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사람 불러서 불을 꺼요! 곧 도착할 겁니다.”전화를 끊자마자 유진우는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최대 속도로 구세당으로 향했다.길 위의 신호등은 신경 쓰지 않았고 마치 바람을 가르며 내달리듯 전속력으로 달렸다.그렇게 평소 20분이 걸리던 거리를 유진우는 10분도 채 안 걸려 현장에 도착했다.유진우가 도착했을 때에도 소방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구세당은 이미 거대한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1층은 전소되었으며 맹렬한 불길이 2층으로 번지고 있었다.많은 이웃들이 물통을 들고 불을 끄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이대로라면 5분도 안 되어 3층까지 불길이 번질 것이 분명했다.“빨리! 빨리 사람들 좀 불러와요!”유공권은 손에 소화기를 들고 절박하게 외치며 불을 향해 계속 쏘고 있었다.그의 옷은 너덜너덜해졌고 온몸이 그을려 있었다. 이미 여기저기 피부가 화상을 입어 있었고 매우 처참해 보였다.“유 명의님, 사철수 아저씨는 어떻게 됐어요? 구해냈나요?”유진우는 급히 달려가 물었다.“사철수 씨는 아직 안에 있어요! 불이 너무 빨리 번져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불을 끌 수가 없어요. 이대로면 큰일입니다!”유공권은 얼굴에 불안과 공포가 가득했다.소화기는 이미 다 써버렸고 그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내가 가서 구해내겠습니다!”유진우는 더 이상 말없이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바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진우 씨, 미쳤어요?! 빨리 나와요! 그러다간 죽어요.”유공권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유진우는 이미 불길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하늘을 보며 한탄했다.“이제 다 끝났어, 모든 게 끝이야!”“대박! 방금 누가 불 속으로 뛰어들었어? 저렇게 용감할 수가 있나?”“뭐? 네가 잘못 본 거 아니야? 이런 불길에 뛰어드는 사람이라니... 말이 안 돼!”“나도 봤어, 분명 한 사람이 뛰어들었어. 믿을 수 없군!”유진우의 목숨을 건 행동에 많은 구경꾼들은 충격을 받아 그만 물을 뿌리는 것도 잊어버렸다.불길은 점점 더 거세졌고 2층은
“쿵!”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유진우는 불길에 휩싸인 채로 높이 뛰어올라 바닥에 착지했다.그의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지면에는 몇 개의 균열이 생겼다.“휘익...” 바람이 불자 유진우의 몸에 붙어있던 불길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그의 피부 표면에서 희미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그 모습은 마치 신비롭고 환상적인 광경을 연상케 했다.“응?”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경험이 풍부한 소방대원조차 놀라움에 말을 잃었고 아무도 엄청난 불길 속에서 사람이 살아서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그는 3층 창문을 깨고 나왔고 불길 속에서 거의 무사히 나왔으니 말이다.이 용감하고도 무모한 행동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내가 잘못 본 건가? 방금 들어갔던 사람이 정말 살아서 나왔단 말이야?”“그뿐만 아니라 사람도 구해냈잖아.”“이 사람 도대체 누구야? 불에도 타지 않고... 이건 말도 안 돼!”잠시 침묵이 흐른 후, 현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모든 이들의 시선이 유진우에게 집중되었고 마치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진우 씨? 진우 씨 정말 괜찮아요?”유공권은 놀라 어쩔 줄 몰랐다.“운이 좋았죠. 불길이 전부 타기 전에 제때 빠져나왔습니다.”유진우는 이렇게 말하며 품속에 있던 이불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이불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흰 연기가 피어오르긴 했지만 불에 타지는 않았다.이불을 펼치자 삐쩍 마른 사철수가 조용히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숨이 약간 가쁘기는 했지만 다행히 무사했다.“정말 다행이네요. 사철수 씨가 무사하다니!”유공권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목이 메었다.조금 전까지 유공권은 사철수가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유진우가 용감하게 불 속으로 뛰어들어 그를 구해냈다.유진우는 사철수의 상태를 점검한 후, 그를 차에 태우고 자리를 정돈했다.그러고 나서 유공권을 돌아보며 물었다.“유 명의님, 구세당이 이렇게 갑자기 불이 난 이유가 뭘까요?”“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잠깐
