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떻게 됐어요? 우리가 이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요?”여호준이 떠보듯 물었다.“X발, 개 같은 것들. 평소 콩고물이라도 있을 땐 누구보다 빨리 나타나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우리가 곧 망하게 생기니까 전부 멀리 피하잖아. 배은망덕한 놈들!”여동남의 낯빛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여씨 가문의 가주가 이 지경으로 타락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아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예요. 그런 개보다도 못한 놈이랑은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요. 우리 꼭 이번 고비를 넘겨서 그놈들이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들어요!”여호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호준아, 아무래도 내 인맥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이젠 너밖에 없어.”여동남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아 참, 너 강천호의 딸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걔한테 연락해서 돈 좀 빌릴 수 있는지 알아봐봐.”“아... 그걸 까먹을 뻔했네요. 강능 갑부인 강천호의 딸이라면 6천억쯤은 별거 아닐 거예요. 지금 당장 전화해 볼게요.”여호준은 재빨리 휴대 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어머, 호준 도련님 아니에요? 오늘은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었나 봐요?”그녀의 한 맺힌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향란 씨도 참. 요즘 진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니까요. 시간이 나자마자 바로 향란 씨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요.”여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여자의 마음을 달래는 데는 그야말로 선수였다.“흥, 그래도 양심은 있네요. 말해봐요,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날 찾았어요?”강향란이 웃으며 물었다.“당연히 향란 씨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죠. 안 그러면 뭐겠어요? 하루만 못 봐도 그렇게 보고 싶더라니까요.”여호준이 입에 발린 소리를 술술 했다.“하하... 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요? 계속 쓸데없는 얘기를 할 거면 전화 끊어요.”“아니요, 끊지 말아요... 사실 작은 부탁이 있긴 있어요.”여호준이 목청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요즘 사업에 문
“여... 여보세요?”여호준은 휴대 전화를 귀에 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유진우 얘기만 했을 뿐인데 왜 고양이를 본 쥐처럼 이렇게 깜짝 놀라는 거지?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나?’여호준은 강향란이 유진우에게 뺨을 맞은 후로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사실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그리고 더 중요한 건 뺨을 맞은 다음에 복수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는 것이다.이 일은 강향란에게 있어서 치욕 중의 치욕이었고 평생 마음속에 박힌 두려움이 되고 말았다.강향란도 분통이 터진 건 사실이지만 유진우를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오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강씨 가문은 그 어떤 복수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유진우는 아주 식은 죽 먹기로 용 관장을 이긴 고수이다. 이런 사람이 한번 미쳐 날뛴다면 하룻밤 사이에 강씨 가문을 피바다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하여 강씨 가문은 어쩔 수 없이 줄곧 참고 있었던 것이었다.그리고 이 또한 유진우의 이름을 듣자마자 강향란이 두려움에 떤 원인이기도 했다.그녀는 또 맞을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호준아, 향란 씨 뭐래?”넋이 나간 아들의 모습에 여동남이 참다못해 먼저 물었다.“젠장, 유진우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는 돈을 못 빌려주겠대요.”여호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강씨 가문의 딸마저 그 자식을 두려워한다고? 설마 조씨 가문 때문이야?”여동남이 떠보듯 물었다.“그럴 가능성 있어요.”여호준이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이거 큰일이네...”여동남이 눈살을 찌푸렸다.“돈을 빌리지 못하면 여씨 가문은 얼마 못 버티고 망하게 돼. 정녕 그 유진우라는 놈한테 부탁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부탁? 부탁은 개뿔!”여호준이 분통을 터뜨렸다.“우리가 그 자식한테 고개를 숙인다는 게 말이 돼요? 정 안 되면 호되게 패버리면 돼요!”“호준아, 절대 흥분해서는 안 돼!”여동남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다.“유진우 뒤에
