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를 잡을 필요도 없지. 오늘 밤이 딱이군!”전투 의지를 높이며 한비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사방에서 엄청난 양의 천지의 영기가 몰려와 그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갔다.그와 동시에 한비영의 기세는 더욱 상승했고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퍼져 나갔다.검은 눈동자는 하얗게 변하고 머리카락은 뻣뻣하게 서며 옷자락이 강한 기운에 의해 펄럭였다.그의 주변에는 번개와 천둥이 울리며 지지직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다음 순간, 한비영은 발이 땅에서 떨어지더니 공중으로 떠올랐다.신과도 같고 마신과도 같은 그 모습은 위풍당당하여 가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 같았다.아직 기술을 시전하지 않았음에도 그 강력한 압도감은 주변 사람들의 숨조차 막히게 만들었다.그 순간 모두는 그를 향해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한비영은 이미 인간이 아닌 무소불능한 신과 같은 존재로 보였다.“저건 천신사상결의 최강 필살기, 전신의 분노다! 모두 멀리 떨어져. 다칠 수 있어!”누군가가 경악하며 외치자 주위의 사람들이 황급히 거리를 두며 물러났다.사실 경고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모두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앞의 세 가지 기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번 공격은 훨씬 강력했다.아직 시전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며 공포가 솟구쳤으니 말이다.“도련님께서 드디어 필살기를 꺼내시는군. 이번에야말로 유진우는 산산조각이 나겠어!”봉연주는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죽여버려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안세리는 이를 악물고 독한 표정을 지었다.유진우가 뛰어날수록 그녀들에게 위협이 커지는 법이다.오늘 밤 그가 살아남으면 앞으로 큰 재앙이 될 게 뻔하니 그들은 한비영이 유진우를 완전히 처단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멈추시오!그때, 갑작스럽게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이어서 금빛으로 빛나는 화살 하나가 어둠 속에서 번쩍이며 한비영을 향해 순식간에 날아들었다.“휘익!”금빛 화살은 공기를 찢으며 긴 금색 잔상을 남겼다. 대단
“오 마이 갓! 전쟁의 신 조무진 아냐?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지?”“헐! 진짜 전생의 신이야! 이번에 제대로 볼거리가 생겼군!”“어머나! 전쟁의 신 진짜 잘생겼다! TV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멋져!”조무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특히 젊은 여성들은 두 눈이 반짝이며 얼굴에 가득 사랑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용국에는 네 명의 군신이 있지만 그중 전쟁의 신은 단 한명뿐이었다.전쟁의 신이라 함은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인물로 조무진은 그 이름에 걸맞은 인물이었다.그는 용맹할 뿐만 아니라 지략도 뛰어나며 무엇보다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외모까지 갖추고 있었다.인기도 면에서 조무진은 용국에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 대중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한비영, 그만하지. 밤늦게 집에 가서 푹 자는 게 낫지 않나? 여기서 싸움질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조무진은 담담하게 말했다.“당신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나 해?”한비영이 턱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누군지 중요한가? 천재의 발아래에선 모두 규칙을 따라야 해. 그리고 너희는 이미 충분히 소란을 피웠어. 이 이상 계속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다.”조무진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네 말투를 보니 이미 알고 있는 듯하군.”한비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곤 곧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여기까지 온 건 유장혁을 돕기 위해서인 것 같군. 그렇지만 오늘 일이 그렇게 쉽게 묻힐 거라 생각하나?”“한비영 너는 무림인이잖아. 매일 술 마시고 의협심을 즐기는 게 좋지 않겠어? 여기에 얽힐 필요는 없잖아.”조무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내가 무림인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우리 세계는 오직 실력으로 존중받는 곳이라는 것도 알겠지.”한비영은 당당하게 외쳤다.“오랜 세월 동안 나는 백전백승이었고 적수를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외롭기도 하지. 그래서 나는 지금 강한 상대가 필요하다. 유장혁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상대지. 유장혁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겨우 기회를 얻었는데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조무진, 너는 세상을 뒤흔드는 전쟁의 신이잖아. 이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며 상대를 제압하려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한비영이 일부러 자극했다.“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 너희는 1대1을 즐기지만 우리는 단체 싸움에 익숙하지. 그러니 우리 방식도 좀 존중해 주는 게 어때?”조무진은 여유 있게 말했다.“참...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한비영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무도에 대한 기본 예의조차 지키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그럴듯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됐고 쓸데없는 말은 그만해라. 