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이튿날 새벽, 천향원.조선미는 커피를 마시며 여러 자료를 훑어보았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그녀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조금 드리웠다.“조선미!”그때 조준서가 흰 눈썹 영감과 함께 기세등등하게 걸어 들어왔다.“무슨 일인데?”조선미는 고개도 들지 않고 계속 자료를 훑었다.“쾅!”조준서가 다짜고짜 한 나무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더니 뚜껑을 열었다. 흰 알약 하나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조선미, 이게 뭔지 봐봐.”조준서가 알약을 가리켰다.“이게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알려줘야지.”조선미는 여유롭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흥! 우리 가문의 백령환도 몰라?”조준서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이게 바로 백령환이구나... 그런데 왜?”조선미가 덤덤하게 물었다.“왜? 왜냐고?”조준서의 말투가 싸늘해졌다.“내가 이 백령환을 어디서 사 왔는지 알아? 강씨 가문에서 사 왔어! 강씨 가문에서 연구에 성공했다고!”“그래? 그런데 뭐? 진작 예상한 일 아니었어?”조선미의 표정이 평온하기 그지없었다.“너 지금 무슨 태도야? 아직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겠어?”조준서가 한스러워하며 말했다.“강씨 가문에서 제조한 백령환의 약효가 아주 뛰어나서 많은 재벌들이 벌써 예약하기 시작한대. 지금 백령환 한 알 값이 1억까지 뛰었어!”“그래서?”조선미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물건은 흔치 않을수록 귀한 법이라고 시중에 아직 백령환만큼 좋은 약이 없어. 계속 이대로 나갔다가 강씨 가문에서 시장이라도 개척한다면 우린 정말 끝이야!”조준서가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대체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조선미가 되물었다.“너한테 두 가지 선택을 줄게. 하루빨리 백령환을 만들어내거나 강천호랑 손을 잡거나 둘 중 하나 선택해!”조준서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군가 백령환의 연구 성과를 도둑질해간 바람에 인제 와서 다시 시작한다는 건 너무 늦었어. 강천호랑 손을 잡는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
그날 오후, 이씨 가문 별장.“누나, 이따가 강향란 씨 생일 파티에 가지?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돼?”테이블 위에 놓인 초대장을 본 이현이 신바람 난 얼굴로 물었다.어쨌거나 강향란은 최고 재벌 강천호의 딸이기에 그런 거물과 친분을 맺는다면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다.“생일 파티에 가는 건 맞는데 둘 밖에 못 가. 소홍이가 먼저 가겠다고 했어.”이청아는 기대 부푼 그에게 찬물을 확 끼얹었다.“쟤랑 간다고?”이현은 소파에 앉아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단소홍을 돌아보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누나, 누나 친동생은 나야. 쟤를 데려가면서 날 안 데려가려고?”그의 말에 단소홍이 하찮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오빠가 가서 뭘 어쩔 건데? 오늘 파티에 참석하는 분들은 전부 고위 관직이나 상류층에 있는 분들이야. 오빠처럼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애가 가기엔 창피하지 않아?”“야! 너 그게 무슨 뜻이야? 넌 뭐 잘난 줄 알아?”이현은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그래도 오빠보단 잘났지.”단소홍은 그의 체면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너...”이현이 화를 내려 하자 장경화가 말렸다.“됐어, 그만들 해. 소홍이 금방 졸업했으니까 이번에 청아랑 같이 생일 파티에 가서 인맥 넓힐 기회를 줘. 오빠인 네가 양보해.”“들었어? 내가 강향란 씨랑 친구가 된다면 벼락출세할 수 있고 앞날이 창창해져. 그때가 되면 오빠도 내 덕을 보게 될 거야.”단소홍이 고개를 들며 으쓱거렸다.“흥! 네 덕을 본다고? 차라리 나 자신을 믿고 말지.”이현이 소파에 앉으며 씩씩거렸다. 그는 단소홍이 오고 나서부터 사랑을 빼앗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 참, 청아야,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네...”그때 장경화가 뭔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가방에서 정교한 액세서리 케이스를 꺼냈다.“이건 며칠 전에 호준이가 너한테 주려고 산 선물이야. 오늘 생일 파티에 갈 때 이거 하고 가면 되겠네. 열어봐봐.”케이스를 열자 루비 귀걸이 한 쌍이 담겨있었다. 장인의 손길이 느껴질 정도로 섬
