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의 비명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하여 가속페달을 밟았다.나는 그녀의 이상 낌새를 눈치채고서야 차를 멈췄다.서란의 얼굴은 파랗게 변했고, 그녀는 나에게 책임을 물을 시간도 없이 가방에서 약을 꺼내 물도 없이 넘겨버렸다.“차 내려, 여기서 나 귀찮게 하지 말고!”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내 차에서 내쫓았다.서란은 원래부터 심장병을 갖고 있었다. 하미선이 그녀를 입양한 후 다시 심장 이식은 해줬는지, 아니면 이식했다 해도 자극을 받으면 안 되는 건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서란은 움직이지 않고, 가슴을 내리치며 자신을 진정시키는 듯했다.한참 후, 그녀는 다시 혈색을 되찾았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 앞에 내던졌다.“길게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에 사인해요.”그건 서류였고, 간단히 읽어보고 나서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서란아, 너희 두 모녀 그렇게나 우리 집 회사를 인수하고 싶어?”서란은 나를 생각해 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지영 언니, 지금 언니네 집안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뭘 더 버텨요? 이참에 차라리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게 좋지 않겠어요? 게다가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언니네 아빠한테도 피해 가기가 쉬워요. 이미 일까지 터진 마당에, 더 설상가상으로 갈 순 없잖아요? ”“우리 집안일에 신경 쓰지 마. 서란아, 넌 한 남자를 위해 이렇게 까지 하는게 재밌니?”내가 되물었다.적어도 내가 처음에 봤을 때의 서란은 이 정도로 혐오감이 극에 달하진 않았다.서란은 멈칫하더니, 나를 웃으며 비꼬았다.“지금의 모습이 전 좋은데요? 적어도 예전보단 잘살고 있고, 당신에게 지금은 보복할 능력도 되잖아요? 나를 지금 이 상태로 만든 건 바로 당신이라고요.”“네가 애당초 물질에 관한 유혹을 참고 선우랑 같이 일반 커플들처럼 잘 만나 결혼까지 갔었다면 배인호는 아마 계속 널 좋아했을 거야. 너에게 모든 걸 다 바치면서 말이야. 근데 결국은 너 스스로 변한 거야. 내 탓으로 돌려도 쓸모 없다고. 알아들어?”
“…”나는 더욱 말문이 막혔고, 배인호를 빤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인호는 조수석 문을 열더니 자연스럽게 내 차에 올라탔다.“농담이야. 나 이 근처 호텔에 데려다줘.”“인호 씨도 차 가지고 왔잖아요?”나는 크게 달갑지 않았다.“기름이 다 떨어졌어. 급하게 따지러 오느라 기름을 넣지 못했어.”배인호는 여유롭게 답했다.나는 그의 이런 한가함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 먼 곳에서 나를 찾아와 책임까지 묻다니…하지만 배인호가 아니더라도, 나는 오늘 저녁 쉴 곳을 찾기는 해야 했다. 외삼촌네는 조용한 곳을 좋아해 교외 별장에 살고 있다. 하여 나는 운전으로 시내 쪽에 가서 쉴 곳을 찾아야 했다.나는 말없이 차만 운전했다.가는 도중, 배인호는 조수석에서 잠이 들었다. 그는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지, 잘 때까지도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밤길은 조금 쓸쓸했고 차 안의 분위기도 침묵에 빠져 있어 나도 약간의 피곤함을 느꼈다. 하여 나는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고, 이 음악은 첼로를 연주할 때 필수 곡이다.이 음악들을 듣고 나니 내 마음도 조금은 풀렸다.“아직도 이 몇 곡만 듣는 거야?”배인호는 갑자기 잠에서 깨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몇 년이나 지났는데, 이젠 그 취향도 좀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이 음악들이 너무 듣기 싫어서 잠에서 깬 건가?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흐흐, 쉽게 바뀔 취향이면 제가 당신한테 몇 년이란 시간을 낭비했겠어요?”배인호는 얼굴색이 약간 변하는 것 같더니 몇초간 침묵 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말이 맞아. 이왕 그런 거면 계속 일편단심인 건 어때?”나는 차갑게 웃어 보이며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인호가 다른 주제로 말을 다시 꺼냈다.“그래서 외삼촌은 뭐라 하셔?”“뭐라 안 하셨어요.”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는 내가 외삼촌 찾으러 온 걸 알고 있었고, 그러면 자연스레 내가 현재