평안 의원.유진우가 한창 독서에 몰두하고 있던 그때 마이바흐 한 대가 의원 문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자 여동남이 선물을 들고 내렸다.“유진우 씨...”의원으로 들어오자마자 여동남은 웃으며 한껏 예의를 갖췄다. 전의 시건방진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죠?”유진우는 덤덤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오늘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진우 씨. 저희가 엄청난 분을 몰라뵙고 함부로 나댔어요. 넓은 아량으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요?”여동남이 먼저 사과를 건넸다. 유진우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조씨 가문이 뒤에서 도와줄 뿐만 아니라 손기태와 친분을 맺은 걸 보면 절대 일반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여 6천억을 빌리려면 반드시 그의 용서를 먼저 구해야 했다.“나 같은 조무래기가 어찌 감히 여씨 가문의 사과를 받겠어요.”유진우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진우 씨는 젊고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인재잖아요.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주세요.”여동남이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유진우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이를 악물고 털썩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진우 씨, 제가 이렇게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앞으로 진우 씨는 저희 여씨 가문의 은인이에요. 저희 산업의 3분의 1... 아니, 2분의 1을 사죄의 의미로 진우 씨한테 드릴게요.”그러고는 머리까지 조아렸다.여동남이 이 정도로 자신을 내려놓을 줄은 유진우도 생각지 못했다. 체면을 버리고 머리까지 조아리며 사과하는 걸 보니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윤아의 고양이를 죽인 건 어떻게 할 셈입니까?”유진우가 덤덤하게 물었다.“당연히 물어드려야죠! 열 마리든 백 마리든 기꺼이 배상하겠습니다.”여동남이 말했다.“코코는 이미 죽었어요. 아무리 배상해봤자 더는 코코가 아니에요.”옆에 있던 임윤아가 입을
“네?”여동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볼을 움켜쥐었다....그 시각 발렌타인 호텔의 어느 한 룸.이청아가 침대에 축 늘어져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으며 의식도 조금 흐릿한 것 같았다.여호준은 그런 그녀 옆에 서서 음흉하게 웃으며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탐냈다.“청아야, 청아. 넌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여자야. 몸매면 몸매, 얼굴이면 얼굴, 분위기면 분위기, 어느 것 하나 꿀리는 게 없어. 아주 대박이야! 솔직히 말해서 수많은 여자를 만나봤지만 너처럼 매력적인 여자는 처음이야. 물론 너처럼 예쁜 여자한테는 나같이 훌륭한 남자가 어울리긴 하지. 유진우 그 자식이 뭔데 감히 널 가져? 하지만 괜찮아. 오늘 밤이 지나면 넌 내 여자야.”여호준은 음흉하게 웃으며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벗기다 말고 뭔가 떠올랐는지 휴대 전화를 꺼내 이청아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카메라를 옮긴 후 촬영 버튼을 눌렀다.“이런 아름다운 밤은 당연히 기록해야지. 전에 유진우랑 약속했었어. 너랑 사랑을 나누는 영상을 찍어서 보내주겠다고. 남자라면 약속을 지켜야지.”여호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비겁하고 파렴치한 놈! 오늘 날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감방에 처넣을 거야!”이청아는 이를 꽉 깨물고 힘겹게 욕설을 퍼부었다.“하하... 이 영상이 노출되는 게 두렵지 않다면 나도 상관없어. 너같이 예쁜 여자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깟 감옥살이 몇 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물론 그 정도까지 일을 크게 벌일 필요는 없어. 오늘 밤이 지나고 나랑 결혼한다면 명성도 더럽혀지지 않고 매일 밤 나랑 잠자리 할 수도 있어. 얼마나 좋아?”여호준은 그녀를 반드시 자기 여자로 만들겠다는 기세로 음흉하게 웃었다.“좋긴 개뿔! 내 말 명심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 같은 위선자랑은 절대 결혼 안 해!”이청아가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몇 번이고 시도해봐도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얼굴도 발그스름
“쿵!”문이 열리자, 방 안의 모든 조명이 터졌고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순식간에 방 전체를 뒤덮었다.“누구야? 어떤 개자식이 감히 내 일을 망쳐?!”여호준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았으나 사방이 어두워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여호준! 당신 죽고 싶어 환장했어?”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고, 창밖으로 비치는 한 줄기 달빛을 빌려 여호준은 마침내 그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유진우다!‘너였구나!’여호준은 표정이 변하더니 재빨리 침대 옆 서랍장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며 소리쳤다.“개자식! 번번이 내 일을 망친 걸 되갚아주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네!”이청아는 허약한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진우! 가... 빨리 가라고! 나 신경 쓰지 마...”유진우를 처음 봤을 때 모든 게 끝났다며 안도감을 느꼈지만, 여호준이 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그녀는 오히려 당황하기 시작했다.