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범 선배, 지영 씨하고 좋아 보이네요.”민설아가 먼저 입을 열더니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이우범은 부인하지 않고 되물었다.“너하고 인호도 사이좋잖아. 아니야?”“뭐 그냥 그렇죠. 우리는 오래 떨어져 있었잖아요. 모든 걸 다시 맞춰가야죠. 근데 괜찮아요.”민설아는 젖은 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에 감정이 남아 있으니까요. 우리가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진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힘들게 얻은 이번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있어요. 무엇보다 아이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우리도 아이 생각해야죠.”말하며 민설아는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빈아. 들어가서 글쓰기 연습하고 있어. 마미는 여기서 바람 쐬다 들어갈게.”빈이는 순순히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더 이우범과 민설아의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다.“얘기 나눠요. 난 샤워하러 가 볼게요.”“네.”이우범이 부드럽게 말했다.“조금 있다가 머리는 내가 말려줄게요.”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더니 이우범은 눈빛을 반짝였다.욕실에 들어가서 나는 빠르게 샤워를 끝냈다. 옷을 입고 나왔더니 이우범은 보이지 않았다.발코니와 방 어디에도 없었다.나는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내가 직접 머리를 말릴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이우범이 내 머리를 말려 줬다면 서로 너무 어색할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머리를 다 말릴 때까지 이우범은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바로 잠자리에 들려 했지만 졸리지 않았다. 그런 김에 나가서 이우범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엘리베이터에 타자 갑자기 배인호가 엘리베이터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나를 보고 놀라 눈썹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더니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샤워했는지 몸에서 나와 같은 향이 났다. 아마 호텔에서 갖춰 둔 은은한 장미꽃향이 나는 바디워시를 사용한 것 같았다.이때 엘리베이터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움직이는 층수만 바라보았다. 그
이우범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나의 손을 잡았다.“설아하고 아래층에서 얘기 좀 나눴어요. 날 찾았으면 전화하지 그랬어요. 그럼 돌아왔을 텐데.”그는 내게 솔직했다. 민설아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질투가 난다거나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속으로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와 민설아가 함께 할 얘기가 뭐지? 둘 사이에 아직도 뭔가 남아있나?나와 이우범은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많이 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를 위해 따뜻한 티도 가져다주며 다정하게 챙겨주었다.하지만 나는 불편한 마음 때문에 이런 따뜻한 다정함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우범 씨, 설아 씨하고 무슨 얘기 했어요?”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우범은 흠칫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왜요? 질투하는 거예요? 아니면 내가 민설아하고 뭔가 꾸미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나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 예상할까?나는 그를 의심한 것이 아니라 단지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궁금했을 뿐이다.묘한 내 표정을 보더니 이우범은 손을 뻗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하지 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민설아가 로아와 승현이에 관해 묻더라고요. 민설아가 의심이 좀 많은 것 같아요. 승현이가 인호를 닮은 것 같아서 꼭 나한테 확인하고 싶었대요.”그렇게 된 일인 걸까? 나는 마음속에 의문이 계속 풀리진 않았지만 그 이유도 이해가 되는 것 같긴 했다. 민설아가 로아와 승현이에 해대 의심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나도 배인호를 쏙 빼닮은 빈이를 봤을 때 의심했었다.“이제 됐죠? 오늘 많이 놀랐을 텐데 일찍 쉬어요. 난 소파에서 잘게요.”이우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네, 많이 피곤하네요.”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늦은 밤이었다. 엘리베이터 사고에 대한 책임은 다음에 호텔 직원에게 물어야겠다.다음날 몇 가지 액티비티
“나 괜찮아요.”나는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을 잠시 멈췄다. 아직 이런 붉은색 잠수복을 다른 사람도 입었는지 정확히 몰랐다. 바다에 우리 두 커플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큰 문제는 없었지만 손바닥에 난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요트에 구급상자가 있었기에 이우범이 조심스럽게 상처를 치료해 주고 붕대도 감아주었다.모든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 민설아가 먼저 제안했다.“인호 씨, 우리 여기서 지영 씨네하고 같이 점심 준비해서 먹는 건 어때요?”그녀와 배인호가 잡은 해산물은 신선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때 그녀는 모든 걸 우리 요트로 가져왔다.“됐어. 우리는 호텔에 돌아가서 먹을 거야.”이우범은 거절했지만 나는 그러자고 했다.“그래요. 그럼 같이 준비해요. 내가 손을 다쳐서 많이 돕진 못하겠지만 맛있게 먹을 순 있어요.”민설아는 태연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요리는 내가 할게요. 다들 내 요리 솜씨 기대해요.”우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먼저 옷을 바꿔 입으로 갔다. 그다음 점심 식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편에 앉아서 바삐 움직이는 민설아를 조용히 지켜보았다.요트에 하늘이 보이는 주방이 있었다. 각종 요리 도구들과 조미료로 가득했다. 민설아의 솜씨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해산물을 손질하는 자세가 꽤 익숙해 보였다.아마도 예전부터 자주 요리해 본 것 같았다.아이에 대한 그녀의 사랑으로 봐서는 해외에서 아이와 단둘이 지내며 직접 요리해서 아이를 먹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인호 씨, 생강 좀 씻어 줄래요?”민설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배인호에게 물었다.“그래.”배인호는 자연스럽게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이때까지 손가락에 물 한번 묻혀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방에 들어가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우리 집에 왔을 때 처음으로 들어갔다가 주방을 폭발시킬 뻔했다.오늘 보니 민설아를 도와주는 그의 모습이 꽤 익숙해 보였다. 단지 말없이 야채를 씻으며
