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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2화

작가: 고운
온하랑은 눈물을 참으며 조용히 계단 입구로 왔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단을 내려갔다.

“온하랑 씨, 청장님께선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녀를 기다리던 경찰이 물었다.

온하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방금 급한 일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이만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추서윤 면회는 나중에 제가 다시 올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온하랑은 차로 돌아왔다. 힘없는 모습으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부민재는 그녀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람이었다. 부승민은 그런 부민재를 위해 책임을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고 했다.

그녀는 아마도 그간 부승민의 입에 발린 소리에 홀려 있었던 탓인지 속상함에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사실 부승민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설령 그가 그녀에게 추서윤이 아닌 자신과 거래를 하자고 했어도 경계를 늦추지 말았어야 했다.

입에 발린 소리 뒤에는 달콤한 사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소와 양귀비가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알아챘다면 아마 뼛속까지 중독되어 더는 이성을 되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멀리서 차가 점점 다가오더니 경찰서 앞에 멈춰 섰다.

그 차에선 소청하와 부윤민이 내렸다. 두 사람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정월 대보름에 만났을 때보다 소청하는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

온하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 소청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확 내려 몸을 숨겼다. 몇십 초 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청하와 부윤민은 이미 경찰서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온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분명 그녀와 온강호가 피해자였다. 부민재가 주모자인지 아니면 공모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감방 신세는 면하지 못할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소청하와 부윤민을 볼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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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태로운 제안   제643화

    게다가 그날 진상을 알게 된 후에도 사람을 시켜 알아보라고 했다. 추서윤이 병원에서 사라진 그 날 확실히 부민재를 찾아갔었고 두 사람의 통화 기록도 확인했었다.다만 그것은 전부 10년 전 일이었다. 만약 추서윤이 부민재를 같이 끌어내리려고 한다면 현재 있는 증거는 부민재에게 불리했다.장국호는 최동철이 경찰에 넘겼다.최동철은 원래부터 부씨 일가에 적의를 보이었다. 비록 부승민은 그가 왜 그런 적의를 보이는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장국호를 매수하여 모든 죄를 부민재에게 뒤집어씌울 동기는 있었다.부씨 일가의 장손이자 BX 그룹의 대표가 살인사건의 주모자이고 살해당한 사람은 유명한 기자다. 이런 내용의 기사가 보도된다면 부씨 일가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아주 뻔했다.부승민은 최동철이 BX를 노리고 그런 것으로 생각해 바로 연민우에게 각종 플랫폼이나 SNS를 예의 주시하라고 했다.최동철이 이러는 데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일부 증거를 없애 버렸을 거로 생각한 그는 바로 육광태에게 연락해 몰래 장국호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다.장국호는 자신까지 끌어들이며 부민재를 모함하고 있었다. 최동철이 장국호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에게 어떠한 이익을 대가로 거짓 진술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부민재의 변호사에게는 시간을 최대한 끌어달라고 말했다.모든 지시를 내린 뒤 부승민은 온하랑을 떠올렸다.‘장국호가 한 진술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까?'‘혹시 오해하고 있는 거 아냐?'그는 핸드폰을 들어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소리를 꺼버리곤 책상 위로 엎어놓았다. 듣지 못한 것처럼, 보지 못한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연기 연습을 했다.사람마다 자기 입장이 있었다. 부승민이 그녀를 도와주었기에 그녀는 부승민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던 일로 하고 계속 부승민과 연락하며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그녀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전부 받지 않았다. 부승민은 걱정이 되어 바로

