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이청아는 유진우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과도한 힘 때문에 붕대로 감겨 있던 상처마저 다시 찢어져서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유진우는 뜨거운 얼굴을 만지며 희비가 없는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오해와 멸시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한때 아내였던 사람이 다른 남자 때문에 뺨을 때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왜? 왜 반성하지 않는 거야?”이청아는 이를 악물고 증오의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며 유진우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심하고, 질투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심지어 은혜를 원수로 갚기까지 하다니 온갖 나쁜 품성이 몸에 배어 있다고 생각되어 뺨으로 유진우를 깨워주고 싶었다.“흠! 나한테 덤벼? 어리석은 놈!”두 사람이 서로 원수가 된 걸 보고 여호준은 속으로 웃었다. 비록 이빨 두 개를 잃었지만, 이청아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며 유진우의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잘했어! 이런 놈은 맞아야 돼!”장경화의 눈이 번쩍 뜨였다.“맞아! 교훈을 주지 않으면 자기가 정말 뭐라도 되는 줄 알아.”이현이 끼어들었다.“허 ...”잠깐 침묵이 흐른 뒤, 유진우는 갑자기 혼자서 웃었다.결혼 생활 3년 동안 두 사람은 싸움은커녕 다툰 적도 거의 없었다.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방금 때린 거로 우리 모든 게 끝났어. 이제부터 서로 빚진 거 없어.”유진우는 심호흡을 하더니 침착하게 돌아서서 나갔다.분노도 으르렁거림도 없이 예상치 못한 무관심만 가득했다.“어?”그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청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똑, 똑, 똑,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아까 나갔던 강 집사가 다시 돌아왔다.“저기, 유진우 씨 어디 계시나요?”“강 집사님, 그놈은 왜 찾으시는지요?”장경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 저희 강 대표님께서 유진우 씨와 화해를 하고 싶다고 선물을 보내셨습니다.”강 집사가 말했다.“선물을요?”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
이청아가 비틀거리며 병실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고 표정은 무뚝뚝했으며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심지어 붕대를 감은 손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떠나는 유진우의 절망적인 눈빛이 칼처럼 그녀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그녀는 두 사람이 점점 더 멀어졌다는 것을 알았다.과거에는 항상 커리어에 집중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다고 결심하고 많은 것을 소홀히 하고 또 많은 것을 포기했었다. 하지만 이혼하던 날부터 그녀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미 너무 늦었다.“청아야, 방금 알아봤는데 ...”병실로 들어오는 이청아를 보자마자 장경화는 반갑게 다가가서 해명했다.“유진우가 수작 부린 거야. 그 자식이 강향란 씨 몸에 나쁜 짓을 하고 그걸로 강 대표를 협박하여 사과하게 만든 거야. 결국에는 교활한 수법을 쓴 거야.”“맞아. 유진우 그 자식이 자기를 내세우려고 비열한 짓을 한 거야.”이현도 덧붙였다.처음에는 자기들 몰래 도와준 사람이 유진우라고 하자 무척 놀라워 하더니 강씨 가문이 유진우가 무서운 게 아니고 그한테 협박당해서였다는 걸 알고 난 뒤 또다시 막말을 해댔다.“엄마, 다들 나가요, 나 혼자 있고 싶어요.”이청아는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청아야, 우리가 유진우를 오해했더라도 괜찮아. 원래 유진우가 사고 친 거잖아. 그 자식은 자기 잘못을 만회한 것뿐이야. 우린 그놈한테 빚진 거 없어.”장경화는 계속했다.“엄마, 나 피곤해서 좀 쉬고 싶으니까 나가세요.”“청아야 ...”“나가요!”이청아의 초췌한 얼굴을 본 장경화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사람들을 이끌고 병실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이번 일의 가장 큰 공신이 유진우가 될 줄은 정말 생각 밖이야, 이외로 여호준 씨 진짜 그런 사람인 줄 몰랐네.”병실 밖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감탄했다.“공신은 무슨, 우리를 그 상황에 빠뜨린 게 누군데.”장경화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호준이는
