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우는 운전하며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이청아는 받지 않았다.그 순간 말 못 할 두려움이 유진우를 확 덮쳤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는 액셀을 끝까지 밟고 곧장 이씨 가문 별장으로 달려갔다. 이혼한 후로 이 집으로 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차에서 내린 그는 별장 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미친 듯이 초인종을 누르며 대문을 냅다 두드렸다.“어떤 예의도 없는 녀석이 문을 이렇게 세게 두드려?”누군가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대문이 철컥하고 열렸다.“유진우? 네가 여긴 왜 왔어?”장경화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한껏 드러냈다.“청아 씨 어디 있어요? 지금 당장 청아 씨를 만나야겠어요.”유진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흥, 네가 만나고 싶다면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 네가 뭔데? 당장 꺼져!”장경화가 그를 매정하게 내쫓고 다시 대문을 닫으려던 찰나 유진우가 닫지 못하게 발로 막아섰다.“청아 씨 지금 안에 있는 거 알아요. 할 얘기 있어서 찾아온 거니까 말 좀 전해주세요.”유진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할 얘기는 무슨. 내 딸은 너 보고 싶지 않대.”장경화가 경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내일이 바로 청아랑 용호걸의 결혼식이야. 앞으로 우리 청아는 용씨 가문의 사모님이라고. 너 같은 사람은 평생 노력해도 안 되니까 다시는 내 딸 귀찮게 하지 마!”“청아 씨는 용호걸이랑 결혼하면 안 돼요.”유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저 진실을 알게 되었어요. 청아 씨는 이런 희생을 할 필요 없어요. 제가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어요!”“해결하긴 개뿔!”장경화가 두 눈을 부릅떴다.“유진우! 경고하는데 제발 쓸데없이 끼어들지 마! 내 딸이 용씨 가문에 시집갈 수 있는 건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이고 청아의 복이야. 혹시 무슨 수작이라도 부렸다간 절대 가만 안 둬!”“부귀영화가 중요한가요, 청아 씨의 행복이 중요한가요?”유진우도
“어떤 일은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나아요.”이청아가 고개를 내저었다.“그래. 그럼 3분 줄 테니까 깔끔하게 정리해.”장경화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옆으로 움직였다.‘아무튼 내일이 지나면 중주로 이사 가서 상류층의 삶을 살 텐데 뭐. 유진우 같은 쓸모없는 놈은 다시는 내 딸 만날 기회도 없어.’“다시는 연락하지 말자며? 왜 또 왔어?”눈앞에 서 있는 유진우를 보는 이청아의 눈빛이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나 다 알았어. 용호걸이 당신을 협박했다며? 당신 용호걸이랑 결혼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어!”유진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이청아는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당신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걸 씨랑 결혼하는 건 강요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그러니까 호의는 고맙지만 여기까지만 해.”‘알면 뭐가 달라져? 결국에는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으면서.’그녀와 용호걸의 결혼은 용씨 가문과 이씨 가문 두 집안이 이익을 위하여 사돈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누가 먼저 결혼을 깨면 두 집안의 죄인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강남 전체에 그들에게 반항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하여 유진우가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었고 오히려 더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그럴 리가 없어!”유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당신은 용호걸을 싫어하면서 왜 기어코 시집가겠다는 거야?”“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게 중요해? 호걸 씨는 나에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할 수 있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이청아가 씩 웃었다.“당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 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유진우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잘 알아? 웃기고 있네!”이청아가 코웃음을 쳤다.“진우 씨, 사람은 현실을 알아야 해. 특히 여자는 더 하지. 힘들게 일하는 것보다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어?”“아니야! 이건 당신