“언니 먼저 올라가 있어요. 난 여기서 친구 좀 기다릴게요.”호텔 로비로 들어온 후 단소홍은 핑계를 대고 이청아를 먼저 보냈다. 왜냐하면 걸림돌이 있는 한 그녀는 묻혀버릴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계속 이대로 함께 있었다간 어찌 친분을 맺고 재벌 남자를 꾈 수 있겠는가?“알았어. 연회장에서 기다릴게.”이청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그녀가 옆에 없자 단소홍은 바로 현장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녀는 일부러 로비에서 이리저리 거닐며 추파를 던지면서 이목을 끌었다. 그러고는 또 다가와 작업을 거는 남자들을 전부 거절했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기면서 제대로 밀당할 생각이었다.“저기요. 귀걸이 너무 예쁜데 어디서 샀어요?”“어디서 샀어요? 이렇게 반짝이고 예쁜 귀걸이는 처음 봐요.”“이 정도 큰 루비면 엄청 비싸겠죠?”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그녀를 둘러싸고 이것저것 물었다. 주얼리 앞에서는 그 어떤 저항력도 없는 게 여자이니까.“이건 판도라의 루비 귀걸이예요. 남자친구가 맞춤 제작해서 선물해준 거라 하나밖에 없어요. 가격은 뭐 그리 비싸진 않아요. 그냥 이삼억 정도 할걸요.”단소홍은 일부러 덤덤한 척 웃었다. 말투는 겸손했지만 얼굴의 오만함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이삼억이 안 비싸요? 역시 남다르네요.”“정말 너무 행복하겠어요. 남자친구가 이런 귀한 귀걸이까지 다 선물하고.”“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죠. 맞춤 제작해서 하나밖에 없는 귀걸이를 선물했다는 게 얼마나 뜻 깊어요. 정말 너무 부러워요.”여자들이 재잘거리며 그녀를 추어올렸다. 득의양양해진 단소홍은 콧대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녀는 주목을 받는 걸 좋아했고 남들의 아부도 즐겼다.그때 롤스로이스 한 대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자 뚜렷한 이목구비에 긴 머리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자가 주목을 받으며 걸어왔다.“강향란 씨?”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로비 안팎이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연회장 안.숨을 헐떡이는 단소홍을 본 이청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소홍아, 친구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어? 친구는?”“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대요.”단소홍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 참, 언니, 거울 좀 빌려줘요. 메이크업 좀 수정하게.”“너도 거울 챙겨왔잖아.”이청아가 말했다.“언니 거울이 더 좋아서 그래요.”단소홍은 대충 둘러대고는 이청아의 가방을 가져와 뒤지기 시작했다.이청아는 그녀의 막무가내 행동이 참으로 불쾌했다. 어릴 적부터 오냐오냐하며 자란 탓에 예의라고는 없었다.“고마워요, 언니.”거울을 찾아낸 후 단소홍은 가방을 휙 던지더니 구실을 찾아 화장실로 갔다.그때 연회장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강향란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을 받으며 걸어오더니 중앙에 딱 멈춰 섰다.“다들 조용해 주세요. 여러분들한테 알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강향란이 손을 흔들며 사람들을 진정시키자 연회장 전체가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오늘은 당연히 무척이나 기뻐해야 할 생일 파티지만 아주 불쾌한 일이 생겼어요.”강향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군가 제가 생일 선물로 받은 귀한 귀걸이를 훔쳐 갔어요. 판도라에서 맞춤 제작한 하나밖에 없는 귀걸이라서 저한테는 엄청 소중한 거거든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 전체가 떠들썩해졌다.“뭐? 감히 강향란 씨의 귀걸이를 훔쳐? 대체 누가 겁도 없이!”“반드시 범인을 찾아내야지! 이런 일은 절대 내버려 둬선 안 돼!”“젠장! 누가 훔쳐 갔는지 알아낸다면 절대 가만 안 둬!”뭇사람들이 저마다 흥분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귀걸이를 훔친 도둑을 경멸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강향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여러분 진정하세요. 사실 도둑은 이미 찾았어요.”강향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누구예요? 누가 훔쳤어요?”사람들이 궁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강향란이 싸늘하게 웃더니 곧장 이청아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가리켰다.“
“이 X년이! 감히 내 남자를 꼬셔? 너 오늘 내 손에 죽었어!”강향란이 쉴 새 없이 술을 들이부으며 모든 사람 앞에서 이청아를 능멸했다.그녀는 인정사정없이 거칠게 나왔다.술을 한 병 들이부으니 이청아는 녹초가 되어 초라한 꼴이 말이 아니었다.다만 강향란은 전혀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이청아의 머리채를 확 잡고 마구 비틀었다.이어서 거침없이 싸대기를 날렸다.“천한 년! 더러운 년! 감히 내 남자까지 건드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어?!”강향란은 욕설을 퍼부으며 미친 듯이 이청아의 뺨을 후려쳤다.한바탕 얻어맞은 이청아는 얼굴이 퉁퉁 붓고 입가에 피가 고였다.“왜? 대체 왜?”이청아는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에 기운이 쫙 빠졌다.“왜긴 뭐가 왜야? 무슨 낯짝으로 그걸 물어? 비겁한 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속이 빤하잖아!”강향란은 이청아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모질게 바닥에 내리쳤다.