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감성적이긴 하지만 사업가이기에 이익과 손해를 정확하게 따지셨다.내가 분석한 결과를 말하자 결국 나의 선택을 믿어줬지만...“엄마 우리 가능한 한 빨리 대체할 수 있는 화장품 성분을 찾거나 아니면 협력 업체에 손해배상을 해줘야 해요. 만약 민설아와 손잡는다면 이후에 우리의 손해가 더 클 수도 있을 거예요.”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그래, 이틀 뒤 네 아빠 수술 끝나고 상황이 안정되면 간병인 쓸 거야. 너와 내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자.”엄마가 대답했다.엄마의 응원이 있으니 나는 바로 불안했던 마음이 많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놓였다. 편안하게 샤워를 끝냈는데 도우미가 다급하게 올라와서 나를 찾았다.“아가씨, 어젯밤에 오셨던 배인호라는 분이 또 오셨어요. 문 앞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어요.”배인호?팩을 붙이고 있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정말 할 일이 없는 걸까? 회사와 집안에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있어야 할 텐데.“돌아가라고 해요. 나 자고 있다고.’나는 이미 잠옷으로 바꿔 입었기에 다시 내려가기 귀찮았다.“어린 남자아이까지 데려와서 아가씨를 만나겠다고 하시는데.”도우미가 한마디 덧붙였다.어린 남자아이?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빈이일까?민설아는 배인호가 서울의 모든 일을 포기하고 여기로 왔다고 했는데? 설마 빈이까지 데리고 온 걸까?나는 빈이가 보고 싶긴 했지만 일이 너무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만약 배인호가 빈이를 데려온 것이라면...나는 마음이 흔들려 바로 재킷을 찾아 입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원을 지나 문밖에 서 있는 배인호가 보였다. 그는 전화하며 내가 나온 것을 발견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빠. 내일 다시 얘기해.”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빈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조금 실망감이 들었다.“뭘 찾는 거야?”배인호가 물었다.“아줌마가 당신이 어린 남자아이도 데려왔다
나는 배인호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그가 여러 명의 의사와 만든 단톡방이었다. 안에는 아빠의 검사 결과와 여러 의사의 제안이 들어있었다.상세한 분석을 접하니 나는 다 아는 글자들이었지만 낯선 감각이 들었다.“내 말을 듣지 않아도 괜찮아. 계속 그 병원에서 수술받아도 돼.”배인호는 내가 오랫동안 말이 없자 내가 아직도 그를 의심한다고 생각해 먼저 말한 것 같았다.계속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너무 당황스러워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빠가 폐암 초기이기에 수술을 잘 받고 회복만 잘하면 괜찮으실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건강관리를 잘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인호는 지금 나에게 아빠의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알겠어요. 고마워요.”나는 정신을 차린 뒤 핸드폰을 배인호에게 돌려주었다. 너무 속상해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아빠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수술을 받으시겠다고 한 것도 모두 내가 아픈 척 연기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아빠에게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면 치료를 거부하실 수도 있었다.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빈이의 목소리가 가끔 들려왔다.배인호가 물었다.“너 괜찮아?”“괜찮아요. 많이 늦었는데, 돌아갈 거예요? 아니면...”나는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심리적 압박감이 너무 컸지만 그런 모습을 배인호의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아 깊은 한숨을 쉰 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혼자서 조용히 있고 싶었다.이때 빈이가 달려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지영 아줌마, 오늘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요? 나 내일 병원에 가는데 오늘 밤에 동생들하고 더 놀고 싶어요.”“빈이야...”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기대 가득한 눈빛을 보니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빈이야, 우리 오늘 밤엔 돌아가야 해. 지영 아줌마 귀찮게 하지 말고.”이때 배인호가 입을 열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빈이의 손을 잡았다.빈이도 철이 든 아이였기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취약점을 보여줄 수가 없었기에 오직 친구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아빠의 현재 상황을 알게 된 뒤 정아는 침묵했다. 이 일은 사실 그녀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녀의 도움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정아야, 나 먼저 끊을게.”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지영아, 이우범한테 말해보는 건 어때?”정아는 갑자기 이우범 얘기를 꺼내자 나는 깜짝 놀랐다.“이우범한테?”“어, 이우범이 너희 부모님께 잘한다며? 아직도 너희 부모님은 이우범한테 씐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으셨잖아? 게다가 의사니까 아저씨를 설득해 주면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정아는 정말 나에게 아이디어를 생각해 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통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좋아, 한 번 해볼게.’나는 바로 용기를 내서 이우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에 돌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설아도 이쪽에 왔으니 아마 이우범도 한동안 여기에 있을 것 같았다.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자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도로 끊었다.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다. 