평안 의원으로 돌아온 후, 유진우는 답답한 마음에 혼자 술을 마셨다. 한잔 또 한잔 끊임없이 술잔을 비웠다.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속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3년 동안의 감정을 어쩌면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았다.“선생님, 선생님...”유진우가 취기가 살짝 올라왔을 무렵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의원 대문을 열어보니 밖에 아리따운 소녀 두 명이 서 있었다. 그중 한 소녀는 하얀 옷차림에 얼굴은 한없이 청순하고 귀여웠는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순진해 보였다.그리고 다른 한 소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기개가 흘러넘쳤다. 그런데 상처 입은 복부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얼굴에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저기 오빠, 여기 혹시 의사 선생님 계세요? 제 친구가 다쳤는데 급히 치료받아야 해서요!”흰옷 차림의 소녀가 다급하게 말했다.“제가 의사예요. 얼른 들어와요.”유진우가 길을 비켜주었다.“고마워요, 오빠.”흰옷 차림의 소녀가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언니, 내가 부축해줄 테니까 들어가요.”“잠깐!”도윤진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설아, 이 사람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게 주정뱅이가 틀림없어. 나 이 사람 못 믿어!”“그런데 언니 지금 피를 많이 흘려서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생명에 위험이 있어요.”남궁은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괜찮아, 나 더 버틸 수 있어. 지원팀이 오길 기다리면 돼. 아무튼 내 목숨을 절대 이런 사람한테 맡길 수는 없어!”도윤진이 입술을 꽉 깨물며 강렬한 눈빛으로 말했다.그녀의 상처는 찰과상이 아니라서 일반 의사들은 치료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술주정뱅이에게는 더욱 맡길 수가 없었다.“실례지만 지원팀이 30분 내로 도착하나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물었다.“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도윤진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다름이 아니라 지금 가슴 쪽에 혈기가 쌓여있고 경맥이 막힌데다가 복부에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어
“쾅!”엄청난 굉음과 함께 누군가가 의원 대문을 발로 걷어찼다. 일고여덟 명 정도의 검은 옷차림에 복면을 쓴 킬러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쳐들어왔다.“큰일 났어! 저 사람들이 쫓아왔어!”도윤진의 낯빛이 확 굳어졌다.전에 킬러들에게 매복 공격당한 바람에 경호팀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도윤진과 남궁은설만 겨우 빠져나왔다. 성공적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했으나 킬러들이 끝까지 쫓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설아, 내가 저들을 막고 있을 테니까 넌 얼른 뒷문으로 도망쳐!”도윤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내가 도망치면 언니는 죽어요. 저들의 목표는 나예요. 차라리 그냥 잡혀가는 게 나아요!”남궁은설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설아, 난 경호팀 팀장으로서 너의 안전을 책임지는 게 내 직책이야. 그러니까 언니 말 들어!”도윤진이 몸으로 막아서며 강렬한 눈빛을 내뿜었다.“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오늘 둘 다 도망 못 가!”한 민머리 남자가 흉악스럽게 웃으며 걸어왔다. 다른 킬러와 달리 그는 복면을 쓰지 않았고 엄청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송강?”도윤진의 낯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요즘 4대 악인이 살인 같은 극악무도한 짓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4인의 무술 실력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미치광이 같아 걱정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그리고 송강이 바로 4대 악인 중 한 사람이었다.“어? 윤진 씨가 날 알고 있었네? 이거 참 영광스러운 일일세.”흉악스럽게 웃는 송강의 눈빛에 조롱이 가득 담겨있었다.“송강! 누가 너한테 시켰든 내가 두 배로 줄 테니까 여기서 멈춰!”도윤진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윤진 씨, 돈이 좋긴 하지만 난 사람한테 더 관심이 있어. 두 사람을 잡아가면 돈이 부족할 일이 없을걸?”송강이 비웃듯이 말했다.“우리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당신도 잘 알 텐데!”도윤진이 경고를 날렸다.“죽이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단지 두 사람의 신분을 빌려서 일을 좀 처리하려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다치고 싶
“아주 겁이 없는 녀석이로구나! 좋아!”한바탕 웃고 난 뒤 송강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너처럼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녀석은 정말 오랜만이야!”“잔말 말고 얼른 돈이나 물어내.”유진우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기분도 별로인데 쓸데없는 소리까지 지껄이니 한대 확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하하... 처맞기 전까지 계속 돈 달라고 할 건가 보네?”송강이 흉악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손을 흔들었다.“가서 저 자식의 손발을 부러뜨려! 언제까지 큰소리 치나 똑똑히 지켜보겠어.”“네!”킬러 몇몇이 두말없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저마다 그의 목숨을 앗아갈 기세였다.“잠깐! 