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을 갈라놓지 못해 안달 난 게 부선월이니 어떻게 해서든 그 사진들을 부승민에게 보여줬을 것이다.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부승민은 부선월의 예상과 달리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다.부승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응.”“언제 알았어?”“하랑아, 그 인간들이 왜 지금에서야 이 사진을 너한테 보여주는지 알아? 네가 임신했으니까. 충격받아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길 바라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아무 생각하지 말고 우리 일단 아이부터 낳자. 그다음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알려줄게.”“그 정도는 나도 알아. 하지만...”온하랑은 입술을 깨물었다.“그 아이가 지금 살아있을 수도 있잖아.”“나도 지금 찾고 있어.”“방금 전화를 받았는데 필라시 교외의 빌트 마을에 있대. 양부모한테 시달려서 이 날씨에 밖에서 쓰레기 줍는다는데 내가 어떻게...”부승민은 표정이 일그러졌다.‘도대체 누가 알려준 거지?’‘부선월 성격상 이런 걸 알려줄 사람이 아닌데...’마음속에는 의심이 가득했지만 온하랑의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이해해. 안 그래도 알아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살아있다면 무조건 데려올 거야.”그 말에 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바라봤다.“안 그래도 너한테 직접 말하려고 했는데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 부승민, 정말 괜찮은 거 맞아?”가만 보면 두 사람은 참 인연이 깊다. 부승민에게 부시아가 있다면 온하랑에게도 그녀만의 ‘부시아’가 있는 셈이니..부승민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사실대로 말해줄까?”“응.”“처음 알게 되었을 때 당연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지.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나한테는 두 가지의 선택밖에 없었거든. 하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고, 다른 하나는 너랑 헤어지는 거였어. 생각해 봤는데 너랑 헤어지는 게 더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모든 걸 감싸안기로 했지.”“언제 알았어?”온하랑의 질문에 부승민은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우리의 첫 아이를
온하랑도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직도 이 일이 걱정스러운지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동철 씨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알려줘야 하나?’깊은 생각에 빠져있을 때, 온하랑은 깜짝 놀라면서 부승민의 어깨를 잡았다.“깜짝 놀랐잖아요.”부승민이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그만 생각하고 밥이나 먹자고.”“먼저 저 좀 내려줘요.”부승민은 못 들은 것처럼 여전히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아줌마가 밖에 계신다고요!”온하랑은 부승민의 팔을 꼬집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그게 뭐 어때서? 누가 볼까 봐?”“좀... 그렇잖아요.”“우린 부부라서 괜찮아. 부끄러워할 거 없어.”온하랑이 또 나지막하게 물었다.“저 안 무거워요?”임신해서 거의 10킬로나 찐 그녀였다.“아니. 안 무거워.”부승민은 자세를 다시 고쳐잡더니 웃으면서 말했다.“10킬로 더 찐다고 해도 얼마든지 들 수 있어.”온하랑은 그의 팔근육을 만져보더니 이 말을 믿어도 되겠다 싶었다.“문 열어줘.”온하랑은 한 손으로 부승민의 목을 잡고 한 손으로 문을 열었다.부승민은 그렇게 온하랑을 안고 식탁으로 향했다.덜컥.바로 이때, 문이 열리면서 이제 막 유치원에서 돌아온 부시아와 안문희가 들어왔다.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하랑은 얼굴이 발그레해지면서 부승민을 콕 찔렀다.“이제 내려줘요.”부승민은 부시아를 힐끔 볼 뿐 여전히 그녀를 내려줄 생각 없이 식탁으로 향했다.부시아는 책가방을 소파에 던져놓고 짧은 다리로 달려오더니 부승민을 도와 의자를 빼주었다.“숙모, 여기 앉아요.”“고마워. 시아야, 오늘 유치원 생활 어땠어?”부승민은 편하게 앉으라고 등 받침대를 온하랑 등뒤에 넣어주었다.부사아 나이대면 공유하기 좋아했기 때문에 온하랑의 질문에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늘여놓기 시작했다.어른한테는 유치한 일일 수도 있었지만 온하랑은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가끔 리액션도 해주었다.“걔는 키도 크고 덩치가 있어서 드림이가 꼼짝
