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범 씨, 미쳤어요?”나는 이 둘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우범은 웃어 보이더니 바닥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아가 몸을 숙여 그 얼굴에 핏자국을 닦아주려 하자, 이우범은 눈을 번쩍 뜨더니 도시아의 손을 뿌리쳤다. 도시아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 아무런 행동조차 할 수 없었다.“배인호 씨, 빨리 일어나요!”여기서 더 다퉜다간 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배인호의 손을 잡으며 그를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배인호는 일어서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의 눈빛에 흠칫 놀랐으며 어안이 벙벙했다. 다행히 노성민이 그 뒤 따라 나갔고, 아마 그의 입에서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도시아 씨, 미안해요. 마무리 좀 해줘요. 오늘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저도 생각지도 못했어요.”내가 도시아에게 말했다.“네, 알았어요.”도시아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는 빨리 이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이미 사람들은 서로 수군대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화거리는 유정이가 아니면, 배인호와 서란이 방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서로 추측하기 시작했다.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나를 흘깃거리며 보기 시작했고, 그 눈빛은 나에게 있어 아주 익숙했다. 그건 누가 봐도 흉보고 있는 눈치였다.클라우드 호텔에서 나왔을 때쯤, 냥이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녀의 얼굴색은 좋지 않았고, 얼굴에는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아마 누구에게 맞은 듯했고, 그녀의 눈시울은 새빨개지더니 오히려 눈물은 흘리지 않고 꾹 참고 있는 것이었다.“왜 그래?”내가 의아해서 물었다.“괜찮아요. 그 늙은 인간한테 한 대 맞았을 뿐이에요.”냥이는 얼굴을 만지면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지영 언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배인호 씨가 언니에 대한 감정이 깊은 것 같아요. 제가 언니랑 겨루는 게 오히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아닐까요?”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냥이의 풀이 죽은
“제가 이우범 씨를 만난 건 중요한 일 때문에 만난 거지, 절대 밀회를 한 게 아니에요.”배인호가 나와 집에 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나는 그 자리에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배인호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고, 그의 눈에서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뜨겁고 부드러운 눈빛이었는데, 이미 그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고 차가움 뿐이었다. 이때 옆에서 술을 먹고 있던 아가씨 두 명이 입을 열었다. 그녀들은 배인호가 누군지 모르는듯했고, 내가 누군지는 더욱 모르는듯했다. 그녀들의 눈에는 내가 구질구질하게 배인호를 잡는 듯한 모습이었을 것이고, 곧바로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이봐요, 바람피워 놓고 지금 용서를 비는 거예요? 이야, 진짜 웃기는 여자네.”“그러게, 그냥 빨리 가요. 우리 술 먹는 거 방해하지 말고요.”또 다른 아가씨도 귀찮다는 듯 나를 내쫓았다.나는 그녀들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배인호의 대답만 기다렸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일단은 그가 나를 믿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지금 능력으로 아빠와 기선우의 일을 해결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하니 말이다. 회사의 일만 해도 이미 바빠 죽겠는데, 인맥 관련된 일은 나에게 있어 더욱더 신경 쓸 겨를도, 별다른 방법도 없는 것이다.배인호는 그녀들의 말을 묵인한 듯 내 말에는 답도 안 하고, 오히려 나를 집에 보내는 것이었다.“이제 가봐. 청담동에서 나갈 거면 나가도 돼. 말리지 않을 거니깐.”그의 말에 내 마음은 쿵 내려앉는 듯했고, 내가 해명하려던 찰나 배인호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발신자 표시를 보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안 가?”“안 가요. 인호 씨가 저와 같이 가는 게 아니면 안 갈 거예요.”나도 내 고집대로 말했다.“그럼 그냥 계속 기다려.”내 말에 답한 뒤 그는 전화를 받았고, 몇 마디 대화 후 전화를 끊고는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나도 술잔을 들고 술을 한 모금 마셨고, 화를 억누르며 계속하여 기다렸다.더 생각지 못
