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잠시 침묵했다.“무슨 소리야. 시간이 나면 지금이라도 당장 할머니를 뵈러 갈 거거든.”“그럼 난데없이 왜 그딴 재단을 세운 건데?”부승민의 질문에 온하랑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그 돈을 내 손에 쥐고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차라리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야.”어렸을 때 자신도 버려진 아이로 여겨졌고, 얼마 전 임가희의 정체를 알게 된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때마침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고 싶었기에 자연스럽게 재단을 설립했을 뿐이다. 그녀의 이런 생각을 부승민은 절대 믿지 않았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모든 재산을 기부하고 나면 넌 아무 걱정 없이 떠나도 되겠네?”“...”그녀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그녀는 촬영할 장면이 몇 개 남았고, 이 동안 재단에 적합한 부이사장과 기타 관리 인력을 뽑아 재단을 운영하게 할 생각이었다. 촬영이 끝나면 그녀는 원하는 곳으로 훌쩍 떠나버릴 수 있었다.예전에 그녀는 부승민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미래의 삶을 위해 부승민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마음에 찔려서 당황하는 온하랑의 모습을 바라보던 부승민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짙은 어둠이 마음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왜 갑자기 떠나려고 해? 형 때문에 그래? 만약 형이 장인어른을 살해한 주범이 아니라고 해도 날 버릴 거야?”온하랑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부승민이 부민재를 꺼내기 위해 가짜 증거까지 만들어 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부승민의 어두운 눈동자를 마주한 온하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숨이 막혔다.“떠나려는 거 아니야.”금방 이혼하고나서 밖에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동안 그녀는 부승민의 집착을 몸소 경험했다. 몇 번이고 밀어냈지만 그는 번번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마음만 먹으면 그녀가 어디를 가든 찾아낼 수 있었다. 따라서 그
“알아. 그저 조금 감정이 북받쳤을 뿐이야.”온하랑은 눈을 내리깔며 그에게 되물었다.“그런데 내가 재단을 설립한 일로 왜 민재 오빠 때문에 떠난다고 생각한 거야? 오빠가 민재 오빠를 주범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유가 증거를 찾을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잖아? 아니면 혹시 애초에 민재 오빠가 사건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속으로는 알고 있어서야?”“아니야. 난 그저 네가 내 곁을 떠날까 봐 두려웠어.” “하지만 며칠 전, 오빠는 나더러 믿고 시간을 달랬잖아. 난 그러기로 했는데 오빠는 날 믿지 않았어...”온하랑은 허벅지를 힘껏 꼬집으며 눈물을 흘렸다.“항상 내 기분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오빠만 생각하잖아.”부승민은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했다.“미안해, 하랑아. 울지마. 네 기분을 신경 안 쓴 게 아니야. 난 그냥...”그는 두 팔을 벌려 온하랑을 끌어안았다.“널 떠날 수 없어서... 앞으로 다시는 널 의심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그 말을 어떻게 믿어.”온하랑은 그를 노려보았다.“예전에도 다시는 나에게 치근덕거리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한 번도 지킨 적이 없잖아.”부승민의 어떤 말은 그냥 방귀라 생각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면 된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알아차린 온하랑이었다. 부승민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온하랑의 볼에 입을 맞췄다.“너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뻔뻔스럽기 짝이 없네.”온하랑은 미간을 찡그렸다. 부승민은 온하랑이 불쾌해하는 표정이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워서 다시 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오늘 밤 같이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을래?”온하랑은 그를 째려보았다.“됐어, 얼른 가. 난 피곤해서 집에 가서 잘래.”그녀는 부승민을 밀어내고 문을 열었다. 부승민이 따라가려고 발을 뻗는데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부승민은 걸음을 멈추고 앞에 있는 문짝을 바라보았다. 그는 멋쩍게 코를 매만지며 안에 대고 외쳤다.“하랑아, 잘 자. 난 위층으로 올라갈게.”집에 들어온 온하랑은 김시연의 눈