“나도 들어볼래.”부승민은 청진기를 귀에 꽂고 1분 동안 심박수가 얼마인지 진지하게 세어보기 시작했다.온하랑은 그의 진지한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게 되었다.식사 도중에 부시아가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키 작고 힘 약한 아이가 키 크고 덩치 큰 아이한테 괴롭힘을 당해 슬프게 우는 모습말이다.그러다 오후에 어떤 남자가 전화 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5살짜리 아이가 영양실조가 와서 체격이 3살짜리 아이랑 비슷해요. 매일 밖에서 쓰레기 주워야 했고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서 밥 먹을 수 있었어요...”‘걔도 똑같이 괴롭힘을 당해도 가만히 울고만 있지 않을까?’“하랑아.”청진기를 벗었을 때 온하랑이 멍을 때리고 있길래 이름을 불렀다.“하랑아.”“응? 아까 뭐라고 했어요?”온하랑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부승민을 쳐다보았다.“1분 동안 112번 뛰었어.”부승민은 청진기를 내려놓고 말했다.“겨우 정상범위이긴 해. 이따 내가 또 확인해 볼게.”“그래요.”“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온하랑은 멈칫하더니 이내 어두운 표정으로 머뭇거렸다.“정말 알고 싶어요?”“당연하지. 무슨 일이든 나한테 말해. 속에 꾹 참고 있지 말고.”부승민의 자상한 모습에 온하랑이 피식 웃었다.“왜 이렇게 자상해요? 제가 걱정되는 거예요. 아니면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걱정되는 거예요?”“당연히 하랑이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지.”“오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어떤 남자가...”온하랑은 그 남자가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고는 한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그 사람 말을 듣고 나서 엄청 속상하더라고요.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이런 상황에 온하랑은 가슴이 아프기만 했다.부승민은 온하랑을 품에 안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하랑아, 자책하지 마.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나중에 데려와서 잘해주면 되지.”하지만 부승민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말았다.‘그 남자 목적이
발을 헛디뎌 절벽으로 떨어지는 꿈을 꿈 것이다.꿈에서 깨어났을 때,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깜깜한 밤, 커튼 사이로 달빛이 비쳐 들어왔다.‘꿈이었네...’온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과 등이 끈적끈적한 것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머리마저 땀에 흥건히 젖어있었고, 땀이 증발하면서 으스스 추운 느낌이 들었다.온하랑은 열을 식히려고 이마에 있던 땀을 닦아내고, 머리를 위로 들어 올려 팔을 이불 밖으로 내놓았다.그러다 고개돌려 옆을 바라보게 되었다.달빛이 은은하게 부승민의 완벽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푹 잠에 빠져들어 있는 모습이었다.온하랑은 몸을 돌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해보려고 했다.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면서 안정을 취하지 못하겠는 것이다.아무리 자보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자 문득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온하랑은 태동을 느껴보려고 복부에 손을 올려놓았다.잠도 안 오겠다. 온하랑은 차라리 일어나 청진기를 가져와 심박수를 확인해 보려고 했다.온하랑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냉큼 청진기를 내려놓고 부승민을 깨웠다.“오빠, 오빠, 일어나 봐요. 얼른 병원으로 데려다줘요.”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부승민의 목소리는 아직 잠겨있었다.“응. 왜 그래?”“방금 심박수를 확인해 보았는데 80회밖에 안 돼요...”부승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이불째로 온하랑을 안고 밖으로 향했다.“당황하지 말고 일단 옷부터 입어요.”며칠 안 지나면 곧 겨울이었기 때문에 밖이 추웠다. 아무리 잠옷이 두껍다고 해도 차가운 밤공기를 이겨낼 수 없었다.“괜찮아.”부승민은 차 키를 들고 바로 밖으로 향하려고 했다.온하랑이 그를 안정시켰다.“일단 저 좀 내려줘요. 걸을 수 있어요. 엘리베이터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신발도 갈아신고 옷부터 챙겨입어요.”“괜찮아?”“괜찮아요.”부승민은 온하랑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하랑은 이불을 두른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 마침 부승민
