안 유진우는 쭉 조씨 가문에서 지냈다.여유로울 땐 황은아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조선미와 꽃구경도 하는가 하면 가끔 홍길수에게 전화를 걸어 조사 결과를 확인하기도 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홍길수가 이미 살인범이 누구인지 확정했다고 한다. 바로 병원의 한 인턴 의사의 짓이었다.살인을 저지른 후 인턴 의사는 죄가 무서워 몰래 도주했다고 한다. 지금 염룡파와 맹호파가 전력을 다하여 쫓고 있기에 살인범을 잡는 건 아마 시간문제일 것 같다.범인만 잡는다면 배후가 누구인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3일 후, 섣달그믐날 밤.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대지가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집마다 연말 분위기가
“싸우기 시작했다고?”그 말에 조군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블랙지존이 왔어?”“드디어 왔네요. 여러분, 저와 함께 나쁜 놈을 죽이러 갑시다.”조일명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죽이자!”“죽이자!”조씨 가문 사람들은 기세등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게 아니라 다들 오해하셨어요.”그들의 모습에 조씨 가문 경호원이 재빨리 설명했다.“블랙지존이 아니라 우리가 데려온 무사들끼리 갈등이 생겨서 지금 연회장에서 싸우느라 난리도 아니에요.”“뭐?”경호원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엄청난 적이라도 몰려온 줄 알았는데 내분이 일어나다니...조금 전 무척이나 흥분하고 열정이 들끓었는데 괜히 힘만 뺀 격이 돼버렸다.“얼른 가봅시다.”조군수는 두말없이 한 무리 사람들과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내분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큰 화를 초래하게 된다.그 시각 조씨 가문 연회장.세간의 수많은 고수들이 한데 모여 음식을 먹으면서 술도 마시고 있었다.정말 가지각색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험상궂은 얼굴에다가 우람한 체격의 남자도 있었고 몸집이 작은 난쟁이, 온몸에 뱀을 칭칭 감은 독술사,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는 검객, 그리고 금 지팡이를 짚은 스님도 있었다.또 어떤 이들은 사람인지 귀신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치장한 사람도 있었다.그때 유진우, 조선미, 조아영, 황백, 황은아 일행이 갑자기 들어왔다. 그들이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고 특히 스타일이 다른 미녀 셋이 가장 이목을 끌었다.“언니, 저 사람들이 다 아빠가 부른 용병들이야? 뭔가 이상한데?”조아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상인은 아주 소부분이었고 대부분 괴상망측한 모습이었다.“블랙지존은 주술에 능해서 일반 무사로 상대하기에는 쉽지 않아. 저들 같은 기인들이 가장 좋은 선택이긴 하지.”조선미가 설명했다.“그렇구나.”조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저 사람들의 눈빛이 마음에 안 들
“쿵!”문이 닫히는 순간, 유진우의 이마가 세게 찌푸려졌다.두려워서가 아니라 명재원의 행동이 불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임강왕이 명재원에게 유진우를 안전하게 산기슭으로 내려보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킬러들이 매복하고 있는 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이었다.이건 그저 상관없는 일인 척 옆에서 구경하는 것보다 더 얄미운 일이었다.“유장혁, 아무리 둘러봐도 소용없어. 아무도 널 도와주지 않을 거야. 오늘이 네 제삿날이거든.”어떤 늑대 무늬가 새겨진 마스크를 쓴 남자가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오더니 굵은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했다.“문관옥, 왜 가면을 쓰고 있는 거야? 차마 얼굴을 들고 나올 수 없는 일이라도 있어서 그래?”유진우가 차갑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마스크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유진우의 예상대로 그는 문관옥이 맞았다.“변장했는데도 알아본다고? 예상 밖이네.”문관옥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기운도 숨기고 목소리도 바꾼 상태인데 알아봤다고? 쉽지 않네.’“기운이든 목소리든 다 바꿀 수 있지만 너한테서 나는 그 역겨운 냄새는 숨길 수 없거든.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어.”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당장 죽게 될 놈이 입은 잘 놀리네!”문관옥은 어두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유장혁, 넌 우리한테 포위당했어. 도망치려고 해도 쉽지 않을 거야. 그래도 우리 구면이긴 하잖아? 그러니까 옛정을 생각해서 너한테 자살할 수 있는 기회 정도는 줄 수 있어. 죽는다고 해도 체면을 지키면서 죽는 게 좋지 않겠어?.”유진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비웃으면서 입을 열었다.“도망친다고? 너희들이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예전에 옥면 산장에서 소란이 일어났을 때, 문관옥의 부하들을 살려준 건 문설봉의 체면을 봐서였다.하지만 이젠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기에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부하들까지 데리고 공격하러 온 더 이상 아무런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그때, 문관옥이 냉
