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똑바로 뜨고 보니, 단소홍이었다. “유진우, 네가 왜 여기 있어?”단소홍은 한번 훑고 자못 놀랐다.“회사 안전부 부장인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유진우는 사과 하나를 집어 들고 뜯어먹기 시작했다.“안전부 부장?”단소홍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언니, 뭐예요? 나도 한낱 비서일 뿐인데 언니가 유진우를 부장으로 만들다니요. 무슨 근거로요?”“내가 뭘 하는지 너한테 설명할 필요는 없어.”이청아는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그리고 네가 비서란 건 잘 아나 보네? 그런데 출근 첫날에 32분이나 지각하다니, 정말 직업정신이 뛰어나구나!”어머니와 이모가 여러 좋은 이야기 해준 덕에 이청아는 단소홍에게 경험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단소홍이 이렇게 못날 줄 몰랐다.“방금 길이 막혀서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게다가 30분 늦었을 뿐인데 별문제 없죠?”단소홍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내가 너 보고 30분 전에 자료를 가지고 회의실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결과는? 회의가 다 끝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았어, 감히 나한테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는 거니?”이청아는 화가 나서 책상을‘탁’ 두드렸다.“네? 회의 끝났다고요?”단소홍은 어리둥절해했다.“흥! 내가 미리 자료를 다 외웠으니 망정이지, 너를 믿었다간 회의를 망쳤을 거야!”이청아는 화가 났다.이청아의 첫날 취임이 엄청 중요한데, 하필이면 눈앞의 단소홍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언니, 제 잘못이에요, 앞으로 꼭 주의할게요.”단소홍은 난처한 표정이었다.“이번에는 따지지 않겠지만 다음부터는 오늘 같은 일이 없는 게 좋을 거야!”이청아가 경고했다.“네네.”단소홍은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됐어, 가서 염룡파가 빚진 일에 대해 알아봐 줘.”이청아가 분부했다.“염룡파?”이 말을 듣자, 단소홍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언니, 왜 염룡파와 얽히게 됐어요? 그분들은 모두 어마무시하고 독한 사람들이라고요!”“왜? 네가 염룡파를 알아?”이청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염룡파 보스라고?”단소홍은 먼저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멍청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길로 말했다. “유진우, 제발 헛소리 그만 좀 해. 네가 뭔데 감히 스스로 염룡파 보스라고 하는 거지?”“유진우, 농담 그만해. 좀 진지하게 대해.” 이청아는 눈을 부릅뜨고 유진우를 노려보았다. 이청아도 눈앞에 있는 유진우의 말을 믿지 않았다.‘서울에 온 지 며칠 됐다고 어떻게 보스 자리까지 오를 수 있겠어?’“이런 일로 내가 너희를 속일 이유가 뭐가 있겠어? 믿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 염룡파로 가자. 내가 당장 돈을 갚게 해 줄 테니까.” 유진우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흥! 우릴 바보로 보는 거야? 염룡파로 가서 빚을 갚으라고 하면 우리 목숨이 어디 남아돌겠어?”단소홍은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됐어, 같이 갈 필요 없어. 내가 직접 갈게. 그럼 되는 거지?” 유진우는 말다툼하기 싫었다.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너무 긴장되게 만들어 놓았다.“잠깐만! 나도 같이 갈게.”유진우가 떠나려고 하자, 이청아가 급하게 일어나 따라갔다.“언니! 미쳤어요? 정말 이 녀석과 염룡파에 가겠다고요?” 단소홍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많이 말했는데 이청아는 하나도 듣지 않은 것 같다.“되든 안 되든 일단 시도는 해봐야지.”이청아는 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빚을 돌려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만약 돌려받지 못한다면 다른 계획을 세워보자.”“하지만...”“넌 무섭다면 가지 않아도 돼.”이청아는 손을 흔들어 제지했다.“내가 무섭다고 해도 언니 혼자 위험에 빠지게 해선 안 돼요.”단소홍은 한숨을 내쉬며 이어 말했다.“언니 안전을 위해서, 제 인맥을 동원해야겠어요.”말하면서 단소홍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오빠, 좀 도와줄 일이 있어...” 3분 후, 단소홍은 전화를 끊었고 얼굴은 많이 평온해졌다.“언니, 방금 도현 씨랑 얘기했어요. 오빠가 도와줄 거라고 했어요. 빚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비록 이청아는 족장 이세훈이 뒤를 받쳐주고 있지만 강북의 세력은 강남이 다스릴 수 없었다.“작은 역할이라면 문제없어요.”홍길수는 크게 웃었다.“오지 않는 게 좋겠네요. 