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먼저 올라가 있어요. 난 여기서 친구 좀 기다릴게요.”호텔 로비로 들어온 후 단소홍은 핑계를 대고 이청아를 먼저 보냈다. 왜냐하면 걸림돌이 있는 한 그녀는 묻혀버릴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계속 이대로 함께 있었다간 어찌 친분을 맺고 재벌 남자를 꾈 수 있겠는가?“알았어. 연회장에서 기다릴게.”이청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그녀가 옆에 없자 단소홍은 바로 현장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녀는 일부러 로비에서 이리저리 거닐며 추파를 던지면서 이목을 끌었다. 그러고는 또 다가와 작업을 거는 남자들을 전부 거절했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기면서 제대로 밀당할 생각이었다.“저기요. 귀걸이 너무 예쁜데 어디서 샀어요?”“어디서 샀어요? 이렇게 반짝이고 예쁜 귀걸이는 처음 봐요.”“이 정도 큰 루비면 엄청 비싸겠죠?”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그녀를 둘러싸고 이것저것 물었다. 주얼리 앞에서는 그 어떤 저항력도 없는 게 여자이니까.“이건 판도라의 루비 귀걸이예요. 남자친구가 맞춤 제작해서 선물해준 거라 하나밖에 없어요. 가격은 뭐 그리 비싸진 않아요. 그냥 이삼억 정도 할걸요.”단소홍은 일부러 덤덤한 척 웃었다. 말투는 겸손했지만 얼굴의 오만함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이삼억이 안 비싸요? 역시 남다르네요.”“정말 너무 행복하겠어요. 남자친구가 이런 귀한 귀걸이까지 다 선물하고.”“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죠. 맞춤 제작해서 하나밖에 없는 귀걸이를 선물했다는 게 얼마나 뜻 깊어요. 정말 너무 부러워요.”여자들이 재잘거리며 그녀를 추어올렸다. 득의양양해진 단소홍은 콧대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녀는 주목을 받는 걸 좋아했고 남들의 아부도 즐겼다.그때 롤스로이스 한 대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자 뚜렷한 이목구비에 긴 머리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자가 주목을 받으며 걸어왔다.“강향란 씨?”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로비 안팎이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연회장 안.숨을 헐떡이는 단소홍을 본 이청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소홍아, 친구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어? 친구는?”“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대요.”단소홍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 참, 언니, 거울 좀 빌려줘요. 메이크업 좀 수정하게.”“너도 거울 챙겨왔잖아.”이청아가 말했다.“언니 거울이 더 좋아서 그래요.”단소홍은 대충 둘러대고는 이청아의 가방을 가져와 뒤지기 시작했다.이청아는 그녀의 막무가내 행동이 참으로 불쾌했다. 어릴 적부터 오냐오냐하며 자란 탓에 예의라고는 없었다.“고마워요, 언니.”거울을 찾아낸 후 단소홍은 가방을 휙 던지더니 구실을 찾아 화장실로 갔다.그때 연회장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강향란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을 받으며 걸어오더니 중앙에 딱 멈춰 섰다.“다들 조용해 주세요. 여러분들한테 알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강향란이 손을 흔들며 사람들을 진정시키자 연회장 전체가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오늘은 당연히 무척이나 기뻐해야 할 생일 파티지만 아주 불쾌한 일이 생겼어요.”강향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군가 제가 생일 선물로 받은 귀한 귀걸이를 훔쳐 갔어요. 판도라에서 맞춤 제작한 하나밖에 없는 귀걸이라서 저한테는 엄청 소중한 거거든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 전체가 떠들썩해졌다.“뭐? 감히 강향란 씨의 귀걸이를 훔쳐? 대체 누가 겁도 없이!”“반드시 범인을 찾아내야지! 이런 일은 절대 내버려 둬선 안 돼!”“젠장! 누가 훔쳐 갔는지 알아낸다면 절대 가만 안 둬!”뭇사람들이 저마다 흥분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귀걸이를 훔친 도둑을 경멸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강향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여러분 진정하세요. 사실 도둑은 이미 찾았어요.”강향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누구예요? 누가 훔쳤어요?”사람들이 궁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강향란이 싸늘하게 웃더니 곧장 이청아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가리켰다.“
