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규현이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설마 저를 이용해서 유명해지려고요?”유명세를 끌려는 사람을 많이 만나보았던 도규현이었다.전에 있었던 도전자 중에 아까 청의객처럼 도규현을 이용하여 인지도를 올려 유명해지려는 사람이 많았지만 저마다 패잔병이 되고 말았다.“일단 저는 그딴 거에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귀찮아서 도씨 가문과 인연을 끊으려고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인연을 끊어요? 어떻게요?”도규현은 웃을 듯 말 듯했다.“아주 간단해요. 제가 도규현 씨를 이기면 도씨 가문 사람들은 저를 피해 다니겠죠.”유진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저를 이겨요? 하하하...”도규현은 멈칫하더니 웃음거리를 본 듯 소리 내 웃었다.무대 아래에 있던 사람들 역시 피식 웃더니 유진우를 바보 취급했다.도규현을 상대로 목숨을 구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감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이길 수 있다는 망언을 퍼붓다니!’“재밌는 사람이네. 자신감이 너무 넘쳐나는 거 아니야?”관중석에 있던 도장수는 피식 웃더니 유진우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하! 정말 주제 파악을 못하네! 청의객마저 규현 오빠한테 참패당했는데 자신이 뭐라고!”옆에 있던 도민향이 보잘것없다는 표정을 했다.“고집이 센 사람은 말리지 못한다더니, 충고를 듣지 않은 건 당신이야.”도윤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남궁은설을 봐서라도 전에 여러 번 유진우를 말렸지만, 전혀 듣지도 않았다.그는 청의객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봤으면서도 여전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그저 멍청한 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맹주님께서는 유진우 씨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세요?”이때 조군수가 갑자기 질문했다.“이길 수 있을지는 조금 지나면 알게 되겠죠.”황보용명은 그저 웃을 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군수야, 지금 나랑 장난해? 저 사람은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우리 아들 발끝만도 쫓아가지 못하는 사람인데 무슨 수로 이기겠어?”도장수가 웃었다.“유명하진 않아도 실
무대 위, 도규현은 웃고 있었다.무대 아래, 관중들 역시 웃고 있었다.유진우의 간단한 한마디는 현장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이 사람들 눈에는 유진우가 도규현의 세 방을 견딜 수 있을지도 문제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는 말은 망언처럼 들렸다.“웃어요? 왜 웃는 거죠?”유진우가 담담하게 물었다.무표정인 그는 무대 아래 사람들의 의논 소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해 보였다.“왜 웃겠어요?”도규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진지한 표정을 보니 정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설마 목숨을 백 개라도 갖고 있는 건 아니죠? 아니고서야 왜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하하하... 어디서 오는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상관없어요. 실력 차이가 얼마나 큰지 곧 알게 될 테니까요!”도규현은 한 손을 내밀더니 손가락을 까딱하면서 장난스레 말했다.“자, 제가 먼저 세 번 봐 드리겠습니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겠습니다.”“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요. 저번에 박웅 씨도 세 번 봐 드린다고 했다가 아직 병상에 누워있는걸요.”유진우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박웅은 그저 제 부하인데 저랑 비교가 되겠어요?”도규현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제 눈에는 별반 다름없는 것 같은데요? 어차피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 같은데.”유진우는 솔직하게 말했다.“네?”도규현의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방금 청의객과 같이 건방진 사람은 수없이 보았어도 유진우는 달랐다. 건방진 와중에 안하무인이었기 때문이다.담담한 표정을 봐서 자신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이러니 무시를 받는 것만 같아 더욱 화가 났다.‘유명하지도 않은 놈이 감히 나를 무시해?’“이봐! 그깟 박웅을 감히 우리 규현 오빠랑 비교해?”관중석에 있던 도민향이 분노했다.“박웅을 이겼다고 해서 규현이랑 한 판 붙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면 너무 천진난만한 짓이지.”옆에 있던