싸울 거면 싸우고 아니면 가라. 여자애처럼 망설이는 꼴은 보고 싶지 않군.”조무진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이 말에 한비영은 분통이 터졌고 이를 악물며 참고 있었다.말로 다투다가는 자신이 더 불리해질 거란 걸 알기에 이 이상 시간 끌어봤자 득이 될 게 없었다.지금 상황으로는 잠시 물러나는 게 최선이었다.“조무진, 오늘 일은 기억해 두겠어. 하지만 너무 기뻐하지 마라. 네가 나타남으로써 유장혁의 정체는 오히려 더 분명해졌어. 잘 생각해봐라. 그럼 이만!”한비영은 이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사라졌다.조무진은 유진우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보였다.한비영의 말대로 유진우의 정체가 더는 숨길 수 없게 된 것이다.내성에서 벌어진 일이 밤새 연경 전체에 퍼질 것이고 조씨 가문의 영향력으로도 완벽히 숨기기는 어려울 터였다.억지로 막으려 할수록 오히려 의심만 키울 뿐이었다.“괜찮아. 흘러가는 대로 두자.”유진우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연경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다.언젠가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잠시 피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었다.이제는 정면으로 맞설 때가 온 것이다.“세리 씨,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되죠?”사람들 속에서 봉연주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한
“응?”유진우의 차가운 미소를 보며 봉연주는 온몸이 떨려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정신을 차린 뒤, 서둘러 애원하듯 말했다.“유... 유진우, 말로 해결해. 이전 일들은 오해였어. 사정이 있으면 우리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할 수 있잖아.”“내가 너희를 살려줘야 할 이유를 대봐.”유진우가 천천히 다가오며 눈에 살기를 띄웠다.“이유? 이유라면... 우리가 살아 있는 게 너에게도 이득이 될 테니까!”봉연주는 재빨리 지혜를 발휘해 말했다.“우리의 재산 절반을 원한다고 했잖아? 네가 원했던 조건을 받아들일게. 우리를 살려만 준다면 어떤 조건이든 따를 거야.”“이미 늦었어.”유진우는 고개를 저었다.“조금이라도 일찍 이 정도 각오를 했더라면 한 번쯤은 살려줄까 생각해 봤겠지. 하지만 지금은 너희가 얼마나 고집불통이고 죽어도 마땅한 자들인지 깨달았어.”“유진우, 우리가 잘못했어! 우린 지금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고!”봉연주는 당황해서 안세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도와달라고 속삭였다.“세리 씨, 뭐라도 좀 말해봐요. 이러다간 우리 다 끝장이에요!”“뭐가 그렇게 겁나요? 정말 못났네요.”이 순간 안세리는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며 강하게 말했다.“유진우, 네가 나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해도 나는 절대 그런 굴욕스러운 일은 참을 수 없어! 나는 당당한 명문가의 자손이야. 너 같은 천민에게 머리를 숙일 수는 없다고!”이 말에 봉연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쳤어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요? 죽고 싶지 않은 거 맞아요?”“흥! 우리가 빌어본들 유진우가 마음을 바꿀 것 같아요? 꿈 깨요!”안세리는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우리가 겁먹을수록 유진우는 더 기고만장해질 테니 저 자식의 오만함을 부추겨선 안 돼요!”“그렇게 자극하다가 유진우가 화라도 내면 어쩌려고 그래요?”봉연주는 울상이 되어 말했다.유진우의 힘을 방금 직접 목격했기에 그의 강함을 실감하고 있었다.천재 한비영조차 손을 못 대고 물러난 걸 보면 유진우의 능력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자각 못 하네.”유진우는 피식 코웃음 쳤다.“네 생각에는 내가 문관옥을 두려워할 것 같아? 진짜 두려워했다면 내가 어떻게 문한성까지 죽였겠어?”이 말에 안세리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하니 굳어버렸다.그녀는 거의 잊고 있었다. 유진우는 문한성조차 죽일 만큼 대담했으니 자신들이라 해서 예외일 리 없었다.‘완전히 미친놈 아니야?’“그만하지. 이제 너희랑 말장난할 기력도 없다. 감옥에 가면 자연스럽게 다 불게 될 거야.”유진우가 무심하게 말했다.“끌고 가.”조무진이 손짓을 하자 두 명의 여자 부하들이 안세리와 봉연주를 끌고 차에 태우려 했다.“안 돼! 난 감옥에 가기 싫어!”“유진우, 제발 날 놔줘! 내가 정말 잘못했어. 앞으로는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100% 네 말에만 따를게. 부탁이야!”봉연주는 진심으로 두려워하며 울부짖었다.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로 말이다.봉씨 가문은 이미 몰락해 더는 그녀를 지켜줄 수도 없었다. 감옥에 가는 순간, 그녀는 고통 속에서 생지옥을 경험할 것이 분명했다.유진우가 반응하지 않자 봉연주는 안세리를 향해 소리쳤다.“안세리! 너 뭐해? 빨리 사과해! 죽고 싶은 건 알겠지만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라고!”그제야 안세리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렸다.이제는 모든 걸 잃었고 조씨 가문의 도움을 받은 유진우와 싸우기엔 역부족이었다.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알았어... 다 말할게!”“유진우, 제발... 우리를 놓아주기만 한다면 알고 싶은 건 뭐든 다 말해줄게!”안세리는 마치 시들어버린 식물처럼 완전히 기가 꺾인 채로 말했다.“너는 나와 협상할 자격이 없어. 지금부터 너희가 음모를 꾸민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말해. 그리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지.”유진우가 냉정하게 말했다.“알았어... 다 말할게.”그렇게 안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던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불빛이 반짝였다.곧이어 퍽 하는
