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뭐라고 했어?”부승민이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응시했다.온하랑이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무 말도 안 했어. 잘못 들었나 보네. 휴대폰 돌려줘!”온하랑은 강경한 태도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어쨌든 휴대전화에는 비밀이 많았고 온하랑은 그것들을 부승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만약 부승민이 온하랑의 휴대전화로 민지훈에게 이상한 메시지라도 보내면 이때까지의 노력이 모두 수포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그리고 온하랑은 부승민이 자신과 서우현의 채팅 기록을 보고 민지훈에게 접근한 목적을 알아채기라도 할까 봐 그게 두려웠다.온하랑이 사실 민지훈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 부승민은 그 전보다 더 심하게 온하랑을 꽉 붙잡고 절대 놓아주려 하지 않을 테니.“휴대폰이 그렇게 중요해?”온하랑의 마음속에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그녀는 큰 두 눈을 부릅뜨고 부승민을 째려보더니 깊게 숨을 들이쉬며 겨우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어차피 지금 어디 가지도 못하는데 휴대폰 돌려준다고 해도 별 쓸모는 없겠다.”부승민은 무언가 떠오른 듯 눈빛이 반짝이더니 온하랑을 가만히 응시했다.“뽀뽀 해주면, 휴대전화 돌려줄게.”부승민의 말투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우월감까지 느껴졌다.온하랑은 놀란 나머지 턱까지 빠질 뻔했다.그녀는 놀란 눈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그 놀라움의 눈빛이 경멸스러움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부승민, 넌 진짜 또라이야!”“넌 그냥 나한테 뽀뽀할 건지 안 할 건지 대답만 해.”화가 난 온하랑이 그대로 이를 악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경계심이 온몸의 털이 바짝 선 고양이가부승민에게 하악질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결정했어? 나 병원 가봐야 하는데.”부승민은 일부러 당장이라도 출발할 듯한 기세를보였다.보폭이 큰 편이었던 부승민은 몇 걸음 안 가 곧장 거실 현관에 도착했다.온하랑은 부승민이 현관을 열고 나가려던 그 순간, 등 뒤에서 부승민을 불러 세웠다.“잠깐만!”온하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 확인했다. 어제 확실히 민지훈과 김시연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었다.부승민이 그녀 대신 대답했다. 그리고 김시연에게 돌아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그가 이상한 얘기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게다가 부승민이 그녀와 서우현의 대화 기록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오늘 아침, 민지훈은 또 문자를 보냈다. 아침 7시 32분에 햇살 이모티콘과 함께 보낸 문자였다.[좋은 아침이에요. 누나.]그리고 이제 거의 8시가 된 시점에 온하랑이 답장했다.[너도 좋은 아침이야.]얼마 지나지 않아 민지훈은 온하랑에게 문자를 보내 출근 중이라고 했다.온하랑은 감기에 걸린 일을 얘기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얼마 지나지 않아 김시연은 별장으로 왔다. 그녀가 든 종이가방에는 온하랑의 옷이 있었다.온하랑이 김시연을 부른 것이었다.멍청한 부승민. 정말 내가 이곳에 앉아있기만 할 줄 알아?김시연은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시아가 아래층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문을 닫은 후에야 한숨을 내쉬었다.“부지런은 정말 사악해. 이거 봐. 계속 엮이면 더 힘들어진다니까. 이번에는 몰라도 다음에 널 다시 가두면 어쩌려고. 시아가 귀여운 건 알아. 나도 시아를 귀여워하고. 하지만 네 생각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시아가 네 아이도 아니고. 네가 평생 키울 것도 아니잖아.”온하랑이 침묵하더니 말했다.“너 오늘 출근해?”사실 그녀는 그녀와 부승민 사이에 부시아가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부시아가 없다고 해도 부승민은 계속 그녀한테 매달릴 것이다.다른 방법으로, 계속해서 궁리해서 그녀를 따라다닐 것이다.온하랑이 이곳을 완전히 떠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온하랑은 부선월처럼 이민 생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복수를 완성한 후의 일이다.김시연은 시계를 보더니 숨을 들이켰다.“아, 지각이다! 난 얼른 갈게!”김시연이 떠난 후, 온하랑은 밖으로 나갔다.부시아는 같이 나갈 수 없어 실망했다.온하랑은 돌아와서 같이 점심을 먹겠다