순간 피가 사방에 튀겼다.선홍빛 핏물과 술이 한데 섞여 그녀의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이청아를 보면서도 강향란은 마음 약해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 기승을 부렸다.그녀는 발을 들어 이청아의 손가락을 꽉 짓밟았다.“으악!”드디어 이청아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살이 찢기는 고통이 솟구쳐 올랐다.“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이 천한 년아! 임자 있는 남자를 뺏는 게 네 취미지? 그래, 뺏어봐, 실컷 뺏어봐!”강향란이 사악한 미소를 날리며 하이힐로 이청아의 손을 모질게 짓밟았다.점점 더 세게, 점점 더 모질게 짓밟았다.곧이어 이청아의 두 손이 찢겨 너덜너덜해졌다. 이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으악!”이청아는 고통스러워 사색이 된 얼굴로 몸을 벌벌 떨었다.열 손가락을 이렇게 짓밟히니 여자가 아니라 사내대장부라고 해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이 모습을 본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도 미간을 찌푸렸다.아무리 훔쳤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심하게 괴롭힐 필요가 있을까?극악무도의 끝판왕이었다!“언니, 내 탓 하지 말
언제부터인지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그 시각, 킹덤 호텔의 연회장 안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좀전의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연회의 진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강향란은 고고한 공주처럼 사람들에게 떠받들려 갖은 아부와 칭찬을 받고 있었다.다만 그녀는 대부분 사람들이 성에 차지 않았다.그저 몇몇 귀빈만이 그녀와 담소를 나눌 자격이 됐다.“아가씨, 진경준 씨랑 유강모 씨가 오셨어요.”이때 집사 한 명이 다가와 나지막이 보고했다.강향란이 고개를 돌리자 늠름한 자태의 두 남자가 연회장 입구에 덤덤하게 서 있었다.그중 한 명은 바로 현무문의 진경준이고 다른 한 명은 진경준의 동문 선배 유강모였다!그들 뒤엔 여자 호위 두 명이 따라왔다.“경준 씨, 강모 씨, 다들 오랜만이에요.”강향란이 얼른 다가가 활짝 미소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생일 축하해요, 향란 씨.”진경준과 유강모는 각자 선물을 그녀에게 건넸다.“자리에 참석해주신 것만으로도 저에겐 영광인데 뭘 또 선물까지 준비해왔어요?”강향란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드려야죠. 준혁 씨가 저희를 챙겨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소한 선물이니 달갑게 받아주세요.”진경준이 웃으며 대답했다.만약 흔한 재벌 집 딸이면 두 사람도 당연히 안중에 두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강향란의 오빠 강준혁은 현무문의 당주에게 직접 전수 받은 제자이기에 계급을 따져도 그들의 선배이다.하여 반드시 강향란에게 체면을 줘야 한다.“아 참, 우리 오빠는 왜 오늘 안 왔어요?”강향란이 되물었다.“선배님은 지금 폐관 중이라 잠시 자리를 떠날 수 없어요. 그래서 저희를 보내 안부 인사를 전한 거예요.”진경준이 설명했다.“그렇군요...”강향란이 머리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자리를 안내했다.“두 분 얼른 앉으세요.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하세요.”“네, 고마워요, 향란 씨.”진경준이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유강모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강향란의 열정적인 태도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 자식이 감히 향란 씨를 때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네!”“미쳤어, 미쳤어! 저 자식 제대로 미쳤다고!”“대놓고 이 소란을 피우고 향란 씨의 뺨을 때리다니, 신이 와도 저 녀석을 구할 순 없어!”유진우의 행동에 장내가 술렁거렸다.누군가는 충격으로, 누군가는 당황함에, 또 누군가는 탄복해 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이 바닥에선 오직 강향란만이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다고 룰이 정해진 듯싶었다. 그녀가 맞는 상황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죽여! 저놈 당장 죽여버릴 거야!”강향란이 다시 일어서며 미쳐 발악했다.그녀가 험상궂은 얼굴로 포효했다.“죽여버려!”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다들 몽둥이를 꺼내 들고 유진우에게 달려들었다.유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번개처럼 손을 뻗더니 주먹을 휘두르며 경호원들을 전부 쓰러 눕혔다.그 과정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는 경호원들을 보더니 뭇사람들이 또다시 입이 쩍 벌어졌다.이들은 전부 강씨 일가의 엘리트라 1대5로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실력인데 방금 유진우가 채 썰듯이 그들을 쓰러 눕혔다.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이리 와봐! 당장 와보란 말이야!”한 경호원이 무전기를 꺼내 구조 호출을 보냈다.