“여씨 가문이 머리를 숙이고 다녀야 한다며 큰소리칠 때는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나 봐? 어때? 이제 겁나지?”여호준은 총을 들고 싸늘하게 말했다.“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 앞에 무릎 꿇어. 안 그러면 내가 쏴 죽일 거야!”유진우의 눈빛은 섬뜩했다.“무릎을 꿇으라고? 당신 같은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지?”“싫다는 거야?”“탕탕!”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쏜 두 발의 총은 유진우의 발 근처에 떨어졌고 여호준은 그를 위협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내 앞에 무릎 꿇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청아를 갖고 놀 거야!”“야... 이 비겁한 자식아!”화가 난 이청아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빨리 뛰었다.약효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화를 내니 더 매혹적이었다.“맞아, 난 비겁한 인간이야.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저 자식은 나중에 상대하고 일단 우리 한번 놀아볼까?”여호준의 표정은 험악했다.“시원
“이 자식이...”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화를 내려고 고개를 들었으나 그때 유진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젠장! 달리기라도 빨라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오늘 그 자식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도망가봤자 손바닥 안이야. 짐승만도 못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 내가 반드시 감옥에 처넣을 거야!”장경화는 이를 갈며 말했다.“맞아요! 절대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요!”단소홍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유진우의 비열하고 파렴치한 행동은 이미 철저히 그들의 마지노선을 밟았다.“음...”이때 잠을 자던 이청아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딸! 드디어 깼네?”장경화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괜찮아?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엄마가 왜 여기 있어요?”이청아는 아픈 머리를 문지르며 기억을 더듬었으나 흐릿했다.“네가 위험에 처한 것 같다고 장 비서한테 연락이 와서 미친 듯이 찾으러 다녔어. 우리가 제때 와서 다행이지, 안 그러면 네가 유진우 그 짐승 같은 놈한테 당할 뻔했어!”말을 이어가던 장경화는 또 분통을 터뜨렸다.“유진우?”이청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물었다.“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걱정하지 마. 우리가 이미 내쫓았어.”장경화는 그녀를 위로했다.“맞아! 우리가 이미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그 자식은 반드시 잡힐 거야.”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왜 잡아? 진우가 방금 날 구해줬어!”이청아가 말했다.“뭐라고? 유진우가 널 구했다고?”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듯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딸, 지금 농담하는 거야? 그 자식이 끔찍한 짓 저지르려고 함부로 대하는 걸 우리가 방금 봤다니까?”장경화는 아예 믿지 않았다.“맞아. 누나가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그 자식이 옷까지 벗겼어!”이현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듯 과장하며 말했다.“유진우가 한 게 맞아요! 저희도 증명할 수 있어요!”단소홍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아니! 절대 아닐 거야! 진우는 그런 사람 아니
동틀 무렵, 여씨 가문의 별장 안.여동남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유난히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어젯밤 여호준이 떠난 후로 지금껏 아무 소식도 못 들었다.전화도 안 되고 연락도 없고, 실종된 것 같다는 생각에 그를 찾으러 경호원을 보냈지만, 아직 아무런 피드백도 받지 못했다. 정말 이상하다!“딩동!”현관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여동남은 밖으로 나갔고 문 앞에는 검은색 미니밴이 주차되었다.갑자기 차 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담긴 포대자루가 거칠게 던져지더니 차는 곧바로 떠났다.“응?”여동남은 놀란 표정으로 입구에 있는 경호원 두 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경호원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둘러 다가가 포대자루를 열어봤다.시퍼렇게 멍든 얼굴에 상처투성이의 벌거벗은 남자가 보였다.“아빠...”남자는 간신히 눈을 뜨더니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호준이?!”여동남은 남자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너... 왜 이렇게 다쳤어?”“그... 유진우가... 그 인간이... 날...”말을 이어가던 여호준은 울부짖으며 목이 메었다.밤에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무도 모른다.