온하랑은 부현승과의 대화를 끝낸 후 컴퓨터로 요즘 찍은 모든 사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시합에 참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물론 이쪽으로 재능이 있긴 하지만 무턱대고 재능만 믿을 게 아니었다. 온하랑은 사진을 처리해서 주현에게 보내주었다.[주현 씨, 이건 내 작품이에요. 시간 되면 봐줘요.]주현이 바로 대답했다.[OKOK!]주현이 또 물었다.[어디로 참가할지는 결정했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아직요.]사실 그녀는 사진 시합의 그룹채팅방에 들어갔다. 안에서는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교류하고 있었다. 온하랑은 가끔 작품 한두 개를 올려 평가받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평가해 주기도 했다.그녀는 꽤 만족스러운 사진을 그룹에 올리면서 물었다.[여러분, 이 사진 어떤 부분을 더 고치면 좋을까요?]그룹 채팅 안의 사람들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칭찬하기에 급급했고 어떤 사람들은 색채나 구조 면으로 자기 생각을 말해주기도 했다. 이윽고 또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카메라 새로 사신 거예요?]온하랑이 대답하기도 전에 수많은 메시지가 올라왔다.[아이언맨?][헐! 아이언맨! 드디어 나타났다!][정말 아이언맨이야?][사랑해요!]...메시지가 수도 없이 쏟아졌다. 어느새 그룹 채팅방에는 ‘아이언맨’에 대한 칭송이 가득했다.온하랑은 멍하니 보다가 아까 그 문자를 보낸 사람이 이 그룹 채팅의 관리자인 ‘동철’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이 반응을 봤을 때 동철이라는 사람은 꽤 실력 있는 사진작가 같았다.온하랑은 바로 대답했다.[얼마 전에 산 카메라이긴 해요. 어떻게 아신 거예요?]솔직히 그녀는 쏟아지는 메시지 속에서 동철이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인차 대답해 주었다.[스모그는 찍기 어려운 거예요. 사진 속의 흑백 구도는 꽤 좋아요. 일정한 심미관이 있는 거죠. 하지만 확연한 실수가 몇 개 있는데 특히 스모그의 노출 정도와...][알겠습니다!]온하랑이 대답했다.아래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보
그룹 채팅의 동철에 대해 온하랑은 네이버와 인스타에서 알아보았다.동철의 본명은 최동철로 올해 31살이었는데 앞의 두 사람보다 많이 젊은, 새로운 세대의 사진작가였다. 전에 산하 국제 촬영 대회에서 특등상을 받은 작품의 주인이기도 했다. 주요하게 인물과 배경의 결합을 좋아하고 배경으로 인물을 살려주고 인물로 배경을 살려주는 일석이조의 촬영 기법을 다루고 있었다.수업 소개까지 본 온하랑은 세 개 수업 다 특색이 있고 시작하는 시간도 비슷해서 선택 장애가 왔다.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핸드폰을 거두고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점심이 되었으니 부시아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한다. 그리고 부승민의 차도 원위치에 돌려놓아야 한다.점심을 먹은 후 온하랑은 약을 먹었다. 그리고 잠이 몰려와 침실로 가서 누웠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두 시였다. 민지훈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누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거부터 들을래요?]온하랑은 좋은 소식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좋은 소식은 우리 부문에서 휴가 전 이틀 동안 온천 리조트에 가서 논대요! 사람마다 가족을 한 명씩 데리고 올 수 있대요!]온하랑은 민지훈의 말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놀란 척했다.[정말요?][네! 누나! 나랑 같이 가요. 걱정하지 말아요. 여자 동료들도 있으니까요.][그래요. 덕분에 나도 온천욕을 할 수 있겠네요. 고마워요.][고맙긴요.][부현승 씨가 얘기한 거예요?][네! 저희 매니저님 엄청 좋죠!]온하랑은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그러네요. 그럼 나쁜 소식은 뭐에요?][나쁜 소식은 바로 휴가 전에 바빠서 누나랑 놀 수 없을 것 같다는 거예요.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휴가가 끝나면 찾아갈게요.]온하랑이 대답했다.[괜찮아요. 아직 젊으니 사업이 우선이죠.]그녀는 그녀가 부현승을 좋은 사람이라고 동의했을 때, 부현승이 바로 이 소식을 부승민에게 전달했을 줄은 몰랐다.부승민은 핸드폰을 쳐다보면서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주변의 온도조차 점점 떨어지는 것
