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혁 씨가 그곳에 가겠다고 한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이 물건을 받아주길 바랍니다.”이청성은 이렇게 말하며 갑자기 주머니에서 금빛 부적을 꺼내어 두 손으로 유진우에게 건넸다.부적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였고 특별한 에너지가 느껴지진 않았다.하지만 유진우는 그 부적에서 묘하게 신비롭고 깊은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려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이건 제가 구한 호신 부적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유장혁 씨가 재난을 피할 수 있게 도와줄지도 몰라요.”이청성이 설명했다.“호신 부적이요?”유진우는 약간의 호기심이 담긴 눈빛으로 물었다.“서로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왜 저를 도와주는 건가요?”“유장혁 씨는 죽어선 안 돼요. 적어도 지금은.”이청성의 목소리는 진지했다.유장혁의 목숨은 귀중하고 용국의 국운과 연결되어 있어 그가 연경에서 죽게 된다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었다.이청성은 그런 사태를 막고 싶었고 그를 도와 이 위기를 넘기려 했다. 그것이 운명을 보는 사람으로서의 그녀의 책임이었다.“이청성 씨의 대의에 감사드립니다.”유진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서슴없이 호신 부적을 받아들었다.조금 전의 대화를 통해 그는 이청성의 진짜 신분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아마 그녀는 친제감 소속일 가능성이 컸다.친제감은 용국에서 매우 신비로운 부서로 그곳의 사람들은 하늘의 별자리부터 지리까지 두루 알고 있으며 예언과 점술로 국운을 예측할 수 있다.능력이 뛰어난 자는 하늘을 날고 요괴를 물리칠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다만 친제감은 평소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고 나라의 안위에 관한 일에만 개입하는 것으로 유명했다.“제가 할 말은 다 했고 할 일도 다 했으니 이제는 유장혁 씨가 깊이 생각해볼 때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호신 부적을 건네고 나서 이청성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단호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인간의 일은 다 했으니 결과는 하늘에 맡길 뿐이었다. 결과가 무엇이 될지는 그
밤은 금세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세면을 마친 유진우는 옷을 갈아입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형님, 이번 길이 험난할 텐데 제가 같이 가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야 서로 보탬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왕현은 어깨에 검을 멘 채로 방에서 달려 나왔다.비록 실력은 부족하지만 유진우를 위해 망을 봐주고 지키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었다.“괜찮아요. 왕현 씨가 할 일은 집에서 잘 머무르면서 아저씨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에요.”유진우는 왕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기억해요. 무슨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면 아저씨와 함께 바로 떠나야 해요. 절대로 위험을 감수하면 안 됩니다.”“알겠습니다!”왕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저씨의 안전을 지킬 것입니다!”“그런 불길한 말은 하지 마요. 난 그저 잠시 다녀오는 것뿐이니 잠깐 주의만 하면 돼요. 그럼 다녀올게요.”유진우는 이렇게 가볍게 인사를 남기고 혼자서 문을 나섰다.진산은 외곽의 외진 지역에 위치해 있어 차로 약 두 시간가량 걸렸다.사람의 발길이 드문 탓에 이름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진산 위에 있는 서하사는 더욱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장소였다.이청성의 도움 없이는 유진우도 한때 권세를 떨쳤던 임강왕이 작은 사찰에서 불경을 외며 은둔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그러나 어떤 일은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유진우가 서하사로 향하는 동안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가 연경 안에서 일기 시작했다.각 세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이 시각, 옥면 산장 서재 안에서는 문관옥이 군사 전략을 연구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어르신!”이때, 한 심복이 급히 뛰어 들어와 정중하게 보고했다.“방금 급히 전해진 밀서가 도착했습니다. 당장 확인하셔야 할 듯합니다.”“응? 가져와 봐라.”문관옥은 한 손으로 봉투를 받아 펼쳐 보았고 이내 그 내용에 눈빛이 반짝였다.“유장혁이 진산 서하사로 향한다. 강력히 저지하되 필요시 가차 없이 처단하라!”문관옥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한비영은 천천히 눈을 뜨고 물었다.“누구지?”“나다.”곧 흰 옷을 입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얀 노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노인은 학처럼 곧은 자세에 자연스러운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로 온몸에 속세를 벗어난 듯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이 인물은 바로 천하회의 종주, 소명이었다!