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손가락은 옷소매를 꽉 쥔 채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이 층에는 온하랑과 김시연의 집 하나밖에 없었다. 집 밖으로는 바로 엘리베이터가 있고 엘리베이터 옆으로 소방 대피 통로가 있는 구조였다.주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저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의 잔잔한 소음만이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하지만 온하랑은 소방 대피 통로 문 뒤로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이 종이를 두고 간 사람이 그 뒤에 숨어 온하랑의 반응을 살피고 있을지도 몰랐다.온하랑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몸을 돌려 문을 굳게 잠갔다.그녀는 문에 등을 지고 기댄 채 온몸의 힘이 스르륵 풀려버렸다.몇 분 정도가 지나자 겨우 안정을 되찾은 온하랑은 그 종잇장의 사진을 찍어 관리 사무실 카카오톡으로 보내 CCTV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전에 살해 협박을 한 번 받았을 때 온하랑은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이번 일을 조사하는 데에도 큰 두려움을 갖지는 않았다.일이 이미 이렇게까지 된 판에 온하랑도 그저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온하랑은 휴대전화를 들어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통하자마자 온하랑이 바로 입을 열었다.“승민아, 나한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시아 데리고 돌아갈래? 요 며칠 동안은 시간이 없을 것 같아…”자신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든 별로 상관없었지만 부시아까지 끌어들여 큰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수화기 너머의 부승민이 말했다.“나 이미 너희 집 앞인데.”“먼저 돌아갈래?”“허.”“…”2분 정도가 지나자 문밖에서 또 한 번의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이번에는 인터폰으로밖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부승민과 부시아인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안심하고 문을 열어주었다.부시아는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바로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고양이에게 장난을 치며 웃
만약 단순한 장난이었다면 가장 좋은 결과일 것이다.만약 그게 아니라면…“응, 알겠어.”“맞다, 서우현 의뢰인은 찾아봤어?”“찾았어.”“누구야?”“… 온하랑.”육광태가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부승민이 순간적으로 흠칫하더니 옆에 있던 현관문을 슬쩍 바라보고는 물었다.“확실해?”“확실하고 말고를 넘어서 확신이야. 서우현한테 의뢰를 맡기기 전에 두 사람이 따로 만난 적도 있더라. 아마 의뢰하려고 만났겠지.”부승민이 침묵을 지켰다.온하랑이 사립탐정에게 그 시절 납치사건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니, 대체 왜일까?육광태가 웃으며 말했다.“에이, 제수씨가 아직 너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래서 알아보고 있는 거 아니야? 한번 계속 알아보라고 해. 어차피 지금 추서윤이랑 완전히 헤어진 거 아니야? 그럼 굳이 숨겨줄 필요도 없잖아.”지금 인터넷에는 그 납치사건에 대한 정보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선 부승민의 공로가 컸다.그러니 온하랑이 사립탐정을 찾아 의뢰를 맡긴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부승민이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나와 추서윤 사이가 지금 어떻든, 추서윤이 그 납치사건 피해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만약 이 일에 네티즌들에 의해 까발려지게 된다면 많은 사람은 물론 추서윤을 안타까워하겠지만 더 많은 시궁창 속 쥐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연예인 피해자에 대한 비판과 조롱, 비하를 일삼을 게 뻔했다.그때 그 일은 추서윤의 남자 친구로서 부승민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었다.부승민은 그날 납치사건에 관련된 모든 뉴스를 지워달라는 추서윤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한 번 약속을 한 이상 그것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부승민 역시 이 일로 추서윤을 협박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지금 추서윤의 처지도 자업자득인 격이었으니 부승민은 지금의 추서윤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품지 않았다.육광태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그건 그래.”