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어쩐지 인터넷에서 그 사건에 관한 내용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더라니.어쩐지 추서윤이 당당하게 계단에서 확 밀더라니. 온하랑이 지금 추서윤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추서윤이 무슨 짓을 하든 함부로 신고할 수 없다는 걸 추서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그 순간, 온하랑의 사고회로가 뒤죽박죽 엉키더니 이미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았다.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피해자를 설득할지에 대해 확신이 있었던 온하랑이였다.하지만 그 납치사건의 피해자가 추서윤이었다는 사실은 온하랑에게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찾아온 온하랑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온하랑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추서윤이 나서서 증언해줄까?온하랑의 마음속에는 확인이 없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며 소파 곁으로 가 앉았다.“예전의 감정은 우선 넣어두고 얘기부터 하자. 너도 내가 너 무슨 목적으로 만나러 온 건지는 알고 있지? 난 네가 나서서 민성주가 그때 납치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증언을 해줬으면 좋겠어. 넌 그 사람들이 마땅한 처벌을 못 받았다는 생각 안 들어?”추서윤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넣어둬? 왜? 불과 며칠 전에 내 뺨을 때렸던 사람이 너야!”온하랑이 눈을 질끈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그 일은 내가 너한테 사과할게.”“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져?”추서윤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뭐, 내가 그때 너한테 맞았던 따귀 그대로 다시 돌려줄 수 있다면 말이 달라질지도 모르지.”침묵을 지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온하랑을 보며 추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온하랑, 넌 피 한 방울 안 섞인 부승민 회장을 위해서는 발 벗고 나서면서 네 아빠를 위해선 그깟 뺨 한 대도 못 맞아줘?”“그래, 때려.”온하랑은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추서윤의 앞에 섰다.추서윤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얼굴
온하랑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추서윤을 응시했다. 마음속에서 깊은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온하랑은 주먹을 꽉 쥐고 당장이라고 추서윤의 뺨을 갈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온하랑의 심장은 이미 반쯤 차게 식었다. 딱 봐도 추서윤 쪽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이 순간, 온하랑이 믿을 사람은 하재범뿐이었다. 온하랑은 그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길, 장국호를 데리고 무사히 귀국하기만을 바라야 했다.그 순간, 갑자기 온하랑의 휴대전화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확인해보니 하재범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아, 쒯! 장국호 잡았거든요? 근데 이 새끼 국경 넘을 때 튀었어요!”혹시라도 온하랑의 의심을 살까 봐 하재범은 장국호가 찍힌 몇 장의 사진들도 함께 첨부해 보내주었다.온하랑은 하재범에게서 온 사진을 유심히 관찰했다. 생긴 게 정말 수배 중인 장국호의 얼굴과 비슷해 보였다. 다행히 하재범이 사기꾼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지만 정작 잡아야 하는 장국호가 또다시 도주를 해버렸다.이번 도주는 전보다 더 면밀히 준비했을 게 분명했다. 전보다 수색이 더 어렵게 됐다.그 소식을 들은 온하랑은 심장이 절벽 끝까지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장국호를 잡는 쪽도 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여기서 이렇게 쉽게 복수를 멈출 수 없었다.온하랑은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고개를 들어 추서윤을 바라보았다.“나 만나러 여기까지 온 이유가 고작 내 부탁을 거절하기 위해서 온 건 아닐 텐데.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원하는 게 뭐야?”“온하랑 그래도 똑똑하네. 그럼 이제 내가 원하는 걸 얘기할게. 요즘 내가 금방 복귀를 했는데 말이야, 매니저 자리가 비었거든.”추서윤이 느긋한 태도로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와서 내 매니저 좀 해. 딱 한 달. 그 정도면 나도 증언해줄게.”온하랑은 추서윤의 말을 듣는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추서윤은 지금 매니저가
