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혁이 어떤 사람인가. 중주에 피바람이 불게 한 살아있는 재난 그 자체였다. 수많은 사람을 벌벌 떨게 만든 괴물이었다. 10년 전, 도시에 재난을 몰고 온 장본인이었다. 그전까지는 누구도 열다섯밖에 안 되는 소년이 세상을 발칵 뒤집을 줄 몰랐다. 어쩐지 장군이 이 사람을 보고는 놀라더라니.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이 자가 10년 동안 잠적한 천재, 유장혁이었다. “쿵!”부관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희망을 잃었다. 유진우는 고개를 돌려 조웅과 두 사람을 본 후 무시하고는 그대로 조천룡 앞으로 걸어갔다. “큰아버지, 살려주세요! 큰아버지!”조천룡은 부러진 다리를 감싼 채 몸을 웅크리고 뒤로 물러나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내가 말했지, 시체도 안 남게 만들어 주겠다고.”유진우는 바닥의 채찍을 집어 들고 조천룡의 얼굴에 대고 힘껏 휘둘렀다. “악!”조천룡이 고통 섞인 비명을 질렀다. 얼굴의 살점이 뜯겨 나가고 피가 사방에 튀었다. 유진우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또 한번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퍽!”채찍의 소리와 함께 조천룡의 피부가 옷처럼 발가벗겨졌다. “악!”조천룡이 또 한번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큰아버지! 살려주세요!”조웅은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하며 그대로 굳어있었다. 유진우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조천룡의 몸에 채찍을 휘둘렀다. 사방에 피와 살점이 튀었다. 고통 섞인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했다. “그, 그만!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조천룡이 바닥에 꿇은 채 울면서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진우는 귀가 먹은 것처럼 계속해서 채찍을 휘둘렀다. 이청아가 받은 고통의 열 배, 백 배는 돌려줄 작정이었다. “잘한다! 죽여버려!”구석에 숨어있는 양의성은 속으로 기뻐하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조천룡 같은 뛰는 놈도 유진우라는 나는 놈을 만나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유진우가 복수를 이어가고 있을 때 길게
고요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한복을 입은 노인이 유진우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안병서가 고개를 숙이게끔 하는 노인이 유진우의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하인이 주인을 만난 상황이라니. 이게 진짜 무슨 상황인가. “어...”양의성은 믿을 수 없어 입만 딱 벌렸다. 유진우가 그저 무술 실력만 좋은 줄 알았는데 이토록 강한 뒷배가 있었다니. 안병서의 지위는 매우 높았다. 하지만 한복을 입은 노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기도 했다. 그러니 한복을 입은 노인은 지위가 더 높을 것이었다. 그런 인물이 유진우 앞에서 꿇다니! 누군가가 뒤통수를 세게 친 느낌이었다. 평소에 아무 것도 아니던 유진우가 이런 뒷배를 가지고 있다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이때의 조천룡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노인이 유진우 앞에서 무릎을 꿇은 그 순간부터 그의 정신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유일한 희망마저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희망 대신 절망과 공포가 자리 잡았다. 구세주인 줄 알았던 사람이 유진우의 아래 사람이라니? 젠장! 보통 괴물을 건드린 게 아니었다. 양의성과 조천룡과는 다르게 조웅은 이미 죽을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 유진우의 신분을 안 그 순간부터 그는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만약 반항한다면 죽는 것은 그뿐이 아니라 그의 전체 가족일 것이었다. “도련님, 10년만입니다... 소인, 드디어 도련님을 찾았습니다!”용복 어르신은 바닥에 꿇은 채 눈물을 흘렸다. 전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유진우는 미동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얘기했다.“꺼져!”두 글자를 내뱉은 유진우는 용복 어르신을 무시하고 그대로 조천룡 앞에 걸어갔다. 그는 살기로 가득한 상태였다. “죽, 죽이지마... 제발 죽이지마... 날 살려준다면 뭐든지 다 할게!”조천룡은 놀란 나머지 소변을 지린 상태로 머리를 조아렸다.