일단은 서란에게서 배인호가 그녀에게 돈을 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와 제대로 풀지 못한 상태로, 이우범에게서 또한 증거를 얻게 되었다.증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에 민설아가 임신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 뒤로 이우범을 만났을 때 누군가에 의해 사진이 찍혔고, 그 사진을 배인호에게 보내 현재 우리 둘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게 되었다.이 모든 걸 진짜 이우범이 저지른 거라고? 거기다 서란과 배인호를 한 방에 넣어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게 한 거도 전부 그가 한 짓이라고?나는 머리가 아파 났다. 전생에 이우범과 내가 손잡고 서란과 배인호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던 일들도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틈틈이 떠올랐다.하지만 내 기억과 이성이 나에게 이우범은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의 가치관과 도덕적 관념은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선에서는 보장이 되지만, 일단 사랑에 빠진 상태의 그는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하곤 한다.“멍멍!”도저가 위층에서 달려왔고, 반갑게 내 다리에 올라앉았다. 나는 도저를 꼭 앉아 주었고, 그제야 덜 외로운 듯했다.그렇게 혼란스러운 생각을 가진 채 나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밖에는 눈도 내리고 바람도 불었으며, 유리창 밖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아마 거의 한 시간에 한 번쯤은 눈을 떠 시간을 확인했고, 거의 다섯 시가 되어갈 때쯤 나는 점차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나는 오래간만에 이렇게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고, 기다리는 사람도 역시 배인호였다. 가슴은 초조한 상태에서 계속 뛰고 있었고, 묵묵히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만약 배인호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그가 나를 포기했다는 걸 명확히 증명해 주는 거고, 그다음 일은 나 스스로 맞서나가야 하는 일인 거다.겨울은 낮이 짧고 밤이 긴지라 해가 뜨는 시간도 비교적 늦다. 나는 불을 끄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거실 큰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딸깍.”바람 소리를 뚫고 미세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나의
나는 점심쯤 되어서야 잠에서 깼고, 일어나 보니 배인호는 이미 방에 없었다.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갔다. 기선혜는 이미 점심 밥상을 다 차린 상태였고, 나를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일어나셨어요? 어서 와서 식사해요.”“인호 씨는요?”내가 물었다.“배인호 대표님 회사로 갔어요.”기선혜가 답했다.“저희에게 지영 씨 아주 힘들 거라면서,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말을 마친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고, 나의 시선은 거실 소파를 향했다. 아침에 그 한바탕 전쟁으로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내 옷들은 이미 집사분들이 다 정리한 상태였다.그녀들은 아마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대충 짐작을 한 듯했고,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그래요. 그러면 저 먼저 밥 먹을게요.”나는 식탁 쪽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요즘 우리 회사는 휴가 기간이었지만 배 씨 그룹은 아직 아니었다. 배인호는 요 며칠 아마 바빠서 집에 있을 시간도 없을듯하다.어제 내가 그 술집을 떠난 뒤, 배인호와 서란 사이에 어떤 일들이 발생했을까…나는 여러 가지 추측을 하기 시작했지만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왕 배인호가 집에 돌아오기로 선택한 이상 서란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듯하다.밥을 먹고 난 뒤, 나는 차로 운전해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는 비록 계속 혼수상태지만, 몸 상태는 안정적이었고, 간병인 이모님도 세심하게 엄마를 아주 잘 돌봐주셨다.나는 요 며칠 회사 일 때문에 병원에 자주 오지는 못했다. 병원에서는 엄마를 집에 모셔다가 간호해도 된다고 했고, 만약 깨어날 기미가 보이면 다시 병원에 데려와 검사받으면 된다고 했다.“엄마, 내가 집으로 모셔갈게. 하지만…”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으며 입으로 이런저런 말을 되뇌었다.만약 엄마를 청담동에 모셔간다면, 엄마가 깬 뒤 나와 배인호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아마 더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이 계획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한참 뒤