부승민은 온하랑을 차 뒷좌석에 태우고 자세히 살펴보았다.조금 붉게 부어오른 이마에는 아무렇게나 대일밴드를 덕지덕지 붙인 상태였고 발갛게 부어오른 왼쪽 얼굴에는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발은…그는 온하랑의 오른쪽 발을 들어 신고 있던 부츠를 벗기려 했지만 온하랑은 몸을 움츠리며 발을 뺐다. 온하랑의 종아리가 부승민에 의해 내리눌려졌고 신고 있던 부츠가 벗겨졌다.부츠를 벗으니 양말 너머로도 퉁퉁 부은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요약하자면 지금 온하랑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부승민의 눈빛이 심각해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 상처들은 다 뭐고? 누구한테 맞은 거야?”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한 온하랑이 대꾸했다.“신경 쓸 거 없어.”“온하랑!”부승민의 집요한 눈빛에 온하랑이 고개를 돌려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부승민은 착잡함과 분노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온하랑이 말을 안 한다고 부승민이 정말 모를까?대체 누구일까? 이런 수모를 당해놓고도 온하랑이 숨겨주는 사람이라니.접대 자리에서 부승민은 단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술을 다 마신 비서는 차를 태워 집까지 보냈고 부승민은 온하랑을 차에 태워 병원까지 직접 운전해 갔다. 병원에 도착한 부승민은 온하랑을 안고 먼저 정형외과로 향했다. 그녀를 의자 위에 앉힌 부승민은 의사에게 온하랑의 증상을 설명했다.온하랑의 오른쪽 발을 집어 들어 벌겋게 부어오른 쪽을 살살 누르며 진찰을 시작했다./“여기 이렇게 누르면 아파요?”온하랑이 대답했다.“조금이요.”“여기는요?”“조금요, 선생님, 살살 눌러주시면 안 될까요? 세게 누르면 엄청 아플 것 같은데요.”“아, 그래요? 그럼 더 세게 눌러드려야겠네.”의사가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온하랑 역시 의사의 말에 딱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저 딱딱한 진찰실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한 의사의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온하랑의 발목을 잘 고정한 의사는 곧바로 그녀의 발을 힘주어 꾹
부승민은 주방 입구에 서서 온하랑의 행동을 관찰하며 말했다.“아까 저녁에 말만 하느라 몇 입 먹지도 못했어. 나 물만두 좀 삶아줘.”온하랑은 고개를 돌리고는 그를 째려봤다. 부승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고는 거실로 떠났다. 그 순간, 식탁에 올려두었던 온하랑의 전화가 울렸다. 부승민이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잠금화면에서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동철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고 무슨 내용인지는 뜨지 않았다.부시아가 예전에 최동철은 온하랑이 등록한 사진 학원의 사진작가라고 했고 두 사람이 같이 촬영 장소 탐사를 나갈 것이라고 부승민한테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현과 부시아가 온하랑과 함께라서 부승민은 온하랑이 정말 촬영을 잘 배워보려는 마음인 줄 알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들어와서 그릇 좀 내가!”주방에서 온하랑의 외침이 전해져왔다. 부승민은 들어가서 한 손에 한 그릇씩 들고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온하랑은 바로 뒤따라 나왔는데 손에는 젓가락과 접시가 들려있었고 접시 안에는 식초랑 다진 마늘이 담겨있었다.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물만두를 먹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부시아는 보면 볼수록 먹고 싶어져 보다 못한 부승민이 깨끗한 그릇을 가져와 몇 개 덜어내 부시아의 그릇에 놓아줬다.식사를 마친 뒤 부승민은 더 이상 남아있을 핑계가 없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떠나야 했다. 그는 가기 직전에 신신당부하며 말했다.“이마에 상처 잊지 말고 제때 약 발라.”온하랑은 대답 없이 문을 닫았다.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부승민의 눈앞에는 문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는 겸연쩍은 듯 코를 문지르고는 엘리베이터에 앉아 차고로 향했다. 