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호 씨,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나는 손의 서류를 내려놓으며 난처해했다.어찌 되었든 나는 진짜로 병에 든 게 아니니 말이다.하지만 배인호는 현재 내가 유방암에 걸렸다고 굳게 믿고 있고, 이미 나를 위해 유방암 전문 치료병원까지 알아봐 둔 상태였다. 나는 배인호가 더는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않기 위해, 사실대로 그에게 말해주려 하였다.“난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한평생 후회할 것 같거든.”배인호는 명쾌하게 말했고 그 누구보다도 진지했다.“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최대한 다 들어줄 테니까.”그 약속은 순간 나의 마음을 움직였고, 사실대로 말해주려던 내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내가 물었다.“진짜예요? 이게 병원에서의 오진이거나 혹은 진짜 기적적으로 내가 살수 있다고 해도 그 약속 끝까지 지킬 거예요?”“응, 결과가 어떻든 간에 내가 들어주기로 한 일은 반드시 지켜.”배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지분 계약서를 하나 더 꺼냈다.“이거 봐.”그 계약서를 본 나는 배인호가 진짜로 크게 자극을 받았구나 싶었다. 그는 어떻게 배 씨 그룹의 15% 지분을 나에게 주려고 할 수 있지? 나는 뭔 말을 했으면 좋을지 몰라 멍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우리 이혼 전에 너 배 씨 그룹에 지분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지금 줄게. 만약 그 뒤에 너 진짜 뭔 일이라도 생기면 이건 네 부모님이나 두 아이한테 줄 수도 있어. 네가 돈이 부족하지 않은 거 나도 잘 아는데, 이 지분돈뿐만 아니라 내 내 약속이기도 해. 네 부모님과 두 아이, 내가 잘 보살필 수 있어.”배인호는 말을 하면서 점점 더 슬퍼 보였다.나는 이 거짓 사실로 인해 배인호의 따뜻한 면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내 마음속으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고, 이건 감동 아니면 뜻밖의 상황인 듯 하다.“배 씨 그룹 지분 저도 가지고 싶었죠.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이혼 전에 일이고, 이렇게나 많이 가질 생각은 없었어요.”나는 그 계약서를 배인호에게
“노민준의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요?”나는 바로 그에게 되물었다.나도 노민준의 주소를 찾고 있었고, 경찰의 도움만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이다.노민준이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살던 곳은 허름한 구식 아파트였다. 그의 고향 주소에 찾아가 봐도 아무도 없었고, 허물어진 낡은 집만 남아있을 뿐이었다.하여 노민준의 주소는 나에게 크나큰 쓸모가 없다. 나는 단지 이우범이 왜 이것을 찾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지영씨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지영 씨 그 일에 대해 내가 대놓고 도와줄 수는 없지만, 사실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그러면서 이우범은 핸드폰으로 나에게 낯선 주소를 하나 보내주었고, 그건 경찰 측에서 전에 나에게 주었던 그 주소와는 다른 주소였다.나는 다시 한번 이우범을 바라보았고, 그 뜻을 알 것만 같았다.그와 민설아는 현재 협업 관계라 상대방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우범은 나를 대놓고 도와줄 수는 없지만, 몰래 나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는 것이다.하지만…민설아가 알기라도 한다면, 이우범에게는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이미 민설아 씨와 협업하는 걸 선택하고 배인호 씨를 같이 겨냥하기로 한 거면서 왜 날 도와주는 거죠? 나와 민설아 씨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이우범 씨,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아요. ”내 속마음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우범이 나에게 준 단서는 추후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내가 그에게 또 신세를 지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왜냐하면 이 일은 나만 지영 씨를 도울 수 있으니까요. 민설아 아주 주도면밀해요. 나 말고 그 누구도 내부 사정에 대해 알 수 없다고요.”이우범은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해주었다.“이것은 내 결정이니 너무 많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한테 있어서 지영 씨가 신세 진 건 없어요. 굳이 신세 진 거라고 하면 내가 신세 진 건 있겠죠.”“그런 거 없어요.”나는 이우범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전에 내가
