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요? 평생 감옥에서 지내야 한다고요?”그 소리에 옆에 있던 유공권의 낯빛이 급변하더니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사실 유공권도 유진우의 제왕 카드가 진짜인지 의심했었다. 하여 안세리의 협박에 이토록 당황한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유진우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진우 씨, 얼른 카드 다시 넣어요. 안 그러면 큰일 난다고요.”유공권이 유진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짜 제왕 카드를 제때 없앤다면 큰 불행은 막을 수 있었다.“유진우 너 아주 간덩이가 부은 놈이구나! 감히 제왕 카드를 위조해? 죽고 싶어?”송영명이 싸늘하게 쳐다보았다.“진우 씨, 지금 뉘우칠 기회를 줄게요. 잘못을 인정하고 그 카드를 없앤 다음 여길 떠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해줄게요.”안세리가 고개를 들고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왜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거죠? 보고도 진짜인지도 모르는 건 당신들인데.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나랑 드래곤 은행으로 갑시다.”유진우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드래곤 은행의 제왕 카드는 유천우가 가기 전에 준 것이기에 가짜일 리가 없었다.“그만 해요, 유진우 씨!”안세리가 굳은 표정으로 호통쳤다.“내가 이미 가짜인 걸 발견했는데도 고집을 부릴 거예요? 난 지금 당신한테 되돌릴 기회를 주는 거라고요. 그런데도 계속 고집을 부리면 나도 더는 참지 않아요!”“왜요? 날 잡기라도 하게요?”유진우가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래야죠!”안세리가 또박또박 말했다.“난 당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감옥에 가야만 정신을 차려서 잘못을 뉘우치고 바른길로 돌아올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난 지금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요.”“날 위해서요? 하하... 참 귀에 거슬리는 말이네요.”유진우가 냉랭하게 웃었다.“세리 씨가 참 가식적인 사람이란 생각 안 해봤어요? 남을 해치고 있으면서 뭘 그렇게 허울 좋은 말만 하고 정의의 사도인 척해요? 정말 역겨워서 못 봐주
“세리 씨,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아요. 당신이 준 기회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에요.”유진우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안세리가 그를 이용한 순간부터, 안두천과 송자현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순간부터 양측은 적대 관계가 돼버렸다.“알겠어!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리니 나도 더는 옛정을 생각하지 않겠어!”안세리의 표정이 확 굳어졌고 더는 예도 갖추지 않았다.“이젠 반말까지 하네? 네가 방금 한 말 똑같이 돌려줄게. 송씨 가문과 안씨 가문에서 계속 나쁜 마음을 품는다면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야!”유진우가 맞받아쳤다.“제 주제도 모르는 것!”안세리는 싸늘하게 한마디 한 후 홱 돌아섰다. 그런데 차에 타려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아 참, 이 얘기 깜빡할 뻔했네. 오늘부터 우리 안씨 가문과 송씨 가문이 손을 잡고 옥로고를 함께 연구하고 생산하기로 했어. 얼마 지나지 않으면 옥로고가 연경에 널리 퍼져서 우리한테 엄청난 부를 안겨줄 거야. 물론 이게 다 네 덕이라는 거 알아. 만약 옥로고 레시피를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언제 이런 엄청난 기회를 얻을 수 있겠어. 어때? 많이 놀랐어? 전혀 예상 못 했지? 두 가문에서 너 대신 옥로고를 널리 알리겠다고 했으니까 오히려 우리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안세리는 한껏 우쭐거렸고 입이 귀에 걸렸다. 옥로고의 가치에 비하면 구세당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유진우에게서 레시피를 얻어낸 건 안씨 가문의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비겁한 것!”유공권이 이를 깨물고 분노를 터트렸다. 옥로고의 신기한 효능을 직접 본 그이기에 그 가치가 얼마나 엄청난지 잘 알고 있었다.유진우는 옥로고의 레시피로 엄청난 부를 가질 수 있었지만 안씨 가문이 배은망덕하게 레시피를 빼앗아갔다. 정말 파렴치하기 짝이 없었다.“안세리, 너희들이 진짜로 이겼다고 생각해?”유진우가 불쑥 한마디 했다.“그럼 아니야?”안세리가 웃으면서 되물었다.“김칫국부터 마시지 마. 너희들이 옥로고 레시피