바닥에 쓰러진 두 구의 시신을 바라보며 유진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무도 고수라면 예민한 오감을 지니고 있어 공격이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해 피하거나 막는 행동을 취하기 마련이다.하지만 조금 전의 두 발은 너무 은밀했고 유진우에게 직접적인 살의를 품지 않았기에 미리 감지하지 못했다.안세리와 봉연주의 생사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유진우의 면전에서 사람을 죽이고 증거를 없애려 하다니, 이것은 대놓고 도발하는 꼴이었다.유진우는 고개를 들어 총알이 날아온 위치를 바라봤다.그곳은 시야가 탁 트인 높은 곳이었지만 지금은 이미 사람이 사라진 상태였다.“빨리! 현장을 즉시 봉쇄하고 반드시 범인을 잡아라!”상황을 파악한 뒤, 조무진은 결단력 있게 명령을 내렸다.“그럴 필요 없어. 범인은 이미 도망갔어.”유진우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안세리와 봉연주는 죽어도 쌌고 굳이 사람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이 너무 빨리 죽어버려서 정보도 못 얻었고 속도 풀지 못했다는 점이다.약간 찜찜했다.“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 거야?”조무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확실하진 않지만 대충 짐작은 가.”유진우는 담담히 말했다.“내 추측이 맞다면 범인은 문관옥의 사람일 거야.”“문관옥?”그러자 조무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이상하네. 그 사람이 왜 저들을 죽였을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인데 암살할 가치가 있을까?”“아마 나와 관련이 있을 거야.”유진우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내 추측이 맞다면 문관옥은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이 두 여자를 이용해 나를 위한 함정을 파고 한비영의 손을 빌려 증거를 없애려 했을 거야.”이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문관옥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 평범한 사람을 처리하는 데 복잡한 방식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명령 한마디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간접적인 방법을 쓴 건 분명히 무언가 꺼리는 것이 있었다는 증거다.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당연하지.”유진우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십 년 전의 진실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날 수 없어.”“좋아! 형이 그렇게 결심했다면 나도 무조건 지원할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조무진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안심해, 사양할 생각 없으니까.”그러자 유진우도 살짝 웃었다.“때 되면 힘든 일은 전부 너에게 맡길 테니 기대해.”“말이 좀 그렇네. 내가 힘든 일만 도맡아 하는 사람이야?”조무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능력 있는 사람이 일을 많이 해야지. 너는 세상에 이름을 떨친 전쟁의 신인데 못 해낼 일이 뭐가 있겠어?”유진우는 능청스럽게 칭찬했다.“뭐, 그렇긴 하지.”그 말에 조무진도 자부심에 찬 모습으로 말했다.“너도 천재긴 하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나만 못하지.”“응, 맞지, 맞아.”유진우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대충 맞장구쳤다.“이 일은 그만두고 일단 시신을 처리해 줘. 난 먼저 갈게.”그는 조무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너희들 봤지? 대단한 유씨 가문의 천재도 결국 나한테 부탁한다 이거야.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지?”조무진은 뒤에 있는 두 여자 부하를 바라보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네... 대단하십니다.”두 여자 부하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조무진이 무슨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게 아닌가 싶었다.남의 일을 대신 해주고도 어찌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지체 높고 고귀한 전쟁의 신이라 불리던 사람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다....안세리와 봉연주의 죽음은 유진우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조무진과 작별한 후, 그는 바로 별장으로 돌아왔다.문관옥이 또 다른 술책을 꾸며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진우 형님, 돌아오셨군요?”별장 입구에 들어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왕현이 다가오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무슨 일이에요?”유진
“이청성 씨였군요.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뒤, 유진우는 금세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이 늦은 밤에 누구의 부탁을 받고 오신 건가요?”그는 이청성을 알지 못했지만 미인도에서 반쪽 옆모습만 본 적이 있기에 그녀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선생님께서 편지를 보시면 자연스럽게 이해하실 겁니다.”이청성은 설명 없이 소매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유진우에게 두 손으로 건넸다.“고맙습니다.”유진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편지를 받아 펼쳐 보았다.편지 내용에 그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편지에는 서명이나 인사도 없이 단 한 줄의 문구만 적혀 있었다.[임강왕 이만기, 현재 진산의 서하사에 거처 중, 법명은 각진.]글을 보는 순간, 유진우는 이 편지가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단번에 알아챘다.