아까 분명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남궁은설이 큰 소리로 말했다.“은설 씨, 난 단지 저 자식을 죽이지 않겠다고만 약속했어. 그런데 저 자식이 죽음을 자초하는데 나라고 뭐 별다른 수가 있겠어? 혼쭐이라도 좀 내줘야지!”송강이 입을 쩍 벌리고 웃었다.그런데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금 유진우에게 달려들었던 킬러들이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들 순식간에 온몸이 굳으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쓰러진 킬러들을 자세히 살피던 사람들은 킬러들의 목에 은침 하나가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뭐야!”갑작스러운 상황에 송강마저도 화들짝 놀라며 경계하기 시작했다.은침으로 혈을 찌르는 건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은침을 날려 혈 자리를 찔러서 쓰러 눕히는 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저 사람 은침도 날릴 줄 알았어?”도윤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은침을 날리는 스킬은 암살 스킬 중 하나인데 일반 암살 스킬보다 수련하기 훨씬 더 어려웠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녀야 할 뿐만 아니라 10년을 하루같이 매일 수련하는 노력이 필요했다.“야 이 자식아, 너 대체 누구야? 누군데 감히 내 일에 끼어들어?”송강이 실눈을 뜨며 천천히 칼을 빼 들었다.
“독충? 당신도 독충에 대해서 알아요?”도윤진이 고개를 돌려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조금 알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정통 무술이 아니라 비뚤어진 무술을 하는 자만이 남을 미혹시키는 이런 독충술을 배우죠. 역시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요!”도윤진이 갑자기 칼을 유진우에게 겨누며 살기를 내뿜었다.“당신 대체 누구예요!”“언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 오빠는 우리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라고요.”남궁은설이 재빨리 몸으로 막아섰다.“설아, 비켜! 정체불명인 이 사람을 반드시 제대로 조사해야 해!”도윤진의 눈빛이 살아있었다.“날 조사하기 전에 아무래도 그쪽 머리부터 어떻게 된 건 아닌지 검사받는 게 좋겠어요.”유진우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독충술로도 병을 치료하고 사람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거 몰라요? 독충술에 능한 자들 중에 나쁜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모두가 다 나쁜 건 아니잖아요. 쓰는 사람의 인품이 어떤지 봐야죠. 그리고 당신 같은 정통 무술파들은 뭐 나쁜 짓을 안 하는 줄 알아요? 민가를 습격하여 약탈하고 재물을 빼앗았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아요!”“헛소리하지 말아요! 지금 궤변이나 늘어놓고 있잖아요!”도윤진이 호통쳤다.“궤변?”유진우가 코웃음을 쳤다.“지금 당신 행동 좀 봐봐요. 정통 무술 집안 출신인 사람들은 다 당신처럼 은혜를 원수로 갚나요?”“당신...”도윤진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언니, 제발 그만 해요! 오빠가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면 아까 왜 우릴 살려줬겠어요?”남궁은설이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마음으로 살려줬는지 어떻게 알아?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어!”도윤진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투가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도리에 어긋남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부르릉!”그때 문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차량 십여 대가 의원 문 앞에 나란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면서 엘리트 경호원들이 빠르게 내리더니 의원을 물샐틈없
이튿날 이른 아침.“똑똑똑...”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유진우가 잠에서 깼다. 문을 열어보니 안병서가 문밖에 떡하니 서 있었다.“안 회장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오셨어요?”유진우가 하품하며 물었다.“좋은 소식이 있어요, 진우 씨.”안병서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진우 씨가 필요하다고 했던 현주과 있잖아요. 그 행방을 찾았어요!”“현주과?”유진우도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그게 정말이에요?”현주과는 다른 영약과 마찬가지로 아주 드물고 귀한 영약이었다. 만약 현주과를 손에 넣는다면 이제 세 가지 영약만 더 구하면 된다. 그러면 수명단을 제조할 수 있다!“당연하죠!”안병서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현주과는 원래 약신궁의 보물인데 요즘 누군가 고가에 사 갔대요.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청운 리조트에 머물고 있답니다.”“그래요? 그게 누군데요?”유진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남궁 가문의 남궁보성입니다.”안병서가 대답했다.“남궁보성? 그자는 왜 현주과가 필요하대요?”유진우가 실눈을 뜨며 물었다. 남궁보성을 만난 적은 없지만 예전에 남궁 가문과 인연이 조금 있었다.