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은 오늘 오전에 민성주가 튀어버렸다는 육광태의 연락을 받았었다.그 순간 그는 온하랑이 신고를 한 이유와 기분을 알게 되었다. 온하랑은 그가 추서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화가 난 것이다...부승민은 자신을 탓했다.온하랑은 금방 추서윤의 약점을 손에 잡았다. 그런데 민성주가 사라져버렸으니 분명 추서윤과 연관이 있었다.추서윤은 예전에 잔혹한 고문을 당한 적이 있었기에 납치범과 대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걸 알고 있었던 그는 추서윤에게 시간을 주었다.만약 그가 추서윤을 압박하여 무언가를 알아내려 했다면 추서윤은 횡설수설하며 정신을 못 차렸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민성주를 놓칠 일도 없었다.납치 사건 때문에 그는 추서윤에게 시간을 준 탓이다.추서윤은 온하랑을 증오했기에 당연히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건 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는 추서윤이 자신을 납치하고 고문했던 납치범을 놓아줄 줄은 몰랐다.추서윤의 행동으로 부승민의 마지막 동정심마저 사라지게 했다.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것은 전부 그녀가 자초한 것이다.그럼에도 부승민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온하랑이 어젯밤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니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가 막혀버린 듯 답답했고 목구멍마저 답답했다.그녀는 그가 역겹다고 했다.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 같았다.부승민은 일로 어젯밤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온하랑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그는 처음에 아주 의아했다. 그리고 이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기쁜 감정이 피어올랐다.핸드폰을 들었다. 떨리는 손가락 탓에 하마터면 바로 전화를 받을 뻔했다.‘안돼! 어제 온하랑이 나한테 어떤 말을 했는지 잊었어?'‘그런데 왜 전화한 거지? 전화를 바로 받으면 안 되지. 그럼 내가 뭐가 되겠어.'‘나도 자존심이 있다고!'부승민은 망설인 끝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아까 어디까지 봤지?'부승민은 서류를 빤히 보았다. 집중이 전혀 되지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 덕에 서류에 적힌 글씨 하나하나가
만약 그녀가 그를 ‘부승민'이 아닌 ‘승민아'라고 불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누가 그러는데 네가 그 여자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며?”부승민은 순간 온몸이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어떻게 알았어?”“연 비서가 알려줬어. 연 비서 혼낼 필요도 없어. 그냥 내가 찝찝해서 캐물어 본 거야. 네 고충도 전부.”부승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것도 알게 된 거야?”그녀는 그의 고충도 알아버렸다...“응. 모든 걸 알고 나니까 내가 널 오해하고 있었더라고. 네가 추서윤을 풀어준 건 전부 나를 위해서였는데... 승민아, 미안해.”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그녀를 위해 추서윤을 풀어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찝찝했다.“하지만 나도 성인이야. 나를 위한다는 이유로 내 눈과 귀를 막진 말아줘. 이렇게 중요한 일을 대체 왜 나한테 숨긴 거야?”부승민은 입술을 틀어 물고 되물었다.“이렇게 중요한 일이 어떤 일인데?”온하랑은 멈칫하곤 다시 말했다.“혹시 지금 내가 떠본다고 생각하는 거야?”‘대에 어디서 티가 난 거지?'온하랑의 말을 들으니 부승민은 더 확신했다. 그녀가 지금 자신을 떠보고 있다고 말이다.“응.”온하랑은 몇 초간 말을 대꾸하지 못했다.“꼭 내가 말해주기를 바라는 거야?”부승민은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그러면 안 돼?”온하랑은 멈칫하더니 코웃음을 쳤다.“흥, 부승민. 머리 좋네!”조금 이를 빠득 갈며 말하는 것 같았다.부승민은 나직하게 웃었다.“과찬이야.”사실 그녀의 연기는 완벽했다. 그도 속아 넘어갈 정도였으니까.다만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만약 온하랑이 자신이 온강호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평온하게 자신과 통화를 하며 그때의 일로 사과할 리가 없었다.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꼈던 호감이 반감했다.“대체 어느 부분에서 눈치챈 거야? 아니면 혹시 추서윤을 풀어준 것도 애초에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이유