차에 앉은 뒤 그는 바로 시동 걸지 않고 온하랑이 오늘 저녁 레스토랑에서 있은 일을 알아보라고 연민우한테 문자를 보냈다.온하랑은 그릇들과 젓가락을 치운 뒤 노곤하게 소파를 파고들었다. 핸드폰 잠금을 해제해 보니 최동철한테서 문자가 와있었다.“왜 오늘 수업 안 왔어?”“죄송해요. 오늘 밤에 일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우리도 방금 도착했어.”최동철은 온하랑을 한번 스캔해 보더니 물었다.“이마에 상처 뭐야? 심한 거야?”“괜찮아요.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몇 년이나 안 봤는데 넌 여전히 대학 때처럼 예쁘네.”“무슨 소리예요.”온하랑은 부끄러운 듯 웃었다.“동철 오빠, 소개를 못 했네요. 이 두 사람은 제 친한 친구예요. 여기는 김시연 씨고 여기는 주현 씨예요. 주현 씨도 사진작가예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아이는 제 조카고요.”김시연은 웃으면서 얘기했다.“잘생긴 오빠, 안녕하세요! 전 김시연이라고 해요.”속상하다는 감정은 김시연 몸에서 오래 머무른 적이 없었다. 김시연은 늘 저절로 소화해 내 훌훌 털어버리고 명랑함을 되찾곤 했다. 주현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주현입니다.”최동철의 눈길이 김시연에게로 옮겨졌다가 멈칫했다. 이내 그는 주현을 바라보며 젠틀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전 하랑이 선생님이고 최동철이라고 합니다. 낭천에 도착하면 우리 같이 토론해 보죠.”제일 마지막 한마디는 주현에게 하는 말이었다. 주현도 웃으며 답했다.“저야 고맙죠.”최동철 뒤로는 금방 차에서 내린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주동적으로 다가와 자기소개를 했다.“예쁜 아가씨들 안녕하세요? 저는 최 선생님 어시예요. 이름은 이석이고요. 편하게 석이라고 부르시면 돼요.”온하랑의 눈썹이 꿈틀댔다.“그 시골의 이석 조교님인가요?”“네, 저 맞아요.”“시간이 늦었으니 다들 얼른 차에 타서 출발하죠?”최동철이 말을 꺼냈다.“그러죠.”일행은 각자의 차로 돌아가 낭천으로 향했다. 낭천은 바로 옆의 도, 강남 시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리적 위치와 지세 등 원인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사계절이 봄 같았다, 거기다 자연풍경이 아름다워 탐사를 나가기 적당한 도시였다.차 안에서 조수석에 앉아 있던 부시아가 뒷좌석의 온하랑을 돌아보며 말했다.“숙모, 저 차 주의 깊게 봤어요?”“응?”“내가 아까 봤을
오후 다섯 시경, 일행은 낭천에 도착했고 탑승했던 차는 일사천리로 이미 예약한 호텔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 온하랑은 차에서 내린 뒤 부시아를 안아 내렸다. 그리고 캐리어를 챙기고는 김시연과 주현을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김시연이 캐리어를 끌면서 주위를 둘러봤다.“그 사람들은요?”“차를 저쪽에 세워뒀을 거예요. 우리가 먼저 올라가서 체크인하죠.”온하랑의 대답에 김시연은 볼 부은 소리를 했다.“여기도 빈자리가 있는데 왜 굳이 저리로 가서 세웠대요.”“누가 알겠어요.”세 사람은 부시아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가 체크인했다. 카운터의 여직원은 신분을 입력하고는 방 키를 건넸다.“다 됐습니다. 여러분들 방 번호는 1605번이고요, 이쪽에서 엘리베이터 탑승하시고 16층에 도착한 뒤에 좌회전해서 네 번째 방이에요.”그들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거실 하나에 방이 세 개 딸린 방을 선택했다. 한 사람이 한 방을 차지하고 온하랑은 부시아를 데리고 한 방을 썼다.“네.”온하랑은 방 키를 가지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네 사람은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바로 옆 지하 1층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최동철 삼인방이 걸어 나왔다. 로비에 사람이 없는 걸 보고 이석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최동철 옆에 서 있는 젊은 남자를 보며 말했다.“아마 벌써 올라간 것 같아요.”“네.”젊은 남자는 무표정으로 말했다.방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모두 배가 고파질 때쯤, 온하랑이 입을 열었다.“우리 호텔 뷔페에 내려가서 먹죠?”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김시연이 냉큼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좋아요! 최동철 씨 일행도 부르죠.”온하랑은 눈썹을 꿈틀댔다.“그래요, 제가 물어볼게요.”“아, 저한테 연락처 좀 보내줘 봐요.”“그래요.”온하랑은 최동철에게 밥을 먹을지 문자를 보냈고 이내 그의 연락처를 김시연한테 보내주었다.“답장이 왔어요. 뷔페에서 보자네요. 얼른 가죠.”“네?”김