일단 빚을 받으러 오면, 결과는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거니까요!” ‘세력, 배경도 없이 나에게 돈을 요구하려 하다니, 꿈도 못 꾸지!’“그럼 어르신 잘 부탁합니다. 일이 성사되면 큰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하하... 좋아요, 편하게 대해요.”홍길수는 순간 싱글벙글했다.과거 경험에 따르면, 큰 선물이라 불리는 것은 돈 2억이거나 그 이상일 수 있다.“어르신...”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하고 있을 때, 부하인 영탁이 갑자기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무슨 일이야? 내가 지금 손님이랑 사업 얘기하는 거 못 봤어?”홍길수가 눈썹을 치켜올려 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어르신, 밖에서 누가 만나 뵈려고 합니다. 말로는 돈을 빚졌으니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영탁이 말했다.“그래? 벌써 왔어? 정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홍길수는 턱을 쓰다듬었다.“홍 어르신, 이따가 잘 부탁해요.”박호철은 빙긋 웃었다.“알았어요, 눈 크게 뜨고 제가 어떻게 수습하는지 잘 봐요!”홍길수는 탁자를 두드리고 그대로 일어섰다. 그리고 거들먹거리며 나갔다.박호철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 사이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바깥 상황을 지켜봤다.그 시각, 부동산 회사의 정문 앞, 이청아는 중간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왼쪽은 유진우, 오른쪽은 단소홍이 서 있었다.“언니, 그만둘까요? 저 안에 있는 사람들 좀 봐요, 하나같이 흉악하고 너무 무서워요!”단소홍은 뒤로 움츠러든 채 침을 꿀꺽 삼키며 무서워했다.단소홍은 이따가 들어가 악명 높은 염룡파 짐승들이 그녀의 몸을 더럽힐까 봐 정말 두려웠다.“문 앞까지 왔는데 중도에 포기하는 법이 어디 있겠어?”이청아는 태연했다.“언니, 염룡파는 인성이 없어요, 만일...”단소홍은 말하려다 멈추었다. 단소홍이 말하는 사이에 홍길수가 이미 무리를 데리고
“어?”영탁은 멍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머지 사람들도 서로 쳐다보며 경악하는 모습이었다.홍길수가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1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죽이겠다고 아우성을 쳤는데, 1초 후 겁에 질려 얼굴빛이 변해 귀신이라도 본 모양이었다.“뭐 해? 빨리 가서 돈 가져와!”주변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자, 홍길수는 초조해서 발로 걷어찼다.“네네...”영탁은 주저하지 않고 급하게 회사로 뛰어갔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홍길수가 두려워하는 것만은 분명했다.영탁이 돈을 가져오는 틈을 타서 홍길수는 유진우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보스, 언제 오셨어요? 미리 언질을 주지 그랬어요, 그럼 제가 사람을 보내서 모시러 갈 텐데요.”“보스?”홍길수가 비굴하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고 이청아와 단소홍은 그대로 멍해졌다. 서로 마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사람을 죽일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독한 염룡파 홍길수가 유진우를 보고 이렇게 보잘것없게 굴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길수야, 빚진 돈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야. 염룡파는 남에게 빚진 돈은 반드시 갚아야 해. 알겠어?”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네네... 보스 말이 맞아요.”홍길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끄덕이며 식은땀을 흘렸다.“방금은 제가 충동적이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그러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네가 방금 한 짓이 너무 무례했어. 채권자에게 사과해.”유진우가 경고했다.“이 회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아까는 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홍길수는 웃으면서 계속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오히려 이청아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청아는 이미 홍길수를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방금 흉악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양이처럼 온순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사실 그녀뿐만 아니라 단소홍도 이미 놀라서 말하지 못했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기억하는 흉악하고 위세를 떨친 홍길수가 맞아?