증거는 없었지만 이런 생각이 한 번 떠오르니 억누를 수 없었다.만약 민설아가 내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면 나는 그저 그녀를 냉혈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밧줄을 나의 발목에 감았다면 그건 의미가 달랐다. 이건 계획 살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인호 씨, 내 가방에서 물티슈 좀 가져다줘요. 기름기 때문에.”민설아가 자기 손에 묻은 기름을 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민설아의 가방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배인호가 대답했다.“알겠어. 잠깐만.”내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내가 가져다줄게요.’내가 가방으로 향하자 민설아의 표정이 변하더니 바로 달려왔다.“괜찮아요. 내가 꺼낼게요. 뭐 이미 더러워진 가방인데요.”그런 다음 그녀는 가방을 손에 넣더니 내가 볼 수 없는 거리까지 간 뒤에야 가방 안에서 물티슈를 꺼냈다.그 행동에 나는 너무 수상했다. 가방 안에 내가 보면 안 되는 물건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하게 내가 보는 것이 싫은 것일까?“왜 그래요?”내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이우범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나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민설아와 배인호는 점심 식사 준비를 마쳤다. 전부 해산물 요리였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와인까지 꽤나 풍성했다.나와 이우범은 한편에 나란히 앉았고 배인호와 민설아가 우리 맞은편에 앉았다.민설아는 자기가 만든 요리에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다.“지영 씨, 우범 씨, 어서 맛이 어떤지 먹어 봐요.”“아주 맛있을 것 같네요.”나는 먹기도 전에 먼저 칭찬했다.“그럼 많이 먹어요.”민설아가 이우범에게 눈짓했다.“우범 선배, 와이프가 손을 다쳤는데 이럴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지영 씨한테 많이 짚어줘요. 아니면 먹여줘도 괜찮고요.”배인호가 차갑게 말했다.“왼손잡이도 아닌데 무슨.”내가 다친 손은 왼손이었다. 하지만 난 오른손잡이였기에 일상생활에 영향이 없었다.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는 정도는 문제 될 것도
나는 민설아의 가방에 왜 그런 밧줄이 들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호텔 매니저에게 연락했다.연락 후 사진을 한 장 보내줬다. 그 사진에는 호텔에서 해산물을 묶을 때 쓰는 밧줄이 있었는데 역시나 민설아 가방에 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 밧줄을 증거로 삼아 그녀를 범인으로 몬다면 그녀는 그것을 이용해 나를 반박할 것이다. 결국 내가 그녀를 모함한 것으로 상황은 반전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호텔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조심하지 않아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이번 일은 더 언급하지 말아야겠어요. 우리에겐 증거가 없어요.”나는 이우범에게 말하며 이유를 설명했다.“네, 알겠어요.”이우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당부했다.“이제부터 민설아를 멀리해요. 난 걔 성격이 어떤지 잘 알아요. 서란 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진 않아요.”이건 이우범이 내게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것이다. 민설아를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난 그녀가 이전에 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오후에는 계속 잠만 잤다. 어두워질 때가 되어서야 이우범과 나가서 밥을 먹었다.호텔 레스토랑은 꼭대기 층에 있었다. 원형 유리 지붕으로 되어 있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다가 훤히 보였다.밤에는 바다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밤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화려한 조명이 꽤 멋있었다.나는 입맛이 없었기에 간단하게 먹을 것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편으로 야경을 보며 식사했다. 이우범은 나의 옆에 앉아서 견과류를 내게 까 주었다.“먹어요.”“저녁에 이걸 다 먹으면 살찌는 거 아니에요?”나는 웃으며 물었다.“지영 씨는 더 쪄도 괜찮아요.”이우범은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너무 마르면 보는 내 마음이 아파요.”사실 지금 난 많이 좋아진 것이었다. 예전에 말랐을 때 여자는 아이를 낳으면 살이 찐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그때 가면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몸매를 가지게 될 거라고 했었다
