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예 부케를 뺏을 생각이 없었고 그냥 뺏은 체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민정은 하필 내가 있는 방향으로 부케를 던졌다.나는 손을 거두려고 했다. 옆에 선 서란이 팔을 높이 뻗으며 부케를 받으려고 하니 받게 놔두려고 했다.이 생각을 굳히기도 전에 부케가 내 품으로 날아들었고 서란은 바닥에 넘어지면서 둔탁한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아!"서란이 고통스럽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아마도 다친 듯했다.아래에서 구경하던 민예솔이 이런 상황을 보고는 급히 이쪽으로 뛰어와 서란의 상처를 살폈다.“괜찮아? 왜 갑자기 넘어진 거야?”하객들도 이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 목을 빼 들고 상황을 살폈다. 부케를 안고 옆에 서 있던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아니나 다를까 서란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한번 보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언니, 저 괜찮아요. 올라와서 지영 언니랑 부케를 뺏는 게 아닌데...”부케를 던질 때 열몇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고 신체적인 접촉도 많아 아래서는 어떤 상황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서란이 만약 나를 저격한다면 나는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부케 뺏을 때 넘어지는 건 원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다친 게 뭐라고?”정아가 직설적으로 말했다.“근데 라니가 이미 부케를 받았는데 허지영 씨가 다시 뺏어가면서 밀친 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민예솔이 서란을 부축해 일으키며 나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나는 두 사람의 쇼를 옆에서 냉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래에 있던 하객 중에 서란을 믿는 사람이 무조건 있을 것이다. 하긴 정아와 애들을 빼고는 다 모르는 사람이니 말이다.역시나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저 사람 배인호 전처 아니야? 서란은 배인호 전 여친이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닐까?”“배인호도 있잖아? 봤을까?”“근데 아까 서란이 먼저 부케를 받았는데 허지영이 뺏어간 거 같은데.”나와 서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감
“인호 씨,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서란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내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눈물이 글썽해서 배인호에게 따질 뿐이었다.배인호만 그녀의 편을 들어준다면 서란은 이렇게 서럽지 않았을 것이다.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 편에 서게 된다. 배인호는 서란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쉽게 그녀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한 것이다.“네가 잘못했으니까 사과하는 게 맞지.”배인호의 말투는 엄격했다.“나 잘못한 거 없어요. 지영 언니가 내 부케 뺏은 거 맞고 나를 일부러 밀어서 넘어지게 했어요.”서란이 그래도 계속 바득바득 우기며 반박했다.“인호 씨가 아직 지영 언니한테 미련이 남아서 언니 편에 설 뿐이에요. 그런 거라면 왜 마음 가는 대로 안 해요?”배인호는 끝내 인내심을 잃고 성질을 내며 언성을 높였다.“닥쳐. 내가 네 가르침까지 받으면서 행동해야 해?”서란이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나를 모함하려 했지만 결국 내가 보는 앞에서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서란이 증오의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서란이 또 나에게 책임 전가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서란은 역시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이를 악물더니 말했다.“언니, 이제 만족해요? 이런 꼴 보고 싶었던 거죠?”“첫 번째, 날 모함한 건 너야. 두 번째, 난 네 꼴도 보기 싫어. 네가 말하는 이런 꼴은 더더욱 싫고.”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서란이 얼굴을 가리고는 울면서 휴게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민예솔이 뒤따라 나간 것 외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배인호는 이우범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차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원수라도 보는 것 같았다.나는 이 두 사람이 내 앞에서 기 싸움을 하는 걸 보기 싫어서 먼저 도망가려고 했다.“지영 씨!”순간 이우범이 나를 불러 세웠다.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봤다.“왜요?”“무슨 일이 있든 간에 난 무조건 지영 씨 편이에요. 지금 이 말 꼭 기억해요.”이