예상보다 신속하게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었다.‘약속한 삼일이 정확히 지켜졌다니... 좀 놀라운 속도인데?’“그분께 감사 인사 전해 주세요.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요. 나중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말씀해 주라 하세요.”곧 유진우는 손가락을 튕겨 봉투를 가루로 만들어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편지 외에 고모께서 한 마디 더 전하라고 하셨습니다.”이청성의 맑은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최근 궁 안에서 이변이 일어났으니 더 이상 조사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거라고요.”“경고 고맙습니다. 염두에 두겠습니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까스로 잡은 실마리를 이렇게 쉽게 놓칠 수는 없었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마지막 단계가 남았을 뿐이었다.“유장혁 씨, 세상은 변하고 십 년 전의 일이 십 년 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운명의 섭리입니다.”이청성은 나지막이 말했다.“운명이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전 운명 같은 건 믿지 않아요. 인간의 의지로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믿죠. 결과가 어찌 되었든
“아니에요?”유장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용호산은 여태껏 무림인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무관심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서태양이 말했다.인재를 선발해 위상을 높이려고 진무사가 나섰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하지만 용호산은 전혀 관계가 없지 않은가?“그럼 무슨 의도인데요?”유장미가 되물었다.“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궁금하거든?”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서태양은 어깨를 으쓱했다.“보혁 씨는 내막에 훤하니까 화두를 꺼낸 거겠죠?”유이슬이 시선을 돌렸다.“내막까지는 아니지만 주워들은 소식이 몇 가지 있긴 해요.”염보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로는 용호산 뒷산의 금지구역에 최근 신비로운 보물이 나타났는데 향후 100년 동안 무림인들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요.”“무슨 보물이 그렇게 대단해요?”유장미가 깜짝 놀랐다.유이슬과 서태양도 예상치 못한 듯 충격을 금치 못했다.무림인들의 흥망성쇠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만약 제 추측이 맞는다면 용원의 기와 관련된 보물일 거예요.”염보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순간, 유진우는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이내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용원의 기? 그게 뭔데요?”유장미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용맥의 정수이기도 하죠.”유이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며칠 전 호룡각이 와해하면서 지하 용맥이 다섯 개의 용원의 기로 변해 세상에 뿔뿔이 흩어졌어. 소문에 의하면 용원의 기를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되어 승승장구한다고 해.”호룡각이 무너지고 용맥이 파괴된 일이 워낙 큰 이슈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진짜요?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있어요?”유장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서에서 관련된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용원의 기를 얻은 자들은 세상을 주름잡는 수장이거나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었어.”유이슬이 한마디 보탰다.“맞아요.”염보혁이 대
유진우는 옆에 있는 염보혁을 흘깃 쳐다보았고, 속으로 상대방이 아무리 예뻐도 남자를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쿨럭!”염보혁은 사레가 들린 나머지 연신 기침하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슬 씨, 지금 절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네요.”“당연히 칭찬하는 거죠. 그런 얼굴을 보고도 어떤 남자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어요?”유이슬이 정색하며 말했다.“네?”염보혁은 말문이 막혔다.설령 사실일지언정 어찌 면전에서 대놓고 말할 수 있지?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정 믿기 어려우면 태양한테 물어봐요.”유이슬이 문득 말했다.한편, 서태양은 염보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시선을 돌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싶었다.“제가요?”서태양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선배, 장난하지 마세요. 저랑 무슨 상관이죠?”“뭔가 냄새가 나는데요?”유장미가 눈썹을 까딱하더니 눈알을 굴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설마 보혁 씨한테 진짜 반한 건 아니죠?”“이... 계집애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서태양이 펄쩍 뛰면서 얼굴이 벌게진 채 고래고래 외쳤다.“남자끼리 엮일 리가 없잖아.”“침착해요. 단지 농담했을 뿐이에요.”유장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게다가 남남 커플이 진짜 사랑이죠. 어차피 안 될 건 없잖아요. 만약 사귈 생각이 있다면 진심으로 축복해줄게요. 하하하!”“입만 열면 헛소리 하네.”서태양은 짐짓 화가 난 듯 혼내려는 액션을 취했다.유장미는 잽싸게 유이슬의 등 뒤로 숨어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산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당사자인 염보혁은 말문을 잃었다.더욱이 유장미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를 흘끔거리는 서태양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몰래 훔쳐보는 탓에 괜히 기분이 세했다.“진우 씨, 이슬 씨, 다들 용호산은 처음이죠? 제가 구경 좀 시켜드릴까요? 주변에 뭐 있는지 소개해줄게요.”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염