“이 X년이! 감히 내 남자를 꼬셔? 너 오늘 내 손에 죽었어!”강향란이 쉴 새 없이 술을 들이부으며 모든 사람 앞에서 이청아를 능멸했다.그녀는 인정사정없이 거칠게 나왔다.술을 한 병 들이부으니 이청아는 녹초가 되어 초라한 꼴이 말이 아니었다.다만 강향란은 전혀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이청아의 머리채를 확 잡고 마구 비틀었다.이어서 거침없이 싸대기를 날렸다.“천한 년! 더러운 년! 감히 내 남자까지 건드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어?!”강향란은 욕설을 퍼부으며 미친 듯이 이청아의 뺨을 후려쳤다.한바탕 얻어맞은 이청아는 얼굴이 퉁퉁 붓고 입가에 피가 고였다.“왜? 대체 왜?”이청아는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에 기운이 쫙 빠졌다.“왜긴 뭐가 왜야? 무슨 낯짝으로 그걸 물어? 비겁한 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속이 빤하잖아!”강향란은 이청아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모질게 바닥에 내리쳤다.순간 피가 사방에 튀겼다.선홍빛 핏물과 술이 한데 섞여 그녀의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이청아를 보면서도 강향란은 마음 약해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 기승을 부렸다.그녀는 발을 들어 이청아의 손가락을 꽉 짓밟았다.“으악!”드디어 이청아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살이 찢기는 고통이 솟구쳐 올랐다.“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이 천한 년아! 임자 있는 남자를 뺏는 게 네 취미지? 그래, 뺏어봐, 실컷 뺏어봐!”강향란이 사악한 미소를 날리며 하이힐로 이청아의 손을 모질게 짓밟았다.점점 더 세게, 점점 더 모질게 짓밟았다.곧이어 이청아의 두 손이 찢겨 너덜너덜해졌다. 이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으악!”이청아는 고통스러워 사색이 된 얼굴로 몸을 벌벌 떨었다.열 손가락을 이렇게 짓밟히니 여자가 아니라 사내대장부라고 해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이 모습을 본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도 미간을 찌푸렸다.아무리 훔쳤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심하게 괴롭힐 필요가 있을까?극악무도의 끝판왕이었다!“언니, 내 탓 하지 말
언제부터인지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그 시각, 킹덤 호텔의 연회장 안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좀전의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연회의 진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강향란은 고고한 공주처럼 사람들에게 떠받들려 갖은 아부와 칭찬을 받고 있었다.다만 그녀는 대부분 사람들이 성에 차지 않았다.그저 몇몇 귀빈만이 그녀와 담소를 나눌 자격이 됐다.“아가씨, 진경준 씨랑 유강모 씨가 오셨어요.”이때 집사 한 명이 다가와 나지막이 보고했다.강향란이 고개를 돌리자 늠름한 자태의 두 남자가 연회장 입구에 덤덤하게 서 있었다.그중 한 명은 바로 현무문의 진경준이고 다른 한 명은 진경준의 동문 선배 유강모였다!그들 뒤엔 여자 호위 두 명이 따라왔다.“경준 씨, 강모 씨, 다들 오랜만이에요.”강향란이 얼른 다가가 활짝 미소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생일 축하해요, 향란 씨.”진경준과 유강모는 각자 선물을 그녀에게 건넸다.“자리에 참석해주신 것만으로도 저에겐 영광인데 뭘 또 선물까지 준비해왔어요?”강향란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드려야죠. 준혁 씨가 저희를 챙겨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소한 선물이니 달갑게 받아주세요.”진경준이 웃으며 대답했다.만약 흔한 재벌 집 딸이면 두 사람도 당연히 안중에 두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강향란의 오빠 강준혁은 현무문의 당주에게 직접 전수 받은 제자이기에 계급을 따져도 그들의 선배이다.하여 반드시 강향란에게 체면을 줘야 한다.“아 참, 우리 오빠는 왜 오늘 안 왔어요?”강향란이 되물었다.“선배님은 지금 폐관 중이라 잠시 자리를 떠날 수 없어요. 그래서 저희를 보내 안부 인사를 전한 거예요.”진경준이 설명했다.“그렇군요...”강향란이 머리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자리를 안내했다.“두 분 얼른 앉으세요.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하세요.”“네, 고마워요, 향란 씨.”진경준이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유강모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강향란의 열정적인 태도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 자식이 감히 향란 씨를 때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네!”“미쳤어, 미쳤어! 저 자식 제대로 미쳤다고!”