다음날 오전 제운 호텔.성대한 결혼식이 이곳에서 곧 열리게 된다. 두 집안이 사돈을 맺는다는 소식이 거의 강능 전체를 뒤흔들었다.수많은 재벌과 정치인들도 초대를 받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수백 대의 고급 차들이 호텔 주차장을 꽉 채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혼식 때문에 큰길마저 통제되었다.멋진 양복 차림의 용호걸이 로비에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인사하는 사람들은 전부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일반 하객은 그의 부하가 맞이했다.“도련님...”그때 권강우가 갑자기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사고가 생긴 바람에 유진우 그 자식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보낸 암살자들도 전부 실종됐고요.”“뭐?”용호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넌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이까짓 일도 제대로 못 해?”“죄송합니다. 제가 그 자식을 너무 얕잡아봤어요.”권강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됐어. 결혼식이 끝나면 내가 직접 사람을 보내서 처리하겠다.”용호걸은 더는 그와 따지고 싶지 않았다.“도련님,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는데요...”권강우가 말끝을 흐렸다.“또 무슨 일이야?”용호걸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저도 어젯밤에 알았는데 유진우 그 자식 오늘 아무래도 결혼식을 깽판 치러 올 것 같습니다.”권강우가 귓속말로 귀띔했다.“깽판?”용호걸은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지금 나랑 장난해? 여기 전부 다 내 사람들인데 걔가 무슨 배짱으로 여기 와서 행패를 부려?”“만일에 대비하는 게 좋겠다는 거죠.”권강우도 따라서 웃었다.“깽판 치고 싶다면 오라고 해. 대체 어떻게 깽판 치는지 나도 보고 싶네!”용호걸이 싸늘하게 웃었다.‘아무것도 모르는 촌놈 주제에 감히 나한테 덤벼? 진짜로 온다면 제대로 본때를 보여줘야겠어.’그 시각 호텔의 어느 한 룸.이청아는 넋이 나간 얼굴로 화장대 앞에 멍하니 앉아있었다.어젯밤에 유진우가 찾아온 다음부터 그녀는 혹시라도 유진우가 어리석은 짓을 하진 않을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하여 그
“지금부터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부 입장!”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뜨거운 박수갈채와 함께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이청아가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세상에나! 신부가 너무 예뻐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요!”“역시 호걸 도련님이세요. 이렇게나 예쁜 여자와 결혼하다니.”“정말 선남선녀네요.”이청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분위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하객들은 저마다 부러움의 눈빛을 보냈다.간단한 오프닝이 끝난 후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릴 차례가 왔다.“자,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두 사람은 양가 어르신께 인사를 드렸다.신부 쪽에는 장경화와 이적이 앉아있었고 신랑 쪽에는 용호걸의 넷째 삼촌이 앉아있었다.“그래그래...”두 사람의 인사에 장경화는 입이 귀에 걸렸다. 그렇게 바라던 소원을 드디어 이루게 된 것이다.이적은 비록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복잡하기만 했다. 긴 시간 집에 있지 않았어도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정도는 대충 다 알고 있었다.용호걸의 넷째 삼촌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뚝뚝한 표정이어서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청아는 참 팔자도 좋단 말이죠. 용호걸이랑 결혼하다니!”멀지 않은 곳에서 이서우가 부러움에 찬 눈빛으로 신랑 신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약혼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런 좋은 기회를 이청아에게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하하... 보기에는 팔자가 좋아 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않아. 용호걸의 성격에 이청아가 잘 살 수나 있을지 몰라.”조국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용호걸의 명성에 관해 들은 바가 있었다.“자, 신랑 신부 맞절!”사회자의 목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다.용호걸과 이청아는 서로 마주하여 섰다. 