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군해 일행은 조씨 가문 남매가 나타났을 때 선우 가문이 우세를 잃었다고 생각했기에 희생양으로 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그러나 호인국 일행이 나타남으로 인해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처럼 그들에게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하용만과 남궁을용 장군이 나타난들 무슨 소용 있으랴!조씨 가문의 쌍둥이 별까지 함께 한다 해도 병부상서를 비롯한 고관 귀족들 앞에서는 선우 가문의 지위를 조금도 위협할 수 없을 것이다.“희재야, 오늘 네 약혼 날이니 이 스승이 별로 선물할 것도 없어. 이 옥패가 나와 오랫동안 함께 지낸 물건이야. 오늘 이것을 너에게 선물할게. 앞으로 네가 더 노력해서 높이 올라가기를 바랄게!”호인국은 웃음 지으며 고풍스러운 옥패를 꺼내 선우희재에게 건넸다.“선생님 감사합니다.”선우희재는 공손한 태도로 양손으로 옥패를 받았다.“백작 대인, 이곳의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분위기가 무척 긴장한 것으로 보이는데요.”호인국은 현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바로 알아차렸다.“호 대인, 오늘 우리 집에 귀찮은 문제가 좀 생겼어요. 호 대인께서 마침 잘 오셨어요. 하마터면 제 백작부가 다른 사람에 의해 부서질 뻔했어요.”선우정호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그래요? 누가 감히 백작부에서 행패를 부리는 거죠?”호인국은 눈썹을 살짝 들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바로 우리 코앞에 서있거든요.”선우정호는 앞을 힐끗 쳐다보았다.호인국은 그 방향으로 내다 보며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남성 총감독, 호국 장군, 조씨 가문 쌍둥이별... 많이 오셨네요.”“스승님, 이놈들이 사람을 너무 괴롭혀요. 스승님께서 우리 대신 이 일을 바로잡아주세요.”선우희재는 공손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하지 말게. 이 스승님이 있는 한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못 할 거야!”호인국은 머리를 들고 가슴을 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며 유진우 일행을 노려보았다.“여러분, 오늘 축하하러 오셨다면 당연히 환영합니다만, 만약 소란을 피우러 오신
“후원자들이 많다 이 뜻이야? 한번 보자고! 머릿수가 모두 몇 개일지!”수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떠드는 광경을 본 조홍연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검을 빼 들어 싸울 준비를 했다.하지만 조홍연이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유진우가 막아 나섰다.“홍연아, 충동하면 안 돼.”조홍연이 살인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살인을 저지른다면 그 후과가 매우 엄중했기 때문이다..유진우 일행과 맞서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연경의 고관 귀족으로 신분과 지위가 매우 높았다.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반드시 조홍연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심지어 관직을 앗아갈수도 있었다.조씨 가문은 기세가 높은 만큼 원수도 많았기 때문에 약점이 잡힌다면 문제를 크게 삼을 것이 뻔했다.지난번에 다른 이에게 모함받은 일이 바로 살아있는 예제이다.유진우는 조홍연이 자신 때문에 이런 큰일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진우 오빠, 이 사람들은 천한 자들이라 우리가 힘으로 제압해서 교훈을 주어야 정신 차리는 사람들이에요.”조홍연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알고 있어. 이 일을 나한테 맡겨.”유진우는 천천히 조홍연이 들었던 검을 아래로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호인국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호 대인, 저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선우 가문이 사람을 풀어만 준다면 우리가 바로 떠날 겁니다.”유진우는 조선미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당신은 또 누군데! 감히 내게 말을 걸다니!”호인국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유진우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사람을 업신여기며 멸시하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아무런 명성도 없는 젊은이가 감히 내게 말을 걸어?’“호 대인, 저는 그저 정의를 바랄 뿐입니다. 부디 저희 요구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유진우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부탁했다.“정의? 흥! 당신들이 백작 부에 침입해 모든 사람 앞에서 사람을 죽이고 소란을 피우더니, 이제 와서 나에게 정의를 바