“슉!”더 크고 빠른 에너지 폭탄이 유진우의 가슴을 조준하고 있었다.유진우는 발에 힘을 실어 상체를 아치형으로 뒤로 젖혔다.이와 동시에 두 번째 에너지 폭탄이 그의 코끝을 스치면서 또 한 번 퍽 소리와 함께 나무를 관통했다.유진우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어 중심을 잡더니 조금도 손상 없이 다시 꼿꼿하게 서 있었다.이 모습을 본 도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손쉽게 대결에서 이길 줄 알았지만, 상대방이 두 번의 공격을 모두 다 피할 줄 몰랐던 것이다.“실력이 그저 이 정도였다면 정말 실망스러운데요?”유진우가 태연하게 말했다.“뭐라고요?”도규현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지금까지 이렇게 자신을 무시한 사람은 없었다.“너무 거만한 거 아니에요? 감히 도규현 씨를 무시하다니요!”“하! 그깟 두 번의 공격을 피한 것 가지고! 규현 씨가 봐주지만 않았다면 이미 산산조각이 났을 것을!”“규현 씨, 봐주지 말고 아주 본때를 보여주세요!”이때 무대 아래에서 부추기기 시작했다.“목숨이라도 구제할 수 있게 봐 드렸더니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도규현은 말을 끝내자마자 바닥을 딛고 공중으로 솟았다.진기의 장점은 간격을 두고 사람을 죽일 수 있어 간단하고 파괴력이 강해 자신과 실력이 많이 차이나는 사람을 손쉽게 이길 수 있었지만, 그 단점은 실력이 비슷한 상대한테는 살상력이 강하지 않아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쉽게 방향이 읽혀 피할 수 있었다.선천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무사끼리의 대결에서 가장 빠르고 쉽게 이기려면 맞붙을 수밖에 없었다.손과 발, 무기, 개인기, 진기, 기본기를 총동원하는 것이 승패를 가릴 수 있는 관건이었다.“죽어!”도규현은 유진우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순간적으로 진기를 모으기 시작했다.우르릉 쾅쾅!우렁차고 굉장한 소리가 들려왔다.한순간 공기마저 뒤엉키더니 에너지가 주먹주위를 감쌌다.그 무서운 위압감에 무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온몸이 찌릿해 났다. 가슴이 거대한 돌에 눌린 듯 숨쉬기
“터벅, 터벅, 터벅...”한 번의 대결 이후 도규현은 파장 때문에 뒤로 열몇 걸음 물러서게 되었다.걸음걸음마다 바닥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마지막 발자국이 떨어진 순간 창백한 얼굴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이 순간 식은땀을 흘리더니 옷소매가 터져 주먹 표면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사람 전체가 낭패한 모습이었다.“뭐야?”이 순간 사람들은 놀라서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주먹 싸움 끝에 도규현이 열세에 처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그야말로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이, 이럴 수가! 규현 오빠가 밀린다고?”도민향은 놀라운 표정으로 한순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이럴 수가? 진우 씨가 저렇게 강했다고?”도윤진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유진우가 도규현을 누르고 우위를 차지했다고 말하면 직접 보지 않은 이상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말... 말도 안 돼! 여자 등만 처먹는 사람이 저렇게 강하다고?”나동수 3인은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들의 예상대로라면 유진우가 한 방에 죽었어야 했지만, 오히려 도규현을 압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야?”이때, 도장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어두운 표정을 했다.‘우리 아들 무술 천재인데 어떻게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질 수가 있지? 이번 경기에서 지면 도씨 가문의 체면은 말이 아닐 텐데...’결정적인 것은 조군수와의 내기로 도씨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고대 서적이 걸려있다는 것이다.일단 패하면 그 결과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역시는 역시로군.”조군수는 놀라움 동시에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진우 씨가 무대에 오르기까지 어느 정도 자신이 없었을 리가?’“하하... 재밌군.”황보용명이 수염을 쓰다듬더니 흥미진진한 표정을 했다.‘젊은 나이에 의술과 무술에 능하다니. 이 녀석, 쉽지 않군!’“언니, 봤어? 형부가 이겼어!”조아영은 멈칫하더니 흥분하기
“오늘, 내가 3년 동안 쌓아온 실력이 어느 정도로 무서운지 보여주도록 하지!”도규현은 말하면서 옷을 벗더니 안에 입고 있던 주석을 드러냈다.한 조각 한 조각의 주석은 마치 철갑옷처럼 한 절반 몸을 가렸다.두 팔, 두 발마저 주석으로 치장했다.“철컥! 철컥! 철컥!”모두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속에서 도규현은 몸에 입고 있던 주석을 한조각 한조각 벗어내기 시작했다.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에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기 시작했다.“헉! 도규현 너무 독한 거 아니야? 몇백 근이나 되는 주석을 짊어지고 있었다니!”“일반인들이 이만한 주석을 몸에 달고 있으면 걷기도 힘든데 도규현은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면서 심지어 대결을 진행했다니! 정말 괴물이 맞네!”“무게를 짊어져도 저렇게 강한데 벗어던지면 실력이 어느 정도일까?”“굉장하겠지!”도규현처럼 독한 사람은 보지 못한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몇백 근이나 되는 무게를 옷처럼 입고 있으면 그 누구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역시 유진우가 우세를 차지했던 것은 규현이 오빠가 자기 실력을 감춰서였어. 이제 봉인이 풀렸으니 손쉽게 이길 일만 남은 거야!”이때 도민향이 다시 이전의 자신감을 되찾았다.“스카이 랭킹 13위에 아무나 드는 것은 아니야.”