“진우 씨, 이렇게 흥분하면 어떡해요? 송씨 가문과 안씨 가문을 건드리면 남쪽 구역에서 더는 발을 붙이기 어려울 거라고요.”유공권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세요, 명의님. 제 뒤에 엄청난 분이 있어서 두 가문이 절 건드리려고 해도 쉽지 않을 겁니다.”유진우가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엄청난 분이요? 그게 누군데요?”유공권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어쩐지 명문가에 겁 없이 덤빈다 했어. 뒤에 백이 있었구나. 하긴, 백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덤비지 못했겠지.’“그건 비밀이라서요.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유진우는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았다. 송씨 가문이든 안씨 가문이든 전혀 안중에 두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일을 크게 벌일 순 없었다. 신분이 노출되면 다른 세력도 알게 되기에 조용히 지낼 수 있으면 최대한 조용히 지내야 했다.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구세당의 큰불도 드디어 진압됐다. 고풍스럽고 위엄이 넘쳤던 건물이 이젠 완전히 폐허가 돼버렸다.담벼락이 다 무너졌고 곳곳에 불에 탄 재가 가득했다. 원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으니 재건해야만 했다. 그런데 재건하려면 엄청난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송영명 이 짐승만도 못한 놈!”폐허가 돼버린 구세당을 보며 유공권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이렇게 된 이상 명의님도 그만 속상해하세요. 제가 구세당을 최대한 빨리 재건할게요.”유진우가 위로를 건넸다.“재건요?”유공권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사이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송씨 가문과 안씨 가문에서 구세당을 눈독 들이고 있어요. 설령 재건한다고 해도 또 불을 지를 겁니다. 전 더 이상 반항할 힘도 없어요.”“명의님께서 절 믿으신다면 구세당을 저한테 파세요. 구세당을 꼭 예전의 모습 그대로 재건할게요. 약속드립니다.”유진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구세당 같은 의원은 나라의 보물이나 다름없기에 절대 사라져서는 안 되었다. 한의학의 세력이 약하고 이어가는 사람도 적은 지금 이런 의원을
“은도 씨, 나한테 사업 아이템이 있는데 무조건 큰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유진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래요? 무슨 사업인데요?”은도가 관심을 보였다.“전화로 얘기하기 어려우니까 한 시간 후에 제왕 빌딩에서 만나서 얘기해요.”유진우가 말했다.“알겠어요. 이따가 봐요.”전화를 끊은 후 유진우는 다시 차를 끌고 나갔다.왕현이 집을 지키고 있어 송씨 가문과 안씨 가문이 수작을 부려도 걱정은 없었다.점심 12시, 제왕 빌딩.안으로 들어온 유진우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 한 룸 앞에 멈춰 섰다.룸 안에 빨간 원피스 차림의 은도가 여유롭게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그녀는 옅은 메이크업에 예쁜 부채를 들고 있었고 검은 긴 머리를 풀어 뒤로 드리우고 있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어 섹시하고 글래머한 몸매가 더욱 유혹적으로 느껴졌다.특히 하얗고 긴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은 저도 모르게 다른 상상을 하게 했다.레트로풍 스타일이긴 했지만 분위기는 아주 요염했고 섹시했다. 서로 다른 분위기가 한데 어우러지니 오히려 또 다른 유혹이 되었다.“어머, 진우 씨 왔어요? 얼른 와서 앉아요.”유진우가 들어오자 은도는 재빨리 일어나 웃으면서 맞이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은도 씨.”유진우가 자리에 앉았다.“아니에요. 나도 금방 도착했는걸요.”은도는 웃으면서 유진우에게 차를 따라주었다.“자, 내가 직접 내린 건데 한 번 마셔봐요.”유진우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차네요. 근데 맛이 조금 특별해요.”“당연하죠. 내가 좋아하는 건 진우 씨도 무조건 좋아해야죠.”은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벗고 예쁜 발을 테이블 밑에 숨긴 채 유진우의 종아리를 슬쩍 터치하면서 점점 위로 올라갔다.“은도 씨, 본론을 얘기할게요.”유진우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거두고 침착하게 말했다.“은도 씨랑 함께 사업하면서 돈을 벌자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어요.”“돈을 벌자고요?