의사 선생님은 부승민과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가 인큐베이터 비용은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뭔데요?”“온하랑 씨 체질상 자궁내막이 얇고, 저번 유산 때문에 몸이 많이 허약해져서 이번에 제왕절개를 하시면 나중에 아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부승민이 온하랑을 쳐다보자 그녀가 말했다.“수술 진행하시죠.”이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할 수 있게 잘 부탁드립니다.”부승민이 온하랑의 손을 잡자, 온하랑도 그의 손을 꽉 잡았다.“오전에 정기검진했기 때문에 또 검사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식사는 언제였을까요?”“저녁 6시쯤일 거예요.”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6시간 전이었다.“수술 진행해도 되겠네요.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분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부승민이 온하랑이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까지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아이가 태어나는 건가?’비록 어제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아예 기억이라곤 없었다.느낌상 이번이 첫 출산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수술에 멍하고 긴장되기 시작했다.“오빠, 나 무서워.”부승민이 온하랑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두려울 거 없어. 하랑아, 오빠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별일 없을 거야.”“오빠, 만약에 내가...”‘만약에 내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어떡하지?’부승민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온하랑의 입을 막았다.“재수 없는 말 하지 마. 괜찮을 거야.”온하랑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간호사분이 수술실로 밀고 들어가면서 부승민한테 당부했다.“기저귀, 옷, 젖병 같은 건 준비하셨어요?”부승민은 멈칫하고 말았다.급히 나오는 바람에 챙길 겨를도 없었는데 말이다.그러자 간호사분이 말했다.“얼른 준비하세요. 안 되면 다른 분한테 빌리고요. 아, 그리고 입원 수속이랑 수술비도 미리 계산하고요.”“아... 네.”부승민이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수술실 문이 닫히고,
“탯줄이 목에 두 바퀴나 감겨있다고 하더라고요.”이에 안문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간호사분이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아이 용품은 준비되셨어요? 준비되셨으면 저한테 주세요.”“여기 있어요.”안문희가 급히 가방에서 아이 용품을 꺼냈다.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집에서 옷과 담요를 하나씩만 가져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깔끔하게 씻어서 밀봉하여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가방 안에는 모자, 기저귀, 젖병, 분유 등도 있었다.간호사는 급한 나머지 아예 가방째로 들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 선생님이 수술실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부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따님입니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고요. 아이는 인큐베이터 실로 옮겨졌습니다. 아마도 두 달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부승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랑이는요?”“아직 마무리 중입니다. 곧 병실로 옮겨질 것입니다.”“네. 감사합니다.”“그러면 저는 휴식하러 가보겠습니다.”의사 선생님은 부승민과 간단히 인사하고는 사무실로 향했다.2분 뒤, 왼손에 링겔을 맞고 있는 온하랑이 간호사에 의해 수술실밖으로 나왔다.병실로 옮겨지는 내내 부승민은 옆을 떠나지 않았다.“하랑아, 수고했어. 몸 괜찮아?”하반신마비라 정신은 말짱하여 부승민을 향해 웃었다.“괜찮아요. 그런데 딸이라네요...”“알고 있어.”부승민은 눈물이 글썽한 채 온하랑의 손을 잡고 있었다.“고마워. 하랑아.”과거를 잊고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아서 고마웠다.이제 이 둘 사이에는 사랑스러운 딸이 존재하는 것이다.부승민은 딸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모진 풍파를 대신 막아주리라 다짐했다.병실에 도착하고, 간호사가 주의 사항을 당부했다.“6시간 내 음식을 섭취하시면 안 되고, 6시간 이후에는 미음 같은 걸 드셔도 됩니다. 담백한 음식으로 드시고, 최대한 자극적인 음