“지금 당장 우리 집으로 와. 그럼 내가 숨소리 들려줄게. 어때?”부승민이 말했다.“흥, 꿈 깨셔.”이런 대화는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민망해지기에 온하랑은 더는 이어가지 않고 말을 돌렸다.“어머, 시간이 늦었네. 나 잘 거야. 끊을게.”“잘자.”부승민은 아쉬움이 뚝뚝 떨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잠깐만, 나 방금 뭔가 떠올랐어.”“뭔데.”“오늘 내가 본가에서 민재 오빠 와이프를 만났어. 임신하셨는데 나한테 민재 오빠가 여전히 밖에서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고 하시더라고. 좀 알아봐 줘. 민재 오빠가 밖에서 만나고 다닌다는 여자가 누군지.”부승민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민재 형이 정말로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건 확실해?”“어떤 여자랑 통화하는 걸 직접 들으셨대.”“그래, 알았어. 내가 사람 시켜서 알아보라고 할게.”통화를 마친 후 온하랑은 핸드폰을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스탠드를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그러나 부승민은 통화 기록을 빤히 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온하랑이 방금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어떤 생각에 잠긴 듯했다.부민재의 운전기사가 수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바로 불러 부민재를 지켜보라고 했다.부민재는 대부분 시간을 회사와 집에서 보냈다. 가끔 고객이나 친구 만나러 다른 곳에 가기도 했었다.이 사람들 중 부민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형수는 부민재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순간 책상을 툭툭 치던 부승민의 손가락이 멈추더니 머릿속에 조금 말이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추서윤이 정말로 온하랑을 증오해서 일부러 자신을 납치했던 납치범을 풀어준 걸까?'부민재의 외도는 그 여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여자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통화에서는 소청하를 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혹시...부승민의 안색이 어두워지고 바로 육광태에게 전화를 걸었다....다음 날 아침, 회장실 전담 비서들과 부승민에게 결재를 받으러 온 직원들은 부승민의 기분이
온하랑은 사실 점심 식사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들어보려고 온 것이다. 사진을 업로드하기 전에 최동철에게 한번 보여줬으니 당연히 심사할 때 그녀의 작품을 보고 점수도 매겼으리라 생각했다.최동철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아니, 다른 일이야.”온하랑은 의아했다.“어떤 일인데요?”최동철은 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몇 번 휙휙 조작하곤 온하랑 앞으로 내려놓았다.“혹시 이 남자, 아는 사람이야?”온하랑은 핸드폰 화면을 힐끔 보았다. 사진은 흐릿했지만 몇 명의 남자들이 중년 남자를 제압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자세히 보던 그녀의 두 눈이 점점 커지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녀는 흥분하면서 최동철을 보았다.“장국호?!”최동철은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만난 고객이 우연히 발견하고 잡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물어보러 온 거야. 네가 아는 사람인지 말이야.”온하랑은 믿을 수 없었다.민성주가 도망을 친 상황에서 장국호마저 다른 사람에게 잡혀버려 절망적이었다.그런데 최동철이 장국호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바로 장국호에 대해 최동철에게 말해주었다.그러자 장국호가 말했다.“우리 회사 고객이 지금 이 사람을 잡고 있어. 강남이랑 거리가 좀 많이 멀어서 며칠은 걸려야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다만... 누군가가 지금 이 사람을 노리고 있다고 들었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면서 납치해 가려고.”온하랑은 긴장한 얼굴로 최동철을 보았다.“동철 오빠, 구체적인 위치를 저한테 알려주면 안 돼요?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가고 싶어요. 아니면 제가 강남까지 데리고 오고 나서 경찰에 넘기면 안 될까요?”최동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 사람이 너한테 지금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아니까. 절대 다른 사람들이 납치하지 못하게 할 거야.”온하랑은 감격스러운 눈길로 그를 보았다.“고마워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 자요, 제가 한잔 따라 드릴게요.”그녀는 술병을 들어 최동철의