“대놓고 이 소란을 피우고 향란 씨의 뺨을 때리다니, 신이 와도 저 녀석을 구할 순 없어!”유진우의 행동에 장내가 술렁거렸다.누군가는 충격으로, 누군가는 당황함에, 또 누군가는 탄복해 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이 바닥에선 오직 강향란만이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다고 룰이 정해진 듯싶었다. 그녀가 맞는 상황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죽여! 저놈 당장 죽여버릴 거야!”강향란이 다시 일어서며 미쳐 발악했다.그녀가 험상궂은 얼굴로 포효했다.“죽여버려!”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다들 몽둥이를 꺼내 들고 유진우에게 달려들었다.유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번개처럼 손을 뻗더니 주먹을 휘두르며 경호원들을 전부 쓰러 눕혔다.그 과정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는 경호원들을 보더니 뭇사람들이 또다시 입이 쩍 벌어졌다.이들은 전부 강씨 일가의 엘리트라 1대5로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실력인데 방금 유진우가 채 썰듯이 그들을 쓰러 눕혔다.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이리 와봐! 당장 와보란 말이야!”한 경호원이 무전기를 꺼내 구조 호출을 보냈다.유진우는 여전히 거들떠보지 않은 채 한 걸음씩 바짝 다가갔다.“막아! 당장 막아!”강향란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여 연신 뒷걸음질 쳤다.몇몇 구경꾼들이 영웅처럼 나서서 그녀를 구해주고 싶었지만 유진우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식겁하여 꼼짝달싹하지 못했다.“개 같은 자식! 네가 감히 날 때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강천호의 딸이야! 험상궂게 죽기 싫으면 지금 당장 내게 무릎 꿇고 빌어!”강향란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그녀는 자신의 집안 배경으로 상대에게 겁을 주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유진우를 제지하고 싶었다.다만 그녀가 맞이한 건 또 한 번의 싸대기였다.강향란은 한순간 머리가 아찔거렸고 입가가 피로 흥건해졌다.“네가 뭔
“뭐? 감히 우리 현무문의 사람을 때려?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네!”유강모의 눈빛이 순간 흉악하게 변했다.그들은 형제간의 정을 나눈 사이다. 감히 유강모의 사제를 때리는 건 그의 얼굴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다.“구해줘요... 나 좀 구해줘요!”강향란은 구세주를 본 것처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걱정 말아요, 향란 씨. 저희 두 사람이 있는 한 이 녀석은 오늘 절대 향란 씨를 건드리지 못해요!”진경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다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유진우가 또다시 강향란의 뺨을 후려쳤다.그는 두말없이 행동으로 모든 걸 보여줬다.“너...”진경준은 울화가 치밀었다.유진우가 의도치 않게 나오는 모습에 그는 살짝 적응하기 어려웠다.“개자식! 너 오늘 죽었어... 너희 온 가족을 죽여버릴 거야! 이 두 분은 현무문의 고수야. 이분들 앞에서 넌 한낱 쓰레기에 불과해. 네 손발을 부러뜨리라고 할 거야. 그리고 톡톡히 대가를 치러주지!”강향란이 휘청거리며 일어나 이를 악물고 표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현무문?!”순간 장내가 또다시 떠들썩해졌다.현무문의 위엄은 못 들어본 자가 없을 정도이다.그곳은 남방 전체에서 손꼽히는 큰 파벌이다.발을 살짝 흔들어도 강능의 산과 땅이 뒤흔들린다!현무문의 엘리트 제자들은 전부 뛰어난 인재라 실력이 막강하다.아무나 한 명 내놔도 한 개 구역을 휩쓸 정도이다!“현무문의 사람까지 와있었네. 저 녀석 틀림없이 죽을 거야!”“그러게 왜 그런 짓을 해서!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을 피워? 온몸의 뼈가 부서질 거야!”“젊은이, 내가 자네라면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 거야. 어쩌면 목숨은 건질지도 모르잖아.”뭇사람들이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거만을 떨었다.그들이 볼 때 유진우의 실력이 나쁜 건 아니지만 고작 이 실력으로 현무문의 고수들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현무문이면 또 뭐가 달라져? 아무도 내 앞길을 못 막아!”유진우가 전혀 겁먹지 않은 듯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자식! 아주 미쳐 날뛰