유진우는 여전히 거들떠보지 않은 채 한 걸음씩 바짝 다가갔다.“막아! 당장 막아!”강향란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여 연신 뒷걸음질 쳤다.몇몇 구경꾼들이 영웅처럼 나서서 그녀를 구해주고 싶었지만 유진우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식겁하여 꼼짝달싹하지 못했다.“개 같은 자식! 네가 감히 날 때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강천호의 딸이야! 험상궂게 죽기 싫으면 지금 당장 내게 무릎 꿇고 빌어!”강향란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그녀는 자신의 집안 배경으로 상대에게 겁을 주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유진우를 제지하고 싶었다.다만 그녀가 맞이한 건 또 한 번의 싸대기였다.강향란은 한순간 머리가 아찔거렸고 입가가 피로 흥건해졌다.“네가 뭔
“뭐? 감히 우리 현무문의 사람을 때려?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네!”유강모의 눈빛이 순간 흉악하게 변했다.그들은 형제간의 정을 나눈 사이다. 감히 유강모의 사제를 때리는 건 그의 얼굴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다.“구해줘요... 나 좀 구해줘요!”강향란은 구세주를 본 것처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걱정 말아요, 향란 씨. 저희 두 사람이 있는 한 이 녀석은 오늘 절대 향란 씨를 건드리지 못해요!”진경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다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유진우가 또다시 강향란의 뺨을 후려쳤다.그는 두말없이 행동으로 모든 걸 보여줬다.“너...”진경준은 울화가 치밀었다.유진우가 의도치 않게 나오는 모습에 그는 살짝 적응하기 어려웠다.“개자식! 너 오늘 죽었어... 너희 온 가족을 죽여버릴 거야! 이 두 분은 현무문의 고수야. 이분들 앞에서 넌 한낱 쓰레기에 불과해. 네 손발을 부러뜨리라고 할 거야. 그리고 톡톡히 대가를 치러주지!”강향란이 휘청거리며 일어나 이를 악물고 표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현무문?!”순간 장내가 또다시 떠들썩해졌다.현무문의 위엄은 못 들어본 자가 없을 정도이다.그곳은 남방 전체에서 손꼽히는 큰 파벌이다.발을 살짝 흔들어도 강능의 산과 땅이 뒤흔들린다!현무문의 엘리트 제자들은 전부 뛰어난 인재라 실력이 막강하다.아무나 한 명 내놔도 한 개 구역을 휩쓸 정도이다!“현무문의 사람까지 와있었네. 저 녀석 틀림없이 죽을 거야!”“그러게 왜 그런 짓을 해서!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을 피워? 온몸의 뼈가 부서질 거야!”“젊은이, 내가 자네라면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 거야. 어쩌면 목숨은 건질지도 모르잖아.”뭇사람들이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거만을 떨었다.그들이 볼 때 유진우의 실력이 나쁜 건 아니지만 고작 이 실력으로 현무문의 고수들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현무문이면 또 뭐가 달라져? 아무도 내 앞길을 못 막아!”유진우가 전혀 겁먹지 않은 듯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자식! 아주 미쳐 날뛰
왕부의 편전.네 명의 제후는 차례대로 자리에 앉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제갈영군은 한가롭게 차를 음미했고, 은성종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주한휘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왕부 편전의 장식을 구경했고, 장범규는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일어나 앉았다가 몇 걸음 왔다 갔다 하며 마음을 졸이는 모습이었다.한 차례 시간이 흘러, 이의진이 유천우와 석태혁을 데리고 마침내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정교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여러분, 병부를 가져왔어요.”이의진이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열자, 그 안에는 금빛의 호부가 놓여 있었다. 호랑이 형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위엄이 깃들어 보였다. 호부 한가운데에는 ‘병갑지부, 좌재왕, 우재경’이라는 금색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역시 병부군요!”호부를 본 장범규가 눈을 반짝였다.“이 병부만 손에 넣으면 흑용군을 동원할 수 있어요. 그러면 유태범의 음모도 허무하게 끝나겠죠.”“천우야, 지체할 시간 없어. 병부를 들고 흑용군 주둔지로 가서 그 장수들을 만나. 신분을 확실히 밝혀야 해. 유태범이 틈탈 구석이 없도록.”주한휘가 서둘러 재촉했다.“병부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야. 유태범이 순순히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 가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을 거다. 철저히 준비해야 해.”은성종이 경고하듯 말했다.“알겠습니다, 제후님. 이미 어머니께도 상의드렸어요. 열 개 정찰팀을 꾸려 여러 갈래로 성을 나갈 거고, 저 역시 그중 한 무리에 섞여서 움직일 겁니다. 유태범이 대비하고 있어도 쉽게 제 위치를 알아내진 못하겠죠. 유태범이 위협을 눈치챌 무렵이면 저는 이미 흑용군 주둔지에 도착해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그거면 충분하겠군.”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한번 당부했다.“천우야, 이번 행선지는 너랑 왕비님만 아는 걸로 해. 괜히 입 밖에 새면 사고가 터질 수 있어.”“명심하겠습니다, 제후님.”“자, 그럼 빨리 움직이자.
