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기습에 실패한 도규현은 유진우의 주먹을 맞고 튕겨 나갔다가 마침 도장수의 발 옆에 떨어졌다.복부에 피가 흘러넘치고 호흡이 점점 사라지는 도규현을 본 도장수는 노발대발하며 상을 탁 치면서 일어났다.“빌어먹을 놈이 감히 내 아들에게 중상을 입혀? 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나.”“혹시 눈이 멀었어요? 방금 날 기습한 건 그쪽 아들이라고요. 난 그저 내 몸을 지키고자 반격한 것일 뿐이고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헛소리 집어치워!”도장수가 분노하며 호통쳤다.“아직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는데도 먼저 돌아서고선 기습이라니!”아들이 먼저 잘못하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그래요. 그럼 승부가 채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정상적으로 공격한 건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유진우가 되물었다.“당연히 문제 되지. 이런 고의 상해야.”도장수가 흉악스럽게 말했다.“링 위의 결투에서 죽고 사는 건 하늘의 뜻에 따른다는 규정이 있어요. 당신 아들이 다친 건 실력이 뒤떨어져서 그런 거예요. 옛 무세가라는 도씨 가문이 설마 지고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겠죠?”유진우가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너!” 도장수는 화가 치밀었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말에 가시가 돋쳐 있네?”그때 도민향이 갑자기 나서서 말했다.“큰아버지, 저런 놈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저놈이 규현 오빠의 단전을 망가뜨렸으니 오늘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요.”“맞아요. 우리 도씨 가문의 천재를 다치게 했으니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절대 안 돼요.”“저 자식은 극악무도하고 인간성이란 추호도 없어서 이 세상에 남아있어봤자 해만 돼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그때 도씨 가문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마다 눈빛이 어찌나 흉악한지 당장이라도 유진우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도규현은 도씨 가문의 희망이자 무도 마스터가 될 기회가 있는 천재였다. 그런 그가 단전이 망가지고 지금까지 수련한 모든 걸 잃게 되었으니 도씨 가문에는 엄청난 충격이
그때 줄곧 침묵하던 황보용명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도 족장님, 세간의 룰을 깨서는 안 됩니다. 링 위에 올라갔으면 죽든 살든 그건 본인의 역량입니다.”“하지만 저희 아들이...”도장수가 반박하려 하자 황보용명이 싸늘하게 째려보았다.“왜요? 설마 세상 사람에게 욕 얻어먹을 짓을 할 셈인가요?”“제가 어찌 감히...”도장수는 이를 꽉 깨물고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세간의 위신으로 보나 가족의 세력으로 보나 도씨 가문은 황보용명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도 족장님, 얼른 아들을 데리고 약신궁에 가보세요. 약신왕이 나선다면 다시 회복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황보용명이 귀띔했다.“여봐라. 당장 차 대기시켜.”그제야 정신을 차린 도장수는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아들을 안고 황급히 연무장을 뛰어나갔다. 그의 뒤로 도씨 가문 사람들도 따라나섰다. 지금은 복수보다 다친 곳을 치료하는 게 급선무였다.“젊은이, 잠깐 얘기 나눌 시간 있어요?”황보용명의 시선이 유진우에게 향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영광입니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보용명과 함께 연무장을 나섰다.그들이 나가자 현장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저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오늘 결투는 정말 대박이었어요. 반전에 반전이 아주 재미있었다니까요.”“그러게나 말이에요. 스카이 랭킹 13위인 도규현이 무명인에게 패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만약 제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절대 못 믿었을 거예요.”“오늘부로 염룡파 보스는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겠네요.”“어린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을 지녔으니 당연하죠.”“저런 젊은 인재가 우리 청운종에 들어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그런 허황한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이미 우리 추풍파에서 데려오기로 했어요. 무슨 대가를 치르든 우리 제자로 들일 겁니다.”“하하... 우리 현무문은 아예 안중에 없어요?”“여러분은 이미 한발 늦었어요. 맹주님께서 벌써 선수 치셨습니다.”“젠장!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선수 쳤다고