연민우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계속 보고했다.“그룹은 올해 강남에 테마파크 몇 개에 투자하려고 합니다. 초보적인 계획이 나온 후 최씨 가문도 그 땅과 연관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더 있어? 없으면 나가봐.”“...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연민우는 서류를 덮은 후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갔다.부승민은 몸을 일으켜 창문 옆으로 와 서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모든 일을 마친 후 그는 핸드폰을 꺼서 주머니에 넣었다. 창문 옆에 선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일이 일어나도 온하랑이 민지훈을 계속 좋아할지. 부승민은 제 자리에 서 있다가 외투를 들고 병실을 나섰다.몇 걸음 떼자마자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부승민 씨?”부승민은 멈춰서서 돌아보았다.“의사 선생님.”“확인해 봤는데 이제 수술 가능하십니다. 언제 하실 건가요?”의사가 물었다.“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일단 보수적으로 치료하려고요.”부승민이 말했다.그는 원래 수술을 하려고 했다. 다만 온하랑과 민지훈이 정말 사귀었을 줄은 몰랐다.그럼 그가 수술하고 누워있는 동안 온하랑과 민지훈은 모든 진도를 다 나갈 것이 아닌가!의사는 약간 놀라더니 이윽고 말했다.“그것도 좋죠. 아직 젊으니 위를 떼어내는 건 좋은 일이 아니거든요.”...부승민이 병원에서 더윈파크힐로 왔을 때, 온하랑은 이미 없었다.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부승민에게 종이로 메시지를 남겨주었다.[내가 정말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바보!]그리고 뒤에 바보라는 그림도 그려주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을 생각하니 약간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또 민지훈과 온천에 가려던 온하랑을 생각하니 바로 표정이 굳어버렸다....온하랑은 집의 침대에 누워 촬영 수업의 역대 작품과 평가를 보고 있었다.주현이 답장했다.[하랑 씨, 작품을 봤는데...]주현은 자기의 의견을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였다.[인물과 자연 분류를 선택하는 게
사진을 확인해 본 온하랑은 약간 놀랐다. 팬의 콩깍지가 아닌, 얼굴이 꽤 입체적인 정말 잘생긴 사람이었다.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속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만난 것 같지만 기억을 되짚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송이가 침대 위로 뛰어올라 온하랑에게 얼굴을 비볐다.송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온하랑은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다!어쩐지 동철이 익숙하다 했더니, 그의 눈매가 부승민과 매우 비슷해서였다.부씨 가문은 부승호부터 시작해서 부광훈, 부민재, 부현승까지 다 잘생긴 편이었다. 그들은 다 두부상이었다.부민재는 조금 부드러운 인상을 갖고 있어 소설에서 나오는 다정한 남자주인공 같았다.하지만 부승민은 부씨 가문의 유일하게 진한 인상을 가진 사람으로 눈매가 날카로웠다.부영훈의 사진을 본 그녀는 부영훈과 부민재가 꽤 닮았다고 생각했다.부승민의 눈매는 아마도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부승민의 어머니는 아마 아주 예쁜 여성일 듯했다. 다만 온하랑에게는 약간 신비한 사람이었다. 부승민조차도 어머니의 얼굴을 몰랐으니까 말이다.들은 바에 의하면 부영훈이 부승민을 밖에서 데려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승호도, 부광훈도, 부승민의 어머니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한다.동철의 외무는 부승민과 꽤 닮아있었다. 선이 분명한 얼굴을 빼면, 눈매 부분이 아주 비슷했다....일은 거의 다 해결되었지만 공급 업체에서 돈을 주지 않았다. 민지훈은 여전히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여섯 시 3분. 그는 아파트 부근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걸어가고 있었다. 늦은 밤이라 길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그때 민지훈은 갑자기 누군가의 비명을 들었다.“살려줘요! 거기 누구 없어요?”그는 정신을 차리고 귀를 기울였다. 비명은 앞의 골목에서 전해져 나오는 것이었다.민지훈은 앞으로 달려갔다. 어두운 골목은 사람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그저 몇 개의 실루엣이 보였고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민지훈은 경찰에 신고하면서 안으로 뛰어들며 소