도윤진은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천재는 두렵지 않았지만 제일 두려운 것은 천재가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것이었다.“하하... 그러니까 도규현이 어떻게 질 수가 있어! 아직 제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야!”잠깐의 놀라움 끝에 나동수 3인은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이것이 바로 자신들이 원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역시 우리 아들. 마지막 한 방을 아직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야. 이제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네!”도장수는 그제야 안심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가문의 명성과 가보를 지킬 수 있겠군.’“진우 씨 위험해졌어.”조군수와 조선미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심각한 표정을 했다.
“뭐야?”검이 손가락 사이에 잡힌 순간 도규현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는 이미 몸에 짊어진 무게를 벗어던졌기에 아까보다 속도도 훨씬 빨라졌고 힘도 강해졌다. 심지어 승리를 거머쥐기 위하여 실력도 숨기지 않고 가장 자신 있는 검까지 빼 들었다. 하여 도규현은 검 한 방에 승부가 날 거라고 확신했지만 자신이 힘껏 휘두른 검을 유진우가 식은 죽 먹기로 막아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손가락으로 집었다. 그것도 단 두 손가락으로 쇠도 진흙처럼 자를 수 있는 검을 잡았다.이게 진짜 인간이란 말인가?”“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도규현의 두 눈이 순식간에 시뻘게지면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그는 장검을 휘두르면서 속박을 벗어나는 동시에 다시 한번 공격했다. 한번 또 한 번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 바람에 링 전체가 검의 그림자로 뒤덮였고 바닥에도 검자국이 점점 많아져 마치 빼곡하게 얽히고 설킨 거미줄처럼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죽어! 죽으라고!”도규현은 연신 포효했고 움직임도 점점 빨라졌으며 검 기술도 날카롭고 사나워졌다. 저도 모르게 실력이 또 어느 정도 향상된 것 같았다.하지만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는 도규현을 보면서도 유진우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몸이 마치 오뚜기처럼 요리 피했다, 조리 피했다 하며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처음부터 끝까지 바닥에 단단한 뿌리라도 내린 듯 두 발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도무지 피할 방법이 없을 때만 손을 써서 막곤 했다.링 위의 결투는 점점 치열해졌고 검의 기운으로 인해 광풍이 휘몰아치기도 했다. 무대 아래에 있는 구경꾼들은 저마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왜냐하면 유진우와 도규현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잔영만 보일 뿐 누가 누구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무엇보다 도규현의 검의 기운이 실로 무서웠다. 그저 여파일 뿐인데도 일반 무사들에게는 아주 치명적이었다.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멀리 떨어져서 관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규현이 마음만 굳게 먹는다면 유진우를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맹주님은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조군수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가운데 자리에 앉은 황보용명에게 물었다.“그 사람이 이길 확률이 9할 정도 될 것 같네요.”황보용명은 실눈을 뜨고 대답했다.“9할요?”그의 말에 왼쪽에 앉은 도장수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역시 맹주님은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우리 규현이가 필살기를 숨기고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셨네요. 9할의 승률은 당연한 겁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들이 이기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황보용명의 한마디에 조마조마하던 마음도 드디어 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무도 마스터인 황보용명의 안목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9할 승률이라고 했다면 무조건 9할 승률이다. 완전히 100%는 아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자신만만한 도장수를 보며 황보용명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무술 18검!”그때 링 위에서 갑자기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검의 기운이 폭발하면서 더욱 날카로워졌다. 링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고 바닥이 쭉쭉 갈라졌다.“규현 오빠가 드디어 필살기를 선보이려고 해. 저 자식 오늘 제삿날이야.”도민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무술 18검은 생사의 갈림길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돼. 