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인호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그가 여러 명의 의사와 만든 단톡방이었다. 안에는 아빠의 검사 결과와 여러 의사의 제안이 들어있었다.상세한 분석을 접하니 나는 다 아는 글자들이었지만 낯선 감각이 들었다.“내 말을 듣지 않아도 괜찮아. 계속 그 병원에서 수술받아도 돼.”배인호는 내가 오랫동안 말이 없자 내가 아직도 그를 의심한다고 생각해 먼저 말한 것 같았다.계속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너무 당황스러워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빠가 폐암 초기이기에 수술을 잘 받고 회복만 잘하면 괜찮으실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건강관리를 잘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인호는 지금 나에게 아빠의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알겠어요. 고마워요.”나는 정신을 차린 뒤 핸드폰을 배인호에게 돌려주었다. 너무 속상해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아빠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수술을 받으시겠다고 한 것도 모두 내가 아픈 척 연기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아빠에게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면 치료를 거부하실 수도 있었다.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빈이의 목소리가 가끔 들려왔다.배인호가 물었다.“너 괜찮아?”“괜찮아요. 많이 늦었는데, 돌아갈 거예요? 아니면...”나는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심리적 압박감이 너무 컸지만 그런 모습을 배인호의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아 깊은 한숨을 쉰 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혼자서 조용히 있고 싶었다.이때 빈이가 달려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지영 아줌마, 오늘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요? 나 내일 병원에 가는데 오늘 밤에 동생들하고 더 놀고 싶어요.”“빈이야...”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기대 가득한 눈빛을 보니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빈이야, 우리 오늘 밤엔 돌아가야 해. 지영 아줌마 귀찮게 하지 말고.”이때 배인호가 입을 열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빈이의 손을 잡았다.빈이도 철이 든 아이였기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취약점을 보여줄 수가 없었기에 오직 친구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아빠의 현재 상황을 알게 된 뒤 정아는 침묵했다. 이 일은 사실 그녀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녀의 도움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정아야, 나 먼저 끊을게.”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지영아, 이우범한테 말해보는 건 어때?”정아는 갑자기 이우범 얘기를 꺼내자 나는 깜짝 놀랐다.“이우범한테?”“어, 이우범이 너희 부모님께 잘한다며? 아직도 너희 부모님은 이우범한테 씐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으셨잖아? 게다가 의사니까 아저씨를 설득해 주면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정아는 정말 나에게 아이디어를 생각해 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통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좋아, 한 번 해볼게.’나는 바로 용기를 내서 이우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에 돌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설아도 이쪽에 왔으니 아마 이우범도 한동안 여기에 있을 것 같았다.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자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도로 끊었다.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다. 이우범이 필요할 때는 연락하면서 필요 없을 때는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했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뻔뻔하게 느껴졌다.드디어 아빠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흥분했었지만 결국 이 방법도 불가능했다.나 혼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이우범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이우범 쪽에서는 경적이 울리는 것이 차 안인 것 같았다.“나 지금 병원에 가는 길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아저씨 치료 방법 바꾸시도록 설득해 볼게요.’이우범이 먼저 말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마치 내가 먼저 자기에게 연락한 이유를 예상한 듯했다.“이우범 씨, 어떻게 알았어요?”나는 조금 놀랍기도 하면서 불안했다.“방금 아주머니가 나한테 연락해 주셨어요. 서울로 돌아가려다가 다시 돌아왔어요.”이우범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와 엄마의 뻔뻔한 도움
이우범이 너무 똑똑한 사람이라 당연히 사람한테 속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누구도 바보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순전히 나를 위해 타협한 것이었다.나는 조금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나 대신 아빠를 설득해 준 것은 고마웠지만 이 일 때문에 계속 그와 얽힐 수는 없었다.“이 얘기는 그만하죠.”이우범은 내가 회피한다는 것을 느꼈는지 가벼워진 말투로 말했다.“아까 내가 아저씨한테 지영 씨가 아픈척하고 있다는 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아저씨 몸 상태도 좋지 않으신데 괜히 걱정 끼칠 필요 없잖아요. 치료하려면 심리적인 안정 상태도 중요하니까요.”나는 깜짝 놀랐다.“네? 아빠한테 얘기했다고요?”이우범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나도 마침 계속 거짓말할 필요 없이 아빠를 보러 가면 된다.나는 머릿속에 아주 기막힌 상상이 떠올라 참지 못하고 불쑥 내뱉었다.“우범 씨 예전에 혹시 다단계에서 사람들 세뇌하는 일이라도 했었어요?”이우범은 나의 말에 어리둥절한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뒤 반응하며 말했다.“허지영 씨,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예전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잖아요?” 