온하랑은 부선월을 무시하고 그대로 경찰서로 향했다.추서윤은 현재 경찰서에 있었다.경찰은 온하랑을 어느 한 취조실로 안내했다. 추서윤은 그곳에 의자에 결박되어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매서운 눈빛으로 온하랑을 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온하랑의 옆에 있는 경찰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그럼 얘기를 나누세요.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너무 길게는 대화하지 마시고요.”말을 마친 경찰은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갔다.취조실 안.추서윤은 온하랑을 매서운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눈에 살기도 담긴 것 같은 모습으로 소리를 질러댔다.“온하랑, 그때 나랑 얘기를 잘 끝냈으면서 다음 날에 바로 배신하고 나를 경찰에 신고해?!”온하랑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의자를 뒤로 빼내면서 추서윤의 맞은 편에 앉았다.“내가 뭘 배신했는데? 네가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민성주와 연락하고 있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넌 처음부터 증인으로 나설 줄 생각이 없었잖아!”“하! 웃기지 마! 그 사람은 날 납치했던 납치범이야. 내가 왜 그런 납치범한테 소식을 흘려?!”“네 통화 기록 전부 복구됐어. 그중에 민성주랑 통화했던 기록도 있더라.”온하랑은 담담하게 말하며 가소롭게 웃었다.“대처 내가 얼마나 미웠으면 뒤에서 납치범과 몰래 손을 잡고 있었던 거야?”추서윤과 최민식의 계획을 알아내기 위해 경찰들은 추서윤 핸드폰 모든 문자 메시지와 통화 기록을 복구했다.추서윤과 온하랑은 납치 사건과 교통사고 건에 관련된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청장은 이 형사 사건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고 복구된 추서윤의 핸드폰 기록에서 민성주의 번호를 발견했다.청장은 더욱 이해가 안 갔다. 추서윤이 이 정도로 온하랑을 증오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추서윤은 온하랑 몰래 뒤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납치했던 납치범마저 풀어주었다.온하랑의 말에 추서윤은 안색이 굳어졌다.그런 그녀를 온하랑이 빤히 보았다.“형사님이 그러던데, 네가 나 만나고 싶다고 말이야. 왜 불렀어
이미 이 지경이 된 이상 추서윤은 부승민과 했던 약속을 어기기로 했다.감방에 가는 건 죽도록 싫었으니 말이다.온하랑은 의심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보곤 뜸을 들였다.“그래서, 지금 너한테 내 약점이 한 개가 아니다?”그녀는 너무 궁금했다.자신의 어떤 약점이 추서윤에게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가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한 개가 아니라고 했다.“그렇다고 할 수 있지.”추서윤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거만한 모습을 보였다.온하랑은 몇 초간 침묵하곤 대답했다.“그래, 약속할게. 네가 쥐고 있는 내 약점을 하나 알려줘.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고 다시 널 찾아올게.”추서윤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래. 그럼 일단 하나를 알려줄게. 사실 넌...”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경찰이 들어왔다.“면회 시간이 끝났습니다. 온하랑 씨, 나오세요.”“...”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경찰을 보면서 웃으며 말했다.“조금만 시간을 늘려주시면 안 될까요? 5분이면 돼요.”경찰은 고개를 저었다.“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도 지시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라서요.”온마음은 뜸을 들이며 답했다.“알겠습니다.”그녀는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서윤을 힐끗 보며 말했다.“나중에 다시 올게.”재판이 열리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었다.“잠깐만...”추서윤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경찰이 끼어들었다.“참, 온하랑 씨. 누군가 온하랑 씨를 찾더군요.”“저를요?”온하랑은 되물으면서 밖으로 나갔다.대체 누가 경찰서까지 와서 그녀를 찾는 걸까?경찰청 로비로 온 온하랑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입구 쪽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는 형체를 발견했다.남자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정장 바지에 수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어깨도 넓었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옷차림도 깔끔했다.온하랑은 입술을 살짝 틀어 물며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사람마다 각기 특별한 취향이 있었다. 그녀도 그러했다.온하랑은 사실 부승민의 뒤통수와 목이 취향이었다.트렌드에 따라 대부분 남자들은 뒷머리를