“스승님?”한비영은 순간 표정을 가다듬고 급히 일어섰다.“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그저 너를 보러 왔다.”소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비영아, 요즘 수련의 진전은 어떠냐?”“이미 마스터 대원만에 도달하여 대 마스터까지는 한 걸음 남았습니다.”한비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지금의 실력으로 천신사상결을 사용한다면 일반 대 마스터와 맞설 수 있을 정도였다.“훌륭하구나. 젊은 나이에 이 경지에 도달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라. 나도 그때 너만큼은 못했지.”소명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과찬이십니다. 스승님께서 정성껏 가르쳐 주신 덕분에 제가 오늘날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겁니다.”한비영은 고개를 숙였다.“겸손해할 필요 없다. 네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네 노력 덕분이다.”소명은 미소를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아, 그러고 보니 어젯밤 누군가와 크게 싸웠다지? 천신사상결을 사용했다던데 사실이냐?”“그렇습니다.”한비영은 부인하지 않았다.“상대는 굉장히 강했는데 천신사상결의 첫 세 가지 형태를 막아낼 정도였습니다. 아쉽게도 네 번째 형태인 전신의 분노까지는 쓸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확실히 승리할 수 있었을 텐데...”“아주 좋다.”만족스러운 대답에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오늘 너에게 설욕할 기회가 생겼구나.”“네?”한비영은 잠시 멍해졌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어젯밤 네 상대는 천재 유장혁이었다.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소명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오늘 아침, 옛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우리 천하회
청풍산, 한빙담.상반신을 드러낸 한 젊고 잘생긴 청년이 물 위에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그의 몸은 마치 가벼운 배처럼 물결을 따라 미묘하게 위아래로 일렁이고 있었다.청년의 머리 위로는 몇 마리 새들이 날아다니며 입에 짚과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물고 둥지를 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물속에서는 여러 마리의 물고기들이 청년 주위를 맴돌며 장난치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청년은 이 순간 마치 자연과 하나가 되어 하늘과 땅, 만물과 공명을 이루고 있는 듯했다.“똑!”그때, 한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호수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그의 두 발이 물결을 일으켜 물속의 물고기들은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고 새들도 깜짝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시기가 되었다. 스승님께서 당장 산에서 내려가라고 명하셨어. 늦어선 안 된다고 하시네.”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말했다.하지만 청년은 여전히 눈을 감고 물 위에 조용히 앉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했다.검은 옷의 인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이번 임무의 목표는 천재 유장혁이야. 네가 한번 겨뤄보고 싶어 하던 상대 아닌가? 이번이 절호의 기회야.”이 말에 청년은 마침내 천천히 눈을 떴다.나른하고 무기력해 보이던 눈에 드문드문 생기가 돌았다.“장소는?”청년이 담담히 물었다.“진산 서하사.”검은 옷의 인물이 답했다.청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물 위에서 천천히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그리고 한 발을 딛자마자 온몸이 금빛으로 변하며 그는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쳐 사라졌다.“몸을 칼처럼 만들어 하늘을 날다니... 설마 또 경지를 뛰어넘은 건가?”검은 옷의 인물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이십 대 초반에 대 마스터 경지에 도달하다니... 온 세상을 둘러봐도 맞설 자가 누가 있을까?’심지어 천재라 불리는 이들도 그보다는 약간 부족할 뿐이다.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천하 무쌍이었다!...운래진, 평안촌.수염이 덥수룩하고 온몸이 흙투성