잘 알고 있다. 명문대를 졸업한 뒤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했고 짧은 시간 안에 병원에서 제일 어리고 실력 좋은 전문의가 됐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뒤에는 아주 성실하게 출근했기에 다른 투잡을 뛸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나는 뭔가 이우범을 모욕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바로 해명했다.“알죠, 당연히 잘 알죠. 난 그저 우범 씨 말재주가 존경스러워서요. 우리 아빠 고집이 얼마나 센데 그걸 이렇게 쉽게 꺾어요? 나하고 엄마는 가끔 아빠 고집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예요.”“아저씨 고집 세시죠. 그래도 아저씨 날 꽤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내 말도 들어주신 것 같아요.”이우범의 말은 자화자찬처럼 들렸지만 그이 말투는 맹세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했다.아빠는 엄마 못지않게 이우범을 좋
“아빠.”빈이는 배인호를 보고 달콤한 목소리로 부르며 달려갔다.배인호는 바로 자연스럽고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빈이를 내려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아빠 몰래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했지? 말 안 들을 거야?”빈이는 배인호가 꾸짖는 듯해지자 바로 내 뒤로 와서 숨은 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배인호의 눈치를 살폈다.“아빠, 난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게 불편해서 일어나 걸어 다닌 거예요.”“배인호 씨, 빈이 보살필 간병인 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민설아가 또 빈이 다치게 할까 봐 걱정돼요.”나는 배인호에게 물었다.하지만 빈이가 나의 말을 듣고 바로 나설 줄은 몰랐다.“지영 아줌마가 잘못 안 거예요. 마미는 날 다치게 하지 않아요.”빈이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민설아가 준 약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빈이가 계속 먹는 것을 말렸을 뿐이다. 그러니 내 말을 듣고 내가 자기 엄마를 오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나와 배인호는 동시에 빈이를 바라보았다. 배인호는 빈이에게 말했다.“빈이 어서 가서 자야지.”빈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흥하더니 순순히 병실로 들어갔다.빈이가 병실로 들어간 뒤 배인호는 나를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물었다.“애가 이러는데도 넌 속상하지 않아?”“별로 속상하지 않아요.”나는 대답했다. 나의 목적은 민설아를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빈이가 가여웠기에 챙겨주는 것이었다.민설아가 전에 빈이에게 어떻게 했든지 두 사람이 친모자 사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에 수년 동안 함께 의지하면서 산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네가 이렇게 마음이 넓은 줄 몰랐네?”배인호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내가 전에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으니까 당연히 몰랐겠죠.”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배인호는 피식 웃더니 우리 아빠 상황에 대해 말했다. 그는 이우범이 다녀간 것을 알고 있었다. 이우범이 나 대신 아
배인호가 나를 칭찬하는 것을 듣고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나를 이렇게 대놓고 칭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빈이는 마치 나와 배인호의 사이를 알고 있다는 듯이 바로 나를 향해 윙크했다.“지영 아줌마, 아빠가 다른 여자를 칭찬하는 거 처음 들어요. 아빠는 마미도 칭찬해 준 적 없어요.”빈이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말했다.“큼큼.”배인호는 바라 헛기침을 두 번 했다. 빈이는 바로 자기가 잘못 말했다는 것을 나는지 목을 움츠렸다. 그러고서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카드를 놀았다.나는 의외였다. 원래대로라면 빈이는 민설아와 배인호가 함께 하길 바라야 했다. 내가 아무리 잘해줘도 친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그러나 나는 이미 몇 번이나 빈이가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와 배인호를 이어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빈이의 이런 행동을 민설아가 알게 된다면 아마 화를 낼 것이다.“오늘은 왜 왔어?”배인호가 내게 다가오며 나가서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나는 카드를 놀고 있는 빈이를 바라보았다. 빈이는 지금 이미 불쌍할 정도로 앙상하게 말랐다. 항암치료를 시작해 머리카락도 거의 다 빠져 비니를 쓰고 있었다. 혈색 하나 없이 창백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병실 밖을 나온 뒤 나는 배인호에게 물었다.“아직도 일치하는 골수를 찾지 못했어요?”그 말을 듣더니 배인호도 조급해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찾았어.”나는 순간 기뻐서 깜짝 놀랐다.“정말요? 그럼 수술은 언제 받는 거예요?”“빈이 상태가 조금 안 좋아서 먼저 치료받은 뒤에 할 거야.”배인호의 대답에 나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빈이의 제일 큰 문제가 백혈병이다. 바로 이식 수술을 받은 뒤 회복하면 빈이는 계속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다른 문제가 또 있나?이어서 배인호는 내게 매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빈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영양실조 상태였어. 그리고 먹었던 약이 빈이의 성정에 영향을 줘서 또래보다 작고 마
