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범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내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는 걸 느꼈다.배인호는 손을 뻗어 내 눈가를 닦아주려 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는 거야?”나는 그의 손을 피하며 머리를 저었다.“아니요, 안 울어요.”“그럼 됐어. 난 네가 내 앞에서 다른 남자 때문에 우는 게 싫거든.”배인호는 손을 거두며 경고가 담긴 한마디를 건넸다.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제 자유에요. 인호 씨가 그런 것까지 절 간섭할 이유는 없어요.”배인호가 차갑게 답했다.“됐어. 가자.”나는 묵묵히 배인호 뒤를 따라나섰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그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우산을 펼쳐 든 배인호는 우산을 비스듬히 내 쪽으로 향해줬고, 나는 그걸 피하진 않았다. 괜히 비를 맞아 감기까지 걸리면 나만 힘드니 말이다.차에 탄 뒤, 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인호 씨, 앞으로 저 계속 데리러 올 필요 없어요. 저 이 기사님한테 부탁해도 되고, 저 혼자서도 운전해 갈 수 있어요.”“오늘은 그냥 가는 길에 들른 거야. 조금 전 샤인 코스메틱에서 오는 길이거든.”배인호는 솔직하게 말했고, 그와 서란 사이의 왕래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인호 씨는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어요? 사사건건 절 간섭하면서 인호 씨는요? 서란은 여전히 당신과 얽히려 하고, 당신을 바라보는 냥이도 있잖아요. 그다음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언제 인호 씨 간섭한 적 있었어요?”나는 참지 못하고 배인호에게 질문을 던졌다.배인호가 담담하게 답했다.“지금 질투하는 거야?”나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그럴 일은 죽어도 없어요.”배인호는 나를 힐끔 보더니, 표정이 약간은 풀린 듯했다. 그는 마치 갓 연애를 시작한 소년처럼, 내가 조금의 질투라도 보이면 기분이 풀리곤 했다.청담동에 도착한 뒤, 나의 핸드폰은 쉴 틈 없이 울렸다. 내 단톡방에서는 끊임없이 문자를 보내왔고, 그 내용 또한 전부 이우범 혼사에 관한 일들이었다.박정아:「지영아, 퇴근했지?
나는 만족스럽게 마스크팩을 하고 잠을 잘 준비했다.내가 거의 잠이 들 무렵, 갑자기 온몸에 정신이 들면서 눈이 번쩍 떠졌다.배인호는 몸을 곧게 폈고, 조금 전 몸을 숙여 내게 다가온 사람이 그가 아닌 것만 같았다.“이걸 얼굴에 온 저녁 붙이고 있을 예산이야?”배인호는 손가락으로 내 마스크팩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나는 놀라서 물었다.“뭐 좀 가지러 왔어. 와보니 네가 문을 잠그지 않았더라고.”배인호는 팩을 휴지통에 버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서랍 속을 뒤졌고, 롭투 시가를 한 박스 들고는 그제야 내게 이어서 말했다.“평소에 그렇게 나를 조심하면서 오늘 문 잠그는 건 까먹었나 봐? 조심해.”말이 끝난 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나는 닫힌 문을 노려보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그를 욕 했다. 아마 배인호가 거의 아래층에 도착한 후에야 나는 얼른 일어나 방문을 걸어 잠갔다.배인호는 술을 마신 듯했고, 조금 전 그한테서 약간의 술 냄새가 풍겨왔었다. 만약 그가 술에 취한다면, 그는 또 한 마리의 짐승으로 변할 것이고, 그러면 내가 위험에 처할 것이다.나는 문이 제대로 잠겨진 지 확인 후 안심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문을 잠그고 잠자리에 들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한밤중이 되자 나는 잠결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고, 배인호의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누가 방문을 잠근 거야? 강도라도 든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히 취기가 섞여 있었고, 그의 술 주량으로 보았을 때 보통은 취하지 않을 건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취해 있었다.내가 답했다.“배인호 씨, 당신 취했어요. 얼른 객실로 가서 쉬어요.”밖에는 잠시 고요해졌고, 나는 배인호가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집사를 부르러 간 것이었다. 이윽고 집사의 애꿎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사장님, 안에서 잠겨진 거라 저희도 문을 열 방법이 없습니다.”배인호는 그 말에 노발대발하며 꾸짖었다.“이런 거도 못 하면 내가 당신들을 왜 쓰겠어? 내 피만