“그 집 딸이 희귀병에 걸렸는데 현주과로 치료해야 한다고 들었어요.”“혹시 그 딸 이름이 남궁은설인가요?”“남궁은설을 아세요?”안병서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알긴 알죠. 어제 만났었거든요.”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진우 씨?”안병서가 떠보듯이 물었다.“전 무슨 일이 있어도 현주과를 손에 넣어야 해요. 오늘 아무래도 뻔뻔함을 무릅쓰고 청운 리조트에 다녀와야겠어요.”유진우는 나갈 채비를 마친 후 안병서의 차에 올라탔다.그에게 있어서 현주과는 매우 중요했다. 이런 귀한 보물은 보통 하나밖에 없다. 이 기회를 잃는다면 언제 또 현주과가 나타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하여 그는 한시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30분 후, 청운 리조트 응접실.남궁보성이 메인 자리에 앉아 유진우와 안병서를 내려다보았다. 일인자 자리에
“뭐? 갑자기 왜?”남궁보성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저... 저도 모르겠어요. 방금 아가씨를 깨우러 갔는데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어요. 몸도 얼음장같이 차가웠고요.”도우미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도우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남궁보성과 도란영은 이미 문을 박차고 나가 딸의 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그런데 딸의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남궁은설이 태양열 옥침대에 조용히 누워있었는데 늘 따뜻하던 옥침대에 얼음과 서리가 한층 껴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사지가 딱딱하게 굳었을 뿐만 아니라 머리에도 서리가 내려앉았다. 게다가 몸 전체에서 차가운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는데 얼핏 보기에 얼음 동굴에서 나온 것만 같았다.“설아!”당황한 도란영이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손을 비비고 입김을 불어 넣으며 딸의 몸을 녹이려 애를 썼다.“큰일 났어!”딸의 맥박을 짚어보던 남궁보성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맥박은 아주 약했고 기운도 잡혔다 안 잡혔다 확실하지가 않았는데 당장이라도 목숨을 잃을 것만 같았다.그가 황급히 딸의 체내에 내공을 불어넣자 주변의 얼음과 서리가 그제야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궁은설의 몸은 여전히 차갑고 딱딱했으며 의식도 돌아오지 않았다.“여보, 당장 손명호 명의님께 연락하여 얼른 오시라고 해!”남궁보성이 재촉했다. 그의 내공으로 딸의 심장을 잠시나마 뛰게 할 수는 있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선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네, 네...”도란영은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바로 휴대 전화를 꺼내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통화를 마친 그녀의 표정이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명의님이 지금 오시는 길이 긴 한데 저녁이 돼서야 도착할 것 같대요.”“저녁? 그때까지 못 버텨!”남궁보성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윤진이한테 전화해서 강능에 있는 명의란 명의는 전부 모셔오라고 해.”“알겠어요!”도란영이 다시 휴대 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그
다섯 명이 등장에 적지 않은 이들이 혼비백산하며 물러났다.남아 있는 이들도 달아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이었다.“저, 저건 염라전의 다섯 악귀 아냐? 대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뭐라고? 다섯 악귀? 설마 그 인간의 피와 살을 즐겨 먹는다는 놈들?”“망할! 오늘 외출하기 전에 운세를 좀 봤어야 했어. 어쩌다 이런 불길한 놈들과 마주친 거야!”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염라전의 다섯 악귀, 그들은 악명이 자자했다.소문에 따르면 그 다섯 명은 잔혹하고 가차 없는 자들로 유명했다. 사소한 말다툼에도 가차 없이 팔다리를 잘라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겐 세상을 경악하게 할 취향이 있었다.그건 바로 인간의 피와 살을 미식으로 여긴다는 것이었다.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모든 세력이 공포에 떨었다.더군다나 다섯 악귀는 단순히 흉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모두 절륜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다.과거 정의로운 자들이 힘을 합쳐 다섯 악귀를 매복해 토벌하려 한 적이 있었다.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다섯 악귀를 처단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절반 이상 몰살당했다.그나마 목숨을 건진 자들 중 일부는 정신이 무너져 미쳐버렸다고 한다.그 사건 이후, 다섯 악귀의 악명은 더욱 널리 퍼졌고 감히 그들을 건드리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그리고 그들이 나타나는 곳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도망쳤다. 혹여나 눈에 띄어 다섯 악귀의 밥이 될까 두려워서였다.그러니 지금 노련한 무사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대체 누가 강하고 미쳐버린 식인 악귀 다섯을 상대하려 하겠는가?