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선생님은 부승민과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가 인큐베이터 비용은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뭔데요?”“온하랑 씨 체질상 자궁내막이 얇고, 저번 유산 때문에 몸이 많이 허약해져서 이번에 제왕절개를 하시면 나중에 아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부승민이 온하랑을 쳐다보자 그녀가 말했다.“수술 진행하시죠.”이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할 수 있게 잘 부탁드립니다.”부승민이 온하랑의 손을 잡자, 온하랑도 그의 손을 꽉 잡았다.“오전에 정기검진했기 때문에 또 검사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식사는 언제였을까요?”“저녁 6시쯤일 거예요.”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6시간 전이었다.“수술 진행해도 되겠네요.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분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부승민이 온하랑이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까지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아이가 태어나는 건가?’비록 어제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아예 기억이라곤 없었다.느낌상 이번이 첫 출산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수술에 멍하고 긴장되기 시작했다.“오빠, 나 무서워.”부승민이 온하랑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두려울 거 없어. 하랑아, 오빠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별일 없을 거야.”“오빠, 만약에 내가...”‘만약에 내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어떡하지?’부승민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온하랑의 입을 막았다.“재수 없는 말 하지 마. 괜찮을 거야.”온하랑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간호사분이 수술실로 밀고 들어가면서 부승민한테 당부했다.“기저귀, 옷, 젖병 같은 건 준비하셨어요?”부승민은 멈칫하고 말았다.급히 나오는 바람에 챙길 겨를도 없었는데 말이다.그러자 간호사분이 말했다.“얼른 준비하세요. 안 되면 다른 분한테 빌리고요. 아, 그리고 입원 수속이랑 수술비도 미리 계산하고요.”“아... 네.”부승민이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수술실 문이 닫히고,
“탯줄이 목에 두 바퀴나 감겨있다고 하더라고요.”이에 안문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간호사분이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아이 용품은 준비되셨어요? 준비되셨으면 저한테 주세요.”“여기 있어요.”안문희가 급히 가방에서 아이 용품을 꺼냈다.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집에서 옷과 담요를 하나씩만 가져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깔끔하게 씻어서 밀봉하여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가방 안에는 모자, 기저귀, 젖병, 분유 등도 있었다.간호사는 급한 나머지 아예 가방째로 들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 선생님이 수술실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부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따님입니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고요. 아이는 인큐베이터 실로 옮겨졌습니다. 아마도 두 달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부승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랑이는요?”“아직 마무리 중입니다. 곧 병실로 옮겨질 것입니다.”“네. 감사합니다.”“그러면 저는 휴식하러 가보겠습니다.”의사 선생님은 부승민과 간단히 인사하고는 사무실로 향했다.2분 뒤, 왼손에 링겔을 맞고 있는 온하랑이 간호사에 의해 수술실밖으로 나왔다.병실로 옮겨지는 내내 부승민은 옆을 떠나지 않았다.“하랑아, 수고했어. 몸 괜찮아?”하반신마비라 정신은 말짱하여 부승민을 향해 웃었다.“괜찮아요. 그런데 딸이라네요...”“알고 있어.”부승민은 눈물이 글썽한 채 온하랑의 손을 잡고 있었다.“고마워. 하랑아.”과거를 잊고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아서 고마웠다.이제 이 둘 사이에는 사랑스러운 딸이 존재하는 것이다.부승민은 딸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모진 풍파를 대신 막아주리라 다짐했다.병실에 도착하고, 간호사가 주의 사항을 당부했다.“6시간 내 음식을 섭취하시면 안 되고, 6시간 이후에는 미음 같은 걸 드셔도 됩니다. 담백한 음식으로 드시고, 최대한 자극적인 음