유공권은 평소에 가난한 이들에게는 진료비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세상을 살아오며 하늘과 양심에 떳떳하고 구세당을 찾은 모든 환자들에게 진심을 다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자신이 평생 쌓아온 선행의 결과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대반 생애의 노력과 정성이 한순간에 불타 없어진 것이었다.그는 깊은 절망과 회의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유 명의님, 비록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는 한 가지 의심이 듭니다.”유진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누가요? 대체 누가 이렇게 악독한 짓을 했단 말이죠?”유공권은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송씨 가문이요.”유진우는 차갑게 두 글자를 내뱉었다.“송씨 가문이요?”유공권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비록 증거는 없었지만 유진우의 말이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구세당을 차지하기 위해 송씨 가문은 이전부터 온갖 협박과 회유를 사용해 왔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며칠 전에는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보낸 장용이라는 깡패도 송씨 가문과 관련이 있었다.만약 누군가가 불을 질렀다면 가장 의심이 가는 쪽은 송씨 가문이었다.“차지할 수 없다면 파괴한다... 송씨 가문 정말 악랄하네요.”유공권은 분노에 떨며 말했다.수십 년간 쌓아온 노력이 한순간에 파괴되었으니 그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그때, 하얀색 마세라티가 갑자기 도로 옆에 멈췄다.곧이어 조수석의 문이 열리며 송충이 먼저 나와서 뒷좌석 문을 공손히 열어 송영명과 안세리를 내리게 했다.이 순간에도 소방대원들은 여전히 물을 뿌리며 불을 끄고 있었고 주변에는 검은 연기와 먼지가 자욱했다.송영명은 햇빛을 가려주기 위해 안세리의 위로 우산을 펼쳤다.“어이! 여기 무슨 일이야? 왜 불이 난 거지?”송영명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일부러 놀란 척을 하며 곧이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유 명의님, 정말 조심성이 없으시네요. 이거 보세요. 남쪽 구역에서 가장 유명한 의관이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
“뭐 하는 거예요?”타들어 가는 수표를 보던 안세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진우가 그녀의 체면을 아예 무시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거절하면 그만이지, 수표를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그럼 안세리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이봐, 유진우, 이게 지금 무슨 뜻이야?”그 모습을 본 송영명이 언짢아하며 호통쳤다.“우리 세리가 너한테 돈을 주는 건 은혜를 베푸는 거야. 주제도 모르고 뭐 하는 짓이야?”“나한테 돈을 주면 그대로 받아야 해? 내가 뭐 거지인 줄 알아?”유진우가 코웃음을 쳤다.안씨 가문에 대한 인상이 정말 좋지 않았다. 어제 안세리가 이용한 일이든 오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일이든 사람은 겉만 보고 모른다는 게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흥! 네 꼴을 봐봐. 거지랑 다를 게 뭐야?”송영명이 하찮다는 듯이 말했다.“계속 더 함부로 지껄였다간 맞는 수가 있어.”유진우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너!”송영명이 화를 내려던 그때 안세리가 손을 들어 말렸다. 그러고는 물기를 머금은 듯 빛나는 눈빛으로 유진우를 조용하게 쳐다보았다.“진우 씨,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우린 분명 친구가 될 수 있었는데 왜 자신한테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요?”“세리 씨 신분이 높아서 난 그럴 자격이 없다고 전에도 얘기했었죠? 친구는 됐어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친구라는 말을 들으니 더욱 귀에 거슬리는 것 같았다.“세리야, 저런 보잘것없는 자식을 신경 써서 뭐 해?”송영명이 고개를 내저었다.“그래요. 당신이 날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는 연락하지 맙시다.”안세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눈빛도 점차 싸늘해졌다.안씨 가문의 딸인 그녀는 신분이 아주 귀했다. 평소 어딜 가든 아부하는 사람만 가득해서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안세리가 자세를 낮추고 유진우에게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이미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그런데 유진우는 그녀의 호의 따위 받질 않았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정말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명의님, 구세당을 파는 것 말고는 더 나은 선택이 없어요. 