“당연하지.”부승민이 웃더니 말했다.“얼른 자.”부승민의 딸은 태어나서부터 금수저였다.눈을 감고 있던 온하랑은 피곤했는지 곧 꿈속에 빠져들었다.집으로 돌아간 부승민은 옷을 갈아입고 온하랑의 옷과 물건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안문희도 온하랑 옆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부승민은 내일이면 베이비시터가 도착할 거라면서 오늘은 자기가 돌보겠다고 했다.한문희는 집에서 부시아만 돌보면 되었다.온하랑은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깼다.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슬슬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온하랑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엎드려 자고있는 부승민을 발견했다.“오빠.”“응?”부승민은 잠결에 온하랑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하량아, 어디 불편해?’“수술 자국이 조금 아프네요.”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아파서 깨어났어요.”“의사 선생님 불러올게. 진통제 좀 받을 수 있나 물어보게.”“네.”몇 분 뒤, 의사 선생님이 병실로 찾아와 온하랑의 상태를 체크하고는 진통제 주사를 놔주었다.“하량아, 또 어디 불편한 데 없어? 옷 갈아입을래?”부승민이 물었다.지금 온하랑은 제왕절개수술을 할 때 입었던 수술복 차림에 안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온하랑은 바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부승민은 트렁크에서 온하랑의 속옷과 편안한 잠옷을 꺼냈다.이런 상황에서는 부끄러워할 새도 없었다. 그렇게 온하랑은 부승민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고 옆으로 누웠다.스스로 몸을 돌릴 수 있었지만 복부에 힘쓰다 보면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진통제가 슬슬 효과를 보이면서 상처도 덜 아팠다.온하랑은 여전히 어두운 밖을 내다보더니 물었다.“지금 몇 시예요?”“다섯 시 사십이 분. 더 잘래?”“네. 오빠도 더 자요.”온하랑은 다시 자려고 눈을 감았다.그런데 몇 분 안 지나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눈을 번쩍 떴다.“오빠.”“응?”“우리 아직 아이 이름도 짓지 않았잖아요.”옆으로 누워있던 부승민이 고개 들어 온하랑을 쳐다보았다.“그러게.
온하랑은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말했다.“모르겠어요. 내일 봐요.”그러다 다시 꿈속에 빠져들었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8시였다.병실을 지키고 있던 베이비시터는 온하랑이 깨어난 걸 보고 인사했다.“사모님, 어디 불편한 데 없으세요?”온하랑은 하품을 하고서 눈을 비비더니 베이비시터 황은숙을 바라보았다.“저 다리가 저려서 그러는데 똑바로 눕고 싶어요.”황은숙은 온하랑의 허리를 잡고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온하랑이 주변을 살피더니 물었다.“오빠는 갔어요?”“나가셨어요. 어디 간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더 주무실래요?”“아니요. 일어날래요.”황은숙은 천천히 침대 등받이를 올리고는 칫솔과 물컵을 가져왔다.온하랑이 이발을 다 닦았을 때, 세수할 수 있게 따뜻한 수건도 가져왔다.이때, 부승민이 돌아왔다.“하랑아, 깼어? 몸은 어때?”“괜찮아요. 출근 안 했어요?”“하랑이가 심심할까 봐. 며칠은 병원에서 함께 지낼 거야.”부승민은 온하랑과 함께하려고 취소할 수 있는 스케줄은 취소하고, 미룰 수 있는 스케줄도 모조리 미룬 상태였다.힘들게 아이를 낳아줬는데 혼자 병원에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온하랑이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아까는 뭐 하러 갔어요?”부승민이 피식 웃었다.“세수 다 하면 알려줄게.”온하랑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뭐길래 이렇게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거예요?”온하랑은 세수를 마치고 황은숙이 건넨 스킨로션을 바르면서 부승민을 쳐다보았다.“이제 됐죠? 말해봐요.”부승민은 핸드폰을 꺼내 온하랑한테 보여주었다.“이거 봐.”핸드폰 화면 속에는 얼굴이 발그레한 아이가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온하랑은 멈칫도 잠시 그윽하게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았다.“이건...”“맞아. 우리 딸. 간호사분한테 찍어달라고 했어.”온하랑은 유심히 보더니 억지 미소를 지었다.“음... 어제보다는 훨씬 예뻐졌네요.”황은숙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가와 핸드폰을 쳐다보았다.“어머, 너무 예쁘네요.”온하랑이 힐끔 쳐다보자 황은숙은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