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태는 얼굴이 사색이 된 채로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지금까지 수많은 풍파를 겪어온 그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쩔 바를 몰랐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뒤에 더 큰 ‘서프라이즈’ 가 숨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고? 아내의 외도보다 충격이 몇 배는 더 컸다.“진우 씨, 확... 확신해요?”손기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마지막 일말의 희망까지 다 버리진 않은 모양이다.“회장님, 듣기 거북하시겠지만 지금 몸 상태를 봐서는 오래전에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예요. 만약 못 믿으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봐도 돼요.”유진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젠 그마저도 손기태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비록 재산이 많긴 하지만 아내가 외도한데다가 아들까지 친아들이 아니라니... 이런 이중 충격은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진우 씨. 여기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러는데 우리 자리를 옮겨 얘기하는 건 어떨까요?”손기태가 무표정으로 말했다.“그래요.”유진우와 조선미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조 기사, 선미 씨랑 진우 씨를 먼저 시크릿 가든에 모셔다드려. 난 이따가 바로 갈게.”손기태가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네.”대답을 마친 운전기사는 유진우와 조선미를 밖에 세운 롤스로이스 자동차로 안내했다.두 사람이 떠난 후에야 손기태의 낯빛이 굳어졌다. 아들이 친아들인지 아닌지는 유전자 검사만 하면 모든 게 밝혀진다.아내의 외도까지는 용서할 수 있지만 남의 자식을 키운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오후 시크릿 가든.유진우와 조선미는 정원을 같이 거닐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했다. 두 사람 뒤로 몇몇 도우미들이 디저트와 음료를 들고 항시 대기했다.그들은 한 바퀴 쭉 둘러본 후에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선미 씨, 손 회장님께서 이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유진우가 불쑥 물었다. 만약 손 부인이 눈에 거슬리는 짓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들
커다란 가업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없다는 건 참으로 비참한 일이었다.“회장님,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칼에 찔려서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치료할 수 있어요. 몸이 다 회복되면 아들 하나가 아니라 열 명 낳는 것도 문제없어요.”유진우가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그게 정말입니까?”손기태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반년 동안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주요하게 그의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남자의 자존심 때문에 그 사실을 계속 숨겨왔었다. 그런 그가 다시 예전처럼 일어설 수 있다는데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회장님, 전 불가능한 일은 입 밖에 꺼내지 않습니다.”그러고는 단약 한 알을 꺼냈다.“이건 제가 제조한 우금환인데 막힌 혈도 뚫어주고 내상을 치료하는 데 아주 좋아요. 일단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네!”손기태는 두말없이 바로 우금환을 꿀꺽 삼켰다.우금환을 삼키자마자 따뜻한 기운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손기태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전에 계속 있었던 허리 통증도 많이 완화되는 것 같았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이 단약이 정말 대박인데요, 진우 씨?”몸속의 신기한 변화를 느끼며 손기태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순식간에 환골탈태한 기분이었다.전에는 유진우의 의술을 의심했었지만 이젠 완전히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아무리 명성이 자자한 명의든 교수든 유진우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회장님, 우금환을 사흘에 한 알 복용하시면 한 달 후에는 완치될 겁니다.”유진우가 약병 하나를 손기태에게 건넸다. 그 약병 안에 우금환이 가득 담겨있었다.“고마워요, 진우 씨.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손기태는 흥분한 나머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얼른 일어나세요, 회장님... 별거 아닌 일인데요, 뭐. 이러지 마세요.”유진우는 재빨리 그를 일으켜 세웠다.이 일은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손기태의 병을 치료해