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여러 번 들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죽고 싶지만 죽을 수조차도 없는 상황을 어떻게 버텨왔는지 그도 기억이 안 났고 그저 일분일초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다.“울지 마. 무슨 일 있었는지 천천히 말해봐. 뒷일은 아빠가 알아서 할게!”여동남은 말하면서 경호원을 시켜 여호준을 집안으로 들여보냈다.그래도 에피네프린 주사를 맞은 덕분에 몸은 상처투성이지만 의식은 또렷했고, 여동남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하게 얘기했다.물론 자기한테 불리한 이야기는 쏙 빼놓았다.“유진우, 이 빌어먹을 개자식! 감히 너한테 그런 짓을 했다고?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그의 말을 듣고 난 여동남은 화가 나서 테이블을 내리쳤고 여호준이 당한 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두피가 저릴 지경이었다.“아빠!
지금 이 순간 여동남은 누구보다도 당황하고 무서웠다.눈앞에 보이는 볼품없는 노인이 전설의 인간 도살자인 줄은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곳까지 오신 거지?’그때 정신을 차린 여호준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대뜸 화를 냈다.“감히 날 때려? 당신들은 오늘 내 손에 죽을 거예요! 여봐라, 저 인간들 싹 다 처리해!”여동남이 고함을 지르며 그를 말렸다.“그만!”이내 ‘털썩’ 하고 한복 입은 어르신을 향해 무릎을 꿇었고 겁에 질린 채 입을 열었다.“어르신! 저희의 어떤 무례한 행동이 심기를 상하게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아빠! 미쳤어요? 왜 저 인간한테 무릎 꿇어요?”여호준은 승산이 있는 싸움인데 갑자기 무릎 꿇고 사과하는 여동남이 이해되지 않았다.“네가 뭘 알아! 이분들은 우리가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얼른 너도 무릎 꿇어!”여동남은 눈치 주며 말했으나 여호준은 무서운 줄 몰랐다.“싫어요! 못 건드릴 게 뭐 있어요? 저쪽은 세 명밖에 없고 우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 정도면 누워서 떡 먹기죠!”“야... 너...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기는 해? 눈앞의 이분은, 그 유명한 인간 도살자란 말이야!”여동남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도살이고 뭐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으니까 저 인간들은 오늘 내 손에 죽을 거예요!”여호준은 여전히 건방졌다.“하하하...”그의 말에 한복 입은 어르신은 웃음을 터뜨렸다.“참 재밌네요. 이대로 죽이기 아까울 정도로.”“날 죽인다고요? 고작 당신 같은 인간들이? 참 주제도 모르고 덤비시네요.”여호준은 사악하게 웃었다.하룻밤의 고문 끝에 그의 마음은 이미 심하게 뒤틀려졌고 격하게 분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다!“망했다... 이제 다 끝났어...”여동남은 잿빛이 된 얼굴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여호준을 바라보며 멍청한 자식을 낳은 자신을 원망했다.“인원수가 많다고 느끼는 거죠?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
이 순간 유진우의 눈이 피를 뿜을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살기가 솟구쳤다.비록 예전에 아버지와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그동안 품었던 그 작은 분노마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단지 호룡각의 일을 완전히 해결한 후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 효도를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둘이 만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암살당해 돌아가셨다. 이 충격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창공!” 유진우가 갑자기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어 창공보검을 불러들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호룡각의 잔당들을 모조리 섬멸해야만 했다!“전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유진우가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손도운이 급히 그를 막아서며 침착하게 조언했다. “호룡각은 준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렇게 무모하게 뛰쳐나가신다면 복수는커녕 오히려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실 수 있습니다!”“비키세요!” 유진우의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창공검의 칼날을 손도운의 목에 바로 겨누었다. 예리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며 상처를 내자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전하! 저를 죽이시더라도 전 전하를 막아야만 합니다. 제가 어찌 전하께서 죽으러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 더 이상의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손도운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진우 앞을 가로막은 채 죽음도 불사하는 자세를 취했다.유진우는 이를 악물었고 그의 손에 든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초간의 대치 끝에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마침내 검을 내렸다.손도운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냉정해져야만 했다. 유만수가 죽었으니 왕부가 분명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이때
