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을 마친 부시아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했고, 온하랑은 별생각 없이 아이 혼자 가도록 내버려두었다.칸막이로 된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부시아는 힘없이 워치를 열어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시아야. 지금 식당에 있어?”부승민의 목소리가 마이크 너머로 들려왔다.“네.”우울한 부시아의 목소리에 부승민은 무언가를 감지했다. “시아야, 왜 그래? 왜 기분이 안 좋아?”“삼촌, 숙모가 오늘 민지훈이랑 밥 먹기로 했대요.”부승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다른 사람한테는 다정하게 대하면서 유독 그에게만 모질게 구는 그녀였다.부시아는 답답한 듯 말했다.“숙모가 어제 분명 답장하기 싫다고 했는데 그게 거짓말이었어요. 그리고 숙모 민지훈 좋아한대요. 앞으로는 그 사람이 내 삼촌이 될 것 같아요. 삼촌, 어떡해요? 숙모 도망가요!”부승민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다.“시아야, 숙모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온하랑은 분명 이주혁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민지훈을 좋아하게 된 거지?’민지훈을 안 지 얼마나 됐고 몇 번이나 만났다고?부승민은 그녀가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정말이에요, 삼촌. 거짓말 아니에요.”“시아야, 걱정 마. 삼촌이 방법을 찾을 거야. 절대 숙모를 빼앗기지 않아.”“삼촌, 난 삼촌 믿으니까 최선을 다해야 해요.”부시아는 문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신나서 전화를 끊고 다시 룸으로 돌아오자 안에는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맞은편에 앉은 잘생긴 외모의 남자는 귀여운 덧니 두 개를 드러낸 채 웃으며 온하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민지훈이었다.부시아는 입을 삐죽거렸다.‘대체 우리 삼촌보다 뭐가 나은 거지?’삼촌만큼 잘생기지도 않았고, 삼촌만큼 키 크지도 않았고, 마른 원숭이 같게 생겨서 삼촌만큼 돈이 많지도 않았다.‘그런데 숙모가 왜 이런 남자를 좋아하는 걸까?’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민지훈의 말이 끊겼다.그는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앙증맞은 어린 소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
“네, 이제 겨우 출근한 지 3일밖에 안 됐고 아직 정식으로 일 시작하지 않았어요. 요 며칠 팀장님께서 회사 규정 제도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제가 인턴으로 있을 프로젝트는 휴대폰 게임인데, 독특하고 창의적이라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민지훈이 온하랑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누나도 전에 마케팅 일 했다면서요, 이번 IP 담당할 생각 없어요?”온하랑이 싱긋 웃었다.“난 일단은 좀 쉬고 싶어서 아직 그럴 생각은 없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요?”“아주 잘 지내요. 전 비록 인턴이지만 팀장님과 선배님들 다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예전에는 배달이나, 커피 심부름 같은 잡일만 시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아예 없어요. 동료들 학력, 이력에 대해 알아보니까 다들 훌륭하신 분들이에요. 회사 분위기도 아주 좋고요.”민지훈은 어쩌다 보니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회사의 모든 면이 다 마음에 든다면서 왜 인턴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업무적으로 물어볼 게 있다는 거지?’온하랑은 굳이 들추지 않았다.“BX그룹이 꽤 마음에 드나 봐요.”민지훈이 말없이 웃었고 그때 직원이 음식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시아야, 뭐 먹고 싶어? 숙모가 집어줄게.”온하랑이 묻자 부시아는 작은 머리를 내밀어 두리번거리더니 통통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나는 수육이요!”온하랑은 아이에게 수육 두 점을 집어주었다.“누나도 먹어요.”민지훈이 온하랑에게 갈비찜 한 조각을 건넸고 온하랑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그녀가 갈비찜을 들고 입에 넣자 옆에서 보던 부시아는 수육을 먹고 싶은 생각마저 사라졌다.“흥.”온하랑이 무시할 줄 알았던 민지훈은 뜻밖의 상황에 무척 기뻐했다.‘혹시 누나도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건 아닐까?’그때 갑자기 민지훈의 휴대폰이 울리고, 힐끗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굳은 표정으로 온하랑에게 말했다.“누나, 팀장님 전화라 잠깐만 통화 좀 하고 올게요.”온하랑도 상대를 배려하며 말했다.“그래요. 급한 일
