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떻게 됐어요? 우리가 이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요?”여호준이 떠보듯 물었다.“X발, 개 같은 것들. 평소 콩고물이라도 있을 땐 누구보다 빨리 나타나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우리가 곧 망하게 생기니까 전부 멀리 피하잖아. 배은망덕한 놈들!”여동남의 낯빛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여씨 가문의 가주가 이 지경으로 타락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아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예요. 그런 개보다도 못한 놈이랑은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요. 우리 꼭 이번 고비를 넘겨서 그놈들이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들어요!”여호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호준아, 아무래도 내 인맥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이젠 너밖에 없어.”여동남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아 참, 너 강천호의 딸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걔한테 연락해서 돈 좀 빌릴 수 있는지 알아봐봐.”“아... 그걸 까먹을 뻔했네요. 강능 갑부인 강천호의 딸이라면 6천억쯤은 별거 아닐 거예요. 지금 당장 전화해 볼게요.”여호준은 재빨리 휴대 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어머, 호준 도련님 아니에요? 오늘은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었나 봐요?”그녀의 한 맺힌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향란 씨도 참. 요즘 진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니까요. 시간이 나자마자 바로 향란 씨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요.”여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여자의 마음을 달래는 데는 그야말로 선수였다.“흥, 그래도 양심은 있네요. 말해봐요,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날 찾았어요?”강향란이 웃으며 물었다.“당연히 향란 씨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죠. 안 그러면 뭐겠어요? 하루만 못 봐도 그렇게 보고 싶더라니까요.”여호준이 입에 발린 소리를 술술 했다.“하하... 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요? 계속 쓸데없는 얘기를 할 거면 전화 끊어요.”“아니요, 끊지 말아요... 사실 작은 부탁이 있긴 있어요.”여호준이 목청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요즘 사업에 문
“여... 여보세요?”여호준은 휴대 전화를 귀에 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유진우 얘기만 했을 뿐인데 왜 고양이를 본 쥐처럼 이렇게 깜짝 놀라는 거지?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나?’여호준은 강향란이 유진우에게 뺨을 맞은 후로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사실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그리고 더 중요한 건 뺨을 맞은 다음에 복수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는 것이다.이 일은 강향란에게 있어서 치욕 중의 치욕이었고 평생 마음속에 박힌 두려움이 되고 말았다.강향란도 분통이 터진 건 사실이지만 유진우를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오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강씨 가문은 그 어떤 복수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유진우는 아주 식은 죽 먹기로 용 관장을 이긴 고수이다. 이런 사람이 한번 미쳐 날뛴다면 하룻밤 사이에 강씨 가문을 피바다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하여 강씨 가문은 어쩔 수 없이 줄곧 참고 있었던 것이었다.그리고 이 또한 유진우의 이름을 듣자마자 강향란이 두려움에 떤 원인이기도 했다.그녀는 또 맞을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호준아, 향란 씨 뭐래?”넋이 나간 아들의 모습에 여동남이 참다못해 먼저 물었다.“젠장, 유진우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는 돈을 못 빌려주겠대요.”여호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강씨 가문의 딸마저 그 자식을 두려워한다고? 설마 조씨 가문 때문이야?”여동남이 떠보듯 물었다.“그럴 가능성 있어요.”여호준이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이거 큰일이네...”여동남이 눈살을 찌푸렸다.“돈을 빌리지 못하면 여씨 가문은 얼마 못 버티고 망하게 돼. 정녕 그 유진우라는 놈한테 부탁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부탁? 부탁은 개뿔!”여호준이 분통을 터뜨렸다.“우리가 그 자식한테 고개를 숙인다는 게 말이 돼요? 정 안 되면 호되게 패버리면 돼요!”“호준아, 절대 흥분해서는 안 돼!”여동남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다.“유진우 뒤에