“선배님! 여기 계셨군요!”다섯 악귀가 주점 안으로 들어와 사방을 살폈다. 그러다 염보혁을 발견하자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가 둘러쌌다. 그러고는 비굴하게 웃으며 아첨하듯 인사했다.그 모습에 주변의 구경꾼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분명 다섯 악귀는 무시무시한 흉악배라 했었는데 어째서 지금 저렇게 낯간지럽게 굴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준수한 청년의 등장에 춘화와 추월의 눈이 반짝 빛났다.그녀들은 철저한 훈련을 받아 웬만해선 쉽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지만 이 남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다.여자도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으로 아름다웠다.만약 그가 여성이었다면 분명 미인의 반열에서 손꼽히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누구시죠?”유진우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냉정하게 물었다.용호산은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강호의 고수들이 숨어 있었다.그러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더욱 경계해야 했다.“저 염보혁이라 합니다. 송강출신이지요. 이번에 용호산에서 무림대회를 연다고 하여 흥미가 생겨 구경하러 왔습니다.”염보혁이라는 그 청년은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매력적이었는지 주위에서 식사하던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그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염불기의 외모가 워낙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유진우와 춘화, 추월 역시 뛰어난 미모를 지녔다.이토록 수려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자연스럽게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송강 출신? 염보혁이요?”유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탐색하듯 물었다.“혹시 염라전의 제자가 아닌가요?”“오?”염보혁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우리 도련님은 지혜로운 분이니 그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죠.”춘화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염라전은 송강에서 손꼽히는 세력이며 그 영향력은 강호 전역에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염라전에 들어간 자는 모두 염씨로 성을 바꾸지요.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추월이 덧붙였다.“그렇군요.”염보혁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견문이 넓고 관찰력이 뛰어나십니다. 감탄할 따름입니다.”“별거 아닙니다. 허리춤의 패를 봤을 뿐이니까요.”유진우는 무심하게 말했다.“네?”염보혁은 순간 당황하며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과연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허리패가 바닥에 나뒹굴고
“그럼 언제 출발할까요?”유진우가 물었다.“두 사람을 붙여 줄 테니 먼저 용호산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세요. 전 먼저 연경에 들러 천영 구슬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개인적인 일을 처리해야 해요. 하지만 걱정 마요. 무림대회 전에 반드시 용호산에 도착해서 진우 씨와 합류할 거예요.”이청성이 말했다.“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죠!”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용호산은 오래전부터 그가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아직 가보지 못했을 뿐이었다.이번 무림대회를 핑계 삼아 제대로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았다.“춘화야, 추월아.”이청성이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곧이어 몸에 꼭 맞는 무복을 갖춰 입은 여자 호위 두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유진우는 슬며시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쌍둥이였다.둘 다 스무 살 남짓한 나이로 빼어난 미모에 늘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으며 실력 또한 선천 후기에 이를 정도로 강했다.웬만한 파벌에서도 뛰어난 인재로 인정받을 수준이었다.“너희 둘이 먼저 진우 씨를 모시고 용호산으로 가거라. 길에서 잘 보살펴 드리고 모든 지시에 따르도록 해.”이청성이 명령했다.“예!”“예!”춘화와 추월은 동시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이게 무슨 뜻이죠?”유진우는 묘한 표정으로 이청성을 바라보았다.“별거 아니에요. 용호산까지 거리가 멀어 이동하는 동안 피로할 수도 있으니 누군가 곁에서 돌봐줘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이청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춘화와 추월은 내 곁에서 오랫동안 수련한 호위예요. 특별한 훈련을 받은 만큼 충성도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자잘한 일은 이들에게 맡기면 될 거예요.”“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죠.”유진우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이청성은 짐을 꾸려 대부대를 이끌고 마을을 떠났다.한편 유진우와 춘화, 추월 세 사람은 다른 길로 빠져 곧장 용호산을 향해 이동했다.이틀 후, 용호산 상청 옛 마을의 춘