저녁 8시 15분, 선셋 바. 약속 시간은 8시였는데 김시연과 온하랑은 일부러 조금 늦게 왔다.김시연의 말에 따르면 상대방이 한참 기다렸다가 그녀가 오지 않아서 자리를 박차고 가버릴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서였다.술집 내부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두 사람은 안쪽 테이블에 앉아 음료 두 잔을 주문했다. 김시연은 휴대폰을 꺼내 상대방에게 문자를 보냈다.[전 도착했어요. 어디예요?”[아직 도착하지 못했는데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상대방이 얼른 답장을 보냈다.[네.]김시연은 답장을 보내며 투덜거렸다.“미친, 나보다 너 늦네!”멀지 않은 구석진 테이블에 훤칠한 남자가 나른히 자리에 앉아 지루하게 와인을 음미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가끔 문 쪽을 힐긋 쳐다보았다.세련되고 깔끔한 외모에 금테 안경을 낀 남자는 온몸에서 우아하고 상쾌한 분위기가 풍겼다. 상큼한 봄바람 같은 남자의 매력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다가가고 싶게 만들었다.얼마 앉아 있지도 않았는데 많은 사람이 몰려와 대시했다. 그중에는 남자도 여자도 있었지만 모두 그에게 거절당했다.어떤 사람이 들어와 자리에 앉는 것을 본 그는 눈빛이 반짝이더니 천천히 와인을 다 마셨다. 잔을 내려놓고 일어나서 가려고 할 때 갑자기 누군가 그를 불렀다.“도진 오빠?”임연지는 웃으며 다가갔다.“어머, 강남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연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요. 정말 우연이네요.”임연지는 뒤에 있는 오재원에게 소개했다.“재원아, 이쪽은 우리 사촌 오빠 친구 연도진 씨야.”“이쪽은 오재원이고 사촌 오빠 소꿉친구예요.”연도진에게 친절하게 말하는 임연지의 말 속에 약간의 호감이 담겨 있는 것을 본 오재원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연도진을 훑어보더니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연도진도 눈을 들어 그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손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야겠어요.”임연지는 미소를 지었다.“네.
김시연은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사람이 좀 눈치가 있으면 안 돼?” “눈치가 있으라니 무슨 말이야?”“그냥 못 본 척 지나칠 것이지. 내가 너 보기 싫어하는 거 몰라서 그래?”지난번 쇼핑몰에서 만났을 때도 김시연은 그랬다. 연도진은 시선을 떨어트리고 미소를 지었다.“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무례한 짓은 못 하거든.”그 말인즉 김시연이 무례하다는 말이다. 김시연은 흥, 콧방귀를 꼈다.“이제 인사했으니까 그만 갈래?”“이렇게 큰 도시에서 우연히 만난 것도 운명인데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김시연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온하랑은 연도진을 흘겨보며 속으로 그의 뻔뻔함이 부승민 못지않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연도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벌써 쫓으려고 그래? 설마 여기서 소개팅이라도 하는 거야? 내가 보는 게 두려워서 그래?”“그 사람이 너 때문에 역겨워할까 봐 그러는데.”김시연이 대답했다.“마침 나도 약속이 있는데, 난 그 여자가 너 때문에 역겨워하는 게 두렵지 않거든. 그러니까 같이 기다렸다가 서로 소개할까.”“...”김시연과 온하랑 두 사람 다 할 말을 잃었다. 온하랑은 세계관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소개팅 자리에서 서로 전 애인을 소개한다고? 연도진이 몇 년 동안 해외에 있으며 배운 게 이거란 말인가?김시연은 알고 있었다. 연도진이 일부러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어 한단 걸. 그녀가 씩씩거리며 폭발하기 일보 직전 연도진이 말했다.“중매인이 내 소개팅 상대가 성이 김씨라고 했는데 설마 넌 아니겠지?”김시연은 입가에 맴도는 말을 삼키다가 숨이 넘어갈 뻔했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켜며 부인했다.“아니야.”“왜 아니라고 생각해?”“카톡 이름이 다르잖아.”“아, 그래. 나 닉네임이 DJ인 카톡도 있는데.”김시연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온하랑도 입꼬리가 떨렸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방금 김시연의 휴대폰 화면 대화창 상단에서 보았던 그 닉네임도 DJ였다.“연, 도,