“잘 가세요, 보스!”홍길수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인사했다.“잘 가세요, 보스!”염룡파 제자들은 홍길수를 그대로 따라 하면서 일제히 소리를 크게 질렀고 그 기세는 놀라웠다.그때 위층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박호철이 마침내 뛰어 내려왔다.“홍 어르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이청아에게 돈을 줬어요?”박호철이 입을 열어 물었다.‘이청아를 골탕 먹이기로 했는데 만나서 바로 돈을 주다니. 언제 염룡파가 이렇게 약해졌지?’“무슨 낯짝으로 말해요?”홍길수는 뒤를 돌아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방금 저 여자랑 같이 있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한낱 작은 보안직원 아닌가요. 뭐가 대수예요?”박호철은 눈살을 찌푸렸다.“작은 보안직원?”홍길수는 멈칫하더니 이내 손을 들어 박호철의 뺨을 때리며 욕했다.“시발, 정말 장난하나. 저 사람은 우리 염룡파 새 보스예요!”“뭐라고요? 새 보스?”박호철은 어리둥절해져서 충격을 받았다.“개자식! 나 방금 너 때문에 죽을 뻔했어.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말고 꺼져!”홍길수는 화가 치밀어 올라 롤렉스를 박호철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박호철은 감히 화도 내지 못하고 의기소침하여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박호철은 이청아가 이런 사람을 알 줄은 꿈에도 몰랐다....“진우 씨, 당신 정말 염룡파 보스야?” 차에서 이청아는 마침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믿기 어렵지만 방금 홍길수의 행동이 이미 사실을 증명했다.“방금 다 봤는데 거짓이겠어?”유진우는 어깨를 으쓱했다.“내 말은, 당신이 어떻게 그 자리에 앉았냐는 거야.”이청아는 궁금한 얼굴이었다.“당연히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켰지, 당신은 내가 주먹으로 앉았다고 생각해?”유진우는 진지하게 말했다. “진짜야?”이청아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유진우는 살짝 웃는 듯했다.“됐어, 난 당신이 어떻게 염룡파 보스 자리에 앉았는지 상관없어. 단지 한 가지, 난 당신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야! 제 코가 석자? 무슨 헛소리 하는 거야?”단소홍이 눈을 부릅떴고 안색은 매우 언짢았다.멀쩡한 데 찬물을 끼얹으니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내 짐작이 맞다면 오늘 사도현은 시크릿 그룹에서 잘릴 것 같아.”유진우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했다.“헛소리하지 마!”이 말을 듣자, 단소홍은 더욱더 불쾌했다.“오빠가 얼마나 훌륭한데 어떻게 잘릴 수 있어?”“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이 일은 사도현이 도와줄 수 없을 거야.”유진우는 어깨를 으쓱했다.“흥! 오빠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을 네가 도와줄 수 있다고? 웃기지 마!”단소홍은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멍청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게 무슨 배짱으로 큰소리를 치는 건지, 원.’“미안한데 사도현이 해낼 수 없는 걸 난 정말 해낼 수 있어.”유진우는 싱긋 웃었다.“야! 너 점점 도가 지나치는데?”유진우의 말에 단소홍은 순간 화가 났다.“유진우, 내가 원래 네 체면 좀 세워주려고 했는데, 네가 이렇게 날뛰니, 보여줄 수밖에. 그때 가서 날 탓하지 마!”말이 끝나자, 그녀는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사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방금 있었던 일들을 다시 과장하여 말했다.“뭐? 내가 잘렸다고? 정말 웃기는군. 내가 시크릿 그룹에서 영향력이 막강한데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릴 수 있겠어?”사도현이 건방지게 말했다.“오빠, 유진우가 사람을 얕잡아보는데, 오늘 오빠 인맥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자고.”단소홍이 화를 돋우기 시작했다.“문제없어! 겨우 프로젝트 한 건 아닌가? 내가 바로 마케팅부 장 매니저에게 전화해서 도와주라고 할 테니 너희들은 직접 와서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돼.”사도현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오빠, 그럼 부탁할게.”단소홍은 기쁜 얼굴로 전화를 끊은 후, 머리를 치켜들고 유진우를 향해 턱을 내밀었다. “유진우, 너 엄청 거만했었지? 나와 같이 시크릿 크룹으로 가지 않을래?”“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유진우는 개의치 않았다.“좋아! 오늘 너와 오빠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똑똑히 알