하지만 사용한다면 상대는 뼈도 못 추리고 죽게 될 거야.”도윤진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이번에도 살아남는지 두고 보자고!”나동수 등 3인은 유진우가 패하는 장면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드디어 끝나는 건가?”도장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유진우의 실력에 많이 놀란 건 사실이지만 그래봤자 아들의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이번 공격만 버티면 역전승할 기회가 있어요. 힘내요!”조군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예비 사위를 응원했다. 옆에 있는 조선미 두 자매도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안절부절못했다.‘맹주님마저 승률이 1할밖
쿵!도규현이 쓰러지던 그때 현장이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조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축하 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아부 소리까지 순식간에 멈췄다.사람들은 경악한 얼굴로 그저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도규현이 이긴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중상을 입고 피를 토했지? 간신히 이긴 거라서 심하게 다쳤나?’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던 그때 링의 폐허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그가 움직이자 주변에 먼지가 흩날렸는데 마치 감지 능력이라도 있는 듯 자연스럽게 흩어지면서 길을 터주었다. 그 사람은 스스로 걸어와 링의 맨 꼭대기에 우뚝 섰다.드디어 준수한 얼굴이 사람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유진우였다.유진우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꿋꿋하게 서서 중상을 입고 쓰러진 도규현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하찮아서 말할 가치도 없는 일을 처리한 듯 표정은 무척이나 덤덤했다.그 시각 링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고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다들 도규현이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유진우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하게 서 있었지만 되레 도규현이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결과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뻔했다.“어... 어떻게 이럴 수가. 도규현이 졌어?”“세상에나. 스카이 랭킹 13위인 강자이자 강남 무림의 최고 천재가 무명인에게 졌다고?”“저 녀석 대체 정체가 뭐야? 규현 도련님에게 중상을 입히다니, 정말 무서운 녀석이야.”잠깐의 침묵 후 현장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저마다 경악한 얼굴이었고 유진우를 쳐다보는 눈빛이 마치 괴물을 보는 듯했다.너무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결과는 이미 눈앞에 펼쳐져 있다. 타고난 천재라 불리는 도규현이 패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말... 말도 안 돼. 규현 오빠가 어떻게 저런 녀석에게 져? 내가 잘못 본 걸 거야.”도민향은 미친 듯이
진이수의 갑작스러운 적대적 태도에 유진우는 잠시 당황하며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초면이고 아무런 악연도 없는 상황인데 왜 이렇게 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일까?’ “진 대장님, 우리가 전에 만난 적 있나요?” 유진우는 가볍게 물으며 손을 천천히 내렸다. “만난 적 없는데요.” 진이수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렇다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유진우가 되물었다. “저는 그저 청성 씨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 진이수는 여전히 단호하게 말했다. “죽음의 사막은 위험이 도사리는 곳으로서 들어간 사람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어요. 강한 실력과 전문적인 지식, 경험이 없다면 일반적인 사람은 하루도 살아남지 못해요. 청성 씨가 저를 고용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청성 씨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죠. 그런데 당신은 전문적인 경호원이 아닌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당신의 능력이 의심되네요. 사막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청성 씨가 오히려 당신에게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돼요.” 진이수의 말은 매우 직설적이고 거칠었다. “진 대장님, 청성 씨가 저를 데려온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의 역할은 단지 길을 안내하는 것뿐이에요. 위험을 피하고 그것만 잘하면 됩니다. 그 이상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저를 평가할 권리는 없습니다. 