모든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대문 방향으로 무장한 호위들과 귀족 몇 명이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맨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미인이었다.그 미인은 겨우 서른 살 남짓 되어 보였고 전신 관리도 잘 되어 있었기에 척 봐도 온화하고 우아하며 기품있어 보였다.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오랫동안 상위층에 머무르고 있는 귀족의 우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미인 옆에는 잘생긴 청년 남자가 따라다녔다.그 청년 남자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건방진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세상에나! 정말 위왕 왕비께서 오셨어! 어떻게 오셨지?”“위왕 왕비? 혹시 서경에 계시는 그분?”“당연하지! 그분 말고 누가 감히 위왕 왕비라고 할 수 있겠어?”미인을 본 현장 사람들은 또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연경에서 온 고관 귀족들의 얼굴에도 경외하는 표정이 드러났다.평범한 왕비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만 위왕 왕비는 달랐다.위왕 왕비의 지위와 권세는 보통 왕비들보다 훨씬 높았다.위왕은 공적이 많고 권세가 무척 높은 분으로 유일하게 국호의 이름으로 등극한 왕이었다.위왕의 지위가 매우 높을뿐더러 심지어 관직 가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그야말로 황제를 제외한 용국의 제일인자였다!남편 덕에 위왕 왕비도 자연스레 신분이 상승했다.물론 가장 큰 이유는 위왕과 결혼하기 전에 위왕 왕비는 용국의 첫째 공주였다. 황제의 친동생이라는 의미이다.황제의 친동생이라는 신분이 바로 사람들이 그녀를 더 경외하게 된 이유이다.“이상하네. 위왕 왕비는 서경에서 줄곧 살고 계시지 않았어? 근데 왜 강남에 나타나신 거지?”고관 귀족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더불어 이해하지 못했다.“백작 대인, 혹시 위왕 왕비와 친분이 있으세요?”한 관원이 갑자기 궁금한 표정으로 선우정호를 바라보았다.“친분이라고?”선우정호는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위왕 왕비와 친분이 있을 리가 없었다.선우
“네?”위왕 왕비의 갑작스운 행동에 모든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모든 사람이 아연실색했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위왕 왕비가 호인국을 만나자마자 그의 뺨을 때릴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군소리도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이렇게 난폭한 장면이 나타났던 것이다.호인국은 병부상서로서 조정의 일품대원이다.모든 사람 앞에서 조금의 여지도 없이 갑자기 뺨을 맞은 것이다.“위... 위왕 왕비, 왜 때리세요?”호인국은 어리둥절했다. 맞아서 붉어진 얼굴을 가리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평범한 귀족이었다면 호인국은 진작에 화를 냈을 것이다.하지만 하필이면 위왕 왕비이자 용국의 첫번재 공주였다. 백번 천번 불만이 있어도 호인국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내가 당신을 때린 이유는 당신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야. 지금 당장 무릎 꿇고 대답하게!”왕비가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위왕 왕비, 소신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요?”호인국은 뻔뻔스럽게 물었다.짝!위왕 왕비는 또 아무 소리 없이 호인국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냉랭하게 말했다.“귀먹었어? 무릎 꿇고 대답하라고 했어!”쿵!호인국은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두 무릎을 꿇었다.두 사람은 군신 차이지만 위왕 왕비가 대중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하면 호인국은 감히 꿇지 않을 수 없었다.이때 선우정호 일행의 웃고 있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그들은 서로 마주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선우정호 일행은 처음에 위왕 왕비가 호인국과 친분이 있어 찾아온 것으로 여겼다.지금 보니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호인국이 이전에 위왕 왕비를 건드렸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호인국,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아?”위왕 왕비는 내려다보며 물었다.“죄신, 잘못했어요.”호인국은 고개를 숙이고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이해가 안 되지만 잘못을 인정하면 그만인 줄 알았다.“자, 그럼 무엇이 잘못됐는지 말해 보게.”위왕 왕비가 또 물었다.“네?”호