민지훈이 떠난 후,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식탁은 온전히 온하랑과 부시아의 몫이 되었다.온하랑은 사실 민지훈이 떠나서 계속 마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부시아 역시 기뻐하며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입가에 기름을 잔뜩 묻히고 작은 손은 새우 껍질을 벗기느라 국물을 묻힌 채 고개를 젖히고 온하랑에게 말했다.“숙모, 지금 점심시간 아니에요? 많이 바쁜가 봐요.”“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지.”“그러면 숙모 곁에 있을 시간이 없는데 외롭지 않겠어요? 삼촌은 돈도 있고 시간도 있는데...”온하랑은 새우를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먹으면서도 말이 참 많아.”“음음.” 부시아는 입에서 새우를 꺼내며 작게 말했다.“그렇잖아요.”“남이 사준 밥을 먹고 있으면서...”“내 마음은 삼촌한테 있어요.”부시아는 진지하게 말했다.“어떻게 한 끼로 날 매수할 수 있겠어요? 이 수육 너무 맛있다.”“...”약 20분 후, 온하랑이 휴대폰을 열어 민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회사 도착했어요? 일 끝나면 뭐라도 챙겨 먹어요. 부현승 씨 그렇게까지 매정한 사람 아니잖아요.]연기를 할 바엔 제대로 해야지.한참 후에야 민지훈은 답장을 보냈다.[문자 지금 봤어요. 고마워요, 누나. 오늘 정말 미안해요. 갑자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괜찮아요. 언제는 예기치 못할 상황이 생기잖아요. 시간 되면 언제 또 같이 밥 먹어요.][누나, 이번 주 토요일 시간 있어요?]온하랑은 대충 그의 뜻을 짐작했다.[시간 돼요.][그날 제가 점심 살게요. 어때요?][알겠어요.]민지훈은 행복해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네, 그럼 토요일에 봐요.]한창 음식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부시아는 온하랑이 핸드폰을 들여다보자 흘깃 쳐다보고는 갑자기 입을 삐죽거렸다.“흥.”온하랑이 그런 아이를 돌아보며 잔뜩 부푼 볼을 꼬집었다.“왜 그래?”“숙모, 토요일에 나랑 같이 밥 먹어요.”부시아는 조그만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구경꾼 하려고?”“흥, 상관없어요. 난 갈 거
세상에, 너무 무겁다.특히 지금은 겨울이라 옷도 두껍게 입고 있었다.온하랑은 부시아를 품에 안고 몇 발짝 못 가서 팔이 아프기 시작했고, 품에 안긴 아이는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온하랑은 부시아를 살짝 안아 올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아주머니, 잠깐만 나와주세요...”거실 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아주머니가 재빨리 나와서 곧 품에서 떨어지려는 부시아를 받아 안았고 온시아는 밑을 받쳐주었다.부시아는 멍하니 눈을 비비며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이 아주머니라는 걸 확인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하랑을 보자 아이는 손을 뻗으며 아직 잠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숙모.”온하랑은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아주머니와 함께 올라갔다.“숙모 여기 있어.”부시아는 눈을 감고 계속 잠을 청했다.아주머니는 부시아를 침대에 눕히고 신발과 겉옷, 바지를 벗긴 다음 이불을 덮어주었다.부시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있는 온하랑이 보였다.“숙모, 가지 마세요, 알았죠?”온하랑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말했다.“숙모 안 가. 시아가 잠들면 갈게.”말을 마친 그가 고개를 돌려 아주머니를 향해 말했다.“아주머니, 제 차 뒷좌석에 시아 인형 세 개가 있는데 그거 가져다주세요.”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나갔고 부시아는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몇 분이 지나자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고, 온하랑은 몇 분 더 앉아서 부시아가 깊게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문을 닫고 나갔다.그런데 계단에 막 도착한 그녀가 자리에 멈춰 섰다. 부승민은 아래층에서 위로 올라오고 있었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했다.온하랑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말했다.“시아는 놀다가 지쳐서 잠들었어. 아직 저녁 안 먹었으니까 이따 깨워서 먹여. 너무 오래 자게 하지 말고.”“그래.”부승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온하랑이 마지막 계단에 도착해도 부승민이 비켜주지 않자 옆에 있는 틈으로 지나쳤다.그 순간 부승민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
