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서는 전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는데 이 말은 이미 그녀가 마음속으로 수십 번이나 되새겼었다.그녀는 말하면서 한시혁의 곁에 다가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그래요? 그렇다면 참 신기한 인연이네요.”이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며 의심스러운 마음을 억눌렀다.사실 이진이 이번에 한시혁을 만나러 온 주요 목적은 이것 때문이었다.그리고 유연서가 방금 한 대답은 뭔가 더 의심스러워 보였다.‘얼핏 듣기에는 합당하지만 정말 이런 우연이 있을까?’이렇게 생각하자 정말 더 의심스럽기만 했다.이진은 곧 화제를 돌려 한시혁과 음악에 관한 일을 이야기했다.이진과 윤이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더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정원의 대문에 서서 윤이건과 이진이 떠난 것을 확인한 후 한시혁은 다시 차가운 표정을 보였다.그는 유연서를 보더니 차갑게 비웃기 시작했다.“유연서 씨께서 거짓말을 할 때 눈 깜빡하지도 않으신다는 걸 몰랐네요.”유연서는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한시혁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여전히 혼잣말로 입을 열었다.“제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당신의 뛰어난 연기에 속았을 거예요.”한시혁이 말을 마치자 유연서는 갑자기 차갑게 웃더니 곧장 한시혁을 쳐다보며 말했다.“제가 지금 한시혁 씨를 도와주고 있는 입장이라는 걸 아시 길 바랍니다.”유연서는 한시혁의 경고하는 듯한 눈빛을 완전히 무시한 채 서서히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한시혁 씨께서 이렇게 연기에 충실하지 않으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요.”유연서는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고 한시혁은 제자리에서 주먹을 힘껏 쥐며 화가 잔뜩 났다.그 후 평범했던 며칠이 지나더니 이진의 생일이 다가왔다.그녀는 떠들썩한 연회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아예 생일에 대해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윤이건이 그녀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진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호화롭고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었다.“이 봐요, 생일 파티에 주인
한시혁이 선보인 노래는 작사는 물론 작곡마저 모두 그가 혼자서 완성한 것이다.바로 이진의 생일에 선물로 주기 위해 준비한 곡이었다.그 곡은 영어 작사였는데 한시혁의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를 더하자 매우 달콤했다.한편 이진의 곁에 서있던 윤이건은 적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무대 위의 한시혁을 노려보았다.윤이건은 이진에게 좋은 생일을 선물하기 위해 참고 있었던 거다. 안 그러면 진작에 한시혁을 무대에서 끌어내렸을 거다.노래가 끝나자 연회장 전체에서 열렬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한시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무대 아래의 이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은 채 불빛이 밝아지자 이진의 곁으로 다가갔다.“어때? 내가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들어?”이진은 자연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처럼 신경을 쓴 선물을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하지만…….”한시혁이 기대하는 눈빛을 보자 이진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하지만 전문적인 시각으로 볼 때 곡은 괜찮지만 작사 수준이 좀 떨어지네.”한시혁의 앞에서 그의 음악 능력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몇 명 없을 거다.게다가 한시혁이 이 말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면서 받아들이게 만드는 사람은 더욱 몇 명 없을 거다. “내가 일부러 이렇게 작사한 거라고 말하면 믿을 거야?”“그게 무슨 소리야?”“네가 음악에 투자할 시간이 거의 없어 보여 혹시나 전문성이 떨어지진 않았는지 일부러 한번 시험해 본 거였어.”이진이 의심스러운 듯한 눈빛을 보자 한시혁은 어깨를 으쓱거렸는데 두 사람은 연이어 웃기 시작했다.그들은 화기애애했지만 유연서는 이번 생일 파티에서 마치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윤이건과 한시혁은 파티 내내 이진의 곁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거의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다.유연서는 멀리서 윤이건과 한시혁의 웃는 얼굴을 보자 질투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지켜보기 싫어 지나가던 웨이터 쟁반에서 샴페인 한 잔
“어때요? 괜찮아요?”그대로 끌려오자 유연서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한시혁의 차가운 눈빛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유연서 씨, 설마 진짜 제 약혼녀가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이 딴 수작이나 부리신 거예요?”한시혁은 입을 유연서의 귀에 가까이 대고 차갑게 말했다.이 말은 분명 유연서더러 분수에 맞지 않게 나대지 말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었다.한편 백정아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고작 유연서 같은 년과 부딪혀 다친 건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백정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던 윤이건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얼른 사람들 사이를 헤쳐지나 윤이건의 앞에 서더니 이진을 무시한 채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이건 오빠, 저 그래도 손님으로 온 건데 이렇게 다친 걸 보고만 있진 않을 거죠?”백정아는 말을 하더니 점점 흥분하며 손을 뻗어 윤이건의 옷소매를 잡았다.“이건 오빠, 이런 일은 공평하게 처리해 주셔야 하잖아요?”윤이건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짜증을 내며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백정아가 대놓고 소란을 피우긴 했지만 윤이건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그러나 윤이건이 입을 열기 전에 한시혁이 먼저 한발 앞섰다.