“일에는 반드시 근원이 있기 마련이지. 우린 다만 위왕 왕비께서 선우 가문에게 화풀이하지 말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어.”선우정호는 긴장한 나머지 침을 꿀꺽 삼켰다.앞서 교만하던 자태가 온데간데 없어졌고 대신 얼굴에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하였다.위왕 왕비가 나타나자 많은 변고가 생겼다.“흥! 겁도 없이 날뛰는 놈들! 위 왕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너희들 머리가 그 몸에 붙어있을 리가 없을걸!”위왕 왕비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리고 위왕 왕비는 많은 사람의 시선 가운데서 한 걸음 한 걸음 유진우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의 도도함과 오만함은 사라지고 보기 드문 미소를 지었다.“장혁아, 오랜만이야. 요 몇 년 동안 잘 지냈어?”“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항상 잘살고 있어어요.”유진우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유진우는 눈앞의 여자에게 원한은 없지만 그렇다고 호감도 없었다.“십 년이나 지났는데 네가 이렇게 컸을 줄이야!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위왕 왕비는 웃음을 지으면서 뒤로 향해 손을 흔들었다.“천우야, 뭘 멍하니 있어? 어서 와서 장혁 형에게 인사드려.”“형?”유천우는 제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유진우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천우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섞여 있었고 얼굴에는 믿을수 ㅣ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유천우는 눈을 비비고는 반복해서 확인하더니 갑자기 유진우에게로 달려들어 그의 품으로 안겼다. 그리고 울부짖기 시작했다.“엉엉... 형, 너무 보고 싶었어요!”“아버지께서 형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하셨어요. 그래도 믿기지 않았는데 형이 정말 살아있었네요. 정말 너무 좋아요!”“10년, 꼬박 10년이에요! 형, 내가 10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요?”“저를 데리고 세상 끝까지 간다더니 저 혼자 집에 두고 몰래 빠져 가다니! 형 정말 너무 해요!”“엉엉....”유천우는 이미지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 유진우를 와락 끌어안고 통곡했다.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유천우는 양손으로 허리를 짚고 한쪽 발을 호인국 가슴에 얹어 땅으로 짓눌렀다. 그리고 호되게 욕설을 퍼부었다.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천둥처럼 들렸고 모든 사람의 가슴에 칼날같이 꽂혔다.순간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모든 사람은 충격에 휩싸였고 입을 떡하니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들은 유진우가 이토록 고귀한 신분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유천우의 형님,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천재, 미래의 서경 왕이었다.짧은 세마다 말이지만 매우 무거운 중량으로 마치 세 개의 큰 산처럼 현장 사람들의 어깨를 짓눌렀다.“누... 누구신지 기억났어. 저분이 바로 연경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요괴 유장혁이야!”“뭐? 유장혁이라고? 이미 죽은 거 아니었어?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지?”“유장혁... 유장혁이라니! 맙소사! 우리가 어떻게 이런 재수 없는 사람을 건드렸지?”잠시 침묵이 흐른 뒤 현장은 거센 폭탄이 떨어진 듯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되어버렸다.모든 사람의 시선이 유진우에게로 집중되었다.사람들 얼굴에는 경악과 놀라움, 두려움, 의심의 표정도 있었지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대부분이었다.유장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씨 가문의 천재이자 진정한 실력자였다. 10년 전부터 이미 천하를 뒤흔들어 그 위세가 매우 당당했다.전 용국에서 수많은 인재가 모두 유진우의 발밑에 짓밟혀 꼼짝하지 못했다.조씨 가문 쌍둥이 별도 그 당시에는 유진우를 높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0년 전의 유장혁은 그야말로 누구도도 따라갈 수 없는 막강한 실력을 갖춘 일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저 저... 저분이 그 천재 유장혁이라고요?”호인국 얼굴은 벼락 맞은 것처럼 창백해졌다.조정에 오래 머무른 군신으로서 호인국은 그 내막은 몰랐지만 10년 전 사건의 전반 과정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그 싸움은 꼬박 3박 3일로 지속되었다.자금성 전체 백성들을 곤경에 빠뜨렸던 사건이었다.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피가 모여 강으로 되었으며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그치