통화를 마치고 부승민은 다시 온하랑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초엿샛날이 되자 김시연이 본가에서부터 돌아왔다.김시연은 캐리어를 한쪽에 치워둔 채 소파 위에 널브러져 귀찮은 듯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누가 봐도 한껏 지친 모습이었다.“왜 그래요?”온하랑이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건네주며 물었다.“어휴…”김시연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침묵을 지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온몸에서 우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모든 일에 항상 활력 넘치고 밝은 미소로만 대해왔던 김시연이었기에 온하랑은 이런 김시연의 모습을 처음 봤다.“시연 씨, 왜 그래요? 아저씨랑 아주머니 어디 아프시대요?”김시연은 눈을 내리깔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하랑 씨, 남자들은 혹시 하반신으로만 생각하는 동물인가요?”잠시 멈칫한 온하랑의 마음속에 안 좋은 예감이 피어올랐다.김시연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우리 아빠가 바람났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근데 밖에서 애까지 낳았대요. 글쎄 그 애가 벌써 대학생이래요! 어쩐지 자꾸 나한테 맞선 보라고 하더라니!”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정하게만 보였던 아저씨도 역시나…온하랑은 묵묵히 김시연을 끌어안으며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었다.“너무 슬퍼하지 말아요.”김시연은 가만히 온하랑의 어깨에 기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하랑은 천장을 바라보며 추억했다.“제가 엄청나게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이혼하셨거든요. 엄마가 떠나고 나서 다시는 안 돌아왔어요. 이미 엄마 얼굴이 기억이 안 나는데 함께 했던 추억들은 짧게 짧게 떠오르는 거 있죠… 사실 저도 뒤늦게 동네 사람들한테서 들은 건데요. 저희 엄마가 밖에서 다른 남자랑 바람이 났대요. 그래서 아빠가 엄마랑 헤어져 준 거라고 하더라고요….”“저도 한때는 정말 힘들고 막막하고 화나고 그랬어요. 그때는 만약 엄마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왜 그랬느냐고도 묻고 싶었어요…”온하랑이 잠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그런데 저한테는 만날 기회라곤 주어질 리가 없었어요. 엄마는 아마 나 같은
부승민이 BX 그룹으로 다시 돌아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회사 공식 계정에서 부승민이 그룹의 새로운 회장으로 등극한다는 소식을 발표했다.아마 BX 그룹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 듯했다.어쨌든 온하랑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예 휴대전화 전원을 꺼버렸다.“시아는 돌아갔죠?”“아니요. 안에서 자고 있어요.”온하랑이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저랑 같이 야외 스케치하러 가고 싶대요.”“주현 씨는 간대요.”“네, 진작 물어봤죠.”“그럼 저도 갈래요!”…모 클럽 내부.전자 모니터 위에 띄워진 숫자 “1”,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부승민이 안으로 들어서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던 그때 한쪽 팔이 안으로 쑥 밀고 들어왔다. 인기척을 감지한 센서가 빠르게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남색 정장을 입은 한 젊은 남자가 엘리베이터 입구에 서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남자의 팔꿈치에는 검은색 외투도 둘려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남자는 고개를 들어 그 안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부승민과 2초 동안 눈을마주쳤다. 이내 다시 눈을 내리깐 청년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옮겨 몸을 돌린 채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섰다.부승민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자신의 앞만 바라보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잠시만요.”청년은 곧바로 얇고 긴 손가락을 뻗어 열림 버튼을 눌렀다.연민우가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와 가슴께를 부여잡고 가쁜 숨을 내쉬며 옆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대표님, 휴대폰 갖고 왔습니다.”연민우는 그 말을 하며 휴대전화를 부승민에게 전해주었다.하지만 연민우가 계속해서 부승민에게 휴대전화를 건네보았지만 부승민은 받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당황한 연민우가 눈빛으로 부승민에게 눈치를 주었다.“대…”연민우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멎었다.연민우는 입을 떡 벌린 채 2초 정도 멍하니 서 있었다.눈앞에 있던 사람은 부승민이 아