“안 돼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육진우가 모험을 강행하려 하자 유천우는 곧바로 제지하고 나섰다.유천우는 그가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유태범의 주변에는 정말 많은 고수가 몰려들어 있었다.두 주먹이 네 손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만약 암살에 실패라도 하면 수많은 고수들의 포위망에 걸려들 위험이 컸다. 장차 서경왕이 될 몸으로서, 유천우는 결코 함부로 유진우가 위험을 감수하도록 둘 수 없었다.“천우야,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는 누군가 희생을 감내해야 하지. 게다가 호위는 하나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주한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유천우는 거의 고함치듯 외쳤다.강한 기세가 순간 터져 나와 주한휘는 뒷걸음질 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아무도 유천우가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하지 못했다.자신이 좀 과격했음을 깨달은 듯, 유천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제후님, 호위의 목숨도 저희와 똑같이 소중해요. 괜히 헛된 희생을 치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모두를 납득시키겠어요?”“그래,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네.”주한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속으로는 그가 호위 하나 때문에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면,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설마 그냥 손 놓고 당하기만 할 생각은 아니겠죠?”장범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제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제갈영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 어떤 방법인데요?”이의진이 살짝 미간을 올리며 물었다.“유태범이 믿는 가장 큰 무기는 흑용군이에요. 우린 이 점을 공략하면 됩니다.”제갈영군은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다들 아시다시피, 전쟁 시기가
석태혁의 발언은 순간적으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이의진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머뭇거리며 술을 다물었다.석태혁은 왕부의 친위이자 그녀가 굳게 신뢰해 온 인물이기에 솔직히 그가 목숨을 걸고 위험에 뛰어들길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장군님께서는 워낙 강하시고 충성도 깊으니 유태범을 암살하러 간다면 가능성이 있겠죠.”장범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의 친위대장인 만큼 실력이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장군님, 제가 괜히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아니지만 혼자 가시는 건 좀 무리가 있을 수도 있어요.”제갈영군이 갑작스레 말했다.“잠깐! 아직 그 전설 속의 인도가 있잖아요?”주한휘가 문득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인도란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겠죠. 인도의 실력이라면 장군님 못지않을 텐데요?”“아니요, 홍복홍께서는 저보다 훨씬 뛰어나십니다.”석태혁이 차분하게 답했다.그가 친위대장이기는 해도 왕부의 진정한 비책은 사실 인도 홍복홍이다. 서경의 세 고수 중 검선은 세상을 떠났고, 주광은 행방이 묘연하다. 결국 남은 인도가 서경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다.대 마스터 급의 인도는 그가 견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와, 그럼 잘됐네요! 인도가 장군님보다 훨씬 강하시다면, 그분께 부탁드리는 게 훨씬 확실하지 않을까요?”주한휘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유감이지만, 홍복홍께서는 왕부를 떠나신 뒤로 지금까지 종적을 감추셨어요. 그분께 부탁드리긴 힘들 것 같네요.”석태혁이 고개를 저었다.“종적이 묘연하다니...”장범규가 미간을 찌푸렸다.“홍복홍이라는 분, 왕부가 이렇게 위태로운데 어디 가신 건지 모르겠군요.”“설마 상황이 안 좋아 보이니까 도망쳐 버린 건 아니겠죠?”주한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주 제후, 그런 말씀은 삼가주세요. 홍복홍께서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 바쳐 오신 분이에요. 도망칠 리가 없습니다.”석태혁의 얼굴이 굳어졌다.“아,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주한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문제가 좀 있어요.”