한시혁은 원래 이런 일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고 오늘 이곳에 온 건 순전히 이진 때문이다. 그는 그저 윤이건의 입을 막으려고 먼저 입을 연 것이다.이 두 사람은 이미 이진을 사이 두고 오랫동안 싸웠었는데 서로 전혀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윤이건을 골탕 먹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한시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앞으로 나아가 윤이건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는데 그 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윤 대표님, 제가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요.”한시혁은 그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유연서 씨는 제 여자인 데다가 제 약혼녀이니까 당연히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지만…….”
백정아는 방금 넘어진 데다가 다치기까지 했으니 이대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했다.게다가 오늘 그녀는 윤이건의 초대를 받은 것이기에 윤이건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겨우 한 번 떠벌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건데 이대로 그만 둘 수는 없지.’백정아는 두 손을 모두 주먹 쥐며 저항을 하려고 했으나 이진의 차가운 눈빛을 보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비록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는 연회장 직원을 따라 연회장을 나섰다.백정아가 떠난 후 파티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분위기는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원래 예정된 시간은 새벽까지였는데 두세 시간 만에 끝나고 말았다.윤이건은 이 비서와 임만만을 불러 손님을 배웅하고 연회장의 일부 결산 문제를 도와줄 것을 당부했다.그리고 연회장을 돌아보며 이진을 찾았는데 한 바퀴 돌아본 뒤 결국 휴게실에서 이진을 찾을 수 있었다.“왜 그래? 많이 피곤해?”윤이건은 말을 하면서 바삐 이진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얼핏 보기에는 큰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윤이건은 이진이 화났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윤이건의 생각대로 이진은 화가 났는데 바로 윤이건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이 생일 파티는 윤이건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 음식은 물론 게스트 명단까지 모두 윤이건이 준비한 것이다.이에 대해 이진은 매우 고마웠지만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도대체 윤이건은 무슨 생각으로 백정아를 내 생일 파티에 초대한 걸까?’윤이건이 자신을 걱정해 오자 이진은 입꼬리를 오므리더니 한숨을 쉬었다.이진은 화가 났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성격이었는데 이런 성격은 늘 그녀를 힘들게 했다.“윤 대표님, 왜 백정아 씨를 초대하시기 전에 저한테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저와 그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이진의 말을 듣자 윤이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곧장 긴장하며 말했다. “며칠 전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을 때 마침 백정아 씨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서
그의 차가운 두 마디를 듣자 유연서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비록 그녀도 한시혁의 호의를 바라진 않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유연서는 입술을 힘껏 깨물고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그리고 더 이상 차 안에는 아무런 말소리도 오가지 않았다.한편 연회장 입구에 서있던 윤이건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진이 정말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윤이건은 넘쳐오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이를 세게 악물었는데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핸드폰을 들고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바로 끊기고 말았다.세 번째 전화까지 끊겨버리자 윤이건은 정말 화가 났다.이번에 윤이건은 이진이 아닌 민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때 민시우는 연회장을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였다.“왜 그래?”“나랑 클럽 가자.”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윤이건의 화난 목소리를 듣자 민시우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민시우는 그들 부부가 싸웠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는 윤이건의 주소를 묻고는 차를 돌려 윤이건을 태우고 곧장 술 마시러 클럽으로 향했다.민시우는 이 클럽의 단골손님이라 클럽에 도착하자 클럽의 매니저가 민시우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그러나 옆에 서있던 윤이건을 힐끗 보더니 깜짝 놀라고 말았다.윤이건을 모르는 게 아니라 윤이건이 이런 곳에 나타난 것에 놀란 거다.이전에 민시우가 윤이건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지만 그가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아 남들에게 얼굴을 보인 적은 없었다.매니저는 즉시 윤이건의 곁에 다가가더니 말을 건넸다.“윤 대표님께서 저희 가게에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제가…….”민시우는 매니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그가 말을 더 한다면 윤이건한테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좋은 술만 올리면 돼. 나머지는 필요 없으니 이만 내려가 봐.”“네, 바로 준비할게요.”매니저는 그제야 윤이건의