그 생각에 부승민은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고, 손등은 핏줄로 불거졌으며, 눈은 점점 더 서늘해져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온하랑을 노려보았다.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함께 씁쓸한 감정과, 질식할 듯한 고통이 비 오는 날의 곰팡이처럼 천천히 피어올라 왔다.온하랑은 갈수록 잔인하게 변하는 부승민의 눈빛에 등골이 서늘해나며 힘껏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부승민, 뭐 하는 거야? 아파!”부승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불규칙한 호흡을 억누르며 온하랑의 손을 놓았다.“너 이주혁 안 좋아해. 처음부터 이주혁 안 좋아했지?”온하랑은 자신의 손목을 문지르며 부승민을 흘겨보고는 뒤돌아 가버렸다.“내가 누구를 좋아하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부승민은 가만히 서서 온하랑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그의 짐작이 맞았다.그녀가 좋아하는 건 이주혁이 아니었다!그렇다고 그녀가 민지훈을 좋아할 리도 없었다.10대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란 그녀에게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심리 분석에 따르면, 온하랑은 대체로 자기보다 조금 나이가 많고 아빠처럼 보듬어 줄 수 있는 남자를 좋아할 가능성이 컸다.아주 잠깐 부승민은 그 남자가 온하랑의 대학 시절 선생님이 아닐까 의심했다. 아직 뭘 모르고 사랑이 고픈 온하랑을 꼬드겨 놓고 결국 그녀를 버렸다. 그래서 온하랑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게 아닐까?틀림없다!부승민은 바로 연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랑이 대학 생활, 특히 선생님과의 관계에 대해 알아봐.”“네!”연민우는 깔끔하게 대답했다.대표님이 딱 짚어 선생님이라고 했다는 건 뭔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전화를 끊은 부승민은 스타 엔터테인먼트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주혁을 포섭하라고 지시했다.온하랑은 이주혁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주혁은 온하랑을 좋아한다.이주혁을 데려와 띄우면 돈도 벌고 일하느라 바빠서 온하랑을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스타 엔터테인먼트
저녁 식사 후 부시아는 백호 인형과 함께 소파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보았다.부승민이 위층에서 휴대폰을 들고 내려오며 말했다.“시아야, 할머니한테서 전화 왔어.”부시아는 잔뜩 신나 휴대폰을 들고 화면 속 부선월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어 뽀뽀했다.“할머니, 굿 이브닝!”부선월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부시아를 바라보며 안심했다.“시아야, 강남에 간 기분이 어때?”“강남 정말 좋아요!”“그래 보이네. 삼촌이 지난 이틀 동안 어디로 데려갔어?”부시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정정했다.“삼촌 말고 숙모, 숙모가 여기저기 많이 데려다줬어요. 이거 봐요!”시아는 백호 인형을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이건 숙모가 동물원에서 사준 인형이에요. 세 개나 사줬어요! 엄청 귀여워요!”부선월의 표정이 굳어졌다.“숙모? 온하랑? 삼촌 이혼하지 않았니?”부시아는 부선월이 온하랑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설명했다.“삼촌 바빠서 숙모한테 날 맡겼어요. 할머니, 난 숙모랑 같이 노는 게 좋아요!”부선월의 눈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가며 더욱더 굳어진 표정과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부승민, 너 듣고 있어? 내가 시아를 너한테 맡겼는데 이런 식으로 돌보는 거야? 왜 시아를 남한테 맡겨, 그러다가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부시아는 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조용히 호랑이 인형을 내려놓고, 정말로 옆에 있던 부승민이 대답했다.“고모, 괜한 걱정이에요. 하랑이는 저랑 이혼했어도 여전히 부씨 가문의 양딸인데 그게 어떻게 남이예요?”“걔가 온씨지, 부씨야? 피를 나눈 형제도 확실히 따지는 마당에, 지금 그룹 대표가 누구인지 잊었어? 온하랑에게 다른 꿍꿍이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어?”부선월은 점점 더 흥분하며 날카로운 어투로 쏘아붙였다.“그리고 이미 너랑 이혼했는데 왜 아직도 그 애한테 집착하는 거야? 재혼하기 싫어서 이래? 하나같이 온하랑에게 홀려서 왜들 이러는지 정말. 네 할아버지나, 너나, 시아도 마찬가지야! 할머니 말 들어. 온
