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연은 저녁을 잘 먹으면서 재밌게 대화를 나눴다.그러다가 강혜령이라는 동창이 말했다.“맞다, 시연아. 그거 들었어? 연도진 귀국했다던 거 같은데. 오늘 올 거래.”그 이름을 들은 온하랑은 김시연을 쳐다보았다.연도진. 그게 바로 김시연과 그녀의 라이벌이 같이 짝사랑했던 남자의 이름이다.김시연은 약간 흠칫하더니 얘기했다.“그래? 그럼 오라고 하지.”그녀의 눈은 약간 흐리멍텅했다. 머릿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그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선명해진다.강혜령이 또 말했다.“오랫동안 못 만났지? 그때 너랑 이슬비가 얼마나 연도진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었냐. 난 너랑 연도진이 사귈 줄 알았어. 그런데 연도진이 해외로 나가니까 이슬비도 나갔더라? 이번은 이슬비가 주최한 동창회라던데 그래서 연도진도 온대.”“그래?”옆의 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설마 두 사람 사귀는 건 아니겠지?”강혜령은 김시연을 흘깃 보고 말했다.“글쎄. 두 사람이 해외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으니까. 이슬비도 계속 솔로였고. 딱 봐도 연도진 때문이잖아. 귀국해서 동창회를 연다는 건,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김시연은 몰래 눈을 흘겼다. 허벅지 위에 놓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다른 여자가 끼어들어 얘기했다.“그래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니까. 마지막 승자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몰라.”김시연은 표정이 굳어서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차갑게 웃었다.“남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간 것도 이긴 건가?”그 여자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김시연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하필 이때 룸의 문이 열렸다.문 앞에는 25세 좌우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키는 180 이상으로 보였다. 그는 목폴라에 정장 바지를 입고 코트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잘생긴 얼굴에 금테 안경까지 더해지니 정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본 후 김시연을 힐긋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얘기 나누고
두 사람이 같이 서 있었다. 모두 다 예뻤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김시연에게 더욱 많이 집중되었다.생얼을 본다면 두 사람 다 비슷했지만 김시연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니 자기 얼굴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그에 맞는 메이크업을 해서 그녀의 분위기를 잘 드러낼 수 있었다.김시연은 눈을 뜨고 이슬비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단톡방에서 그렇게 도발하더니. 내가 오니까 두려운가 봐?”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약간 어색해졌다.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김시연의 성격은 그대로였다.사람들은 다들 연도진과 이슬비가 사귈 거라고 생각했다.1등과 2등이니까.하지만 연도진과 김시연이 사귀다니.1등과 꼴찌의 만남이다.과묵한 사람과 시끄러운 사람의 만남이다.그때 반에는 김시연과 대적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김시연의 별명 중에는 저승사자도 있었다.하지만 연도진 앞에서 저승사자는 그저 귀여운 양이 되었다.이슬비는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너 도진이랑 오랫동안 못 만났지? 도진아, 시연이 여기 있어. 아무리 그래도 사귀었던 사이인데 인사라도 할래?”연도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김시연은 보면서 천천히 걸어왔다.기억 속의 마른 몸은 이제 성숙한 남자의 몸이 되었다. 금테 안경은 과묵한 그의 성격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주는 것 같았다.김시연은 연도진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안경 너머, 연도진의 눈빛은 많은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김시연이 차갑게 얘기했다.“해외에서 안 먹히니까 돌아온 거야?”연도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아직도 널 데려갈 남자는 없는 모양이지?”사람들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이슬비가 갑자기 웃었다.“시연아, 농담도 참. 도진이는 투자 업계의 신이야. 먹히지 않다니. 헤어진지 오래됐는데 설마 아직도 도진이를 미워하는 거야? 그렇게 속 좁게 굴지 마.”온하랑이 말했다.“연도진 씨라고 하셨죠? 장난도 정도껏 하세요. 시연 씨를 짝사랑하는 남자들이 길거리에 넘쳐나요. 데려갈