이우범이 필요할 때는 연락하면서 필요 없을 때는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했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뻔뻔하게 느껴졌다.드디어 아빠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흥분했었지만 결국 이 방법도 불가능했다.나 혼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이우범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이우범 쪽에서는 경적이 울리는 것이 차 안인 것 같았다.“나 지금 병원에 가는 길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아저씨 치료 방법 바꾸시도록 설득해 볼게요.’이우범이 먼저 말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마치 내가 먼저 자기에게 연락한 이유를 예상한 듯했다.“이우범 씨, 어떻게 알았어요?”나는 조금 놀랍기도 하면서 불안했다.“방금 아주머니가 나한테 연락해 주셨어요. 서울로 돌아가려다가 다시 돌아왔어요.”이우범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와 엄마의 뻔뻔한 도움
이우범이 너무 똑똑한 사람이라 당연히 사람한테 속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누구도 바보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순전히 나를 위해 타협한 것이었다.나는 조금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나 대신 아빠를 설득해 준 것은 고마웠지만 이 일 때문에 계속 그와 얽힐 수는 없었다.“이 얘기는 그만하죠.”이우범은 내가 회피한다는 것을 느꼈는지 가벼워진 말투로 말했다.“아까 내가 아저씨한테 지영 씨가 아픈척하고 있다는 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아저씨 몸 상태도 좋지 않으신데 괜히 걱정 끼칠 필요 없잖아요. 치료하려면 심리적인 안정 상태도 중요하니까요.”나는 깜짝 놀랐다.“네? 아빠한테 얘기했다고요?”이우범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나도 마침 계속 거짓말할 필요 없이 아빠를 보러 가면 된다.나는 머릿속에 아주 기막힌 상상이 떠올라 참지 못하고 불쑥 내뱉었다.“우범 씨 예전에 혹시 다단계에서 사람들 세뇌하는 일이라도 했었어요?”이우범은 나의 말에 어리둥절한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뒤 반응하며 말했다.“허지영 씨,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예전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잖아요?” 잘 알고 있다. 명문대를 졸업한 뒤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했고 짧은 시간 안에 병원에서 제일 어리고 실력 좋은 전문의가 됐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뒤에는 아주 성실하게 출근했기에 다른 투잡을 뛸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나는 뭔가 이우범을 모욕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바로 해명했다.“알죠, 당연히 잘 알죠. 난 그저 우범 씨 말재주가 존경스러워서요. 우리 아빠 고집이 얼마나 센데 그걸 이렇게 쉽게 꺾어요? 나하고 엄마는 가끔 아빠 고집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예요.”“아저씨 고집 세시죠. 그래도 아저씨 날 꽤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내 말도 들어주신 것 같아요.”이우범의 말은 자화자찬처럼 들렸지만 그이 말투는 맹세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했다.아빠는 엄마 못지않게 이우범을 좋
“아빠.”빈이는 배인호를 보고 달콤한 목소리로 부르며 달려갔다.배인호는 바로 자연스럽고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빈이를 내려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아빠 몰래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했지? 말 안 들을 거야?”빈이는 배인호가 꾸짖는 듯해지자 바로 내 뒤로 와서 숨은 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배인호의 눈치를 살폈다.“아빠, 난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게 불편해서 일어나 걸어 다닌 거예요.”“배인호 씨, 빈이 보살필 간병인 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민설아가 또 빈이 다치게 할까 봐 걱정돼요.”나는 배인호에게 물었다.하지만 빈이가 나의 말을 듣고 바로 나설 줄은 몰랐다.“지영 아줌마가 잘못 안 거예요. 마미는 날 다치게 하지 않아요.”빈이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민설아가 준 약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빈이가 계속 먹는 것을 말렸을 뿐이다. 그러니 내 말을 듣고 내가 자기 엄마를 오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나와 배인호는 동시에 빈이를 바라보았다. 배인호는 빈이에게 말했다.“빈이 어서 가서 자야지.”빈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흥하더니 순순히 병실로 들어갔다.빈이가 병실로 들어간 뒤 배인호는 나를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물었다.“애가 이러는데도 넌 속상하지 않아?”“별로 속상하지 않아요.”나는 대답했다. 나의 목적은 민설아를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빈이가 가여웠기에 챙겨주는 것이었다.민설아가 전에 빈이에게 어떻게 했든지 두 사람이 친모자 사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에 수년 동안 함께 의지하면서 산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네가 이렇게 마음이 넓은 줄 몰랐네?”배인호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내가 전에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으니까 당연히 몰랐겠죠.”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배인호는 피식 웃더니 우리 아빠 상황에 대해 말했다. 그는 이우범이 다녀간 것을 알고 있었다. 이우범이 나 대신 아