이틀 후, 평안 의원. 기절해 있던 이청아는 드디어 깨어났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평범한 방이었다.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 그리고 침대까지.살짝 익숙했다. 마치 전에 와 본 것처럼.“일어났어?”이때 유진우가 손에 쇠고기 야채죽을 든 채 들어왔다.별거 아니었지만 이틀을 연속 굶은 이청아에게는 꽤 유혹적이었다.그리고 그녀의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났다. “네가 날 구해준 거야?”이청아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먼저 물었다. “네가 다친 채로 길가에 있는 것을 주워 왔을 뿐이야.”유진우가 담담하게 얘기했다. “주워 와?”이청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묻다가 그제야 또 물었다. “아, 나 얼마나 쓰러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지금 무슨 상황이야? 내 부모님은 괜찮으시고?”연이은 질문 폭탄에 유진우는 골치가 아팠다.그저 일일이 대답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넌 이틀을 기절해 있었고 가족은 다 괜찮아. 조씨 가문은 이미 불에 타서 다 사라졌어.”가족이 무사하다는 소리에 이청아는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곧 놀라서 되물었다. “불에 탔다고? 무슨 일이야?”“자세히는 모르는데 가스가 샜나 봐. 조씨 가문의 이삼십 명 되는 사람들이 다 화재에서 죽었다고 하더라고.”유진우가 대답했다. “가스가 새? 이렇게 타이밍 좋게?”이청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다 자업자득이야. 그동안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가 대답했다. 그러자 이청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시름을 놓았다. 조씨 가문이 없어지면 보복당할 위험도 없었다. “됐어. 그만 생각하고 죽부터 먹어.”유진우는 쇠고기 야채죽을 건넸다. “고마워.”배가 고픈 이청아는 거절하지 않고 죽을 건네받은 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따뜻한 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런데도 아쉬운 것인지 이청아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가 가서 한 그릇 더 가져올게.”유진우는 가서 또 한 그릇 떠왔다. 이청아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두 번째 그릇도 다 먹어버렸다. 뜨끈한 죽이 위를
한바탕 소동 끝에 이청아는 얼굴이 붉어지고 땀에 흠뻑 젖게 되었다.그 원한에 가득 찬 눈빛은 유진우를 소름이 끼치게 했다. ‘단지 약을 발랐을 뿐이잖아? 왜 모욕을 당한 것처럼 그러는 건데.’“다 봤냐고, 다 봤으면 빨리 나가!”이청아는 이불로 몸을 가렸다. 저 가는 허리 라인과 탐스러운 엉덩이는 사람을 유혹시키는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었다.“이 약은 네가 가져가. 닷새 정도 바르고 나면 흉터가 사라질 거야.”유진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약병을 내려놓고는 문밖으로 나갔다.시간이 얼마 흐른 뒤, 옷을 정리하고 입은 이청아도 방문을 열고 나왔다.불과 아까까지만 해도 화를 내던 그녀는 다시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핸드폰 좀 빌려줘, 전화 좀 하게.”이청아는 죽을 먹고 있던 유진우에게 손을 뻗었다.유진우도 아무 말 없이 순순히 핸드폰을 그녀에게 바쳤다.“잠금 비번은?”이청아가 물었다.“네 생일.”유진우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말을 들은 이청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입꼬리가 작게 올라갔지만 이내 다시 그 모습을 감췄다.“흥!”이청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잠금을 해제한 뒤, 그녀는 먼저 집에 연락해 안부를 전했다.이어서 그녀는 장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대표님! 드디어 연락이 되는군요! 요 며칠 도대체 어디에 계셨어요? 왜 아무런 소식도 없으셨던 겁니까?!” 장 비서의 말투는 꽤나 격동되어 있었다.“일이 좀 있어서 연락을 못 했어. 회사는 어때?” 이청아가 물었다.“새 회사는 괜찮아요. 금방 개업한 데다가 조씨 가문이 뒤에서 받쳐주고 계시고, 아무튼 여러 방면에서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청성 그룹에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장 비서가 대답했다.“무슨 문제?” 이청아는 조금 불안했다.“자금을 회수하는 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러 사업 파트너들이 돈을 갚지 않으셔서 회사가 금융위기에 놓였습니다. 다행히 대표님이 가지고 계신 160억 비상 자금