그리고 우리 말고 살 사람도 없고요.”안세리가 다정한 말투로 설득했다.남쪽 구역은 안씨 가문과 송씨 가문의 천하인데 그들의 동의가 없이 누가 감히 구세당을 이어받겠는가?“안 팔아요! 죽어도 안 팔아요! 내 구세당을 빼앗아갈 궁리 하지도 말아요!”유공권이 노발대발하면서 소리를 질렀다.반평생 동안 수많은 피와 땀을 흘리면서 일궈 세운 오늘날의 구세당이었다. 그런 구세당을 어찌 팔 수가 있겠는가? 그것도 이런 양심 없고 욕심만 가득한 인간에게 말이다.심지어 구세당이 이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돈 버는 기계가 되어 결국에는 명성이 완전히 바닥날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팔지 않겠다고요?”송영명이 싸늘하게 웃었다.“명의님, 잘 생각하고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릴 거절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에요.”“난 이미 살 만큼 다 살았어요.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당신들을 두려워하겠어요?”유공권의 두 눈에 핏발이 다 섰다.“명의님의 강직한 품성과 두려움 없는 용기는 참으로 존경해요. 근데 명의님은 괜찮아도 가족 생각은 하셔야죠. 명의님의 후손들이 걱정되지도 않으세요?”송영명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유공권은 마치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그래. 난 두려운 게 없고 죽는 것도 무섭지 않은데 우리 가족은 어떡해? 저 사람들 살인과 방화까지 서슴없이 저지르는데 뭔 일인들 못 하겠어?’“내가 기억하기로 명의님한테 아주 예쁜 손녀가 있던데... 앞날도 창창한 젊은 나이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얼마나 안타까워요. 안 그래요?”송영명이 웃을 듯 말 듯했다.털썩!그 순간 유공권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자신이 송영명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아무리 물러서지 않고 배짱이 있어도 명문가의 권력 앞에서는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이런 권력을 건드렸다간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60억요?”그 소리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일제히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유진우였다.“인마, 방금 뭐라고 했어?”송영명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세리도 눈살을 찌푸리면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명의님, 60억으로 구세당을 사겠습니다.”유진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그리고 구세당을 원래 모습으로 복구하고 명의님은 여전히 구세당의 수석 의사로서 구세당의 크고 작은 일들을 관리하면 됩니다. 약속드릴게요.”그 소리에 유공권은 순간 멍해졌다. 유진우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재건하고 권력이 바뀌지 않는다는 건 유공권더러 계속 구세당을 관리하면서 선행을 이어가라는 뜻이었다.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앞으로 구세당이 얼마를 벌든 그와는 상관이 없었다. 물론 구세당의 명성과 유공권의 정신적 지주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깟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진... 진우 씨, 진심이에요?”유공권이 재차 확인했다.“그럼요.”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구세당은 의술로 사람들을 구하고 행복을 가져다줬어요. 저도 의사로서 이런 훌륭한 의원이 돈 버는 도구가 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지킬 생각인데 명의님은 저한테 팔 의향이 있으신지요?”“팔죠. 당연히 팔죠. 근데...”유공권은 말을 멈추고 송영명 일행을 쳐다보았다.얼마에 팔든 상관이 없었고 심지어 유진우에게 공짜로 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유공권은 유진우를 자신의 후임으로 생각했으니까.그런데 문제는 송씨 가문과 안씨 가문에서 구세당을 눈독 들이고 있었다. 유진우가 구세당을 사겠다는 건 두 가문과 맞서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행동은 아주 위험했다. 만약 구세당을 유진우에게 판다면 유진우를 해치는 것과 다름없었다.“이 자식아, 둘이 지금 짜고 나한테 장난쳐?”송영명이 코웃음을 쳤다.“지금 네 꼴을 봐봐, 거지랑 뭐가 달라? 너 같은 사람은 가진 걸 다 팔아도 60억을 마련하지 못해. 근데 구세당을 사겠다고? 그럴 자격이나 있어?