그 시각 가든 응접실.“아빠, 회장님께서 우리한테 돈을 빌려주실까요?”여호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회장님은 통이 크시고 평소 선행을 좋아하시는 분이야. 게다가 우리 여씨 가문이랑 관계도 괜찮아서 돈을 빌리는 것쯤은 아무 문제 없을 거야.”여동남이 차를 마시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비록 여씨 가문이 예전보다는 많이 기울었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 년 먹을 것이 있다고 밖에 나가면 그래도 어느 정도 체면은 섰다.“우리 자금만 끊이지 않았어도 다른 사람한테 돈을 빌리지 않았어요. 이게 다 사업이 망한 탓이에요.”여호준이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얼마 전 그들은 비보를 전해 들었는데 그들과 손을 잡은 수많은 대표들이 갑자기 자금을 철수하기 시작했고 전에 얘기를 다 마쳤던 프로젝트마저도 전부 어그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가문 전체가 순식간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지금 거금을 투입하지 않으면 보름도 안 되어 여씨 가문이 망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손기태밖에 없다.“이 일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해. 투자자들이 갑자기 전부 자금을 철수했어. 아무래도 누군가 뒤에서 우리 여씨 가문을 상대로 손을 쓴 것 같아.”여동남이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간이 배 밖으로 나온 자식이 대체 누군데 감히 우리 여씨 가문을 건드려요?”여호준이 불같이 화를 내며 책상을 탁 쳤다.원래는 비연단의 처방전을 손에 넣은 후 자금을 투자하여 스스로 연구할 계획이었다. 일이 계획대로만 진행되었더라면 여씨 가문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아직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했어. 일단 자금부터 마련하고 고비를 넘긴 후에 그놈이 누군지 잡아내야지!”여동남의 두 눈에 싸늘함이 스쳐 지나갔다.“아빠, 우리 지금 자금이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대략 얼마 정도 필요해요?”여호준이 떠보듯 물었다.“적어도 6천억은 있어야 해!”여동남이 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그렇게나 많이요?”여호준의 낯빛이 확
그는 비연단의 처방전을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어야만 했다.“날 오해했군.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손기태가 싸늘하게 말했다.“네?”여동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방금 무슨 뜻이었어요?”“두 사람 오늘 나한테 돈 빌리러 왔지?”손기태는 그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한 채 되물었다. 그러자 여동남이 멋쩍게 웃었다.“우리 여씨 가문이 요즘 자금 문제가 생겨서 회장님께 부탁드리러 왔어요.”“얼마나 필요한데?”“대략 6천억이요.”“6천억?”손기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미안한데 그 돈 못 빌려줘.”“못 빌려준다고요?”여동남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6천억이면 회장님께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왜 못 빌려준다는 거죠?”“정확히 말하면 난 그 돈을 진우 씨한테 빌려줬어. 당신들이 빌리고 싶으면 진우 씨한테 부탁해.”손기태가 조롱 섞인 얼굴로 말했다.“네? 유진우 씨한테 빌려줬다고요?”그의 말에 두 부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6천억이나 되는 큰돈을 저 쓸모없는 유진우한테 빌려줬다고? 말도 안 돼!’“회장님, 지금 장난하시는 거 아니죠? 그 큰돈을 저 사람한테 빌려주셨다고요?”여동남이 두 눈을 부릅떴다.“그러게 말이에요, 회장님. 그 돈을 저 사람한테 빌려주면 저희는 어떡해요?”여호준도 경악하긴 마찬가지였다.“당신들이 어떡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손기태는 그들의 사정 따위 전혀 봐주지 않았다.“회장님,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잊었어요? 저런 사람한테 돈을 빌려줄지언정 우리한테는 빌려주지 않겠다니, 정말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우리 여씨 가문의 체면이 저 사람보다 못하단 말입니까?”여동남이 불만을 토로했다. 어쨌거나 여씨 가문은 명문가였다. 세력으로 보나 인맥으로 보나 유진우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주제가 못 되었다.바보가 아닌 이상 둘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다 알 것이다.“지금 이 자리에서 똑똑히 얘기하는데 난 당신들이랑 아무 친분이 없어. 내 돈을 내가 빌려주고 싶은 사람한테
“회장님, 유진우가 대체 뭐라고 저희 여씨 가문이랑 등을 돌리는 겁니까?”여동남의 낯빛이 말이 아니게 어두워졌다. 자신만만하게 왔다가 대차게 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솔직하게 얘기할게. 진우 씨는 내 은인이자 귀한 손님이야. 진우 씨와 껄끄러운 사이라면 나와도 껄끄러운 사이인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진우 씨한테 잘못했다고 사과하든지, 여씨 가문이 망하길 기다리든지 알아서 선택해.”손기태가 전에 없던 날카로운 기세로 무섭게 몰아붙였다.“지금 유진우 씨한테 사과하라고요? 말도 안 돼요!”여호준이 분노를 터뜨렸다. 여씨 가문 도련님이 어찌 저런 촌놈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단 말인가?“사과 못 하겠으면 꺼져! 당신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손기태가 그들을 대놓고 내쫓았다.“손 회장님! 세상사는 다 돌고 도는 법인데 사람을 이렇게 내쳐서는 안 되죠! 언젠가는 후회하는 날이 올 겁니다!”여호준이 이를 꽉 깨물고 한마디 내뱉고는 씩씩거리며 나가버렸다.“회장님, 우리 여씨 가문이랑 완전히 등을 돌리겠다 이거죠? 우리가 고작 6천억을 어디 가서 못 빌릴 것 같아요?”여동남도 그를 무섭게 째려보고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났다.