결국 돌멩이랑 나무 조각만 잔뜩 남았다."어휴 이 바보야 왜 이렇게 순진한 거야. 밤새 고생해서 잡은 물고기를 싹 다 뺏겼잖아."지나가시던 어르신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다. "아 맞다, 어젯밤에 강풍 때문에 우리 집 기와가 날아갔는데, 이따가 시내 가서 좀 사다가 얹어줘. 알겠지?"바보는 말없이 씩 웃기만 했다. "어휴. 진짜 순진한 녀석이라니까. 어서 가봐, 마누라가 아침밥 차려놓고 기다리겠다."할아버지는 손을 저으며 바보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안 촌은 작은 마을이었다. 늙은이부터 어린아이까지 다 합쳐도 겨우 백여 명 정도가 사는 곳이었다.근데 이 바보만큼은 마을에서 좀 특이한 경우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이 바보는, 마을 사람들 기억엔 그저 말도 못 하는 순진한 바보였다. 누가 속이든 괴롭히든 그저 헤벌쭉 웃기만 했고, 그 모습은 늘 한결같았다.바보는 마을 앞에서 뒤까지 걸어가더니, 울타리가 있는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집이 크진 않고 좀 남루했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울타리로 둘러싼 마당에는 닭이랑 오리가 몇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늙은 황구 한 마리가 대문 앞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바보가 다가오자 벌떡 일어나서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바보야, 왔어?" 소리를 듣고 중년 여자가 문밖으로 나와서는, 가까이서 보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다 뭐야, 돌멩이랑 나무토막뿐이네? 생선이랑 새우는? 설마 또 누구한테 다 빼앗긴 거 아니지?"바보는 말이 없었고,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어리숙하게 웃기만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중년 아줌마는 화가 나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아이고 바보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니. 그 녀석들 말 믿지 말라고. 벌써 몇 번이나 속았는데? 왜 정신을 못 차리니?""친구.... 친구...." 바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됐어, 됐어. 너한테 말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하는데."중년 여자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바보의 어깨에 묻은 흙
바보는 용작검을 깨끗이 닦은 뒤 검집에 넣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와 그릇과 젓가락을 정리하고, 집 안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그러고는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오고, 닭과 오리에게 먹이를 주었다.모든 일을 끝낸 후, 바보는 옷을 갈아입고 현관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결국 검집을 등에 메고 천천히 집을 나섰다. 대문을 막 나서려는데, 양 갈래머리를 한 어린 여자아이가 급히 달려왔다. 아이는 대여섯 살 정도로 보였고, 얼굴은 좀 검었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예뻐서, 앞으로 미인이 될 상이었다.눈가가 붓고 코 주변에 핏자국이 있어, 방금 누군가와 싸운 듯했다."바보 오빠!" 여자아이는 한 손에 물고기를, 다른 손에 게 몇 마리를 들고서 바보 앞으로 달려와 자랑스레 말했다. "봐, 내가 네 것들을 되찾아 왔어. 어때, 대단하지?" "또 싸운 거니?" 바보가 쪼그리고 앉았다."걔들이 오빠를 괴롭히고 물건을 가로챘잖아. 돌려달라고 했는데 안 준다고 해서, 혼내준 거야!" 여자아이는 고개를 치켜들고 뽐내듯 말했다. "내가 말라 보여도 힘이 엄청나게 세. 걔들 울면서 도망갔어!" "이런 것들 가지고 그럴 필요 없었는데." 바보가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어쨌든 난 걔들이 오빠를 괴롭히는 건 절대로 용납 못해!"여자아이는 완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는 내 친구니까, 누가 오빠를 괴롭히면 내가 대신 혼내줄 거야!" "친구라고?" 바보는 살짝 웃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두야,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난 정말 행운이야. 떠나기 전에 선물을 하나 줄게."바보는 가슴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여자아이에게 주며 말했다. "이건 내 평생의 노력이 담긴 거야. 이제 네게 주는 거야. 네게 도움이 됐으면 해." "어? 책?" 여자아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근데 난 글자를 못 읽어." "괜찮아, 글자를 배우고 나서 읽어도 돼." 바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자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바보는 자두의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주면서 말했다. "자두야, 잘 기억해. 밥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있어. 난 이만 가야겠다." 자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보가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알게 되었다. 바보가 자신에게 준 책이 수많은 대가가 평생 꿈꾸던 값진 보물이었다는 것을.그날 평안 촌 개울가에는 몇몇 아줌마들이 빨래하면서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집안일이랑 동네 뒷담화로 한창 재미가 붙어있을 때였다. "야, 저기 좀 봐! 멋진 남자 왔다!"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들 뒤를 돌아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저기 바보 아냐?""바보라고?"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자세히 보더니 마침내 알아보고 놀라며 말했다."어머나! 진짜 바보네.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달라 보여?""옷도 말끔하고, 머리도 단정하고, 얼굴에 바보 같은 웃음도 없어졌어. 이러니까 제법 멋있어" 여자들이 수군거렸다. "춘자 씨! 바보 왔어!"