다른 처녀들도 모두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진심 어린 간청을 했다.이 광경을 본 유진우는 넋이 나갔다.노란 옷 처녀의 말은 그의 귀를 때리는 듯했다.지옥 같은 일을 겪고도 이 아이들이 자신이 아닌 천하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이런 원대한 뜻과 깨달음은 그조차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이청성이 말했듯, 이들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을 향하는 처녀들이었다.귀하고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누가 여자가 남자만 못하다 했는가?진정한 대의 앞에서 이 여자들이야말로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었다.이런 의로운 용사들이 있는데 어찌 서경이 부흥하지 않을까? 어찌 천하가 평안하지 않을까?“오빠, 결정해요. 받아주지 않으면 저 애들은 살아갈 희망조차 잃을 거예요.” 이청성이 진지하게 말했다.“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어요?” 유진우가 엄숙하게 물었다.“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모든 소녀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 허락하죠!”유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을 시작할 거예요. 견뎌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다면 편한 곳에서 평안히 살도록 해요.”“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의 소녀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소녀들도 따라 외쳤다.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성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네가 돌봐. 내일 저애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해.”“알겠어요.”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소녀들을 데리고 떠났다.일행이 막 나가자 손도운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그의 표정이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고 큰일이라도 난 듯했다.“전하! 큰일 났습니다!”유진우를 보자마자 손도운은 ‘쿵’하고 무릎을 꿇고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왕부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왕께서 자객의 암살로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요?”이 말을 듣자 유진우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
“오빠, 급한 건 알지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아가씨들은 지금 오빠만 믿고 있고 목숨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받아들이면 좋은 점이 많을 거예요. 예를 들어, 오빠가 외로울 때...”“농담하지 말고 요점이나 말해요!” 유진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솔직히 말할게요.”이청성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장혁 씨, 사실 이 처녀들은 보기 드문 인재예요. 제가 이미 선별했는데 모두 영리하고 의지가 강해요. 조금만 가르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예요.”“무슨 뜻이에요?” 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밀사의 중요성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여자 밀사는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장점이 있죠. 이 처녀들을 밀사로 키우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청성이 말했다.“말은 쉽지, 밀사 하나 키우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전 지금 제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든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그는 이 처녀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지, 이용당하거나 장기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충성심인데 그들은 이미 그걸 가지고 있어요. 장혁 씨가 그들을 구해줬고 장혁 씨의 빛이 그들의 어두운 세상을 비춰줬죠. 저애들은 장혁 씨를 신처럼 여기고 있어요.”“시간과 노력은 걱정하지 마요. 장혁 씨가 직접 가르칠 필요 없이 좋은 스승만 찾아주면 돼요. 장혁 씨 곁의 손도운이라면 아주 적합할 것 같은데요.” 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었다.“그건 청성 씨 생각이고 저 애들한테는 물어봤어요?” 유진우가 물었다.“당연히 물어봤죠. 모두 하겠대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이청성이 말했다.“불쌍한 사람들인데 그럴 필요까지야...” 유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장혁 씨, 어둠 속에 있어도 빛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세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발 저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