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확인해 본 온하랑은 약간 놀랐다. 팬의 콩깍지가 아닌, 얼굴이 꽤 입체적인 정말 잘생긴 사람이었다.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속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만난 것 같지만 기억을 되짚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송이가 침대 위로 뛰어올라 온하랑에게 얼굴을 비볐다.송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온하랑은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다!어쩐지 동철이 익숙하다 했더니, 그의 눈매가 부승민과 매우 비슷해서였다.부씨 가문은 부승호부터 시작해서 부광훈, 부민재, 부현승까지 다 잘생긴 편이었다. 그들은 다 두부상이었다.부민재는 조금 부드러운 인상을 갖고 있어 소설에서 나오는 다정한 남자주인공 같았다.하지만 부승민은 부씨 가문의 유일하게 진한 인상을 가진 사람으로 눈매가 날카로웠다.부영훈의 사진을 본 그녀는 부영훈과 부민재가 꽤 닮았다고 생각했다.부승민의 눈매는 아마도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부승민의 어머니는 아마 아주 예쁜 여성일 듯했다. 다만 온하랑에게는 약간 신비한 사람이었다. 부승민조차도 어머니의 얼굴을 몰랐으니까 말이다.들은 바에 의하면 부영훈이 부승민을 밖에서 데려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승호도, 부광훈도, 부승민의 어머니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한다.동철의 외무는 부승민과 꽤 닮아있었다. 선이 분명한 얼굴을 빼면, 눈매 부분이 아주 비슷했다....일은 거의 다 해결되었지만 공급 업체에서 돈을 주지 않았다. 민지훈은 여전히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여섯 시 3분. 그는 아파트 부근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걸어가고 있었다. 늦은 밤이라 길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그때 민지훈은 갑자기 누군가의 비명을 들었다.“살려줘요! 거기 누구 없어요?”그는 정신을 차리고 귀를 기울였다. 비명은 앞의 골목에서 전해져 나오는 것이었다.민지훈은 앞으로 달려갔다. 어두운 골목은 사람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그저 몇 개의 실루엣이 보였고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민지훈은 경찰에 신고하면서 안으로 뛰어들며 소
민지훈은 주변에서 호텔을 잡았다. 그리고 서수현을 침대에 눕힌 후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봤다. 그의 얼굴에는 멍이 퍼렇게 나 있었다.민지훈은 요즘 바빠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워크샵을 갈 때에는 다 나을 것이다.이런 얼굴로 온하랑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약간 창피했다.주변에는 약국도 없었고 호텔에도 연고가 없었다.민지훈은 배달로 약을 시킨 후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이윽고 여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오지 마... 제발... 싫어...”민지훈은 얼른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 옆에 앉아 위로해주었다.“괜찮아요. 이미 쫓아냈어요.”서수현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민지훈을 와락 안고 눈물을 흘렸다.민지훈은 멍하니 있다가 서수현을 밀어내려고 했다.“저기...”서수현은 그래도 손을 놓지 않고 더 힘껏 민지훈을 안고 울었다.“너무 무서워요... 정말 너무 무서워요...”민지훈은 약간 흠칫하다가 손을 거두었다.아마도 너무 놀라서 이러는 것 같았다. 지금 밀어낸다면 더 큰마음의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그냥 이대로 안고 있게 놔두기로 했다....워크샵 당일, 모든 직원들은 가족 한 명을 데리고 회사 앞에 왔다.김시연은 차를 임시 주차장에 세우고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온하랑은 마스크를 쓰고 조수석에서 내렸다.그녀는 민지훈을 진심으로 좋아해서 사귀는 게 아니었기에 김시연에게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김시연의 고문 끝에 온하랑은 대충 얘기해줄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함께 그룹 입구로 걸어갔다.직원들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민지훈은 계단에 앉아 만두와 우유를 들고 있었다.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온하랑과 김시연을 보더니 환한 표정으로 바로 일어나 걸어갔다. “누나, 시연 누나도 왔군요!”김시연은 민지훈을 툭 치고 말했다.“민지훈. 우리 하랑이 데려갔으면 꼭 책임져요. 알겠어요?”“걱정하지 마요. 꼭 잘 대해줄 거니까요!”민지훈은 옆의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온하랑은 그저 입꼬