  • 위태로운 제안   제644화

    “알아.”“하지만 넌 믿지 않잖아.”“나도 널 믿고 싶어. 하지만...”온하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부승민, 그날 회사에 있었을 때 넌 이미 부민재가 연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맞아?”그녀도 그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부선월이 청장에게 한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그를 믿겠는가?“응.”“그럼 부민재가 자수하기 며칠 전까지 넌 뭐 했어?”부승민은 멈칫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 내가 지금 부민재 혐의를 풀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정말이야?”“그럼 아니야? 부민재는 추서윤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야.”부승민이 추서윤과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어서 이러는 것으로 생각했다...“아닐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부승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내가 하랑이 마음속에 정말로 이런 사람이었던 거야?'‘날 조금이라도 믿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온하랑은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네가 그랬지. 누군가 장국호를 매수했다고. 누가 매수하는데?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매수하는데?”온하랑의 냉담한 얼굴에 부승민은 씁쓸함이 밀려왔다.“매수한 사람은 최동철일 거야. 최동철은 오래전부터 우리 일가에 적의를 보였거든.”그 말을 들은 온하랑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웃어버렸다.“최동철이라고? 최동철은 장국호를 붙잡아 경찰에 넘긴 사람이야. 우리도 부민재가 그 사건과 연관이 있었다는 걸 몰랐는데 최동철이 알고 있었다고?”“만약 정말로 최동철이 알고 부씨 일가를 겨냥하기 위해 그런 거라면 부민재가 자수하는 그 날 이미 기사가 쫙 퍼졌을 거야.”그러나 지금 기사 하나 올라온 것이 없었다.이 부분에 대해선 부승민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그도 그저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그날 내가 너한테 했던 말은 전부 부민재가 직접 나한테 해준 말이었다. 정말로 부민재가 주모자였다고 해도 나랑 연관 없어. 하랑아, 그분은 너의 아버지셔. 나도 네가 장인어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어. 그런 내가 왜

  • 위태로운 제안   제645화

    “내가 결백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지금은 이 방법밖엔 없어...”“너 정말!”온하랑은 화가 치밀었다.“너 지금 날 협박하는 거지?”“난 그런 의미가 아니야...”“서 있는 말든 마음대로 해!”온하랑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리고 그대로 책상 위로 던지곤 주방으로 들어가 저녁을 만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온하랑이 주방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현관엔 김시연이 캐리어를 끌며 들어오고 있었다.“하랑 씨! 나 왔어요!”“어서 와요. 저녁은 먹었어요?”김시연은 주방에 있는 온하랑을 보곤 바로 손을 들었다.“아뇨, 아직이에요! 저도 주세요!”“알겠어요.”펄펄 끓은 물에 온하랑은 새우 물만두를 2인분 넣었다.뜨거운 물이 그녀의 손에 튀었다.“앗, 쓰읍.”온하랑은 얼른 손을 털며 입으로 후후 불었다.집안을 둘러보던 김시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왜 그래요? 다쳤어요?”“네, 조금요.”“예전에는 이런 실수도 안 하던 사람이었잖아요.”김시연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온하랑은 그녀를 힐긋 보았다.“네?”“아녜요.”김시연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전 들어가서 짐 좀 정리하고 있을게요. 다 되면 불러줘요.”“네.”물만두가 완성되고 온하랑은 여러 밑반찬을 그릇에 옮겨 담아 식탁으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김시연을 불렀다.“시연 씨, 저녁 먹어요!”“네! 가요!”김시연은 방에서 나와 바로 온하랑의 맞은편에 앉았다. 맛있는 냄새에 김시연은 바로 너스레를 떨었다.“세상에, 하랑 씨. 내가 그동안 하랑 씨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며칠 동안 도시락만 먹어서 이것 좀 봐요. 배가 홀쭉해졌단 말이에요.”“괜찮아요. 며칠 후면 다시 볼록해질 거예요.”“음... 냄새 엄청 좋아...”김시연은 혼잣말을 하곤 바로 물만두를 입에 넣었다. 그녀는 이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물만두를 꼭꼭 씹어 삼킨 그녀는 온하랑을 보았다.“하랑 씨, 그날 소파는 왜 바꾼 거예요?”