제갈영군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새 왕이 즉위하려면 폐하의 허가와 백관의 승인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워요. 게다가 폐하의 뜻을 받고 백관을 모시려면 앞뒤로 최소 사흘은 걸려요. 지금 우리 상황으로는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없죠.”“에이, 설마? 즉위가 그렇게나 복잡해요?”장범규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다들 천우가 어르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잖아요. 그럼 당연히 서경왕 자리를 잇는 게 맞지 않나요?”“맞아요! 급할 때는 융통성도 발휘해야 하는 거잖아요.”주한휘가 곁에서 맞장구쳤다.“두 분 다 서경왕위를 산적 두목 뽑듯 생각하시는 건가요? 깃발 하나 꽂고 술 몇 사발 마신 다음 큰소리 몇 마디로 끝낼 일이 아니에요. 농담하지 마세요.”제갈영군이 약간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서경왕위는 서경 백성만이 아니라 천하 모든 사람의 안위와도 연결돼 있죠. 서경이 혼란스러워지면 천하가 뒤숭숭해지고, 서경이 안정되면 천하도 평안해져요. 과장이 아니라 서경왕위의 무게는 폐하의 황위에 전혀 뒤지지 않아요. 그런 중요한 자리를 함부로 정하고 아무나 앉을 수 있겠습니까?”“맞아요. 저도 천우가 빨리 왕위를 이어서 군심을 안정시키면 좋겠지만, 왕위 계승은 장난이 아니죠.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고 남들 입방아에 오르기 딱이니까요.”이의진이 고개를 저었다.규율과 절차 없이는 질서가 서기 어려운 법. 서경왕 자리의 무게는 그만큼 무겁다. 폐하의 명령과 문무백관의 증인이 없으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다들 너무 규칙만 따져서 이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어요.”장범규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지금 도련님이 왕위를 잇지 못하면 유태범의 대군이 쳐들어올 때 어쩌자는 겁니까?”주한휘가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은 제후님, 혹시 다른 방도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냥 말씀 좀 해주세요. 더는 뜸 들이지 말고요.”제갈영군이 은성종을 바라봤다.“두
“뭐라고요? 목격자를 전부 없애버린다고요?”그 말을 듣자 장범규의 안색이 급변했다.“농담하는 거 아니죠? 북쪽 4대 제후는 모두 유태범의 사람인데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전부 죽인다는 게 말이 돼요?”“큰일을 하는 자는 마음이 독해야 하는 법입니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사람한테 약간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제갈영군이 덤덤하게 말했다.“물론 이건 마지막 계획이에요. 만약 북쪽 4대 제후가 무사히 왕위를 빼앗고 병부를 손에 넣는다면 유태범은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바로 왕위를 이어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만약 북쪽 4대 제후가 실패하면 유태범은 큰일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욕심이 많은 자일수록 더욱 광기 어린 행동을 보일 것이다.예전에 유태범은 위왕에게 억눌려 힘을 숨기고 기회를 기다렸다. 위왕이 세상을 떠난 지금 속박을 벗어난 유태범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렇다면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네요.”장범규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흑용군은 서경에서 가장 강하고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흑용군을 장악한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만약 유태범이 표기 대장군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다시 왕실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흑용군을 대량으로 동원할 가능성이 컸다.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다. 오직 승자만이 왕이 되고 패자는 반역자가 될 뿐이니까.“제후님들은 모두 서경의 기둥입니다. 혹시 좋은 해결책이라도 있습니까?”이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전 싸우는 것만 잘하지, 머리를 쓰는 건 절대 안 돼요.”장범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저도 그렇습니다.”주한휘도 고개를 내저었다.“회음 제후님은 재능이 뛰어나니 뾰족한 수가 있으면 얘기해보시죠.”제갈영군의 시선이 은성종에게 향했다.그들이 성문 앞의 십만 대군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은성종의 회유책 덕분이었다.장교들의 가족과 친구를 이용하여 그들을 설득하고 항복하게 했다.많