그 순간 나는 심장이 철렁하는 것만 같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너무도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도 이미 변한 상태였다.“말해봐요.”“내가 사람을 시켜 기선우 핸드폰 위치를 추적하게 했거든. 근데 폐기된 냉동창고 안 에 있었어.”배인호는 머뭇거리더니 이어서 말했다.“지금 아직도 거기 있을 거야.”“냉동창고요?!”나는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기선우의 핸드폰이 어떻게 그런 곳에서 나올 수 있으며, 게다가 폐기된 냉동창고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배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너 신고하려면 빨리 해. 비록 아직도 거기 있는진 모르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이야.”배인호의 말을 더 들을 것도 없이 나는 이 일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경찰서에 신고했다.나는 배인호한테서 폐기된 냉동창고 주소를 알아낸 뒤, 경찰에게 그 주소를 알려줬다.전화를 끊은 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직접 냉동창고로 가서 상황을 확인하려 했지만, 배인호가 막아 나섰다.“나랑 같이 가.”“당신 술 마셨잖아요.”나는 급하게 외투를 챙겨 입었다.“저 혼자 가면 돼요.”배인호는 내 말은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나보다도 먼저 방문을 나서며 말했다.“네가 운전하면 되잖아?”배인호는 원래부터 기선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선우의 생사에 관해 관심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의 말은 무시한 채 빠르게 운전해 그 냉동창고로 향했다.냉동창고는 서울시 교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예전의 우리 회사가 이 냉동창고를 임대하여 일부 생산 원료를 보관했지만, 임대 기간이 만료되면서 더는 임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곳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기선우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곧 경찰에서도 도착했고 냉동창고 주인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 자물쇠가 고장 난 것을 발견했고, 조금만 힘을 주니 열 수 있었다.나는 분주하게 수색하는 경찰들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고, 불안감도 극도
배인호는 내 침대 옆에 앉으며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부검 결과 나왔어. 기선우, 얼어 죽은 거래. 죽기 전에 너에게 전화했던 거고.”나는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배인호의 그 말을 듣고 아예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거기 부근에 CCTV도 없고, 냉동창고 CCTV도 고장이 났었대. 현재 경찰 쪽 초기적인 판단은 기선우가 전화 한 통을 받고 거기에 갔었고, 냉동창고가 이미 폐기된 건 줄 알고 들어갔다가 문이 잠겨버린 거래.”배인호의 말을 나는 단 하나도 믿을 수 없었다. 기선우가 멍청하게 혼자서 교외의 폐기된 냉동창고에 들어가 그 안에 갇혔다는 게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현재의 내 심정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그렇게 호락호락 한 게 아니라, 이상하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이거 서란이 저지른 거예요!”한참 뒤, 나도 평정심을 되찾은 뒤 배인호를 향해 말했다.“예전부터 서란이 선우더러 서울을 떠나게 궁지로 몰았어요. 서란만이 이런 악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거라고요!”“현재 증거가 없잖아.”배인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일단 진정 좀 해.”“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인호 씨, 제가 선우를 해친 거라고요. 알아듣겠어요? 저야말로 이 사건의 발단이에요. 그렇게 착한 애가 이런 결과를 맞이했는데, 제가 진정할 수 있겠냐고요!”나는 감정이 폭발한 상태에서 말했다.내 감정이 점점 격해지는 걸 본 배인호는 바로 나를 자기 품에 끌어안으며 위로했다.“일단 푹 쉬어. 만약 기선우의 죽음이 진짜로 서란과 연관이 있는 거라면 내가 너 대신 복수해줄게. 그렇게 해주면 될까?”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배인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를 거세게 밀치며 날카롭게 되물었다.“저 그만 속여요. 당신이 어떻게 절 도와줄건데요?”“당신은 그냥 거짓 그 자체에요. 저랑 이혼하고 이 관계를 놓지 못하더니, 한쪽으로는 또 서란과 얽히고 있잖아요!”