그렇게 그날 저녁, 나는 배인호가 어디에 갔는지도 모른 채 있었고, 그는 전화조차 없었다. 나는 창밖의 흰 눈을 보며 불안함과 혼란 속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핸드폰이 울렸고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건 이우범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지금 좀 만날 수 있어요?”이우범이 먼저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진 상태로, 아주 피곤해 보였다.“이우범 씨,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많이 속상하죠?.”나는 이미 이우범에게 경각심이 생긴 상태였기에 말도 전보다 더 신경 써서 했다. 행여나 그를 추궁하고 싶어도 일단 지금은 참았다. 이우범은 몇초간 침묵하더니 계속하여 입을 열었다.“네, 저 지영 씨 한번 만나고 싶어요. 만나서 정확히 얘기할 거도 있고요,”나는 행여나 일이 더 커질 수도 있기에,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할 말 있으면 전화로 말해줘요.”“지영 씨도 알잖아요, 제가 지영 씨 한번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이우범은 점점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그날 서란과 배인호가 왜 그 방에서 나왔는지 알고 싶은 거 아니에요?”그렇다, 그 일은 내가 알고 싶어 하는 일이 맞다. 배인호의 말로는 이우범이 꾸민 거라고 하는데 진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물론, 현재의 이우범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고, 잠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우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와 도시아가 약혼식 올린 거 지영 씨는 뭐 때문인지 알잖아요? 이젠 엄마도 돌아가셨으니 저 파혼하려고요.”“뭐라고요?”나는 깜짝 놀랐고, 이우범이 이 정도로 파격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마자 파혼이라니…“이건 제가 원하는 생활이 아니에요. 전 단지 엄마가 떠나기 전 편하게 가셨으면 하는 바람이었고요. 지금은 엄마도 떠나셨으니, 저도 더는 뭐 꺼릴 게 없어요.”이우범은 결심을 내린 듯했다.“이우범 씨, 일단 진정해요. 지금 모든 사람이 당신과 도시아 씨가 약혼했
이윽고 거리는 점점 멀어졌고, 나도 서란과 우지훈의 대화를 더는 들을 수 없었다.나는 충격 속에 빠졌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이때 이모건이 전화로 나에게 말했다.“된 건가요?”“네, 됐어요. 진짜 고마워요.”나는 정신을 차린 뒤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설 지나고 세희도 같이 봐요. 제가 밥 살게요.”이모건이 웃으며 말했다.“너무 안 그러셔도 돼요.”그래도 서란이 이모건을 모르니 다행이지, 그게 아니면 나는 조금 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나저나 유정에게 약을 탄 사람이 우지훈이라니?!우지훈은 악독하게도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꾸미고 연기한 거였으며, 마지막에 그 책임을 전부 유정이에게 덮어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유정이가 날 밀친 걸 생각하면, 이건 하늘이 그녀에 대한 복수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그러나 유정은 서란에 대해 항상 진심이었고, 마치 서란 옆의 시녀처럼 행동했었다.서란은 본인의 이익때문에 우지훈과 손잡고 유정이를 총받이 삼은 것이었다.단지 사람들을 위층으로 끌어들여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배인호와 일부러 같은 방에서 나오다니…서란은 여전히 심성이 고약했다. 그녀는 자신한테 이익이 되는 사람이면 그게 누구든지 불문하고 그 사람을 잘해줬다.서란과 우지훈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 나도 서서히 걸어 나왔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대체 누가 나를 인터넷으로 헐뜯는지 보려 했는데, 여기 오고 나서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도시아 인가? 아니면 서란? 우지훈?나는 그들 셋이 아마 같은 선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나를 겨냥하기 위해서, 아니면 배인호를 겨냥하기 위해서…하지만 서란이 배인호를 겨냥할 리가 없다고 본다. 그 사진에서 그녀와 배인호는 마치 한 쌍의 커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나는 현재 어느 한 안갯속에 빠져 방향을 잃은 것만 같았다.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나는 그 자리를 어떻게 떠났는지도 모른