지금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유태범이 흑용군을 이끌고 오는 것이었다.“너희 둘은 주모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력자야. 사형은 면해도 처벌은 면치 못해.”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여봐라. 저 두 놈을 끌고 가서 감시하고 내 명령 없이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거라.”“알겠습니다.”몇 명의 친위대가 재빨리 다가가 포박된 진승민과 강윤기를 강제로 끌고 갔다.“장군님, 항복한 병사들을 처리해 주십시오.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더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이의진이 석태혁을 보며 말했다.“알겠습니다.”석태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왕비님 자비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그때 네 명이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왔다.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병사들이 자동으로 길을 터주었는데 네 사람이 바로 남쪽 4대 제후였다.맨 왼쪽으로부터 제갈영군, 그다음은 은성종, 주한휘, 장범규가 나란히 서 있었다.“저희가 너무 늦게 온 바람에 왕비님께서 많이 놀라셨죠? 부디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은성종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겸손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그런 말씀 마십시오. 만약 제때 와주시지 않았다면 왕부가 위험에 처했을 겁니다. 제후님들 모두 공신이십니다.”이의진은 재빨리 다가가 허리 굽힌 은성종을 일으켜 세웠다.사실 남쪽 4대 제후가 이렇게 빨리 군대를 보내 지원해 줄 거라는 건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다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밤낮으로 달려왔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왕부를 지키고 서경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이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은성종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맞습니다. 만약 위왕님께서 저를 살려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왕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요.”장범규가 호탕하게 말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그는 가장 솔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왕비님, 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왕부의 어려움은 곧 우리의 어려움이니 당연히 도와야죠.”주한휘가 웃으며 말했다.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겠다는 말이 서경왕부 상공에 계속 맴돌았다.이미 공포에 질려 있던 반군들은 더욱 두려움에 떨었고 전투 의지를 완전히 잃었다.쨍그랑, 쨍그랑, 쨍그랑...점점 더 많은 병사들이 손에 든 무기를 던졌고 고집을 부리는 일부 병사들은 즉시 체포되어 포박당했다.왕부를 오랜 시간 공격했음에도 함락되지 않았고 성문을 지키던 군대도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네 명의 제후 중에 둘은 포로가 되어 잡혔고 둘은 도망쳤다. 대세를 잃을 그들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항복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하지만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목숨을 헛되이 버리려 하지 않았다.“난 방금 한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항복한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무기를 던진 반군을 보며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 강압적이지 않았고 강렬한 기세도 내뿜지 않았으며 오히려 말투가 부드러워졌다.항복한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왕비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많은 장교들이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왕비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장교들이 앞장서자 많은 병사들도 무릎을 꿇었다.몇 분 만에 조금 전까지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사람들의 무릎을 전부 꿇렸다.이의진의 자비에 모든 병사들은 진심으로 감동했다.“너희 둘은 어떡할 거야?”이의진이 뒤에 매달려 있는 진승민과 강윤기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왕부 대문에 매달려 있었는데 꼴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저... 저희도 항복하겠습니다.”진승민과 강윤기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왕부의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건 그들이 성문 밖에 주둔시킨 군대가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게다가 왕부를 포위 공격하던 선봉 부대는 모두 무릎을 꿇고 항복했고 그들 두 사람까지 인질이 되었다.이런 상황에서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항복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 희망이 남아 있었다.만약 대장군 유태범이 흑용군을 이끌고 도착한다면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