이때 백정아는 기자가 보낸 사진과 윤이건이 클럽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더니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조금 기대를 했다.백정아는 이런 생각에 얼른 이 기자에게 문자를 보냈다.[전 안 무서우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저한테 협박 같은 건 안 통하니까 어디 한번 터뜨려 보시든지!]백정아는 메시지를 보내고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클럽에 들어섰다.한편 연회장을 떠난 이진은 원래 별장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돌아가면 분명 윤이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그래서 이진은 기사에게 정희의 집 주소를 알려준 뒤 눈을 감고 잠시 쉬었다.택시 기사는 원래 이진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려고 했으나 연인들끼리 싸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백미러를 통해 이미 눈을 감은 이진을 한 번 보더니 코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차가 정희의 별장에 도착한 후 이진은 차에서 내려 돈을 지불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머니를 만져보자 방금 급히 가느라 아무것도 챙겨오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렸다.“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이진은 민망한 마음에 인사를 건네고는 얼른 정희 집 문을 두드렸다.결국 정희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먼저 이진의 택시비를 내주고 말았다.“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두 사람이 방에 들어선 후 정희는 소파에 앉아있는 이진에게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갑자기 이진은 드레스를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그저 외투를 입고 뛰쳐나왔다.게다가 오는 내내 실랑이를 벌이느라 머리도 헝클어지고 화장도 엉망이 되었다.“지금 네 모습은 뭔가 초라한 신데렐라 같네.”정희의 말을 듣자 이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거실 구석에 놓인 거울을 보았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정말 못났네.”이진의 말에 정희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함께 친구로 지내왔기에 눈빛 하나, 행동 하나로도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정희는 곧 이진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녀를 일으켜 욕실로 들여보냈다.“내가 입을 옷 몇 벌 찾아올 테니까 먼저 샤워부터 해. 괜히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이진은 정희의
유연서도 망설이지 않고 이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한편 정희는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전혀 부잣집 아가씨의 모습이 아니었다.정희는 이진이 유연서를 초대하는 것을 보자 다소 이해가 되지 않았다.야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갑자기 변한 유연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다.정희는 유연서가 했던 행동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그러나 이진이 먼저 받아들였기에 그녀도 더 이상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해물죽 한 그릇이 배속에 들어가자 이진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역시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네.’기분이 조금 좋아지자 이진은 장난을 치려고 했다.“자기야, 이렇게 쪼잔하게 나올 거야? 내가 야식 먹고 싶다고 했는데 어떻게 죽을 줄 수 있어?”“이 계집애야. 연회에서 아무것도 안 먹었으면서 다짜고짜 술을 마시려는 거야? 너 그러다가 몸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떡할래?”정희가 화를 내자 이진은 더 환하게 웃었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이진은 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정희의 집으로 찾아갔었다.두 사람은 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잠 푹 자기만 했다.이진에게 있어서 정희는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만의 피난처였다.한편 정희는 욕을 하면서 일어나 아직 개봉하지 않은 와인을 가지러 갔다.“이 와인이면 괜찮지?”이진은 전혀 그 와인을 볼 필요가 없었다. 정희가 무조건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꺼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세 개의 와인잔에 와인을 천천히 붓고 세 여자는 가볍게 컵을 맞대고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유연서가 있었기에 이진은 줄곧 자신과 윤이건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정희도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뜻밖에도 유연서가 먼저 억울한 표정을 짓더니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사실 제가 오늘 연회장을 떠난 후 다시 돌아온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유연서는 말을 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는데 곧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좀 우스운 일이기도 하지만,