“지난번에 했던 그 말, 아직 유효한 거죠? ”나는 자존심 같은 건 다 내려놓고 물었다. 배인호가 아빠의 일로 나를 속일 사람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빠가 진짜 누구에 의해 이렇게 된 거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아빠를 만나 일의 자초지종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어떤 말?”배인호의 굳어 있던 얼굴은 순식간에 풀렸고, 내가 뭘 묻는지 알면서 일부러 되물었다.“내가 청담동에 가서 보름 동안 살면 아빠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면서요.”나는 아빠가 나를 탓할지라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빠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거면, 나는 딸로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깨어나면, 아빠가 이 일을 당한 거에 대해 많이 속상해하실 것이다. 배인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내 손을 놓더니 내 말을 정정해 주었다.“한 달.”“보름 동안이라면서요?!”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응, 보름은 네가 정한 거잖아? 지금은 네가 나에게 부탁하는 거니까, 내가 그 조건 좀 고치려고.”배인호는 마음껏 뻔뻔함을 드러냈다.나는 몇 마디 반박하려 했지만, 배인호의 눈빛 하나에 제압당해 버렸으며, 지금 나의 위치에 대해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지금 만약 또 그를 거절한다면, 아빠를 벼랑 끝까지 미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그래요. 좋아요. 하지만 3일 이내에 아빠를 만날 수 있게 해줘요.”나도 내 요구를 제기했다.“알겠어.”배인호는 간단명료하게 답했다.“그럼, 지금 청담동으로 가.”“저 아직 짐 정리도 못 했어요!”내가 답했다.“그럴 필요 없어. 청담동에 이미 다 준비해 뒀거든. 넌 몸만 가면 돼. 때마침 오늘 우릴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배인호는 내 의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끌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의 손은 내 손과 달리 아주 따뜻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손까지 잡을 필요 없어요.”“손이 그렇게나 차가운데 옷 좀 두껍게 입어.”배인호는 내 손을
배인호 어머니는 나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냥이를 쳐다봤다.이렇게나 직접 배인호네 집으로 찾아온 여자는 당연히 보통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냥이는 머리를 검은색으로 바꿔, 많이 차분하고 얌전해 보였다. 코 피어싱이나 입술 피어싱도 다 제거하긴 했지만, 귀에 그 줄줄이 끼여진 피어싱은 제거하지 않은 상태라, 차분함에 약간의 자유분방함이 섞여 있는듯한 모습이었다.내가 잘난 척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배인호 부모님이 어떤 며느리를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지적이고, 외적으로는 심플하고 귀티 나는 스타일을 선호하신다.냥이처럼 귀에 줄줄이 끼워진 피어싱은 당연히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게다가 그들은 아직 냥이의 신분도 모르는 상태이다.“인호야, 이분은 누구시니?”배인호 어머니는 이런 스타일은 싫어하시지만, 그래도 교양 있고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그냥 아는 애예요.”배인호는 간단명료하게 소개했으며, 그 태도는 심지어 무척 차가웠다.냥이는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아저씨. 저는 배인호 씨의 친구입니다. 그냥 냥이라고 불러주세요. 오늘 아주머니 생신이라고 들어서 선물 드리러 왔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가져온 선물을 배인호 어머니에게 내밀었고, 투명하고 정교한 선물상자에는 한눈에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 아름다운 비취 관음이 놓여있었다.이 선물을 본 배인호 어머니의 표정은 역시나 밝아졌고, 그녀를 향한 몇 마디의 칭찬에 냥이의 표정도 많이 풀렸다.하지만 배인호 어머니는 그 선물을 다시 냥이에게 돌려줬다.“정말 고맙지만 이렇게 귀중한 선물은 제가 받을 수 없어요. 냥이 씨, 온 김에 그냥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가요. ”냥이는 멈칫하더니 약간의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선물을 거절당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라도 뻘쭘하긴 하지만, 배인호 어머니가 선물을 거절하는 거도 지극히 정상인 적인 일이다. 배인호의 그냥 아는 일반 친구의 귀중한 선물을 받