평안 의원.유진우가 한창 독서에 몰두하고 있던 그때 마이바흐 한 대가 의원 문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자 여동남이 선물을 들고 내렸다.“유진우 씨...”의원으로 들어오자마자 여동남은 웃으며 한껏 예의를 갖췄다. 전의 시건방진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죠?”유진우는 덤덤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오늘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진우 씨. 저희가 엄청난 분을 몰라뵙고 함부로 나댔어요. 넓은 아량으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요?”여동남이 먼저 사과를 건넸다. 유진우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조씨 가문이 뒤에서 도와줄 뿐만 아니라 손기태와 친분을 맺은 걸 보면 절대 일반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여 6천억을 빌리려면 반드시 그의 용서를 먼저 구해야 했다.“나 같은 조무래기가 어찌 감히 여씨 가문의 사과를 받겠어요.”유진우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진우 씨는 젊고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인재잖아요.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주세요.”여동남이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유진우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이를 악물고 털썩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진우 씨, 제가 이렇게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앞으로 진우 씨는 저희 여씨 가문의 은인이에요. 저희 산업의 3분의 1... 아니, 2분의 1을 사죄의 의미로 진우 씨한테 드릴게요.”그러고는 머리까지 조아렸다.여동남이 이 정도로 자신을 내려놓을 줄은 유진우도 생각지 못했다. 체면을 버리고 머리까지 조아리며 사과하는 걸 보니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윤아의 고양이를 죽인 건 어떻게 할 셈입니까?”유진우가 덤덤하게 물었다.“당연히 물어드려야죠! 열 마리든 백 마리든 기꺼이 배상하겠습니다.”여동남이 말했다.“코코는 이미 죽었어요. 아무리 배상해봤자 더는 코코가 아니에요.”옆에 있던 임윤아가 입을
“네?”여동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볼을 움켜쥐었다....그 시각 발렌타인 호텔의 어느 한 룸.이청아가 침대에 축 늘어져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으며 의식도 조금 흐릿한 것 같았다.여호준은 그런 그녀 옆에 서서 음흉하게 웃으며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탐냈다.“청아야, 청아. 넌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여자야. 몸매면 몸매, 얼굴이면 얼굴, 분위기면 분위기, 어느 것 하나 꿀리는 게 없어. 아주 대박이야! 솔직히 말해서 수많은 여자를 만나봤지만 너처럼 매력적인 여자는 처음이야. 물론 너처럼 예쁜 여자한테는 나같이 훌륭한 남자가 어울리긴 하지. 유진우 그 자식이 뭔데 감히 널 가져? 하지만 괜찮아. 오늘 밤이 지나면 넌 내 여자야.”여호준은 음흉하게 웃으며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벗기다 말고 뭔가 떠올랐는지 휴대 전화를 꺼내 이청아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카메라를 옮긴 후 촬영 버튼을 눌렀다.“이런 아름다운 밤은 당연히 기록해야지. 전에 유진우랑 약속했었어. 너랑 사랑을 나누는 영상을 찍어서 보내주겠다고. 남자라면 약속을 지켜야지.”여호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비겁하고 파렴치한 놈! 오늘 날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감방에 처넣을 거야!”이청아는 이를 꽉 깨물고 힘겹게 욕설을 퍼부었다.“하하... 이 영상이 노출되는 게 두렵지 않다면 나도 상관없어. 너같이 예쁜 여자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깟 감옥살이 몇 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물론 그 정도까지 일을 크게 벌일 필요는 없어. 오늘 밤이 지나고 나랑 결혼한다면 명성도 더럽혀지지 않고 매일 밤 나랑 잠자리 할 수도 있어. 얼마나 좋아?”여호준은 그녀를 반드시 자기 여자로 만들겠다는 기세로 음흉하게 웃었다.“좋긴 개뿔! 내 말 명심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 같은 위선자랑은 절대 결혼 안 해!”이청아가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몇 번이고 시도해봐도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얼굴도 발그스름
“쿵!”문이 열리자, 방 안의 모든 조명이 터졌고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순식간에 방 전체를 뒤덮었다.“누구야? 어떤 개자식이 감히 내 일을 망쳐?!”여호준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았으나 사방이 어두워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여호준! 당신 죽고 싶어 환장했어?”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고, 창밖으로 비치는 한 줄기 달빛을 빌려 여호준은 마침내 그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유진우다!‘너였구나!’여호준은 표정이 변하더니 재빨리 침대 옆 서랍장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며 소리쳤다.“개자식! 번번이 내 일을 망친 걸 되갚아주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네!”이청아는 허약한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진우! 가... 빨리 가라고! 나 신경 쓰지 마...”유진우를 처음 봤을 때 모든 게 끝났다며 안도감을 느꼈지만, 여호준이 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그녀는 오히려 당황하기 시작했다.“여씨 가문이 머리를 숙이고 다녀야 한다며 큰소리칠 때는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나 봐? 어때? 이제 겁나지?”여호준은 총을 들고 싸늘하게 말했다.“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 앞에 무릎 꿇어. 안 그러면 내가 쏴 죽일 거야!”유진우의 눈빛은 섬뜩했다.“무릎을 꿇으라고? 당신 같은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지?”“싫다는 거야?”“탕탕!”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쏜 두 발의 총은 유진우의 발 근처에 떨어졌고 여호준은 그를 위협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내 앞에 무릎 꿇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청아를 갖고 놀 거야!”“야... 이 비겁한 자식아!”화가 난 이청아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빨리 뛰었다.약효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화를 내니 더 매혹적이었다.“맞아, 난 비겁한 인간이야.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저 자식은 나중에 상대하고 일단 우리 한번 놀아볼까?”여호준의 표정은 험악했다.“시원