술이 몇 잔 오가자 서서히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이슬 씨, 방금 검종의 제자라고 하시던데 무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용호산에 오른 건가요?”염보혁이 넌지시 물었다.“그런 셈이죠.”유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성격이 무심한 편이라 말주변이 딱히 없었다.“사실 저희는 스승님의 명을 받고 찾아왔어요.”상대적으로 외향적인 유장미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노천사가 용호산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거든요. 검종 뿐만 아니라 천하회, 주술교를 포함한 파벌에서 최정예 제자들을 파견해 출전할 예정이에요.”“그럼 검종에서는 세 분이 참석하는 건가요?”염보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요.”유장미가 고개를 저었다.“저희는 단지 구경하러 왔을 뿐,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는 따로 있어요.”그녀와 서태양은 선천 후기에 속했고, 유이슬은 실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반보 마스터에 불과했다.어찌 됐든 천교에 비하면 열세에 처하는지라 검종을 대표해서 출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따로 있다니? 설마 홍군림이에요?”염보혁의 눈썹이 까닥했다.“그건 저도 잘 몰라요.”유장미가 생긋 웃었다.“워낙 제멋대로에 신출귀몰하는 사람이라 이번 무림대회에 참가할지 아무도 몰라요. 만약 홍 선배가 진짜 출전한다면 우승은 우리 검종이 차지할 거예요.”홍군림은 천교 랭킹의 1위에 올랐을뿐더러 어린 나이에 경천 랭킹에 진입한 검종의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만 성격이 까칠하고 독불장군이라 종주를 제외하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장미야, 그건 네 생각이고.”이때 유이슬이 입을 열었다.“홍 선배가 실력이 뛰어나고 검종의 천재로서 일반 무사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능력자가 한 명 더 있잖아.”“누구요?”유장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장혁.”유이슬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홍 선배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요?”유장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막상막하야. 천교
“네?”염보혁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특히 잘 보이기 급급했던 서태양은 굳은 얼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허공에 손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럴 수가?방금 목숨 걸고 구하려던 사람이 남자였다니?“남자...? 농담이죠?”붉은 옷 소녀가 염보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경국지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인이 대체 어디를 봐서 남자란 말인가?푸른 옷 여인은 입만 벙긋했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흡혈파 망나니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한테 집적거렸다니?취향 한번 독특했다.“아니요. 진짜 남자예요.”염보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밖에 나가면 여자로 오해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붉은 옷 소녀가 말을 아꼈다.“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염보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해탈한 듯 말했다.“아쉽네요.”붉은 옷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본인이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선배? 왜 그래요? 괜찮아요?”그녀는 아직도 넋을 잃은 서태양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어깨를 툭 쳤다.“응? 아, 괜찮아.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이야.”서태양은 꿈에서 깨어난 듯 금세 정신을 차렸다.다만 눈빛만큼은 남자한테서 떠나지 않았다.이렇게 요염한 얼굴이 사내란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그야말로 재능 낭비이지 않은가?“저는 염보혁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염보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유이슬이에요.”푸른 옷 여인이 대답했다.“저는 유장미라고 해요.”붉은 옷 소녀가 활짝 웃었다.비록 남자이지만 미모에 저절로 눈이 갔다.“서태양입니다.”서태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죠?”염보혁은 손을 내밀더니 소개를 이어갔다.“이쪽은 유진우 씨, 그리고 두 분은 호위무사인...”“춘화와 추월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수염 난 사내의 몸에 피투성이 상처가 생겼다.눈 깜짝할 사이에 연신 검에 찔린 탓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비록 수염 난 사내가 힘은 더 셌지만 기교에서는 한참 못 미쳤다.여자의 화려한 검술은 감탄을 자아냈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악!”수염 난 사내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사지가 부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했다.