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잘 어울리네.”최동철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임연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마워요, 오빠.”임연지는 최동철을 사촌 오빠라고 말하지만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없었고 그녀에 대한 최동철의 태도는 친밀하지 않았다. 이 최씨 가문의 사촌 아가씨는 실속이 없었다. 그러나 최동철이 그녀를 지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강남은 괜찮은 곳이야. 넌 여기 있고 싶으면 더 있어도 돼.”“네.”임연지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고모도 여기 며칠 있을 거래요. 동림이가 주말에 놀러 오고 싶대요.”최동철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부승민이 걸어간 방향을 보며 말했다.“가 봐.”“그럼 나 먼저 갈게요, 오빠.”임연지는 부승민이 간 방향으로 쫓아갔다. 임연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최동철이 비서를 불러 귀에 대고 몇 마디 지시를 내리자 고개를 끄덕인 비서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임연지는 복도에서 부승민을 발견했다. 그는 창가에 서서 왼손을 주머니에 꽂고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통화 중이었다. 들어 올린 팔에 의해 깔끔한 슈트에 몇 겹의 주름이 잡히며 어깨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임연지는 관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넓은 어깨와 다부진 몸매, 전화를 받는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매력이 철철 넘쳐흘렀다.서른이 되면 살이 찌기 시작하는 남자들을 아주 많이 봤지만 부승민은 여전히 완벽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눈에 그가 정기적으로 헬스장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주 운동하는 사람들만의 특유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그의 목소리도 매우 듣기 좋았다. 중저음의 동굴 목소리는 남성적인 매력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 임연지는 부승민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휴대폰 너머의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불구속 상태라도 사건 수사는 중단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 사건은 증거가 분명해서 바로 검찰에 송치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사건의 당사자인 추서윤과 최민식 조감독의 얘기였다.
“...”“다 말했으면 갈게요.”떠나는 부승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임연지는 너무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자신이 부승민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온하랑은 결혼까지 했었는데 저라고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어디가 온하랑보다 못한데? 임연지가 부승민을 쫓아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연지 씨.”고개를 돌려보니 최동철의 비서였다.“유 비서님? 무슨 일이죠? 오빠가 저를 찾으러 오라고 했나요?”“최 대표님께서 연지 씨더러 급하게 다가가지 말고 정보를 줄 테니 인내심을 가지고 위층 호텔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임연지는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차올랐다. 사촌 오빠가 나서서 도와주려는 걸까?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았어요. 오빠 소식 기다릴게요.”강남 고위 인사들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부승민이 주최 측과 형식상의 대화를 주고받을 때 최동철이 천천히 다가왔다. 주최 측은 얼른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최동철 씨가 처음 강남에서 열린 포럼에 참석해 주셨는데 저희 대접이 소홀하지는 않았겠죠?”“그럼요.”최동철은 웃으며 말했다. “친절하고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려요. 이번 포럼은 저에게도 매우 의미 있었어요. 만약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도 다시 오겠습니다.”“자리를 빛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 소개해 드릴게요. 이분은 부승민 씨에요. 포럼에서 보셨죠. 승민 씨도 최동철 씨에 대해 들어보셨을 테죠. 대단한 분들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부승민은 눈을 들어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했다.“최동철 씨,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요. 만나서 반갑습니다.”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던 최동철은 손에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부승민도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감사합니다.”주최자는 두 사람의 훈훈한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오전 포럼에서 논의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했다.“지난 몇 년 동안 우리 모두 알다
유은정이 옆으로 스쳐 지나가며 임연지의 손에 객실 카드 한 장을 건넸다. 임연지가 로비로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왼쪽 엘리베이터는 이미 올라가고 있었다.그녀가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자 오른쪽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32층에 도착한 임연지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며 마침 김 비서와 마주쳤다. 부승민은 이미 방에 들어간 것 같았다.임연지는 다른 데 정신을 팔지 않고 카드와 일치하는 방 번호를 찾았다. 굳게 닫힌 객실 문을 보며 침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부승민을 생각하니 임연지는 긴장되면서도 설렜다.몸도 좋으니까, 아마... 엄청나겠지...이런 최상급의 남자와 함께라면 원나잇도 가능했다. 게다가 임연지는 어차피 부승민과 결혼할 생각이었다.심호흡을 한 그녀는 카드로 문을 열고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재빨리 문을 잠갔다.