선우정호도 당황하여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유씨 가문 천재! 미래의 서경의 왕!선우 가문은 결국 건드리지 말아야 할 존재를 건드렸다.“망했어! 망했어! 다 망했어!”조군해는 땅에 털썩 주저앉았고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해졌다.그 뒤에 있는 조씨 가문의 고위층 사람들도 절망과 후회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유진우의 정체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줄 몰랐다. 심지어 이제는 유진우란 이름만 들어도 놀랄 정도로 무서워졌다.선우 가문도 실력이 대단했다. 그 세력이 방대하고 인맥이 매우 넓었다. 심지어 연경에서 병부의 상서와 같은 높은 관직 귀족들을 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강남 전체를 놓고 말해도 모두 손에 꼽히는 존재였다.그러나 선우 가문이 아무리 세력이 크고 내력이 깊다고 해도 서경 왕부와 같은 큰큰 인물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다치기만 해도 여지없이 부서지는 존재로 되고 말 것이다.양측의 차이점은 마치 구름 위로 나는 용과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그 수평 차이가 천차만별이다.왕부 세자인 유진우는 모든 선우 가문의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몽땅 파괴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불똥이 튈 것이다.“노인네! 이제 알겠어? 감히 우리 형에게 덤벼들어? 명이 너무 길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유천우는 오만한 자태로 내려다보면서 소리쳤다.“오, 오해... 오해에요!”호인국은 몹시 당황해하면서 즉시 무릎을 땅에 꿇으면서 사과했다.“제가 몰라보고 세자 저하를 오해한 겁니다. 부디 세자 저하께서 소인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말을 마친 호인국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면서 큰 절을 몇 번 올렸다.위세당당했던 병부상서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고 비굴하고 순순히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변했다.평범한 왕부 세자라면 호인국이 이 정도로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으며 비굴하게 큰절까지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유장혁은 남달랐다. 서경 왕부의 세자로서 그 천부적인 재능과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권세가 하늘을 찌를듯한 아버지도 배
짝하는 소리와 함께 선우희재는 얼굴을 맞고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그의 얼굴에는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또렷이 보였다.그러나 이 순간에도 그는 감히 불만을 품지 못하고 바로 고개를 돌려 조군해와 그의 일행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다 너희 잘못이야. 아직도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사람을 풀어주지 않고?”그 한마디로 그는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네?”조군해와 일행들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그들은 조선미가 납치당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어디에 갇혀 있는지 몰랐다.그들도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조윤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밀실에 있어요. 그들은 밀실에 갇혀 있어요.”조윤지는 목을 움츠리고서는 고개를 숙인 채 마침내 머뭇거리며 말했다.“빨리 밀실로 가서 사람을 구해.”호인국은 소리를 지르며 한 무리의 고위 인사들을 데리고 곧바로 선우 가문의 밀실로 향했다.지금 공을 세울 좋은 기회였기에 그들은 당연히 잘 수행해야 했다.“너희들 조선미가 무사하실 기도해.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유진우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날카롭게 상관 가문과 조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한 무리의 사람들은 겁에 질려 정신을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얼마 후 조선미와 조아영 두 사람은 마침내 구출되었다.다행히 두 사람은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유진우는 조선미의 앞으로 가서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전에 그는 오로지 조선미의 안전을 위해 항상 참고 침묵을 지켰다.지금 조선미에게 아무 일도 없었기에 이제 그가 정리해야 할 차례였다.“말해 봐. 오늘 있었던 일 당신들은 어떻게 해결할 거야?”유진우가 차갑게 말했다.“조선미를 이미 풀어줬잖아. 우리가 뭘 더 해야 해?”선우희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지금 이 순간까지 선우희재는 예전에는 이름도 모르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