명령을 받은 후 진승민의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렸다.“그리고 너. 네 부하들도 전부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해.”이의진은 칼끝을 돌려 강윤기의 목에 겨누었다.살기등등한 이의진의 눈빛에 강윤기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무기 전부 내려놔.”쨍그랑, 쨍그랑, 쨍그랑...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렸고 강윤기가 통솔하던 병사들도 무기를 버렸다.전장의 약 60%에 달하는 군대가 전투를 포기했다. 나머지 40%는 무기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전투는 사기가 떨어지면 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이미 무기를 버렸는데 어찌 더 공격할 수 있겠는가?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제후가 이미 사라져 수만 명의 군대를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두머리가 사라졌으니 당연히 당황하는 수밖에.“다들 잘 듣거라. 너희들의 제후는 이미 도망갔고 너희들이 죽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어. 아직도 그런 사람을 위해 싸울 것인가? 너희들이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것이고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아. 그래서 무기를 내려놓으면 오늘 일어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물론 계속 저항하면 책임을 물을 것이고 그땐 모든 사람을 반역자로 취급할 것이다. 그럼 너희들은 참수될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심각한 처벌을 받을 것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판단하거라.”이의진의 강렬하고 힘찬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보이지 않는 위엄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제후님이 정말 도망갔어? 그럼 우린 어떡해?”“나한테 물으면 내가 누구한테 물어?”“이 싸움은 원래 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어. 왕실을 구원하고 범인을 잡긴 개뿔. 이건 그냥 반역이야. 이 일에 책임을 묻는다면 우린 모두 죽을 거라고.”“진 제후님과 강 제후님도 이미 항복했는데 우리도 항복할까? 왕비님께서 우리한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전장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의견이 분분했다.그들은 이미 전투 의지를 완전히 잃었지만 명령이
“됐어. 그만 좀 웅얼거려. 유태범이 왕이 될 수 있을지는 오늘 밤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제갈영군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듯 손을 크게 휘둘렀다.“여봐라. 반역자들을 잡아들여서 감시하거라!”“알겠습니다.”친위대가 즉시 앞으로 나와 노정한과 하원휘를 포박했다.“제갈영군. 우리 모두 한 지역의 제후이고 동등한 위치에 있는데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건 우리 체면을 너무 짓밟는 거 아니야?”노정한이 소리쳤다.“체면?”제갈영군이 코웃음을 쳤다.“이미 반역자로 잡혔는데 무슨 체면이 더 있어?”“제갈영군, 아직 승패가 결정된 것도 아니고 대세도 정해지지 않았어. 대장군님이 왕이 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어?”노정한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맞아. 세상일은 돌고 돈다고 했어. 지금 한껏 위세를 부려도 영원히 부릴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야. 그러니까 적당히 해.”하원휘가 맞장구를 쳤다.“너희들이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을지도 아직 모르는데 감히 내 앞에서 큰소리를 쳐? 정말 주제를 모르는구나. 여봐라, 어서 저 둘의 입을 막아라. 더 이상 시끄럽게 떠들지 않게.”제갈영군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너...”노정한과 하원휘가 뭐라 더 말하려던 그때 입을 강제로 틀어막은 바람에 웅얼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끌고 가.”제갈영군이 손을 휘두르자 부하들이 바로 그들을 차에 태웠다.제갈영군의 시선이 앞쪽의 유진우에게 향하더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어딘가 낯이 익은데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나?”“네, 만난 적이 있어요. 전 서경왕부 사람입니다.”유진우가 대답했다.“그래?”제갈영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왕부의 고수들은 내가 전부 알고 있는데 당신은 전혀 모르겠어. 대체 누구지?”“제 신분은 나중에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진우는 제갈영군에게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인사한 뒤 순식간에 사라졌다.“빠르네.”제갈영군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이 다 휘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