  • 위태로운 제안   제646화

    가까이에서 보니 그의 옷은 이미 빗물에 흠뻑 젖은 상태였고 앞머리에선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부승민은 그녀가 건넨 우산을 보았다. 받지 않고 그저 가만히 온하랑을 보았다.“고마워, 하랑아. 네가 나와줘서 난 기뻐. 하지만 받지 않을래.”은은한 가로등 불빛 아래 그가 입을 열자 뽀얀 입김이 나왔다.온하랑은 고개를 떨군 채 우산을 그래도 부승민의 품으로 밀어 넣었다.“가져가! 차로 돌아가라고!”그녀가 손을 빼자 우산은 그대로 바닥에 툭 떨어졌다.온하랑의 안색이 변하고 바닥에 떨어져 버린 우산을 보다가 부승민을 보았다.“싫으면 말아! 비 맞고 싶은 거라면 다른 곳에 가서 맞아. 괜히 우리 집 아래에서 맞았다고 무슨 일이 생기면 내 탓할 생각하지 말고.”“알았어. 아파트 입구에 서 있을게.”“...”온하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비를 맞으며 말이다.올곧은 그의 자세를 보니 더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온하랑은 속에서 화가 치밀어 그대로 집으로 올라가려 했다.우산을 챙겨 줬는데도 그는 받지 않았으니까.‘어디에 서 있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해!'‘나랑 상관없는 일이고 상관할 생각도 없어!'하지만 얼마 못 가 온하랑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랫입술을 틀어 물며 몸을 돌려 부승민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를 쳤다.“부승민, 너 정말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지?!”부승민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빗속을 뚫고 말이다.“하랑아, 난 네가 왜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믿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너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난 부민재는 돕지 않았다고. 설령 나를 믿지 못한다고 해도 경찰을 믿어주리라 생각했어. 아직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인데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확정 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난 확정 지은 적 없어. 그러니까 얼른 돌아가.”온하랑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사건이 아직 해결되기 전이었지만 판사는 이미 판결서를 준비하고 있었다.조사 결과만 나온다면 정식 판결서가 나올 것이다.“정말?

  • 위태로운 제안   제647화

    그녀는 화가 난 모습으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간다면서! 왜 안 가고 계속 서 있는 건데!”부승민은 넋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왜... 다시 내려온 거야?”온하랑은 여전히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사실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복도에 서서 그가 가는지 안 가는지 지켜보고 있었다.역시나 그는 가지 않았다.만약 그녀가 그대로 집으로 올라갔다면 그는 분명 밤새 내내 그곳에 서 있으리라 생각했다.온하랑은 부승민의 목적이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이 약해졌으니 말이다.부승민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두어 걸을 움직이던 온하랑은 멈춰 서더니 몸을 돌려 그를 째려보았다.“올라가고 싶다며?”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부승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뒤따라 갔다.온하랑은 먼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곤 부승민을 째려보았다.엘리베이터 안에선 그의 옷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하랑아, 나한테 기회를 주는 거 맞지? 그렇지?”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대답을 들려줬다.“시연 씨는 이미 자고 있으니까 이따가 조용히 들어와. 바로 내 방으로 오는 거야. 거실에 머물 생각하지 마, 알았어?”“응.”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이건 전부 그가 뻔뻔하게 버틴 탓에 얻은 기회였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온하랑은 현관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부승민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 웃겨 저도 모르게 눈웃음을 짓게 되었다.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부승민을 보면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인 뒤 조심스럽게 현관을 열곤 부승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부승민은 조용히 들어간 뒤 바로 온하랑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닫은 뒤 빠르게 방으로 돌아왔다.방 문을 닫기 전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그러곤 한숨을 내쉬었다.현관부터 그녀의 방