똑똑똑...이른 아침, 유진우가 금방 기지개를 켰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어보니 이청성이 한 손에 아침 식사가 담긴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따뜻한 우유와 식빵 그리고 삶은 달걀까지, 부족함 없이 알차게 준비되어 있었다.“먼저 이거 드세요. 얘기할 게 있어요.”이청성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의자를 하나 찾아 앉았다.“고마워요.”유진우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자마자 허기를 채우듯 먹기 시작했다.평범한 음식이었지만 의외로 맛이 훌륭했다.“무슨 일이에요? 말씀해 보세요.”그는 빵을 한입 베어 물며 먼저 물었다.“오늘 아침에 몇 가지 정보를 입수했어요. 세 가지 중요한 소식이 있어요.”이청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 두 잔을 우려냈다. 한 잔은 자신의 앞에 두고 다른 한 잔은 유진우에게 밀어주었다.“첫 번째 소식이에요. 최근 며칠 동안 용호산에서 이상 현상이 자주 목격되고 있어요. 우리 쪽 사람들은 이게 용원의 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어요.”“오? 그래요?”유진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흥미롭다는 듯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용호산은 본래 좋은 기운이 잘 모이는 명당으로 유명하죠. 용원의 기를 끌어들이는 것도 이상할 게 없어요.”“두 번째 소식은요, 닷새 후 용호산에서 천사비보를 걸고 무림대회를 연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승자에게 천사비보를 하사한다더군요.”이청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무림대회요?”유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평소 세속과 거리를 두던 용호산이 웬일이래요? 게다가 천사비보는 또 뭐고?”“저도 그 점이 궁금하긴 해요.”이청성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용호산이 강호에 발을 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여러 세력들도 이에 상당히 놀라워하고 있어요. 천사비보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용호산이 중히 여기는 물건이니 절대 평범하지 않을 겁니다. 소식을 접수한 많은 세력들은 이미 용호산으로 모이고 있어요.”황실이 두려워하는 곳은 서경왕부와 용호산 단
“저요?”유진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장은경은 얼어붙고 말았다. 무심결에 되물었다.“왜요?”아까까지만 해도 순조롭게 이야기가 흘러가던 터라 갑작스런 호출에 당황스러웠다.“은혜를 원수로 갚는 게 너무 괘씸해서요, 이 이유면 충분한가요?”유진우의 목소리는 냉기로 가득했다.그는 줄곧 장은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만 지금까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았기에 눈감아 주었을 뿐이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장은경이 괜히 방해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런 위기를 겪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만약 실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이미 목숨을 잃고 모든 것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그래서 그는 장은경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진우 씨!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장은경은 다급하게 변명하며 한껏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상관없는 일이라고요? 어쩔 수 없었다고요? 우리한테 보물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예요. 그쪽이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이에요? 원앙문과 금도문과 연이 있는 사람이 그쪽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유진우는 차갑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정말 아니에요... 믿어주세요!”장은경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급히 덧붙였다.“서지석이에요! 모두 서지석이 꾸민 일이에요! 저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에요! 불만이 있으면 서지석에게 가서 따지세요! 저랑은 무관한 일이에요!”빈말로 둘러대기만 해서는 믿어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희생양을 내세워야 했다.마침 서지석은 이 자리에 없었고 이번 일과도 관련이 있었으니 그를 떠넘기는 게 가장 적절했다.“뭐라고요?”서지석의 이름을 들은 양강인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지금 상황에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상책이었다.“서지석이라고요?”유진우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지금 누굴 바보로 아는 건가요? 만약 서지석이 관련되어 있다면 왜 지금 이 자리에 없겠어요?”게다가 서지석이 몰래 보낸