다른 자리에는 다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일부러 이슬비 옆자리를 비워두었다.연도진은 입술을 약간 씹었다. 금테 안경 아래의 눈에 불쾌감이 언뜻 엿보였지만 이내 이슬비 옆에 앉았다.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이슬비가 연도진에게 말했다.“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어. 싫어하는 거면 다른 거 시켜도 돼.”연도진은 어두운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의 다른 남자가 장난치듯 물었다.“내가 싫어하는데, 다른 음식 시켜도 돼?”“저리 꺼져.”이슬비가 웃으면서 얘기했다.밥을 먹을 때, 이슬비는 때때로 옆의 연도진에게 말을 걸고 또 시도 때도 없이 김시연에게 시비를 걸었다.김시연은 그런 이슬비를 무시하고 다른 친구들과 얘기를 나눴다.다른 친구들은 김시연을 더욱 좋아했다.솔로인 남자들도 일부러 김시연한테 말을 걸었다.고등학생 시절, 김시연은 성적이 좋지 않아 담임의 골치를 썩였다. 그래서 담임은 그녀를 마지막 줄에 앉혔다.마지막 줄에는 여자가 김시연뿐이었다. 김시연은 외향적인 성격으로 남자들과 털털하게 친구가 되었다.게다가 남자들도 자존심이 있었다. 이슬비는 연도진을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었기에 그들은 이슬비한테 가고 싶지 않았다.오건호는 원래 김시연의 짝궁이었는데 지금 김시연을 엄청 잘 챙겨주고 있었다. 음식을 짚어주거나 음료수도 부어줬고 그녀의 직업과 삶에도 관심을 가졌다.김시연이 장난치면서 물었다.“왜 그렇게 관심하는 거야? 나랑 자고 싶어?”오건호가 웃으면서 물었다.“자게 해줄 거야?”연도진은 묵묵히 밥을 먹고 있다가 젓가락을 꽉 쥐었다. 낮게 내리깐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이슬비가 옆에서 연도진을 두 번이나 불렀지만 연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슬비는 김시연이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났다.눈을 데룩 굴린 그녀는 강혜령에게 눈치를 주면서 앞의 술병을 가리켰다.강혜령은 그 뜻을 알아듣고 술을 주어 한 잔을 김시연에게 주면서 말했다.“시연아, 오랜만인데 같이 술이나 하자.”김시연은 술을 받고 같
김시연이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연도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안경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 머리 속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는 무슨 조폭 마누라마냥 그를 복도에서 가로막았었다.“연도진. 나 너 좋아해. 내 남자 친구 해라. 어때?”지금도 그녀의 성격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는데 호칭은 쓰레기로 변했다.김시연은 민지훈이 일부러 이슬비의 승부욕을 자극해서 동창회를 열게 만들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는 이슬비가 무조건 도발을 할 것이라 생각했고 김시연이 성격을 참지 못하고 이슬비의 도발에 넘어가서 동창회에 참가할 거란 것도 알았다.올 때 문 앞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엄청난 정신력으로 겨우 평정을 유지했다.김시연은 룸 앞에까지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룸에 있던 모든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김시연은 원형 테이블에 사람이 하나도 없고 테이블 근처에도 사람이 안 보이자 이상함을 눈치챘다.종업원이 이미 테이블을 치웠다고?온하랑은?소파에 있던 중년의 남성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아가씨, 혹시 방 잘못 찾아온 거 아니에요?”김시연은 말을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어리둥절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언제부터 저렇게 나이 많은 동창이 있었지?담임이 찾아온 건가?이주혁은 몸을 일으켜 중년의 남성에게 사과의 뜻을 담아서 웃으면서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데려다주고 올게요. 시연 씨. 나가요.”중년의 남성은 어느 프로그램의 피디였는데 이주혁은 그 프로그램에 나가고 싶어서 피디를 매니저랑 같이 이번 점심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것이었다.누구도 김시연이 갑자기 쳐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가까이 다가서자, 이주혁은 김시연 몸에서 풍기는 짙은 술 냄새를 맡아냈다. 