나는 순간 멈칫했고, 고개를 돌려 배인호를 쳐다봤다.배인호도 나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서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저희 일행 아니에요.”내가 먼저 입을 열어 설명했다.로비 카운터에서는 깜짝 놀라더니 바로 우리에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두 분 커플인 줄 알았어요. 입으신 옷도 너무 커플룩 같으셔서…”나는 고개를 숙여 나와 배인호의 옷을 번갈아 보았고, 우리는 블랙앤 화이트의 조합으로 누가 봐도 커플룩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배인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괜찮아요. 저도 사실 이 사람이랑 옷 스타일이 서로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로비 카운터에서는 배인호의 미소를 보고는 얼굴이 빨개지며 좋아했고,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나는 전 과정에서 입을 열지 않았고, 배인호가 방을 잡고 간 뒤에야 나도 따로 방을 잡았다.배인호의 방은 비스듬히 맞은편에 있었고,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할 때 그가 입을 열었다.“내일 외삼촌한테 가는 거면 나도 같이 가. 내 차가 아직 거기 있어.”“그냥 혼자 차 잡아서 가면 안 돼요?”나는 불쾌한 듯 물었다.“네 차로 가면 돈을 아낄 수 있잖아.”그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답했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엄청나게 근검절약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나는 그를 상대하기도 귀찮아, 아예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그날 저녁, 나는 마음속 불안감에 악몽을 꿨고, 깨어나 보니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새벽이 되니, 나는 아예 잠이 오지 않았고, 배인호를 피해서 가려면 아침 일찍 외삼촌네로 가는 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건, 배인호가 이미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그는 검은색 스웨터만 입은 채 코트는 손에 들고 있었다.“네가 일찍 깰 줄 알았어. 다만 이렇게까지 일찍이 일줄은 몰랐네.”배인호는 나를 보자마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당신 진짜 끈질기네요.”“착각하지 마!. 단지 잠이 안 와서 일찍 나왔을
아빠도 내가 배인호에게 다시 도움을 청하는 건 원치 않을 것이다. 아빠는 자존심도 강하신 분이라, 그 후에라도 알고 나면 분명히 나에게 뭐라 할 게 뻔하다.나는 내 이런 고집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와 아빠의 의견대로 하고 싶었다.그들이 원치 않는 일이라면, 나는 최대한 그 일들을 피할 것이다.“허지영, 너 고집 진짜 세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나한테 먼저 부탁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 네 그 버릇도 좀 고쳐줄 겸!”배인호는 어두운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나는 머리를 저었다.“이번에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배인호 씨, 우리 집이 거지가 된다고 해도 절대 당신한테 머리 숙이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내가 당신 곁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라는 것 같은데, 절대 그럴 일 없다고요.”배인호는 나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내가 언제 돌아와 달래? 너에게 보상 좀 해주려는데 그것도 안 되는 거야?”“필요 없어요.”나는 고민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배인호는 더는 말하지 않았고, 나를 몇 초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그래, 아무튼 미리 말할게. 네가 내 곁에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돼. 하지만 절대 다른 남자랑 못 만나게 할 거야. 난 말하면 말한 대로 해.”말을 마친 뒤 그는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은 협박 요소가 다분했다. 이건 전생에 그가 서란한테 했던 최초의 수법인 건가?하지만 나는 서란이 아니니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외삼촌네 집에서 나온 뒤, 나는 더는 그들을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회사 쪽에 상황이 더욱 긴급한지라 나는 얼른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나는 매일 해가 저물 때까지 정신이 없었다. 직원들도 달래야 했고, 생산 판매도 감독해야 했고, 주식을 철회하겠다는 그 늙은 여우들도 상대해야 했고, 재무팀 일도 조사해야 했다.하지만 아빠의 일은 여전히 진전이 없었다. 큰아버지 쪽에는 지장이 생겼고, 이우범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사무실에는 나 혼자 남아 있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테이블에 있는 서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서류는 복사본이었다. 다 보고 나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류의 내용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나는 서류를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마침 큰아버지가 와 계셨다. 