“당연하지.”부승민이 웃더니 말했다.“얼른 자.”부승민의 딸은 태어나서부터 금수저였다.눈을 감고 있던 온하랑은 피곤했는지 곧 꿈속에 빠져들었다.집으로 돌아간 부승민은 옷을 갈아입고 온하랑의 옷과 물건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안문희도 온하랑 옆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부승민은 내일이면 베이비시터가 도착할 거라면서 오늘은 자기가 돌보겠다고 했다.한문희는 집에서 부시아만 돌보면 되었다.온하랑은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깼다.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슬슬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온하랑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엎드려 자고있는 부승민을 발견했다.“오빠.”“응?”부승민은 잠결에 온하랑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하량아, 어디 불편해?’“수술 자국이 조금 아프네요.”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아파서 깨어났어요.”“의사 선생님 불러올게. 진통제 좀 받을 수 있나 물어보게.”“네.”몇 분 뒤, 의사 선생님이 병실로 찾아와 온하랑의 상태를 체크하고는 진통제 주사를 놔주었다.“하량아, 또 어디 불편한 데 없어? 옷 갈아입을래?”부승민이 물었다.지금 온하랑은 제왕절개수술을 할 때 입었던 수술복 차림에 안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온하랑은 바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부승민은 트렁크에서 온하랑의 속옷과 편안한 잠옷을 꺼냈다.이런 상황에서는 부끄러워할 새도 없었다. 그렇게 온하랑은 부승민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고 옆으로 누웠다.스스로 몸을 돌릴 수 있었지만 복부에 힘쓰다 보면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진통제가 슬슬 효과를 보이면서 상처도 덜 아팠다.온하랑은 여전히 어두운 밖을 내다보더니 물었다.“지금 몇 시예요?”“다섯 시 사십이 분. 더 잘래?”“네. 오빠도 더 자요.”온하랑은 다시 자려고 눈을 감았다.그런데 몇 분 안 지나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눈을 번쩍 떴다.“오빠.”“응?”“우리 아직 아이 이름도 짓지 않았잖아요.”옆으로 누워있던 부승민이 고개 들어 온하랑을 쳐다보았다.“그러게.
온하랑은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말했다.“모르겠어요. 내일 봐요.”그러다 다시 꿈속에 빠져들었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8시였다.병실을 지키고 있던 베이비시터는 온하랑이 깨어난 걸 보고 인사했다.“사모님, 어디 불편한 데 없으세요?”온하랑은 하품을 하고서 눈을 비비더니 베이비시터 황은숙을 바라보았다.“저 다리가 저려서 그러는데 똑바로 눕고 싶어요.”황은숙은 온하랑의 허리를 잡고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온하랑이 주변을 살피더니 물었다.“오빠는 갔어요?”“나가셨어요. 어디 간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더 주무실래요?”“아니요. 일어날래요.”황은숙은 천천히 침대 등받이를 올리고는 칫솔과 물컵을 가져왔다.온하랑이 이발을 다 닦았을 때, 세수할 수 있게 따뜻한 수건도 가져왔다.이때, 부승민이 돌아왔다.“하랑아, 깼어? 몸은 어때?”“괜찮아요. 출근 안 했어요?”“하랑이가 심심할까 봐. 며칠은 병원에서 함께 지낼 거야.”부승민은 온하랑과 함께하려고 취소할 수 있는 스케줄은 취소하고, 미룰 수 있는 스케줄도 모조리 미룬 상태였다.힘들게 아이를 낳아줬는데 혼자 병원에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온하랑이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아까는 뭐 하러 갔어요?”부승민이 피식 웃었다.“세수 다 하면 알려줄게.”온하랑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뭐길래 이렇게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거예요?”온하랑은 세수를 마치고 황은숙이 건넨 스킨로션을 바르면서 부승민을 쳐다보았다.“이제 됐죠? 말해봐요.”부승민은 핸드폰을 꺼내 온하랑한테 보여주었다.“이거 봐.”핸드폰 화면 속에는 얼굴이 발그레한 아이가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온하랑은 멈칫도 잠시 그윽하게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았다.“이건...”“맞아. 우리 딸. 간호사분한테 찍어달라고 했어.”온하랑은 유심히 보더니 억지 미소를 지었다.“음... 어제보다는 훨씬 예뻐졌네요.”황은숙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가와 핸드폰을 쳐다보았다.“어머, 너무 예쁘네요.”온하랑이 힐끔 쳐다보자 황은숙은