“예.”왕 아저씨는 짧게 대답하더니 강렬했던 기세를 순식간에 거두고 조용히 이청성의 뒤로 물러섰다.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인 채 다시 보잘것없는 집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방금 전의 위압적인 모습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이 노인이 엄청난 실력의 대 마스터라는 걸 믿지 못할 것이다.“이청성 아가씨!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목숨을 건질 희망이 생기자 처절하게 빌던 그들은 얼굴을 환희로 물들이며 다시금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했다.“너무 일찍 기뻐하지는 마. 너희를 죽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곱게 풀어줄 생각은 없어. 죽음은 면했지만 벌은 피할 수 없을 거야.”이청성은 담담하게 말했다.“왕 아저씨, 이들의 혈도를 봉하고 몸을 묶어서 진무사에 넘겨요.”“뭐? 진무사?”그 순간 모든 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진무사는 용국의 공식 기관으로서 강호의 무사와 각 세력들을 통제하는 곳이었다. 모든 파벌과 무도 연맹은 진무사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했다.진무사는 악명 높은 무사들을 가차 없이 체포해 가두곤 한다.그들에게 진무사는 공포 그 자체였다.“이청성 아가씨!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진무사에 넘기지 말아 주십시오!”“진무사에 잡혀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고요!”사람들은 울며불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진무사에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어렵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그나마 죄가 가벼운 자들은 형벌만 받으면 되지만 만약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면 죽느니만 못한 고통을 겪으며 생을 마감해야 했다.“묶어라.”왕 아저씨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몸을 날려 각자의 기경팔맥을 봉했다. 그리고 경호팀 팀원들에게 명령해 두 파벌의 생존자들을 모두 결박하도록 했다.“이청성 아가씨, 잠깐만요!”양강인이 다급하게 외쳤다.“우리를 진무사에 넘긴다고 해서 아가씨께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만약 저희를 살려주신다면 앞으로 아가씨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명령만 내리시면 군말 없이 따르겠습니다!”
왕 아저씨는 공격을 가한 후에도 늠름하게 서 있었다. 마치 하늘의 신이 강림한 듯한 기세로 압도적인 위엄과 위력을 내뿜고 있었다.그의 앞에 지름 삼사십 미터에 달하는 깊은 손바닥 모양의 구덩이가 갑자기 생겼다.구덩이 안은 처참했다. 사지가 절단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온전한 시신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인간 지옥이었다.이것이 바로 왕 아저씨의 공격이었다.손바닥 그림자가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땅에는 깊은 구덩이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서 있던 수많은 무도 고수들도 순식간에 짓눌려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형체도 없이 살점으로 변해버렸다.운 좋게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도 강렬한 장풍에 휩쓸려 몇 미터나 날아갔다. 그들은 땅에 나뒹굴며 비명을 질렀다.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엔 눈앞의 광경에 그만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손바닥 모양의 깊은 구덩이 속에 펼쳐진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식은땀이 흐르게 만드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원앙문과 금도문의 장로와 집사들은 거의 다 전멸하고 말았다.“내... 내가 잘못 본 건가?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전부 죽었어... 다 죽었다고... 두 파벌의 수십 명 고수가 한순간에 사라졌다고, 이게 사람이냐? 악마나 다름없잖아!”“원앙문과 금도문은 이제... 끝장났어!”열댓 명의 생존자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였다.왕 아저씨의 공격은 그들의 모든 반항심을 짓눌러버렸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공포뿐이었다.“대 마스터? 저 노인이 대 마스터라고?”양강인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의 입술도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왕 아저씨의 손바닥은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내리꽂혔다. 평범한 마스터가 낼 수 있는 위력이 절대 아니었다.그것은 세상의 정상에 군림하는 대 마스터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유진우 하나만으로도 상대