“천한 년! 죽여버릴 거야!”따끔거리는 볼을 만지던 정영준 은행장이 노발대발하며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민첩한 이청아는 곧장 다리를 뻗어 정영준 은행장의 가랑이를 힘껏 걷어찼다.“으악!”정영준 은행장이 비명을 지르며 가랑이를 붙잡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찌나 고통스러웠던지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역겨운 것!”이청아가 나가려던 그때 마침 문 앞에서 몰래 엿듣고 있던 유진우를 발견하고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여기서 뭐 해?”“아니야. 혹시라도 네가 괴롭힘당할까 봐.”유진우가 어깨를 들썩였다. 바닥에 누운 채 비명을 지르는 정영준 은행장을 본 그의 두 눈에 싸늘함이 스쳐 지나갔다.조금 전 다행히 이청아가 완승했길래 망정이지, 그가 나선다면 두 손을 영영 못 쓰게 만들어버렸을 것이다.“일 다 봤어. 그만 가자.”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이청아는 하이힐을 또각또각 밟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기분이 말이 아니게 다운되었다.“거기 서, 이 년아!”그때 정영준 은행장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사람을 쳐놓고 도망치려고? 우리를 무시해?”그의 분부와 함께 몇몇 경비원이 달려와 두 사람이 못 나가게 문을 막아섰다.“천한 년! 감히 나한테 발길질을 해? 죽여버릴 거야!”정영준 은행장이 노기등등하게 다가오며 손찌검을 하려 했다. 그런데 유진우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넌 또 누구야? 감히 내 일에 끼어들어? 죽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정영준 은행장이 매섭게 쏘아붙였다.“청아한테 사과해. 안 그러면 그 입 찢어버리겠어!”유진우의 낯빛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사과는 개뿔.”분노가 치밀어 오른 정영준 은행장이 주먹을 휘두르려 하자 유진우는 민첩하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먼저 내리쳤다.“찰싹!”커다란 체구의 정영준 은행장이 그대로 맥없이 튕겨 나갔다. 맞은 얼굴이 살짝 비틀어졌고 입을 벌리자 이가 우르르 빠졌다.“뭐?”튕겨 나간 정영준 은행장을 본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유진우가
“대체 어떤 놈이 감히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워? 죽고 싶어 환장했나 봐?”조민이 시가를 물고 위세를 부리며 걸어 들어왔다.혹시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저절로 길을 비켜주었다. 이청아마저도 낯빛이 잔뜩 어두워졌다.조훈이 죽은 후에 모든 세력을 물려받은 조민은 전보다 훨씬 더 위풍당당해 보였다. 게다가 강천호까지 뒤를 봐주고 있어 그를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다들 옆문으로 가. 여긴 내가 막고 있을게.”이청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유진우 앞을 막아섰다. 그녀가 나름 신분이 있어 조민이 아무리 미쳐 날뛴다고 해도 그녀를 어찌하진 못할 것이다.하지만 유진우는 달랐다. 신분도 배경도 없는 그가 조민의 손에 잡힌다면 죽음 아니면 평생 장애가 남을 정도로 두들겨 맞을 것이다.“간다고? 어딜?! 조민 회장님이 온 이상 오늘 누가 와도 너희들을 못 구해! 그냥 얌전히 죽길 기다려.”비웃음과 함께 정영준 은행장이 조민에게 뒤뚱뒤뚱 걸어갔다.“회장님, 드디어 오셨군요. 제 얼굴 좀 보십시오. 잔뜩 얻어맞았습니다.”“응?”조민이 그를 흘겨보았다.“대체 무슨 일이야?”“어떻게 된 거냐면요. 아까 저 여자가 대출하겠다면서 절 찾아왔는데 신용이 별로 좋지 않아서 제가 거절했거든요. 그런데 글쎄 파렴치한 년이 절 꼬시지 뭐예요? 그것도 다른 남자들이랑 다 같이 놀재요. 제가 싫다고 거절하니까 대뜸 손찌검부터 날렸어요. 정말 극악무도한 여자예요!”정영준 은행장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사실을 왜곡했다.“그래? 그렇게나 나댔어? 내 이름 얘기 안 했니?”조민의 표정이 무척이나 싸늘했다.“당연히 얘기했죠. 그런데 회장님을 전혀 안중에 두질 않더라고요. 회장님이 직접 나선다고 해도 쥐어패 버리겠다나 뭐라나!”정영준 은행장이 거짓말을 잔뜩 부풀려 말했다.“그래, 아주 좋아!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아주 등신으로 아나 보지?”조민이 흉물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대박 그룹의 회장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아니야! 말도 안 돼!’이청아는 그 생각을 바로 접었다.유진우는 그냥 일반인이다. 얼굴이 잘생긴 것 말고는 별다른 재주도 없는 사람이다.그와 달리 조민은 조훈 어르신의 뒤를 이었고 대박 그룹의 회장인 데다가 부하도 수백 명에 달한다. 그런 그가 유진우를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내가 괜한 생각한 걸 거야.’조민은 아직도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심하게 얻어맞은 정영준 은행장은 피까지 토하며 고통스러워했다.그는 정영준 은행장을 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유진우가 화를 내어 그의 목숨을 앗아가면 큰일이니까.“회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만 때리세요... 제발 그만요!”정영준 은행장이 울며불며 처량하게 빌었다.조민은 유진우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유진우의 낯빛이 조금 풀린 걸 확인하고 나서야 주먹을 멈추었다.‘화풀이할 놈이 있었길래 망정이지, 안 그러면 큰일 날뻔했어.’“나한테 사과해서 뭐 해! 이 대표님이 널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너 오늘 여기서 죽어.”조민이 으름장을 놓았다.“이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제발 용서해 주세요.”정영준 은행장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손이야 발이야 하고 빌었다. 