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나의 마음은 아직도 불안했다. 하지만 직접 서란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이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는 서란이 싱가포르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성재가 말했을 것이다.“걔 도대체 뭐 하자는 거니? 왜 너한테 계속 질척거려? 넌 이미 배인호하고 이혼했는데 그 여자는 뭘 더 원하는 거야?”엄마는 분노했다.나는 조금 혼란스럽게 대답했다.“그 여자는 유학 온 거예요. 우연히 성재 오빠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고요. 조금 일이 있어서 스스로 그만뒀어요.”“인호도 같이 간 거지?”엄마는 바로 맞추었다. 나는 침묵으로 대답했다.엄마는 화를 참지 못하셨다. 엄마는 배인호와 서란이 나를 괴롭힌다고 느끼셨다. 직접 배인호에게 전화하시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엄마, 이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엄마하고 아빠 건강 챙기세요. 특히 엄마 감정 기복이 심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나는 엄마가 화를 풀어 드리고 당부했다.엄마도 나의 성격을 아시기에 더 말씀하지 않으셨다. 결국 내가 나서서 처리해야 될 문제들이었기에 더는 잔소리 하지 않으셨다.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며칠 동안은 너를 방해하는 사람 없이 너무도 고요했다.나는 입덧이 조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도 대부분 2, 3개월을 넘기면 입덧이 줄어든다고 했다. 하지만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배가 불러오는 것이다.지금은 숨길 수 있지만 2, 3개월이 더 지나가면 힘들었다. “죄송하지만 비켜주세요!”주말 아침, 나는 장을 보려고 나왔는데 이삿짐센터에서 가구를 옮기고 있었다. 바로 나의 옆집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내가 사는 아파트도 꽤 좋은 아파트였지만 제일 좋은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와 가까웠고 큰아버지 집과도 가까워 허성재가 여기로 집을 구해 주었다.옆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는데 지금 이사를 오나 보다.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한번 쳐다보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장을 다 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옆
나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바깥이 조용해지자, 배인호를 살며시 밀어냈다.“베란다 문이 안 닫혀요. 좀 닫아줘 봐요.”배인호가 “응”하고 대답하더니 그쪽으로 가서 검사했다.비는 계속 크게 내렸고 바람도 멈추지 않았다. 배인호가 베란다 문을 한번 쭉 검사하고 문을 닫았을 때는 이미 옷과 머리가 다 젖어 있었다.문이 닫히자, 바깥의 비바람 소리가 많이 작아진 것 같았다. 나는 배인호에게 마른 수건 하나를 건네줬다.“고마워요. 이걸로 머리 좀 닦아요.”배인호가 수건을 건네받더니 아무렇게나 머리를 닦았다. 그의 셔츠는 대부분 오른쪽이 젖어 있었다. 젖은 셔츠는 그의 어깨부터 등 허리까지 찰싹 붙어 있어 근육 라인이 살짝 보였고 머리를 닦을 때마다 근육이 따라서 움직였다.나는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배인호가 머리를 다 닦으면 갈 줄 알았다.“혼자 살면서 왜 이 집을 선택한 거야?”배인호가 뜬금없이 물었다.“회사랑도 가깝고 큰아버지 집이랑도 가까워서요.”나는 간략하게 대답했다.“근데 여기 안전도 그렇고 주변 시설도 별로인 거 같은데.”배인호는 이곳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인호 씨는 왜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요?”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에 물었다.“너랑 똑같은 이유로, 회사가 가까워서.”배인호가 멈칫하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대화를 시작했으니 나는 이왕이면 내가 알고 싶은 일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다.“이쪽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주기가 얼마나 돼요? 언제 돌아갈 거예요?”나는 소파에 앉아 질문을 던졌다.배인호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담담하게 답했다.“아직 몰라. 내가 빨리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지? 걱정하지 마. 껌딱지처럼 붙어있지는 않을 테니까.”나는 저도 모르게 한 마디 대꾸했다.“전에 나한테 껌딱지 같다고 했었는데.”분위기가 순간 껄끄러워지기 시작했고 공기도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예전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감정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배인호의 시선이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