“이 자식이...”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화를 내려고 고개를 들었으나 그때 유진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젠장! 달리기라도 빨라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오늘 그 자식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도망가봤자 손바닥 안이야. 짐승만도 못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 내가 반드시 감옥에 처넣을 거야!”장경화는 이를 갈며 말했다.“맞아요! 절대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요!”단소홍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유진우의 비열하고 파렴치한 행동은 이미 철저히 그들의 마지노선을 밟았다.“음...”이때 잠을 자던 이청아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딸! 드디어 깼네?”장경화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괜찮아?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엄마가 왜 여기 있어요?”이청아는 아픈 머리를 문지르며 기억을 더듬었으나 흐릿했다.“네가 위험에 처한 것 같다고 장 비서한테 연락이 와서 미친 듯이 찾으러 다녔어. 우리가 제때 와서 다행이지, 안 그러면 네가 유진우 그 짐승 같은 놈한테 당할 뻔했어!”말을 이어가던 장경화는 또 분통을 터뜨렸다.“유진우?”이청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물었다.“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걱정하지 마. 우리가 이미 내쫓았어.”장경화는 그녀를 위로했다.“맞아! 우리가 이미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그 자식은 반드시 잡힐 거야.”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왜 잡아? 진우가 방금 날 구해줬어!”이청아가 말했다.“뭐라고? 유진우가 널 구했다고?”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듯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딸, 지금 농담하는 거야? 그 자식이 끔찍한 짓 저지르려고 함부로 대하는 걸 우리가 방금 봤다니까?”장경화는 아예 믿지 않았다.“맞아. 누나가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그 자식이 옷까지 벗겼어!”이현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듯 과장하며 말했다.“유진우가 한 게 맞아요! 저희도 증명할 수 있어요!”단소홍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아니! 절대 아닐 거야! 진우는 그런 사람 아니
동틀 무렵, 여씨 가문의 별장 안.여동남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유난히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어젯밤 여호준이 떠난 후로 지금껏 아무 소식도 못 들었다.전화도 안 되고 연락도 없고, 실종된 것 같다는 생각에 그를 찾으러 경호원을 보냈지만, 아직 아무런 피드백도 받지 못했다. 정말 이상하다!“딩동!”현관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여동남은 밖으로 나갔고 문 앞에는 검은색 미니밴이 주차되었다.갑자기 차 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담긴 포대자루가 거칠게 던져지더니 차는 곧바로 떠났다.“응?”여동남은 놀란 표정으로 입구에 있는 경호원 두 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경호원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둘러 다가가 포대자루를 열어봤다.시퍼렇게 멍든 얼굴에 상처투성이의 벌거벗은 남자가 보였다.“아빠...”남자는 간신히 눈을 뜨더니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호준이?!”여동남은 남자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너... 왜 이렇게 다쳤어?”“그... 유진우가... 그 인간이... 날...”말을 이어가던 여호준은 울부짖으며 목이 메었다.밤에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무도 모른다.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여러 번 들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죽고 싶지만 죽을 수조차도 없는 상황을 어떻게 버텨왔는지 그도 기억이 안 났고 그저 일분일초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다.“울지 마. 무슨 일 있었는지 천천히 말해봐. 뒷일은 아빠가 알아서 할게!”여동남은 말하면서 경호원을 시켜 여호준을 집안으로 들여보냈다.그래도 에피네프린 주사를 맞은 덕분에 몸은 상처투성이지만 의식은 또렷했고, 여동남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하게 얘기했다.물론 자기한테 불리한 이야기는 쏙 빼놓았다.“유진우, 이 빌어먹을 개자식! 감히 너한테 그런 짓을 했다고?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그의 말을 듣고 난 여동남은 화가 나서 테이블을 내리쳤고 여호준이 당한 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두피가 저릴 지경이었다.“아빠!