얼굴에 웃음꽃이 핀 용호걸과 달리 이청아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 어려있었다.“맞절하자...”용호걸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런데 절을 하다 말고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용호걸이 고개를 들었다. 이청아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게 절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 결혼식... 깽판 치러 왔어요!”유진우의 목소리가 예식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순식간에 모든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사람들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용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결혼식을 망치려 할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저 자식 누구예요? 감히 결혼식을 망치려 하다니. 사는 게 지겨운가 봐요.”“그나저나 배짱 하나만큼은 진짜 있네요. 제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나대다니!”“대박, 정말 대박이에요! 아주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겠는데요?”잠깐의 침묵 후 예식장이 발칵 뒤집혔다. 저마다 이러쿵저러쿵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진우 씨?”익숙한 얼굴에 이청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내 걱정이 밀려왔다.감동한 건 사실이지만 유진우의 행동으로 인하여 곧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결혼식을 망친다는 건 이씨 가문과 용씨 가문의 체면을 깎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저 자식 미친 거 아니야? 다짜고짜 결혼식을 깽판 치러 오다니. 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러는 거지?”이서우는 경악한 나머지 도무지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어리석은 놈!”조국화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그를 쳐다보았다.용씨 가문에서 진작 호텔 주변에 수많은 경호원을 배치해 두었다. 유진우가 이렇게 쳐들어온 건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온 거나 마찬가지였다.“무모하고 멍청한 자식!”용호걸의 표정이 싸늘해지더니 살기를 마구 내뿜었다. 유진우가 진짜 제 발로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유진우! 경고하는데 당장 꺼져. 안 그러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거야!”장경화가 엄숙한 얼굴로 호통쳤다.딸이 재벌가에 시집가는 길을 망치는 자는 곧 그녀의 적이 된다.“청아 씨, 나 왔어.”유진우는 주변의 호통과 협박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무대 위로 성큼성큼 올라가 확고한 눈빛으로 아름다운 그녀를 쳐다보았다.“여긴 왜 왔어? 당장 나가!”이청아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용씨 가문의
이것은 그에게 모욕을 줬을 뿐만 아니라 용씨 가문 전체의 체면을 깎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이청아! 여기서 도망치는 순간 넌 바로 이씨 가문의 죄인이 될 거야.”조국화 모녀가 분노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쳤다.“딸, 절대 충동적으로 어리석은 결정을 해선 안 돼. 이대로 저놈이랑 가면 우리 집안 다 망해!”당황한 장경화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용씨 가문을 건드리면 부귀영화만 잃는 게 아니라 가족 전체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엄마, 저...”이청아가 말끝을 흐렸다.“내가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마.”유진우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이 결혼 절대 못 해! 불만 있는 사람은 나한테 마음껏 덤벼!”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이 떠들썩해졌다.“와! 저 남자 너무 멋있잖아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과 적이 되는 것도 두렵지 않은가 봐요.”“날 저렇게 사랑해 주는 남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멋있긴 한데 그 대신 치러야 할 대가도 엄청나잖아요.”“용씨 가문과 이씨 가문을 건드렸으니 저 사람 아마 내일을 넘기지 못할걸요?”무대 위의 유진우를 보며 하객들은 의견이 분분했다.놀라움과 칭찬, 그리고 경멸과 하찮음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청아 씨, 그만 가자.”유진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저 두 사람을 잡아!”용호걸의 명령에 수많은 경호원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와 두 사람을 포위했다.“가려고요? 나한테 물어나 봤어요?”용호걸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청아 씨,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요. 순순히 나랑 결혼한다면 오늘 일은 없던 거로 할게요. 안 그러면 가만 안 둘 겁니다!”“나도 기회를 줄게요. 지금 당장 강능에서 꺼지지 않으면 후회할 겁니다.”유진우가 싸늘하게 되받아쳤다.“제 주제도 모르는 놈! 당장 가서 저놈의 팔다리를 부러뜨려라!”화가 난 용호걸이 명을 내렸다.“네!”경호원들이 삼단봉을 꺼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그때 누