류현은 뭐라 더 말하려 했으나 각진이 손을 휘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더 말할 필요 없어. 내 말대로 해.”“네.”류현은 유진우를 한 번 노려보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재원아, 너는 유 시주님을 데리고 뒷산으로 가. 꼭 시주님을 안전하게 잘 모셔야 해.”각진이 다시 말했다.“그럼 주지스님은 어떡하나요?”명재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명재원은 임강왕의 호위 팀장이었기에 항상 그를 호위해 왔었다.이제 와서 왕이 아닌 다른 사람을 호위하라고 하니 약간의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지훈이랑 현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괜찮아. 빨리 가 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각진이 이렇게 말했다.“네.”명재원은 두 손을 모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유진우를 데리고 나가 버렸다.나가기 전에 유진우는 뒤를 돌아 각진을 한 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명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유 시주님, 이쪽으로 오세요.”명재원은 유진우를 데리고 서하사 뒤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숨겨져 있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안은 생각보다 어두컴컴했다.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하지만 명재원은 이 길을 잘 알았다. 그는 성냥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 불빛은 길을 환히 밝혀주었다.유진우는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이 길은 산에서 내려가는 비밀 통로임을 알게 되었다.통로는 매우 길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데다가 좁아서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유 시주님, 이 길은 산기슭까지 이어집니다. 비밀리에 만들어진 거라서 외부인들은 모르는 길이죠. 시주님은 제가 안전하게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오지 마세요.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명재원이 길을 안내하며 이렇게 말했다.“감사합니다.”유진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오늘 방문한 것으로 의문은 다 풀렸어요. 그러니까 다시는 오지 않을게요. 더 이상 여러분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배신자라고요?”그 말을 들은 유진우가 미간을 찡그렸다.그는 어딘가에서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임강왕이 이렇게 말한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각진 스님, 그럼 그 배신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있나요?”유진우가 다시 물었다.“그 사람은 바로 장혁 씨 아버지의 부하였던 송원호입니다.”각진이 말했다.“원호 삼촌이라고요? 그럴 리가요. 원호 삼촌은 이미 전사하지 않았나요?”유진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유진우도 알다시피 송원호는 아버지가 신임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형제처럼 여겼고 동고동락하며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료였다.십 년 전, 송원호가 호위 팀장의 역할을 맡아 그들 가족을 연경으로 호송하던 때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여러 명의 암살자를 처치했다.특히 자금성에서의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송원호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머니를 호위하여 성을 빠져나가다 전사했다.‘그런 사람이 어떻게 배신자일 수 있다는 거지?’“이 소식을 들었을 때 저도 많이 놀랐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조사했지만 단서들은 모두 송원호 씨를 가리키고 있었죠.”“저도 송원호 씨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협박을 받았을 수도 있고 배반을 당했을 수도 있지만 이 사건이 그와 관련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어요.”“장혁 씨가 말한 죽음은 사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사람을 보내서 확인했거든요. 송원호 씨는 죽지 않았어요. 시신은 사람을 찾아서 위장한 것입니다.”각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원호 삼촌이 바로 그 배신자라고요?”유진우는 눈살을 찌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아보려는 듯했다.