지금 이 순간 여동남은 누구보다도 당황하고 무서웠다.눈앞에 보이는 볼품없는 노인이 전설의 인간 도살자인 줄은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곳까지 오신 거지?’그때 정신을 차린 여호준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대뜸 화를 냈다.“감히 날 때려? 당신들은 오늘 내 손에 죽을 거예요! 여봐라, 저 인간들 싹 다 처리해!”여동남이 고함을 지르며 그를 말렸다.“그만!”이내 ‘털썩’ 하고 한복 입은 어르신을 향해 무릎을 꿇었고 겁에 질린 채 입을 열었다.“어르신! 저희의 어떤 무례한 행동이 심기를 상하게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아빠! 미쳤어요? 왜 저 인간한테 무릎 꿇어요?”여호준은 승산이 있는 싸움인데 갑자기 무릎 꿇고 사과하는 여동남이 이해되지 않았다.“네가 뭘 알아! 이분들은 우리가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얼른 너도 무릎 꿇어!”여동남은 눈치 주며 말했으나 여호준은 무서운 줄 몰랐다.“싫어요! 못 건드릴 게 뭐 있어요? 저쪽은 세 명밖에 없고 우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 정도면 누워서 떡 먹기죠!”“야... 너...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기는 해? 눈앞의 이분은, 그 유명한 인간 도살자란 말이야!”여동남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도살이고 뭐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으니까 저 인간들은 오늘 내 손에 죽을 거예요!”여호준은 여전히 건방졌다.“하하하...”그의 말에 한복 입은 어르신은 웃음을 터뜨렸다.“참 재밌네요. 이대로 죽이기 아까울 정도로.”“날 죽인다고요? 고작 당신 같은 인간들이? 참 주제도 모르고 덤비시네요.”여호준은 사악하게 웃었다.하룻밤의 고문 끝에 그의 마음은 이미 심하게 뒤틀려졌고 격하게 분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다!“망했다... 이제 다 끝났어...”여동남은 잿빛이 된 얼굴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여호준을 바라보며 멍청한 자식을 낳은 자신을 원망했다.“인원수가 많다고 느끼는 거죠?
“아니에요?”유장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용호산은 여태껏 무림인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무관심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서태양이 말했다.인재를 선발해 위상을 높이려고 진무사가 나섰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하지만 용호산은 전혀 관계가 없지 않은가?“그럼 무슨 의도인데요?”유장미가 되물었다.“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궁금하거든?”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서태양은 어깨를 으쓱했다.“보혁 씨는 내막에 훤하니까 화두를 꺼낸 거겠죠?”유이슬이 시선을 돌렸다.“내막까지는 아니지만 주워들은 소식이 몇 가지 있긴 해요.”염보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로는 용호산 뒷산의 금지구역에 최근 신비로운 보물이 나타났는데 향후 100년 동안 무림인들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요.”“무슨 보물이 그렇게 대단해요?”유장미가 깜짝 놀랐다.유이슬과 서태양도 예상치 못한 듯 충격을 금치 못했다.무림인들의 흥망성쇠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만약 제 추측이 맞는다면 용원의 기와 관련된 보물일 거예요.”염보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순간, 유진우는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이내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용원의 기? 그게 뭔데요?”유장미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용맥의 정수이기도 하죠.”유이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며칠 전 호룡각이 와해하면서 지하 용맥이 다섯 개의 용원의 기로 변해 세상에 뿔뿔이 흩어졌어. 소문에 의하면 용원의 기를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되어 승승장구한다고 해.”호룡각이 무너지고 용맥이 파괴된 일이 워낙 큰 이슈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진짜요?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있어요?”유장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서에서 관련된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용원의 기를 얻은 자들은 세상을 주름잡는 수장이거나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었어.”유이슬이 한마디 보탰다.“맞아요.”염보혁이 대
유진우는 옆에 있는 염보혁을 흘깃 쳐다보았고, 속으로 상대방이 아무리 예뻐도 남자를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쿨럭!”염보혁은 사레가 들린 나머지 연신 기침하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슬 씨, 지금 절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네요.”“당연히 칭찬하는 거죠. 그런 얼굴을 보고도 어떤 남자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어요?”유이슬이 정색하며 말했다.“네?”염보혁은 말문이 막혔다.설령 사실일지언정 어찌 면전에서 대놓고 말할 수 있지?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정 믿기 어려우면 태양한테 물어봐요.”유이슬이 문득 말했다.한편, 서태양은 염보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시선을 돌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싶었다.“제가요?”서태양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선배, 장난하지 마세요. 저랑 무슨 상관이죠?”“뭔가 냄새가 나는데요?”유장미가 눈썹을 까딱하더니 눈알을 굴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설마 보혁 씨한테 진짜 반한 건 아니죠?”“이... 계집애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서태양이 펄쩍 뛰면서 얼굴이 벌게진 채 고래고래 외쳤다.