“헐! 방금 뭐야?”부러진 검에 쓰러진 두 여자 호위, 뭇사람들은 한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다들 유진우가 잘못 걸려들었다고 여겼는데 도리어 그가 현무문의 엘리트를 바닥에 쓰러 눕히다니.입이 쩍 벌어질 광경이었다.“자식, 이렇게 대단했어?”진경준도 놀란 기색이 역력하여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저번엔 무방비 상태로 당했다고 변명할 순 있지만 이번엔 진짜 실력 차이였다.“한 실력 하는군. 어쩐지 여기서 겁도 없이 소란을 피우더라니.”유강모가 실눈을 뜨고 실실 쪼개며 웃었다.아진, 아현의 실력이 유강모에 훨씬 못 미친다 해도 일반 무사를 상대하기엔 충분했다.유진우가 그런 아진, 아현을 가볍게 재꼈으니 그의 실력을 무시할 수 없다.다만 딱 그 정도까지였다.“경준 씨! 아무 문제 없다고 했잖아요?”강향란이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다 무너진 그녀의 얼굴은 다시 보니 악귀처럼 사악할 따름이었다.“작은 해프닝일 뿐이에요.”진경준이 머쓱한 듯 웃으며 해명했다.“괜찮아요, 강모 형만 있으면 저 녀석은 도망 못 가요!”“향란 씨, 진정하세요. 제가 반드시 향란 씨를 위해 복수할 겁니다!”유강모가 앞으로 두어 걸음 나서며 유진우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거만한 자세로 유진우에게 말했다.“네가 한 실력 하는 건 인정해. 다만 아쉽게도 넌 나를 만났지! 지금 기회 줄게. 당장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게 빌면 목숨은 살려둘게!”“들었어 이 X끼야?! 당장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우리 형이 널 아작내는 수가 있어!”진경준도 유강모의 세력만 믿고 마구 짖어대기 시작했다.“그래? 그럼 어디 한번 해보던가.”유진우가 싸늘한 눈빛으로 돌변했다.“이 자식이! 아직도 사리 분별이 안되나 봐? 너 우리 강모 형이 누군지 알아? 이 바닥에서 명성이 자자한 번개손이야!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진경준이 턱을 치켜세우고 말했다.순간 장내가 또다시 떠들썩해졌다.“뭐라고? 저분이 설마 번개손 유강모 씨야?!”“맙소사! 번
“휙!”거센 바람이 휘몰아쳐 유강모의 얼굴이 변형될 것만 같았다.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니 유진우의 주먹이 마침 그의 가슴팍에서 멈췄다.몇 센티미터를 사이 두고 멈췄는데 강력한 그 파워만으로도 유강모의 몸이 의연히 휘청거렸다.그는 순간 선홍빛 핏물을 내뿜었다.주먹에 따라온 바람만으로 내상을 입었으니 만약 이 주먹에 맞았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다행히 아까 바로 무릎을 꿇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어르신!”유강모는 겁에 질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바닥에 꿇은 채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좀전의 위풍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그는 지금 놀라움보다도 두려움이 더 앞섰다!주먹이 맞부딪힌 순간 늘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의 내공이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겨 아무런 저항력도 없었다.덩달아 온몸의 경맥에 막중한 상처를 입었다.실력이 몇 단계 떨어져야 이런 상황이 일어난다.하여 유진우가 다시 공격하려 할 때 그는 바로 항복하고 용서를 빌었다.긴 건 기고 아닌 건 아니니 일단 살고 봐야 한다.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일이 뭐가 대수라고?“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지 마. 꺼져 당장!”유진우가 차갑게 쏘아붙였다.“네, 지금 바로 꺼지겠습니다!”드디어 목숨을 건진 유강모는 일 초의 망설임 없이 곧장 연회장을 뛰쳐나갔다.체면이고 뭐고 다 부질없는 노릇이었다.“아니 이건...”황량하게 도망치는 그의 낭패한 모습에 장내가 고요한 정적에 빠졌다!언더 랭킹 고수이자 현무문의 엘리트, 명성이 자자한 번개손이 그냥 이렇게... 도망쳤다고?!다들 믿기 어려운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런 결과일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유강모가 나서면 가차 없이 유진우를 제압할 거로 여겼는데 결과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직접 지켜본 게 아니라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번개손이 유진우에게 맞아 쥐새끼처럼 허겁지겁 도망치다니!“아니... 어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
이 순간 유진우의 눈이 피를 뿜을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살기가 솟구쳤다.비록 예전에 아버지와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그동안 품었던 그 작은 분노마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단지 호룡각의 일을 완전히 해결한 후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 효도를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둘이 만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암살당해 돌아가셨다. 이 충격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창공!” 