“미안해요. 출근 시간에 전화 받으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계속…”기선혜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녀의 눈시울은 화가 난 나머지 새빨개졌다.“괜찮아요. 전 단지 그런 인간쓰레기랑 더 이상 말 섞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만약 부모님이 걱정되시는 거면, 설 지나고 여기로 모셔 와요. 그 인간 말종하고 완전히 멀리하고요.”나는 기선혜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위로했다.기선혜는 끝끝내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울기 시작했고, 이때 배인호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이 광경을 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탁으로 향했다.나는 기선혜를 잘 다독인 후에야 밥을 먹기 시작했다.나는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일이 있는지라 말이 없었고, 워낙 냉담한 성격인 배인호는 더욱이 말이 없었다. 만약 예전 같은 경우라면, 나는 그에게 우지훈에 관한 일을 꼭 언급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내일 나와 병원 좀 가.”갑자기 배인호가 입을 열었고, 그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병원이요? 왜요?”나는 깜짝 놀랐다.“가서 검사 좀 받아보려고.”배인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고, 새까만 동공에는 은은한 광택과 함께 약간의 냉기가 돌았다.나는 속으로 조마조마했지만, 겉으로는 차분한척했다.“뭐 검사하려고요?”배인호의 시선은 아래로 향하더니 내 배를 보는 듯했다. 내 배는 단지 테이블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을 뿐이었고, 이어서 그는 다시금 나를 빤히 응시하며 나에게 말했다.“너 혹시 나몰래 피임약 먹어?”그 말을 듣고 난 뒤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임신이 힘들다는 사실을 배인호가 알까 봐 두려웠고, 그 일에 대해 이우범 또한 배인호에게 말해주지 않은듯하다. 만약 말했다면, 나는 아마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아니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굳이 피임약 같은 걸 먹을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나 속이는 거 아니지?”배인호는 약간 불신하는 듯했다.“제가 미쳤다고 그거로 거짓말하겠어요
내 기분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배인호의 아버지는 멍하니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허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우리도 어젯밤에 인호에게서 전화를 받고 오늘 아침 일찍 달려왔다. 많이 놀랐니?”“그래. 인호가 너와 여기서 설을 보낼 거라고 하길래 우리도 왔어. 시끌벅적하고 좋지.”배인호 어머니도 두 걸음 앞으로 나오시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내려오렴, 조금 있다가 점심 먹자.”나는 재빨리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어색했지만 정중하게 미소를 지었다.“아저씨, 아주머니. 오셨어요.”“그래, 우리 가족도 2, 3년 동안 함께 모여서 설을 보낸 적이 없지?”배인호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배인호 어머니가 언급한 가족에는 아마 내가 포함되지 않겠지?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배인호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으려고 하다가 손을 거두셨다. 아마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하시는 것 같았다.“제가 올해... 사정 때문에 여기서 설을 보내게 됐어요.”나는 조금 죄송한 마음에 설명하려고 했다.“괜찮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난 널 딸처럼 생각하고 있어. 배씨 가문도 너의 집이란다.”배인호 어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이 말을 듣고 나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 배인호의 부모님은 내게 잘해 주셨다. 전생에서는 내가 다가가지 않았기에 결국 배인호와 서란을 허락하셨지만, 이번 생에는 내게 민설아의 일을 숨기셨다.하지만 악독한 분들이 아니셨기에 나는 배인호의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다 좋다고 했다.배인호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거실에 앉아서 배인호의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주제는 모두 무의식적으로 우리 집안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와 배인호의 사이를 떠보셨다.결국 두 분 모두 나와 배인호의 재결합을 바라셨다. 나는 부인도 승인도 하지 않고 그저 모호하게 넘어갔다.만약 두 분이 내가 다시 임신하기 어렵다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