제가 할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유진우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는 성격이 온화한 편이지만 이처럼 자신을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돈을 받는 일도 적당히 해야죠. 이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그렇게 대충할 수 없어요.” 진이수는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이청성을 향했다. “청성 씨, 이 일과 관련된 뛰어난 경호원을 몇 명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저를 믿으신다면 그들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물론 비용이 더 들겠지만요.” “진 대장님, 그 마음은 고맙지만 저는 유진우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가 있기 때문에 제 안전은 문제가 없을 거예요.” 이청성은
차량은 일정한 속도로 순조롭게 달렸다. 결국, 그들은 다음 날 오전에 죽음의 사막의 가장자리 지역에 도착했다. 사막의 가장자리에는 크지 않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약 500-600가구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마을에는 여관, 주유소, 마트 등이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필요한 물건들은 다 갖추어져 있었다. 탐험대들에게 이 마을은 중요한 보급소로 위험한 순간에 생명의 은인이 되기도 한다. 사막에 들어가기 전이나 사막을 빠져나오는 이들은 모두 이 마을에 잠시 머물며 정보를 얻고 물자도 보충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사막으로 물자를 운반하기 어려운 탓에 마을의 물가가 외부보다 몇 배나 비쌌다는 것이다. 이청성의 차량 행렬은 마을에 들어가 ‘희망의 집’이라는 이름의 여관 앞에 멈췄다. 이 여관은 원래 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곳으로 방이 아주 많아 100명 넘게 수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청성 씨, 도착했습니다.” 차량이 멈추고 한 명의 용병 옷을 입은 남자가 이청성의 차 창문을 두드렸다. 그 남자는 30대 중반의 키 큰 남자였고 황색 군복을 입고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강한 인상의 얼굴을 지닌 그 남자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느낌을 주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진이수, 탐험대의 대장이며 죽음의 사막에 두 번 들어가 성공적으로 살아 돌아온 경험이 있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이청성은 그에게 큰돈을 주고 가이드를 맡겼다. 이번 탐험도 그가 이끌게 되었다. “진 대장님, 이곳이 바로 사막의 마을인가요?” 이청성은 차 문을 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부분의 건물은 낮고 허름해 보였다. 사막의 모래바람에 오랜 세월 닳고 닳아 마을은 전반적으로 허술하고 거칠게 보였다. 하지만 ‘희망의 집’이라는 여관은 예외였다.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자주 청소하는 듯했다. “맞습니다. 반경 100리 내에 이 마을 하나뿐입니다. 죽음의 사막에 가까워서 ‘사막의 마을’이라 불리죠.” 진이수는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이
왕부에 돌아온 유진우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두 통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유만수의 서재에 두었고 다른 하나는 유천우의 침실에 놓았다. 이 두 통의 편지는 사실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남기는 작별 인사였다. 유진우는 감정적인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했다. 때로는 침묵 속에서 떠나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일 때가 있었다. 황혼이 내려앉을 무렵, 유진우는 이청성의 차에 몸을 싣고 서남의 사막으로 향했다. 서남에서 가장 거대한 사막은 ‘죽음의 사막'이라고 불린다. 이 사막은 환경이 극도로 험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잘못 들어가면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물론 죽음의 사막은 위험하지만 그 안에는 보물도 숨겨져 있고 금광도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수많은 탐험대가 생명을 걸고 사막에 들어가 운을 시험하려 한다. 운이 좋으면 보물을 발견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될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목숨을 잃고 만다. 과장하지 않고 말하자면 매년 수백 명이 보물을 찾아 사막에 들어가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도 죽음의 사막에는 끝없이 많은 탐험대가 몰려든다.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고 새는 먹이를 위해 죽는다'는 말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일확천금을 꿈꾸며 사막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청성은 당연히 죽음의 사막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 신비로운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죽음의 사막에서 탐험했던 경험이 있는 전문 탐험대에게 큰돈을 지급해 길잡이를 맡겼다. 자신의 호위대와 합쳐 총 100명 이상의 인원과 30대가 넘는 차량이 함께 떠났다. 그중 절반 이상은 물자를 실은 차량이었다. 음식, 물, 나침반, 통신 장비, 응급처치 키트, 자외선 차단복, 구조 도구 등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청성은 부족함 없이 모든 물품을 준비했다. 밤이 깊어졌다. 차량 행렬은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었다. 유진우는 자리에 기대어 창밖으로 달빛을 바라보며 얼굴에 어떤 감정도 드러내