그는 계략을 당하거나 암살당하는 것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배신은 참을 수 없었다.송원호는 유진우에게 놓고 말해서 반쯤 스승 같은 존재였고 예전에는 무술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었다. 게다가 군을 이끄는 경험마저도 송원호에게서 전수 받은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죽도록 애쓰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이만기도 그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이었기에 사실 이만기도 잘못한 것은 없었다.“장혁 씨 아버님께서도 여러 번 저를 구해 주셨고 또 저를 그렇게 신뢰해 주셨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정말 부끄럽습니다.”각진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만약 유진우가 그를 꾸짖거나 때렸다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했을 것이다.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유진우는 전혀 그를 탓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진으로 더욱 하여금 죄책감에 빠지게 했다.“각진 스님,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희는 호룡각과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왜 저희를 암살하려 했던 걸까요?”유진우가 다시 물었다.“장혁 씨가 한 일들이 호룡각에게 위협을 줬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경고의 의미로 보낸 듯합니다.”각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십 년 전, 장혁 씨네 서경왕부는 권세가 막강했고 명성이 자자했어요. 황제의 권위마저도 능가하는 듯했죠. 호룡각은 서경왕부의 존재가 그들의 지위를 위협했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그저 넘어갈 수는 없었던 거예요.”“고작 그런 이유로 제거하려 했다고요?“유진우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의 눈빛에 냉기가 흘렀다.“장혁 씨, 서경왕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영향력이 크답니다.”각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장혁 씨 아버님께서 훌륭하신 것뿐이라면 호룡각은 참고 넘어갔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장혁 씨네 가족은 다들 지나치게 좋은 유전자를 가졌잖아요.”“장혁 씨 아버님인 육만군 씨는 잘생기신 데다가 재능도 뛰어나신 분이었죠. 수십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셨고요. 그는 왕에 준하는 분이셨고 오십만 정예 군을 지휘했었죠.”“장혁 씨 어머님이신 진소연 씨도 대단한 사람이셨어요. 삼십 대 초반에 이미 무도 미스터로 되신 독보적인 분이셨죠.”“그리고 장혁 씨도 예사로운 분은 아니시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신의 보호를 받은 분이시니까요. 열다섯 살에 마스터 경지에 도달
“좋습니다!”각진 스님의 말을 듣자, 유진우는 돌려 말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각진 스님, 저는 단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당시 우리를 암살하려 계획했던 배후의 주동자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역시 그것이었군요.”각진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뻔히 예상했다는 듯, 바로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유 시주님, 호룡각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호룡각이요?”유진우는 눈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유만준에게서 몇 마디 들은 적은 있지만, 잘은 모릅니다.”“모르신다면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각진 스님은 숙연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호룡각은 나라가 세워질 때 만들어져 황제의 권력 위에 존재하던 기구였습니다. 그곳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최정상급 고수들이었죠.그중 누구 하나만 뽑아도 수많은 군사와 맞먹을 만큼 강했습니다.특히 호룡각의 수장인 이원무의 능력은 더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온 천하를 통틀어 용호산의 속세를 떠난 도사 외에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이 없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현 황제가 이원무의 도움으로 즉위했다는 점이었다.어떻게 보면 황제라는 존재는 이원무가 마음대로 조종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황제의 권력과 자리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이런 자가 바로 이원무였다. 이른바 호룡각의 본모습이었다.말을 끝맺으며 각진 스님의 눈에 분개의 기색이 스쳤으나, 더 깊은 것은 무력감이었다.황실의 혈족이자 황제의 아우로서, 그는 호룡각의 진정한 공포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이원무는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호룡각 구성원 하나도 황제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었다.더욱 서글픈 것은 그들에게 저항할 어떤 수단도 없었다는 점이었다.반기를 든 자들은 모두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니까.호룡각은 겉으로는 보호를 위한 조직이었으나, 실제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무법천지가 되어버렸다. 전후로 얼마나 많은 천리를 어기는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정도였다.더욱 절망적인 것은 누구도 그들을 관리할 수도, 감히