도씨 가문 대문 밖.마이바흐 한 대가 한무리 사람을 뒤로한 채 빠르게 달려 나갔다.“빨리 빠져나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젊은이와 얘기할 시간도 없을 뻔했어요.”황보용명은 고개를 돌려 조급해서 안달이 난 무사들을 보며 자신의 선견지명을 몰래 감탄했다.“그 정도인가요?”유진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하하... 아직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나 봐요?”황보용명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오늘 도규현을 이긴 것만으로도 젊은이의 실력과 천부적인 재능을 충분히 증명했어요. 강남 무림의 젊은 세대 중에서 젊은이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사람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드물걸요? 지금 얼마나 많은 파벌에서 젊은이를 제자로 들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지 몰라요.”“이거 귀찮게 됐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겸손하게 있는 건데.”유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도규현에게 도전장을 내민 건 다시는 건드리지 말라고 도씨 가문에 경고하기 위해서였는데 도씨 가문이 기세를 돋우려고 많은 사람까지 불러 관전하게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도씨 가문은 제 발등을 찍었고 되레 유진우가 이름을 날렸다.“당신 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남들은 이름을 날리고 싶어도 날릴 기회가 없는데 젊은이는 오히려 싫어하네요?”황보용명이 웃으며 말했다.“명성이 있다고 해서 돈을 벌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면 걸핏하면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전장을 내밀 거 아니에요. 이게 스스로 귀찮은 일을 자초한 거나 다름없죠.”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젊은 나이인데 명성을 중요시하지 않다니,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젊은이는 정말 적어요.”황보용명은 유진우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맹주님, 듣기 좋은 소리 그만 하세요. 저는 큰 포부도 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할 얘기 있으면 그냥 하세요.”유진우가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빙빙 돌리지 않을게요.”황보용명을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사실 젊은이와 무도 대회에 관해 얘기 좀 나누려고
유진우가 씁쓸하게 웃었다.“알았어요. 어차피 그냥 몇 판 싸우는 건데 출전할게요.”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다 문제 될 게 없었다.“좋아요. 그럼 나와 약속한 겁니다.”황보용명이 씩 웃었다.“맹주님은 은퇴하셨는데 왜 아직도 무도 연맹의 일에 신경 쓰십니까?”유진우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내가 몸은 비록 무도 연맹에 있지 않아도 마음은 여전히 무도 연맹에 있어요. 그리고 지금의 무림 맹주는 내 큰 제자예요. 큰 제자를 위해 인재를 끌어모으면 안 돼요?”황보용명이 웃으며 말했다.“성품이 고결하고 지조가 굳은 맹주님을 진심으로 탄복합니다.”유진우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예를 표했다.“됐어요. 그만 아부해요. 어디 가요? 데려다 줄게요.”“염룡파로 돌아가려고요.”...오후 시각 부운산의 약신궁.도규현은 창백한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옥침대에 누워있었다. 흰 가운을 입을 몇몇 의사들이 조심스럽게 그를 치료해주었다.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도장수는 그저 안절부절못하며 옆에 서 있었다. 하지만 치료하는 데 방해될까 봐 감히 소리도 내질 못했다.한참이 지난 후 드디어 도규현의 찢어진 상처를 전부 다 꿰맸다.“동장로님, 우리 아들의 상태는 어떠합니까?”치료를 마치자 도장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다행히 제때 모셔와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동장로는 옷소매로 흐르는 땀방울을 쓱 닦았다.“너무 다행이네요.”도장수는 한시름을 놓다가 이내 다시 캐물었다.“생명에 지장이 없다면 무도 수련은요? 영향이 있나요?”“그게 지금 가장 큰 문제예요.”동장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아드님의 단전이 심각하게 망가져서 다시 예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건 불가능해요. 무도 수련도 더는 안 되고요.”“네? 어떻게 이럴 수가...”도장수의 낯빛이 확 굳어졌다.“동장로님의 의술이 뛰어나시잖아요. 제발 다른 방법 좀 생각해 주세요. 돈이 얼마가 들든, 무슨 대가를 치르든 우리 아들만 치료할 수 있다면 다 상관없어요.”“족장님, 재능이 모자라고
