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을 갈라놓지 못해 안달 난 게 부선월이니 어떻게 해서든 그 사진들을 부승민에게 보여줬을 것이다.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부승민은 부선월의 예상과 달리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다.부승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응.”“언제 알았어?”“하랑아, 그 인간들이 왜 지금에서야 이 사진을 너한테 보여주는지 알아? 네가 임신했으니까. 충격받아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길 바라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아무 생각하지 말고 우리 일단 아이부터 낳자. 그다음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알려줄게.”“그 정도는 나도 알아. 하지만...”온하랑은 입술을 깨물었다.“그 아이가 지금 살아있을 수도 있잖아.”“나도 지금 찾고 있어.”“방금 전화를 받았는데 필라시 교외의 빌트 마을에 있대. 양부모한테 시달려서 이 날씨에 밖에서 쓰레기 줍는다는데 내가 어떻게...”부승민은 표정이 일그러졌다.‘도대체 누가 알려준 거지?’‘부선월 성격상 이런 걸 알려줄 사람이 아닌데...’마음속에는 의심이 가득했지만 온하랑의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이해해. 안 그래도 알아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살아있다면 무조건 데려올 거야.”그 말에 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바라봤다.“안 그래도 너한테 직접 말하려고 했는데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 부승민, 정말 괜찮은 거 맞아?”가만 보면 두 사람은 참 인연이 깊다. 부승민에게 부시아가 있다면 온하랑에게도 그녀만의 ‘부시아’가 있는 셈이니..부승민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사실대로 말해줄까?”“응.”“처음 알게 되었을 때 당연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지.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나한테는 두 가지의 선택밖에 없었거든. 하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고, 다른 하나는 너랑 헤어지는 거였어. 생각해 봤는데 너랑 헤어지는 게 더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모든 걸 감싸안기로 했지.”“언제 알았어?”온하랑의 질문에 부승민은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우리의 첫 아이를
온하랑도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직도 이 일이 걱정스러운지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동철 씨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알려줘야 하나?’깊은 생각에 빠져있을 때, 온하랑은 깜짝 놀라면서 부승민의 어깨를 잡았다.“깜짝 놀랐잖아요.”부승민이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그만 생각하고 밥이나 먹자고.”“먼저 저 좀 내려줘요.”부승민은 못 들은 것처럼 여전히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아줌마가 밖에 계신다고요!”온하랑은 부승민의 팔을 꼬집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그게 뭐 어때서? 누가 볼까 봐?”“좀... 그렇잖아요.”“우린 부부라서 괜찮아. 부끄러워할 거 없어.”온하랑이 또 나지막하게 물었다.“저 안 무거워요?”임신해서 거의 10킬로나 찐 그녀였다.“아니. 안 무거워.”부승민은 자세를 다시 고쳐잡더니 웃으면서 말했다.“10킬로 더 찐다고 해도 얼마든지 들 수 있어.”온하랑은 그의 팔근육을 만져보더니 이 말을 믿어도 되겠다 싶었다.“문 열어줘.”온하랑은 한 손으로 부승민의 목을 잡고 한 손으로 문을 열었다.부승민은 그렇게 온하랑을 안고 식탁으로 향했다.덜컥.바로 이때, 문이 열리면서 이제 막 유치원에서 돌아온 부시아와 안문희가 들어왔다.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하랑은 얼굴이 발그레해지면서 부승민을 콕 찔렀다.“이제 내려줘요.”부승민은 부시아를 힐끔 볼 뿐 여전히 그녀를 내려줄 생각 없이 식탁으로 향했다.부시아는 책가방을 소파에 던져놓고 짧은 다리로 달려오더니 부승민을 도와 의자를 빼주었다.“숙모, 여기 앉아요.”“고마워. 시아야, 오늘 유치원 생활 어땠어?”부승민은 편하게 앉으라고 등 받침대를 온하랑 등뒤에 넣어주었다.부사아 나이대면 공유하기 좋아했기 때문에 온하랑의 질문에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늘여놓기 시작했다.어른한테는 유치한 일일 수도 있었지만 온하랑은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가끔 리액션도 해주었다.“걔는 키도 크고 덩치가 있어서 드림이가 꼼짝