유진우가 갑자기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어 창공보검을 불러들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호룡각의 잔당들을 모조리 섬멸해야만 했다!“전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유진우가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손도운이 급히 그를 막아서며 침착하게 조언했다. “호룡각은 준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렇게 무모하게 뛰쳐나가신다면 복수는커녕 오히려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실 수 있습니다!”“비키세요!” 유진우의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창공검의 칼날을 손도운의 목에 바로 겨누었다. 예리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며 상처를 내자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전하! 저를 죽이시더라도 전 전하를 막아야만 합니다. 제가 어찌 전하께서 죽으러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 더 이상의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손도운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진우 앞을 가로막은 채 죽음도 불사하는 자세를 취했다.유진우는 이를 악물었고 그의 손에 든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초간의 대치 끝에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마침내 검을 내렸다.손도운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냉정해져야만 했다. 유만수가 죽었으니 왕부가 분명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이때
다른 처녀들도 모두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진심 어린 간청을 했다.이 광경을 본 유진우는 넋이 나갔다.노란 옷 처녀의 말은 그의 귀를 때리는 듯했다.지옥 같은 일을 겪고도 이 아이들이 자신이 아닌 천하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이런 원대한 뜻과 깨달음은 그조차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이청성이 말했듯, 이들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을 향하는 처녀들이었다.귀하고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누가 여자가 남자만 못하다 했는가?진정한 대의 앞에서 이 여자들이야말로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었다.이런 의로운 용사들이 있는데 어찌 서경이 부흥하지 않을까? 어찌 천하가 평안하지 않을까?“오빠, 결정해요. 받아주지 않으면 저 애들은 살아갈 희망조차 잃을 거예요.” 이청성이 진지하게 말했다.“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어요?” 유진우가 엄숙하게 물었다.“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모든 소녀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 허락하죠!”유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을 시작할 거예요. 견뎌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다면 편한 곳에서 평안히 살도록 해요.”“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의 소녀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소녀들도 따라 외쳤다.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성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네가 돌봐. 내일 저애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해.”“알겠어요.”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소녀들을 데리고 떠났다.일행이 막 나가자 손도운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그의 표정이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고 큰일이라도 난 듯했다.“전하! 큰일 났습니다!”유진우를 보자마자 손도운은 ‘쿵’하고 무릎을 꿇고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왕부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왕께서 자객의 암살로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요?”이 말을 듣자 유진우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