“제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손기태가 코웃음을 쳤다.그가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한 마당에 남성 전체에서 누가 감히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겠는가?...집으로 돌아온 여씨네 부자는 여전히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손기태 오늘 약을 잘못 처먹었대요? 그런 놈 때문에 지금 우리랑 맞선다는 게 말이 돼요?”여호준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 자식 뒤에 아무래도 엄청난 조력자가 있는 것 같아.”여동남이 눈살을 찌푸리고 고민에 빠졌다.“조력자는 무슨, 한낱 기생오라비에 불과해요. 지금 조선미만 믿고 저렇게 나대는 거예요. 손기태도 아마 조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우리랑 등을 돌린 게 분명해요.”여호준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조씨 가문도 참 골칫덩어리야. 우리 여씨 가문의 자금이 끊긴 게 조씨 가문과
“아빠, 어떻게 됐어요? 우리가 이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요?”여호준이 떠보듯 물었다.“X발, 개 같은 것들. 평소 콩고물이라도 있을 땐 누구보다 빨리 나타나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우리가 곧 망하게 생기니까 전부 멀리 피하잖아. 배은망덕한 놈들!”여동남의 낯빛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여씨 가문의 가주가 이 지경으로 타락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아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예요. 그런 개보다도 못한 놈이랑은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요. 우리 꼭 이번 고비를 넘겨서 그놈들이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들어요!”여호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호준아, 아무래도 내 인맥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이젠 너밖에 없어.”여동남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아 참, 너 강천호의 딸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걔한테 연락해서 돈 좀 빌릴 수 있는지 알아봐봐.”“아... 그걸 까먹을 뻔했네요. 강능 갑부인 강천호의 딸이라면 6천억쯤은 별거 아닐 거예요. 지금 당장 전화해 볼게요.”여호준은 재빨리 휴대 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어머, 호준 도련님 아니에요? 오늘은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었나 봐요?”그녀의 한 맺힌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향란 씨도 참. 요즘 진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니까요. 시간이 나자마자 바로 향란 씨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요.”여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여자의 마음을 달래는 데는 그야말로 선수였다.“흥, 그래도 양심은 있네요. 말해봐요,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날 찾았어요?”강향란이 웃으며 물었다.“당연히 향란 씨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죠. 안 그러면 뭐겠어요? 하루만 못 봐도 그렇게 보고 싶더라니까요.”여호준이 입에 발린 소리를 술술 했다.“하하... 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요? 계속 쓸데없는 얘기를 할 거면 전화 끊어요.”“아니요, 끊지 말아요... 사실 작은 부탁이 있긴 있어요.”여호준이 목청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요즘 사업에 문
“여... 여보세요?”여호준은 휴대 전화를 귀에 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유진우 얘기만 했을 뿐인데 왜 고양이를 본 쥐처럼 이렇게 깜짝 놀라는 거지?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나?’여호준은 강향란이 유진우에게 뺨을 맞은 후로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사실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그리고 더 중요한 건 뺨을 맞은 다음에 복수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는 것이다.이 일은 강향란에게 있어서 치욕 중의 치욕이었고 평생 마음속에 박힌 두려움이 되고 말았다.강향란도 분통이 터진 건 사실이지만 유진우를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오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강씨 가문은 그 어떤 복수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유진우는 아주 식은 죽 먹기로 용 관장을 이긴 고수이다. 이런 사람이 한번 미쳐 날뛴다면 하룻밤 사이에 강씨 가문을 피바다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하여 강씨 가문은 어쩔 수 없이 줄곧 참고 있었던 것이었다.그리고 이 또한 유진우의 이름을 듣자마자 강향란이 두려움에 떤 원인이기도 했다.그녀는 또 맞을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호준아, 향란 씨 뭐래?”넋이 나간 아들의 모습에 여동남이 참다못해 먼저 물었다.“젠장, 유진우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는 돈을 못 빌려주겠대요.”여호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강씨 가문의 딸마저 그 자식을 두려워한다고? 설마 조씨 가문 때문이야?”여동남이 떠보듯 물었다.“그럴 가능성 있어요.”여호준이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이거 큰일이네...”여동남이 눈살을 찌푸렸다.“돈을 빌리지 못하면 여씨 가문은 얼마 못 버티고 망하게 돼. 정녕 그 유진우라는 놈한테 부탁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부탁? 부탁은 개뿔!”여호준이 분통을 터뜨렸다.“우리가 그 자식한테 고개를 숙인다는 게 말이 돼요? 정 안 되면 호되게 패버리면 돼요!”“호준아, 절대 흥분해서는 안 돼!”여동남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다.“유진우 뒤에