“아...”서란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녀가 여기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오른쪽 어깨는 정상으로 보였으며, 전혀 다친 사람 같지 않았다.이때 민예솔이 그녀 대신 답했다.“여사님, 그런 게 아니라 제 동생이 괜한 통증으로 오늘 자리에 영향을 끼칠까 봐, 여기 오기 전 특별히 진통제를 먹고 왔어요. ”이제는 하다 하다 진통제라니...서란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맞아요. 근데 별 큰 문제는 없어요. 지영 언니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요.”“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면서 왜 날 고소하려 했어?”나는 적절한 타이밍에 입을 열어 되물었다.그 순간 민예솔도 대꾸할 방법이 없는 듯 말문이 막힌 채 멍해 있었다.서란은 촉박해 보이는 표정으로 하미선쪽을 바라봤다.“이건 모두 오해로 초래된 일인 거죠. 오해는 해명하고 고소는 취하하면 되는 겁니다.서로 다 친한 사이라 왕래가 잦다 보니, 이런 갈등은 피할 수 없네요. 양해해주세요.”역시 서란의 뒷배경인 하미선이 전혀 조급해 하지 않고 차분히 얘기를 이어 나갔다.나는 담담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그래요, 해명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서란의 표정은 의심이 가득했으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더는 묻지 않았고, 나도 여기까지만 답했다.현재 거실 소파에는 배인호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로 꽉 차 있지만, 서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사람들이었다.때마침, 저녁상이 준비되었고, 저녁을 먹으라는 집사의 말에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풀렸다.원형 식탁에는 때마침 8개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배인호 어머니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지켜본 서란은 그 옆에 다가가 앉으려 했으나, 배인호 어머니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영아, 내 옆에 앉아.”“네.”나는 그녀의 말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서란은 속상한 듯 배인호 어머니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배인호에게 시선이 멈췄다. 아마 배인호가 어디 앉으면 그녀도 그 옆에 가서 앉으려는 듯했다.배인호는 아무 생각 없이 자
“그렇죠, 단지 인연도 길연과 악연으로 나뉠 뿐이죠.”배인호 어머니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배인호 부모한테 있어서 서란과 배인호의 인연은 기필코 악연일 것이다.배인호 어머니의 그 한마디는 서란으로 하여금 그 누구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서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우여곡절 끝에 결국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났다. 냥이는 다 같이 케이크를 먹자고 제안했고, 배인호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인호 씨, 저 좀 잠깐 봐요.”나는 케이크는 먹을 생각조차 없었고, 낮은 목소리로 배인호를 불러냈다.“무슨 일이야?”배인호가 물었다.“저 오늘 저녁 나가봐야 해서 케이크는 못 먹을 것 같아요. 그러니 저 인호 씨 차 키 좀 빌려줘요.”나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들여다봤고,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배인호는 내 낌새가 이상함을 느끼고, 거실을 힐끗 보더니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조금 전 너에게 전화 한 사람 누구야? 그 사람 찾으러 가는 거야?”나는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고스란히 그에게 얘기해줬다.“기선우한테서 걸려 온 전화예요. 근데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아마 뭔 일이 생긴 것 같아요.”배인호의 의심은 가셔지지 않았고, 그는 전부터 나와 기선우 사이를 의심했던지라 그의 의심은 더욱 깊어져 갔다.나는 아예 직접 차 키를 찾아 나섰고, 그런 모습을 본 배인호 어머니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지영아, 뭐 찾고 있어?”“저 인호 씨 차 좀 빌리려고 차 키 찾고 있어요.”내가 답했다.“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인호더러 데려다 달라고 해. 시간도 늦은 저녁이라 여자 혼자서는 위험해.”배인호 어머니는 나를 강박으로 앉혀 케이크를 먹으라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인호더러 내 급한 일을 도와주라고 했다.배인호 아버지도 곧바로 배인호를 향해 말했다.“그래, 지영이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네가 좀 같이 가서 도와줘!”나는 원래는 그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었지만, 만약 기선우