불그스레한 얼굴을 보니 적잖이 많이 마신 듯했다. 어쩐지 조금 어리벙벙해 보였다.김시연은 고개를 들고 멈칫하더니 눈을 깜박였다.“이주혁 씨? 어떻게 우리 동창회에 있어요?”이주혁은 그녀의 팔을 밖으로 끌면서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모양새를 보면 김시연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무슨 짓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김시연은 이주혁의 옷깃을 끌어당기면서 말했다.“이주혁 씨는 낯선 사람 아니야. 이주혁 씨는 내 친구야!”이주혁은 연도진을 보면서 눈썹을 치켜뜨면서 되물었다.“들으셨어요?”연도진도 이주혁을 보면서 말했다.“취했잖아요. 룸도 못 알아보는데 친구도 못 알아볼 수 있죠!”오고 가는 눈빛에서 불꽃이 튕기는 것만 같았다.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룸 안에는 아직 손님이 있어서 이주혁은 오래 자리를 비우기가 난처했다. 그는 눈빛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김시연에게 물었다.“누구랑 같이 왔어요.”“하랑이요. 온하랑 어디 갔어요? 왜 저 안 기다렸대요?”김시연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이주혁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물었다.“온하랑이 어느 룸에 있는데요.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눈앞의 남자가 취한 김시연을 데리고 가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연도진은 그를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0307.”이주혁은 고개를 돌려 몸 뒤의 김시연을 쳐다봤다.“온하랑 찾으러 같이 갈까요?”“좋아요!”김시연은 병아리처럼 대답했다.“가죠.”김시연은 이주혁의 팔뚝을 잡고 얌전하게 그를 따랐다.그녀는 둘 사이에서 이주혁을 더 믿는 게 보였다.연도진은 한 발짝 떨어져서 걸었다. 안경 너머의 눈빝은 더없이 깊었다. 연도진은 아무 소리도 없이 따라 걸었다.룸은 딱 두 개 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연주혁이 바로 문을 열고 옆으로 섰다. 그러고는 이주혁을 흘겼다.이주혁은 들어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온하랑을 찾았다.온하랑도 그와 김시연을 발견하고 바로 일어났다.“이주혁?”“하랑 씨!”김시연은 그녀를 보고 헤헤 웃으면서 안겼다.온하랑은 중심을 잡고 김시연의 허리를 안았다.“어떻게 여기 있어?”이주혁은 연주혁에 대한 적의를 거둬들이고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여기서 밥 먹고 있는데 방을 잘못 찾아왔더라고.”“고마워.”온하랑은 김시연
주위에서 몰래 속닥거리던 사람들도 이 말을 듣고 시선을 보내왔다.주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온하랑은 잠깐 멈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주혁은 저희 친구예요.”친구들이 부러운 눈길을 보내면서 온하랑에게 말했다.“그럼, 하랑 씨, 시연아. 이주혁 싸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저도 갖고 싶어요. 부탁할게요...”“나도, 나도. 시연아, 고마워. 고마워요 하랑 씨.”“나도 갖고 싶어. 시연아...”온하랑이 채 말하기도 전에 김시연이 가슴을 치면서 승낙했다.“그래! 문제없어!”“너무 좋다, 시연아!”“고마워, 시연아!”“시연아, 너 이주혁이랑 엄청 사이좋지? 무려 직접 데려다주기까지 하잖아.”온하랑은 눈빛이 어두워졌다.많은 친구가 김시연을 둘러싸고 말했다.이슬비는 이 모습을 보자 눈에 질투가 어려서 주먹을 움켜쥐었다.왜?왜 사람들은 그녀보다 김시연을 더 좋아해 주지? 친구들도 그렇고, 온하랑도 그렇고?내가 김시연한테 꿀리는 게 뭔데?또 다른 사람이 물었다.“시연아. 다른 아는 연예인 있어?”김시연은 트림을 하고는 말했다.“있지. 무슨...”그녀는 손가락을 접으면서 연예인들의 이름을 대려는 순간이었다.온하랑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시연 씨, 배불리 먹었어요?”“배불러요.”김시연은 바로 화제가 바뀌었다.“술은? 술은 어딨어? 난 술 마실래!”“안 돼요. 더 마시면 안 돼요. 돌아갈 때가 됐어요.”“싫어요. 난 더 마실래요!”김시연은 미간을 누르면서 손을 뻗어 온하랑의 팔을 붙잡았는데 이미 눈이 풀려 있었다.“안 돼요.”온하랑은 일어나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집에 가야 해요.”“아유. 하랑 씨. 시연이가 가기 싫어하는데 그냥 조금 더 앉아 있다 가세요.”옆에 있던 친구가 권했다.김시연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보면서 애 같은 표정으로 입을 뚱하게 내밀었다.“안 갈 거예요. 마실 거라고요!”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숙여 작게 귓속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이슬비랑 연도진이 당신 술주정 부리는