갑자기 문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이때 누군가 외쳤다.“야, 경찰 떴어.”그 후 바 전체에 한바탕 소동이 일기 시작하더니 일부 손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제자리에 얼어붙었고 일부 손님은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듯 우왕좌왕하며 도망쳤다.경찰 두 명이 정문으로 들이닥쳐 질서를 유지했다. 앞에선 경찰이 엄격하게 말했다.“모두 조용히 하세요. 술집 내부에 누군가 불법 약물을 반입했다는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시간을 많이 지체하지 않을 테니 조사에 적극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공무집행방해죄로 체포될 겁니다.”대부분 손님이 진정하고 경찰 조사에 협조했다. 김시연은 어이없어 연도진을 바라보았다.“이곳에서 마약을 한다고? 난장판이 따로 없네! 야, 연도진 뭐 이딴 곳을 찾아?”연도진은 억울한 듯 말했다.“나라고 어떻게 알았겠어...” “닥쳐!”입술을 꾹 다문 연도진은 말하지 않았다. 김시연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면 신고한 사람이 마약을 한 사람의 인상착의를 말했을 거 아니에요?”온하랑은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연도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만, 이런 사람 많은 장소라면 다른 사람이 더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일일이 다 확인할 거야.”마약, 에이즈... 이런 단어들을 들은 김시연은 몸을 흠칫 떨며 그를 흘겨봤다.“누가 너한테 물었어?”“안 들으면 되잖아.”입술을 삐죽인 김시연은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하랑 씨, 안색이 왜 이래요? 어디 아파요?” “조금 어지러워서요.”온하랑은 가슴을 부여잡았다.“심장도 빨리 뛰고 아마도 요즘 너무 바빠서 제대로 휴식하지 못해 그런가 봐요.”“에휴.”김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원래는 얼굴만 보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또 이런 일로 시간을 뺏기네요.”말을 마친 김시연은 연도진을 흘겨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곳에 올 수 있었을까?!연
연도진이 대답한 후 경찰은 노트를 덮고 펜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갑시다. 세 분은 저희와 함께 서로 가서 소변 검사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네? 소변 검사라뇨?”김시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지금 우리를 의심하는...”어안이 벙벙해진 온하랑은 마음 한구석에서 이유 모를 불안감이 피어올랐다.“무슨 문제가 있으면 검사 결과가 나온 다음에 다시 말하죠.”김시연은 다른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연도진이 그녀를 말렸다. 지금 당장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진정하려고 애썼지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다 네 탓이야! 일부러 날 골탕 먹인 건 그렇다 쳐도 하필이면 골라도 뭔 이런 개떡 같은 장소를 골라?”김시연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연도진을 노려보았다.“그래, 그래. 다 내 탓이야, 내 탓.”앞에 있던 경찰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두 분 소개팅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방금 만난 사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세 사람은 경찰차로 끌려갔다. 온하랑은 혼자 다른 차에 탔고 두 명의 경찰이 양옆에 앉았다.온하랑은 무엇 때문인지 마음이 극도로 흥분되며 확 터뜨리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게다가 이유도 모른 채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어 짜증이 나서 사람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김시연과 연도진은 한차에 타고 경찰이 옆에 앉았다. 연도진은 몸을 뒤척이더니 경찰의 의심스러운 눈빛 아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경찰관님, 전화 한 통만 할 수 있을까요?”“누구한테요?”“친구요.” “전화해요.”한 번호로 전화를 건 연도진은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동철 씨, 저예요.”연도진은 눈앞에 상황을 최동철에게 설명하며 온하랑의 증상에 대해 강조했다.“아마도 누군가 하랑 씨를 노리는 것 같은데요.”최동철이 대답하자 연도진은 전화를 끊었다. 김시연은 그 말을 듣고 뒤늦게 알아챘다.“그러니까, 네 말은 하랑 씨가...”김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류 청장님이 말해주셨어. 그 두 여자애는 네 친구야?”연도진의 삼촌, 서정훈이 물었다.“네, 제가 알기로는 절대 불법적인 약물에 손댈 사람들이 아니에요. 바에서 술 마실 때 누군가 술에 손을 쓴 것 같아요.”연도진의 말을 들은 서정훈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옆에 있는 류지태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류지태가 말했다.