평안 의원.유진우가 한창 독서에 몰두하고 있던 그때 마이바흐 한 대가 의원 문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자 여동남이 선물을 들고 내렸다.“유진우 씨...”의원으로 들어오자마자 여동남은 웃으며 한껏 예의를 갖췄다. 전의 시건방진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죠?”유진우는 덤덤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오늘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진우 씨. 저희가 엄청난 분을 몰라뵙고 함부로 나댔어요. 넓은 아량으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요?”여동남이 먼저 사과를 건넸다. 유진우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조씨 가문이 뒤에서 도와줄 뿐만 아니라 손기태와 친분을 맺은 걸 보면 절대 일반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여 6천억을 빌리려면 반드시 그의 용서를 먼저 구해야 했다.“나 같은 조무래기가 어찌 감히 여씨 가문의 사과를 받겠어요.”유진우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진우 씨는 젊고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인재잖아요.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주세요.”여동남이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유진우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이를 악물고 털썩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진우 씨, 제가 이렇게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앞으로 진우 씨는 저희 여씨 가문의 은인이에요. 저희 산업의 3분의 1... 아니, 2분의 1을 사죄의 의미로 진우 씨한테 드릴게요.”그러고는 머리까지 조아렸다.여동남이 이 정도로 자신을 내려놓을 줄은 유진우도 생각지 못했다. 체면을 버리고 머리까지 조아리며 사과하는 걸 보니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윤아의 고양이를 죽인 건 어떻게 할 셈입니까?”유진우가 덤덤하게 물었다.“당연히 물어드려야죠! 열 마리든 백 마리든 기꺼이 배상하겠습니다.”여동남이 말했다.“코코는 이미 죽었어요. 아무리 배상해봤자 더는 코코가 아니에요.”옆에 있던 임윤아가 입을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
이 순간 유진우의 눈이 피를 뿜을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살기가 솟구쳤다.비록 예전에 아버지와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그동안 품었던 그 작은 분노마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단지 호룡각의 일을 완전히 해결한 후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 효도를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둘이 만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암살당해 돌아가셨다. 이 충격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창공!” 유진우가 갑자기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어 창공보검을 불러들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호룡각의 잔당들을 모조리 섬멸해야만 했다!“전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유진우가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손도운이 급히 그를 막아서며 침착하게 조언했다. “호룡각은 준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렇게 무모하게 뛰쳐나가신다면 복수는커녕 오히려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실 수 있습니다!”“비키세요!” 유진우의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창공검의 칼날을 손도운의 목에 바로 겨누었다. 예리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며 상처를 내자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전하! 저를 죽이시더라도 전 전하를 막아야만 합니다. 제가 어찌 전하께서 죽으러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 더 이상의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손도운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진우 앞을 가로막은 채 죽음도 불사하는 자세를 취했다.유진우는 이를 악물었고 그의 손에 든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초간의 대치 끝에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마침내 검을 내렸다.손도운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냉정해져야만 했다. 유만수가 죽었으니 왕부가 분명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이때