왕현의 등장으로 기세는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었다.용씨 가문 고수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용호걸이 인질로 잡혀있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형님, 여긴 저한테 맡기고 먼저 가십시오.”왕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기운산 결투 이후 그는 본투비 레벨을 돌파하였기에 실력이 백 배 가까이 늘었다.“가라고?”용호걸이 코웃음을 치며 건방지게 말했다.“어디로 가게? 도망가봤자 결국에는 우리 용씨 가문에 쫓기는 신세가 될 거야.”그의 말에 떠나려던 유진우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싸늘하게 말했다.“지금 날 협박해?”“하하... 협박하면 뭐?”용호걸은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어디서 이런 조력자를 데려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신 혼자서 날 상대하려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닌가?”“그래서 당신이 강하다고 생각해?”유진우가 되물었다.“당신 하나쯤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지.”용호걸이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당신뿐만 아니라 이청아와 이청아 가족들도 용씨 가문의 보복을 받을 거야. 당신들... 영원히 불안에 떨며 살게 될 거야!”그의 말에 이청아의 낯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가 가장 걱정하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그녀가 모든 걸 내팽개치고 이대로 도망친다면 가문 전체가 위험에 빠질 것이고 그 결과는 그녀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웠다.“어때? 이제 좀 무서워?”유진우가 아무 말이 없자 용호걸은 더욱 의기양양했다.“유진우!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내 앞에 무릎 꿇고 빌어. 그러고 나서 당신 여자를 직접 내 침대까지 데리고 와. 그러면 내가 당신 목숨 정도는 살려줄지도 모르니까.”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찰싹하고 따귀를 맞은 용호걸의 얼굴에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다.“뭐야?”용호걸은 따끔거리는 얼굴을 움켜쥔 채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도 경악을 금치 못하며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이렇게나 많은 사람 앞에서 용호걸의 따귀를 때리다니, 저 자식 제정신이야?’“이 자식아! 감히 날
“하지만...”“얼른 가. 당신이 여기 있으면 내가 더 신경 써야 해서 집중이 안 돼.”이청아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유진우가 가로챈 바람에 결국 하는 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도 다른 선택이 없었고 그냥 이대로 쭉 가는 수밖에 없었다. 유진우만 무사히 돌아온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그와 떠날 생각이었다.이청아가 무사히 떠난 후 유진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시선을 옮겼다.“안 가고 뭐 해요? 여기서 죽길 기다려요?”“얼른 가자.”이서우와 조국화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이청아가 파혼한 바람에 용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계속 이 자리에 있으면 불똥이 괜히 그들에게 튈 수도 있었다.“재수 없는 놈! 너 때문에 우리 이씨 가문이 망하게 생겼어!”장경화는 너무도 화가 나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부랴부랴 도망쳤다.결혼이 깨지면서 팔자를 바꾸려는 장경화의 꿈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일 때문에 용씨 가문을 건드려서 앞으로는 편한 날이 없을 것이다.“젊은이, 배짱 하나는 인정이야, 아주.”그때 용호걸의 넷째 삼촌이자 용씨 가문의 넷째 어르신이 갑자기 일어나 덤덤하게 말했다.“지금까지 우리 용씨 가문에 이런 치욕을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 젊은이는 처음이야, 물론 마지막이 될 거고. 솔직히 말해서 젊은이의 용기는 인정이야. 하지만 오늘이 젊은이의 제삿날이 될 거야!”그러고는 손을 휘둘렀다.“터벅터벅...”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수많은 무장 경호원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들더니 순식간에 유진우를 물샐틈없이 포위했다.“저 녀석 오늘 죽었어. 용씨 가문 넷째 어르신이 진짜로 움직였어!”“대놓고 결혼식을 망친 것도 모자라 용씨 가문에 치욕을 주었으니 죽어 마땅하지!”“허세를 부릴 땐 좋아도 결국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니까! 쌤통이야, 아주.”포위된 유진우를 보며 하객들은 의견이 분분했다.“호걸이를 풀어주면 젊은이의