근무 시간이라 그런지 민예솔은 더 이상 나와 입씨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오후 내내 좋지 않았다.퇴근 후 차를 운전해 회사를 나가려는데 눈에 익은 빨간색 BMW가 보였다. 차에서 내린 서란은 옷차림이 꽤 밝았고 머리에는 도트 베레모를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스타일리시했다.‘퇴사했는데 회사는 왜 왔지?’마음속에 의문이 들긴 했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내가 사는 단지로 돌아와 여느 때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려고 하는 그때 누군가가 재빨리 잡아 세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천천히 열렸고 배인호가 차가운 안색으로 들어왔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본 것 외에 더 이상의 시선 교류는 없었다.배인호의 손에 식자재가 들려있었다. 식자재를 사 들고 오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약간은 가정적인 좋은 남자로 보이기까지 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몇 초 뒤 갑자기 세게 흔들렸다. 나는 황급히 손잡이를 잡아 평형을 잡았지만, 심장이 심하게 떨려왔다.“엘리베이터 고장 났나 보네.”배인호가 열림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장 났다고요?”어이가 없었다.“서비스 센터 콜 해봐요.”이내 서비스 센터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에 조금 문제가 생겨 수리 인원을 연락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직원의 말이 끝나고 엘리베이터는 침묵에 잠겼다. 나와 배인호는 서로 할 말이 없었다.이 침묵은 나의 배에서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에 깨졌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이미 밥을 해서 먹었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요즘 내 배 속에서 꼬물꼬물하는 새로운 생명체 때문인지 자주 배가 고팠다.배인호가 나를 힐끔 쳐다봤고 나는 민망해서 머리를 돌렸다.“꼬르륵~”배가 다시 항의를 해왔다.“많이 배고파?”배인호가 허리를 굽히고는 바닥에 놓인 봉지를 열었다. 안에는 식자재 외에도 사과와 식빵이 들어 있었다. 배인호가 식빵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먼저 좀 먹어.”나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빵을 받아
저녁, 나는 배인호가 했던 말을 네 사람이 있는 채팅방에 보냈다.정아랑 애들은 명탐정이 되어 분석해 주었다.정아:「지영아, 배인호가 다른 사람한테 서란 연락처 알아내는 거 직접 봤다며? 그럼, 배인호가 먼저 쫓아다닌 거지.」민정:「그건 모르지. 연락처를 물었다고 해서 꼭 쫓아다닌다는 건 아니잖아. 배인호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건 맞지만 지영이를 속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정아:「젠장, 이 두 사람 진짜 뭐 하자는 거야. 머리 아프네.」세희:「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는데, 서란은 단순한 캐릭터는 아니야...」정아:「그러니까! 보기에 그렇게 단순해 보이는 애들이 속이 더 구리다니까. 지영아 이미 이혼도 했겠다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앞으로는 서란이랑 배인호 만나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아. 너랑 사주가 안 맞는 거 같아!」애들이 분석하는 걸 보며 머릿속에 이우범을 떠올렸다. 혹시 뭘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우범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우범은 바로 받았다.“언제 시간 돼요? 물어볼 게 있어요.”내가 물었다.“지금요. 만나서 얘기할래요?”이우범이 시간 나면 지금 만나자고 했다.“그래요.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우범 씨는 이쪽으로 오는 게 불편하잖아요.”나는 다시 차키를 들었다.“어디예요?”반 시간 뒤, 나와 이우범은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마음속에 가득 찬 의문을 이우범과 같이 하나하나 정리해 보고 싶었다. 이우범이 바로 대답해 주어 내 의혹을 풀어줬으면 싶었다.“우범 씨, 혹시 인호 씨가 얘기한 적 있나요? 처음에 서란 어떻게 쫓아다닌 건지?”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왜요?”이우범의 눈빛이 복잡해졌다.“갑자기 이 일은 왜 또 묻는 거예요?”나는 머리를 숙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냥 궁금해서요. 인호 씨가 얘기한 적 있어요?”이우범이 잠시 고민하더니 머리를 흔들었다.“자세히는 말한 적 없어.”이우범도 잘 모르는 듯했다. 내가 답답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나를 떠보기 시작했다.“인호가 무슨 말 했어요