만약 이번 동창회가 아니었다면, 그 복잡한 일은 아마 영원히 그녀 마음속 깊은 구석에 숨겨졌을 것이다.온하랑은 그제야 김시연이 인터넷에서 남자 모델들 사진을 수집하는 걸 좋아하고 남자를 불러 같이 술을 마시고 노래는 불러도 연애는 안 하는지 알 것 같았다.아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한 번도 연도진을 잊어 본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에게 상처를 크게 받아서 다시는 사랑을 믿지 않게 된 걸지도 모른다.“...내가 그렇게 비굴하게 다시 만나자고 빌었는데... 남아 달라고 바랬는데, 그래도 갔어요... 그렇게 7년을 떠났으면, 돌아오긴 왜 돌아와?”김시연은 목이 메었다.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떨리자 듣는 온하랑의 마음도 아팠다.그녀는 김시연이 이렇게까지 억울해하는 건 처음 봤다.7년 전, 김시연이 갓 대학에 붙었을 시점이었다.“하랑 씨. 제가 얼마나 걔를 좋아했는지 모를 거예요... 부모님은 제가 유학 가길 바랐는데 걔 놓치기 싫어서, 제가 부모님 설득해서 남았거든요... 근데, 걔는 갑자기 가버렸어요... 일말의 여지도 안 남겨주고... 돌아오면 돌아왔지... 왜 굳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나냐고...”김시연은 뒤에서 뭐라 중얼거렸지만 소리가 점점 더 작아져서 온하랑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러다가 그녀는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다. 얼굴에는 이미 마른 눈물자국만 남아 있었고 입은 여전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집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조용히 내려서 부시아를 데려왔다.그는 미리 부시아에게 말했다.“시연 이모가 뒷좌석에서 자고 있으니까, 조수석에 앉아. 차에서 큰 소리로 말하면 안 돼.”부시아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 지하 주차장에 주차했다.온하랑은 김시연을 깨웠다.“시연 씨, 일어나 봐요. 집에 도착했어요! 집에 가서 자요.”두 번을 불러서야 김시연은 한쪽 눈만 뜨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하품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보면서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집 도착했어요?”“네. 올라가서 자요.
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김시연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온하랑이 문을 열 때, 김시연이 감탄하면서 말했다.“그거 봐요. 부지런이랑 연도진 같은 사람들은 다 조금만 성공하면 쓰레기가 된다니까. 아무래도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겠죠?”온하랑이 들어가면서 말했다.“맞아요.”“아, 민지훈 씨랑은 어떻게 됐어요?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만약 마음이 변하는 거 같으면 바로 차버려요.”김시연은 바로 소파에 누웠다.“아직 만나보고 있어요. 이번 주는 바쁘대요.”온하랑이 담담하게 말했다.옆의 부시아는 소파에 앉아있다가 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제야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고개를 들고 물었다.“숙모, 부지런이 삼촌이에요?”“음...”온하랑은 약간 난감해졌다.“왜 삼촌이 지런인 거예요?”김시연이 말했다.“시아야, 내가 알려줄게. 네 삼촌이 다른 여자의 말에 쉽게 넘어가 지X을 해서 부지X이 될 뻔했는데 부지런으로 고쳐준 거야. 알겠어?”부시아는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승민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온하랑의 경고를 떠올리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김시연은 씻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온하랑은 부시아와 놀아준 후 누웠다. 침대에 누운 그녀는 품에 부시아를 안고 물었다.“아주머니의 손자는 다 나았대?”“아니요. 오늘 전화해봤는데 심하게 아프대요. 폐렴으로 된 것 같아요.”“그럼 확실히 심하네. 내일 본가에 데려가 줄게. 내가 가서 봐야겠어.”“나도 가고 싶어요.”“안돼, 넌 아직 어려. 옮으면 어떡해.”부시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애교했다.“마스크 끼면 안 돼요? 숙모, 제발 가게 해줘요! 숙모가 최고인데...”부시아는 머리를 온하랑의 몸에 대로 비볐다.온하랑은 또 마음이 약해져 허락할 뻔했다.“안돼. 시아야. 네 할머니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셔. 그런데 나랑 있다가 병이라도 옮으면 네 할머니는 우리가 만나는 걸 반대할 거야. 알겠어?”부시아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