앞은 바로 왕대운의 창고다.코너를 돌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동료들은 호기심에 밖을 쳐다보았다.앞에 화물차 한 대가 있었는데 주변에는 크고 작은 택배 상자가 떨어져 있었다.창고 직원들은 얼른 그 택배들을 줍고 있었다.왕대운은 팔짱을 낀 채 길옆에 서서 이 모든 것을 짜증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한테 기다리라고 손짓했다.부현승이 일어나서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죠?”버스 운전기사가 말했다.“택배 운송 차량이 전복된 것 같습니다”부현승이 차에서 내려 왕대운과 말을 나누었다. 약 2분 후, 그는 다시 차에 돌아와 버스 기사한테 얘기했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처리한다고 합니다.”누군가가 물었다.“멀쩡한 화물차가 왜 전복됐대요?”“바퀴가 갑자기 터졌다네요.”부현승이 말했다.왕대운은 화가 나서 욕을 퍼부었다.“어떤 놈이 바닥에 압정을 가득 깔아놓은 거야!”민지훈은 왕대운을 보고 창문을 열고 인사하려고 했다가 이내 온하랑이 입술을 말고 슬픈 눈을 한 채로 왕대운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민지훈이 조심스레 물었다.“누나,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온하랑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입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표정을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몇 분 후, 버스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온하랑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고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진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기도 했고 일부러 민지훈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오전에 부문의 활동에 온하랑은 참가하지 않고 혼자 방에 있으면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점심을 먹을 때, 민지훈이 그녀를 데리러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민지훈은 온하랑이 밥을 얼마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누나, 왜 그래요? 기분 안 좋아요? 아니면 어디 아파요?”온하랑은 한숨을 내쉬었다.“기분이 안 좋아요.”“왜요? 처음에는 좋지 않았어요?”온하랑은 밥을 한입 먹고 말을 이어나갔다.“아까 올 때 택배 창고를 지났잖아요. 길에
온하랑의 질문에 민지훈도 열심히 생각을 떠올렸다.두 집안은 다 평범한 집안이니 왕대운이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렸을지는 정말 미지수였다.그때 그 시절에 누가 감히 그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려준 걸까. 돈을 들고 도망갈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말이다.이해가 되지 않은 민지훈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쳐다보았다.“누나, 혹시 아저씨가 이상한 곳에서 돈을 가진 거라고 생각해요?”온하랑은 담담하게 웃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한 거라는 걸 알아요. 그래도 음주운전으로 내 아버지를 죽인 사람한테 적대심을 갖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거든요.”“누나의 마음을 알아요. 아무리 아저씨가 실수라고 해도, 벌을 받았다고 해도 용서할 필요는 없어요. 어쨌든 아저씨 때문에 누나 아버님이 돌아가신 거니까요.”온강호가 죽지 않았다면 온하랑은 부승민 같은 쓰레기를 만날 일이 없었다.“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지훈 씨”온하랑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온하랑의 입에서 자기 이름을 들은 민지훈은 귀가 약간 빨개지고 마음이 설레였다.“아니에요. 누나는 내 여자친구니까 당연히 누나 입장에서 생각해야죠.”“하지만, 정말 저 아저씨한테 돈 많은 친구가 없어요?”온하랑은 밥을 먹으면서 신경 쓰지 않는 척 물었다.민지훈도 크게 의심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을 떠올렸다.“정말 없는 것 같은데요.”온하랑은 실망한 표정으로 밥을 계속 먹었다.“그 사람이랑 지훈 씨 아버님이 사이가 좋으니 돈을 빌려주신 건 아닐까요? 혹은 돈 빌리는 걸 도와줬다거나. 혹은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조건을 준 사람을 소개해준 건 아니에요?”“우리 아버지는... 아마 돈을 안 빌려주셨을 걸요? 제 아버지한테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준 사람은 어릴 때 딱 한 번 봤는데 그 후로는 다시 본 적이 없어요.”예상하던 대로였다. 배후는 그들을 해외로 빼돌린 후 연락을 끊었다.“얼굴 기억나요?”온하랑이 넌지시 물었다.“강남에 돈 많은 사람이 거기서 거기인데. 내가 알지도 모르잖아요.”“돈 많은 사