민지훈은 주변에서 호텔을 잡았다. 그리고 서수현을 침대에 눕힌 후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봤다. 그의 얼굴에는 멍이 퍼렇게 나 있었다.민지훈은 요즘 바빠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워크샵을 갈 때에는 다 나을 것이다.이런 얼굴로 온하랑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약간 창피했다.주변에는 약국도 없었고 호텔에도 연고가 없었다.민지훈은 배달로 약을 시킨 후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이윽고 여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오지 마... 제발... 싫어...”민지훈은 얼른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 옆에 앉아 위로해주었다.“괜찮아요. 이미 쫓아냈어요.”서수현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민지훈을 와락 안고 눈물을 흘렸다.민지훈은 멍하니 있다가 서수현을 밀어내려고 했다.“저기...”서수현은 그래도 손을 놓지 않고 더 힘껏 민지훈을 안고 울었다.“너무 무서워요... 정말 너무 무서워요...”민지훈은 약간 흠칫하다가 손을 거두었다.아마도 너무 놀라서 이러는 것 같았다. 지금 밀어낸다면 더 큰마음의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그냥 이대로 안고 있게 놔두기로 했다....워크샵 당일, 모든 직원들은 가족 한 명을 데리고 회사 앞에 왔다.김시연은 차를 임시 주차장에 세우고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온하랑은 마스크를 쓰고 조수석에서 내렸다.그녀는 민지훈을 진심으로 좋아해서 사귀는 게 아니었기에 김시연에게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김시연의 고문 끝에 온하랑은 대충 얘기해줄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함께 그룹 입구로 걸어갔다.직원들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민지훈은 계단에 앉아 만두와 우유를 들고 있었다.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온하랑과 김시연을 보더니 환한 표정으로 바로 일어나 걸어갔다. “누나, 시연 누나도 왔군요!”김시연은 민지훈을 툭 치고 말했다.“민지훈. 우리 하랑이 데려갔으면 꼭 책임져요. 알겠어요?”“걱정하지 마요. 꼭 잘 대해줄 거니까요!”민지훈은 옆의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온하랑은 그저 입꼬
앞은 바로 왕대운의 창고다.코너를 돌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동료들은 호기심에 밖을 쳐다보았다.앞에 화물차 한 대가 있었는데 주변에는 크고 작은 택배 상자가 떨어져 있었다.창고 직원들은 얼른 그 택배들을 줍고 있었다.왕대운은 팔짱을 낀 채 길옆에 서서 이 모든 것을 짜증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한테 기다리라고 손짓했다.부현승이 일어나서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죠?”버스 운전기사가 말했다.“택배 운송 차량이 전복된 것 같습니다”부현승이 차에서 내려 왕대운과 말을 나누었다. 약 2분 후, 그는 다시 차에 돌아와 버스 기사한테 얘기했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처리한다고 합니다.”누군가가 물었다.“멀쩡한 화물차가 왜 전복됐대요?”“바퀴가 갑자기 터졌다네요.”부현승이 말했다.왕대운은 화가 나서 욕을 퍼부었다.“어떤 놈이 바닥에 압정을 가득 깔아놓은 거야!”민지훈은 왕대운을 보고 창문을 열고 인사하려고 했다가 이내 온하랑이 입술을 말고 슬픈 눈을 한 채로 왕대운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민지훈이 조심스레 물었다.“누나,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온하랑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입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표정을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몇 분 후, 버스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온하랑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고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진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기도 했고 일부러 민지훈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오전에 부문의 활동에 온하랑은 참가하지 않고 혼자 방에 있으면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점심을 먹을 때, 민지훈이 그녀를 데리러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민지훈은 온하랑이 밥을 얼마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누나, 왜 그래요? 기분 안 좋아요? 아니면 어디 아파요?”온하랑은 한숨을 내쉬었다.“기분이 안 좋아요.”“왜요? 처음에는 좋지 않았어요?”온하랑은 밥을 한입 먹고 말을 이어나갔다.“아까 올 때 택배 창고를 지났잖아요. 길에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