노란 옷을 입은 아줌마가 저 멀리 향해 외쳤다. "응?" 춘자라고 하는 아줌마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평소에는 어리숙하기만 하던 바보가 웃으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단정한 이목구비에 깊이 있는 눈빛이 더해져, 전체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바보 맞아?" 춘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춘자 씨, 나 멀리 가야 해서 오래 못 돌아올 것 같아. 집 일은 네가 좀 봐줘."바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것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동안 바보는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맨날 몇 마디 단어만 멍청하게 되풀이하더니, 갑자기 조금 전엔 말도 똑똑하게 하고 목소리도 또렷하니 보통 사람처럼 말하는 게 아닌가. 정말 깜짝 놀랐다. "너....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춘자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멍하니 쳐다보았다."춘자 씨, 이렇게 오래 날 보살펴줘서 정말 고마워. 너랑 결혼한 건 내
천기각 백효당.선우현은 평소 아끼던 보물 함을 열어 그 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양피지의 표지에는 세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경세방(驚世榜)!천기 각의 경세방은 천하의 가장 뛰어난 강자들을 모두 망라했다.방에는 나이 제한도 없고 남녀 구분도 없으며, 노소의 차이도 없었다. 오직 실력만이 기준이었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방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명성이 자자한 전설적인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선우현은 봉인을 조심스럽게 뜯고 양피지를 천천히 펼쳤다.그 안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으며, 열 개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위에서 아래로 차례로제1위: 용호산의 장선기제2위: 호룡각의 이원무제3위: 서량검신 백준제4위: 검종 종주 홍흥조제5위: 천하회 종주 소무명제6위: 무고교 교주 공대숙제7위: 한상성 성주 한상제8위: 진무사 사장 반유림제9위: 흑방의 고혼제10위: 대내 상시 부규환선우현은 명단을 한번 쭉 살펴본 뒤, 붓을 들어 제10위인 부규환의 이름 옆에 표시를 그었다. 그러고는 붓을 위로 올려 제9위 고혼의 이름 옆에도 표시했다. 그때 백효당의 제자 하나가 급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와 죽간을 올리며 보고했다.“당주님, 긴급 소식입니다. 한상 성주가 드디어 성을 나섰답니다!”“뭐라고?”선우현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적잖이 놀란 듯했다.한상이란 자가 10년째 성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갔는데, 하필 오늘 그 규칙을 깨다니.“한상이가 어디로 갔지?”선우현이 입을 열었다.“연경 쪽으로 향했습니다. 아마도 진산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진산 서하사란 말이지?”선우현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재밌군... 안위순에 이어 고혼, 이제 한상까지 움직였어. 육장수 녀석이 오늘 살아남기 힘들겠는데.”정보망으로 유명한 백효당은 사방에 정보원들이 깔려 있어 소식을 빨리 접했다.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늘 가장 먼저 알아냈다.어젯밤부터 연경이 소란스러웠는데, 오늘 아침엔 더욱 심상치 않
두 손이 맞붙으며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유진우는 몸을 한 번만 움찔했을 뿐인데 모든 힘을 가볍게 막아냈다. 반면,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는 유진우의 한 손에 의해 수십 미터나 날아가며 땅에 떨어졌고 코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온몸의 경락이 반쯤 부서져버렸다. “너... 너 어떻게 이렇게 강한 거지?”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는 가슴을 움켜잡았고 얼굴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유진우는 분명 독에 중독되었고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단순한 한 방으로 나를 이렇게 쉽게 물리친 거지? 우리의 실력 차이가 이렇게 컸던 건가?’ “내가 기습당하기 전에 내 실력을 조사하지 않았나?” 유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입가에는 검은 피가 묻어 있었다. 사철수 몸속의 독은 이미 모두 빠져나갔고 목숨에 지장은 없었다. 유진우 자신은 부상을 입고 독에 중독되었지만 깊은 수련 덕분에 당장 쓰러지지는 않았다. “넌 아무리 강해도 결국 그냥 무도 마스터에 불과하다. 우리는 충분히 널 죽일 수 있어!”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는 큰 소리로 외쳤다. 호룡각이 파괴된 날, 그곳의 고위 인물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남은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 싸웠고 사실상 더 이상 조직을 구성할 수 없었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잘 모르지만 서경 왕부의 음모였고 유진우가 그 모든 일의 주범이라고 알고 있었다. 