병원에 하루만 있고 나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서 퇴원했다.나는 경찰서로 달려가 기선우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 보러 갔는데 들려오는 것은 배인호와 같은 대답이었다.경찰서에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설이 다가오니 길거리에 많은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다. 설은 한해 중에 가장 큰 명절이다.차갑고 번화한 거리에서 나는 서란의 전화를 받았다. 서란은 모르는 번호를 쓰고 있었다.“선우... 왜 그렇게 된 거예요?”핸드폰에서는 서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서란, 너 연기 정말 잘한다.”나는 쌀쌀한 목소리로 물었다.“선우는 너의 첫 남자친구잖아.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넌 조금의 양심 가책도 못 느껴?”서란은 울면서 말했다.“지영 언니, 난 선우를 다치게 할 생각은 정말 없었어요. 그저 사고였어요. 언니는 내가 그렇게 독한 줄 알아요? 난 양심도 없는 줄 알아요? 난 단지 선우가 서울을 떠나길 바란 것 뿐이라고요.”서란은 슬프게 울고 있었다. 마치 진심으로 기선우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지영 언니, 우리 만나서 얘기 좀 해요.”서란은 또 먼저 만나자고 했다.나는 서란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독한 여자가 어디까지 연기하는지 보고 싶었다.나는 만나자고 대답했고 서란은 카페 ‘랑데부’에서 만나자고 했다.그곳에는 이미 오랫동안 가지 않았다. 나는 가끔 처음에 카페에서 서란을 훔쳐본 것을 후회했다. 그로 인해 일어나야 할 일들이 엉망이 된 것 같았다.반 시간 후, 나는 서란을 만났다. 저번에 여기서 서란을 만났을 때 서란은 내가 배인호와 이혼하기를 바랐다.그때 서란은 초췌하고 창백한 것이 상처 입은 한 송이 꽃 같았다. 현재 그 꽃은 이미 부자가 되어 온몸에 명품을 휘감고 저렴한 물건은 찾아볼 수 없었다.카페 직원은 모두 바뀌어 서란과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지영 언니.”서란은 나를 보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빨갛게 부은 눈은 방금까지 운 것 같았다.“그냥 이름만 불러. 우리 사이에
“갑자기 여기는 왜 온 거야?”배인호는 나 대신 코트를 여며주며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카페 안을 쳐다보았다. 서란은 이미 배인호가 온 것을 발견했고 아까 코트를 걸쳐주는 장면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좀 전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지우고 저런 꼴 사나운 표정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한 사람을 사랑하면 자기의 모든 감정을 그 사람에게 넘겨준다더니 서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인호를 이용해 아주 쉽게 서란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배인호는 나의 시선을 따라 서란을 발견했다.“서란 만나러 온 거야?”배인호의 목소리는 갑자기 차가워졌고 눈썹은 무의식적으로 치켜 올라갔다.“난 서란에게 기선우를 죽였는지 물으러 왔어요.”나의 대답은 분명 바보 같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배인호의 표정이 단호해졌다.“이건 경솔한 짓이야.”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있는 여전히 아름답고 고상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세월이 그를 비껴간 것 같았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차분함과 카리스마가 더해졌을 뿐이다. 서란이 포기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이 남자의 마음은 외모에 걸맞지 않았다.배인호는 나의 눈빛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얇은 입술을 열었다.“왜?”“내가 병실에서 한 말 때문에 화난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데리러 왔어요?”난 웃으며 어깨에 걸쳐진 코트를 단단히 감쌌다.“추워, 차에 가서 얘기해.”“그래요.”배인호는 먼저 차로 갔다.서란이 카페에서 달려 나와 배인호를 불렀다.“인호 씨.”배인호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지만, 서란에게 대답하지 않고 나에게 물었다.“안 오고 뭐 해? 바람이 춥지 않아?”서란의 원망 어린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빠르게 걸어갔다. 아까 한 서란의 말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계속 참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때론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깨닫고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이혼 후 배인호는 나를 많이 참아 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배인호는 정말로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진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먼저 거래를 제안했으니 내가 속인다면 전과는 다를 것이다.