“남자끼리 엮일 리가 없잖아.”“침착해요. 단지 농담했을 뿐이에요.”유장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게다가 남남 커플이 진짜 사랑이죠. 어차피 안 될 건 없잖아요. 만약 사귈 생각이 있다면 진심으로 축복해줄게요. 하하하!”“입만 열면 헛소리 하네.”서태양은 짐짓 화가 난 듯 혼내려는 액션을 취했다.유장미는 잽싸게 유이슬의 등 뒤로 숨어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산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당사자인 염보혁은 말문을 잃었다.더욱이 유장미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를 흘끔거리는 서태양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몰래 훔쳐보는 탓에 괜히 기분이 세했다.“진우 씨, 이슬 씨, 다들 용호산은 처음이죠? 제가 구경 좀 시켜드릴까요? 주변에 뭐 있는지 소개해줄게요.”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염
술이 몇 잔 오가자 서서히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이슬 씨, 방금 검종의 제자라고 하시던데 무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용호산에 오른 건가요?”염보혁이 넌지시 물었다.“그런 셈이죠.”유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성격이 무심한 편이라 말주변이 딱히 없었다.“사실 저희는 스승님의 명을 받고 찾아왔어요.”상대적으로 외향적인 유장미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노천사가 용호산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거든요. 검종 뿐만 아니라 천하회, 주술교를 포함한 파벌에서 최정예 제자들을 파견해 출전할 예정이에요.”“그럼 검종에서는 세 분이 참석하는 건가요?”염보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요.”유장미가 고개를 저었다.“저희는 단지 구경하러 왔을 뿐,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는 따로 있어요.”그녀와 서태양은 선천 후기에 속했고, 유이슬은 실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반보 마스터에 불과했다.어찌 됐든 천교에 비하면 열세에 처하는지라 검종을 대표해서 출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따로 있다니? 설마 홍군림이에요?”염보혁의 눈썹이 까닥했다.“그건 저도 잘 몰라요.”유장미가 생긋 웃었다.“워낙 제멋대로에 신출귀몰하는 사람이라 이번 무림대회에 참가할지 아무도 몰라요. 만약 홍 선배가 진짜 출전한다면 우승은 우리 검종이 차지할 거예요.”홍군림은 천교 랭킹의 1위에 올랐을뿐더러 어린 나이에 경천 랭킹에 진입한 검종의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만 성격이 까칠하고 독불장군이라 종주를 제외하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장미야, 그건 네 생각이고.”이때 유이슬이 입을 열었다.“홍 선배가 실력이 뛰어나고 검종의 천재로서 일반 무사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능력자가 한 명 더 있잖아.”“누구요?”유장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장혁.”유이슬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홍 선배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요?”유장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막상막하야. 천교
“네?”염보혁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특히 잘 보이기 급급했던 서태양은 굳은 얼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허공에 손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럴 수가?방금 목숨 걸고 구하려던 사람이 남자였다니?“남자...? 농담이죠?”붉은 옷 소녀가 염보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경국지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인이 대체 어디를 봐서 남자란 말인가?푸른 옷 여인은 입만 벙긋했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흡혈파 망나니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한테 집적거렸다니?취향 한번 독특했다.“아니요. 진짜 남자예요.”염보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밖에 나가면 여자로 오해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붉은 옷 소녀가 말을 아꼈다.“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염보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해탈한 듯 말했다.“아쉽네요.”붉은 옷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본인이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선배? 왜 그래요? 괜찮아요?”그녀는 아직도 넋을 잃은 서태양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어깨를 툭 쳤다.“응? 아, 괜찮아.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이야.”서태양은 꿈에서 깨어난 듯 금세 정신을 차렸다.다만 눈빛만큼은 남자한테서 떠나지 않았다.이렇게 요염한 얼굴이 사내란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그야말로 재능 낭비이지 않은가?“저는 염보혁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염보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유이슬이에요.”푸른 옷 여인이 대답했다.“저는 유장미라고 해요.”붉은 옷 소녀가 활짝 웃었다.비록 남자이지만 미모에 저절로 눈이 갔다.“서태양입니다.”서태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죠?”염보혁은 손을 내밀더니 소개를 이어갔다.“이쪽은 유진우 씨, 그리고 두 분은 호위무사인...”“춘화와 추월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수염 난 사내의 몸에 피투성이 상처가 생겼다.눈 깜짝할 사이에 연신 검에 찔린 탓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비록 수염 난 사내가 힘은 더 셌지만 기교에서는 한참 못 미쳤다.