“오빠, 급한 건 알지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아가씨들은 지금 오빠만 믿고 있고 목숨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받아들이면 좋은 점이 많을 거예요. 예를 들어, 오빠가 외로울 때...”“농담하지 말고 요점이나 말해요!” 유진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솔직히 말할게요.”이청성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장혁 씨, 사실 이 처녀들은 보기 드문 인재예요. 제가 이미 선별했는데 모두 영리하고 의지가 강해요. 조금만 가르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예요.”“무슨 뜻이에요?” 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밀사의 중요성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여자 밀사는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장점이 있죠. 이 처녀들을 밀사로 키우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청성이 말했다.“말은 쉽지, 밀사 하나 키우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전 지금 제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든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그는 이 처녀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지, 이용당하거나 장기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충성심인데 그들은 이미 그걸 가지고 있어요. 장혁 씨가 그들을 구해줬고 장혁 씨의 빛이 그들의 어두운 세상을 비춰줬죠. 저애들은 장혁 씨를 신처럼 여기고 있어요.”“시간과 노력은 걱정하지 마요. 장혁 씨가 직접 가르칠 필요 없이 좋은 스승만 찾아주면 돼요. 장혁 씨 곁의 손도운이라면 아주 적합할 것 같은데요.” 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었다.“그건 청성 씨 생각이고 저 애들한테는 물어봤어요?” 유진우가 물었다.“당연히 물어봤죠. 모두 하겠대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이청성이 말했다.“불쌍한 사람들인데 그럴 필요까지야...” 유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장혁 씨, 어둠 속에 있어도 빛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세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발 저희를
“마마의 뜻은 내통자를 찾으라는 것입니까?”석태혁이 물었다.“아니요, 내통자와 범인 수사는 이미 홍 장군에게 맡겼습니다. 석 장군께선 더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이의진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경은 최근 몇 년간 불안정했어요. 전에는 어르신이 계셔서 소인배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했지만 이제 어르신께서 돌아가셨으니 서경이 혼란에 빠질 것이고 우리 왕부가 가장 먼저 모든 이의 표적이 될 겁니다.”“제가 유만군을 소집한 것은 왕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누구든 왕부를 해하려 한다면 즉시 처단하세요. 자비를 베풀 필요 없습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대답했다.비상시기에는 비상조치가 필요했다. 왕이 돌아갔으니 왕부가 곧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상황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왕부가 위험할 뿐 아니라 서경이 사분오열되어 제후들이 각자의 영토를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천하가 대란에 빠질 것이다!“석 장군, 장군께선 어르신의 심복이자 우리 왕부의 기둥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모두 장군께 달렸습니다.” 이의진이 깊은 뜻을 담아 말했다.“소신, 충성을 다해 왕부를 지키겠습니다!” 석태혁의 표정이 결연했다.왕이 암살당한 것은 친위대장인 자신의 책임이었다. 왕부가 지금 사람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면 자결로 죄를 갚았을 것이다.“석 장군, 전 이미 소식을 봉쇄했습니다. 어르신의 서거를 아는 이가 많지 않아요. 조금 후 조문 오는 자들을 잘 살피세요. 대부분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올 테니 누구든 방자히 굴면 즉시 체포하세요!” 이의진이 다시 명령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왕의 죽음은 모두에게 숨길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흉심을 품은 자들은 이미 왕부에 첩자를 심어두었을 거고 왕의 서거를 알면 반드시 방문을 빌미로 허실을 탐색하거나 심지어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오늘부로 왕부는 평온할 수 없을 것같았다....서쪽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에서.유진우가 막 기상하여 문을 열자 밖에 십여 명의 꽃다운 처녀들이