“울어도 소용없어. 어서 사과해.”놀랍게도 배인호가 입을 열었다. 방금 나에게 사과를 요구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그는 빈이를 나의 앞으로 데려왔다.“마미가 네 잘못이라고 했으면 사과해야지. 아까는 내가 오해했어.”그의 행동에 민설아도 어안이벙벙한지 멍하니 배인호를 바라보았다.빈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내 앞에 와서 섰다. 지금 엄마와 아빠 모두 자기에게 사과하라고 하니 기댈 곳도 없는데 어떻게 계속 고집을 부릴 수 있을까?“아줌마 죄송해요. 내, 내가 마음대로 먹을 것을 가져갔어요. 내가 잘 못했어요. 우아아아...”빈이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말까지 더듬는 모습이 보기에도 안타까웠다.어린아이가 모르는 것이 많은 건 부모가 잘 가르치지 못한 결과다. 그러니 빈이가 이렇게 된 건 민설아의 책임이다.나는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아줌마가 용서해 줄게. 다음부터 먹고 싶은 건 먼저 예의 있게 물은 다음에 먹는 거야. 알겠지?”빈이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배인호와 민설아를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민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빈이에게 손을 흔들었다.“착하지. 이리 와.”빈이는 뛰어가서 다시 민설아의 등 뒤에 숨었다. 배인호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그럼, 식사 마저 해요.”나는 배인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려 이우범에게 말했다.“우린 가요.”이때 민설아가 또 입을 열었다.“지영 씨, 잠깐 할 얘기 있어요.”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나와 그녀가 더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우범은 그걸 보더니 내 팔을 잡고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배인호가 나의 반대쪽 팔을 잡았다.“잠깐만, 못 들었어?”원래 나는 민설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고 했다. 어차피 얽혔는데 그녀가 어떤 연기를 펼치는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배인호의 거친 행동에 짜증이 났다.나는 바로 그의 손을 쳐냈다.“난 듣고 싶지 않네요.”말을 마치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나는 담담하게 대답한 뒤 정아와 함께 온천으로 들어갔다.그 사이 정아는 불쾌한 듯 계속 민설아를 언급했다.그녀는 예전에 서란을 싫어했었다. 지금은 서란이 감옥에 갇혔는데 또 민설아가 나타났다. 애초에 서란은 민설아를 닮은 외모에 민설아의 심장을 이식받았다는 이유로 배인호와 얽히게 된 것이었다.정아는 내게 지금은 서란 보다 민설아가 더 꼴 보기 싫다고 말했다.“민설아 얘긴 그만하고 네 얘기 들어보자.”정아가 갑자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이우범과 이번에 같이 놀러 온 소감이 어때? 부부 사이의 감정에 도움이 됐어?”“그럭저럭.”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우범은 내게 잘해주었다. 그는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나는 그를 좋아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끔 흔들리긴 했지만 모두 아이들 때문이었다. 정아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아이고, 나도 알아. 네가 지금 이우범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는걸. 애들 때문에 같이 있는 거겠지. 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몰랐어. 언론에서는 네가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떠들어 대고 있었는데 네가 이우범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는 소식을 알렸으니. 정말 대단했어.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여줬지.”나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나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우범과 나는 애초에 아무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승현이가 배인호를 닮았다고 느끼면서도 입 밖으로 말하진 못했다.온천을 마친 뒤 정아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럴 때면 왜 베프가 좋다고들 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노성민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여보, 아들이 배고프대.”“알았어. 금방 갈게.”정아는 큰아들이 배고프다는 소리를 듣더니 바로 급해졌다. 전화를 끊은 뒤 제일 빠른 속도로 옷을 입으며 내게 말했다.“지영아, 나 먼저 올라갈게. 너 아까 야식 먹겠다고 했지? 같이 못 먹겠어.”“그래. 너 빨리 가봐.”나는 서둘러
저 사람은 심한 폐질환을 앓고 있다고 했는데 왜 담배를 피우지?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다시 삼켰다. “그래요. 타세요.”이우범은 나를 한 번 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차에 오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목적지에 도착할 동안 차 안에서 그들은 배려도 없이 계속 담배를 피웠다.내가 그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막지 않으니 끊임없이 피워댔다. 그 모습에 나는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이우범에게 먼저 두 사람의 목적지에 데려다주자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두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었고 돈을 줄 생각은 더욱 없어 보였다. 어차피 내가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내게 주는 느낌이 너무 좋지 않았다.백미러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로아야, 승현아.”집에 오자마자 나는 두 아이를 빨리 만나고 싶어 달려갔다. 부모님은 내가 온 것을 보시더니 얼른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셨다.“아이고, 엄마 왔네. 로아 승현이 엄마가 돌아왔네.”엄마는 로아를 내게 넘겨주며 허허 웃으셨다.“어땠어? 이틀 동안 재밌게 놀았니?”엄마는 내가 거기서 배인호와 민설아를 만났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질문을 하실 리가 없었다.엄마가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재밌었어요. 애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먼저 왔어요.”이때 이우범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못 보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이거 아까 그 두 사람이 실수로 두고 간 핸드폰이에요.”두 사람이 차에서 내릴 때 조금 급해 보이더니 핸드폰을 차에 떨어트린 것도 몰랐나 보다.나는 로아를 다시 엄마에게 안겨준 뒤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브랜드도 없는 낡아 보이는 핸드폰이었지만 두 사람에게 중요한지는 알 수 없었다.나는 핸드폰을 열어 통화목록을 보려고 했다. 화면을 터치하니 비밀번호도 잠겨있지 않아 바로 열렸다. 바로 문자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