걱정하며 호들갑을 떠는 은도를 본 유진우는 흠칫 놀랐고 갑자기 멍해졌다. 그녀에게서 조선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선미 씨 잘 지내고 있나? 너무 오래 연락하지 않아서 화난 건 아니겠지?’유진우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손을 거두면서 상처를 싸매주려는 은도를 거절하며 설명했다.“괜찮아요, 은도 씨. 이런 작은 상처는 옥로고만 바르면 바로 나을 수 있어요.”그러고는 미리 준비한 옥로고를 꺼내 상처에 발랐다.전에 검은색이던 옥로고와 달리 이번에 바른 건 초록색이었고 옥처럼 투명했다. 이것이야말로 개량한 후의 정품이었다. 부작용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약효도 아주 좋았다.“아무리 약효를 보여준다고 해도 자해할 필요까진 없잖아요. 얼마나 아파요.”은도의 두 눈에 원망이 조금 섞여 있었다.“이렇게 해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고 설득력도 있으니까요.”유진우가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그냥 말해도 믿을 텐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팔에 흉터라도 생기면 보기 거북하잖아요.”은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그게 바로 내가 증명하려던 거예요. 옥로고는 외상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흉터도 없앨 수 있어요.”유진우는 찻주전자를 들고 두 잔을 따른 후 웃으며 말했다.“이 찻주전자에 담긴 차를 다 마시면 방금 다친 상처도 다 말끔히 사라질 겁니다.”“그래요?”은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유진우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은도도 점점 흥미가 생겼다.두 사람은 차를 음미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시간 거의 다 됐어요. 보세요, 은도 씨.”그러고는 휴지로 팔에 바른 옥로고를 살살 닦았다. 초록색의 약을 닦아내자 찢어졌던 상처가 신기하게도 사라졌고 흉터도 없었다. 옅은 붉은색 자국이 있었는데 그건 상처가 아문 자리였다.“네?”화들짝 놀란 은도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아까 상처는요? 왜 사라졌죠?”“사라진 게 아니라 치료된 거예요.”유진우가 바르게 수정했다.“말도 안 돼요.”은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15
“은도 씨, 손을 잡으면 당연히 혼자 싸우게 하지 않죠. 대부분의 압력은 내가 감당할 테니까 은도 씨는 제조와 홍보만 맡아주면 돼요. 은씨 가문의 인맥을 동원해서 옥로고의 명성만 널리 알리면 됩니다.”유진우의 진지한 말에 은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옥로고가 좋긴 했지만 안씨 가문 그리고 송씨 가문과 등을 돌려도 될 정도로 가치 있는 약일까?“물론 은도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을게요. 이 옥로고는 그냥 선물로 줄게요.”유진우는 덤덤하게 웃으면서 약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앞으로 쭉 밀었다.은씨 가문의 세력도 만만치 않긴 했지만 남쪽 구역에서는 3위였고 1위와 2위가 바로 안씨 가문과 송씨 가문이었다.만약 두 가문과 동시에 맞서 싸운다면 은씨 가문은 엄청난 압력을 견뎌야 했다. 이젠 은도의 결정만 남았다.“그나저나 진우 씨는 왜 나랑 손을 잡으려는 건데요?”은도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건넸다.“첫째는 은도 씨가 인품이 바른 사람이라서, 둘째는 우리 인연이 있어서예요. 그리고 셋째는 은씨 가문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유진우가 대답했다.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긴 했지만 은도는 여러 번이나 그를 도와줬었다.인품은 아무 문제 없었기에 유진우도 은씨 가문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서 안씨 가문과 송씨 가문의 지위를 대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그리고 옥로고가 바로 그 쐐기였고 은씨 가문이 일어설 수 있는 키포인트였다.“좋아요! 진우 씨가 날 이렇게 믿는데 나도 한번 해보도록 하죠!”잠깐 고민하던 은도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부귀영화를 누리려면 그만큼 모험도 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억눌려 산 은씨 가문이 들고 일어설 때도 됐다.“고마워요, 은도 씨.”유진우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은도가 욕심이 있고 필사적으로 싸우는 성격임을 보아낼 수 있었다. 일반 재벌의 딸이라면 절대 이런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자, 잘해봐요, 우리!”은도가 찻잔을 들고 요염하게 웃었다.“잘해봅시다.”유진우도 찻잔을 들어 건
별장으로 돌아온 유진우는 휴대전화를 들고 안절부절못했다.조금 전 은도와 사업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조선미 생각이 났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와 참을 수가 없었다.머릿속에 온통 조선미의 생각뿐이었고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왕현에게서 들었는데 조선미는 이미 외할아버지와 함께 연경으로 와서 발전하고 있다고 했다.전화 한 통이면 두 사람은 바로 만날 수 있었지만 유진우는 걱정이 앞섰다.연경도 남성 못지않게 숨은 세력이 많았고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하는 일이 너무 위험해서 조선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아니면 그냥 만나서 안부라도 물어볼까?”