여자의 화려한 검술은 감탄을 자아냈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악!”수염 난 사내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사지가 부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했다.온몸은 피가 흥건했고 상처로 가득했다. 비록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형님!”패배한 우두머리를 보자 흡혈파 제자들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항상 위풍당당하고 기세등등했던 수장이 이런 몰골을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젠장! 감히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저년을 없애버려!”흡혈파 제자들이 고래고래 외치며 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여자를 덮쳤다.“무용지물이야.”푸른 옷 여인은 콧방귀를 뀌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었다.얼마 안 되어 흡혈파 제자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채 선혈이 낭자했다.“역시 대단하세요!”눈앞의 광경에 붉은 옷 소녀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망나니 따위가 감히 검종에게 대들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서태양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뭐... 뭐라고? 너희들이 검종 제자였어?”흡혈파 제자들은 안색이 돌변하더니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검종은 무림인들의 세계에서 3대 문파 중 하나로 천하회와 주술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비록 제자들이 많지 않았지만 뛰어난 인재들밖에 없다.특히 검종의 홍군림은 어린 나이에 천교 랭킹 1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경천 랭킹에 진입하여 세계 10위의 강자가 되었다.경천 랭킹 10위권에 검종 제자가 무려 2명이나 있는데 압도적인 실력으로 3대 파벌의 수장 자리를 거머쥐었다.여기서 검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이제야
“윽!”서태양은 이를 악물고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온 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이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어깨를 짓누른 흡혈검을 떼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힘이 점점 더 가해졌고 무릎이 닿은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작 이런 실력으로 감히 우리 흡혈파한테 덤비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수염 난 사내가 냉소를 지었다.“형님! 멋져요.”“역시 대단하세요.”부하들이 질세라 감탄했다.북쪽에서 흡혈파라고 하면 꽤 이름 있는 큰 파벌인지라 애송이 같은 놈이 도발할 만한 게 아니었다.“감히 내 앞에서 영웅 행세해? 넌 오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야. 교훈 삼아 사지를 부러뜨려줄게!”수염 난 사내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흡혈검을 들어 올려 서태양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챙!검이 닿기 직전 청색 보검이 불쑥 나타나 허공에서 공격을 막아냈다.“응?”수염 난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푸른 옷 여인이 보검을 들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선배?”서태양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제야 한숨 돌렸다.조금만 늦었더라도 오른손을 잃어버렸을 텐데 그나마 선배가 제때 도움을 줘서 천만다행이었다.“괜히 참견하지 마.”수염 난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우리 후배한테 손을 대는 순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여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맞아! 너희들 같은 망나니는 벌을 받아 마땅하지.”이때, 붉은 옷 소녀가 검을 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언니, 제가 도와줄게요.”“아니야. 넌 태양이랑 지켜보고 있어. 이런 놈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푸른 옷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수염 난 사내가 히죽 웃었다.“그런 왜소한 몸으로 오빠의 검을 어찌 막으려고? 차라리 무기는 내려놓고 침대에서 겨뤄보는 건 어때?”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부하들이 폭소를 터뜨렸다.곧이어 음흉한 시선으로 여자를 훑으며 멋대로 평가하
서태양이 움직이자 수염 난 사내의 뒤에서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두 명이 튀어나왔다.두 사람은 무기로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몸체는 강한 피비린내와 함께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는 칼날이 오랫동안 선혈에 노출된 결과였다.무림인들의 세계에서는 흡혈검이라고 불렀다.다만 아쉽게도 그들이 지닌 검은 아직 미성숙 단계였고 기세가 한창 부족했다.챙! 챙!서태양이 먼저 검을 빼 들고 혼자서 두 명의 사내와 대결을 벌였다.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맞서 싸웠지만 힘만 강했을 뿐 행동이 굼뜬 편이었다.공격할 때마다 동작이 다소 어설펐다.반면, 서태양은 누가 봐도 고수의 가르침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스피드, 힘,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느 하나 뒤처진 데 없었다.세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는 순간 실력 차이가 현저했고, 서태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내를 쓰러뜨렸다.그리고 응징할 겸 각자의 다리에 검을 관통했다.“흥! 고작 이런 실력으로 우쭐거려? 제 주제도 모르고.”