전의 오만방자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됐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이청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네네, 바로 꺼지겠습니다.”정영준 은행장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어찌나 급히 도망치는지 벗겨진 신발을 주울 새도 없었다.“이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다 제가 잘못 가르친 탓이에요. 이번 일을 제대로 반성하겠습니다.”조민이 한껏 자세를 낮추었다. 머리가 좋은 조민은 유진우가 평소에도 겸손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의 정체를 까발리지 않았다.“조민 씨가 이토록 정의로운 분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조민 씨를 다시 보게 되었네요.”이청아가 덤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요, 뭐.”조민이 제 발 저린 듯 말했다.
점심시간 천향원.조선미와 안도균이 차를 음미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선미야, 우리 전에 했던 내기 기억하고 있지? 벌써 사흘이 지났고 난 여전히 무사해. 약속 지켜야지?”안도균이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히죽 웃었다.“삼촌, 뭐가 그리 급해요? 아직 사흘이 되려면 반나절이나 남았어요.”조선미의 표정이 한없이 여유로웠다.“하하... 너 정말 그 사기꾼 놈을 믿는 건 아니지?”안도균은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수년간 무술을 연마한 내가 내 몸 상태가 어떤지조차 모를 리가 있겠어? 날 지금 봐봐, 아픈 사람 같아 보여?”“그건 모르겠지만 전 유진우 씨의 판단을 믿어요.”조선미가 여유롭게 웃었다.“흥, 그 자식이 대체 너한테 뭔 짓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믿는 거야?”안도균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그러게요. 이것도 인연인가 보죠...”유진우의 얼굴을 떠올리던 조선미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아무튼 아직 반나절 남았어요. 날이 저물기 전까지 삼촌이 무사하다면 패배를 인정할게요.”“그래. 그럼 반나절만 더 기다릴게. 그 사기꾼의 진짜 모습을 보게 해줄게.”안도균은 경호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차에 올라탄 후 한 경호원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조선미 씨처럼 훌륭한 분이 왜 그런 사기꾼을 마음에 들어 한대요? 전 정말 이해가 안 가요.”“여자들은 원래 생각을 벗어나는 법이지. 이제 유진우라는 자식 좀 조사해 봐. 대체 어디서 온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안도균이 분부했다.“알겠습니다.”대답을 마친 경호원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차가 천천히 달렸고 안도균은 평소처럼 옆에 기대 두 눈을 감았다.그런데 잠시 후 갑자기 흉통이 밀려왔다. 처음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이 점점 심해지더니 나중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돼버렸다.마치 칼로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고통이었다. 평소 강인한 성격의 그마저도 고통에 몸부림쳤다.“그 사기꾼 얘기가 다 사실이란 말이야? 이렇게나 신
“제가 이길 수 없어도 서경에는 왕이 계시잖아요. 그들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왕보다 더 강할까요?”“이보게 친구,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들이 아니에요. 그 악당들의 아버지들은 전부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 유명하며 대부분 서경 황족과 친분이 두텁고 개인적인 금융거래도 엉켜있어 아무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어요.”유성은 울먹이면서 말했다.“이런 벌레 같은 놈들을 설마 어르신도 상관하지 않는다고요?”유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어르신 인품으로 보면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절대 가만히 있었을 수 없었을 것이다.“어르신께서 처리해야 될 일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찌 이런 작은 일까지 일일이 신경 써주시겠어요. 게다가 그 나쁜 관리자 놈들이 이런 추악한 일들이 생겨도 말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입막음했으니, 어르신께서는 절대 알 리도 없고 우리를 위해 정의를 밝혀줄 기회도 없었어요.”유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서경이 이 정도로 난잡해졌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유진우는 서경에서 손가락에 꼽힐 수 있는 집안의 세자로서 시민들이 이런 압박을 받고 있으면서도 하소연할 길이 없다는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노가 차올라 낯색이 어두워졌다.게다가 장군의 아들인 유성마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반 시민들은 또 어떤 압박을 받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지금의 서경은 겉보기엔 번화한 것 같지만, 인성은 예전 같지가 않아요. 