“인호 씨, 저 도와서 기선우 좀 찾아주면 안 돼요?”나는 이젠 체면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배인호에게 도움부터 청했다.하지만 배인호는 내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했다.“싫어.”“그 애 서란 때문에 이미 궁지에 몰려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는 애예요. 그런 애가 이 시점에 갑자기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건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긴 걸 거예요. 그러니 좋은 일 한번 한다 치고 저 좀 도와줘요!”나는 한 손으로 배인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현재의 나는 진심으로 기선우를 내 동생처럼 여기고 있었고,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꼭 어떤 방법을 쓰든지 그를 도울 것이다.하지만 배인호의 눈에는 냉기가 가득했고,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그 앨 왜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건데?”“그 애와 저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그 애는 단지 제가 좋아하는 동생일 뿐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동생을 챙기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인 거죠.”나는 다급하게 그에게 말했지만, 곧 맥이 빠졌다.“됐어요. 그냥 저 혼자 경찰서에 신고할게요.”말을 마친 뒤 나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배인호는 낮은 목소리로 욕을 하는 듯했고, 곧 내 뒤를 따라왔다.“내가 도와줄게, 됐지?”“진짜죠?”나는 그가 나를 돕겠다는 소리에 빠르게 반응했다.“응, 이틀 내로 찾아줄게. 근데 나 조건이 하나 있어.”배인호는 깊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나는 이미 청담동에 돌아가 1달 동안 살기로 약속까지 했기에, 조건이 더 추가된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말해봐요.”“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이우범에게 그 어떠한 기회도 주지 마.”배인호는 강경한 태도로 이 조건을 말했고,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대답만을 기다렸다.나도 이우범과 다시 엮이고 싶지 않던 참이라, 그의 요구조건이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기 힘든 건 아니었다.“그래요, 그러면 우리 아빠를 만나는 일이랑 기선우를 찾는 일 모두 인호 씨한테 맡길게요. 그리
“왜 그래? 누구한테서 온 문자야?”때마침 앞에 빨간 불이라 배인호는 차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나는 핸드폰을 숨기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정아에게서 온 문자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배인호는 입가를 살짝 올리며, 약간의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우범이가 약혼한다는 소식 아니야?”나는 깜짝 놀랐다.“이미 알고 있었어요?”전에 민정이 결혼식 피로연에서 배인호가 확신에 찬 말투로 이우범과 도시아는 약혼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이우범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현재는…“당연하지.”배인호는 시선을 거두고는 앞을 내다보며 냉담하게 답했다.“난 이미 예전에 알고 있었어. 우범이는 집에 부모님이 정한 대로 해야 하거든. 예전에 의학 공부할 때도, 집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학업 포기하겠다고 부모님 협박해서야 결국 하게 된 거야.”나는 이우범이 의학 공부를 위해 그 정도로 필사적이었는지 미처 몰랐다. 하여 그가 나 때문에 그걸 포기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너랑 우범이 사이는 미래가 안 보여.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거도 좋은 일인 거지.”배인호가 이어서 말했다.나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인호도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어느덧 차는 회사 아래까지 도착했고, 나는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배인호는 바로 가지 않고, 내가 회사 큰문까지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이치대로라면, 이우범이 약혼하는 건 나에게 있어 좋은 일이며 더는 그가 나를 놓지 못할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게다가 도시아도 괜찮은 배우자이며 그 둘은 무척 어울리는 한 쌍이다.하지만 나는 그가 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집안에 뜻이 어떻든 절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여자하고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근데 이 짧은 시간 내에,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나는 이우범이 나와 배인호처럼 이런 비극적인 결혼이 아닌, 행복한 결혼을 하길 바랐다.나는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