나는 서류를 큰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큰아버지는 전에 내부 상황을 알아봐 주기로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류 내용을 알게 되었으니 바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나는 평생을 청렴하고 공정하게 살아오신 아빠가 직권을 남용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큰아버지도 깊은 한숨을 쉬었다.“아마 샤인 코스메틱에 복수하려고 하셨을 거야. 지영아, 네 아빠 일 손쓰기 힘들 것 같구나. 만약 감옥에 가게 되더라도 네가 대비를 잘해야 해.”나는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큰 바위가 가슴을 억누르고 있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이 서류들은 아빠가 최근에 검토한 서류들이었고 친필 사인과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내용은 모두 샤인 코스메틱에 관한 것이었다.모두 아빠가 자기 직권을 이용해 샤인 코스메틱을 표적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너무 충동적이었어. 곧 퇴직인데 조금만 참으시지. 왜 이런 일을 벌이셨을까?”큰아버지는 눈썹을 찌푸리셨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일은 이미 확정되었고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아빠의 성격에 죄를 인정하실 거고 변명도 하지 않으실 거다. 나는 지금 아빠는 곧 감옥에 가고 엄마도 식물인간이 될 수 있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화사와 가족들을 책임져야 했다.나에게는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눈물을 닦은 후 모든 정력을 일에 쏟아부었다.나와 이우범이 헤어졌다는 사실과 아빠가 재판받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모두 이우범이 자기 발목이 잡힐까 봐 먼저 헤어지자고 했고 내가 자존심 때문에 먼저 입장 발표를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할 거예요.”이우범의 대답은 간단했고 또 집착적이었다.이렇게 하다간 그가 정말 극단적인 행동을 할 것 같았다. 때가 되어 많은 사람이 다치고 결국 그는 나를 원망 할 것이다. 나는 독하게 마음먹고 나쁜 사람이 되기로 했다.“이우범 씨,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난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한 적 없다는 거. 단지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그러다가...”나는 듣기 싫을 말들을 내뱉었다.“난 아직도 배인호를 사랑해요. 미안해요.”말을 마치자, 이우범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을 하고 나를 놓아 주었다.몇 초 동안의 눈 맞춤이 마치 한 세기처럼 긴 것 같았다.그는 다시 평정심을 찾고 말했다.“나도 알아요. 당신이 인호를 놓지 못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요.”이것이 그를 포기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이유였다.“그러니 이만 가봐요. 이후에 당신 부모님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게 하는 게 당신이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에요.”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이우범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날리고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힘이 빠져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분이 많이 다운되었다.설상가상이라고 비서가 갑자기 또 들어왔다.“허 대표님, 큰일 났어요. 배 씨 그룹에 배 사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대표님을 뵈러요!”나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배인호가 왜 날 찾아온 거지? 전에 했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나?방금 이우범에게 명확하게 얘기하고 마음이 복잡해서 거절했다.“프런트 직원한테 막으라고 하세요. 나 회의 중이라고.”“네, 알겠습니다.”비서는 다급하게 나갔다.5분 후, 비서가 다시 나타났다. “허 대표님, 배 사장님께서 비즈니스 얘기하려고 왔다고 하십니다. 돌려보낼까요?”비즈니스?이런 시점에서 우리 회사는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었다. 협력 관계를 이어 오던 회사들은 다급하게 우리 회사와 협력을 끊었고, 전에 계약하려고 했던 회사들도 철회할뻔했다.배인호는