어르신도 이젠 연세가 많으셔서 몸이 예전보다 못해지다 보니 많은 일들을 직접 처리할 수 없기에 관리자들에게 기회를 주어 처리하게 하는데 그들 또한 이런 추악한 일들은 어르신께 보고 없이 내부에서 숨기고 있어서 우리한텐 이런 불공평한 일들은 자주 볼 수 있는 일들이에요.”유성은 실망이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이런 일들은 금시초문이에요. 이젠 제가 알았으니 절대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저한테 말만 해주시면 제가 반드시 되돌려 놓을 거예요.”유진우는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어?”의외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비석을 다시 똑똑히 쳐다본 유진우는 이 비석의 주인이 뜻밖에도 자신이랑 친분 있는 당시 흑용군의 선봉에 섰던 유림 부 장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선봉군은 모두 신중하게 고른 실력 있는 사람들로 부 장군까지 될 수 있었다는 건 그 누구보다 더 우수했을 것이다.유진우의 기억 속에 부 장군 유림은 천성적으로 신력을 가진 사람으로 전쟁터에서 매우 사납고 흉악했으며 무수한 적을 죽여 일생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유림 장군은 또한 자신의 아버지 유만수를 위해 서경을 평정시키고 적들을 방어하는데 큰공을 세웠었고 희생된 후에도 관직이 바로 한 계급 올라 선봉군 주 장군으로 바뀌었다.그리하여 장례식도 매우 성대하게 치렀고 후손들은 덕분에 각종 우대를 받으며 생활했다.‘이대로라면 유림 장군의 후손들은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처참해진 걸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유진우는 혼자 생각하다 천천히 젊은 남자한테로 다가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려 했다.“누구냐!”젊은 남자는 인기척을 눈치챈 듯 살짝 경계하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긴장하지 말아요. 우리도 당신처럼 가족한테 제사를 지내러 왔어요.”경계심이 가득한 남자를 본 유진우는 급하게 대답했다.“가족한테 제사 지내러 오셨다고요?”젊은 남자는 아래위로 훑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의 눈빛을 보니 경계심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네, 저희도 방금 제사가 끝나고 돌아가려던 찰나 너무 슬피 우시길래 걱정되어 찾아왔어요.”“죄송해요. 방금 제가 감정이 조금 격했어요. 두 분이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라요.”유진우의 걱정 어린 말투에 젊은 남자는 그제야 사과의 말을 전했다.“괜찮아요. 저희도 다 이해해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르고 있었다는 듯 눈앞의 비석을 쳐다보며 놀란 어조로 물었다.“어머! 여기는 위대한 유림 장군님의 묘지가 아니에요? 설마 귀하께서는 유 장군님의 후손이신가요?”“네, 제 이름은 유성이고 유림 장군은 바로 저희 아버지예요
유진우는 어머니의 비석 앞에서 무릎 꿇고 절을 올렸다.어머니를 살해한 주범 이원무는 살해되였고 호룡각도 무너졌으니 이젠 채원진과 사철수 일행만 남았다.이 사람들만 없애면 어머니의 피맺힌 원수는 완전히 갚을 수 있다.“어머니, 너무 보고 싶어요!”유진우는 눈앞의 비석을 바라보면서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유진우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일 년 내내 나랏일에만 힘쓰시며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으셨고 어머니 혼자 고생스럽게 자신을 키우셨다.어렸을 때 어머니가 너무 엄하게 다스린 탓에 반항심이 생겨 걸핏하면 엉덩이를 몇 대씩 더 맞곤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고된 마음을 이해 할수 있었다.유진우는 서경 세자로서 어려서부터 부유했고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었다.이런 환경에서 어머니가 잘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는 남을 쉽게 깔보는 부잣집 도련님이 되었을 것이다.유진우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어머니가 정성껏 길러주신 덕분이다.무술이든 군사든 의약이든 아니면 기이한 비술이든 모두 어머니의 교육을 벗어나지 못했다.어머니는 그에게 생명을 줬을 뿐만 아니라 장래의 모든 길을 열어 주셨다.“휴...”슬픔에 젖어 있는 유진우를 보며 이청성은 한숨을 내쉬며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다.그녀는 두 모자가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을거로 생각했다.한 시간 뒤, 유진우는 하소연을 마치고 어머니의 비석 앞에서 정중하게 세 번 절을 한 후 일어섰다.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커다란 묘지에는 몇몇 사람들이 간혹 슬피 통곡하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도 없었다.“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유진우는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청성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괜찮아요. 전 진 왕비의 인품을 항상 매우 탄복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그녀의 수상을 보게 된 것도 저의 영광이에요.”이청성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날도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일단 쉴 곳이라도 찾아봐요.”유진우는 어머니의 말이 나오면 더 슬퍼질까 봐 다시 말을 돌렸다.“제가