부승민은 부끄러워하는 온하랑의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일단 물 마셔. 가스가 나오면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리고.”온하랑이 황은숙이 준비해 두었던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부승민은 병원 사이트에 들어가서 인큐베이터 동영상을 찾아보았다.“하량아, 이거 봐봐.”화면 속 모습은 사진 속 모습처럼 손을 들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시간도 볼 수 있었고, 아이가 숨을 쉬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할 수 있었다.“좋네요.’온하랑은 화면 속 작은 몸집에 작은 손발, 포동포동한 팔다리를 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었다.“계속 보고있어도 돼. 몸을 뒤집거나 우유 마시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거야.”“아이패드 가져왔어요? 아이패드로 보게요.”부승민은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병원 사이트로 들어가서 다시 동영상을 켜놓았다.녀석이 아직 움직이지도 않는데 보고만 있어도 힐링 되는 느낌이었다.몇 분 뒤, 녀석이 입을 오므리더니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이거 봐봐요. 얼마나 귀여워요.”온하랑은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귀엽네.”온하랑은 고개돌려 부승민을 쳐다보았다.“어제 잘 못 잔 거 아니에요? 좀 자다 올래요?”“아니. 여기서 함께 있을 거야.”“그래도 좀 쉬어요. 저녁이면 아주머니랑 바통 터치해야죠.”부승민은 잠깐 고민하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장 비서. 베이비시터 좀 알아봐. 경험이 풍부하고 인성이 좋은 분으로. 월급은 상관없어. 최대한 빨리. 오후면 바로 오실 수 있게.”부승민은 전화를 끊자마자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이러면 됐지?”온하랑은 할 말을 잃었다.“이거 무슨 냄새에요?”온하랑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물었다.“아주머니, 지금 뭘 끓이고 계세요?”“어죽이요...”아주머니는 뚜껑을 열어 휘젓고 있었다.“식사하실 수 있을 때 바로 드시게 미리 끓여놓는 거예요. 어죽이 몸에 좋아요.”“참 생각이 깊으시네요.”“그럼요.”황은숙이 뿌듯해
“잘 모르겠어요.”온하랑은 망설이고 있었다.“열 달을 채워서 출산할 줄 알고 모유 수유하지 않으려고 했는데...”“아이가 일찍 태어날 줄 몰랐죠?”“네.”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아이 면역력이 좋아질 수 있도록 첫 달은 모유 수유하는 것을 추천해 드려요. 어차피 산후 조리하셔야 하잖아요. 일에도 지장이 없으니 한 달 후에 단유하시는 것을 추천해 드려요.”온하랑은 잠깐 고민해 보더니 황은숙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어죽을 다 마시고 온하랑은 또 CCTV를 쳐다보았다.8시 반쯤, 의사 선생님이 간호사와 함께 회진을 돌면서 온하랑의 상처를 소독해 주고 거즈를 붙여주었다.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떠나고, 온하랑은 부승민과 황은숙을 쳐다보더니 말했다.“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온하랑은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아직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에서 내려갈 수 없는데 어떡하지? 성인 기저귀를 하고 그냥 침대에서 해결할까? 아니면 카테터를?’어떤 방법으로든 창피하기만 했다.똑같이 이런 상황은 처음인 부승민은 침묵 끝에 이렇게 말했다.“아니면... 내가 화장실까지 안아줄까?”“그럴 필요 없어요.”황은숙이 말했다.“자, 사모님. 제가 부축해 드릴 테니 천천히 걸어보세요.”“그래도 돼요?”“괜찮아요. 자.”황은숙은 한 손으로 온하랑의 어깨를 부축하고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저를 따라 천천히 돌아누우세요...”부승민도 옆에서 온하랑이 일서날 수 있게 등을 받쳐주었다.온하랑은 천천히 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황은숙과 부승민의 부축하에 천천히 일어섰다.일어서니 훨씬 상쾌한 느낌이었다.온하랑은 천천히 걸어서 화장실로 향했다.부승민은 화장실 문 앞까지 함께했고, 온하랑은 황은숙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천천히 변기에 앉았다.창피할 것도 없이 후다닥 해결하고는 아줌마와 함께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그래도 큰 신호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쓸 힘도 없었을 것이다.황은숙과 부승민은 다시 온하