유진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한참 동안 베란다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숨을 길게 들이쉰 후 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5초 정도 이어지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흥! 드디어 나한테 전화했네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그동안 대체 어디 갔었어요? 다른 년 생긴 거 아니죠? 내가 진우 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어쩜 인사도 없이 나 혼자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나 해요?”“...”전화를 받자마자 연속으로 쏟아진 조선미의 질문에 유진우는 넋이 나갔다. 겨우 생각해낸 인사말을 할 수조차 없었고 말문이 막혀버렸다.“왜 아무 말이 없어요? 그래도 미안하긴 한가 봐요?”조선미도 그제야 마음을 진정했다.“아까 나한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잖아요.”유진우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아, 이젠 내가 귀찮고 시끄럽다 이거예요? 며칠 못 봤다고 그새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사람 마음이 어떻게 변해요?”조선미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 해요. 진심으로 사과할 테니까 부디 넓은 마음으로 한 번만 용서해줘요.”유진우는 바로 깨갱 했다.“흥, 진심으로 사과하는 걸 봐서 이번만 용서할게요. 다음에는 절대 용서 안 해요.”조선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사실 그동안 조선미도 유진우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내성 안에 최고의 권력을 상징하는 자금성이 있었는데 그곳은 야심이 많은 사람들이 꿈에 그리는 성지이자 유진우가 진실을 찾고 억울함을 풀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다.마침 퇴근 시간이라 차가 아주 막혔다. 유진우는 한 시간 전에 출발했는데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하늘이 다 어둑해진 뒤였다.조선미가 연회를 연 곳은 퀸즈라는 5성급 호텔이었다.환경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 오락 시설도 없는 게 없었다. 그리고 고급스럽고 서비스도 좋아서 손님들을 초대하기에는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그 시각 퀸즈 호텔 맨 꼭대기 층 1번 연회장 안.화려한 옷차림의 젊은 남녀들이 한데 모여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무대 위에서는 손님들의 흥을 돋우려고 춤과 노래가 끊이질 않았다.연회장 전체의 분위기가 아주 뜨거웠다.“선배님, 조선미 씨가 오늘 정말 얼굴을 비출까요?”구석에서 한 남녀가 술잔을 들고 뭔가를 찾는 듯 계속 두리번거렸다. 두 남녀가 바로 유성신과 유강청이었다.“당연하지.”유강청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알아봤는데 오늘은 우미 그룹에서 주최한 연회라고 했어. 회장인 선미 씨가 빠질 리가 있겠어? 아마 이따가 올 거야.”“선미 씨가 우릴 도와줄까요? 너무 걱정돼요.”유성신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오늘 구세당이 불에 탄 일로 이미 트라우마가 생겼다. 만약 어젯밤에 밤새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송씨 가문에서 저지른 화재라 고자질을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강청에게 부탁해서 더 대단한 거물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여 유강청은 유성신과 함께 이곳에 찾아왔다.“성신아,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조선미 씨가 나서서 도와준다면 송씨 가문이 아니라 안씨 가문도 너한테 함부로 어쩌지 못할 거야.”유강청이 진지하게 말했다.“그렇게 대단해요?”유성신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선배님, 조선미 씨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유강청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낮은 목소리
진이수의 갑작스러운 적대적 태도에 유진우는 잠시 당황하며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초면이고 아무런 악연도 없는 상황인데 왜 이렇게 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일까?’ “진 대장님, 우리가 전에 만난 적 있나요?” 유진우는 가볍게 물으며 손을 천천히 내렸다. “만난 적 없는데요.” 진이수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렇다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유진우가 되물었다. “저는 그저 청성 씨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 진이수는 여전히 단호하게 말했다. “죽음의 사막은 위험이 도사리는 곳으로서 들어간 사람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어요. 강한 실력과 전문적인 지식, 경험이 없다면 일반적인 사람은 하루도 살아남지 못해요. 청성 씨가 저를 고용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청성 씨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죠. 그런데 당신은 전문적인 경호원이 아닌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당신의 능력이 의심되네요. 사막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청성 씨가 오히려 당신에게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돼요.” 