“나도 들어볼래.”부승민은 청진기를 귀에 꽂고 1분 동안 심박수가 얼마인지 진지하게 세어보기 시작했다.온하랑은 그의 진지한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게 되었다.식사 도중에 부시아가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키 작고 힘 약한 아이가 키 크고 덩치 큰 아이한테 괴롭힘을 당해 슬프게 우는 모습말이다.그러다 오후에 어떤 남자가 전화 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5살짜리 아이가 영양실조가 와서 체격이 3살짜리 아이랑 비슷해요. 매일 밖에서 쓰레기 주워야 했고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서 밥 먹을 수 있었어요...”‘걔도 똑같이 괴롭힘을 당해도 가만히 울고만 있지 않을까?’“하랑아.”청진기를 벗었을 때 온하랑이 멍을 때리고 있길래 이름을 불렀다.“하랑아.”“응? 아까 뭐라고 했어요?”온하랑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부승민을 쳐다보았다.“1분 동안 112번 뛰었어.”부승민은 청진기를 내려놓고 말했다.“겨우 정상범위이긴 해. 이따 내가 또 확인해 볼게.”“그래요.”“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온하랑은 멈칫하더니 이내 어두운 표정으로 머뭇거렸다.“정말 알고 싶어요?”“당연하지. 무슨 일이든 나한테 말해. 속에 꾹 참고 있지 말고.”부승민의 자상한 모습에 온하랑이 피식 웃었다.“왜 이렇게 자상해요? 제가 걱정되는 거예요. 아니면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걱정되는 거예요?”“당연히 하랑이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지.”“오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어떤 남자가...”온하랑은 그 남자가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고는 한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그 사람 말을 듣고 나서 엄청 속상하더라고요.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이런 상황에 온하랑은 가슴이 아프기만 했다.부승민은 온하랑을 품에 안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하랑아, 자책하지 마.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나중에 데려와서 잘해주면 되지.”하지만 부승민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말았다.‘그 남자 목적이
발을 헛디뎌 절벽으로 떨어지는 꿈을 꿈 것이다.꿈에서 깨어났을 때,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깜깜한 밤, 커튼 사이로 달빛이 비쳐 들어왔다.‘꿈이었네...’온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과 등이 끈적끈적한 것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머리마저 땀에 흥건히 젖어있었고, 땀이 증발하면서 으스스 추운 느낌이 들었다.온하랑은 열을 식히려고 이마에 있던 땀을 닦아내고, 머리를 위로 들어 올려 팔을 이불 밖으로 내놓았다.그러다 고개돌려 옆을 바라보게 되었다.달빛이 은은하게 부승민의 완벽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푹 잠에 빠져들어 있는 모습이었다.온하랑은 몸을 돌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해보려고 했다.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면서 안정을 취하지 못하겠는 것이다.아무리 자보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자 문득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온하랑은 태동을 느껴보려고 복부에 손을 올려놓았다.잠도 안 오겠다. 온하랑은 차라리 일어나 청진기를 가져와 심박수를 확인해 보려고 했다.온하랑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냉큼 청진기를 내려놓고 부승민을 깨웠다.“오빠, 오빠, 일어나 봐요. 얼른 병원으로 데려다줘요.”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부승민의 목소리는 아직 잠겨있었다.“응. 왜 그래?”“방금 심박수를 확인해 보았는데 80회밖에 안 돼요...”부승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이불째로 온하랑을 안고 밖으로 향했다.“당황하지 말고 일단 옷부터 입어요.”며칠 안 지나면 곧 겨울이었기 때문에 밖이 추웠다. 아무리 잠옷이 두껍다고 해도 차가운 밤공기를 이겨낼 수 없었다.“괜찮아.”부승민은 차 키를 들고 바로 밖으로 향하려고 했다.온하랑이 그를 안정시켰다.“일단 저 좀 내려줘요. 걸을 수 있어요. 엘리베이터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신발도 갈아신고 옷부터 챙겨입어요.”“괜찮아?”“괜찮아요.”부승민은 온하랑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하랑은 이불을 두른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 마침 부승민