그날 저녁 염룡 무관의 2층 사무실.“보스, 오늘 정말 멋있었습니다. 도씨 가문의 체면을 짓밟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염룡파의 명성도 널리 알렸어요. 지금 염룡파의 천여 명의 제자들이 보스를 얼마나 우러러보고 존경하는지 몰라요.”홍길수는 유진우에게 차를 따르며 끊임없이 아부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입이 다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전에는 유진우가 패하여 도씨 가문이 복수할까 봐 조마조마했었지만 이젠 완전히 전세가 바뀌었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상황에서 도규현을 압승할 정도로 유진우의 실력이 대단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단 한 번의 결투로 유진우는 이름을 떨쳤다.“됐어. 그 말만 벌써 팔백 번은 더 들었겠다. 다른 새로운 건 없어?”유진우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그가 돌아오고 나서부터 홍길수는 아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머리에 떠오른 칭찬이란 칭찬은 전부 다 쏟아낸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요염한지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유진우를 유혹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새로운 거요? 알겠어요.”홍길수는 잇몸을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보스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후부터 적지 않은 엘리트 고수들이 몰려와서 우리 염룡파에 가입하겠다고 했어요. 제가 아까 봤는데 하나같이 실력이 뛰어나더라고요. 조금만 더 훈련한다면 우리 염룡파의 튼튼한 기둥이 될 것 같아요. 이 기세로 계속 이어간다면 3년 이내에 염룡파가 서울의 최고 자리에 앉을 거라 확신합니다.”그의 말에 유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건 좋은 소식이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염룡파가 부족한 대로 놓아둘망정 인품이 나쁜 사람은 절대 들여선 안 돼.”염룡파가 발전할수록 유진우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확장해서는 안 되고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안 그러면 쉽게 내란이 일어날 수 있다.“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보스. 그쪽은 제가 잘하잖아요. 사람인지 귀신인지 척 보면 알아요.”홍길수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 복잡한 세간에서 수년 동안 버텨온 그는 재간
“증거? 어디 있어?”이청아가 화들짝 놀랐다.“증거를 항상 갖고 다녀.”유진우는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 증거 두 개를 꺼내놓았다.“이건 부검 결과서인데 이현이 누군가 탄 독에 사망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 그리고 이 검은 침이 바로 살인 흉기야.”“뭐?”이청아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자세히 살펴보았다.“만약 내 말을 못 믿는다면 직접 사람을 찾아서 알아봐도 돼.”유진우는 한마디 더 보탰다. 비록 증거가 있어도 아직 범인을 찾지 못했기에 상대를 설득하는 건 조금 어려웠다.“그럴 필요 없어. 난 당신을 믿어.”이청아의 표정이 무척이나 복잡해 보였다.“사실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오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어.”“정말 다행이야.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서...”유진우는 씩 웃어 보였다.“오해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해해줘. 나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이현이 그렇게 죽고 나서 정말 힘들고 막막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리고 당신을 잃을까 봐 두려웠고 우리 둘이 원수가 될까 봐 두려웠고... 또 더는 기댈 곳 없이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웠어. 나...”이청아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눈물을 뚝뚝 흘려도 유진우의 눈에는 예쁘기만 했다.“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유진우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의 토닥임에 이청아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내린 듯 유진우의 품에 와락 안겨 엉엉 울었다.심하게 흐느끼는 바람에 어깨마저 떨렸고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오랫동안 꾹꾹 참아왔던 감정이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폭발해버렸다.“어휴...”유진우는 한숨을 푹 내쉬고 이청아를 꽉 끌어안더니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그래, 마음껏 울어... 울면 한결 나아질 거야... 아 참, 비밀 하나 알려줄게. 사실 내가 당신 동생을 죽인 게 맞아.”“뭐?”이청아의 몸이 굳어지더니 고개를 들고 경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당... 