오늘 그는 유진우가 서경 왕부의 밀사를 만나러 온다는 비밀 정보를 받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복수를 꿈꿨지만 상대가 이토록 강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흥! 만약 내가 그저 평범한 무도 마스터였다면 아마 오래전에 죽었을 거야. 지금 살아있는 게 기적이지.” 유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건가?”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는 눈을 크게 뜨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유진우가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라면 이렇게 젊은 나이에 대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는 빠르고 정확하게 내리쳤다. 전신의 강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렸고 뒤에서 기습 공격을 한 탓에 방어할 틈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유진우가 여전히 사철수를 치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주변 상황을 전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긴 칼을 내리칠 때 유진우는 재빨리 호신 진기를 발동시켜 몸에 방어막을 만들었다. “쾅!”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의 긴 칼이 유진우의 호신 진기를 강하게 가격했다. 그 충격으로 잔잔한 물결처럼 진기의 파장이 퍼져 나갔다. 엄청난 반동에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의 칼은 튕겨져 나가고 그는 몸이 휘청이며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자신은 전력을 다해 칼을 내리쳤고 심지어 기습 공격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유진우는 죽지는 않아도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를 보면 전혀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밀려서 뒤로 물러섰다. ‘이 어린놈이 나보다 더 강하다고?’ “윽!” 그때, 치료 중이던 유진우가 갑자기 검은 피를 토했다. 얼굴은 온통 새카맣게 변했다. 방금 전 독기는 너무 강력해서 유진우의 몸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막을 수 없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사철수를 치료하는 데 너무 많은 진기를 소모한 탓이었다. 그로 인해 독소를 억제할 수 없었고 그대로 오장육부에 침투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의 기습에 맞서려고 무리하게 방어를 했고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충격이 겹쳐 결국 피를 토하게 된 것이다. “하하하, 결국 너도 다 죽어가고 있구나!”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는 유진우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 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한 방에 바로 무너지네.’ “이번엔 너의 목숨을 가져가겠다!”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는 떨어진 칼을 다시 움켜잡고 유진우에게 달려들어 한 번 더 칼을 휘둘렀다. “전하!” 중상을 입
“난 너랑 시간 낭비할 생각 없어! 꺼져!”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가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더 이상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맹렬히 공격을 시작했다. 원래 서로 비슷한 수준이던 손도운은 금세 밀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실력은 결국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전에 손도운이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와 팽팽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뜨거운 혈기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손도운의 그 우세는 사라졌고 남은 건 오직 순수한 실력 차이였다. 이제 싸움은 더 이상 간단한 기술이나 혈기 싸움이 아니었다. 실력의 차이가 승패를 가를 수밖에 없었다. “죽어라! 죽어라!”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는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공격을 퍼부었다. 그 공격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격렬해졌다. 손도운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직 방어할 뿐 반격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3분 내로 손도운은 완전히 패배할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이 모습을 본 유진우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고 앞에 나서려는 순간 갑자기 경계심이 솟구쳤다. 아직 반응하기도 전에 ‘펑!’하는 소리와 함께 발아래에서 검은 안개가 퍼져 나갔다. 유진우는 본능적으로 호신 진기를 발동시켜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검은 안개는 마치 영혼처럼 유진우의 호신 진기를 뚫고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이 안개가 눈, 귀, 입, 코, 그리고 피부의 모든 모공을 통해 침투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지?” 유진우는 깜짝 놀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아무리 많은 것을 봐왔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호신 진기마저 막지 못하는 이런 괴이한 안개는 대체 뭐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유진우는 곧바로 기운을 모아 독을 빼내려 했다. 비록 이 검은 안개가 매우 이상하긴 했지만 그의 실력이라면 그것을 제거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장혁아! 괜찮아? 아무