유씨 가문 묘원, 일명 왕씨 가문 묘원은 약 800묘의 광활한 면적을 자랑한다. 묘원 내부는 경치가 아름답고 나무들이 우거져 있으며 널찍한 도로와 다양한 시설이 완벽히 갖춰져 있다. 묘원 곳곳에는 수많은 꽃과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사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봄에는 벚꽃이 만개하여 꽃바다가 펼쳐지고 여름에는 푸른 잔디가 깔려 시원한 느낌을 준다. 가을이 되면 단풍잎이 흩날리며 감탄을 자아내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쌓여 은빛으로 뒤덮인다. 유씨 가문 묘원은 개방형으로 유씨 가문의 자손들뿐만 아니라 서경을 위해 공헌한 많은 장병들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매년 추모 기간 때마다 묘원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떤 사람들은 고인의 묘를 참배하러, 또 어떤 이들은 순국열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서경 사람들은 이 점을 특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은 현재 누리고 있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모두 순국열사들이 목숨을 바쳐 쟁취한 결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시간 후, 유진우와 이청성은 차를 타고 유씨 가문 묘원의 정문에 도착했다. 신분 노출을 피하기 위해 두 사람은 간단히 변장을 했다. 이청성은 섬유 재질의 인조 얼굴 가면을 쓰고 평범한 얼굴로 변장했다. 이는 사전에 준비한 것이었다. 서경에 도착해 종일 망사 모자나 베일을 쓰고 다닐 수는 없었기에 오히려 주목을 끌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청성은 평범한 얼굴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매와 기품은 여전히 돋보였다. 묘원 안을 걷는 동안 그녀를 힐끗거리는 남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연지 랭킹 1위의 무게감이었다.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그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유진우는 기억을 더듬으며 묘원의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억이 맞는다면 어머니의 묘는 묘원의 가장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고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다. 약 10분 정도 걸었을 때, 유진우는 드디어 진왕비의 묘를 찾아냈다. 다른 묘소에 비해 진왕비의 묘는 훨
서경 왕성.유진우와 이청성은 비행기에서 내려 조용히 승합차에 올랐다. 그들은 매우 신중하게 행동했으며 아무의 주목도 받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두 사람만이 함께 떠난 것으로 그들의 밀사와 근위병은 이미 전날 밤에 서경에 도착해 있었다. 이렇게 하니 더욱 은밀하고 안전했다. 차 안에서 이청성은 창문 너머로 번화한 거리를 바라보며 새로운 것들에 흥미를 느꼈다. 연경의 번잡함과 비교하면 서경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역 풍경이든, 문화든, 연경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고 평소 연경을 떠날 일이 거의 없었던 이청성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서경이 이렇게 많이 변했을 줄은 몰랐어요. 어렸을 때 이곳에 왔을 땐 대부분 낮은 건물들뿐이었는데 십여 년 만에 연경 못지않게 번화해졌네요.” 이청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그러게요. 서경이 정말 많이 변했어요. 이제는 저조차도 길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유진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모든 것이 이미 변해버린 모습이었다. 왕부에 돌아가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당신 아버지는 정말 위대한 분이에요.” 이청성은 감동한 듯 말했다. “아바마마께 들었는데 20여 년 전 서경은 아직도 황폐하고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지는 곳이었다고 해요. 백성들은 고통 속에 살아갔고 정말 메마른 땅에 굶주린 시체가 들판을 덮은 그런 상태였죠.” 그런데 서경왕 유만수가 나타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유만수는 연경의 명문가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놀라운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 군에 입대한 후에는 연전연승하며 많은 공을 세웠고 당시 그는 ‘세상에 비할 자 없는 명장’으로 불렸다. 어린 나이에 후작이 되고 장군의 자리에 올랐으니 정말 대단한 영광이었다. 모두가 유만수가 연경에 돌아가 발전하면 ‘천하의 권력을 쥔 이인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결정을 내렸다. 바로 서경에 정착해 국경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다.