점심을 먹고 난 후, 유진우는 갑자기 이청성의 전화를 받았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상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만날 장소는 성서의 옛 저택으로 정했다. 성서에 있는 그 오래된 집은 유진우가 이미 구매해 놓은 곳으로 주로 밀사 훈련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전에 소현무에게 피해를 보았던 여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서경의 밀사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의 큰 뜻은 다시는 자신들처럼 고통을 겪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깊은 뜻에 유진우는 존경을 표했으며 그들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손도운의 훈련을 거친 그 여자들은 이제 입문 단계에 있지만 진짜 임무를 수행하려면 최소한 3년 이상의 연습이 필요했다. 유진우는 그들이 평생 임무를 수행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모든 것이 평화롭다는 의미였다. 밀사들은 잠재적인 위협이 있을 때만 활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그들은 거의 죽을 각오로 임무를 수행한다. 30분 후, 유진우는 성서의 오래된 집에 도착해 회의실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청성이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이청성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면사포와 모자로 가리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매만 봐도 여전히 매우 유혹적이었다. 특히 그녀에게서 풍기는 신비롭고도 매혹적인 기운은 마치 타고난 매력처럼 사람들을 쉽게 끌어당기는 느낌을 주었다. “왔어요?” 이청성은 직접 유진우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공주마마, 갑자기 절 찾으시다니,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유진우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우리 이렇게 친해졌는데 공주마마라 부르는 게 좀 어색하지 않나요? 다른 호칭을 쓰는 건 어때요?” 이청성은 미소를 머금은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뭐라 부르면 되나요? 아가씨? 아니면 여사님?” 유진우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이, 그런 거 말고 그냥 청성 씨라고 불러도 되잖아요. 왜 그렇게 격식을 차려요?” 이청성은
원인은 간단했다. 유진우는 배신자를 극도로 혐오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적인 자들은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했다. 반란을 일으킨 다섯 명을 처형한 후, 그들을 따랐던 고급 장교들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처분이 내려졌다. 강등될 자는 강등되고 포섭할 자는 포섭하며 감옥에 가야 할 자들은 감옥에 보냈다. 구체적인 처분은 자발적인 배신이었는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유진우는 반란을 수습하는 동시에 홍복홍에게 유만군의 한 부대를 이끌고 보물 지도의 위치를 따라 호룡각의 보물 창고를 찾아가도록 지시했다. 모든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호룡각에도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대 마스터인 홍복홍 앞에서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손쉽게 호룡각의 잔당을 소탕하고 보물 창고에 있던 모든 재물을 회수해 왔다. 사철수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물 창고 안에는 재물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경 왕부에서 동원한 수백 대의 대형 트럭과 수만 명의 인력을 총동원해야만 창고를 완전히 비울 수 있었다. 그 모든 재물의 양과 가치는 어마어마해서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이 보물만으로 서경의 향후 20년 군자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창고 하나만으로 이 정도라면 남은 세 개의 보물 창고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나라를 사고도 남을 부가 될 것이었다. 보물을 가져온 뒤 가장 먼저 진행된 것은 바로 공로를 논하고 상을 주는 일이었다. 남방의 세 명의 제후인 회음 제후 은성종, 평양 제후 장범규, 선평 제후 주한휘는 모두 큰 공을 세운 자들이었기에 마땅한 보상을 받았다. 그들의 휘하에 있던 장군과 병사들도 저마다 공훈에 따라 상을 받았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어느덧 사흘이 지나 있었다. 3일 후, 정오. 유진우가 식사하던 중 홍복홍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세자 전하, 아뢸 일이 있습니다.” 홍복홍은 몸을 숙이며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