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웃기만 할 뿐 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빨간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냈다.빨간 카드 정면에 금색의 용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주 위풍당당하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뒷면에 제왕이라는 금색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이건 드래곤 은행의 제왕 카드인데 자산이 1조 원이 넘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카드야. 그리고 이 카드 한 장으로 용국의 아무 은행에서 현금 100억을 찾을 수도 있고. 인제 말해봐 봐. 내가 이래도 구세당을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깟 60억이 없을 것 같아?”유진우는 빨간 카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마음껏 비웃었다.“뭐? 드래곤 은행의 제왕 카드?”카드를 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드래곤 은행은 용국에서 가장 큰 은행이었고 국고와도 연결되어 있었다.은행에서는 이용 고객들을 여러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차례로 일반 VIP, 골든 VIP, 플래티넘 VIP, 블랙 골든 VIP, 다이아몬드 VIP 그리고 최고급 레벨의 제왕 VIP였다. 그리고 제왕 VIP가 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첫 번째 조건은 개인 재산이 적어도 1조 원에 달해야 했고 두 번째 조건은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거물이어야만 했다.예를 들어 명문가의 가주거나 선행을 많이 해서 명성이 자자한 재벌, 또는 나라의 기둥이 되는 인재여야만 가능했다.드래곤 은행의 제왕 VIP가 된다면 부의 피라미드 가장 꼭대기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돈을 버는 게 물을 마시는 것처럼 쉬웠다.그런데 문제는 용국 전체에 제왕 VIP를 소유한 사람이 50명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각계 거물들이 통제하고 있어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써서는 안 되었다.“네... 네가 왜 드래곤 은행의 제왕 카드를 갖고 있어?”귀한 카드를 본 순간 송영명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명문가 도련님인 그마저도 블랙 골든 카드밖에 신청하지 못했다. 유진우의 제왕
“뭐라고요? 평생 감옥에서 지내야 한다고요?”그 소리에 옆에 있던 유공권의 낯빛이 급변하더니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사실 유공권도 유진우의 제왕 카드가 진짜인지 의심했었다. 하여 안세리의 협박에 이토록 당황한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유진우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진우 씨, 얼른 카드 다시 넣어요. 안 그러면 큰일 난다고요.”유공권이 유진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짜 제왕 카드를 제때 없앤다면 큰 불행은 막을 수 있었다.“유진우 너 아주 간덩이가 부은 놈이구나! 감히 제왕 카드를 위조해? 죽고 싶어?”송영명이 싸늘하게 쳐다보았다.“진우 씨, 지금 뉘우칠 기회를 줄게요. 잘못을 인정하고 그 카드를 없앤 다음 여길 떠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해줄게요.”안세리가 고개를 들고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왜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거죠? 보고도 진짜인지도 모르는 건 당신들인데.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나랑 드래곤 은행으로 갑시다.”유진우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드래곤 은행의 제왕 카드는 유천우가 가기 전에 준 것이기에 가짜일 리가 없었다.“그만 해요, 유진우 씨!”안세리가 굳은 표정으로 호통쳤다.“내가 이미 가짜인 걸 발견했는데도 고집을 부릴 거예요? 난 지금 당신한테 되돌릴 기회를 주는 거라고요. 그런데도 계속 고집을 부리면 나도 더는 참지 않아요!”“왜요? 날 잡기라도 하게요?”유진우가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래야죠!”안세리가 또박또박 말했다.“난 당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감옥에 가야만 정신을 차려서 잘못을 뉘우치고 바른길로 돌아올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난 지금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요.”“날 위해서요? 하하... 참 귀에 거슬리는 말이네요.”유진우가 냉랭하게 웃었다.“세리 씨가 참 가식적인 사람이란 생각 안 해봤어요? 남을 해치고 있으면서 뭘 그렇게 허울 좋은 말만 하고 정의의 사도인 척해요? 정말 역겨워서 못 봐주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