진이수의 말은 매우 직설적이고 거칠었다. “진 대장님, 청성 씨가 저를 데려온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의 역할은 단지 길을 안내하는 것뿐이에요. 위험을 피하고 그것만 잘하면 됩니다. 그 이상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저를 평가할 권리는 없습니다. 제가 할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유진우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는 성격이 온화한 편이지만 이처럼 자신을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돈을 받는 일도 적당히 해야죠. 이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그렇게 대충할 수 없어요.” 진이수는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이청성을 향했다. “청성 씨, 이 일과 관련된 뛰어난 경호원을 몇 명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저를 믿으신다면 그들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물론 비용이 더 들겠지만요.” “진 대장님, 그 마음은 고맙지만 저는 유진우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가 있기 때문에 제 안전은 문제가 없을 거예요.” 이청성은
차량은 일정한 속도로 순조롭게 달렸다. 결국, 그들은 다음 날 오전에 죽음의 사막의 가장자리 지역에 도착했다. 사막의 가장자리에는 크지 않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약 500-600가구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마을에는 여관, 주유소, 마트 등이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필요한 물건들은 다 갖추어져 있었다. 탐험대들에게 이 마을은 중요한 보급소로 위험한 순간에 생명의 은인이 되기도 한다. 사막에 들어가기 전이나 사막을 빠져나오는 이들은 모두 이 마을에 잠시 머물며 정보를 얻고 물자도 보충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사막으로 물자를 운반하기 어려운 탓에 마을의 물가가 외부보다 몇 배나 비쌌다는 것이다. 이청성의 차량 행렬은 마을에 들어가 ‘희망의 집’이라는 이름의 여관 앞에 멈췄다. 이 여관은 원래 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곳으로 방이 아주 많아 100명 넘게 수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청성 씨, 도착했습니다.” 차량이 멈추고 한 명의 용병 옷을 입은 남자가 이청성의 차 창문을 두드렸다. 그 남자는 30대 중반의 키 큰 남자였고 황색 군복을 입고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강한 인상의 얼굴을 지닌 그 남자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느낌을 주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진이수, 탐험대의 대장이며 죽음의 사막에 두 번 들어가 성공적으로 살아 돌아온 경험이 있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이청성은 그에게 큰돈을 주고 가이드를 맡겼다. 이번 탐험도 그가 이끌게 되었다. “진 대장님, 이곳이 바로 사막의 마을인가요?” 이청성은 차 문을 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부분의 건물은 낮고 허름해 보였다. 사막의 모래바람에 오랜 세월 닳고 닳아 마을은 전반적으로 허술하고 거칠게 보였다. 하지만 ‘희망의 집’이라는 여관은 예외였다.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자주 청소하는 듯했다. “맞습니다. 반경 100리 내에 이 마을 하나뿐입니다. 죽음의 사막에 가까워서 ‘사막의 마을’이라 불리죠.” 진이수는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이
왕부에 돌아온 유진우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두 통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유만수의 서재에 두었고 다른 하나는 유천우의 침실에 놓았다. 이 두 통의 편지는 사실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남기는 작별 인사였다. 유진우는 감정적인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했다. 때로는 침묵 속에서 떠나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일 때가 있었다. 황혼이 내려앉을 무렵, 유진우는 이청성의 차에 몸을 싣고 서남의 사막으로 향했다. 서남에서 가장 거대한 사막은 ‘죽음의 사막'이라고 불린다. 이 사막은 환경이 극도로 험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잘못 들어가면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물론 죽음의 사막은 위험하지만 그 안에는 보물도 숨겨져 있고 금광도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수많은 탐험대가 생명을 걸고 사막에 들어가 운을 시험하려 한다. 운이 좋으면 보물을 발견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될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목숨을 잃고 만다. 과장하지 않고 말하자면 매년 수백 명이 보물을 찾아 사막에 들어가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도 죽음의 사막에는 끝없이 많은 탐험대가 몰려든다.