“아?”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잔뜩 긴장했다.모두 다 얼마 전 원앙문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나선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겁낼 거 없어! 우리에겐 인질이 있다고, 저놈은 함부로 나서지 못해!”양강인은 그렇게 다독이며 용기를 북돋웠다.금도문의 두 장로는 인질로 붙잡힌 이청성을 한 번 바라보고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유진우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짧은 망설임 끝에 결국 이를 악물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이제 와서 돌아서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유진우를 제압하지 못하면 보물은커녕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할 판이었다.무슨 수를 쓰든 승부를 걸어야 했다.유진우의 기경팔맥만 봉하면 그는 한낱 폐인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될 터이니 더는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진우 씨,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바로 움직이세요.”그때, 이청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녀는 유진우가 자신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길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라면 그녀는 얼마든지 벗어날 방법이 있었다.“닥쳐! 이년아, 입 다물지 않으면 네 얼굴을 찢어버릴 줄 알아!”장은경이 날카롭게 외쳤다.“은경 씨,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은경 씨한테 붙잡혀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저는 그냥 은경 씨와 장난삼아 놀아준 것뿐이에요. 지금쯤 슬슬 지루해질 참이네요.”이청성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말을 마친 그녀는 한 손으로 인을 맺으며 낮은 목소리로 짧게 외쳤다.“숨을 은!”짧은 외침을 끝으로 이청성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허공 속으로 증발해 버린 듯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뭐야, 어떻게 된 거야? 어디로 간 거지?”“이상하네! 분명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눈 깜빡할 새에 사라졌어!”갑작스러운 변화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장은경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그녀의 칼은 여전히 허공에 있었고 품에 안고 있던 인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저기 봐! 저
“멈춰! 함부로 움직이면 이 여자를 당장 죽여버릴 테다!”날카로운 외침이 뒤에서 울려 퍼졌다.유진우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원앙문과 금도문의 고수들이 이청성을 붙잡은 채 여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그 가운데 장은경은 이청성의 목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고 있었고 눈빛은 사나운 맹수처럼 거칠고 매서웠다.유진우는 천천히 미간을 좁히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짙은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오늘 밤 원앙문과 금도문이 갑작스럽게 습격을 감행한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십중팔구 장은경과 관련된 일이었다.정말 더러운 본성을 숨기지 못하는 여자였다.예전에 환해맹에게 포위당했을 때 이청성이 나서서 그녀를 구하지 않았다면 장은경은 이미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그런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이제 와서 은혜를 원수로 갚고 이청성의 목에 칼을 들이대니 어처구니가 없었다.‘젠장!’“멍하니 서서 뭐 해? 당장 칼 내려놔!”장은경은 조심스레 뒤로 물러서며 칼끝을 이청성의 목덜미에 바짝 밀착시켰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유진우는 이청성을 향해 각별한 마음을 품고 있으며 결국 그녀를 외면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쾅!”유진우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창궁검을 그대로 땅에 내던졌다.이런 놈들을 상대하는 데는 검이 있든 없든 별반 다를 게 없었다.“검을 이쪽으로 차! 힘 조절 잘하고!”장은경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끝으로 검의 손잡이를 찼다.창궁검은 지면을 따라 미끄러지듯 수십 미터를 날아가 장은경의 발 앞에 멈춰 섰다.이 광경을 본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방금 전 유진우가 휘두른 몇 차례의 공격은 실로 공포 그 자체였다. 두 파벌의 오너조차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가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면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전부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었다.그의 검을 거둬낸 지금, 사람들은 마음속 불안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좋아, 좋아! 역시 내 제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