이진은 고개를 들어 잔에 든 와인을 마시며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자신의 상황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곧 입꼬리를 올리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역시 누구든지 감정을 쉽게 다스리긴 힘드나 보네.’그녀들은 곧이어 술병을 비워갔는데 세 사람은 점점 취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취하고 말았다.부엌에서 거실로 자리를 옮기며 술 한 병을 더 따려고 했으나 모두 잠이 들고 말았다.이진과 정희는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는데 유연서는 아직 조금 정신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눈을 뜨고 상황을 둘러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이번 일로 이진의 신뢰를 꽤나 얻었나 보네.’그녀들은 이튿날 아침이 되기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지만 인터넷은 이미 떠들썩하기 시작했다.파파라치들이 백정아의 도발에 넘어간 것이다.그들은 러시아워를 맞아 어제 찍었던 백정아의 사진을 모두 인터넷에 올렸다.이것은 분명 네티즌들의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백정아의 이미지는 안 그래도 나빠지고 있었는데 지금 인터넷에는 온통 그녀에 대한 욕설들만 가득했다.일이 일어난 지 대략 반 시간이 지난 후, 여전히 정희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진은 해란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대표님, 어디 계세요? 회사에 큰일이 생겼어요.”이진은 핸드폰을 들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는데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파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대표님? 괜찮으세요?”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이진의 소리에 해란은 마음을 졸였는데 이진은 쓴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괜찮아. 회사 쪽은 무슨 일이야?”“AMC 지부의 건축 설계 도면이 유출되어 지금 회사 전체가 혼란스러워졌어요.”해란의 말을 듣자 이진은 머리가 더 아팠다.“단서가 있나요?”“아직은 정확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어요. 지금 처리하는 중이지만 정말 골치 아프게 되었어요.”이진은 해란이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어쨌든 회사의 총감독인 그녀가 이런 일을 처리할 때 당황해서는 안 된다.“먼저 할 수 있는
결혼식 날짜는 8월 초로 정해졌으며,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될 예정이다.웨딩드레스 가게에서 청혼한 이건의 이야기는 곧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이건이 바라던 대로,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진이 윤이건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의 결혼식은 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다.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사람은 친한 지인들 외에 회사 직원들만 초대했다.윤이건의 가족들은 보기 드물게 모두 현장에 참석했지만, 이진 쪽은 텅 비어 있었다.한편 이씨 가문은 여전히 다툼이 지속되고 있었다.“이것 봐! 내가 애초에 뭐라 그랬어? 이진 그년이 양심 없는 년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이제 알겠지? 그년은 결혼식처럼 중요한 날조차 아버지인 당신을 부르지 않았어. 이기태, 정말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백윤정은 노발대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에게는 예전의 자애로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앞으로 달려들어 이기태를 때리려고 들었다.이기태는 화가 난 마음에 백윤정을 밀어냈다.“좀 저리 꺼져!”‘그래봤자 이진이는 내 친 딸인데, 지금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백윤정 때문이잖아. 백윤정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진이를 그렇게 대했겠어? 백윤정이 자꾸 끼어들어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이진도 날 이렇게까지 미워하진 않았을 거야.’물론 이기태의 눈에는 그저 이익밖에 없다. 그가 후회하는 건 오직 이진을 통해 이건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뿐이다.지금의 이기태는 백윤정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매일 싸우기 바빴다.이기태는 결혼식이 끝날 때가 되자 뻔뻔스럽게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이기태 씨, 전에 제가 전화를 끊을 때 했던 말을 잊으신 거예요?”이기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 너머 들려왔다.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그제야 기억난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진, 너!”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시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이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이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듣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윤이건 씨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시언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힘겹게 한 마디 물었다.“제가 몇 년 더 빨리 나타났다면.”“그래도 결과는 똑같아요.”이진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말을 마친 뒤, 이진은 더 이상 시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건을 향해 걸어갔다.애초에 이진은 시우가 이 연회를 통해 정희와의 결혼 소식을 발표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이진은 마침내 시우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피곤했던 이진은 이건의 가슴에 기대어 말했다.“이건 씨, 저 해외여행 가고 싶어요.”“해외여행?”이건은 원래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얼마 후 이진을 데리고 출국할 생각이었다.이진이 먼저 제기한 이상, 이건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진을 껴안고 말했다.“그래,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이를 위해 이건은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모든 일들 미뤘다. 하지만 이건의 원래 계획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YS그룹에는 이건이 직접 처리해야 될 큰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이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이진을 데리고 해외로 여행을 간 것이다.이 소식을 전해 들은 YS그룹의 고위층들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건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쨌든 프로젝트는 끝내고 가야지.하지만 이건의 대답은 그저 한마디뿐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결혼식을 마친 후, 이건은 분명 이진과의 아이를 돌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그러기에 앞으로 일에 전념하는 시간은 점점 적어질 게 뻔했다.옆에 있던 이진은 한쪽에 놓인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리는 것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내가 너무 충동적인 건 아니겠지? 이건 씨는 날