“잠깐만요!”중년 남자가 가려고 하자 단소홍이 달려가 말했다.“장 매니저님, 저는 몰라도 사도현은 아실 거예요.”“사도현?”중년 남성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사도현과 무슨 사이지?”“사도현은 제 남자친구예요.”단소홍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장 매니저님, 저는 오빠가 이미 당신에게 미리 인사를 했다고 믿어요. 이제, 우리는 사무실에 들어갈 수 있겠죠?”“못 들어갑니다.”중년 남성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까와 같습니다. 저를 만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해요.”“네?”단소홍은 어리둥절해하며 깜짝 놀랐다.“장 매니저님, 방금 잘 못 들으셨나요? 전 사도현의 여자친구예요, 이번에 온 것은 당신과 사업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그게 뭐 어때서요?”중년 남자는 냉소하듯 말했다.“당신은 말할 것도 없고, 사도현이 직접 와도 미리 예약해야 해요!”“당신...”단소홍은 잠시 화가 치밀었다.단소홍은 상대방이 자기를 거절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심지어 사도현의 체면도 주지 않는다.“단소홍, 사도현의 명성이 여기선 잘 안되는 것 같군.”유진우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단소홍은 눈꼬리를 실룩거리더니 안색이 좀 안 좋게 변했다.자신만만해서 왔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단소홍은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여전히 단념하지 않았다.“장 매니저님, 같은 처마 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보는데, 설마 도현 씨와 사이가 틀어질 생각이세요?”“사이가 틀어지면 뭐 어때요? 빨리 꺼지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무례하다고 탓하지 마요.”중년 남자가 외쳤다.“다... 당신 정말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네요!”단소홍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가슴이 심하게 출렁거렸다.“장봉원! 너 정말 위풍 잘 떠네!”그때 찬바람과 함께 사도현이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사도현을 보자 단소홍은 매우 기뻐서, 즉시 사도현 쪽으로 다가갔다.“오빠, 마침 잘 왔어, 이 사람이 방금 나를 업신여겼어.”“내가 다 봤어. 이제 나한테 맡겨.”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말... 말도 안 돼!”사도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비록 사도현은 아무런 업적이 없지만, 줄곧 실수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빽이 있어 평소에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회사를 활보한다.그의 인맥으로는 감원하더라도 그가 해고당할 리는 없었다.도대체 무슨 상황이지?“오빠, 잘렸어?”표정이 달라진 사도현을 보며 단소홍도 놀란 표정이었다.‘이 사업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왜 지금 사업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일자리를 잃어버렸지?”“문제가 생겼나 보다.”이청아는 생각에 잠긴 듯 얼굴을 찡그렸다.사도현이 도움을 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안되는 것 같다.“장봉원! 솔직히 말해, 네가 몰래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 아니야?”사도현은 무섭게 고개를 들었고 눈빛은 무서웠다.“나는 너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너를 해치려 하겠어? 게다가, 나도 그럴만한 실력이 없으니, 너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장봉원은 담담하게 말했다.장봉원은 사도현 같이 제대로 하지 않고 눈치껏 하는 척만 하는 놈은 진작부터 눈에 거슬렸다.오늘날 해고된 것은 너무도 통쾌했다.“헛소리! 네가 아니면 누구겠어? 틀림없이 네가 고발했어!”사도현은 사납게 굴었다.재직 몇 년 동안 사도현은 확실히 적지 않은 돈을 삼켰으니, 아마도 약점을 잡혔을 것이다.“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장봉원은 설명하기 귀찮았다.어차피 상대방은 회사 사람도 아니니 지금은 걱정할 게 없었다.“장봉원! 너 역시 독하네!”사도현은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네가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사실대로 말해줄게, 난 회사에 든든한 빽이 있어! 오늘 퇴사해도 내일 다시 나올 수 있어!”“어? 그래? 네 빽이 누군데?”장봉원이 되물었다.“흥! 말하면 네가 놀랄까 봐 걱정돼. 이 회사 대표가 내 친삼촌이야!”사도현이 거만하게 말했다.“어쩐지 너 같은 사람이 매니저가 되더라니, 이렇게 든든한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