  • 위태로운 제안   제648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려 방 중간에 우뚝 서 있는 부승민을 보았다. 머리를 헝클어져 있었고 알몸 상태였던 지라 굴곡이 선명한 복근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수건 한 장만 몸에 걸치고 있었다.그가 걸치고 있는 수건은 분홍색이었다. 온하랑의 수건 중 하나였다. 원래부터 하얀 피부는 분홍색 수건을 걸쳐도 아주 잘 어울렸다.부승민은 올해가 지나면 서른이 되었다.자기주장이 뚜렷한 이목구비와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한 그의 몸은 누가 봐도 젊고 활력이 있어 보였다.온하랑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얼른 가서 샤워해.”부승민은 다소 웃음기가 담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알았어. 그런데 시연 씨 자고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자다가 깰 수 있잖아.”온하랑은 그를 째려보았다.‘뭘 그렇게 자꾸 묻는 거야?!'“응, 그럴 수 있지.”부승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이내 욕실로 들어갔다.온하랑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침대에 앉았다.욕실에선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심란했다. 뭘 해야 할지 몰랐던 그녀는 대충 대본을 들고 두어 장 넘겼다.분명 더는 부승민에게 홀리지 않겠다고, 더는 가깝게 지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온하랑은 뒤로 벌러덩 누워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그녀는 마치 부승민이라는 덫에 걸려 빠져나오려고 해도 빠져나올 수 없게 된 것 같았다.미로에 갇힌 것처럼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이때 밖에서 김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랑 씨, 물 다시 끓였는데 마실래요?”온하랑은 원래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네, 한잔 남겨 줘요.”한참 후, 부승민은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칼에선 여전히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고 온몸엔 수건 한 장을 걸치고 있었다.머리칼에서 떨어진 물기 때문인지 몸에 남았던 물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물방울이 그의 하얀 피부를 따라 그대로 탄탄한 근육까지 흘러내렸다.온하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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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하랑은 먼저 씻으려고 일어나면서 부승민에게 말했다.“일단 가만히 있어. 시연 씨가 출근하고 나면 비서한테 연락해서 옷 가져다 달라고 해.”“알았어.”부승민은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 얼굴이 조금 불그스레 하고 입술도 창백한 것 같았다. 심지어 말하는 목소리마저 조금 쉬어 있었다.온하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부승민을 자세히 보았다.“너... 혹시 지금 열나는 거 아냐?”부승민은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에 올리곤 느릿하게 말했다.“그런 것 같아.”“...”온하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대로 방을 나간 뒤 다시 돌아왔을 때는 따듯한 물과 해열제가 있었다. 협탁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일단 물부터 마셔. 이다가 비서한테 옷 가져다 달라고 하면서 아침도 사다 달라고 해. 아침을 먹고 약을 먹는 거야.”“응.”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부승민은 어딘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고마워.”그녀는 비슷한 말을 예전에 그에게 자주 했었다.그러나 지금은 못 들은 지 오래되었다.그는 누운 채 그녀를 보며 말했다.“하랑아, 넌 참 나한테 잘해주는 것 같아.”온하랑은 눈을 부릅뜨며 그를 보다가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간단히 씻은 후 온하랑은 주방으로 들어가 아침을 만들었다.그녀가 방금 부승민에게 비서한테 연락해 아침을 사 오라고 했던 건 괜히 음식을 많이 하면 김시연이 의심할까 봐서였다.고민하던 온하랑은 결국 한 번에 계란 후라이를 네 개나 했고 네 개의 샌드위치를 만들었다.만약 김시연이 그녀에게 묻는다면 감독님에게 가져다줄 것이라고 핑계 댈 생각이었다.김시연이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온하랑은 그녀의 방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시연 씨, 아침 먹어요!”3초 뒤, 방 안에선 김시연의 아주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하랑 씨. 어제 깜박하고 말 안 했네요. 나 오늘 휴식이에요. 아침은 안 먹을게요.”온하랑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네... 알겠어요...”그녀는 만들어 둔 아침을 들고 방으로 왔다. 샌드위치 두 개와 우유 한잔을 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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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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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 위태로운 제안   제1381화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위태로운 제안   제1380화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 위태로운 제안   제1379화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 위태로운 제안   제1378화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 위태로운 제안   제1377화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 위태로운 제안   제1376화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 위태로운 제안   제1375화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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