다른 처녀들도 모두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진심 어린 간청을 했다.이 광경을 본 유진우는 넋이 나갔다.노란 옷 처녀의 말은 그의 귀를 때리는 듯했다.지옥 같은 일을 겪고도 이 아이들이 자신이 아닌 천하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이런 원대한 뜻과 깨달음은 그조차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이청성이 말했듯, 이들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을 향하는 처녀들이었다.귀하고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누가 여자가 남자만 못하다 했는가?진정한 대의 앞에서 이 여자들이야말로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었다.이런 의로운 용사들이 있는데 어찌 서경이 부흥하지 않을까? 어찌 천하가 평안하지 않을까?“오빠, 결정해요. 받아주지 않으면 저 애들은 살아갈 희망조차 잃을 거예요.” 이청성이 진지하게 말했다.“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어요?” 유진우가 엄숙하게 물었다.“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모든 소녀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 허락하죠!”유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을 시작할 거예요. 견뎌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다면 편한 곳에서 평안히 살도록 해요.”“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의 소녀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소녀들도 따라 외쳤다.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성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네가 돌봐. 내일 저애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해.”“알겠어요.”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소녀들을 데리고 떠났다.일행이 막 나가자 손도운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그의 표정이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고 큰일이라도 난 듯했다.“전하! 큰일 났습니다!”유진우를 보자마자 손도운은 ‘쿵’하고 무릎을 꿇고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왕부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왕께서 자객의 암살로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요?”이 말을 듣자 유진우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
“오빠, 급한 건 알지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아가씨들은 지금 오빠만 믿고 있고 목숨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받아들이면 좋은 점이 많을 거예요. 예를 들어, 오빠가 외로울 때...”“농담하지 말고 요점이나 말해요!” 유진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솔직히 말할게요.”이청성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장혁 씨, 사실 이 처녀들은 보기 드문 인재예요. 제가 이미 선별했는데 모두 영리하고 의지가 강해요. 조금만 가르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예요.”“무슨 뜻이에요?” 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밀사의 중요성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여자 밀사는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장점이 있죠. 이 처녀들을 밀사로 키우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청성이 말했다.“말은 쉽지, 밀사 하나 키우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전 지금 제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든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그는 이 처녀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지, 이용당하거나 장기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충성심인데 그들은 이미 그걸 가지고 있어요. 장혁 씨가 그들을 구해줬고 장혁 씨의 빛이 그들의 어두운 세상을 비춰줬죠. 저애들은 장혁 씨를 신처럼 여기고 있어요.”“시간과 노력은 걱정하지 마요. 장혁 씨가 직접 가르칠 필요 없이 좋은 스승만 찾아주면 돼요. 장혁 씨 곁의 손도운이라면 아주 적합할 것 같은데요.” 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었다.“그건 청성 씨 생각이고 저 애들한테는 물어봤어요?” 유진우가 물었다.“당연히 물어봤죠. 모두 하겠대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이청성이 말했다.“불쌍한 사람들인데 그럴 필요까지야...” 유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장혁 씨, 어둠 속에 있어도 빛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세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발 저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