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고 새는 먹이를 위해 죽는다'는 말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일확천금을 꿈꾸며 사막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청성은 당연히 죽음의 사막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 신비로운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죽음의 사막에서 탐험했던 경험이 있는 전문 탐험대에게 큰돈을 지급해 길잡이를 맡겼다. 자신의 호위대와 합쳐 총 100명 이상의 인원과 30대가 넘는 차량이 함께 떠났다. 그중 절반 이상은 물자를 실은 차량이었다. 음식, 물, 나침반, 통신 장비, 응급처치 키트, 자외선 차단복, 구조 도구 등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청성은 부족함 없이 모든 물품을 준비했다. 밤이 깊어졌다. 차량 행렬은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었다. 유진우는 자리에 기대어 창밖으로 달빛을 바라보며 얼굴에 어떤 감정도 드러내
점심을 먹고 난 후, 유진우는 갑자기 이청성의 전화를 받았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상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만날 장소는 성서의 옛 저택으로 정했다. 성서에 있는 그 오래된 집은 유진우가 이미 구매해 놓은 곳으로 주로 밀사 훈련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전에 소현무에게 피해를 보았던 여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서경의 밀사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의 큰 뜻은 다시는 자신들처럼 고통을 겪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깊은 뜻에 유진우는 존경을 표했으며 그들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손도운의 훈련을 거친 그 여자들은 이제 입문 단계에 있지만 진짜 임무를 수행하려면 최소한 3년 이상의 연습이 필요했다. 유진우는 그들이 평생 임무를 수행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모든 것이 평화롭다는 의미였다. 밀사들은 잠재적인 위협이 있을 때만 활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그들은 거의 죽을 각오로 임무를 수행한다. 30분 후, 유진우는 성서의 오래된 집에 도착해 회의실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청성이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이청성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면사포와 모자로 가리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매만 봐도 여전히 매우 유혹적이었다. 특히 그녀에게서 풍기는 신비롭고도 매혹적인 기운은 마치 타고난 매력처럼 사람들을 쉽게 끌어당기는 느낌을 주었다. “왔어요?” 이청성은 직접 유진우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공주마마, 갑자기 절 찾으시다니,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유진우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우리 이렇게 친해졌는데 공주마마라 부르는 게 좀 어색하지 않나요? 다른 호칭을 쓰는 건 어때요?” 이청성은 미소를 머금은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뭐라 부르면 되나요? 아가씨? 아니면 여사님?” 유진우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이, 그런 거 말고 그냥 청성 씨라고 불러도 되잖아요. 왜 그렇게 격식을 차려요?” 이청성은
원인은 간단했다. 유진우는 배신자를 극도로 혐오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적인 자들은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했다. 반란을 일으킨 다섯 명을 처형한 후, 그들을 따랐던 고급 장교들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처분이 내려졌다. 강등될 자는 강등되고 포섭할 자는 포섭하며 감옥에 가야 할 자들은 감옥에 보냈다. 구체적인 처분은 자발적인 배신이었는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유진우는 반란을 수습하는 동시에 홍복홍에게 유만군의 한 부대를 이끌고 보물 지도의 위치를 따라 호룡각의 보물 창고를 찾아가도록 지시했다. 모든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호룡각에도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대 마스터인 홍복홍 앞에서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손쉽게 호룡각의 잔당을 소탕하고 보물 창고에 있던 모든 재물을 회수해 왔다. 사철수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물 창고 안에는 재물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경 왕부에서 동원한 수백 대의 대형 트럭과 수만 명의 인력을 총동원해야만 창고를 완전히 비울 수 있었다. 그 모든 재물의 양과 가치는 어마어마해서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이 보물만으로 서경의 향후 20년 군자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창고 하나만으로 이 정도라면 남은 세 개의 보물 창고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나라를 사고도 남을 부가 될 것이었다. 보물을 가져온 뒤 가장 먼저 진행된 것은 바로 공로를 논하고 상을 주는 일이었다. 남방의 세 명의 제후인 회음 제후 은성종, 평양 제후 장범규, 선평 제후 주한휘는 모두 큰 공을 세운 자들이었기에 마땅한 보상을 받았다. 그들의 휘하에 있던 장군과 병사들도 저마다 공훈에 따라 상을 받았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어느덧 사흘이 지나 있었다. 3일 후, 정오. 유진우가 식사하던 중 홍복홍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세자 전하, 아뢸 일이 있습니다.” 홍복홍은 몸을 숙이며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