“시연아, 또 만나네? 새해 복 많이 받아.”연도진이 온화한 웃음을 띠며 김시연 옆의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김시연이 불편한 심기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일이 있어서. 넌?”연도진은 옆의 벽에서 종이 타월 두 장을 뽑아내 손을 닦았는데 하나하나의 동작이 화보 속 한 장면 같았다.“놀려고.”김시연은 딱딱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손의 물기를 털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 김시연의 팔을 연도진이 잡았다.“같이 밥 먹을 수 있을까?”“안 돼.”김시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화장실을 걸어 나갔다. 식사 자리에 돌아오니 온하랑은 그녀의 안 좋은 안색을 눈치채고 물어왔다.“무슨 일 있어요?”김시연은 콧방귀를 끼더니 말했다.“쓰레기를 봤더니 기분이 안 좋네요.”온하랑은 이내 누굴 얘기하는지 알아차렸다.“그 사람 여기 있어요?”“네.”김시연은 집히는 대로 두 입 먹더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전 안 먹을래요. 먼저 방에 돌아가려고요. 밤에 나갈 계획 있나요?”온하랑은 최동철을 바라봤고 최동철은 시계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8시에 나가서 야경 찍는 법 가르쳐 드릴게요.”“그래요, 그럼. 전 먼저 가서 좀 누워있을래요.”김시연은 핸드폰을 들고 자리를 떴다.“숙모, 저도 배불러요. 그만 갈래요.”부시아도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온하랑은 최동철을 향해 말했다.“그럼 우린 먼저 가볼게요. 이따 8시에 로비에서 봐요.”“그래.”온하랑 일행이 뜨자 자리에는 최동철과 이석 두 사람만 남았다. 이석은 머뭇거리다 말했다.“최 대표님, 아까 꼬맹이가 온하랑 씨한테 숙모라고 부르던데요.”“들었어.”최동철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온하랑 남편이 누군지 알아봐.”“네.”이때 연도진이 접시를 들고 걸어와 최동철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그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다 돌아갔어요?”“응.”이석이 놀리듯 말했다.“시연 씨가 화장실에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돌아가겠다던데요? 쓰레기를 봤다는지 하하하.
“...네...”연 비서는 숨을 참으며 겨우 대답했다. 부승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성큼성큼 사무실을 떠났다. 연 비서는 그제야 겨우 숨을 길게 내쉬고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호텔을 예약했다.온하랑 일행은 8시경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도시 외곽을 따라 걸으면서 셔터를 눌러댔고 김시연은 가끔 모델 역할을 해주었다. 매번 온하랑이 찍은 사진을 보며 부족한 부분을 최동철은 직접 시범해 보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부시아가 힘들어서 투덜대자 이석은 시아를 번쩍 안아 들고 걸었다.열 시가 조금 넘어서 호텔에 돌아와 세수를 마친 뒤 온하랑은 침대에 누워 오늘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다양한 지식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부시아는 이미 곯아떨어졌고 그녀도 핸드폰을 내려놓고 불을 끄고는 잠을 청했다.그날 밤, 이상하게도 온하랑은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자신이 꿈을 꾸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해도 깨어날 수 없었다. 꿈속에서 사람들과 둘러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면서 어떤 옷차림이 멋진 남자가 술잔을 들고 헌팅하러 왔다. 온하랑은 간단하게 넘기고 귀찮다는 듯 화장실로 갔는데 무심코 거울을 본 뒤 놀라서 깨어났다.눈이 크게 떠졌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방안은 칠흑같이 손을 내밀어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녀는 눈을 감고 아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은 마치 만삭의 임산부 같았는데 배가 불러있었다.아니,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꿀 수가 있지? 설마 아이가 너무 갖고 싶은 건가?온하랑은 가까스로 숨을 토해내고는 부시아가 그녀의 품에 안겨서 곤히 잠든 모습을 보며 손을 내밀어 아이의 볼을 꼬집었다. 하지만 꿈은 희한하게 최동철이 했던 얘기와 맞아떨어졌다. 그가 얘기한 다른 이야기들도 그녀를 속이는 것 같지 않았으나 그녀는 어떻게 머리를 쥐어짜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녀는 곰곰이 기억을 되새겼다. 그때, 머리에 날카로운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스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