이진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남학생을 꼬드겼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는 데다가, 시우 씨의 동생인 건 아예 모르던 일이야. 도대체 이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이진은 화를 내며 이건을 노려보았다.“제가 언제 그런 행동을 했다고 그래요. 전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거든요.”“정말이야?”이건은 일부러 장난친 거다. 사실 메시지를 보고 불쾌한 기분이 조금 들었는데, 이진의 반응은 그를 매우 기쁘게 했다.이건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그렇다면 자기 마음속에는 나밖에 없다는 거지?”‘그럼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네. 시우 이놈은 겁도 없네, 감히 내 아내더러 자기 사촌 동생을 위로해달라는 거야?’이건은 차갑게 웃으며 이진의 핸드폰을 가지고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시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진 씨, 제가 보낸 메시지를 보셨나요? 저도 어쩔 수 없어서 연락을 드린 거예요. 이 녀석이 술에 취해 밤새 이진 씨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또 뭐 했는데?”이건은 그의 말을 끊은 뒤 질투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네 사촌 동생이 대단한 사랑꾼인가 봐.”‘윤이건?’전화 너머의 시우는 하마터면 심장이 터질 뻔했다.“이건아, 이진 씨 핸드폰이 왜 네 손에 있는 거야? 난.”“나랑 이진이가 부부인 걸 잊은 거야?”이건은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아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럼 내 아내를 좋아하는 사람마다 직접 가서 위로해 줘야 되는 거야? 내가 동의할지 말지는 둘째 치고, 이진이 정말 간다고 해도 네 동생이 괜찮아질 리는 없어.”마침 뭔가 생각난 이건은 잠시 망설이더니 협박하듯이 말했다.“술에서 깨면 네 동생한테 전해. 어제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이건은 다른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에게 들러붙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이
‘윤이건? 윤이건이 어떻게?’시언은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와 시우는 사촌 형제이기에, 이건과 시우가 친한 친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이건은 이미 결혼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설마.’시언은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건과 이진이 어떤 사이든, 이진이 이건을 얼마나 의지하든, 그는 자신이 이진을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시언은 몸 옆에 늘어진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이때 정신을 차린 그는 앞으로 나아가, 이건의 앞길을 막고 환한 미소를 선보였다.“윤 대표님, 전 민시언입니다. 시우 형의 사촌 동생이에요. 시우 형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너무 영광입니다. 혹시 이진 씨랑은.”“이건 씨, 나 돌아가고 싶어요.”시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진은 취기를 못 이겨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이건의 차가운 표정은 순식간에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이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숙여 이진을 안았다. 그리고 시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진을 조수석에 태웠다. 세심하게 안전벨트를 맨 후 무심코 뒤쪽을 스쳐보자, 시언은 방금 자세를 유지한 채 제 자리에 서 있었다.“이건 씨, 얼른 돌아가요.”이진은 아직도 이건에게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이건은 시선을 돌려 이진의 희고 정교한 얼굴을 보자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그동안 결혼식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데, 반드시 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선물해 줄게.’이건이 직접 이진을 데려간 것을 목격한 시언은, 정신을 잃은 듯이 축 처진 채로 시우의 아파트를 찾았다. “민시언?”시우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언을 보자 조금 놀란 듯했다.“네가 이곳엔 왜 온 거야?”시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형, 술 한잔하실 래요?”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기에 술 한잔하는 것쯤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하지만 시우는 정희와 함께 임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최근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시언의 상