연민우의 말문이 막혔다.연민우의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이 최동철이라는 사람은 온하랑이 해외에서 유학 중일 때 한인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사람으로 온하랑을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온하랑과 가까운 사이로 지내던 남자 중 한 명으로 어쩌면 온하랑이 예전에 낳았던 아이의 친아버지일지도 몰랐다.어쩌면 최동철이 부승민을 견제하는 이유가 바로 부승민이 온하랑 전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지 않을까.이번에 부승민이 BX 그룹으로 돌아온 수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최씨 집안이 비싼 값에 BX 그룹 대체에너지 프로젝트의 핵심인물들을 가로채 간 탓에 프로젝트에 전혀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프로젝트 진행이 하루씩 밀릴 때마다 손해 보는 금액은 정말 어마어마하다.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일전 부승민이 강력하게 밀고 나갔던 탓에 투자도 적잖이 받았고 부승민을 포함한 회사 고위층이 이 프로젝트를 쉽사리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어쨌든 절대 최동철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됐다.연민우가 부승민에게 최동철과 온하랑의 관계에 관해 얘기하려던 순간 엘리베이터가 정해진 층에 도착하고 문이 활짝 열렸다. 큰 보폭으로 엘리베이터를 벗어나는 부승민 탓에 연민우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다급하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이번 식사 자리는 한 과학기술회사의 인수합병을 위한 자리였다.부승민이 BX 그룹으로 돌아오자마자 제안한 이 인수합병 건은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임원진들의 허가를 받아냈다.위 질환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부승민은 술을 마시기에 적합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접대하는 내내 연민우가 부승민에게 가는 술을 막아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그 탓에 예상 했던 대로 연민우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접대 자리가 끝나자 부승민은 자신의 운전기사를 연민우를 집까지 데려다주도록 했다.술이 깨고 나니 연민우는 얘기하려고 했던 최동철에 관한 이야기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후였다.그날 저녁, 부승민은 비서에게서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
온하랑은 가방을 챙겨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로 2층으로 올라가 예약 해놓은 룸으로 들어갔다.모퉁이를 돈 온하랑은 계단을 오르며 고개를 들자 갑자기 2층 계단 입구 쪽에 나타난 사람을 마주쳤다. 바로 조금 전 마주쳤던 그 실루엣, 추서윤이 맞았다.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온 추서윤이 계단 난간에 기댄 채 얼굴에는 우아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눈은 깜빡도 하지 않은 채 온하랑을 똑바로 응시하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정말 네 차였어!”잠시 걸음을 멈칫한 온하랑은 계속해서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뭐지? 추서윤이 서서 날 기다리고 있는 날이 다 오네. 뭐 집안 얘기나 나누려고 찾아왔어?”“당연히 아니지.”웃으며 대답하는 추서윤의 눈빛에는 원망이 섞여 있었다.“특별한 선물이나 하나 줄까 싶어서—”말이 끝나기 무섭게 추서윤이 힘껏 온하랑을 손으로 밀쳤다.“아—”미처 피할 새도 없이 온하랑의 발이 공중으로 붕 뜨더니 그대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그 순간, 마치 하늘과 땅이 뒤섞이는 듯했다.온하랑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바닥에 고꾸라진 후였다. 극심한 고통에 그녀의 눈앞이 아득해졌다.뒤늦게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추서윤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온하랑의 몸 곳곳에서 정도가 다른 고통들이 느껴졌다.제일 아픈 부위는 바로 이마였다. 손을 뻗어 천천히 건드려만 보아도 밀려드는 고통에 얼굴마저 새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손가락에는 뜨겁고 비린내 나는 붉은 액체들이 잔뜩 묻어있었다.“아가씨, 괜찮으세요?”종업원이 뒤늦게 달려와 넘어져 있던 온하랑을 부축했다.“우선 거기 잠깐 앉아 계세요, 제가 구급상자 들고 올게요. 120 응급차 불러드릴까요?”오른쪽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발목 쪽에서 살려달라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곧 약속한 7시가 다 되어간다..“괜찮습니다. 대일밴드 있나요?