지금 돌아보면 모든 게 교묘하게 짜인 계획이었던 셈이다.유태범은 이들의 동선과 의도를 이미 꿰뚫고 있었고, 애초부터 이들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유태범의 예상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그래서 미리 판을 짜 두고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병부를 빼앗는 데 성공한 것이다.결국 이들이 스스로 늑대를 집 안에 들인 셈이 되어 병부를 잃고 말았다.서경의 표기대장군 자리에서 유태범이 한 사람 아래 수많은 사람 위를 차지했던 이유가 새삼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속내를 꿰뚫는 교활함에서 이들은 아직 조금 모자랐다.밤이 지나 아침이 밝았다.밤새 치른 전투의 흔적을 정리하면서 왕부 대문 앞에 쌓였던 시신들은 이미 수습됐지만 땅속으로 스며든 핏자국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남은 세 제후가 이끌고 온 병력은 근처 성방영에 배치되어, 만약 사태가 급변하면 언제든 왕부를 도울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다.병부를 도난당한 탓에 왕부 안 사람들은 대부분 밤새 한숨도 못 잤다.석태혁이 이끌고 나간 유만군 역시 밤새 밖을 뒤졌지만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뒤, 이의진은 다시 한번 주한휘, 은성종, 그리고 장범규를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하고 정보를 모았다.하지만 병부가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뾰족한 방도가 떠오를 리 없었다.그때, 간밤에 사라졌던 석태혁이 마침내 돌아왔다.떠날 땐 부하들과 함께였는데 돌아올 땐 그 혼자뿐이었고 게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모습이었다.의논 중이던 이들이 모여 있던 의회장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더니 피를 토했다.“장군님! 어쩌다 이렇게 크게 다쳤습니까?”이의진이 크게 놀라 급히 사람들을 시켜 석태혁을 의자에 앉혔다.“장군님, 병부는 찾으셨나요?”주한휘는 석태혁의 상처보다도 병부의 행방이 더 급한 듯 보였다.“왕비님, 소장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제갈영군을 따라잡기는커녕 도중에 매복을 당해 함께 간 유만군 병력도 전멸됐습니다. 병부 역시 되찾지 못했으니 부
“뭐라고요? 서경을 떠나 도망치자고요? 그럼 왕위는 그대로 유태범한테 넘어가는 거잖아요.”유천우는 표정이 어두워졌다.“산만 남아 있으면 땔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살기만 하면 우리는 아직 기회가 있어.”은성종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왕위를 뺏기고 병부도 잃고 50만 흑용군까지 모조리 유태범이 호령하게 되면, 저희가 무슨 수로 다시 기회를 잡겠어요.”주한휘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도 이 지경이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욕심내어 유씨 가문과 연을 맺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무 이득도 못 보고 오히려 그만 곤란한 처지에 빠졌으니 진퇴양난이었다.“은 제후님 말씀대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요.”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들에게 너무나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병부가 정말 유태범 손에 들어가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터. 결국 서경을 떠날 수밖에 없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그녀는 용국의 장공주이니, 서경을 떠나 연경으로 가더라도 어떻게든 자리 하나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들에게 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 길도 고려하고 있었다.“그래도 너무 낙담하진 마요. 석 장군의 실력도 제갈영군과 막상막하니까요, 혹시라도 병부를 되찾아 온다면 저희에게도 길이 열릴 거예요.”은성종이 나직이 덧붙여 말했다.“맞습니다. 아직 결판이 난 건 아니니 모두 기운 내세요.”장범규가 힘주어 말했다.“여러분,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유천우는 가볍게 몸을 숙여 예를 표한 뒤 뒤돌아서 편전을 나섰다.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형 육진우였다.유천우는 도령 차림으로 변장한 육진우를 따로 불러 자신이 묵는 방으로 안내했고 시종들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지시했다.“천우야, 아까 지붕 위에서 인기척이 스쳐 갔던데 무슨 일이 생긴 거야?”안전하다고 느낀 육진우가 먼저 물었다.“네, 제후님들께서 함께 계시던 편