서태양은 장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좋아! 잘했어!”승리를 거머쥔 서태양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비록 나서서 싸울 용기는 없었지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그래도 실력은 꽤 있나 보네? 어쩐지 참견하더라니.”수염 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고 음침한 목소리로 협박했다.“하지만 오늘 임자를 만났지. 흡혈파를 마주친 이상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흡혈파는 무슨, 들어보지도 못했구먼.”서태양의 표정은 기고만장했다.“하! 괜찮아. 네 피를 전부 흡수하고 나면 우리가 왜 흡혈파라고 불리는지 알 거야.”수염 난 사내가 이죽거리더니 두말없이 공격을 개시했다.그가 발을 내딛자마자 맹렬한 기세가 솟구쳤고, 손에 든 흡혈검은 핏빛을 뿜어내며 곧장 서태양을 덮쳤다.앞서 상대했던 부하들과 달리 수염 난 사내의 흡혈검은 살기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쉽게 화를 부르는 법이다.염보혁은 남자였지만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요염한 얼굴을 지녔다.길을 나서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지금처럼 깡패 무리와 마주할 때면 번번이 시비에 휘말리기 일쑤였다.유진우는 모른 척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어이, 이쁜이. 저런 나약한 놈이랑 술 마셔서 뭐 하겠어? 차라리 우리랑 한잔하지, 아주 즐겁게 해줄 테니 말이야!”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염보혁의 턱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이 손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염보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어여쁜 외모 탓에 남녀를 불문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처럼 대놓고 희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오, 이쁜이가 화를 내네?”수염 난 사내는 턱을 문지르며 비웃었다.“솔직히 말해서 화난 얼굴이 더 매력적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감탄스럽군.”그의 말에 뒤따르던 무리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유진우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이 사내는 제법 능숙하게 수작을 부렸다.염보혁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셋을 센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봐주지.”염보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본다고? 하하하!”수염 난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이거 제법 앙칼진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위층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우리를 손 봐줘, 어때?”“맞아, 맞아! 방도 넉넉하니 차례대로 너랑 놀아줄 수 있다고!”그의 동료들도 시시덕거리며 말을 보탰다.“셋.”염보혁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이쁜이, 괜히 버티지 말고 그냥 올라가자. 내가 아주 다정하게 대해줄 테니 말이야.”수염 난 사내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댔다.“둘.”염보혁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안아 올라가는 수밖에.”그가 손을
유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혁 씨가 이렇게까지 많은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제 생각엔 장일청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은데요.”용호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염보혁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다니, 이건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진우 씨께서 과찬해 주시는군요. 저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듣는 걸 좋아해서 호기심에 이런저런 소문을 알아본 것뿐입니다. 사실 별다른 능력은 없어요.”염보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진우 씨께서 무림대회에 참가하신다면 전 온 힘을 다해 진우 씨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보혁 씨,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전 그저 세상 구경이나 해볼 겸 참가하는 것뿐입니다. 우승 같은 건 감히 꿈도 꾸지 않아요. 애초에 제 실력으로 어떻게 그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진우 씨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염보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우 씨는 외모도 준수하고 기품 또한 비범하시죠. 멀리서 봐도 강렬한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비록 진우 씨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진우 씨는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닙니다!”“보혁 씨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평범한 출신에 보잘것없는 실력을 갖췄을 뿐입니다. 아마 실망할 겁니다.”“하하, 괜찮습니다. 커다란 황금 잉어가 어찌 작은 연못에서만 머물겠습니까? 바람과 구름을 만나면 반드시 용이 되어 날아오를 것입니다. 지금 진우 씨의 명성이 미미할지라도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하늘 높이 날아오를 날이 올 거라고!”염보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눈빛은 절대적인 믿음을 담고 있는 듯했다.유진우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뭐지? 분명 오늘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