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임연지는 미간을 찌푸렸다.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 방처럼 깨끗한 거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임연지의 시선이 침실로 향했다.부승민은 지금쯤 침실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얼른 침실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문이 살짝 열리자 임연지는 슬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큰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어리둥절해 있던 그녀는 문을 활짝 열었지만 침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닫혀 있는 욕실 문을 보며 앞으로 걸어간 임연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설마 방을 잘 못 찾아왔나? 임연지는 다시 객실 문 앞으로 가서 번호를 확인했다. 이 방이 틀림없는데 부승민이 왜 안에 없지? 설마 도망갔나?!안색이 어두워진 임연지는 이를 악물고 곧바로 최동철에게 전화했다. 휴대폰 화면을 흘긋 들여다본 최동철은 주최자에게 양해를 구했다.“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네.”최동철은 휴대폰을 들고 비상계단 입구로 걸어가 전화를 받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오빠, 그 사람 도망갔어요.”임연지는 방금 있었던 일을 말했다. 최동철의
잠시 주저하던 온하랑은 미간을 구긴 채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금방 갈게.”솔직히 정말 귀찮았지만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코트를 챙겨서 문을 나섰다. “하랑 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요?”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김시연이 갑자기 물었다. 발걸음을 멈춘 온하랑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오늘 밤 저녁 촬영이 있어서요.”“아...”김시연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조심해서 가요.”온하랑은 현관에서 조용히 신발을 갈아 신고 있는데 김시연이 또 물었다.“밤에 돌아올 거예요?”“상황 봐서요.”“알았어요.”한 길만 지나면 온하랑은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제 거의 다 왔는데 지하 주차장으로 갈까, 아니면 밖에서 기다려?”“밖에서. 준경로까지 운전해서 들어오면 일레븐 편의점이 보일 거야. 그 맞은편에서 기다려.”온하랑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승민의 말을 따랐다.“알았어.”전화를 끊고 나서야 부승민의 휴대폰에 아직 배터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새 어디서 충전이라도 했나? 온하랑은 차를 운전해 지정된 장소로 가서 멈춰 섰다. 기다리는 동안 창문을 내리고 좌우를 살폈다.“가자.”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부승민이 재빨리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그는 등받이에 힘없이 기대앉았다. 깜짝 놀란 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디서 온 거야...”그녀는 말하다 말고 부승민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얼굴이 붉어진 채 심하게 숨을 헐떡이며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고 있었고,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했다. 옷은 지저분하고 주름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오빠, 뭔 일 있었어?”온하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부승민은 팔을 들어 눈을 가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더러운 속임수에 당했을 뿐이야.”“그럼 병원으로 갈까?”부승민은 잠시 멈칫하다가 갑자기 팔을 내렸다. 그녀를 응시하는 칠
온하랑의 귀가 빨개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부승민을 흘긋 쳐다보더니 곧바로 거절했다.“무슨 헛소리야?! 더 빨리 운전할 테니까 집에 가서 직접 해결해!”어떻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어떤 도움인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도와줄 수 있단 말이지?호흡이 거칠어진 부승민은 목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내리더니 힘겹게 말했다.“집에 갈 때까지 못 버틸 것 같아...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해 중앙공원으로 가.” 잠깐 망설이던 온하랑은 핸들을 꺾어 우회전 차선으로 들어갔다. 3분 후, 차가 공원에 들어섰다.중앙공원은 지금 개방되어 있었다. 아직 날도 춥고 밤이라서 한 사람도 없었다. 온하랑은 차를 길가에 주차하고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었다.“밖에 나가 있을게. 알아서 해결해.”그녀가 정말 차 문을 밀려고 하자 부승민이 뒤에서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하랑아, 제발 부탁이야. 좀 도와주면 안 돼? 너무 힘들어...”부승민은 온몸이 불덩이었고 커다란 손도 엄청 뜨거웠다. 그가 온하랑의 손목을 잡았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그의 불타오르는 시선을 마주한 온하랑은 온몸이 나른해지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안 돼. 혼자 해결해...”부승민은 온하랑의 손바닥을 지그시 눌렀다. 가늘게 뜬 눈에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널 어떻게 안 할게.”온하랑은 반사적으로 다섯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알고 싶지 않았지만 부승민이 손바닥을 누르는 순간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왜 하필 이런 엉뚱한 타이밍에 알아차린 것인지!입술을 감쳐문 온하랑은 아무 말도 없이 부승민에게서 손을 빼내고 차에서 내렸다. 부승민은 가슴이 조여오며 눈빛에 실망감이 드러났다. 그러나 뒷좌석 문이 열리더니 온하랑이 옆에 앉아서 문을 닫았다. 괜한 걱정을 한 부승민은 안색이 밝아지며 불꽃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온하랑을 응시했다.“고마워, 하랑아.”부승