“됐어,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방에 들어가서 쉬어.”유만수는 피곤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유만수가 유진우한테 왕위를 계승해 줄 생각을 했던 건 한편으로는 유진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책감 때문에 조금이나마 보상을 해주고 싶어서였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진우는 야망도 없고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그러니 유만수도 싫다는 아들을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얼마 남지 않은 삶이니 이젠 두 아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지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 외에 일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유진우는 뭔가를 말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우는 아직 왕이 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확실히 아니었다.다른 사람들한테는 서경의 왕은 최고의 권세를 대표하고 무궁무진한 부귀영화를 대표하며 세계 정상에 서는 위풍을 대표하겠지만, 유진우한테 서경의 왕은 너무 무거운 자리였다.그 자리는 오르기만 하면 짊어져야 할 것이 너무 많고 더 이상 자기 자신보다 전체 서경, 더 나아가 천하의 백성을 생각해야 한다.유진우는 자신은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 이렇게 무거운 책임을 질 자신이 없었다. 유진우는 이번만큼은 그냥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며칠 동안 유진우는 왕부에서 시간을 보냈다.반역을 평정하는 이번 일은 호룡각을 소탕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이 많았다.유만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유진우가 그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했다.먼저 유태범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유진우는 유태범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첫째, 병권을 반납하고 서경에 머물며 매일 개를 산책시키고 말을 타고 활을 쏘며 한가로운 귀족으로서 부귀한 삶을 누린다. 단, 어떤 세력도 있어서는 안 되며 수중의 호위대도 백 명을 넘지 말아야 한다.둘째, 어느 정도의 금전을 가지고 서경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발전한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왕부는 절대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제가 한 약속이니 제가 지켜야죠.”유진우가 꿀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는 보물 황옥주를 가지고 있어 용원의 기를 찾는 데 성공할 확률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야말로 해변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다.“그래. 그럼, 네 말대로 용원의 기는 네가 찾아봐. 그런데 문제는 그걸 찾고 난 다음에는 뭐 할래?”유만수는 되물었다.“그건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요. 아직 그렇게 멀리까지 생각 안 해봤어요.”유진우는 고래를 저으며 말했다.“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유만수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약속을 지킨 뒤 두말 말고 다시 돌아와서 왕위를 이어받아. 뒷걱정 없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말했잖아요. 저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유천우는 단번에 거절했다.“내 아들인 네가 왕위를 이어받지 않으면 누가 이어받아? 설마 정말 천우에게 이 중책을 맡길 생각이야?”유만수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천우는 학문도 능하고 무술도 능한데 안 될 건 또 뭐예요?”유진우가 반박하며 물었다.“우수한 건 맞지만 천우는 대장군이 더 어울려. 서경의 왕은 아니야.”유만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서경이 세력이 크긴 하지만 내우외환이 끊지지 않고 있어.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많은 세력이 반드시 들고 일어날 거야. 그때가 되면 천우가 막아낼 수 있을 거 같아? 천우한테 왕위를 계승하는 건 그를 해치는 길이야.”“그럼, 저는 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예요?”유진우가 물었다.“너는 팔자가 굳세고 대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이 세상에서 너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연경에 있는 분도 같은 생각이야. 네가 서경의 왕이 된다면 전체 국면을 안정시킬 수 있어. 나중에 서경에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너는 그만한 중책을 다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야.”유만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듣다 보니까 결국 저는 정세