배인호가 나를 칭찬하는 것을 듣고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나를 이렇게 대놓고 칭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빈이는 마치 나와 배인호의 사이를 알고 있다는 듯이 바로 나를 향해 윙크했다.“지영 아줌마, 아빠가 다른 여자를 칭찬하는 거 처음 들어요. 아빠는 마미도 칭찬해 준 적 없어요.”빈이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말했다.“큼큼.”배인호는 바라 헛기침을 두 번 했다. 빈이는 바로 자기가 잘못 말했다는 것을 나는지 목을 움츠렸다. 그러고서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카드를 놀았다.나는 의외였다. 원래대로라면 빈이는 민설아와 배인호가 함께 하길 바라야 했다. 내가 아무리 잘해줘도 친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그러나 나는 이미 몇 번이나 빈이가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와 배인호를 이어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빈이의 이런 행동을 민설아가 알게 된다면 아마 화를 낼 것이다.“오늘은 왜 왔어?”배인호가 내게 다가오며 나가서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나는 카드를 놀고 있는 빈이를 바라보았다. 빈이는 지금 이미 불쌍할 정도로 앙상하게 말랐다. 항암치료를 시작해 머리카락도 거의 다 빠져 비니를 쓰고 있었다. 혈색 하나 없이 창백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병실 밖을 나온 뒤 나는 배인호에게 물었다.“아직도 일치하는 골수를 찾지 못했어요?”그 말을 듣더니 배인호도 조급해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찾았어.”나는 순간 기뻐서 깜짝 놀랐다.“정말요? 그럼 수술은 언제 받는 거예요?”“빈이 상태가 조금 안 좋아서 먼저 치료받은 뒤에 할 거야.”배인호의 대답에 나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빈이의 제일 큰 문제가 백혈병이다. 바로 이식 수술을 받은 뒤 회복하면 빈이는 계속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다른 문제가 또 있나?이어서 배인호는 내게 매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빈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영양실조 상태였어. 그리고 먹었던 약이 빈이의 성정에 영향을 줘서 또래보다 작고 마
“빈아. 만약에 진짜 엄마랑 가고 싶다면 아줌마는 너 많이 보고 싶을 거야.”결국 내가 내뱉은 말은 이처럼 온도 없는 대답이 되었다.빈이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래도 얌전하게 웃으며 말했다.“아줌마가 빈이 보고 싶어 할 거라는 거 알아요. 크면 꼭 다시 보러 올게요.”나는 마음이 어수선했다. 내 능력으로 아이 하나쯤 더 키우는 건 문제 없었다. 전에 불임 판정을 받았을 때 입양에 대해서도 고민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빈이의 신분이 문제였다.“응. 아줌마도 시간 나면 보러 갈게.”결국 난 마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게다가 민설아가 그렇게 쉽게 아이를 내게 넘겨줄 리가 없었다.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고 했다.“아줌마, 안아보고 싶어요.”나는 허리를 숙여 빈이를 안아주었다.“그래요, 그럼 저는 대디 찾으러 가요.”빈이는 얼른 나를 풀어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그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빈이를 데려다주려 했으나 그가 거절했다.“아줌마, 빈이 혼자 올라가면 돼요. 아줌마도 엄청 바쁘잖아요. 자주 보러 오지 않아도 돼요. 보디가드 아저씨 둘이나 있는데 심심하지 않아요. 같이 카드 게임도 하고 애니메이션도 보면 돼요.”빈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내 시간을 뺏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나는 그런 빈이를 보며 멈칫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빈이는 빠르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병원에서 나갔다. 아빠를 봤으니 이제 아이를 보러 가야 했다.차에 올라탔는데 배인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그가 물었다.“아까 빈이한테 뭐라 한 거야?”“아니요. 별말 안 했는데? 왜요?”내 가슴이 조여왔다.“올라와서는 말도 안 하고 갑자기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한참을 울더라고.”배인호의 말투에서 난감함이 느껴졌다.나는 마음이 먹먹했다. 아까 내 반응에 상처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랬다. 빈이에게 희망을 주고 또 실망을 준
“인호야, 지영이 아픈 거 아니니까, 그 이유로 찾아오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엄마는 내가 망설이자 대신 털어놓았다.배인호는 우리 엄마의 말을 듣더니 눈이 반짝였다. 나를 보는 눈빛에서 탐구의 의미가 보였다.마음이 켕기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인생에는 난처한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평생 갈고 닦은 연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나는 배인호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태연하게 웃었다.“네, 엄마 말이 맞아요. 병원 오진이에요.”엄마와 아빠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마도 오진은 무슨, 일부러 불쌍한 척하는 거라고 생각하실 것이다.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딱히 이 점을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무슨 용건 더 있어? 없으면 가봐. 나도 인제 그만 쉴 거야.”아빠가 전혀 배인호를 배려하지 않고 내쫓았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눕자마자 이불을 덮은 채 자는 척했다.“인호 씨, 무슨 일 있으면 나랑 얘기해요. 나가요.”미안하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해서 그런지 배인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계속 엄마, 아빠의 냉대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배인호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엄마가 한 말에 크게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엄마, 아빠에게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렸다.부모님은 내가 배인호와 나가서 얘기하려고 하자 다급하게 나를 말리려 했지만 내가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둘은 내키지 않아도 결국 가만히 있었다.복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 층은 다 고급 병실이라 조용한 편이었다. 가끔 몇몇 간호사만 갔다 왔다 했다.나와 배인호는 부모님이 우리가 하는 얘기를 듣지 못하게 나란히 걸어 나왔다.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미안해요. 오진이라는 거 진작에 알려줬어야 했는데, 바빠서 까먹었어요.”“이번엔 오진 아니래?”배인호가 되물었다. 눈빛으로는 그의 기분을 가늠할 수 없었다.“네, 이번에는 오진 아니래요. 만약에 나한테 속았다고 생각해서 전에 나한테 약속한 그 조건…”나는 알게 모르게 이 포인트를 짚었다. 내가 제일 묻고 싶은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