약을 따뜻한 물에 풀어 거실로 돌아오자 이우범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자격이 없으면 넌 있어? 너하고 나 똑같은 처지야.”“맞아.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난 내 모든 것을 바쳐 지영이한테 보상해 줄 거야. 근데 넌 그렇게 할 수 없잖아. 이우범 넌 네 가문의 일이나 가서 해결해.”배인호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했다.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내 가슴이 조금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이우범은 살짝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네 집안에는 문제가 없나 봐? 배인호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거 아니야? 예전에 내가 지영 씨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했었지? 내 충고를 듣지 않은 건 너야.”“우리 집안에 일이 있어도 부모님은 모두 지영이를 예뻐하셔. 네가 나와 비교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허허.”배인호의 경멸 가득한 비웃음을 날렸다.“그리고 네가 민설아를 도우면서 함께 나를 괴롭힌 순간부터 넌 나한테 충고할 자격 같은 건 없다는 걸 너도 알아야지.”이우범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이 오히려 담담하게 당시 자기가 한 행동을 설명했다.“내가 그렇게 한 건 네가 먼저 민설아한테 잘못했기 때문이야. 민설아는 네 아이를 임신했고 만약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민설아는 정말 강에 뛰어들었을 거야. 한 번에 두 사람이 죽을 뻔했다고. 너 두 생명을 감당할 수나 있겠어?”만약 이우범이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배인호는 그래도 화를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들은 이우범에 대한 배인호의 분노와 원망을 모두 폭발시켰다.“내 아이라고?”배인호는 화를 내며 물었다.“이우범, 난 계속 너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넌 매번 나를 바보로 만드는구나. 난 너희 집안에 극단적인 수단을 쓰진 않았어. 과거 우리 우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 부모님들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야. 만약 네가 나하고 끝까지 가보겠다면 어디 해 봐.”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배인호가 마침내 그 사실을 말할 줄은 몰랐
배인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우범의 모습도 나타났다.이미 내 침실 문 앞에 서 있는 배인호를 본 그의 표정이 약간 굳어지고 발걸음도 멈칫했지만 결국 다가왔다.이때 나는 품에 로아를 안고 있었는데 아기 침대에서 자던 승현이가 울기 시작했다. 배인호는 아기 침대로 가서 승현이를 들어 올려 품에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두 녀석은 배인호에게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품에 안고 조금 달래자 승현이는 바로 울음을 그쳤다.그 모습을 보고 나는 도우미를 부르지 않았다.공교롭게도 바로 이때 밖에서는 천둥소리가 그쳤고 비바람 소리만 계속 들려왔다. 이우범은 나와 배인호가 아이를 한 명씩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는 발코니로 가서 상황을 확인하면서 말했다.“바람이 너무 셌나 봐요. 발코니 밖에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창문에 부딪혔네요. 창문에 구멍이 뚫렸는데 내일 사람 불러서 바꾸면 될 거예요.”나는 로아를 안은 채 다가가 간단하게 확인했다. 발코니는 정말 엉망이었다. 통유리에 구멍이 뚤렸지만 다행히 전부 깨지진 않았다.바람에 의해 부러진 나뭇가지가 꽤 컸고 한쪽 귀퉁이가 여전히 유리에 박혀 있었다. 발코니는 완전히 젖어 있었다.“알겠어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우범에게 말했다.“어서 가서 쉬어요. 이젠 괜찮아요.”“내가 로아 안을게요.”하지만 이우범은 손을 뻗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내 품에 안겨 있는 로아를 바라보았다.애초에 엄마가 이우범이 아이들을 보기 위해 우리집에 오는 것을 허락했다. 나도 그가 로아와 승현이에 대한 사랑에 불순한 감정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한마디 하며 로아를 건네주었다.“어깨 다쳤으니까 조심해요.”“네.”이우범은 알겠다고 하며 다치지 않은 쪽으로 로아를 건네받으며 다친 쪽으로는 살며시 로아를 토닥였다.로아는 자기를 안고 있는 남자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맑고 촉촉한 눈동자와 방금 울어 살짝 붉어진 눈가가 조금 불쌍해 보였다.이우범은 참지