유태범은 분한 마음에 울화통이 터졌지만 그렇다고 감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유진우와 유천우가 거절하며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왕은 그 두 사람 중에서 나와야 한다는 걸 유태범도 잘 알고 있었다.조금이라도 허튼 생각을 한다면 그의 최후도 채원진과 똑같아질 것이 뻔했다.“그만! 그만! 이 녀석들이! 왕위를 계승하라는데 무슨 처벌을 받듯이 말하고 있어? 그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야?”두 아들의 태도에 화가 난 유만수는 욕을 퍼부었다.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왕위를 값이 없이 여기며 서로 안 한다고 싸우는 두 아들 때문에 유만수는 너무 창피했다.“저는 정말 생각이 없어요. 천우한테 물려 주세요.”유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저는 왕위를 감당할 재목이 아니에요. 무조건 형을 시키세요.”유천우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둘 다 입 다물어!”유만수는 탁자를 세게 치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내가 결정해. 너희들이 제멋대로 이래라저래라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몸만 괜찮았다면 너희들이 왕위를 이렇게 빨리 넘겨받을 수 있었을 거 같아?”유만수가 화를 내자 유천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절대 못 하겠다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생각을 밝히고 있었고 유진우는 여전히 자신과 상관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유만수는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말했다.“자식놈들이 모두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줬네요. 왕위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오늘에는 모두 즐겁게 먹고 마시며 좋은 시간을 보냅시다.”“자자, 다들 마십시다.”장범규는 웃으면서 분위기를 풀었다. 그는 누가 왕위를 이어받든 상관없었다.결정은 순전히 유만수의 손에 달렸으니, 장범규는 누가 왕이 되었던 유만수의 결정을 따르고 지지할 생각이었다.방금까지 얼어있던 분위기는 금세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다만 아까와 달리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첫 번째 부류는 회음 제후 은성종을 필두로 유진우를
“뭐?”유진우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며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서경의 왕위는 수많은 사람이 바라지만 누구도 얻을 수 없는 자리였다.이렇게 존귀하고 최고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서로 마다하는 유진우와 유천우 때문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예전에는 왕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웠거늘, 유진우와 유천우는 완전히 반대였다.두 사람은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양보하며 왕위를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유진우를 지지하던 사람도 유천우를 지지하던 사람도 모두 입만 벌린 채 얼어있었다.당사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는데 정작 두 형제는 서로 양보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었다.“형, 애초에 약속했잖아요. 형이 왕이 되고 내가 장군이 돼서 형을 보좌한다고. 왜 말을 바꿔요?”유천우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언제?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어.”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게으르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것에 익숙해. 구속받는 것도 싫고 부담스러워서 싫어. 그리고 너를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아. 왕위는 네가 더 합당해.”“합당하기는 개뿔!”유천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내 능력이 어느 정도 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애당초 나는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에요. 하지만 형은 다르죠. 형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수하고 형이야말로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계승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후계자예요.”“천우야, 함부로 너 자신을 낮추지 마. 네가 나보다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야. 너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야.”유진우가 말했다.“난 몰라요! 아무튼 서경의 왕은 형이 하세요!”유천우는 화가 나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익지 않은 참외를 억지로 비틀어 따봤자 그 참외는 달지 않아. 나는 큰 포부도 없고 남을 위하는 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