의사 선생님은 부승민과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가 인큐베이터 비용은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뭔데요?”“온하랑 씨 체질상 자궁내막이 얇고, 저번 유산 때문에 몸이 많이 허약해져서 이번에 제왕절개를 하시면 나중에 아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부승민이 온하랑을 쳐다보자 그녀가 말했다.“수술 진행하시죠.”이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할 수 있게 잘 부탁드립니다.”부승민이 온하랑의 손을 잡자, 온하랑도 그의 손을 꽉 잡았다.“오전에 정기검진했기 때문에 또 검사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식사는 언제였을까요?”“저녁 6시쯤일 거예요.”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6시간 전이었다.“수술 진행해도 되겠네요.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분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부승민이 온하랑이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까지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아이가 태어나는 건가?’비록 어제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아예 기억이라곤 없었다.느낌상 이번이 첫 출산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수술에 멍하고 긴장되기 시작했다.“오빠, 나 무서워.”부승민이 온하랑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두려울 거 없어. 하랑아, 오빠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별일 없을 거야.”“오빠, 만약에 내가...”‘만약에 내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어떡하지?’부승민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온하랑의 입을 막았다.“재수 없는 말 하지 마. 괜찮을 거야.”온하랑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간호사분이 수술실로 밀고 들어가면서 부승민한테 당부했다.“기저귀, 옷, 젖병 같은 건 준비하셨어요?”부승민은 멈칫하고 말았다.급히 나오는 바람에 챙길 겨를도 없었는데 말이다.그러자 간호사분이 말했다.“얼른 준비하세요. 안 되면 다른 분한테 빌리고요. 아, 그리고 입원 수속이랑 수술비도 미리 계산하고요.”“아... 네.”부승민이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수술실 문이 닫히고,
“탯줄이 목에 두 바퀴나 감겨있다고 하더라고요.”이에 안문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간호사분이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아이 용품은 준비되셨어요? 준비되셨으면 저한테 주세요.”“여기 있어요.”안문희가 급히 가방에서 아이 용품을 꺼냈다.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집에서 옷과 담요를 하나씩만 가져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깔끔하게 씻어서 밀봉하여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가방 안에는 모자, 기저귀, 젖병, 분유 등도 있었다.간호사는 급한 나머지 아예 가방째로 들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 선생님이 수술실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부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따님입니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고요. 아이는 인큐베이터 실로 옮겨졌습니다. 아마도 두 달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부승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랑이는요?”“아직 마무리 중입니다. 곧 병실로 옮겨질 것입니다.”“네. 감사합니다.”“그러면 저는 휴식하러 가보겠습니다.”의사 선생님은 부승민과 간단히 인사하고는 사무실로 향했다.2분 뒤, 왼손에 링겔을 맞고 있는 온하랑이 간호사에 의해 수술실밖으로 나왔다.병실로 옮겨지는 내내 부승민은 옆을 떠나지 않았다.“하랑아, 수고했어. 몸 괜찮아?”하반신마비라 정신은 말짱하여 부승민을 향해 웃었다.“괜찮아요. 그런데 딸이라네요...”“알고 있어.”부승민은 눈물이 글썽한 채 온하랑의 손을 잡고 있었다.“고마워. 하랑아.”과거를 잊고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아서 고마웠다.이제 이 둘 사이에는 사랑스러운 딸이 존재하는 것이다.부승민은 딸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모진 풍파를 대신 막아주리라 다짐했다.병실에 도착하고, 간호사가 주의 사항을 당부했다.“6시간 내 음식을 섭취하시면 안 되고, 6시간 이후에는 미음 같은 걸 드셔도 됩니다. 담백한 음식으로 드시고, 최대한 자극적인 음