손도운의 검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빨랐다.게다가 그의 검술은 극히 사납고 위압적이며 전형적인 군무 스타일로 꾸밈이 없고 불필요한 움직임이 없었다.그의 모든 움직임과 검법은 살인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깔끔하고 효과적이면서 매우 폭력적이었다.4대 호법의 진형이 신비롭기는 했지만, 손도운의 빠른 검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들이 진형을 바꾸려고 할 때마다 손도운은 빈틈을 발견하고 빠른 검으로 돌파했다.한 차례의 교전 끝에 네 사람은 완전히 제압당해 반격할 여지가 없었다.“손 장군님이 이렇게 강한 무도 마스터인 줄 몰랐네요!” 사철수는 조금 놀랐다.“유만수의 근위병이자 밀정단까지 이끄는 자인데 당연히 평범할 리가 없죠.” 유진우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손도운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예사롭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유만수로부터 중임을 받고 연경까지 먼 길을 왔다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손 장군님의 나이를 보아하니 겨우 30대에 불과한데 이런 성취를 거둘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위왕 님 곁에는 숨은 인재들이 많네요.”사철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끝났네요.”유진우가 불쑥 말했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도운의 공세가 거세졌다.거센 파도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칼날의 기세는 막을 수 없었다.초반부터 기세가 꺾인 4대 호법은 순간적으로 압박을 받아 열수를 버티기도 전에 손도운의 빠른 검에 처져 입과 코로 피를 뿜으며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넘어졌다.“흥! 감히 전하를 해치려고 해? 그전에 내가 든 검이 동의하는지 물어봐!”손도운은 살기가 가득한 아우라를 뿜으며 위풍당당하게 말했다.그가 유진우를 마주했을 때 보여준 겸손함은 온데간데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고수를 만났네.”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는 손을 들어 계속 공격하려는 4대 호법을 제지했다.“이제 당신 차례야!”손도운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고 칼끝을 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의 얼굴을 향해 겨눴다.“흥! 네가 4명을 이겼다고 해서
그들은 어둠 속을 지니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용사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소중하고 중점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다.“전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도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전하의 신분이 특수하여 모든 세력이 은밀히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밀정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쉽게 노출될 수 있었다.“손 장군님, 왕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텐데 지금 상황이 어떤지 말씀해 주세요.” 유진우가 다시 물었다.“전하, 지금 상황은...”손도운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갑자기 아래층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그들은 눈길을 주고받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그들이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가면을 쓴 암살자 무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암살자들은 날카로운 눈빛과 함께 강력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선두에 선 한 사람은 붉은 옷을 입었고 그 옆에 있는 네 명은 흰옷을 입었고 나머지는 모두 검은색 옷을 입었다.“당신들 누구야?”왕현이 가장 먼저 검을 뽑아 유진우의 앞에 막아섰다.“전하, 먼저 가세요. 제가 뒤따라가겠습니다.”손도운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천천히 뽑았다.“유장혁! 네가 우리 호룡각을 무너뜨리고 각주를 죽였으니 오늘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해줄게!”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가 분노하며 소리쳤다.“고작 당신들 몇 명만으로 날 죽일 수 있겠어요?”유진우는 조용히 앉아서 차를 천천히 마시며 말했다.전혀 개의치 않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이 오만한 놈아, 오늘 호룡각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줄게!”붉은 옷을 입은 암살자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진 쳐! 저놈을 죽여라!”“예!”옆에 있던 흰옷의 암살자 네 명은 아무 말 없이 곧바로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네 사람의 속도가 매우 빨랐고 움직임이 신비로웠으며 그들이 피하고 이동하는 모습은 거의 잔상만 보일 뿐이었다.가장 관건적인 것은 네 사람의 공격과 방어가 매우 잘 조율되어 있었고 진법이 완성되면서 살상력이 배가되었다.“나