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최대한 침착하게 배인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알아요. 나도 진심이에요.”“너의 진심을 어떻게 보여줄 거야?”배인호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아래로 이동하더니 마침내 이불 위에 떨어졌고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의도가 아주 분명했다.더 이상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그냥 내가 바보이다.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지만 어차피 임신은 어렵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금세 자신을 설득했다.배인호와 처음 잠자리를 가지는 것도 아닌데 수줍어할 필요는 없었다.고민이 끝나자 나는 이불을 들어 올렸다.방이 따뜻해서 나는 얇은 잠옷을 입고 있었지만 금세 벗겨졌고 보여야 할 곳 보여서는 안 될 모든 곳이 보였다.배인호는 거리낌 없이 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라보았고 눈빛이 타올랐다. 배인호는 부드럽게 한숨을 쉬었다.“피부는 하얀데, 너무 말랐어.”“...”그 말이 사실이었기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나의 밋밋한 가슴을 보고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다니 새삼 배인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배인호는 넥타이를 풀어 땅에 던진 다음 망설이지 않고 내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배인호의 몸은 아름다웠다. 넓은 어깨 덕분에 그는 어떤 옷을 입든지 핏이 좋았다. 선명한 복근 라인이 조명 아래에서 매우 매력적이었고 온몸에 섹시함이 흘러넘쳤다.“잘 생각했어?”배인호는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네, 인호 씨가 약속대로만 하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나는 어색하고 난감했지만 담담하게 대답했다.나의 말이 끝나자, 배인호는 몸을 숙여 내 입술에 키스했다. 그의 숨결은 뜨거웠고 은은한 담배 향이 났다. 온몸에 피부들이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나와 배인호는 전에 이미 관계를 맺었
나는 도우미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나는 배인호에게 애초에 왜 서란에게 돈을 줬는지 묻지 않았다. 물어볼 때마다 결국 대답은 계속 바뀌었다.지금 나는 오로지 배인호를 잘 이용할 생각이다. 거래가 끝나면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다.마침 배인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젯밤 무음으로 해 놓았는지 이제야 울렸다. 아마도 서란의 연락인 것 같았다.나를 데리러 온 배인호를 보고 서란은 아마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뱀새도록 밖에서 기다렸을 것이다.저번 배인호 어머니의 생신때 서란은 내가 온 것을 봤지만 내가 여기서 지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안 가봐도 괜찮겠어요?”나는 수프를 마시며 가볍게 물었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속이 따뜻해졌다. 어젯밤에 체력을 너무 많이 소진해 힘이 하나도 없고 배가 많이 고팠다.“기다리다 지치면 가겠지.”배인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서란과 할 말 없어.”나는 눈을 내리깔고 그릇에 남은 수프를 바라보다가 우유를 한 잔 더 가져와 마시기 시작했다. 배인호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아침을 다 먹고 배인호는 재킷을 가지고 나를 기다렸지만 내가 거절했다.“먼저 회사 가 봐요. 난 좀 쉬고 싶어요. 조금 있다가 이 기사님한테 부탁해서 아빠 보러 가면 돼요.”“내가 데려다줄게.”배인호는 재킷을 내려놓으려고 했다.“됐어요. 인호 씨, 우리가 정말 다시 함께하려면 계속 이러는 건 서로 피곤해요. 편하게 지내자고요.”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배인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살짝 깜빡이며 내가 말한 것을 고려하는 것 같았다.몇 초가 지난 후 배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배인호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 마침내 안도감을 느꼈다. 사실 나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마음이 복잡했다.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나는 차 키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갔다. 아빠가 있는 구치소로 가야겠다.빌라를 나서는데 서란의 차가 가로막았다. 서란은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려 나의 차 문을 두드렸다.내가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