하룻밤 푹 자고 난 뒤, 다음날 아침 이진은 호텔에서 출발해 학교로 갔다.서현도 마찬가지로 이번 만남을 무척 중시하였다. 그녀는 이진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수업을 오후로 미뤘다.카페에 앉은 서현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이 대표님, 제가 오만해 보이긴 해도, 평범한 작가들과 비슷한 꿈을 꾸고 있거든요. 제가 쓴 시나리오를 대중들에게 알려, 널리 선보이는 게 제 꿈이에요. 하지만 제가 글을 쓸 때에는 저만의 요구가 있기에,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서현의 요구는 별로 지나치진 않았다. 그저 세훈이 제기했던 요구처럼 원칙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이 방면의 문제는 서현이 말하지 않아도 이진이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이진이 바로 동의하자 서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진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전에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서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제 너무 지나친 행동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이진 씨처럼 훌륭하신 분을 놓치게 되었을 지도 몰라.’ 세부사항을 토론한 후, 이진은 세훈과 서현을 데리고 원작자를 찾아가 판권을 따냈다.그 후 배우의 캐스팅으로부터 촬영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였다. 배우들의 캐릭터 소화는 물론, 배우들 사이의 호흡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몇 달 후, 영화는 이건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상영되었다.의 원작 팬이 워낙 많았고, 호기심으로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영화관을 나설 때 모두 영화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개봉 첫날, 전국의 영화관 티켓은 모두 매진되었다.심지어 대부분 영화관에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영화를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상영하였다.개봉한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는 수십 년간 1위를 차지했던 영화를 뛰어넘기도 했다.이 영화의 촬영 제작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도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그들은 마치 다크호스처럼 갑자기 대중들의 시선 속에 나
이진은 말을 마친 후 정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떠났다.“이진아, 넌 저분이 동의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한참을 걸은 뒤 정희가 호기심에 물었다.이진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현이 딱 봐도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재능이 있는 작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굳이 모욕을 당하면서 저 여자를 선택할 필요는 없잖아.’정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내가 연예계에 아는 사람이 꽤나 있는데, 그냥 이서현 말고 다른 작가 소개해 줄까?”“아직은 필요 없어.”이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아마 날 거절하지 않을 거야.”이진이 거절한 이상 정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정희가 포기한 채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앞에서 엄청난 비주얼을 가진 키 큰 남학생이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예쁜 누나들,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두 사람을 향해 한 말이지만, 남학생은 줄곧 이진을 훔쳐보고 있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정희는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학생, 지금 대시하는 거예요?”생각이 들통난 남학생은 부인하기는커녕 겸연쩍은 듯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누나들은 저희 학교 학생이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처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두 사람 연락처를 모두 받아 가시려는 거예요? 생각보다 욕심이 많으시네요.”정희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장난을 쳤다.그러자 남학생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용기를 내어 이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누나, 전화번호 주시면 안 될까요? 절대로 귀찮게 굴진 않을 게요!”‘지금 충분히 귀찮은 것 같은데.’이진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깔끔하게 거절했다.“죄송하지만, 안될 것 같네요.”난생처음 대시를 시도해 본 남학생은, 자신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남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옆에 있던 정희는 차마 이대로 지나치기 힘들어, 가방에서 이진의 명함을 한 장 꺼내 남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연락처는
이진은 자신의 가장 진실된 생각을 전한 것은 물론, 판권을 반드시 따내려는 결심으로 원작자를 두 번이나 찾아갔다. 결국 원작자는 그녀에게 한 번 만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진은 이번 기회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전에 조사한 자료들을 들고 사람을 찾으러 대학으로 향했다.그녀 스스로 배역을 연구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이진은 전문적인 작가를 찾아야 했다. 현재 대학교 교수인 이서현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출발하기 전에 이진은 특별히 학교의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현의 수업시간표를 찾았다. 그리고 교장에게 부탁하여 수업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이진의 신분을 알게 된 교장은, 단번에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두 손 두 발 들어 환영했다.한편 이 일을 알게 된 정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애초에 이진이 연예계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 경제 뉴스밖에 안 보던 이진이 정말 영화를 찍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진심이었던 거야? 왜 갑자기 영화를 찍으려는 거지?’정희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 네가 의 판권을 따내 영화로 제작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사실이야?”“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비행기 탑승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기에, 이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 지금.”“너 지금 공항이야?”눈치 빠른 정희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 한가하던 정희는 이진을 따라 서현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우리 이진이가 갑자기 영화를 찍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정희는 결정을 내린 듯이 말했다.“이진아, 좀만 기다려 금방 갈게!”정희는 줄곧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성격이라, 이진은 핸드폰을 거두고 방금 정희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비행기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착륙했다.이진은 택시를 타고 바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사전에 알아보았던 수업시간표를 따라 강의실을 찾았다. 분명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시간