“그래요, 갑시다.”내가 만나자고 했으니 데려다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이우범은 현재 병원에서 마련해준 기숙사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다. 내가 사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에둘러 가다 보니 반 시간은 더 걸렸다.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길에서 둘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내 기분도 별로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아파트 밑에 도착했지만, 그는 바로 올라가지 않았고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지영 씨, 만약 배인호가 당신이 생각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다시 받아줄 거예요?”이 질문은 배인호가 했던 질문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아니요. 이미 받은 상처가 많아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더 아플 거예요.”이우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건 맞아요. 근데 만약 다 오해였다면 그래서 지영 씨가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나는 응원할 거예요.”“응원한다고요?”그의 말에 내가 멈칫했다.‘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내가 다시 돌아간다 해도 응원한다고?’이우범이 웃으며 말했다.“네. 근데 그전까지는 계속 쫓아다닐 거예요. 지영 씨가 자기 마음 확인할 때까지요.”이렇게 말하고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창문 너머로 이우범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조금 멍하니 있었다.‘이우범이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인가?’저번 생에 이우범은 서란을 위해서라면 배인호한테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20, 30년 되는 우정도 사라졌지만 전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고 나는 서란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혈투를 벌이는 건 원하지 않았다.오늘 밤도 머리가 복잡했고 많은 일들이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튿날 휴가를 냈다. 이대로는 도저히 출근이 어려웠다.허성재는 이런 면에서 나한테 무척 관대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성장일 뿐
목 안이 한번 움직이더니 위에서 뭔가가 위로 솟구쳤고 나는 기를 쓰며 참았다.배인호는 내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자 나를 불렀다.“와서 밥 먹어. 배 안고파?”나는 아무 말 없이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나는 최대한 소리를 낮추고 변기를 내리는 소리로 구역질 소리를 감추려 하니 시원하게 토하지도 못하고 너무 괴로웠다.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배인호가 바로 문 앞에 서 있었다.“변태예요? 화장실까지 따라다니게?”켕기는 게 있는 나는 큰소리로 배인호를 나무랐다.배인호의 얼굴이 굳더니 차갑게 말했다.“가서 밥 먹어. 난 이만 가볼게.”그가 빨리 가기만을 기다렸던 터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인호가 집에서 나가고 나는 재빨리 그 카레 생선 요리를 던져버렸다. 나머지 요리는 다 내 입에 잘 맞았고 순식간에 다 비워버렸다. 식사를 마치고는 도시락을 정리했고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갔다.“사랑의 쿠키? 쯧쯧, 배인호가 감동하겠네.”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머리를 돌렸더니 서란과 유정이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다. 서란의 손에는 예쁜 박스가 들려져 있었다. 디저트를 담는 접시 같았다.유정이 서란을 칭찬하다가 나를 보고는 입을 닫았다.서란의 표정도 놀란 듯했다. 여기서 나를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듯한 표정이었다. 배인호도 여기 살고 있으니 말이다.나는 무표정으로 그 두 사람을 한번 쳐다보고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서란도 잠깐 망설이더니 따라서 들어왔다. 유정은 나를 한번 흘깃 째려보았고 서란의 표정은 복잡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곧 배인호에게 성가신 일이 일어날 것이다.“재수 없어. 왜 저 여자도 여기 사는 거야?”유정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서란이 나를 한번 흘끔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엘리베이터가 내가 사는 층에 도착하니 서란의 안색은 이루 말할 것 없이 안 좋았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멍해서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유정이 성질을 냈다.“젠장. 저