온몸은 피가 흥건했고 상처로 가득했다. 비록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형님!”패배한 우두머리를 보자 흡혈파 제자들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항상 위풍당당하고 기세등등했던 수장이 이런 몰골을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젠장! 감히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저년을 없애버려!”흡혈파 제자들이 고래고래 외치며 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여자를 덮쳤다.“무용지물이야.”푸른 옷 여인은 콧방귀를 뀌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었다.얼마 안 되어 흡혈파 제자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채 선혈이 낭자했다.“역시 대단하세요!”눈앞의 광경에 붉은 옷 소녀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망나니 따위가 감히 검종에게 대들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서태양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뭐... 뭐라고? 너희들이 검종 제자였어?”흡혈파 제자들은 안색이 돌변하더니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검종은 무림인들의 세계에서 3대 문파 중 하나로 천하회와 주술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비록 제자들이 많지 않았지만 뛰어난 인재들밖에 없다.특히 검종의 홍군림은 어린 나이에 천교 랭킹 1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경천 랭킹에 진입하여 세계 10위의 강자가 되었다.경천 랭킹 10위권에 검종 제자가 무려 2명이나 있는데 압도적인 실력으로 3대 파벌의 수장 자리를 거머쥐었다.여기서 검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이제야
“윽!”서태양은 이를 악물고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온 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이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어깨를 짓누른 흡혈검을 떼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힘이 점점 더 가해졌고 무릎이 닿은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작 이런 실력으로 감히 우리 흡혈파한테 덤비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수염 난 사내가 냉소를 지었다.“형님! 멋져요.”“역시 대단하세요.”부하들이 질세라 감탄했다.북쪽에서 흡혈파라고 하면 꽤 이름 있는 큰 파벌인지라 애송이 같은 놈이 도발할 만한 게 아니었다.“감히 내 앞에서 영웅 행세해? 넌 오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야. 교훈 삼아 사지를 부러뜨려줄게!”수염 난 사내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흡혈검을 들어 올려 서태양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챙!검이 닿기 직전 청색 보검이 불쑥 나타나 허공에서 공격을 막아냈다.“응?”수염 난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푸른 옷 여인이 보검을 들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선배?”서태양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제야 한숨 돌렸다.조금만 늦었더라도 오른손을 잃어버렸을 텐데 그나마 선배가 제때 도움을 줘서 천만다행이었다.“괜히 참견하지 마.”수염 난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우리 후배한테 손을 대는 순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여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맞아! 너희들 같은 망나니는 벌을 받아 마땅하지.”이때, 붉은 옷 소녀가 검을 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언니, 제가 도와줄게요.”“아니야. 넌 태양이랑 지켜보고 있어. 이런 놈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푸른 옷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수염 난 사내가 히죽 웃었다.“그런 왜소한 몸으로 오빠의 검을 어찌 막으려고? 차라리 무기는 내려놓고 침대에서 겨뤄보는 건 어때?”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부하들이 폭소를 터뜨렸다.곧이어 음흉한 시선으로 여자를 훑으며 멋대로 평가하
서태양이 움직이자 수염 난 사내의 뒤에서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두 명이 튀어나왔다.두 사람은 무기로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몸체는 강한 피비린내와 함께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는 칼날이 오랫동안 선혈에 노출된 결과였다.무림인들의 세계에서는 흡혈검이라고 불렀다.다만 아쉽게도 그들이 지닌 검은 아직 미성숙 단계였고 기세가 한창 부족했다.챙! 챙!서태양이 먼저 검을 빼 들고 혼자서 두 명의 사내와 대결을 벌였다.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맞서 싸웠지만 힘만 강했을 뿐 행동이 굼뜬 편이었다.공격할 때마다 동작이 다소 어설펐다.반면, 서태양은 누가 봐도 고수의 가르침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스피드, 힘,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느 하나 뒤처진 데 없었다.세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는 순간 실력 차이가 현저했고, 서태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내를 쓰러뜨렸다.그리고 응징할 겸 각자의 다리에 검을 관통했다.“흥! 고작 이런 실력으로 우쭐거려? 제 주제도 모르고.”서태양은 장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좋아! 잘했어!”