10시 반이 되자 약속대로 가느다란 형체가 내 앞에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순간 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민설아는 연보라색 트렌치코트 안에 흰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 얼굴이 더 작아 보였다. 그녀는 리버 로즈 핸드백을 들고 있었는데 눈부신 보석이 박혀있었다. 사실 그녀의 단아한 옷과 화장에 어울리지 않는 코디였다.“왜요? 날 보고 놀랐어요?’민설아는 나의 맞은편에 안더니 손에 들린 핸드백을 조심히 내려놓으며 우아하게 내게 물었다.“민설아 씨가 아만다예요?”나는 정말 놀랐지만 이내 진정하며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얘기 나누죠.”민설아는 웨이터를 불러 물 한 잔을 달라고 했다.나는 조용히 앉아서 샴페인을 마시며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만약 전매특허를 갖고 있는 사람이 민설아라면 나는 이 연구 프로젝트를 중단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엄마는 이 프로젝트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기획한 것이라고 했다. 삼촌이 돌아가시기 전 내린 마지막 결정이 바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거라고 하셨다. 돈을 벌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삼촌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 드리려는 이유가 더 컸다.내가 먼저 협력을 포기하겠다고 쉽게 말하지 않았다. 샴페인을 절반쯤 마셨을 때 민설아가 먼저 짜증을 내며 말했다.“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예요? 지영 씨네 회사에서 내 특허를 갖고 싶다면 먼저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민설아 씨가 말하는 성의라는 게 뭐죠?”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조롱 섞인 말을 날렸다.“배인호와 결혼하는 거라도 내가 도와줘야 하나요?”이 말을 듣더니 민설아의 표정이 바로 어두워졌다. 그녀가 한 모든 것은 모두 배인호와 결혼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몇 년간 죽은 척한 것도 남의 자식을 이용해 배씨 가문의 친손자인 척하며 돌아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배인호 정말 마약처럼 위험한 매력으로 사람을 빼져 들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도 한 번 죽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에게 푹 빠져 있었을 것이다.서란이든 민설아든 나와 다른 점은 아마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며 민설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를 자극하려는 모양인데 만약 삼촌이 살아계셨다면 민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신뢰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아마 나와 똑같은 선택을 하셨을 거라고 믿었다.“그래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평가해 줄 필요는 없어요. 고마워요.”나는 태연하게 몇 마디 건넨 뒤 더 이상 민설아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차가 주차장을 떠나려 할 때 민설아가 앞을 가로막을 줄은 몰랐다. 기사님이 내게 물었다.“대표님, 저 여자가 우리 차를 막고 있습니다.”“무시하고 그냥 돌아가 주세요.”나는 상대하기 귀찮아 기사님에게 민설아를 피해달라고 했다.다시 출발하려던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나는 앞좌석 등받이에 부딪힐 뻔해 화가 났다.“무슨 일이에요?”“대표님, 저 여자가 또 차 앞을 막아서서 거의 치일 뻔했습니다.”기사님은 두려움에 떨며 대답했다.유리창 밖을 바라보니 민설아가 자기 이미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팔을 벌린 채 내 차 앞을 막고 서 있었다.그 두려움 없는 기세에 나는 당황스러웠다.나는 정말 짜증이 났다. 프로젝트가 마지막 단계에서 문제가 생겼으니 기본적으로 폐기된 거나 마찬가지다.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민설아가 이렇게 질척거리니 나는 짜증이 몰려왔다.나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민설아는 내가 차에서 내리는 걸 보더니 바로 차 앞에서 비켰다. 나는 허리를 숙여 기사님에게 말했다.“먼저 다른 곳에서 기다려 주세요.”“알겠습니다.”기사님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차를 몰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벌써 가을이 되어 호텔 밖 길 양옆으로 단풍나무가 예쁘게 물들어 있었다. 한낮에도 가을 특유의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쌀쌀한 바람이 일자 빨간색이나 노란색 단풍잎이 바닥에 떨어져 인도를 아름답게 수놓았다.나는 단풍잎이 가득 덮인 길옆으로 민설아와 함께 걸어왔다.아름다운 풍경을 이런 사람과 함께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차는 왜 막는 거예요? 죽고 싶은