“어르신!”“깨어나세요! 제발 깨어나세요!”이의진은 숨이 끊어진 유만수를 보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모든 일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그가 자신의 품에서 이렇게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소식을 듣고 모여든 왕부의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쏟아냈다. 유만수는 왕부의 하늘이자 서경의 하늘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하늘이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시간이 흘러 날이 밝았다.서경 왕부 전체가 비통한 분위기에 잠겼고 전에 정무를 보던 대청은 이제 영당이 되어 사방에 흰 만장이 걸렸다. 정교하게 조각된 검은 관이 중앙에 놓였고, 그 안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유만수가 평온한 얼굴로 누워있었다.영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 꿇고 있었는데 대부분 왕부의 신임 장수들과 유씨 가문의 자제들로, 모두 상복을 입고 슬픔에 잠겨있었다. 이의진은 맨 앞에서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홍복홍이 들어와 영정 앞에 절을 올리고 이의진 앞으로 와서 깊이 절했다.“왕비마마, 왕의 장례는 분부대로 처리했습니다. 소식을 봉쇄하고 조용히 진행하여 민심이 동요치 않게 했습니다.”“범인은 잡았습니까?” 이의진이 눈물을 닦으며 살기를 뿜었다.남편이 눈앞에서 피살당했으니 그녀는 범인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범인의 무공이 너무 높아 추적에 실패했습니다.”“호룡각 잔당의 소행이에요. 즉시 수사하세요. 범인을 반드시 잡아오되, 필요하다면 흑용군을 동원해도 좋습니다!”“네.” 홍복홍은 물러갔다.“천우는 언제 오나?” 이의진이 고개를 돌려 여자 호위병에게 물었다.“도련님께서 변방 훈련 중이라 전갈을 보냈으니 오후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여자 호위병이 대답했다.“왕부 경계를 엄중히 하고 아무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해.”이의진이 또 명령을 내렸다.“네!” 호위병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다.“어르신, 제가 반드시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의진은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영당을 나와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후원에
“물러가겠습니다.”이의진이 예를 갖추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까만 인영 하나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검은 복면의 자객이었다.“조심하세요!”이의진이 순간 얼어붙었다가 외쳤다.“유만수! 죽어!”흑의인이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검을 내지르자 섬광이 스치더니 검은 유만수의 가슴을 관통했다.한 줄기 빛처럼 빠른 검세에 누구도 반응할 틈이 없었다.유만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가슴을 꿰뚫은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문간에 있었던 이의진도 충격에 빠져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왕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어떻게 자객이 들어왔단 말인가?하필 홍복홍과 석태혁이 공무로 나간 때를 노린 것이, 마치 미리 계획된 듯했다.“유만수! 이것이 호룡각에 맞선 대가다!”흑의인이 거칠게 검을 뽑자 유만수의 가슴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사람 살려! 자객이야! 자객이 들었어!” 이의진이 소리쳤다.순식간에 서경 왕부 전체가 발칵 뒤집혔고 호위병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흑의인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즉시 지붕으로 도약해 달아났고 왕부의 고수들은 연이어 공중으로 날아올라 최대한 빠르게 추격했다.“어르신! 어르신!”이의진이 급히 유만수 앞으로 달려갔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유만수는 가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고 말을 하려다 격렬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어르신! 말씀하지 마세요! 괜찮으실 거예요! 꼭 괜찮으실 거예요!”이의진은 한 손으로 유만수의 상처를 누르며 다른 손으로 문 밖을 향해 외쳤다. “의원! 의원은요? 어서 와서 어르신을 살려주세요!”“의진아...” 유만수가 떨리는 손으로 이의진의 팔을 붙잡고 힘없이 말했다. “의진아... 나는 이제 끝에 다다랐어. 잘 들어... 내가 죽으면 서경이 크게 혼란스러워질 거야. 네가 왕비로서 사태를 안정시켜야 해. 내 신임하는 장수들이 널 도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