“그랬군요. 도진 씨, 서 의원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부하 직원들에게 빨리 확인하고 두 친구분을 풀어주라고 할게요.”“고마워요, 류 청장님.”연도진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취조실 안으로 들어온 심문관은 경험과 대화를 통해 온하랑이 처음이고 아직 중독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온하랑은 두통을 참으며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필사적으로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당시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세부 사항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잘 생각해 보세요. 술잔이 시야에서 사라진 적이 없는지.”미간을 찌푸린 온하랑은 두통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씁쓸하게 말했다.“전 정말 생각이 안 나요.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 보시면 안 돼요?”심문관은 계속 말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이때 밖에서 한 경찰이 들어와서 심문관의 귀에 무언가를 말했고, 두 사람은 함께 취조실을 나갔다.몇 분 후 심문관은 다시 들어와 온하랑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이만 나가봐요.”“네?”온하랑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터질 것 같던 머리가 순식간에 편해지는 것 같았다.“심문 안 해요?”“더 하고 싶은 거예요?”그녀는 두말없이 일어나 취조실에서 나왔다.“하랑 씨! 괜찮아요?”이미 취조실에서 나온 김시연은 문 앞에서 온하랑을 기다렸다가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앞으로 다가갔다.“난 괜찮아요. 그냥 머리가 좀 아파요. 시연 씨는 어때요?”김시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난 아무 반응도 없어요. 검사 결과가 아니었다면 내가 마신 술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거예요. 대체 누구 짓인지. 아무튼 이 바는 이제부터
연도진도 설핏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럼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어요?”“...인사를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서정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그게 뭐 고민할 가치가 있어요.”“저를 기억하세요?”온하랑은 고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처음에는 생각나지 않았는데 이제 기억이 나네요. 당신 이름은 온하랑이고 남편은 부승민 맞죠?”“기억력이 정말 좋으시네요.”온하랑은 일부러 부승민과 이혼한 사실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슬쩍 아부했다. 진실을 말한 것이니 아부라 할 수도 없었다.어쨌든 그때 한 번 보았을 뿐인데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온하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정훈은 미소를 지으며 길게 말하지 않고 밖으로 걸어갔다. 연도진은 발걸음을 주춤하더니 김시연을 바라보았다.“먼저 휴게실에 가서 기다려.”김시연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다리를 뻗어 앞으로 걸어갔다. 서정훈은 뒤에서 따라오는 연도진을 흘끗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방금 그 여자애한테 관심 있어?”연도진은 부인하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잠시 어머니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삼촌.” “너도 이제 어리지 않은데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면 얼른 결정하고 부모님께 보여드려야지.”서정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말했다.“네, 알아요.”문 앞에 이르자 연도진은 앞장서서 걸어가 차 문을 열었다.“삼촌, 들어가세요.”서정훈은 뒷좌석에 앉았다.“그래 들어가 봐. 일 처리 잘하고, 다음에 집에 와서 밥 먹으렴.”“네.”서정훈을 배웅한 연도진은 휴게실로 향했다. 온하랑과 김시연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시연은 서정훈이 낯익다고 생각했지만 온하랑의 말을 듣고서야 그의 정체를 알고 감탄했다.“이렇게 친절한 분이라니 믿을 수가 없네요. 그런데 연도진은 어떻게 저분을 알고 있죠?”“그건 연도진한테 물어봐야죠.”온하랑이 말을 마치자마자 연도진이 휴게실 문 앞에 나타났다. 김시연은 그를 흘끗 쳐다보며 물었다.“야, 너 저분을 어떻게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