하지만 경찰은 장국호와 민성주 사이의 관계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장국호를 수배할 때 민성주를 가만히 뒀을 리 없었다.두 사람은 확실히 아는 사이다!하지만 민성주는 귀국할 수 있지만 장국호는 그럴 수 없었다.민지훈은 얼른 젓가락을 주워 옆에 놓은 후 온하랑에게 새로운 젓가락을 건네주었다. 온하랑은 진정하고 대답했다.“고마워요.”그녀는 민지훈을 향해 웃어 보인 후 그에게 고기를 짚어주었다.“장국호? 강남 사람이에요? 이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아니요... 국내가 아니라 아마도 양강에 있을 거예요.”양강은 두 판이라는 나라의 도시였다. 인구도 많고 경제도 좋으며 매우 번화한 도시였다.“그렇군요.”온하랑은 심장이 느리게 뛰는 것 같았다. 얼른 주제를 돌렸다.“사실 저번에 시연이랑 두 판으로 여행을 가려고 하다가 결국 노르빈으로 갔거든요.”장국호가 해외에 있는 한, 국내 경찰들이 그를 잡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양강에 있는 장국호를 찾아서 잡은 후 국내 경찰에게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법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양강으로 갔으면 우리는 못 만났을 거예요.”“장국호가 양강에 있으면 아버님이랑 아저씨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온하랑은 민지훈의 플러팅에 신경 쓸 새도 없었다.그저 장국호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민지훈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몰라요.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물어봐 줄까요?”온하랑은 뜨끔했다.민지훈이 돌아가서 민성주에게 묻는다면 위험했다. 민성주가 눈치챌 수도 있었다.경찰은 두 사람한테만 수배령을 내렸다. 다른 용의자는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만약 장국호와 민성주의 관계를 알고 토대로 조사한다면, 또 그녀 손의 사진과 더불어, 피해자까지 찾는다면 민성주를 체포할 수 있을 것이다.온하랑은 생각하다가 얘기했다.“사람을 시켜서 왕대운 씨의 재산에 대해 조사할 거예요. 아버님은 그 사람이랑 친구니 내 편을 들어주지는 못하더라도 날 팔지는 말아줘요. 알겠죠?”“당연
민지훈은 고개를 들고 여자를 보고 웃었다.“수현 씨, 우연이네요?”서수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민지훈 곁의 온하랑을 무시해 버린 채 부드럽게 말했다.“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전 친구랑 놀러 왔거든요.”“전 회사 워크샵 때문에요.”“며칠 전, 그날 밤. 호텔까지 데려다줘서 정말 고마워요. 상처는 괜찮아졌어요?”민지훈은 온하랑의 눈치를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많이 괜찮아졌어요. 수현 씨는 경찰에 얘기했어요?”온하랑은 밥을 먹다가 호기심에 두 사람한테로 시선을 돌렸다..호텔?“이미 진술을 기록했어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지훈 씨가 없었다면 전... 하... 정말 너무 감사드려요.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서수현은 눈물을 글썽이며 민지훈을 쳐다보았다.온하랑은 서수현이 민지훈을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챘다.“보답할 필요 없어요. 해야 한 일인데요.”민지훈은 온하랑을 가리키며 얘기했다.“소개해 드릴게요. 여기는 제 여자친구인 온하랑이에요. 누나, 여기는 서수현 씨에요.”온하랑은 서수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서수현은 그제야 온하랑을 발견한 것처럼 눈썹을 치켜세웠다.“온하랑 씨, 안녕하세요. 지훈 씨 여자친구였군요. 전 지훈 씨 누나인 줄 알고...”“확실히 나이는 더 많긴 해요.”“아하, 요즘은 연하도 괜찮죠.”서수현이 웃으면서 민지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만할게요. 식사 계속하세요.”서수현은 돌아가면서 온하랑이 생각보다 카메라를 잘 안 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실물은 사진보다 훨씬 예뻤다. 그러니 부승민이 그녀한테 매달리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쓰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온하랑은 서수현의 뒷모습을 보다나 시선을 거두고 계속 밥을 먹었다.그러다가 그녀는 자기가 너무 담담한 것 같아서 질투는 하지 않더라도 민지훈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 떠올라 부드럽게 물었다.“며칠 전에 다쳤어요?”민지훈은 이런 관심을 좋아했다. 그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전에 깡패