은성종이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빨리! 병부를 쫓아!”이의진도 곧바로 지시했다.“쫓아가요!”석태혁은 번개처럼 칼을 뽑아 들고 유만군 부대 일부를 이끌고 제갈영군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유천우는 멍하니 서 있다가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설마 제갈영군이 병부를 빼앗아 도망칠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에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갈영군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천우야, 제갈영군은 원래부터 유태범 쪽이었나 봐. 전력을 다해 너를 지지하고 왕부를 돕는 척한 건, 우리 경계를 완전히 풀어놓기 위해서였던 거지. 때가 되면 병부를 빼앗아 우릴 궁지에 몰아넣을 속셈이었어.”은성종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제길... 제갈영군이 배신자였다니, 너무 괘씸하잖아요!”장범규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러게 말이에요. 흑용군 얘기를 그렇게나 강조하더니, 결국 병부를 훔쳐 달아날 빌미를 만든 거였네요. 정말 교활해요!”주한휘가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렸다.“만약 병부를 되찾지 못하고 유태범 손에 넘어가면... 저희는 완전히 끝나고 말 거예요.”이의진은 눈살을 찌푸린 채 심각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원수 병부가 흑용군의 지휘권을 결정한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병부를 쥔 자가 흑용군을 움직일 수 있으니, 유태범이 지금껏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부대를 끌어온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었다.병부만 있으면 그 즉시 전군을 호령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50만 흑용군이 들이닥치면 서경은 물론 천하 어디라도 막아낼 재간이 없을 터였다.“어머니, 죄송합니다. 전부 제 탓이에요. 제가 좀 더 주의 깊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유천우는 깊이 고개를 떨구었다. 병부가 자기 손에서 떨어져 나간 이상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고 생각했다.“천우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제
왕부의 편전.네 명의 제후는 차례대로 자리에 앉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제갈영군은 한가롭게 차를 음미했고, 은성종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주한휘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왕부 편전의 장식을 구경했고, 장범규는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일어나 앉았다가 몇 걸음 왔다 갔다 하며 마음을 졸이는 모습이었다.한 차례 시간이 흘러, 이의진이 유천우와 석태혁을 데리고 마침내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정교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여러분, 병부를 가져왔어요.”이의진이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열자, 그 안에는 금빛의 호부가 놓여 있었다. 호랑이 형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위엄이 깃들어 보였다. 호부 한가운데에는 ‘병갑지부, 좌재왕, 우재경’이라는 금색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역시 병부군요!”호부를 본 장범규가 눈을 반짝였다.“이 병부만 손에 넣으면 흑용군을 동원할 수 있어요. 그러면 유태범의 음모도 허무하게 끝나겠죠.”“천우야, 지체할 시간 없어. 병부를 들고 흑용군 주둔지로 가서 그 장수들을 만나. 신분을 확실히 밝혀야 해. 유태범이 틈탈 구석이 없도록.”주한휘가 서둘러 재촉했다.“병부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야. 유태범이 순순히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 가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을 거다. 철저히 준비해야 해.”은성종이 경고하듯 말했다.“알겠습니다, 제후님. 이미 어머니께도 상의드렸어요. 열 개 정찰팀을 꾸려 여러 갈래로 성을 나갈 거고, 저 역시 그중 한 무리에 섞여서 움직일 겁니다. 유태범이 대비하고 있어도 쉽게 제 위치를 알아내진 못하겠죠. 유태범이 위협을 눈치챌 무렵이면 저는 이미 흑용군 주둔지에 도착해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그거면 충분하겠군.”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한번 당부했다.“천우야, 이번 행선지는 너랑 왕비님만 아는 걸로 해. 괜히 입 밖에 새면 사고가 터질 수 있어.”“명심하겠습니다, 제후님.”“자, 그럼 빨리 움직이자.