어쩐지.어쩐지 인터넷에서 그 사건에 관한 내용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더라니.어쩐지 추서윤이 당당하게 계단에서 확 밀더라니. 온하랑이 지금 추서윤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추서윤이 무슨 짓을 하든 함부로 신고할 수 없다는 걸 추서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그 순간, 온하랑의 사고회로가 뒤죽박죽 엉키더니 이미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았다.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피해자를 설득할지에 대해 확신이 있었던 온하랑이였다.하지만 그 납치사건의 피해자가 추서윤이었다는 사실은 온하랑에게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찾아온 온하랑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온하랑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추서윤이 나서서 증언해줄까?온하랑의 마음속에는 확인이 없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며 소파 곁으로 가 앉았다.“예전의 감정은 우선 넣어두고 얘기부터 하자. 너도 내가 너 무슨 목적으로 만나러 온 건지는 알고 있지? 난 네가 나서서 민성주가 그때 납치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증언을 해줬으면 좋겠어. 넌 그 사람들이 마땅한 처벌을 못 받았다는 생각 안 들어?”추서윤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넣어둬? 왜? 불과 며칠 전에 내 뺨을 때렸던 사람이 너야!”온하랑이 눈을 질끈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그 일은 내가 너한테 사과할게.”“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져?”추서윤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뭐, 내가 그때 너한테 맞았던 따귀 그대로 다시 돌려줄 수 있다면 말이 달라질지도 모르지.”침묵을 지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온하랑을 보며 추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온하랑, 넌 피 한 방울 안 섞인 부승민 회장을 위해서는 발 벗고 나서면서 네 아빠를 위해선 그깟 뺨 한 대도 못 맞아줘?”“그래, 때려.”온하랑은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추서윤의 앞에 섰다.추서윤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얼굴
온하랑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추서윤을 응시했다. 마음속에서 깊은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온하랑은 주먹을 꽉 쥐고 당장이라고 추서윤의 뺨을 갈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온하랑의 심장은 이미 반쯤 차게 식었다. 딱 봐도 추서윤 쪽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이 순간, 온하랑이 믿을 사람은 하재범뿐이었다. 온하랑은 그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길, 장국호를 데리고 무사히 귀국하기만을 바라야 했다.그 순간, 갑자기 온하랑의 휴대전화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확인해보니 하재범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아, 쒯! 장국호 잡았거든요? 근데 이 새끼 국경 넘을 때 튀었어요!”혹시라도 온하랑의 의심을 살까 봐 하재범은 장국호가 찍힌 몇 장의 사진들도 함께 첨부해 보내주었다.온하랑은 하재범에게서 온 사진을 유심히 관찰했다. 생긴 게 정말 수배 중인 장국호의 얼굴과 비슷해 보였다. 다행히 하재범이 사기꾼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지만 정작 잡아야 하는 장국호가 또다시 도주를 해버렸다.이번 도주는 전보다 더 면밀히 준비했을 게 분명했다. 전보다 수색이 더 어렵게 됐다.그 소식을 들은 온하랑은 심장이 절벽 끝까지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장국호를 잡는 쪽도 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여기서 이렇게 쉽게 복수를 멈출 수 없었다.온하랑은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고개를 들어 추서윤을 바라보았다.“나 만나러 여기까지 온 이유가 고작 내 부탁을 거절하기 위해서 온 건 아닐 텐데.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원하는 게 뭐야?”“온하랑 그래도 똑똑하네. 그럼 이제 내가 원하는 걸 얘기할게. 요즘 내가 금방 복귀를 했는데 말이야, 매니저 자리가 비었거든.”추서윤이 느긋한 태도로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와서 내 매니저 좀 해. 딱 한 달. 그 정도면 나도 증언해줄게.”온하랑은 추서윤의 말을 듣는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추서윤은 지금 매니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