“빈아. 만약에 진짜 엄마랑 가고 싶다면 아줌마는 너 많이 보고 싶을 거야.”결국 내가 내뱉은 말은 이처럼 온도 없는 대답이 되었다.빈이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래도 얌전하게 웃으며 말했다.“아줌마가 빈이 보고 싶어 할 거라는 거 알아요. 크면 꼭 다시 보러 올게요.”나는 마음이 어수선했다. 내 능력으로 아이 하나쯤 더 키우는 건 문제 없었다. 전에 불임 판정을 받았을 때 입양에 대해서도 고민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빈이의 신분이 문제였다.“응. 아줌마도 시간 나면 보러 갈게.”결국 난 마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게다가 민설아가 그렇게 쉽게 아이를 내게 넘겨줄 리가 없었다.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고 했다.“아줌마, 안아보고 싶어요.”나는 허리를 숙여 빈이를 안아주었다.“그래요, 그럼 저는 대디 찾으러 가요.”빈이는 얼른 나를 풀어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그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빈이를 데려다주려 했으나 그가 거절했다.“아줌마, 빈이 혼자 올라가면 돼요. 아줌마도 엄청 바쁘잖아요. 자주 보러 오지 않아도 돼요. 보디가드 아저씨 둘이나 있는데 심심하지 않아요. 같이 카드 게임도 하고 애니메이션도 보면 돼요.”빈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내 시간을 뺏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나는 그런 빈이를 보며 멈칫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빈이는 빠르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병원에서 나갔다. 아빠를 봤으니 이제 아이를 보러 가야 했다.차에 올라탔는데 배인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그가 물었다.“아까 빈이한테 뭐라 한 거야?”“아니요. 별말 안 했는데? 왜요?”내 가슴이 조여왔다.“올라와서는 말도 안 하고 갑자기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한참을 울더라고.”배인호의 말투에서 난감함이 느껴졌다.나는 마음이 먹먹했다. 아까 내 반응에 상처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랬다. 빈이에게 희망을 주고 또 실망을 준
“인호야, 지영이 아픈 거 아니니까, 그 이유로 찾아오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엄마는 내가 망설이자 대신 털어놓았다.배인호는 우리 엄마의 말을 듣더니 눈이 반짝였다. 나를 보는 눈빛에서 탐구의 의미가 보였다.마음이 켕기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인생에는 난처한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평생 갈고 닦은 연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나는 배인호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태연하게 웃었다.“네, 엄마 말이 맞아요. 병원 오진이에요.”엄마와 아빠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마도 오진은 무슨, 일부러 불쌍한 척하는 거라고 생각하실 것이다.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딱히 이 점을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무슨 용건 더 있어? 없으면 가봐. 나도 인제 그만 쉴 거야.”아빠가 전혀 배인호를 배려하지 않고 내쫓았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눕자마자 이불을 덮은 채 자는 척했다.“인호 씨, 무슨 일 있으면 나랑 얘기해요. 나가요.”미안하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해서 그런지 배인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계속 엄마, 아빠의 냉대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배인호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엄마가 한 말에 크게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엄마, 아빠에게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렸다.부모님은 내가 배인호와 나가서 얘기하려고 하자 다급하게 나를 말리려 했지만 내가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둘은 내키지 않아도 결국 가만히 있었다.복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 층은 다 고급 병실이라 조용한 편이었다. 가끔 몇몇 간호사만 갔다 왔다 했다.나와 배인호는 부모님이 우리가 하는 얘기를 듣지 못하게 나란히 걸어 나왔다.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미안해요. 오진이라는 거 진작에 알려줬어야 했는데, 바빠서 까먹었어요.”“이번엔 오진 아니래?”배인호가 되물었다. 눈빛으로는 그의 기분을 가늠할 수 없었다.“네, 이번에는 오진 아니래요. 만약에 나한테 속았다고 생각해서 전에 나한테 약속한 그 조건…”나는 알게 모르게 이 포인트를 짚었다. 내가 제일 묻고 싶은
아빠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엄마가 막았다.무엇이든 도가 넘으면 역효과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나와 배인호는 아직 재결합의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데 더 자극하다가 나의 반항 심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엄마는 나를 잘 알았다. 전에 모녀 사이에 틈이 생길 뻔한 이유도 너무 강압적으로 내 감정에 관여하려 했기 때문이다.“아빠, 됐어요. 잘 쉬고 계세요.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나는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는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집에 돌아오니 골치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이모건이 우리 집 앞에 서서 어두운 표정으로 우리 집 대문을 훑어봤다.세희는 요즘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다. 정서가 안정적이지 않아 별로 집에서 나오지 않았고 나의 두 아이를 돌봤다. 귀여운 두 아이를 보며 마음의 병을 치료하려고 했다.이모건을 본 순간 내 마음이 조여왔다.나는 바로 차에서 내리지 않고 즉시 세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빨리 어딘가 숨어 있으라고 말이다.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태연한 척 차에서 내렸다.“허지영 씨.”나를 본 이모건은 이국적인 외모로 약간은 가식적으로 웃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외국인의 발음이 조금씩 들렸다. 오히려 그게 더 매력적이었다.“제 여자 친구 여기에 있나요?”여자 친구라니,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영국에 약혼녀까지 있는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세희를 자기 여자 친구라고 부르는지 의문이었다. 영국에 요즘 들어 일부다처제가 유행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미안한데, 이모건 씨 여자 친구가 누구죠?”나는 가방을 들고 이모건 앞으로 걸어가 낯선 말투로 물었다.“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냐고요?”“여자 친구와 조금 다퉜어요. 전화를 안 받아주더라고요. 정아와 민정이네는 이미 찾았는데 없었어요. 그래서 이쪽으로 온 거예요.”이모건은 내가 이렇게 비꼬아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미소를 유지했다. 하지만 눈가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나는 이모건 어머니의 신분이 떠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