“당연하지.”부승민이 웃더니 말했다.“얼른 자.”부승민의 딸은 태어나서부터 금수저였다.눈을 감고 있던 온하랑은 피곤했는지 곧 꿈속에 빠져들었다.집으로 돌아간 부승민은 옷을 갈아입고 온하랑의 옷과 물건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안문희도 온하랑 옆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부승민은 내일이면 베이비시터가 도착할 거라면서 오늘은 자기가 돌보겠다고 했다.한문희는 집에서 부시아만 돌보면 되었다.온하랑은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깼다.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슬슬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온하랑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엎드려 자고있는 부승민을 발견했다.“오빠.”“응?”부승민은 잠결에 온하랑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하량아, 어디 불편해?’“수술 자국이 조금 아프네요.”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아파서 깨어났어요.”“의사 선생님 불러올게. 진통제 좀 받을 수 있나 물어보게.”“네.”몇 분 뒤, 의사 선생님이 병실로 찾아와 온하랑의 상태를 체크하고는 진통제 주사를 놔주었다.“하량아, 또 어디 불편한 데 없어? 옷 갈아입을래?”부승민이 물었다.지금 온하랑은 제왕절개수술을 할 때 입었던 수술복 차림에 안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온하랑은 바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부승민은 트렁크에서 온하랑의 속옷과 편안한 잠옷을 꺼냈다.이런 상황에서는 부끄러워할 새도 없었다. 그렇게 온하랑은 부승민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고 옆으로 누웠다.스스로 몸을 돌릴 수 있었지만 복부에 힘쓰다 보면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진통제가 슬슬 효과를 보이면서 상처도 덜 아팠다.온하랑은 여전히 어두운 밖을 내다보더니 물었다.“지금 몇 시예요?”“다섯 시 사십이 분. 더 잘래?”“네. 오빠도 더 자요.”온하랑은 다시 자려고 눈을 감았다.그런데 몇 분 안 지나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눈을 번쩍 떴다.“오빠.”“응?”“우리 아직 아이 이름도 짓지 않았잖아요.”옆으로 누워있던 부승민이 고개 들어 온하랑을 쳐다보았다.“그러게.
온하랑은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말했다.“모르겠어요. 내일 봐요.”그러다 다시 꿈속에 빠져들었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8시였다.병실을 지키고 있던 베이비시터는 온하랑이 깨어난 걸 보고 인사했다.“사모님, 어디 불편한 데 없으세요?”온하랑은 하품을 하고서 눈을 비비더니 베이비시터 황은숙을 바라보았다.“저 다리가 저려서 그러는데 똑바로 눕고 싶어요.”황은숙은 온하랑의 허리를 잡고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온하랑이 주변을 살피더니 물었다.“오빠는 갔어요?”“나가셨어요. 어디 간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더 주무실래요?”“아니요. 일어날래요.”황은숙은 천천히 침대 등받이를 올리고는 칫솔과 물컵을 가져왔다.온하랑이 이발을 다 닦았을 때, 세수할 수 있게 따뜻한 수건도 가져왔다.이때, 부승민이 돌아왔다.“하랑아, 깼어? 몸은 어때?”“괜찮아요. 출근 안 했어요?”“하랑이가 심심할까 봐. 며칠은 병원에서 함께 지낼 거야.”부승민은 온하랑과 함께하려고 취소할 수 있는 스케줄은 취소하고, 미룰 수 있는 스케줄도 모조리 미룬 상태였다.힘들게 아이를 낳아줬는데 혼자 병원에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온하랑이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아까는 뭐 하러 갔어요?”부승민이 피식 웃었다.“세수 다 하면 알려줄게.”온하랑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뭐길래 이렇게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거예요?”온하랑은 세수를 마치고 황은숙이 건넨 스킨로션을 바르면서 부승민을 쳐다보았다.“이제 됐죠? 말해봐요.”부승민은 핸드폰을 꺼내 온하랑한테 보여주었다.“이거 봐.”핸드폰 화면 속에는 얼굴이 발그레한 아이가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온하랑은 멈칫도 잠시 그윽하게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았다.“이건...”“맞아. 우리 딸. 간호사분한테 찍어달라고 했어.”온하랑은 유심히 보더니 억지 미소를 지었다.“음... 어제보다는 훨씬 예뻐졌네요.”황은숙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가와 핸드폰을 쳐다보았다.“어머, 너무 예쁘네요.”온하랑이 힐끔 쳐다보자 황은숙은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