부승민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키득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차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다. 온하랑은 시동을 걸고 창문을 내리면서 내일 꼭 세차장에 갈 거라고 결심했다.“오늘 밤 무슨 일이 있었어?”방금 뒷좌석에 앉았을 때 그녀는 그의 슈트에 있는 벽에 마찰한 흔적을 보았다.“누가 날 음해하려고 했는데 내가 호텔 방을 나간 걸 알고 사람을 시켜서 호텔 출구와 비상계단을 지키고 있어서 벽을 타고 밖으로 나왔어.”방에 들어간 후 김 비서가 나가자마자 부승민은 발코니로 나갔다. 그는 32층 발코니에서 31층 발코니로 내려갔다. 31층 객실은 비어있었다. 최동철이 쉽게 내보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정문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일부러 시간차를 두고 3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서 내려 화장실에 숨었다.최동철의 사람들이 화장실을 찾으려고 할 때 그는 창문으로 나가 화장실과 가장 가까운 방의 발코니로 이동했다.그 사람들은 그가 계단을 이용할 것이라고만 생각했고, 그렇게 빨리 내려올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에 아래층은 감시가 소홀해서 부승민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연민우도 포럼에 참석했지만 최동철이 사람을 시켜 연민우를 감시할 게 분명했고 만약 연민우와 통화하면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하랑에게 데리러 오라고 부탁했다.길가에서 그를 기다리던 온하랑은 앞길과 뒷길에만 신경을 썼다. 부승민은 옆 2층 화장실에서 내려왔다. 온하랑은 흥,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인기가 참 많으시네. 수많은 여자가 자고 싶어 안달인 걸 보면.”“넌 안 자고 싶어?”“꺼져.”“누가 나를 음해하려고 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라이벌 아니면 위로 올라가고 싶은 사람이겠지.”부승민은 가부를 말하지 않았다.만약 자신에게 약을 먹인 사람이 최동철이라고 하면 온하랑이 믿을까?그는 앞에 있는 도로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너희 아파트로 가.”온하랑은 백미러로 그를 흘겨보았다.“오빠 운전하면 안 돼.”그녀는 자신이 차에서 내리면 그가
호텔 방 안에서 임연지는 짜증이 나서 거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거의 다 왔는데 놓쳐버리고 말았다. 흥, 그래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어차피 쓸모없는 몸부림일 텐데. 최동철이 이미 이 건물에 사람들을 배치했기에 부승민은 조만간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온다.임연지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비상계단 입구로 걸어갔다. 내부는 어둡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30층이 넘는데 부승민이 정말 여기로 내려올까?“저기요?”갑자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연지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계단 모퉁이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자 센서 등이 켜졌다. 그제야 임연지는 검은 그림자가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창백한 얼굴과 빨간 눈시울을 보니 아마도 기분이 좋지 않아 이곳에 숨어 있었던 것 같다.“깜짝 놀랐네.”임연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젊은 여자가 말했다. “당신이 계속 들여다보는 걸 봤어요.”“여기 얼마나 있었어요?”“30분 정도요.”임연지는 그 말에 다급히 물었다.“그럼 어떤 남자가 여기를 지나가는 걸 보셨나요? 키도 크고 잘생겼어요!”여자는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가 온 이후로 아무도 지나간 적 없어요. 30층이 넘는데 누가 계단을 이용하겠어요?”임연지는 당황해서 입을 크게 벌렸다.“확실해요?”“그럼요.”부승민이 계단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어디로 갔을까?서둘러 방으로 돌아온 임연지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설마 방에 숨어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하며 옷장을 하나씩 열어보았지만 옷장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여기도 없고 계단도 이용하지 않았다면 어딘가에 숨어 그녀가 방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 최동철의 사람들이 제때 지키지 못해 이미 탈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아니면 다른 층의 방에 들어가 숨었을 수도 있었다. 임연지는 서둘러 최동
“숙모, 저 놀이동산 가고 싶어요.”부시아는 다른 애들보다 일찍 철들었지만 그래도 아인지라 요즘 유치원만 다녀서 나가서 놀고 싶은 모양이었다.온하랑은 요 며칠 계속 비가 부슬부슬 내렸던 터라 날씨부터 확인했다.오늘 아침에도 비가 내려 햇빛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리기만 했다. 또다시 비가 올 가능성이 컸다.“숙모가 맛있는 거 사줄까? 오전에 놀이동산 가서 놀고 점심에 맛있는 거 먹는 거 어때?”“네!”“그래, 숙모랑 놀이동산에 놀러 가자. 그런데 비가 오면 바로 집으로 오는 거야. 알았지?”“네.”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가는 길 내내 녀석은 최근에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더니 결국 지치고 말았다.온하랑은 피식 웃더니 음악을 틀었다.놀이동산에 도착한 부시아는 마음껏 즐겼다.회전목마에서 내려오자마자 또 롤러코스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하지만 키 제한으로 탈 수가 없었다.부시아는 주위를 살피더니 미끄럼틀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미끄럼틀은 그네, 시소 등이 있는 무료 체험 구역에 있었다.그 옆은 바로 음식 코너라 달려가던 중 발걸음을 멈추고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숙모, 저 소떡소떡 먹고 싶어요.”마침 온하랑도 먹고 싶었던 찰나였다.2인분 주문을 마치고 뒤돌아보았을 때, 부시아는 이미 미끄럼틀에서 놀고 있었다.“조심해.”온하랑이 당부했다.“알겠어요.”부시아는 대답하자마자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소떡소떡은 바로 이 자리에서 만드는 거라 오래 기다려야 했다. 온하랑은 기다리는 동안 부시아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객님, 소떡소떡 완성되었습니다.”온하랑은 포장을 건네받으면서 계좌이체 하려고 했다.바로 이때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고 뒤돌아보았을 때 부시아는 바닥에 넘어져 힘겹게 일어서려고 했다.그래서 바로 달려가 부시아를 부축했다.“시아야, 괜찮아? 어디 다친 곳 없어? 안 아파?”부시아는 놀란 표정으로 껍질이 까여 피가 보이는 손바닥을 내밀었다.“다른 곳은?”부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