내가 먼저 영상통화를 걸었고 기선우는 빨리 받았다.몇 달 사이에 해맑기만 하던 남자애가 성숙해진 듯 보였다. 머리는 짧게 잘랐고 회색 때 탄 재킷을 입고 있었다.선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다.“누나, 막 퇴근해서 옷이 좀 더러워요. 인턴 기간이라 매일 공사장에서 인부들이랑 먹고 자고 하다 보니 이럴 수밖에 없네요. 꺼리지 마세요.”“꺼릴 게 뭐가 있어?”나는 재빨리 대답했다.“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네. 깔끔하고 보기 좋다.”“저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것보다 머리가 길면 일할 때 불편해서요.”기선우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일 갓 시작했을 때 옷차림이 일하러 온 것 같지 않다고 놀렸었거든요.”기선우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이것저것 말하다가 그가 물었다.“누나, 언제 귀국해요? 월급 나오면 조금은 집에 보내고 조금은 누나랑 밥 먹으려고 남겨뒀거든요. 아니면 작은 선물이라도 해드리고 싶어서요. 아직 너무 비싼 건 못 사드려요.”“아니야. 네가 번 돈은 일단 모아 둬. 가족들 쓸 수도 있고 결혼 때 보탤 수도 있는데 일단은 허투루 쓰지 말고 모아.”내심 감동스러우면서도 미안했다.“매달 조금씩 모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인턴 기간이라 얼마 안 되지만.”기선우가 대답했다.“어느 회사서 일해?”내가 물었다.“작은 부동산 회사에서 일해요. 아직은 공사장 뛰고 있지만 앞으로 조금씩 승진해야죠.”기선우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는 늘 낙천적이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의 이런 마음가짐이 좋았다.최근에 귀국한다 해도 아마 4월쯤일 것이고 곧이었다. 나는 기선우와 귀국하면 같이 밥 먹자고 약속을 잡았고 서란에 대해서도 직접 보고 물어보려고 했다.기선우는 많이 기뻐하는 듯 보였고 말투도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네! 그래요! 기다릴게요!”“그래, 그때 보자.”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전화를 끊고는 다시 집을 나섰다. 낮에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아 바람을 좀 쐬고 싶었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배가 부르기도 하고 오는 길에 유기견 한 마리가 있길래 치킨 사서 주려고 했는데 너도 먹고 싶다니 내가 살게.”내 웃음에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서란의 얼굴은 이미 붉게 타올랐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눈도 빨개졌다. 서란은 입술을 깨물기 참으로 좋아했다.“허지영!”배인호가 언짢은 듯 나를 불렀다. 내 말이 듣기 거북한 건 사실이었다.유정이 큰 소리로 말했다.“왜 서란을 개라고 욕해?!”내가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서란이라고 한 적 없어. 근데 너 굉장히 총명하다.”이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먹방을 하며 좋아졌던 기분을 이 사람들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길 임신하면 기분이 좋아야 성격이 좋은 애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잘 먹고 잘 마셨으니, 집으로 가서 씻고 자려고 하는데 이우범이 문자를 보내왔다.「아직도 치킨 먹고 싶어요? 내가 사 갈게요.」이우범은 진짜 좋은 사람이었다.나:「아니에요. 아까 배불리 먹었어요. 고마워요!」이우범은 더 이상 답장하지 않았다. 나는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고 이튿날 제때 출근했다.곧 연휴라 회사에 연휴 공지가 떴다. 허성재는 연휴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회사 내 모든 사람에게 3일의 휴가를 주었다.큰아버지도 이번에 한국에서 가족 행사가 있어서 귀국할 예정이라 같이 가기로 했다.휴가 전날 퇴근하자마자 나는 짐을 싸고 큰아버지와 공항으로 향했고 밤 비행기로 귀국했다.몇 시간의 비행을 거쳐 안전하게 착륙했다. 이륙 전 이 기사한테 연락을 해두었다. 이 기사는 아직 아빠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이 기사는 공항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와 큰아버지가 나오자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잽싸게 내 손에 들린 짐을 받았다.“사모님.”“이제는 아가씨라고 불러요.”내가 웃으며 말했다.이 기사는 나와 배인호가 결혼한 뒤에 고용한 기사라 나를 계속 “사모님”이라고 불러왔다. 지금은 배인호와 이혼했으니 이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