“됐어,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방에 들어가서 쉬어.”유만수는 피곤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유만수가 유진우한테 왕위를 계승해 줄 생각을 했던 건 한편으로는 유진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책감 때문에 조금이나마 보상을 해주고 싶어서였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진우는 야망도 없고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그러니 유만수도 싫다는 아들을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얼마 남지 않은 삶이니 이젠 두 아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지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 외에 일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유진우는 뭔가를 말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우는 아직 왕이 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확실히 아니었다.다른 사람들한테는 서경의 왕은 최고의 권세를 대표하고 무궁무진한 부귀영화를 대표하며 세계 정상에 서는 위풍을 대표하겠지만, 유진우한테 서경의 왕은 너무 무거운 자리였다.그 자리는 오르기만 하면 짊어져야 할 것이 너무 많고 더 이상 자기 자신보다 전체 서경, 더 나아가 천하의 백성을 생각해야 한다.유진우는 자신은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 이렇게 무거운 책임을 질 자신이 없었다. 유진우는 이번만큼은 그냥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며칠 동안 유진우는 왕부에서 시간을 보냈다.반역을 평정하는 이번 일은 호룡각을 소탕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이 많았다.유만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유진우가 그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했다.먼저 유태범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유진우는 유태범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첫째, 병권을 반납하고 서경에 머물며 매일 개를 산책시키고 말을 타고 활을 쏘며 한가로운 귀족으로서 부귀한 삶을 누린다. 단, 어떤 세력도 있어서는 안 되며 수중의 호위대도 백 명을 넘지 말아야 한다.둘째, 어느 정도의 금전을 가지고 서경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발전한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왕부는 절대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제가 한 약속이니 제가 지켜야죠.”유진우가 꿀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는 보물 황옥주를 가지고 있어 용원의 기를 찾는 데 성공할 확률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야말로 해변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다.“그래. 그럼, 네 말대로 용원의 기는 네가 찾아봐. 그런데 문제는 그걸 찾고 난 다음에는 뭐 할래?”유만수는 되물었다.“그건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요. 아직 그렇게 멀리까지 생각 안 해봤어요.”유진우는 고래를 저으며 말했다.“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유만수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약속을 지킨 뒤 두말 말고 다시 돌아와서 왕위를 이어받아. 뒷걱정 없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말했잖아요. 저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유천우는 단번에 거절했다.“내 아들인 네가 왕위를 이어받지 않으면 누가 이어받아? 설마 정말 천우에게 이 중책을 맡길 생각이야?”유만수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천우는 학문도 능하고 무술도 능한데 안 될 건 또 뭐예요?”유진우가 반박하며 물었다.“우수한 건 맞지만 천우는 대장군이 더 어울려. 서경의 왕은 아니야.”유만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서경이 세력이 크긴 하지만 내우외환이 끊지지 않고 있어.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많은 세력이 반드시 들고 일어날 거야. 그때가 되면 천우가 막아낼 수 있을 거 같아? 천우한테 왕위를 계승하는 건 그를 해치는 길이야.”“그럼, 저는 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예요?”유진우가 물었다.“너는 팔자가 굳세고 대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이 세상에서 너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연경에 있는 분도 같은 생각이야. 네가 서경의 왕이 된다면 전체 국면을 안정시킬 수 있어. 나중에 서경에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너는 그만한 중책을 다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야.”유만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듣다 보니까 결국 저는 정세