배인호는 듣더니 유쾌하게 웃었다.“네가 이미 이우범하고 헤어졌는데 내가 왜 널 물 먹이겠어? 난 기분 좋아. 지금 네가 뭘 원한다고 해도 난 다 해줄 수 있어.”오후 햇볕이 유리를 통해 들어와 그의 몸을 비추었다. 그의 옆모습은 마치 금빛으로 물든 것 같았다. 누군가가 세심하게 그린 그림 속 사람처럼 멋있었다.내가 봐도 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눈빛은 맑게 빛나고 나를 바라볼 때 날카로운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알고 보니 이우범과 내가 헤어져서 그의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자비를 베풀어 나를 도와주려는 것이었다.“만약 우리가 협력한다면 어떠한 사적인 일에도 참견하지 말아요.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나는 물었다.“어떤 게 사적인 일에 참견하는 건데?”배인호는 일부러 내게 물었다.“예전 일로 계속 질척거리는 거요.”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배인호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과하게 너에게 참견하지 않겠다고 대답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린 전에 결혼했던 사이고 너도 내가 너에게 어떤 마음인지 잘 알잖아. 사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건 불가능해.”배인호는 꽤 관대했다. 듣기 좋지 않은 말을 먼저 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됐어요. 우리 더 이상 엮이지 말아요. 전에 말했었죠. 당신 도움 더는 필요 없다고. 일도 마찬가지예요.”“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배인호는 인내심 있게 나에게 상기시켜 주었다.“하지만 가끔은 자신감이 아무런 쓸모도 없을 때가 있어, 자기를 더 곤경에 빠트릴 수도 있고.”어떤 일이 그를 화나게 하는 것보다 큰 문제일까?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사실 마음속으로 갈등이 심했다. 한 면으로는 회사를 급하게 살리고 싶었고 다른 한 면으로는 배인호와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배인호는 재촉하지 않았고 내가 잘 생각해 보기를 기다렸다. 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없던 일로 하죠. 배인호 씨.”나의 대답에 그는 불만스러워했고 비웃으며 몸을 일으켜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넌
바에는 음악이 시끄럽게 울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배인호를 빼곤 듣는다고 해도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다.그의 눈빛이 유감스러움과 애달픔으로 깊게 물들었다. 그는 손을 올려 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대신 닦아 주었다.“미안해.”“오늘 우리 아빠 생일이에요. 근데 내 집은? 어디 있어요? 그 차갑고 텅텅 빈 그 집? 아니야...”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배인호 씨. 우리 결혼 했을 때, 매일 나 혼자 그 생기 없는 빌라를 지켰잖아요. 거기가 내 집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당신하고 이혼해도 난 여전히 만신창이이고 부모님의 집도 잃고 여전히 난 혼자예요. 정아 말이 맞았어. 당신이 날 망치고 있는 거야.”배인호의 손짓이 멈췄다. 그는 나의 턱을 조금 힘주어 잡았다. 나의 고개를 들어 자기와 시선을 맞추게 하고 미련이 흘러넘치는 말을 뱉었다.“난 네가 계속 나한테 매달렸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펜 하나가 안 보여도 날 귀찮게 해줬으면 좋겠다고.”“난 더 이상 당신한테 안 매달려요. 배인호 씨.”나는 취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날 속여서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하지 말아요. 난 이미 벌어진 모든 걸 받아들였어요.”배인호의 눈빛은 바로 깊어졌고 얼굴에 먹구름이 낀 것 같았다.“계속 날 화나게 하지 마.”“우리 부모님도 이미 저렇게 되셨는데, 당신이 뭘 갖고 날 더 협박할 수 있는데요?”“네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서 일궈낸 회사를 포기할 거야?”배인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잔인하게 웃었다.“내가 즐거울 땐 널 도와줘도, 기분 나쁘면 설상가상으로 널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고. 알겠어?”나의 얼굴에 미소가 굳었다. 맞다. 엄마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회사를 무너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내가 요즘 일에 목을 맨 것도 모두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 아니었던가?배인호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지 나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잡아냈다.“지금은 나하고 가. 아니면 결과는 네가 책임져야 할 거야.”배인호는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