서하사의 법당은 크지 않았고 금빛 화려한 장식도 없었으며, 정면에는 단지 3-4미터 높이의 석가모니 불상 하나만 모셔져 있었다.소박한 모습이었지만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불상 주변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불상 앞 방석 위에는 마른 체형의 중년 스님이 앉아 있었다.황적색 가사를 입고 눈을 감은 채 한 손으로는 목어를 두드리고 다른 손은 입 아래에 둔 채 경문을 읊고 있었다.매우 신실한 모습이었다.“주지 스님, 유 시주님이 와계십니다.”가사 입은 스님이 앞으로 나아가 조용히 전했다.이 말에 주지 각진 스님은 드디어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일어나 유진우에게 합장하며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유 시주님, 오래간만입니다.”“그러게요,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지금 각진 스님이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임강왕 전하라고 불러야 할까요?”“저는 이미 세속의 인연을 끊고 법호를 각진이라 하오니, 그저 각진이라 부르시면 됩니다.”각진 스님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유진우는 담담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각진 스님, 제가 오늘 갑자기 찾아온 것은 주로 몇 가지 의문점을 해소하고 싶어서입니다.”“유 시주님께서 물으시려는 것은 10년 전의 일들이겠지요?” 각진 스님은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맞습니다.” 유진우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진 스님, 10년 전 당신은 아직 출가하지 않으셨고 자금성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계셨죠. 당연히 내막을 알고 계실 텐데, 숨김없이 진실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유 시주님, 지난 일은 모두 지나갔는데 왜 과거에 매달리시나요?” 각진 스님이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지나간 일이라도 없었던 일이 되진 않습니다. 전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인데, 그게 잘못된 걸까요?" 유진우가 반문했다.“어떤 진실은 모르는 게 차라리 낫습니다. 알게 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각진 스님이 조심스레 경고했다.“저는 이미
“누구시길래 여기까지 오신 거요?”두 스님은 즉시 자리를 바꾸어 앞뒤로 유진우의 진퇴로를 막아섰다.두 사람의 눈빛은 매섭게 경계하며 날카롭게 주시했다.그들은 이곳에서 여러 해를 은거하며 세상과 단절한 채 외부인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갑자기 낯선 사람이 나타나 왕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만나자 하니 분명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다.“저는 유장혁이라고 합니다. 임강왕을 뵈러 왔으니 길을 비켜주시면 좋겠습니다.”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유장혁이라고?”두 스님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더욱 놀란 표정이었다.“유 시주님, 이곳은 절입니다. 임강왕이란 분은 계시지 않으니 돌아가십시오.”둥근 얼굴의 스님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두 스님, 멀리서 왔으니 진심을 담아 뵙고 싶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한 번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유진우는 예를 갖춰 합장하며 인사했다.“유 시주님, 난처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 절은 너무 작아서 시주님 같은 귀한 분은 모시기가 힘듭니다.”둥근 얼굴의 스님이 말했다.“부처님께서는 인과를 말씀하셨죠. 각진 스님께서 10년 전에 뿌린 씨앗, 이제는 거둬들일 때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피해 숨기만 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일일 뿐입니다.” 유진우가 당당하게 말했다.“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군요.” 둥근 얼굴의 스님이 냉랭하게 말했다. “유 시주님,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만 주지 스님은 참선 중이시라 외부인은 만나지 않으십니다. 돌아가십시오!”“좋게 말씀드렸는데 굳이 막으시겠다면 강제로라도 들어가야겠습니다.” 유진우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어떻게든 오늘은 이만기를 만나야만 했다.“유 시주님! 법당은 성스러운 곳인데 어찌 이리 난동을 부리려 하십니까?!" 둥근 얼굴의 스님이 호통쳤다.“더 이상 떠나지 않으시면 몽둥이로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스님이 짜증난 듯 말했다.“한번 해보시죠.”유진우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법당으로 들어가려 했다."방자하도다!"두 스님은 이를