유태범은 분한 마음에 울화통이 터졌지만 그렇다고 감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유진우와 유천우가 거절하며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왕은 그 두 사람 중에서 나와야 한다는 걸 유태범도 잘 알고 있었다.조금이라도 허튼 생각을 한다면 그의 최후도 채원진과 똑같아질 것이 뻔했다.“그만! 그만! 이 녀석들이! 왕위를 계승하라는데 무슨 처벌을 받듯이 말하고 있어? 그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야?”두 아들의 태도에 화가 난 유만수는 욕을 퍼부었다.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왕위를 값이 없이 여기며 서로 안 한다고 싸우는 두 아들 때문에 유만수는 너무 창피했다.“저는 정말 생각이 없어요. 천우한테 물려 주세요.”유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저는 왕위를 감당할 재목이 아니에요. 무조건 형을 시키세요.”유천우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둘 다 입 다물어!”유만수는 탁자를 세게 치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내가 결정해. 너희들이 제멋대로 이래라저래라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몸만 괜찮았다면 너희들이 왕위를 이렇게 빨리 넘겨받을 수 있었을 거 같아?”유만수가 화를 내자 유천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절대 못 하겠다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생각을 밝히고 있었고 유진우는 여전히 자신과 상관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유만수는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말했다.“자식놈들이 모두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줬네요. 왕위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오늘에는 모두 즐겁게 먹고 마시며 좋은 시간을 보냅시다.”“자자, 다들 마십시다.”장범규는 웃으면서 분위기를 풀었다. 그는 누가 왕위를 이어받든 상관없었다.결정은 순전히 유만수의 손에 달렸으니, 장범규는 누가 왕이 되었던 유만수의 결정을 따르고 지지할 생각이었다.방금까지 얼어있던 분위기는 금세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다만 아까와 달리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첫 번째 부류는 회음 제후 은성종을 필두로 유진우를
“뭐?”유진우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며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서경의 왕위는 수많은 사람이 바라지만 누구도 얻을 수 없는 자리였다.이렇게 존귀하고 최고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서로 마다하는 유진우와 유천우 때문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예전에는 왕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웠거늘, 유진우와 유천우는 완전히 반대였다.두 사람은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양보하며 왕위를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유진우를 지지하던 사람도 유천우를 지지하던 사람도 모두 입만 벌린 채 얼어있었다.당사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는데 정작 두 형제는 서로 양보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었다.“형, 애초에 약속했잖아요. 형이 왕이 되고 내가 장군이 돼서 형을 보좌한다고. 왜 말을 바꿔요?”유천우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언제?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어.”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게으르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것에 익숙해. 구속받는 것도 싫고 부담스러워서 싫어. 그리고 너를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아. 왕위는 네가 더 합당해.”“합당하기는 개뿔!”유천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내 능력이 어느 정도 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애당초 나는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에요. 하지만 형은 다르죠. 형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수하고 형이야말로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계승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후계자예요.”“천우야, 함부로 너 자신을 낮추지 마. 네가 나보다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야. 너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야.”유진우가 말했다.“난 몰라요! 아무튼 서경의 왕은 형이 하세요!”유천우는 화가 나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익지 않은 참외를 억지로 비틀어 따봤자 그 참외는 달지 않아. 나는 큰 포부도 없고 남을 위하는 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