당신 뭐 하는 짓이야?”이청아의 표정이 급변했고 미친 듯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가슴이 실로 매력적이었다.“당신 장난하는 거 좋아하잖아. 내가 끝까지 놀아준다니까?”유진우가 냉랭하게 말했다.“미친놈, 당장 멈추지 못해?”이청아가 성을 냈다.“언제까지 연기할 셈이야? 얼굴 가죽이 다 떨어졌는데 몰랐어?”유진우가 말했다.“뭐?”이청아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무심결에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이리저리 어루만지다가 그제야 상대에게 들켰다는 걸 깨달았다. 어루만지든 만지지 않든 이 행동만으로도 가짜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내 연기가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벌써 들킬 줄은 몰랐네.”정체가 들통나자 ‘이청아’ 는 더는 숨기지 않고 손으로 가면을 힘껏 벗겼다.이청아는 사라졌고 그 대신 한 낯선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예쁘장하게 생겼지만 안색은 어디가 아픈지 창백했다. 특히 두 눈에 독기가 가득하고 음험한 게 전형적인 악녀였다.“당신 누구야? 왜 청아 씨인 척하는 건데?”유진우가 싸늘하게 물었다.“내 답을 듣기 전에 내가 이청아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말해.”여자는 그 답이 궁금했다. 스승에게 전수받은 그녀의 역용술은 용모와 골격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어 웬만하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본인과 비슷했다.100%까지 똑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싱크로율이 90%는 되었다.이 정도가 된다면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짧은 시간 내에 알아차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여 그녀를 만나자마자 어떻게 가짜라는 걸 구별해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당신의 역용술이 뛰어나긴 해. 외모로만 본다면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몇 가지 간과한 게 있어. 첫째, 청아 씨는 향수를 쓰지 않아. 하지만 당신 몸에서는 옅은 향기가 나. 그리고 둘째, 청아 씨는 고집이 세서 남을 함부로 믿지 않아. 이 증거들로는 청아 씨를 설득하기 어려워. 방금 당신은 지나치게 감정을 호소했어. 나의 경계를 늦추려 일부러 그런 거겠지. 마
한무리 가면을 쓴 여자들이 칼을 뽑아 들고 이청아의 목을 겨누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피부를 스쳐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다.유진우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경우 이청아의 목숨을 끊어버릴 기세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결국 하는 수 없이 손을 풀었다.상대 인원이 너무 많이 이청아의 목숨으로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진작 이럴 것이지.”은경은 목을 비틀며 이미 승기를 잡은 것처럼 말했다.“유진우, 스승님이 당신을 눈여겨본 건 당신의 영광이야. 지금 고개만 끄덕이면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거절한다면 당신이 죽는 건 물론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죽게 될 거야.”“꼭 그렇게 끝까지 몰아붙여야겠어?”유진우가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스타일이 늘 이래. 당신 같은 천재를 얻을 수 없다면 죽여야지.”은경이 말했다.“고작 당신들 주제에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유진우가 되물었다.“하하... 당신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도 아무 준비 없이 오지 않았어.”은경이 싸늘하게 웃었다.“방금 당신이 마신 차에 십향연근제를 넣었어. 이 독은 색깔도 냄새도 없어. 일단 중독되면 온몸에 힘이 쫙 빠지면서 진기조차 쓸 수 없게 돼. 시간을 보니까 곧 발작할 것 같은데?”“십향연근제?”유진우의 표정이 급변했다.십향연근제는 10대 기이한 약 중 하나였는데 사람에게 해로운 독성은 없으나 수많은 무사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진기를 봉인하고 근육과 뼈를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이 두 가지 특징만으로도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다만 이 기이한 약이 이젠 거의 사라졌는데 은경의 손에 남아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해독약 이리 내.”유진우는 손을 내밀어 은경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비틀거리더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이마에 저도 모르게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십향연근제는 당신 같은 무도 고수를 제압하기에 아주 딱이야. 당신이 기운을 끌어모을수록 약효가 더 빨리 퍼져. 어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