이진은 별장을 나선 뒤 홀로 국장의 집으로 향했다.공교롭게도 여태껏 이진을 만나보고 싶어 하던 가정의도 국장의 집에 있었다.하지만 연이은 실패로 가정의도 이진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이진은 엄청 겸손한 데다가 이건의 아내다. 그녀가 어떤 신분이든 간에, 외부에 자신의 실력을 알릴 생각이 없다면, 가정의도 더 이상 묻진 않을 것이다.두 사람은 자리에 앉은 후, 국장의 건강에 대해 자세히 토론하기 시작했다.옆에 있던 국장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때때로 몇 마디 맞장구를 치자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이진은 경계심을 내려놓고 많은 의견을 제기하였다. 국장은 모든 의견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 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글썽였다.“모두 이진 씨 덕분이에요. 이진 씨가 아니었다면 이 늙은이가 고질병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고생했을 거예요.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국장님, 곧 괜찮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이진은 국장의 말을 얼른 끊은 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게다가 할아버지의 친구분이시니, 제가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전엔 제가 생각이 짧은 데다가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줄곧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너무 탓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탓하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나한테 이렇게 큰 도움을 줬는데, 고마워하기도 모자랄 판에 탓할 리가 있겠어?’마을의 개발 프로젝트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이진도 마찬가지로 세훈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이 대표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워낙 조건이 후해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더라고요.”진심 어린 이야기를 마친 후, 세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저한테 특별한 요구가 하나 있는데, 이 대표님께서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어떤 요구죠?”이진은 호기심에 눈썹을 찡긋거렸다.세훈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께서 절 좋게 봐주시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영화가 방영되었을 때 괜한 추측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방
오 감독은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 내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진에게 사과하기로 한 것이다.이진은 전에 말했던 대로 마음에 들었던 감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작품마저 몇 개 없는 신인 감독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 감독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나처럼 유명한 감독을 마다하고 신인 감독과 합작한다는 거야? 내가 그동안 받은 상이 얼마인데! 이진 그년은 분명 사람 보는 눈이 삐뚤어진 거야! 신인 감독 주제에 얼마나 잘 찍을지 똑똑히 지켜봐야겠어.’오 감독은 불만이 가득했으나 자신의 앞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진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모두 이진이 예상했던 대로다. 전화를 받은 순간, 이진은 만만에게 눈빛을 보내 모 플랫폼에서 생방송을 시작했다.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오 감독은, 애써 웃으며 이진의 용서를 구하는 척했다.“이진 씨, 전엔 제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보였던 것 같네요. 의 촬영을 양세훈한테 맡길 생각인 거죠? 제가 양 감독을 소개해 줄 테니, 실시간 검색어의 글들을 내려 주시면.”“글을 내려달라고요?”이진은 오 감독이 뜻밖의 비장 카드라도 쥐고 있는 줄 알았다. 그가 이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지금 말 같지 않은 조건으로 나와 협상하려는 거야?’이진은 마음속으로 차갑게 비웃고는 비꼬듯이 입을 열었다.“오 감독님, 본인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잊으신 거예요? 지금 저한테 조건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 사과를 하셔야죠. 제가 양세훈 감독님을 선택한 건 사실이지만, 제 방식대로 촬영에 참여하도록 설득시킬 것이니, 당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요.” “당신,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넘어가지 그래?”오 감독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모욕을 당했기에, 이대로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위선적인 모습을 집어치우더니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굽신거려주니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모두 윤이건 덕분이라는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마 윤 대표한테 들러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