“괜찮아요. 부현승 씨가 지훈 씨를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것도 기회니까 얼른 가봐요.”민지훈은 친구들이 여자친구와 이런 문제로 싸우는 것을 자주 보았다. 하지만 그들에 비하면 온하랑은 그의 업무를 지지해 주었다.“고마워요, 누나. 먼저 온천까지 바래다줄까요?”그는 온하랑을 보면서 자기 안목을 칭찬했다.젊고 예쁘고 성숙하고 사람 마음을 잘 헤아려주고 여러 방면에서 도와줄 수 있는 누나를 만나서 기쁠 따름이었다.“안 갈래요. 여기 좀 앉아있으려고요.”“그래요. 난 먼저 갈게요.”민지훈은 먼저 정자를 떠났다.온하랑은 그 자리에 서서 앞에 핀 꽃들을 보며 사진을 찍었다.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왜 다시 왔어요?”대답은 들리지 않았고 발걸음 소리만 점점 더 커졌다.온하랑은 수상함을 느끼고 돌아서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꽉 안았다.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껴안았다.“이거 놔요!”놀란 그녀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얼른 반항하며 벗어나려고 했다.뒤의 남자는 코웃음 치더니 큰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잡은 채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난간으로 몰아붙였다.“움직이지 마.”“부승민?”“왜? 민지훈이 아니라 실망했어?”부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면 부승민은 속이 타들어 갔다.게다가 아까, 부현승이 전화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이미 키스했을 것이다.이런 젠장!온하랑은 대답하지 않고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왜 여기 있는 거야. 부현승이 알려줬어?”“응. 그럼 넌 여기 와서 뭐 하려고.”“온천욕 하러 왔지.”“온천욕? 민지훈이랑 같이?”부승민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민지훈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부현승한테 워크샵에 가족 동행을 가능하게 만들어서라도 온천욕이 하고 싶어? 정말 계획적이야. 이제 며칠이 지났다고 그렇게 몸이 달아올라?”온하랑은 그제야 부현승이 그 소식을 부승민에게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민지
“변태야?”온하랑은 앞으로 가면서 엉덩이를 그한테서 떼어냈다. 부승민은 얼른 다시 몸을 겹쳐오면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너도 하고 싶잖아.”“아니야!”온하랑은 정신을 차리고 바로 부인했다.“날 놓아줘!”“아니라고?”부승민이 낮은 소리로 되물었다. 매력적인 보이스가 온하랑의 귀를 두드려 그녀를 유혹하려 했다.하지만 온하랑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응.”뒤의 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온하랑은 약간 긴장했지만 이내 벗어나기 위해 약간 움직여 보았다.부승민이 갑자기 얘기했다.“확인해 보자.”온하랑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라서 뛰었다.“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거야!”“내기하자. 만약 내가 진다면 앞으로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게.”부승민은 이어서 얘기했다.“물론 내가 이기면 오늘 밤 넌 내꺼야. 어때?”“싫어! 내가 왜 내기를 해?”“못하는 건 네가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지. 안 그래?”“아니야! 그냥 너랑 내기하고 싶지 않아서야!”“겁쟁이. 나한테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데 안 할 거야?”“몇 번이나 매달리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약속 안 지켰잖아. 이제는 안 믿어.”부승민이 흠칫했다.이제 온하랑은 그의 조건을 믿지 않는다.“그럼 바꾸자. 내가 지면 오늘 저녁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움직이지 않을게. 어때?”온하랑은 숨을 멈췄다. 3년 동안, 침대에서는 부승민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그녀는 부승민을 침대에 눕혀 하고 싶은대로 하는 상상을 잠깐 해보았다.‘함정이다!’온하랑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싫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너랑 내기하지 않을 거야, 얼른 날 놔줘! 안 그러면 화낼 거야!”부승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온하랑이 함정에 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었다.“시아도 왔어. 너랑 온천욕 하고 싶대.”부승민의 품에서 벗어난 온하랑은 뒤로 물러나서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부승민을 쳐다보았다.“정말? 날 속이는 거 아니지?”“못 믿겠으면 전화 쳐봐.”“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