부승민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온하랑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약점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 여자랑 거래하지 말고 차라리 나랑 해. 난 절대 널 다치게 할 리가 없으니까.”속마음과 말이 다른 버릇은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아니 고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가 좋아하니 말이다.특히 그녀가 침대에서 “싫어.”라고 할 때 더욱 좋아했다.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그를 째려보았다.그는 정말이지 거래를 참 잘했다.확실히 부승민과 거래하는 것은 추서윤과 거래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나았다.여하간에 추서윤은 그녀를 뼛속까지 증오할 뿐 아니라 자신을 납치했던 납치범까지 풀어주며 그녀를 해치려고 했으니 말이다. 만약 그런 추서윤에게 합의를 해준다면 나중에 또 그녀를 해치려 할지도 모른다.부승민이 원하는 거래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아맞힐 수 있었다. 남녀가 한 방에서 만나면 할 수 있는 것이었다.온하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승민의 미소도 점차 사라졌다.“설마 정말로 그 여자한테 합의해 줄 생각인 건 아니지?”온하랑이 바로 대꾸했다.“당연히 아니지. 내가 바보도 아니고.”말을 마친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부승민을 보았다.“그래도 명색에 네 전 여자친구인데 정말로 내가 합의 안 해주길 바라는 거야?”“그 여자는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가 있어.”부승민은 온하랑을 힐끗 보곤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빛이 다소 그윽해졌지만, 다시 미소를 지었다.“왜? 지금 일부러 나 떠보는 거야?”만약 그가 추측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추서윤이 감방에 가길 바랐다.“누가 떠봤다고 그래?”온하랑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을 돌렸다.“너랑 거래할 순 있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 추서윤을 사지로 내몰다가 막무가내로 나오면 어떡해?”“그러지 못할 거야.”추서윤이 감방을 간다고 해도 어차피 몇 년만 있으면 출소할 수 있었다.하지만 막무가내로 나오면서 온하랑의 약점을 퍼뜨리면 부승민은 그녀를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할 생각이다.자
온하랑은 살짝 머뭇거리며 답했다.“알았어.”그녀는 사실 회사로 오고 싶지 않았다.그곳엔 아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고 부승민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와 부승민은 이혼을 했지 서로 죽이고 싶어 안달 내는 원수 사이가 아니었다. 부씨 일가와 여전히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기에 두 사람이 같이 있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그저 그녀가 예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기사는 두 사람을 태운 채 지하 주차장까지 들어갔다.온하랑과 부승민은 VIP 전용 통로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장실이 있는 층까지 올라왔다.회장실은 대표실의 바로 위층에 있었다. 그랬기에 온하랑 전 직장 동료들을 마주치지 않았다.부승민의 비서는 바뀌지 않았다. 비서의 표정 관리도 완벽했다.부승민과 온하랑이 같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자리에 앉아 있던 비서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인사를 했다.연민우만 제외하고 말이다.그의 추측이 맞았다.부승민이 온하랑을 만나러 가기 위해 급하게 회사에서 나갔던 것이다.부승민은 비서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내 방으로 커피 부탁하지.”회장실로 들어온 온하랑은 먼저 주위부터 둘러보았다.“허, 네 방이 대표실보다 2배로 더 크네. 정말 멋져!”그녀의 모습에 부승민이 웃음을 터뜨렸다.“마음에 들어? 복귀하면 네 방도 이렇게 만들어 줄까, 어때?”“응, 싫어.”소파에 앉은 온하랑은 다리를 꼬았다.그녀는 현재 하루하루가 여유로웠다. 그런데 뭣 하러 굳이 출근하러 오겠는가?게다가 그녀는 가만히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SNS에 직접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여 여러 회사에서 그녀의 저작권을 사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다. 사진을 엽서로 인쇄하고 삽화로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쏠쏠한 벌이가 되었다.이때 비서가 노크하며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온하랑 앞으로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두어 걸음 물러나곤 말했다.“회장님, 10분 뒤 회의가 있습...”“나가.”“네.”비서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