엄마는 감성적이긴 하지만 사업가이기에 이익과 손해를 정확하게 따지셨다.내가 분석한 결과를 말하자 결국 나의 선택을 믿어줬지만...“엄마 우리 가능한 한 빨리 대체할 수 있는 화장품 성분을 찾거나 아니면 협력 업체에 손해배상을 해줘야 해요. 만약 민설아와 손잡는다면 이후에 우리의 손해가 더 클 수도 있을 거예요.”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그래, 이틀 뒤 네 아빠 수술 끝나고 상황이 안정되면 간병인 쓸 거야. 너와 내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자.”엄마가 대답했다.엄마의 응원이 있으니 나는 바로 불안했던 마음이 많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놓였다. 편안하게 샤워를 끝냈는데 도우미가 다급하게 올라와서 나를 찾았다.“아가씨, 어젯밤에 오셨던 배인호라는 분이 또 오셨어요. 문 앞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어요.”배인호?팩을 붙이고 있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정말 할 일이 없는 걸까? 회사와 집안에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있어야 할 텐데.“돌아가라고 해요. 나 자고 있다고.’나는 이미 잠옷으로 바꿔 입었기에 다시 내려가기 귀찮았다.“어린 남자아이까지 데려와서 아가씨를 만나겠다고 하시는데.”도우미가 한마디 덧붙였다.어린 남자아이?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빈이일까?민설아는 배인호가 서울의 모든 일을 포기하고 여기로 왔다고 했는데? 설마 빈이까지 데리고 온 걸까?나는 빈이가 보고 싶긴 했지만 일이 너무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만약 배인호가 빈이를 데려온 것이라면...나는 마음이 흔들려 바로 재킷을 찾아 입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원을 지나 문밖에 서 있는 배인호가 보였다. 그는 전화하며 내가 나온 것을 발견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빠. 내일 다시 얘기해.”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빈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조금 실망감이 들었다.“뭘 찾는 거야?”배인호가 물었다.“아줌마가 당신이 어린 남자아이도 데려왔다
나는 배인호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그가 여러 명의 의사와 만든 단톡방이었다. 안에는 아빠의 검사 결과와 여러 의사의 제안이 들어있었다.상세한 분석을 접하니 나는 다 아는 글자들이었지만 낯선 감각이 들었다.“내 말을 듣지 않아도 괜찮아. 계속 그 병원에서 수술받아도 돼.”배인호는 내가 오랫동안 말이 없자 내가 아직도 그를 의심한다고 생각해 먼저 말한 것 같았다.계속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너무 당황스러워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빠가 폐암 초기이기에 수술을 잘 받고 회복만 잘하면 괜찮으실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건강관리를 잘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인호는 지금 나에게 아빠의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알겠어요. 고마워요.”나는 정신을 차린 뒤 핸드폰을 배인호에게 돌려주었다. 너무 속상해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아빠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수술을 받으시겠다고 한 것도 모두 내가 아픈 척 연기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아빠에게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면 치료를 거부하실 수도 있었다.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빈이의 목소리가 가끔 들려왔다.배인호가 물었다.“너 괜찮아?”“괜찮아요. 많이 늦었는데, 돌아갈 거예요? 아니면...”나는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심리적 압박감이 너무 컸지만 그런 모습을 배인호의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아 깊은 한숨을 쉰 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혼자서 조용히 있고 싶었다.이때 빈이가 달려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지영 아줌마, 오늘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요? 나 내일 병원에 가는데 오늘 밤에 동생들하고 더 놀고 싶어요.”“빈이야...”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기대 가득한 눈빛을 보니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빈이야, 우리 오늘 밤엔 돌아가야 해. 지영 아줌마 귀찮게 하지 말고.”이때 배인호가 입을 열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빈이의 손을 잡았다.빈이도 철이 든 아이였기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