“짧게는 반달, 길게는 1년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유진우의 몸은 경직되고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자신이 늘 유만수의 부작위를 원망했어도 그들은 결국 같은 피가 흐르는 부자였다.유만수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진우는 저도 모르게 불안해하고 있었다.그의 곁에 남아있는 가족은 몇 명밖에 안 되는데 유만수까지 떠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 소식 확실한가요?”유진우는 침착해 보이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만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손을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었다.“전하, 이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확실합니다. 어르신께서 제가 전하께 알려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만, 저는 전하께서 이 사실을 아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손도운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어르신께서 항상 몸이 정정하셨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예요?”사철수가 물었다.“지난 10년 동안 어르신께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서경을 지키고, 오랑캐의 침략을 막고, 모든 내부 세력도 항상 경계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어르신께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손도운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유만수의 근위병으로서 그는 모든 것을 안중에 두고 있었다.예전의 서경왕은 손가락만 까딱해도 조정과 민간을 뒤흔들 정도로 위엄있고 패기가 넘쳤다.그러나 이제 영웅은 죽어가고 있으며 그의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정말 슬프고 안타까웠다.“휴... 어르신께서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셨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서경 전체뿐만 아니라 용국의 절반에 가까운 영토도 함께 짊어지셨습니다. 비록 높은 공들을 세웠지만 몸이 너무 많이 상했습니다.”손도운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유만수...또 다른 말은 없었어요?” 유진우는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서경은 전하의 영원한 집이니 전하께서 힘들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언제든지 돌아오셔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손도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의 제왕 빌딩은 예전의 북적거림과는 달리 조금 한산해 보였다.특히 2층은 예약석이라 외부인 출입이 불가능했다.유진우는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왕현과 사철수를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이때 2층 VIP 코너에는 단 한 사람만 앉아 있었다.그 남자는 검은 옷에 평범한 외모, 평범한 몸매와 평범한 기질을 가졌고 아무런 특징이 없어 보이는 매우 평범한 일반인으로 보였다.“전하, 소인 인사드리옵니다.” 유진우가 나타나자 그 남자는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누구시죠?”유진우는 담담히 물었다.“소인의 이름은 손도운이고 어르신의 근위병입니다. 어르신께서 전하가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저를 보내 전하를 도우라고 하셨습니다.”“근위병이라고요?”유진우는 손도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다시 물었다. “당신의 신분을 어떻게 증명하죠?”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가 아니었다. 명확한 증명이 필요했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이건 어르신께서 소인한테 주신 영패입니다.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손도운은 주머니에서 영패를 꺼내 양손으로 건넸다.유진우는 영패를 받아 자세하게 살펴보고 마침내 경계심을 풀었다.확실히 서경왕부의 영패였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근위병만이 얻을 자격이 있었다.영패로 상대방의 신분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손 장군님, 반가워요.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되니까 얼른 일어나세요.”유진우는 영패를 돌려주는 동시에 손도운을 일으켜 세웠다.“전하, 감사합니다.”손도운은 기쁘면서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손 장군님, 이분은 한때 중군 부장이었던 사철수 장군님이에요.”유진우는 사철수를 가리키며 말했다.“사 장군님, 사 장군님의 명성을 오래전부터 많이 들었는데 오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손 장군님, 천만에요. 난 이제 늙었어요. 앞으로는 그쪽 젊은이들의 세상이에요.”사철수는 웃으며 말했다.“이분은 제 친구 왕현이에요.” 유진우가 왕현을 가리키며 말했다.“왕현 형