승리를 거머쥔 서태양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비록 나서서 싸울 용기는 없었지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그래도 실력은 꽤 있나 보네? 어쩐지 참견하더라니.”수염 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고 음침한 목소리로 협박했다.“하지만 오늘 임자를 만났지. 흡혈파를 마주친 이상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흡혈파는 무슨, 들어보지도 못했구먼.”서태양의 표정은 기고만장했다.“하! 괜찮아. 네 피를 전부 흡수하고 나면 우리가 왜 흡혈파라고 불리는지 알 거야.”수염 난 사내가 이죽거리더니 두말없이 공격을 개시했다.그가 발을 내딛자마자 맹렬한 기세가 솟구쳤고, 손에 든 흡혈검은 핏빛을 뿜어내며 곧장 서태양을 덮쳤다.앞서 상대했던 부하들과 달리 수염 난 사내의 흡혈검은 살기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쉽게 화를 부르는 법이다.염보혁은 남자였지만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요염한 얼굴을 지녔다.길을 나서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지금처럼 깡패 무리와 마주할 때면 번번이 시비에 휘말리기 일쑤였다.유진우는 모른 척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어이, 이쁜이. 저런 나약한 놈이랑 술 마셔서 뭐 하겠어? 차라리 우리랑 한잔하지, 아주 즐겁게 해줄 테니 말이야!”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염보혁의 턱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이 손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염보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어여쁜 외모 탓에 남녀를 불문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처럼 대놓고 희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오, 이쁜이가 화를 내네?”수염 난 사내는 턱을 문지르며 비웃었다.“솔직히 말해서 화난 얼굴이 더 매력적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감탄스럽군.”그의 말에 뒤따르던 무리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유진우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이 사내는 제법 능숙하게 수작을 부렸다.염보혁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셋을 센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봐주지.”염보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본다고? 하하하!”수염 난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이거 제법 앙칼진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위층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우리를 손 봐줘, 어때?”“맞아, 맞아! 방도 넉넉하니 차례대로 너랑 놀아줄 수 있다고!”그의 동료들도 시시덕거리며 말을 보탰다.“셋.”염보혁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이쁜이, 괜히 버티지 말고 그냥 올라가자. 내가 아주 다정하게 대해줄 테니 말이야.”수염 난 사내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댔다.“둘.”염보혁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안아 올라가는 수밖에.”그가 손을
유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혁 씨가 이렇게까지 많은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제 생각엔 장일청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은데요.”용호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염보혁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다니, 이건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진우 씨께서 과찬해 주시는군요. 저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듣는 걸 좋아해서 호기심에 이런저런 소문을 알아본 것뿐입니다. 사실 별다른 능력은 없어요.”염보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진우 씨께서 무림대회에 참가하신다면 전 온 힘을 다해 진우 씨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보혁 씨,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전 그저 세상 구경이나 해볼 겸 참가하는 것뿐입니다. 우승 같은 건 감히 꿈도 꾸지 않아요. 애초에 제 실력으로 어떻게 그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진우 씨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염보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우 씨는 외모도 준수하고 기품 또한 비범하시죠. 멀리서 봐도 강렬한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비록 진우 씨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진우 씨는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닙니다!”“보혁 씨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평범한 출신에 보잘것없는 실력을 갖췄을 뿐입니다. 아마 실망할 겁니다.”“하하, 괜찮습니다. 커다란 황금 잉어가 어찌 작은 연못에서만 머물겠습니까? 바람과 구름을 만나면 반드시 용이 되어 날아오를 것입니다. 지금 진우 씨의 명성이 미미할지라도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하늘 높이 날아오를 날이 올 거라고!”염보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눈빛은 절대적인 믿음을 담고 있는 듯했다.유진우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뭐지? 분명 오늘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