“일리가 있네요.” 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경천 랭킹은 큰 변동이 있었어요. 이원무와 백준이 연이어 죽고 반유림은 행방불명이며 부규환은 한 칼에 쓰러졌죠. 작년 톱10 중 4명이 사라졌으니 정말 큰 손실이에요. 다행히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해 공백을 메웠어요. 정말 ‘강산은 인재가 계속 이어지고 신세대가 구세대를 대체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네요.” 이청성은 감탄하며 말했다. “새로 순위에 오른 이들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유진우는 갑자기 물었다. “5위, 채원진, 호룡각의 신임 각주죠. 이 사람은 아바마마께서도 전에 당신에게 언급하셨던 인물이에요. 송원호란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활동 중이에요. 이원무가 죽으면서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된 거죠.” 이청성이 대답했다. “채원진이란 사람은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예전에는 경천 랭킹에 없었는데 이원무가 죽자마자 순위에 올랐고 그것도 그렇게 높은 위치인가요?” 유진우는 약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말이죠. 채원진이라는 사람은 아주 깊이 숨어 있던 인물이에요. 이원무가 억누르고 있던 시절에는 채원진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었죠. 하지만 이원무가 죽고 나서 채원진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고 엄청난 수단으로 호룡각 잔당들을 정리했어요. 그러면서 천기각이 그제야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5위라는 평가는 보수적인 것이고 그의 실제 실력은 삼대파의 종주들과 견줄 만하다는 평이 많아요.” 이청성의 말투는 점점 진지해졌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군요?” 유진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경천 랭킹의 강자는 순위마다 큰 격차가 있었다. 예전에 백준은 혼자서도 경천 랭킹 강자 3명과 싸워 완벽히 우위를 점했으니 말이다. 또한 자신이 부규환과 싸웠을 때 서로 막상막하였고 술법을 써야 겨우 승리했었다. 그렇다면 부규환보다 더 상위에 있는 채원진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와 맞닥뜨린다면 이길 수 있을지는커녕 목숨을 건지는 것조차 어려울 수도 있었다. “호룡각 부각
“어쨌든 이 진무열이 천교 랭킹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라면 분명 비범한 능력을 가졌을 겁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보세요. 그래도 친척이잖아요.” 이청성은 반쯤 농담 식으로 말했다. “적일지 아군일지 아직 모릅니다. 난 진씨 가문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어요.” 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온화하고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진씨 가문에 의해 가문을 떠나야만 했고 이후 한 번도 그곳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진씨 가문이 결코 좋은 집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진무열이 어떻든 유진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물론 진씨 가문이 인재를 길러내는 데 있어 독보적인 능력을 가진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공주님은 그 정도 실력을 가졌으니 천교 랭킹에도 올라야 정상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름이 없죠?” 유진우가 문득 물었다. “이건 무림인들의 세계의 순위표예요. 황실 인물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청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천기각이 아무리 강력한 정보기관이라 해도 모든 걸 완벽히 알 수는 없어요. 이 순위표는 단지 참고용일뿐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용국은 땅이 넓고 숨은 고수들이 많으니 우리가 모르는 곳에 더 강한 인물들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건 맞는 말이네요.” 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고 사람 위에 또 다른 사람이 있는 법. 천교 랭킹에 들지 않은 강자가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마지막 순위표를 발표할게요. 이번에는 경천 랭킹입니다.” 이청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경천 랭킹은 용국 최정상 강자들의 순위표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각 지역의 거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먼저 경천 랭킹 1위는 여전히 변함없는 존재, 용호산의 장선기입니다.” “그리고 2위와 3위는 큰 변화가 있었어요. 이전에는 호룡각 각주 이원무와 서경검선 백준이 차지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2위가 검종의 종주, 홍흥조예요.” “3위는 천하회의 종주, 소