식사를 마친 유진우는 이만 자리를 뜨기로 했다.이틀 밤낮을 잠만 자다 보니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얼른 돌아가야 했다.차에 오르기 전 이청성은 유진우를 불러 세웠다.“유진우 씨, 내가 어젯밤에 점쳐봤는데 아직 당신의 위기가 완전히 해소된 거 아니에요. 앞으로 한동안은 반드시 조심해야 해요.”“명심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넨 후 곧 차에 올라탔다.차에 탄 유진우는 먼저 조선미한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한 다음 조무진과 조홍연 두 사람한테 연락해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했다.그리고 왕위 계승 전이 시작되면 반드시 조정 전체에 재앙이 닥치게 될 것이고 왕족인 조씨 가문 역시 벗어날 수 없으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명확히 알렸다.한 시간 후 유진우는 별장에 도착했다.같은 시각 별장에서 윤아는 요리하고 사철수와 유공권은 서예를 연구했으며 왕현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누구야?”유진우가 문을 여는 순간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왕현이었다.“저예요.”유진우는 즉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진우 형님, 드디어 돌아왔네요.”왕현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이틀 동안 어디에 있었어요? 왜 아무 연락이 없었어요?”유진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급한 일이 생겨서 처리하느라 이틀이나 걸렸어요.”유진우는 차마 자신이 이틀 동안 잠을 잤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진우 형님, 전에 주신 서신은 서경으로 돌려보냈어요.”왕현이 말했다.“그래요.”유진우는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며 말을 돌렸다.“아참, 아저씨랑 유명의는 어때요?”“그들은 괜찮아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요 며칠 동안 경계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어요.”왕현이 말했다.“다행이네요. 왕현 씨 수고가 많아요.”“전하 돌아오셨어요?”이때 사철수와 유공권이 서재에서 나왔다.두 사람은 줄곧 집에만 있다 보니 지난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고 그다지 걱정될 것도 없었다.“아저씨, 안색이 점점
“뭐라고요?”이청성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늦게 반응했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사실 저는 공주님께서 황제가 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아마 폐하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래서 만약 그런 생각이 있으시다면 서경왕부를 대표해서 전폭적으로 지원할 수 있어요.”유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장혁 씨! 농담하지 마세요. 하나도 안 웃겨요!”“저는 그냥 여자일 뿐이고 그런 자격이 없어요. 황궁 내에서도 저를 받아들일 수 없을 거예요.”“여자라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죠?”유진우는 진지하게 말했다.“누가 여자면 황제가 될 수 없다고 했어요? 신종여왕도 여성이었지만 황제 자리에 올랐잖아요. 지금 공주님은 신종여왕보다 조금 젊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 노력만 한다면 분명히 해낼 수 있어요.”“유장혁 씨가 믿어줘서 고맙지만, 저는 그런 생각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비현실적인 생각을 버려줘요.”이청성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지금까지 단 한 명의 여황제가 있었고 그 여황제는 좋은 기운과 기회가 따랐기에 작은 희망이란 가능성이 있었다.이청성은 그런 전설적인 인물과 자신을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게다가 만약 자신이 권력을 쥐고자 한다면 세상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그때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그런 상황은 이청성이 가장 원하지 않는 그림이었다.“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됐어요. 저는 그냥 한 번 제안했을 뿐이에요. 물론 공주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유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성민이 말했듯이 이청성은 왕족 중에서 황제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이청성은 여성이다.이 길을 걷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은 분명하다.그뿐만 아니라 세 명의 황자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고 궁 안의 신하들 또한 이청성이 황제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청성 자신이다.이청성이 그런 마음가짐을 가졌다면 유진우는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