“안 돼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육진우가 모험을 강행하려 하자 유천우는 곧바로 제지하고 나섰다.유천우는 그가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유태범의 주변에는 정말 많은 고수가 몰려들어 있었다.두 주먹이 네 손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만약 암살에 실패라도 하면 수많은 고수들의 포위망에 걸려들 위험이 컸다. 장차 서경왕이 될 몸으로서, 유천우는 결코 함부로 유진우가 위험을 감수하도록 둘 수 없었다.“천우야,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는 누군가 희생을 감내해야 하지. 게다가 호위는 하나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주한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유천우는 거의 고함치듯 외쳤다.강한 기세가 순간 터져 나와 주한휘는 뒷걸음질 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아무도 유천우가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하지 못했다.자신이 좀 과격했음을 깨달은 듯, 유천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제후님, 호위의 목숨도 저희와 똑같이 소중해요. 괜히 헛된 희생을 치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모두를 납득시키겠어요?”“그래,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네.”주한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속으로는 그가 호위 하나 때문에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면,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설마 그냥 손 놓고 당하기만 할 생각은 아니겠죠?”장범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제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제갈영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 어떤 방법인데요?”이의진이 살짝 미간을 올리며 물었다.“유태범이 믿는 가장 큰 무기는 흑용군이에요. 우린 이 점을 공략하면 됩니다.”제갈영군은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다들 아시다시피, 전쟁 시기가
석태혁의 발언은 순간적으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이의진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머뭇거리며 술을 다물었다.석태혁은 왕부의 친위이자 그녀가 굳게 신뢰해 온 인물이기에 솔직히 그가 목숨을 걸고 위험에 뛰어들길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장군님께서는 워낙 강하시고 충성도 깊으니 유태범을 암살하러 간다면 가능성이 있겠죠.”장범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의 친위대장인 만큼 실력이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장군님, 제가 괜히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아니지만 혼자 가시는 건 좀 무리가 있을 수도 있어요.”제갈영군이 갑작스레 말했다.“잠깐! 아직 그 전설 속의 인도가 있잖아요?”주한휘가 문득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인도란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겠죠. 인도의 실력이라면 장군님 못지않을 텐데요?”“아니요, 홍복홍께서는 저보다 훨씬 뛰어나십니다.”석태혁이 차분하게 답했다.그가 친위대장이기는 해도 왕부의 진정한 비책은 사실 인도 홍복홍이다. 서경의 세 고수 중 검선은 세상을 떠났고, 주광은 행방이 묘연하다. 결국 남은 인도가 서경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다.대 마스터 급의 인도는 그가 견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와, 그럼 잘됐네요! 인도가 장군님보다 훨씬 강하시다면, 그분께 부탁드리는 게 훨씬 확실하지 않을까요?”주한휘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유감이지만, 홍복홍께서는 왕부를 떠나신 뒤로 지금까지 종적을 감추셨어요. 그분께 부탁드리긴 힘들 것 같네요.”석태혁이 고개를 저었다.“종적이 묘연하다니...”장범규가 미간을 찌푸렸다.“홍복홍이라는 분, 왕부가 이렇게 위태로운데 어디 가신 건지 모르겠군요.”“설마 상황이 안 좋아 보이니까 도망쳐 버린 건 아니겠죠?”주한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주 제후, 그런 말씀은 삼가주세요. 홍복홍께서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 바쳐 오신 분이에요. 도망칠 리가 없습니다.”석태혁의 얼굴이 굳어졌다.“아,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주한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문제가 좀 있어요.”제갈영군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새 왕이 즉위하려면 폐하의 허가와 백관의 승인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워요. 게다가 폐하의 뜻을 받고 백관을 모시려면 앞뒤로 최소 사흘은 걸려요. 지금 우리 상황으로는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없죠.”“에이, 설마? 즉위가 그렇게나 복잡해요?”장범규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다들 천우가 어르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잖아요. 그럼 당연히 서경왕 자리를 잇는 게 맞지 않나요?”“맞아요! 급할 때는 융통성도 발휘해야 하는 거잖아요.”주한휘가 곁에서 맞장구쳤다.“두 분 다 서경왕위를 산적 두목 뽑듯 생각하시는 건가요? 깃발 하나 꽂고 술 몇 사발 마신 다음 큰소리 몇 마디로 끝낼 일이 아니에요. 농담하지 마세요.”제갈영군이 약간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서경왕위는 서경 백성만이 아니라 천하 모든 사람의 안위와도 연결돼 있죠. 서경이 혼란스러워지면 천하가 뒤숭숭해지고, 서경이 안정되면 천하도 평안해져요. 과장이 아니라 서경왕위의 무게는 폐하의 황위에 전혀 뒤지지 않아요. 그런 중요한 자리를 함부로 정하고 아무나 앉을 수 있겠습니까?”“맞아요. 저도 천우가 빨리 왕위를 이어서 군심을 안정시키면 좋겠지만, 왕위 계승은 장난이 아니죠.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고 남들 입방아에 오르기 딱이니까요.”이의진이 고개를 저었다.규율과 절차 없이는 질서가 서기 어려운 법. 서경왕 자리의 무게는 그만큼 무겁다. 폐하의 명령과 문무백관의 증인이 없으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다들 너무 규칙만 따져서 이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어요.”장범규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지금 도련님이 왕위를 잇지 못하면 유태범의 대군이 쳐들어올 때 어쩌자는 겁니까?”주한휘가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은 제후님, 혹시 다른 방도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냥 말씀 좀 해주세요. 더는 뜸 들이지 말고요.”제갈영군이 은성종을 바라봤다.“두