유진우는 거침없이 진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결국 절 정문 앞에 이르렀다.문 위에는 현판 하나가 걸려있었는데‘서하사'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서하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절이었고, 겉모습을 보니 꽤 오래된 듯 여러 곳이 낡아 있었다.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임강왕이 이런 작은 절에 몸을 숨기고 있을 줄을.유진우는 앞으로 다가가 절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후 조금 더 힘주어 두드렸다.“예, 갑니다.”절 안에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일고여덟 살 정도의 동자승이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유진우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며 물었다. “시주님, 무슨 일이 신가요?”“산에서 길을 잃었는데 마침 절이 있어서 물 한 잔 청하러 왔습니다. 괜찮을까요?” 유진우는 거짓말을 지어냈다.“얼마든지요, 시주님. 이리 들어오세요.”동자승은 아무런 의심 없이 절 문을 열어 유진우를 안으로 들였다.오랜만에 외부인을 보아서인지 동자승은 무척 신이 난 듯 재잘재잘 끊임없이 물었다. “시주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죠? 진산엔 맹수들이 많아서 다행히 낮에 길을 잃으셨네요. 밤이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아, 그리고요. 길을 잘 모르시면 제가 나중에 산 아래까지 모셔다드릴게요.”“고맙습니다.” 유진우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이 동자승이 꽤 재미있는 녀석이네.’“당연한 일이에요.”동자승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출가한 사람은 자비를 품어야 하니 누군가 어려움에 부닥쳤다면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야 한다고 하셨어요. 한 생명을 구하는 게 7층 탑을 짓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거든요.”“실례지만 한 가지 여쭤볼게요. 서하사에는 모두 몇 분이나 계신가요?” 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몇 분이냐고요?”어린 스님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더니 말했다. “우리 서하사에는 주지스님이 계시고, 제 스승님, 그리고 두 분의 사숙님들, 거
“무슨 일이야?”이원무는 몸에 묻은 돌을 털어내며 천천히 제단에서 내려왔다.붉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서 마치 모든 것을 무시하는 신과 같았다.사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원무의 존재는 하늘의 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손가락 하나로도 순식간에 사람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어르신님, 용담적염창이 갑자기 이상한 기운을 내뿜었는데 무언가에 반응한 것 같습니다.”호룡각의 제자가 말했다.“이상한 기운이라?”이원무는 뒤에 있는 붉은 장창을 돌아보고는 손짓하여 불러들였다.“윙-!”붉은 창이 은은한 울림과 함께 땅을 박차고 올라와 이원무의 손아귀에 딱 들어왔다.이원무는 눈을 감고 세심히 살피더니 곧 답을 얻었다.“그래서 용작검이 세상에 나타난 거였구나. 네가 이리 예민하게 반응한 게 이해되는군.”이원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그래, 용작검이 세상에 나타났구나. 네가 이리 흥분한 것도 당연하군.”이원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이 말에 호룡각 일원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용작검이라고요? 그 유명한 천하제일검 말씀인가요?”“제가 알기로 용작검은 지금 검신 백준의 애검인데, 혹시 백준이가 연경에 들어온 걸까요?”“흥! 정말 배짱 하나는 크구나. 호룡각의 허가도 없이 감히 연경에 침입하다니, 완전히 법도 모르는 자로군!”용작검의 등장 소식에 놀라는 이도 있고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호룡각은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천하의 대소사를 관장하니, 누구든 어떤 세력이든 호룡각 앞에서는 머리 숙여야만 했다.백준은 앞서 알리지도 않고 연경 땅에 제멋대로 들어와 호룡각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이런 행동은 분명히 호룡각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었다.“너희는 용맥을 지키고 있어라. 내가 나가서 살펴보겠다.”이원무는 한마디만 던지고 몸을 휘둘러 붉은 광채가 되어 순식간에 하늘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이원무가 떠나자마자 호룡각 일원들은 즉시 산을 지키는 대진을 발동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용천산 아래에는 용국의 용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