[뭘 이렇게 많이 줘.][요 며칠 바빠서 그러는데 시간 나면 우리 양딸 보러 갈게.][나는 안 보고?][못생긴 사람은 안 봐.]점심 식사 시간, 온하랑은 그릇에 담겨있는 죽을 보더니 입을 삐쭉 내밀었다.이때 부승민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두 날만 참아. 나중에 아주머니가 맛있는 걸 해주실 거야.”“오빠 밥은 맛있어 보이네요?”“켁...”사레에 들린 부승민은 황은숙을 힐끔 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생각해 봐. 이걸 먹으면 소화하고 나서...”온하랑은 바로 그의 입을 막았다.“그만 해요! 죽 먹으면 될 거 아니에요!”오후. 장 비서가 베이비시터 한 명을 보내왔다. 자기 와이프가 출산할 때 모셨던 베이비시터라면서 책임감도 넘치고 경험도 있으신 분이라고 했다. 마침 시간이 돼서 소개받고 온 것이다.부승민은 베이비시터 유정화와 어느정도 이야기를 해보고는 계약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황은숙과 유정화가 번걸아 가면서 온하랑을 돌보기로 했다.온하랑은 심심했는지 또 아이패드를 쳐다보았다.잠에서 깨어난 녀석은 기지개를 켜더니 배고픈지 울기 시작했다.온하랑은 마음이 찢기는 듯했다.“왜 우는 거예요? 배고파서 우는 거예요?”부승민은 그녀의 옆에서 함께 아이패드를 쳐다보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간호사분이 잘 돌봐주실 거야.”말이 끝나자마자 화면 속에 간호사분이 나타났다.녀석이 배고파서 우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분유를 타왔다. 한 손으로는 녀석의 목을 받쳐주고 한 손으로는 젖병을 입에 물렸다.눈을 감고 있던 녀석은 분유 냄새를 맡고 본능적으로 울음을 멈추고 젖병을 빨기 시작했다. 두 손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온하랑은 또 한 번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유정화도 CCTV 속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아이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그래도 발육이 잘됐나 봐요.”온하랑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진지하게 말했다.“오빠.”“응?”“우리 애가 나중에 크면
뒤따라 들어온 안문희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사모님이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오고 싶어 하던지. 하원하자마자 이쪽으로 왔어요.” 부시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부승민에게 인사를 하고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숙모, 동생은요?” 부승민은 손을 뻗어 아이패드를 건네주며 말했다. “동생 여기 있어. 이쪽으로 와봐.” “엄청 작아요.” 부시아는 침대에 기대며 아이패드 화면을 쳐다봤다. “그런데 왜 상자 안에 있어요?” “동생이 너무 빨리 태어나서 지금 잠깐 상자 속에 있는 거야. 여기에 있어야 더 잘 자랄 수 있거든.” 부시아는 알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 나와요?” “두 달 정도 있어야 돼.” “네? 그렇게 오래요?” 부시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시간 금방 지나갈 거야. 시아 아직 밥 안 먹었지? 이따가 아빠랑 같이 밥 먹자.” “네.” 부시아는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고 짧은 다리로 침대 옆으로 달려가 작은 얼굴을 삐쭉 내밀었다. “숙모, 약 드시는 거예요?” “아니. 이건 어탕이야. 시아도 먹어볼래?” “네.” 부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맛있을 것 같아요.” “아주머니한테 한 그릇 떠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병실에 주방용품이 많지 않아 부승민과 베이비시터는 배달 음식을 시켰다. 저녁을 먹은 후, 부시아는 가기 싫은지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안문희를 따라 떠났다. 황은숙도 퇴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정화가 출근했다. 수술 둘째 날, 주현이 선물을 한가득 가지고 온하랑 보러 찾아왔다. 셋째 날, 온하랑의 몸과 정신이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부승민이 이미 조산 소식을 할머니와 둘째 이모에게 알린 터라 그들도 온하랑을 만나러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왔다. 수다를 한참 떨다가 모니터를 통해 아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점차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온하랑은 최대한 많이 걸어 다녔고 저녁 식사 후에는 부승민의 부축을 받으며 복도를 산책했다. 병실로 돌아온 후, 부승민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