부승민은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부시아의 어깨를 다독였다.“시아야, 그만 울어, 울지마...”부시아는 부승민의 품에 쓰러져 엉엉 울며 흐느꼈다.부승민은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계속 등을 토닥이며 탁자에서 휴지 두 장을 꺼내 조심스레 건네주며 천천히 아이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부시아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흐느낌을 멈추지 않았다.“착하지, 시아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놀면 돼. 알겠지? 할머니 말 안 들어도 돼.”부승민의 어깨에 기댄 부시아는 눈이 충혈되고 속눈썹에 눈물이 맺힌 채 여전히 감정에 북받쳐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할머니는 왜 숙모를 싫어해요?”부승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온하랑이 부씨 저택에 온 이후로 부선월은 온하랑을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다.처음엔 그저 공기로 여기며 무시하다가 나중에 할아버지가 온하랑과 부승민의 결혼을 발표하자 부선월은 격하게 반대했고, 굳이 귀국해서 할아버지를 찾아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따로 온하랑을 찾아온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두 사람을 이기지 못한 부선월이 이번엔 부승민을 찾아와 견결히 반대했다.그가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싶지 않다며 앞으로 온하랑과 꼭 이혼하겠다고 말하고 나서야 겨우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처음부터 부선월이 내세운 이유는 온하랑이 불우한 집안 출신이라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다만 부시아에게는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부시아는 의아한 듯 부승민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부승민은 부시아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시아, 앞으로 강남에서 지내면서 학교 다닐래? 삼촌이 잘 돌봐줄게.”“나는...”부시아가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숙이자 부승민이 싱긋 웃었다.“그럼 일단 이 얘기는 그만하고 할머니 말씀은 신경 쓰지 마. 삼촌이랑 있으면 삼촌 말대로 어디서 누구랑 놀든 마음대로 해.”부승민은 망설이는 부시아의 마음을 잘 알았다.부선월은 어릴 적부터 그녀를 키워준 사람이었고, 비록 촌수가
전화가 연결되고 목소리가 차분해진 부선월이 물었다.“시아는 잠들었어?”“네.”부선월은 힘없는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승민아, 고모는 널 위해서 이러는 건데 왜 고집을 부려?”“온하랑 아니면 저 재혼 안 해요. 고모도 더 말씀하지 마세요. 시아 얘기하려고 다시 전화한 겁니다.”부선월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네가 온하랑한테 제대로 홀렸구나! 온하랑이 애를 못 낳는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그래서 시아를 거기에 두고 온하랑의 딸로 만들려는 거야? 난 절대 반대다!”눈을 매섭게 뜬 부승민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어떻게 알았어요?”“걔가...”부선월은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애처 자제하는 것 같았다.“그날 너한테서 유산했다는 말 듣고 병원 가서 확인해 봤어. 걔가 애를 못 낳으니까 내가 재혼을 반대하는 거야. 너도 잘 생각해 봐. 정말 친자식도 없이 평생을 살 생각이야?”“네, 전 이번 생에 온하랑 말고는 누구도 원하지 않아요!”부승민이 단호하게 말했다.“고모, 시아 방학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아 스스로 선택하게 할 생각입니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려보내고, 여기 남겠다고 하면 앞으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세요.”“너...”부선월은 격분했다.“걔가 왜 낙태 한번 한 걸로 다시 임신하지 못하는지 생각 안 해봤어? 그 배 속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알고 그러는 거야. 고작 그런 여자애 때문에...”“고모!”부승민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제가 고모를 고모라고 불러드리는 건 어른에 대한 존중이지, 고모가 마음대로 하랑이를 모욕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아 앞으로 여기 있을 겁니다. 고모처럼 빈부 차이 따지면서 옳고 그름을 모르는 사람 곁에 두는 건 애 성장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부승민, 너...”부선월이 말하기도 전에 부승민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다시 전화가 걸려 왔지만 단호히 거절했고, 계속해서 부선월이 전화를 걸자 부승민은 아예 소리를 끄고 탁자 위에 엎어놓았다....그 후 이틀 동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