“신병 랭킹 4위는 취설검, 소유자는 홍흥조.” “신병 랭킹 5위는 패왕도, 소유자는 소명.” “신병 랭킹 6위는 추성검, 소유자는 한서.” “신병 랭킹 7위는 천뢰도, 소유자는 진무열.” “신병 랭킹 8위는 황천검, 소유자는 홍군림.” “신병 랭킹 9위는 창궁검, 소유자는 유장혁.” “신병 랭킹 10위는 폭우이화침, 소유자는 당흠.” 이청성은 신병 랭킹의 순위를 차례로 읊으며 그에 관련된 정보를 전달했다. 신병 랭킹에는 신병의 이름뿐 아니라 그 소유자의 정보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신병 랭킹 상위 10위에 두 자루나 이름을 올리다니, 이게 기쁠 일인지 걱정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군.” 유진우는 리스트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신병 랭킹에 오른다는 건 겉으로는 영광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동시에 커다란 위험을 동반한다. 이른바 ‘옥이 무거우면 지키는 자가 고생한다’는 말처럼 신병을 손에 넣은 이상 이를 지킬 만한 강한 실력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각지의 고수들이 신병을 노리고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두 자루나 가졌으니 속으로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청성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무도 고수들이 제대로 된 병기를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혼자서 두 자루를 차지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부러워할지 상상이 가네요.” “저는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신병 랭킹이 발표된 이상 앞으로 제 무기를 노리는 고수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겠군요. 일일이 방어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예요.” 유진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청성은 웃으며 대꾸했다. “사람들이 당신의 검을 빼앗으려면 먼저 자신의 실력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만 잃게 될 테니 그런 멍청한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오호? 무슨 뜻이죠?” 유진우는 흥미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알게 될 겁니다. 이제 나머지 두 개의 리스트를 들려줄게요.” 이청성
“당신이?” 유진우는 놀란 눈으로 이청성을 바라보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공주 전하, 당신은 귀족 중의 귀족이고 신분이 고귀합니다.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제가 당신을 끌어들일 순 없습니다.” “뭐죠? 저를 무시하는 건가요?” 이청성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순간, 날카로운 백색 강기가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와 창문을 뚫고 날아가더니 정원에 있는 바위산을 강타했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바위산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마스터 강기?” 유진우의 동공이 흔들렸다. “설마 당신이 무도 마스터란 말입니까?” 여성이 무도를 수련하는 것은 남성보다 훨씬 어렵다. 그중에서도 여성이 마스터 경지에 이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유진우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해 보이는 이청성이 이미 마스터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더 놀라운 점은 그와 오랫동안 함께 있었음에도 그녀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여자는 정말 철저히 감추고 있었구나.’ “제 실력은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부담을 덜어줄 정도는 됩니다.” 이청성은 평온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당신이 남자였다면 황제 자리는 틀림없이 당신 것이었을 겁니다!” 유진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친제감 사람들이 대체로 무력을 추구하지 않고 점복술, 기문둔갑에 더 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청성이 마스터 경지에 이를 정도로 무술에 능통하다면 그녀가 익힌 술법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녀가 이전에 사용했던 호신 부적만 보더라도 이는 명백했다. “빈말 그만하고요.” 이청성은 손을 흔들며 대화를 끊었다. “당신을 돕겠다고는 했지만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이죠?” 유진우가 물었다. “간단합니다. 저를 도와 용원의 기를 찾아주세요.” 이청성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물론 찾으면 공평하게 나누죠.”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도 아니면서 용원의 기는 왜 찾으려고 하는 겁니까?” 유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