“뭐라고요? 목격자를 전부 없애버린다고요?”그 말을 듣자 장범규의 안색이 급변했다.“농담하는 거 아니죠? 북쪽 4대 제후는 모두 유태범의 사람인데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전부 죽인다는 게 말이 돼요?”“큰일을 하는 자는 마음이 독해야 하는 법입니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사람한테 약간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제갈영군이 덤덤하게 말했다.“물론 이건 마지막 계획이에요. 만약 북쪽 4대 제후가 무사히 왕위를 빼앗고 병부를 손에 넣는다면 유태범은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바로 왕위를 이어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만약 북쪽 4대 제후가 실패하면 유태범은 큰일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욕심이 많은 자일수록 더욱 광기 어린 행동을 보일 것이다.예전에 유태범은 위왕에게 억눌려 힘을 숨기고 기회를 기다렸다. 위왕이 세상을 떠난 지금 속박을 벗어난 유태범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렇다면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네요.”장범규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흑용군은 서경에서 가장 강하고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흑용군을 장악한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만약 유태범이 표기 대장군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다시 왕실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흑용군을 대량으로 동원할 가능성이 컸다.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다. 오직 승자만이 왕이 되고 패자는 반역자가 될 뿐이니까.“제후님들은 모두 서경의 기둥입니다. 혹시 좋은 해결책이라도 있습니까?”이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전 싸우는 것만 잘하지, 머리를 쓰는 건 절대 안 돼요.”장범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저도 그렇습니다.”주한휘도 고개를 내저었다.“회음 제후님은 재능이 뛰어나니 뾰족한 수가 있으면 얘기해보시죠.”제갈영군의 시선이 은성종에게 향했다.그들이 성문 앞의 십만 대군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은성종의 회유책 덕분이었다.장교들의 가족과 친구를 이용하여 그들을 설득하고 항복하게 했다.많
지금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유태범이 흑용군을 이끌고 오는 것이었다.“너희 둘은 주모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력자야. 사형은 면해도 처벌은 면치 못해.”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여봐라. 저 두 놈을 끌고 가서 감시하고 내 명령 없이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거라.”“알겠습니다.”몇 명의 친위대가 재빨리 다가가 포박된 진승민과 강윤기를 강제로 끌고 갔다.“장군님, 항복한 병사들을 처리해 주십시오.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더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이의진이 석태혁을 보며 말했다.“알겠습니다.”석태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왕비님 자비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그때 네 명이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왔다.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병사들이 자동으로 길을 터주었는데 네 사람이 바로 남쪽 4대 제후였다.맨 왼쪽으로부터 제갈영군, 그다음은 은성종, 주한휘, 장범규가 나란히 서 있었다.“저희가 너무 늦게 온 바람에 왕비님께서 많이 놀라셨죠? 부디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은성종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겸손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그런 말씀 마십시오. 만약 제때 와주시지 않았다면 왕부가 위험에 처했을 겁니다. 제후님들 모두 공신이십니다.”이의진은 재빨리 다가가 허리 굽힌 은성종을 일으켜 세웠다.사실 남쪽 4대 제후가 이렇게 빨리 군대를 보내 지원해 줄 거라는 건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다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밤낮으로 달려왔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왕부를 지키고 서경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이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은성종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맞습니다. 만약 위왕님께서 저를 살려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왕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요.”장범규가 호탕하게 말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그는 가장 솔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왕비님, 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왕부의 어려움은 곧 우리의 어려움이니 당연히 도와야죠.”주한휘가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